눈 떠보니 조선군관-8화
본문
8화 작은 싸움이 있었습니다
판관과 부사는 아직 그 충격이 가시지 않은 지 한참을 멍한 표정으로 한동훈을 바라봤다.
아직 핏기가 가시지 않은 얼굴을 한 채 한동훈이 웃으며 군례를 올렸다.
“작은 싸움이 있었습니다.”
“허허, 작은 싸움이 있었다고? 저 많은 여진인들을 어찌 잡아 온 건가? 이걸 작은 싸움이라 하면 큰 싸움은 대체 뭐란 말인가? 아주 전쟁을 하다 왔구먼!”
부사는 한동훈의 말에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풍산보의 고변을 해결하라고 했더니 무슨 마을 하나를 초토화하고 오지 않았는가?
직접 창고에서 한동훈에게 임무를 들려준 판관이 머쓱한 표정으로 덧붙였다.
“그러게 말입니다. 이건 뭐 마을 하나를 통째로 털었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허허.”
무슨 난이 일어난 줄 알고 급히 판관과 부사의 뒤를 따라온 회령도호부의 수많은 병졸도 입을 크게 벌리고 그들을 쳐다봤다.
황당하다는 듯 한동훈 일행을 바라보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한동훈 일행의 인원은 많아야 일곱 명-.
고작 그 인원으로 저 많은 여진인을 잡아 온 것이다.
회령에 도착하자 그간의 고생이 씻겨 내려갈 것 같은 한동훈은 밝은 미소를 지으며, 구출한 조선인들을 가리켰다.
“풍산보 백성들을 데려간 여진인 마을을 털고, 저들을 구해 왔습니다.”
“저들이 다 풍산보 백성들이란 말인가? 실종된 이들보다 더 많지 않은가?”
“여진인 마을에 노예로 일하고 있는 조선인들이 더 있었습니다. 이야길 들어 보니 정묘년에 끌려와 이곳저곳에 계속 팔려 다닌 것 같습니다.”
“이제라도 조선으로 데려와 다행일세. 그나저나 일은 어찌 된 건가? 풍산보 백성들을 여진인들이 납치한 거였나?”
“납치한 건 아니었습니다. 정확히 말씀드리면 값을 치르고 사 갔다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사 갔다니?”
“풍산보의 토착 군관들이 백성들을 여진인들에게 그간 팔아넘기고 있었습니다.”
“뭣이라?”
판관과 부사는 한동훈의 말에 기가 막힌 듯 혀를 끌끌 찼다.
한동훈은 다시 군례를 올리며 말했다.
일단은 쉬어야 했다.
“자세한 사정은 문서로 정리해 보고 드리겠습니다.”
“알겠네. 뭣들 하느냐!”
부사의 말에 도호부의 군병들이 급히 움직였다. 수많은 여진인 포로들과 조선인들, 그리고 물자들을 인계해 하나둘 끌고 가기 시작했다.
기나긴 첫 임무의 끝이었다.
* * *
회령도호부 회의실.
깨끗이 씻고 옷을 갈아입은 일행들이 회의실에 앉아 있었다.
전후 사정을 적은 장계는 한동훈이 서면으로 작성해 올린 뒤였다.
부사와 판관이 다른 방에서 장계를 읽는 동안 일행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잠시 후 부사와 판관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하하, 자네 임무를 해결하라 했더니, 이거 원. 아주 마을 하나를 박살 냈구먼!”
“아주 대단한 일을 해냈습니다.”
두만강변에서 이미 눈으로 봤지만, 글로 접한 한동훈 일행의 활약은 대단했다.
부사와 판관은 너털웃음을 지었는데, 그들 역시 조선의 무관인지라 여진인을 박살 낸 것이 기쁜 모양이었다.
당시 조선은 주화파와 주전파로 나뉘어 있었다.
주전파들은 정묘호란의 치욕을 이야기하며 복수를 말했는데 무관들은 대부분 주전파였다.
주화파는 강성한 후금의 힘을 강조하며, 현실론을 이야기했지만, 명분은 아직 주전파에 있었다.
명에게 은혜를 갚는다고 반정을 일으킨 지 아직 7년이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그나저나 그 괘씸한 놈들은 어떻게 했나? 중앙 관직이 아닌 함경도 토관직이라지만, 관직을 제수받은 이들이 백성을 팔아 먹다니 개만도 못한 놈들이네!”
판관이 풍산보 무관들을 향해 한바탕 욕지거리를 하자, 한동훈이 갑자기 생각난 듯 대답했다.
“사실 그들을 처리할 방법이 마땅치 않았습니다.”
“그래? 그럼 그들은 지금 어디 있나?”
“아직 풍산보 인근에 파둔 구덩이에 갇혀 있을 겁니다.”
