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모라이즈-776화
본문
00776 최후의 전조는 조금씩 태동하고. =========================================================================
나는 말을 마친 근원을 천천히 관찰했다. 확실히 특이한 녀석이다. 눈 씻고 봐도 감정을 찾을 수 없는 얼굴, 마치 의무라는 것처럼 주기적으로 깜박거리는 것 같은 눈. 겉으로 보면 작고 귀여운 초등학생에 지나지 않는데, 딱딱한 인형 같은 언행은 수백 년을 산 현자와도 같다.
짙은 보랏빛 눈동자가 나를 고요히 바라본다. 그 눈에도 어떤 감정도 보이지 않는다. 한소영이 초감각의 영향으로 자연스레 생성된 무표정이라면, 근원은 흡사 감정이라는 걸 아예 알지 못하는 듯했다. 아니면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해 의도적으로 학습하지 않았거나.
“이상 징후일 가능성은 높은데 원인은 모르겠다는 뜻인가.”
근원은 유심히 보지 않으면 모를 정도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기온에 이상이 생겼거나 혹은 계절의 영향이거나…. 좌우간 이러한 현상이 원인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어지간한 돌발 변수를 포함해서 말이다.”
근원은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었다. 허나 일부러 모르는 척하며 질문했다. 근원의 회답에 따라, 그동안 기연가미연가(其然-未然-)하던 고민을 끝낼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비록 확신까지는 얻지 못하더라도.
이윽고 근원이 입을 열었다.
“저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기온은 근래 이상 범위를 벗어나지 않았고, 계절의 변화도 아직 이릅니다. 그 외 어떤 것도 균형을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늘만이 어두워졌을 뿐입니다.”
근원은 ‘오직’ 이라는 말을 특히 강조했다.
“그래, 그렇다는 말이지.”
“단, 이 현상을 뒷받침할 수 있는 명확한 근거 자료는.”
“아니. 괜찮아. 네 말은 확실하게 알아들었으니까.”
“…….”
양손을 깍지 끼며 미소 짓자 근원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휙 몸을 돌려 문으로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나는 근원의 옆모습을 가만히 응시했다.
“혹시 일부러 찾아온 건가? 경고 차원에서.”
근원은 여전히 걸음을 멈추지 않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네거티브. 확신이 없는 이상 경고는 어불성설입니다.”
“그럼?”
“목적은 처음 방문 시 밝혔습니다. 그냥 이 현상에 관한 타인의 생각이 궁금했을 뿐입니다.”
“그러면 말이다.”
잠깐 말을 끊자 근원이 문을 앞두고 우뚝 걸음을 정지했다. 고개 돌려 나를 쳐다보는 눈빛은 거북함과 어울림이 묘하게 공존하는 기운을 품고 있었다.
“내가 이 현상의 원인을 밝히려는 목적으로 움직인다면, 너는 동참할 의도가 있나?”
근원은 바로 입을 열지 않았다. 이해하지 못한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허나 무언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다.
“왜?”
“이상합니다.”
“뭐가 이상한데?”
“말을 듣고 이해한 순간….”
근원은 말을 흐리며 흘깃 나를 살폈다.
“까닭 없이 몸이 고양되는 기분을 느꼈습니다.”
“그래?”
나는 빙긋 웃었다. 그리고 나가도 된다는 의미로 손짓했다. 근원은 계속 나를 바라보더니 곧 문을 열고 총총히 사라졌다. 확실한 답은 듣지 못했으나 굳이 되물어볼 필요는 없었다.
참가 여부는, 방금 말로 충분했으니까.
*
하루, 이틀 그리고 사흘이 지나도 현상은 여전했다. 클랜원들은 누구도 개의치 않는 모습을 보였으나, 계속 하늘을 관찰한 결과, 하늘이 흐릿해지는 시점이 점차 빨라지는 듯했다. 착각일지도 모르겠지만, 오늘은 중천에 떠오른 해도 약간 빛을 잃은 것 같아 보이기도 하다. 그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서서히, 아주 천천히.
어쩌면…. 이러다 언젠가는 아침에도 어두운 해와 하늘을 맞이하는 게 아닐까.
- 그렇게 걱정되면 한 번 나가보지 그래?
가만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자 돌연 화정의 음성이 머릿속을 울렸다.
- 새 장비도 얻었고, 겸사겸사 시험도 해볼 겸 말이지.
‘그것도 나쁘지 않지.’
