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모라이즈-730화
본문
00730 핏물 속에서 피는 꽃. =========================================================================
이유정은 조용히 서 있었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리자 부스스 흘러내리는 머리카락 사이로 수척한 얼굴이 드러났다. 연한 붉은빛이 감도는 눈동자가 눈앞의 상대를 지그시 응시한다.
이유정은 왼손은 허리춤으로, 오른손은 옷을 살짝 젖히더니 복부에 찍힌 주홍색 낙인에 가져다 댔다. 이윽고 형형한 빛무리가 뿜어지면서 약간 짧은 길이의 카타나가 솟아나온다. 하승윤도 스커트를 살짝 들추고는 양 허벅지에 손을 가져가 두 개의 단검을 뽑아 들었다. 연한 얼음 빛이 서려 있는, 시릴 듯한 냉기를 흘린다.
그렇게 두 여인은 흡사 약속이라도 한 듯 무기를 뽑고 서로 마주했다. 돌연 기이한 긴장감이 장내를 휩쓸었다.
나는 처음에는 무조건 말릴 생각이었다. 이유정이 전혀 득 볼 게 없는 전투였기 때문이다. ‘제 3의 눈’을 가진 나와 일반 사용자의 시선은 다르다. 클래스와 연차의 차이가 있는 이상, 누가 봐도 이유정이 우세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제 3의 눈’이 말해주는 사용자 정보는 전혀 다르다.
< 사용자 정보(Player Status) >
1. 이름(Name) : 하승윤(2년 차)
2. 클래스(Class) : 일반 용병(Normal, Mercenary, Expert)
[근력 84] [내구 82] [민첩 90(+2)] [체력 88] [마력 92(+2)] [행운 78]
< 특수 능력(1/1) >
1. 심안(心眼)(Rank : B Zero)
< 잠재 능력(4/4) >
1. 양손 단검술(Rank : A Plus)
2. 백병전(Rank : A Minus)
3. 난전 발동(Rank : S Zero)
4. 신검합일(Rank : C Plus)
< 사용자 정보(Player Status) >
1. 이름(Name) : 이유정(4년 차)
2. 클래스(Class) : 여명의 검투사(Rare, Gladiator Of the Dawn, Expert)
[근력 83] [내구 79] [민첩 92(+2)] [체력 84] [마력 90] [행운 88]
< 특수 능력(1/1) >
1. 피에 젖은 마음(Rank : A Zero)
< 잠재 능력(3/4) >
1. 양손 단검술(Rank : B Plus)
2. 묘(猫) 족 체술(Rank : B Zero)
3. 백병전(Rank : C Plus)
4. –
행운을 제외하면 이유정이 우세한 건 오직 민첩 하나뿐. 근력, 내구, 체력, 마력. 그리고 특수, 잠재 능력까지 모두 하승윤이 압도하는 수준이다. ‘피에 젖은 마음’은 핏물이 난무하는 실제 상황이라면 모를까, 대련에서는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능력이다. ‘묘 족 체술’이라는 상당히 좋은 능력이 있다고는 하지만, ‘심안’과 ‘신검합일’의 조합이면 충분히 대응하고도 남을 것이다. 애초 숙련도에서도 상대가 되지 않는다.
단순한 호승심에서 나온 걸까, 아니면 약할 것이라 생각되는 하승윤을 상대로 분풀이하러 나온 걸까. 당최 무슨 생각으로 저러는지는 모르겠으나 이유정의 패배는 그야말로 명약관화(明若觀火)였다. 그렇기에 나는 이번만큼은 절대로 허락할 생각이 없었다. 안 그래도 자존심을 먹고 사는 이유정이 과연 패배를 겸허히 받아들일 수 있을까? 더욱이 이렇게 한 명도 빠짐없이 모여 구경하는 상황에서?
“잠….”
그때였다.
잠깐이라고 외치려는 찰나, 순간적으로 멈칫 입을 다물고 말았다.
“…….”
잘은 모르겠다. 그냥 직감일 수도 있다. 그러나 갑자기 예사롭지 않은 기운이 느껴졌다. 상대를 바라보는 이유정의 눈동자는 뜻 모를 비장함을 품고 있었다. 깊은 고민을 하는 듯한 표정에는 차마 말로 형언할 수 없는 복잡한 무언가가 서려 있었다.