“응? 구덩이? 무슨 구덩이를 말하는 건가?”
“묶어 놔도 줄을 풀고 도망갈 거 같았습니다. 그래서 삽을 주고 땅을 파게 했습니다. 우물만큼은 아니어도, 꽤 깊게 판 구멍이라-”
“거기가 어딘가? 사람을 보내겠네.”
한동훈의 말을 들은 판관이 잠시 자리를 비웠다.
병사들에게 풍산보 토관들을 끌고 오라는 지시를 내리기 위함이었다.
부사가 다시 한번 일행들을 보며 노고를 치하했다.
“다들 고생했네. 정리되는 대로 북병사 영감께도 곧 장계를 보낼 예정이네.”
“감사합니다. 영감”
“이 일이 조정에 보고되면 발칵 뒤집히겠지. 다만 자네에게 묻고 싶은 게 있네.”
“예, 영감.”
“자네가 말한 부분과 장계에 적혀 있는 부분이 약간 다른데 왜 그런가? 약탈한 물목에 수량이 비어 있지 않은가? 왜 이 부분을 적지 않았지?”
사실이었다. 한동훈은 수량 부분을 전부 비워 두고 심지어 물목도 전부 기재하지 않았다.
부사의 질문에 한동훈이 품에 있는 종이를 꺼내 들었다.
인력에 대한 현황을 정리한 종이였다.
“여진인 수급(首級) 38개, 성인 남자 23명, 성인 여자 79명, 어린아이 59명입니다. 구출한 조선인은 성인 남자 13명, 성인 여자 17명, 어린아이 10명입니다.”
“왜 구출해 온 조선인 숫자만 쓰고, 여진인들의 숫자는 제대로 쓰지 않았냐는 말일세.”
부사의 말에 한동훈이 조용히 답했다.
“수급은 전부 베어 오고, 남은 시체들은 땅에 묻었습니다. 부서진 곳은 전부 뜯어내거나, 고쳐 전투의 흔적을 최대한 없애느라 하루를 지체했습니다. 다만-”
“다만?”
”한양에서 이 싸움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몰라서 비워 두었습니다. 너무 적은 숫자로 많은 이들을 잡아 왔다고 보고하면, 공을 의심받을 수 있고 주화파들이 벌떼같이 들고 일어날 수도 있지 않을까 하여-”
“하하. 자네 벌써 정치까지 고려하는 건가? 잘했네. 내 이 부분은 적당히 써서 북병사께 고하겠네!”
부사가 한동훈의 말이 의외였는지 크게 웃고는 적당히 숫자를 기재하기 시작했다.
“그래, 수급은 38개로 하지. 전부 죽였다고 하겠네. 그리고 자네 말대로 이번에 구해 온 조선인들은 실제 숫자와 같으니 내버려 둠세. 다만 여진인 포로는 쓰지 않겠네. 자네가 알아서 관리하게나.”
“영감, 어째서 포로들은 한 명도 쓰지 않으시는 겝니까?”
“포로를 한양으로 압송하게 되면, 문제가 커지겠지. 일부만 보냈다가는 제출한 숫자와 다른 것을 한양에 끌려간 포로들이 실토할 수도 있는 일이네. 그리고 저들을 전부 보내자니, 압송할 군관과 병졸들을 차출해야 하네. 그렇게까지 하기에는 이곳도 여유가 없네-”
여유가 없다고 말했지만, 부사는 괜히 포로를 한양으로 보내 주화파들이 거품을 물고 달려드는 것이 보고 싶지 않은 눈치였다.
괜히 문제를 키우는 일이기도 했다.
한참 장계를 쓰던 부사가 고개를 들고 한동훈 일행을 쳐다보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자네들에게 양해를 구해야 할 일이 있네.”
“예, 영감”
“이번 전투는 조선인 군관 8명이 한 것으로 해도 되겠나?”
“영감. 뜻대로 하소서.”
“그래. 그들도 그걸 고마워할 테지.”
한동훈이 덤덤하게 대답하자 부사가 고마워한다.
풍산보 일을 조정에 보고해 봤자 관리 책임 문제가 생길 수 있었다.
어차피 최석과 여진인들이 같이 싸운 부분을 쓸 수 없으니 숫자를 바꾸려는 것이었다.
풍산보 토관 5명과 정식으로 과거에 급제한 출신 무관 3명이 백성들을 납치해 간 여진인들과 용감히 싸우다 5명이 죽었다고 쓸 셈이었다.
대신 38명의 수급을 베고, 수많은 이들을 구출해 왔으니 아주 명예로운 죽음이었다.
* * *
병사들에게 지시를 마친 판관은 부사의 말에 다시 회의실을 나설 수밖에 없었다.