- 그래. 너 요즘 계속 고민하고 있잖니. 네가 그렇게 불안하면 나가야지 어쩌겠어. 그리고 예전에 이렇게 말도 한 적 있잖아? 작전에 실패한 군인은 용서할 수 있어도, 경계를 소홀히 한 군인은 용서할 수 없다고. 이대로 하릴없이 기다리고만 있다가, 느닷없이 무슨 일 터지면 어쩌려고 그래?
‘음.’
- 한데 정말 봐도 봐도 좋은 말이네. 네가 했을 리는 없고, 누가 한 말이니?
‘있어. 실은 나도 몰라.’
화정의 말은 옳다. 약 15년 전인가. 예전에 군대 선임이 그런 적이 있다. 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면, 안 하면 된다고. 이걸 반대로 말하면 해야 할 일은 해야 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지금이 바로 해야 할 때였다.
그러나 아직 행동하기에는 이르다. 행동을 할 때는 명확한 목적이 있어야 하며, 그 목적을 이루려면은 ‘어떻게?’ 라는 의문을 충족해야 한다. 이 두 조건을 만족하지 못하는 행동은 의미 없는 시간 낭비에 불과하다.
근원의 말을 듣고 명확한 목적은 생겼지만, 아직 ‘어떻게?’ 라는 의문은 채우지 못했다. 막말로 이 현상의 발생 원인이 어디 있는지 알고 찾아야 한다는 말인가? 그렇다고 무작정 감으로 맞출 수도 없는 노릇이고.
갑작스럽게 이런 상황을 맞이했다면 아마 한참을 헤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천만다행으로 단서는 있다. 확실하다기보다는 짚이는 정도에 불과했으나, 왜 이상 현상이 발생했는지 추측할만한 거리가 딱 하나 있었다.
‘괴물 소환 상자 4.’
그때 개봉한 상자 중 나는 두 개의 상자를 닫을 것을 지시했다. 하나는 타나토스의 꽃, 또 하나는 고대 악신. 그리고 고대 악신이 소환될 때 하늘이 급격히 어두워지는 현상이 발생했다. 그때는 형도 이상하다 느낄 정도로 하늘이 어둑해졌다가, 상자를 닫으니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러니 그때의 현상과 관련이 있는 게 아닐까? 아니, 혹시….
이번에도 악마와 관련이 있는 게 아닐까?
속단할 수는 없으나 염두에 두지 않을 수도 없다. ‘야만 왕의 무덤’ 원정 때도 악마가 관련돼 있을 거라고는 꿈도 꾸지 못했으니까. 이미 미래는 변해도 너무나 변했고, 놈들이 어떤 짓을 벌일지는 나도 예측할 수는 없다.
‘화정. 궁금한 게 있는데.’
- 응?
‘접때 말한 타나토스의 꽃이라는 거. 혹시 상자로 소환될 뻔한 이후 깨어날 가능성은 없을까?’
- 이미 깨어났을걸?
‘뭐라고?’
- 뭘 놀라는 거야. 그 정도의 존재는 스스로 원하지 않는 한 언젠가는 깨어나.
‘그럼 봉인은?’
- 아, 뭐가 궁금한지 알겠네. 걱정하지 마. 그리고 신들을 얕보지 말라고. 봉인 과정에는 여러 신이 참여했고, 타나토스 꽃이 깨어나는 경우도 염두에 뒀으니까. 즉 깨어나든 말든 스스로 봉인을 풀고 나올 가능성은 0%라는 말이지.
‘그럼 안전하다는 뜻인가?’
- 외부에서 의도적으로 간섭하지 않는 한 100% 장담할 수 있어. 애초 신들이 그렇게 허투루 일을 처리하는 줄 알아? 그리고 혹시나 말하는데, 타나토스의 꽃을 어떻게 해볼 생각은 꿈도 꾸지 마.
그럴 생각은 없었다. 비교해볼 목적으로 물어봤을 뿐, 진정으로 궁금한 건 따로 있으니까.
‘그럼 고대 악신의 경우는 어때?’
- 응?
‘고대 악신도 너희가 봉인한 건가?’
- 걔? 걔는 아닐걸? 그 아이는…. 아.
화정은 순간적으로 말을 멈칫했다. 이제야 내가 묻고 싶은 의도를 깨달은 듯했다.
- 으음, 그럴 가능성도…. 맞아, 그래….
