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모라이즈-398화
본문
00398 3. 두 번째 의뢰 - 구출 : 얼어붙은 숲(5/5) =========================================================================
오후였다.
중천에 떠오른 해는 마침 지나가는 구름에 반쯤 가려져 있었다. 서늘했던 공기는 조금씩 따뜻해져 가고 있었고, 도시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은 왠지 모르게 활기찬 느낌이었다.
전쟁이 끝난 지도 어느덧 3개월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전란에서 한 걸음 비켜서 있던 모니카는 보다 빠르게 원래 모습을 되찾았고, 이스탄텔 로우의 노력이 합쳐져 전보다 더욱 번성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확실히 한소영은 대단한 사용자였다. 이번 혼란을 잘 매만져 오히려 도시 발전의 기회로 삼았으니.
팡!
그때 매서운 파공음이 문득 귓가로 흘러들었다. 하여 소리의 근원지인 정원으로 고개를 떨구자, 웃통을 훌렁 벗은 채 열심히 창을 휘두르는 안현이 보였다.
팡! 팡, 팡!
공기를 치는 소리가 제법 경쾌하다. 자세도 그다지 나쁘지 않고. 아무래도 그날 이후 하루도 거르지 않고 열심히 연습한 게 조금씩 성과를 보이는 모양이다.
현은 한동안 열심히 움직이다 잠시 몸을 멈추더니 자세를 유지한 그대로 고개를 갸웃했다. 체술에 많은 영향을 받는 '기공창술사'인만큼 뭔가 잘 이어지지 않는 부분이 있는 모양이다.
그러다 내 시선을 느낀 걸까. 일순 녀석이 갑작스레 고개를 돌리더니 정확히 내가 서 있는 테라스를 올려다보았다. 오호라. 이제 감각도 꽤 예민해진 건가?
순간 절로 흐뭇한 마음이 들어, 난 기분 좋은 웃음과 함께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현은 처음에는 깜짝 놀란 듯 멍한 얼굴을 보였다. 하지만 이내 의아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더니, 곧 수줍은 표정으로 땀이 흐르는 상체를 가렸다.
'……?'
갑자기 왜 이러나 싶어 가만히 생각하다가, 나는 반사적으로 검을 잡았다. 그러자 녀석은 아니라는 듯 고개를 짤짤 흔들었고, 이내 헤헤 웃으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렇게 한바탕 뜻 모를 의미(?)가 오고 간 후, 다시 진중한 얼굴로 자세를 잡는 안현을 보며 난 짧게 고개를 까닥였다.
아픈 만큼 성숙한다고 했던가?
신상용의 죽음 이후 애들의 태도는 서서히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물론 각 개인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그 중에서 가장 큰 변화를 보인 클랜원은 바로 현이었다.
예전에는 약간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종종 가벼운 태도가 보였는데, 근래에 들어서는 가끔 장난을 치더라도, 자신의 본분은 잊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윽고 다시 열심히 창을 휘두르는 녀석을 보다가, 나는 차분히 걸음을 돌려 집무실로 들어섰다. 그리고 방문을 열어 복도로 나선 후,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을 밟아 3층 창고로 향했다.
조만간 창고 정리를 실시할 생각이었고, 겸사겸사 새로 들어온 장비들이 잘 있는지도 확인해볼 요량이었다.
잠시 후.
3층 창고에 도착하자, 나는 먼저 온 선객에 잠깐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굳게 닫혀있어야 하는 문은 약간 열린 상태였고, 벌어진 문틈으로 누군가의 기척이 흘러나오고 있다.
하여 조심스레 문을 열어 창고 내부로 들어서자, 두터운 상자에 둘러싸인 채 쭈그려 앉은 한 여인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나는 여인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잡티 하나 없는 새하얀 피부에 쌀쌀맞게 다 물린 입술. 이내 새침한 빛이 감도는 눈동자와 마주하자, 여인이 한별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나를 보자마자 어깨를 흠칫하더니 곧 살며시 시선을 내리깔았다.