…아니. 어딘가 모르게 잔뜩 긴장한 기색이 오히려 망설이는 것 같다고나 할까?
아무튼, 하나 확실한 건 호승심이나 분풀이를 목적으로 나온 게 아니라는 것이다. 방심하는 태도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걸 보자 한층 종잡을 수 없다는 기분이 들었다. 정말로,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고연주도 이대로 진행하는 건 무언가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살그머니 나를 돌아본다. 그 순간 ‘정말 허락해도 될까.’ 라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지만, 결국에는 지그시 눈을 감고 말았다. 속행하라는 신호였다.
- …시작!
고연주의 신호를 기점으로, 한 여인이 폭발적으로 뛰쳐나갔다.
탁탁탁탁!
장내에 빠른 발소리가 울리고 붉은 머리카락이 휘날린다. 이유정이 양팔을 크게 젖히면서 선공을 잡았다. 그러나 하승윤은 당황하지 않고, 곧바로 자세를 살짝 낮추면서 양손을 올렸다. 이내 푸르스름한 기운과 붉은 기운이 충돌하면서 본격적인 전투의 신호탄이 쏘아졌다.
이윽고 가벼운 폭음에 이어서 하승윤의 몸이 미끄러지듯이 밀려났다. 선공을 적절히 방어했는지 자세는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이유정도 이 정도는 예상한 모양이다. 가라앉은 눈동자로 앞을 주시하면서 저돌적으로 돌격한다. 하승윤은 거리를 벌릴 생각인지 연신 걸음을 물리고, 이유정은 선공을 이어갈 생각인 듯 빠르게 따라붙는다.
물러나고 들어가는 만큼, 속도는 이유정이 더 빨랐다. 거리 안으로 들어간 순간 이유정은 갑자기 폭발적으로 가속했고, 안으로 접근하는 동시 허리를 크게 돌리면서 회전력에 카타나를 맡긴다. 바로 그 순간, 하승윤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자리 잡았다.
퍽.
발차기.
이유정의 몸이 채 절반도 돌지 못하고 크게 흔들렸다. 하승윤이 기습적으로 발을 움직여 다리를 걸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대로 복부를 걷어차려고 했지만, 이유정은 비틀거리면서도 신속하게 후방으로 물러섰다. 이 움직임은 의외였는지 하승윤의 두 눈에 이채가 스쳤다.
하지만, 나는 혀를 찼다. 그나마 승부를 걸어볼 만한 게 저 움직임이었는데 벌써 간파 당하다니. 조금 더 확실하게 공격하겠다는 의도는 좋지만, 행동 반경이 너무 컸다. 아마 하승윤은 이유정이 갑자기 근접해올 때부터 오른쪽으로 돌아설 것을 알아챈 듯싶다. 그러니까 저렇게 여유롭게 반응하지. 결과적으로 불필요한 움직임이 돼버렸다.
이유정은 낯을 찌푸리면서도 간신히 자세를 회복했고, 그 즉시 재차 돌격해 들어갔다. 흡사 절대로 물러나지 않으려는 의지를 표출하려는 듯이.
하승윤도 이번에는 물러나지 않았다. 쌍 단검을 상단으로 세우면서 마주 짓쳐 들어갔고, 마주친 둘은 곧 화려한 난타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유정은 확실히 전력을 다하고 있었다. 안현을 상대할 때와는 완전히 다르다. 조금도 방심하지 않으면서 세찬 공격을 퍼붓는데, 하얀색과 붉은색이 검광이 삽시간에 수십 개로 불어나며 번쩍번쩍 춤을 춘다.
그러나 더욱 대단한 건 하승윤이었다. 여전히 태연한 얼굴로 앞쪽을 응시하는데,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춤추는 검광을 모조리 받아쳐 버린다. 상대의 공격이 훤히 보인다는 소리였다. 그러면서 살금살금 거리를 줄이는 게, 아까 이유정의 특이한 움직임을 눈여겨본 듯싶다.