‘혼잣말하지 말고 설명 좀 부탁해.’
- 음…. 조금 뜬금없을지도 모르지만, 우선 들어봐. 인간은 매우 뛰어난 잠재력을 가지고 있거든? 개중에는 신의 반열에 오르는 인간도 있을 정도지.
‘흠.’
- 물론 그런 인간은 극히 드물어. 수천, 수만 년을 통틀어 손으로 꼽을 정도니까.
‘호, 누가 있지?’
- 가령 군신(軍神), 치우천왕을 예로 들 수 있겠지.
‘치우천왕이라면…. 내가 저번에 구입한 갑옷의…?’
화정은 그렇다고 말하고는 빠르게 말을 이었다.
- 여하튼 요점은, 역사를 토대로 봤을 때 특출한 인간이 간간이 등장했다는 거야. 그것도 신과 대적할 수 있을 정도로. 특히 세상이 어지럽거나 위험에 처했을 때는 꼭 나타났지. 마치 누가 마법이라도 부린 것처럼.
아직 화정이 말하는 의도는 잘 모르겠다. 허나 우선은 계속 들어보기로 했다. 화정이 이렇게 설명하는 건 그만한 이유가 있을 테니까.
- 그렇기는 하지만, 사실 냉정히 말해서 인간은 신처럼 완벽한 존재는 아니야. 뛰어난 잠재성을 갖고 있으나 어쨌든 불완전한 존재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거든. 이건 모든 인간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사항이야.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 여기서 처음으로 돌아가자. 내가 알기로는, 고대 악신은 신이 아닌 인간에게 봉인됐다고 해. 신을 봉인할 정도면 강력한 결계임은 두 말할 것도 없겠지. 하지만….
‘하지만?’
- 봉인을 건 게 인간이라는 게 문제야. 완전성은 절대로 장담할 수 없어. 아무리 그 인간이 대단하다고 해도, 무수한 신이 참여한 봉인 과정과는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잖아. 안 그래?
‘그럼….’
- 그래. 저번에 상자 사건으로 고대 악신이 깨어나고, 그로 인해 봉인이 약해졌을 가능성이 높다는 거지. 어쩌면 외부서 누군가 개입했을 가능성도 있고. 아무튼, 이러한 결과 이상 현상이 생겼다고는 추측할 수 있어. …이 말이 듣고 싶었던 거지?
‘…….’
듣고 싶기는 했지만, 실은 아니라고 해주기를 바랐다. 만일 화정의 말이 사실이라면, 내 추측이 맞는다면. 그럼 격 높은 신을 상대해야 한다는 소리였으니까. 비로소 실마리를 잡았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동시에 암담한 기분도 내려앉는다.
“고대 악신이라….”
스스로 들어도 한숨과도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고대 악신, 고대 악신….”
어디서 들어본 거 같기는 하다. 한데 기억을 아무리 더듬어도 명확하게 떠오르지는 않는다. 비밀 도서관을 모조리 뒤져봐야 하나? 그건 시간이 꽤 걸릴 것 같은데.
…잠깐, 잠깐만.
“아.”
돌연히 한 기억이 빛살처럼 뇌리를 스쳤다. 그야말로 어떤 전조도 예고도 없는, 갑작스레 스친 생각이었다. 그래, 나는 이와 관련한 비슷한 내용을 최근에 ‘읽은’ 적이 있다. 1회 차가 아니라 2회 차에서.
드르륵.
곧장 서랍을 열자 푸른 빛으로 물든 부채가 눈에 들어온다. 나는 바로 제 3의 눈을 활성화했다.
『백야(白夜)의 무희(舞姬)』
(설명 : 무희란 본래 춤을 추는 여인을 뜻하며, 고대 홀 플레인에서는 번영과 안녕을 기원하는 제물로 인식되고는 했습니다. 그러나 백야의 무희가 출현한 이후 그 인식은 완전히 변하게 됩니다. 이 특출한 무희의 기원은 태양이 어둠에 먹힌 시절, 신녀곡(神女谷)에서 스스로 걸어 나온 한 여인에게서 시작됩니다.
여인은 전 대륙 곳곳을 돌아다니며 흉(凶)과 화(禍)를 막고, 길(吉)과 복(福)을 보호하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고아한 춤사위는 죽어버린 토지를 달래고, 단 한 번 선자(扇子)를 떨침으로써 하늘을 가리는 어둠을 물리쳐, 온 인간의 우러름을 받았습니다.