부사는 판관을 보며 냉정히 말했다.
“그들을 죽이게나.”
“예, 영감”
“아, 그래도 마지막 가는 길에 이유는 꼭 물어보게. 단순히 돈 때문에 그런 건지 궁금하군.”
“알겠습니다.”
판관이 군례를 올린 뒤 급히 방을 나갔다.
조금 전의 지시를 바꿔야 했다.
어떤 이유가 있든 간에 그들은 어차피 죽을 운명이었다.
회령도호부까지 끌고 와서 죽든, 스스로 판 구멍 속에서 죽든 말이다.
한동훈이 다시 품속에서 종이를 꺼냈는데 이번에는 물품 물목이 적혀 있었다.
한동훈이 먼저 부사께 용서를 구하며 말했다.
“영감, 조선인들에게 여진 마을에서 챙긴 생필품과 먹을 것을 최대한 챙겨 주었습니다. 미처 보고하지 않고, 재량껏 나눠 준 것을 용서해 주십시오.”
“잘했네. 용서는 무슨 용서란 말인가?”
조선인 중 갓 잡혀 온 이들도 있었지만, 노예 생활로 꽤 많은 시간을 보낸 이들도 있었다.
풍산보 마을 사람들이야 다시 돌아가면 그만이지만, 기반이 없는 이들은 가만히 있으면 굶어 죽을 터였다.
그 때문에 약탈한 물품 중에 음식과 생필품 등을 꽤 챙겨 줬다.
“소 6두, 말 47필, 가마솥 28개, 삽 32개, 호미 51개, 도끼 33개, 놋쇠 밥그릇 82개, 놋쇠 병 93개, 철답죠. 21개, 검 43개, 활 43개, 초피 49장, 호피 4장, 표피 3장, 진주 다섯 묶음, 상품성이 없는 각종 동물의 가죽 123장입니다. 그 외에는…….”
“아니 엄청난 양이지 않은가? 조선인 노예들에게 정말 따로 챙겨 준 것이 맞나? 어찌 이만큼이나 가져온 건가?”
“마을 하나를 통째로 털다 보니-.”
부사가 어마어마한 양의 약탈품 목록을 듣고 입을 턱 벌리며 말했다.
“여진놈들이 왜 농사보다 약탈에 목을 매는지 알 것 같구먼그래!”
* * *
“살려 주시오!”
우물처럼 깊은 구멍에서 계속해 살려 달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구멍에 갇힌 지 벌써 삼 일째였다.
이대로 굶어 죽을 거라는 공포에 점점 정신이 침식되어 들어가고 있었다.
여러 명이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가 지상에서 들려왔다.
“권관 나리께서 말씀하신 곳이 여기 같은데?”
“땅을 파낸 흔적을 보면 맞는 듯하네.”
그 소리에 구멍에 갇혀 있던 군관들이 저마다 기운을 내서 외쳤다.
“여기 사람이 있소!”
“제발, 살려 주시오!”
살려 달라는 소리에 구원의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지상에서는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왜 그랬냐? 단순 돈 때문이었느냐? 이유를 솔직히 말하는 자는 살려 주겠다.”
회령도호부에서 나온 이의 말에 서로 저마다 비난하기 시작한다.
“이자가 그랬소. 풍산보의 백성들이 다 사라지면 우리도 마을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 했소.”
“네 이놈!!! 너도 찬성하지 않았더냐?”
“뭔 소리냐. 사는 사람이 없어지면 더 지킬 이유가 없어 돌아갈 수 있다고 우리를 꾀지 않았느냐?”
“뭐? 돈 벌고 싶다고 한 것이 누군데! 네놈이 더 악착같이 팔아넘기지 않았더냐!”
구멍 안에서 토착 군관들이 자기들끼리 싸우는 이야기를 요약하면 이랬다.
함경도는 춥고 척박했다.
거주하는 사람도, 지킬 병력도 부족했고, 자원이 전반적으로 부족한 상황이었다.
오죽하면 1년간 북방을 지키다 오는 부방 제도가 생겼을까?
풍산보의 토관들은 국경 지역이 아닌, 함경도 내륙에 살던 이들이었다.
다른 역을 면해 준다는 소리에 토관직을 제의받고 군 생활을 하다 이곳까지 흘러들어왔다.
풍산보의 마을 사람들이 없어지고 보가 폐지되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마음에 시작한 일 같았다.
지상에서는 차가운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닥쳐라. 네놈들이 그러고도 사람이냐! 함경도에 사는 이들이 얼마나 힘겹게 사는지 뻔히 알면서 어찌 그리 어리석은 짓을 할 수 있느냐!”
“…….”
“덮어라!”
군관의 지시에 병사들이 삽으로 흙을 덮기 시작했다.
“아악…….살려 주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