그렇게 시간이 지날수록 하승윤의 허리가 차츰 앞으로 굽혀지고 이유정의 허리는 같은 방향으로 젖혀진다. 서서히 밀리는 형국. 방금 난전을 기점으로 주도권이 완벽하게 넘어갔다. 입을 질끈 깨무는 걸 보니 이유정도 스스로 느끼고 있는 것 같다.
그때.
“히얏!”
“하앗!”
하승윤과 이유정의 기합이 겹쳤다.
우직하면서 간결하게 찔러 들어가는 하승윤의 공격.
급격한 호선을 그리며 맞받아치는 이유정의 공격.
각자가 뻗어낸 회심의 일격이 중간에서 충돌한다. 이어서 동시에 나가떨어지는 둘을 보면서 나는 한숨을 흘렸다. 비단 나뿐만이 아니라 남다은이나 허준영도 비슷한 기색을 띠고 있었다. 방금 부분에서 승부가 완연히 갈렸음을 알아챈 것이다.
하승윤은 진정 정석의 극치였다. 물러나는 와중에도 똑바로 자세를 잡고 상대를 흔들림 없이 응시한다. 발은 벌써 다음 공격을 준비하고 있다. 그에 반해 이유정은 중심을 잡지 못하고 또 한 번 크게 흔들렸다. 용병이 난전에서 밀렸다는 건 결국 총체적으로 부족하다는 소리였다. 이 기회를 놓치기 싫었는지, 하승윤은 빠르게 몸을 추스른 후, 바로 자세를 낮추며 비호처럼 달려들었다.
이유정의 눈을 크게 치뜨며 황급히 양손을 올렸다. 하승윤은 단검을 크게 내리치는, 처음으로 커다란 동작을 보였다. 자신이 거의 모든 부분을 웃돈다는 사실을 알아낸 이상, 더는 탐색전을 할 생각이 없는 것이다. 시린 냉기를 뿜는 단검이 정수리를 쪼갤 듯한 기세로 일직선으로 내리 찍힌다. 이유정은 한순간 멍한 모습을 보였지만, 반사적으로 물러나면서 두 카타나를 교차시켰다.
카앙!
그리고 들려오는 맑은 철성. 하승윤의 단검과 이유정의 카타나가 마주 닿은 것과 동시, 세찬 불꽃이 튀겼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바른 자세에서 가한 공격과 간신히 성공한 방어는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잠시 후, 하승윤은 힘껏 힘을 주며 이유정의 카타나를 찍어 누르기 시작했다. 이유정도 지지 않으려는 듯 끙 신음을 흘렸으나 상황은 여러모로 불리했다. 애초 키도 하승윤이 훨씬 큰 터라, 교착 지점이 서서히 하강하면서 이유정의 무릎도 속절없이 구부려지는 중이었다.
그렇게 서로 힘겨루기를 하는 와중, 무릎이 절반을 넘게 굽혀진 순간, 갑자기 하승윤이 양팔을 크게 밀어내면서 기습적으로 앞차기를 했다.
“……!”
깜짝 놀란 이유정이 튕기듯 몸을 물렸으나 하승윤은 그대로 치고 들어가 어깨로 강하게 들이받았다. 그 효율적인 육탄 공격에 이유정은 외마디 신음을 지르며 날아가, 등으로 바닥을 긁으면서 주르륵 밀려났다. 어지간히 지기 싫었는지 곧장 일어서기는 했지만, 그때는 이미 하승윤도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가볍게 움직인 단검의 끝으로 이유정의 카타나가 걸렸다. 땡그랑, 청아한 소리를 낸 카타나는 손에서 벗어나 튕기듯 허공으로 솟구친다.
찌르기는 푸르스름한 빛이 돼 정면으로 직진했고, 이유정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단검은, 정확히 인중 앞에서 멈췄다. 이유정은 살며시 눈을 뜨더니 망연한 표정을 짓는다.
이렇게 승부가 끝났다. 하승윤이 압도적인 실력을 선보이며 승리했다.
- 그만.
고연주도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이벤트의 종료를 알렸다. 그러자 이유정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어, 언니! 잠….”