끝에는 강력한 악령에게 패배 당해 저속해지기는 했지만, 결국 스스로 악령에게 안겨 나락으로 타락하는 길을 선택한 비운의 여인입니다. 이처럼 비록 최후는 아름답지 못했다고는 하나, 세상을 구원한 아름다운 기적을 의심할 여지는 없습니다.
백야의 무희는 초자연적인 존재, 혹은 신비적인 힘을 비는 토속 주술에 근간을 두며, 특히 악(惡)을 상대로 절대적인 상극 관계를 가집니다.)
설명은 읽은 순간 나도 모르게 탄성을 지르고 말았다. 아니, 탄식인지도 모르겠다.
“하….”
문득 온몸으로 오소소 소름이 끼쳤다.
장담할 수는 없다.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현재 현상이 이상 징후라는 가정하에, 화정의 설명을 조합한다면?
‘이 특출한 무희의 기원은 태양이 어둠에 먹힌 시절….’
‘하늘을 가리는 어둠을 물리쳐….’
이 부분은 현재의 현상과 비슷하다.
‘스스로 걸어 나온 한 여인에게서 시작됩니다.’
‘끝에는 강력한 악령에게 패배 당해 저속해지기는 했지만….’
여인은 화정이 말한 특출한 인간. 강력한 악령은 고대 악신.
‘결국 스스로 악령에게 안겨 나락으로 타락하는 길을 선택한 비운의 여인입니다.’
‘이처럼 비록 최후는 아름답지 못했다고는 하나, 세상을 구원한 아름다운 기적을 의심할 여지는 없습니다.’
스스로 타락하는 길을 선택하고 세상을 구원했다. 자신을 희생함으로써 고대 악신을 봉인했다.
이렇게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 호, 이건….
‘어때?’
- 등잔 밑이 어두웠군. 우리 예측과 완전하게 일치하네.
‘젠장.’
- 갈 거야?
‘…가야지.’
고민할 것도 없는 문제였다. 예측이 사실이라면 책임은 우리에게 있다. 내가 상자를 구입했고 안솔이 개봉하도록 지시했으니까. 허나 책임이 없다손 쳐도, 무조건 가야 한다. 생각하기도 싫은 경우지만, 고대 악신이 완전하게 깨어날 경우 어떤 거지 같은 상황이 발생할지 모른다.
“후유.”
끝났다. 목적은 한층 명백해졌으며 방법도 찾아냈다. 물론 아직 부족하기는 하나, 최소한 어떻게 움직일지는 정해졌다. 이제는 정말로 행동만이 남았다.
‘화정. 고대 악신이라는 놈이 완전히 깨어날 경우, 내가 이길 수 있나?’
- 현재 상태로라면 100% 질걸? 단 염화 능력을 사용할 시, 5분에 한해서 7할의 확률로 압도할 수 있어.
염화 능력이라. 하기야 그렇겠지. 그 엄청난 게헨나와도 잠시나마 호각을 이루게 해줬으니까.
‘한데 그거 죽음이 확실한 경우가 아니면 절대로 사용하지 말라며?’
- 당연하지. 그건 네 생명력을 담보로 한 능력이야. 일종의 동귀어진(同歸於盡)이라고 할 수 있지. 그러니까 죽을 경우가 아니면 사용하지 말라는 거야.
‘결국에는 죽으라는 소리냐.’
- 어쩔 수 없어. 그냥 봉인이 완전히 풀리지 않았기를 기도하는 수밖에.
역시나 그런 수밖에 없나. 알아내는 건 여기까지. 나머지는 직접 가서 확인하는 수밖에 없다.
나는 힘차게 몸을 일으켰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얼른 자료를 모으고, 최대한 빠르게 준비를 마친 후 출발해야 한다.
장소는 신녀곡(神女谷).
이윽고 방을 나서기 직전, 나는 흘깃 눈을 돌려 테라스 너머를 응시했다.
“…….”
하늘은 여전히 어두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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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아라 인터뷰는 아마 일주일 후 조아라 블로그에 업데이트될 듯싶소.
인터뷰라고 딱딱하게 하기 보다는, 의례 후기에 적듯이 거칠고 야성적으로 적었소이다.
특히 어떠한(?) 질문에는 많은 공을 들였으니 많은 기대 부탁 드리외다. 꾸벅.
그럼 독자 분들 모두 편안한 밤 보내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