“사용자 하승윤. C 등급입니다. 두 사람 모두 고생했습니다.”
나는 말을 끊으면서 곧바로 등급을 발표했다. 이유정이 애타는 낯으로 돌아보았으나 나는 천천히 머리를 가로저었다. 더 해봤자라는 의미였다.
그리 길지 않은 전투였음에도 이유정의 이마는 땀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그에 반해 하승윤은 호흡조차 흐트러지지 않았다. 둘 사이에는 그 정도로 명백한 차이가 있었다.
잠시 후, 사방에서 손뼉을 치기 시작했다. 결과가 의외인지 약간의 웅성거림은 있었지만, 어쨌든 최선을 다한 두 사람에게 보내는 박수였다. 물론 승자와 패자가 받아들이는 입장을 다르겠지만.
하승윤은 빙긋 웃으면서 정중히 인사했다. 그리고 이유정은 돌연 풀썩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망연한 눈동자. 부르르 떨리는 눈매가 웃는지 우는지 모르게 이지러진다. 박수가 조금은 시들해졌다.
“하…. 하하….”
거칠어지는 숨소리 사이로, 허탈한 웃음이 새어 나온다. 스스로도 믿을 수가 없는지 흡사 넋이 나간 듯한 표정이다. 그리고 그런 이유정을 고소하다는 얼굴로 응시하는 일부 클랜원들.
…공공연한 비밀이기는 하지만, 클랜 내 이유정의 평가는 상당히 좋지 않다. 탁 까놓고 말해서, ‘성격이나 행동이 제멋대로이면서 자신이 강한 줄 아는 철부지.’ 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그래서 알게 모르게 싫어하는 클랜원도 많고. 안현과 비교해도 차이를 알 수 있다. 안현이 사고를 쳤을 때는 그나마 소수라도 옹호 여론이 있었지, 이유정은….
여하튼 사정이 어쨌든, 전투의 결과는 예상대로였다. 4년 차 레어 클래스 사용자가 2년 차 일반 클래스 사용자에게 완패했다. 나는 가만히 중앙을 응시했다.
그 순간, 어쩌면 이유정도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
아니. 모를 리가 없다. 직접 전투를 치렀으니만큼 중간중간 자신이 상대보다 딸린다는 것쯤은 확실하게 느꼈을 것이다.
‘아.’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찰나, 문득 아까 이유정이 지었던 표정이 뇌리를 스쳤다.
무언가 깊게 고민하는, 망설이는 것 같은 얼굴.
그러자 확신은 할 수 없지만, 나는 왠지 이유정이 이 자리에 나온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안현과의 전투에서 무언가 느낀 게 있는 게 분명하다.
그러니까 한 번 확인하려고, 정확하게 확인해보고 싶어서 나온 게 아닐까?
등급 하락 사건 이후 안 그래도 구설에 오른 상황이었다.
이기는 게 당연하고 지면 이상해지는 상황이었다.
진심으로 전력을 다했지만 시종일관 밀리는 상황이었다.
여기서 패배한다면, 자신이 목숨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자존심에 크게 금이 가버리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유정은 그 모든 상황을 감수하고 계속 싸우는 걸 선택했다. 현재 자신이 처한 모든 상황을 반전할, 최후의 방법으로써.
그래. 사용자 이유정은 자신을 확인해볼 요량으로 이 자리에 나섰다. 그리고 패배함으로써 현실을 절감했다. 자신이 강한 게 아니라, 머셔너리가 강하다는 현실을.
내 예상이 맞는 걸까.
“이게…. 이게 뭐야….”
돌연 헛웃음을 그친 이유정이 덜덜 떨리는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정말 열심히 했는데…. 정말로, 정말로…. 그런데….”
말을 끝까지 잇지 못하고 천천히 고개를 숙이더니, 어깨가 가늘게 떨리기 시작했다. 결국, 이유정은 “흑.” 오열을 터뜨렸다. 목놓아 우는 게 아닌, 흐느끼는 듯한 작은 소리였다.
손에 가려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끅…. 흑….”
그러나 뺨을 타고 흘러내린 눈물은, 어느새 턱을 지나 아래로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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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