“오빠? 안녕하세요.”
“응. 안녕.”
“저…. 이건….”
“알고 있어. 어제 영감님한테 들었거든…. 요즘 보석에 대해서 배우고 있다며?”
어제 영감님에게 창고 좀 개방해달라는 요청을 받은 기억이 있어, 한별이 창고에 있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되지는 않았다.
그러자 대답을 들은 한별은 눈을 동그랗게 만들었고, 곧 새치름히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나는 제 3의 눈을 활성화했다.
< 사용자 정보(Player Status) >
1. 이름(Name) : 김한별(1년 차)
2. 클래스(Class) : 보석 마법사(Secret, Jewel Mage, Runner)
3. 소속 국가(Nation) : 자유 용병(Free)
4. 소속 단체(Clan) : Mercenary(Clan Rank : 평가 중입니다.)
5. 진명 • 국적 : 별에서 비롯된 자 • 아름다운 빛과 광택을 다루는 자 • 대한민국
6. 성별(Sex) : 여성(22)
7. 신장 • 체중 : 170.5cm • 51.3kg
8. 성향 : 냉정 • 노력(Cool • Effort)
(변경 전) [근력 51] [내구 59] [민첩 70] [체력 53] [마력 88] [행운 68]
(변경 후) [근력 51] [내구 59] [민첩 71] [체력 54] [마력 89] [행운 68]
(잔여 능력치 포인트는 4포인트입니다.)
'상처가 없어졌네? 마력도 1포인트 상승했고.'
“네. 제가 모르는 부분까지 세세하게 알려주셔서, 매일매일 찾아가고 있어요.”
예전과는 다른 똑 부러지는 대답.
왠지 모르게 낯설다고 느껴졌지만, 어떻게 보면 지금이 한별이의 본 모습일 것이다. 더구나 성향이나 능력치를 보면 그동안 그녀가 여실히 노력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었다.
아무튼 이러한 변화는 내 입장에서도 환영할만한 것이었기 때문에, 나는 기꺼운 마음으로 다가가 머리를 쓰다듬었다.
슥슥.
“고생하네. 열심히 하는구나.”
“오, 오빠?”
슥슥.
“응? 요즘 주변에서 그러더라. 처음 들어왔을 때랑 많이 달라졌다고. 아무튼 잘 지내는 것 같아 다행이야.”
“네, 네? 감사…. 아, 아니. 자, 잠시만….”
기분이 나빴던 걸까? 한별은 이리저리 몸을 배배 꼬며 손길을 피하려 노력했다. 빠르게 눈을 깜빡이는 게 무척이나 당황한 얼굴이었다. 하여 얼른 손을 떼자,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주 살짝 거칠어진 숨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그녀는 발개진 얼굴로 목을 가다듬고는 오른손으로 왼손 약지를 매만졌다. 예전에 내가 주었던 안티 매직 링(Anti Magic Ring)을 아직도 갖고 있는 모양이다.
“아. 내가 실수했나?”
나는 혹시나 해서 물어보았다.
한별은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더니 입을 꼭 다문 채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그러더니 또 눈을 내리깔았다. 얘는 왜 이렇게 나랑 눈을 마주치는걸 싫어하는 걸까.
이윽고 숙인 고개 사이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빠도…. 요즘 조금 변하신 것 같아요.”
“응? 어디가.”
“예전에는 되게 차갑고 무서웠는데…. 요즘에는 가끔 웃어주시고…. 가끔 이름도 불러주시고…. 가끔 보이는 눈빛도 다정해지신 것 같고….”
'가끔?'
중간중간 말끝을 흐려서 그런지, 한별의 대답은 불분명했다. 해서 고개를 갸웃하고 있자 이내 다시 고개를 드는 그녀를 볼 수 있었다.
“그냥…. 예전보다는 여유가 생기신 것 같아요. 그래서 저도 좋아요.”
그리고는 까닭 없이 비장한 어조로 말을 매듭지었다.
나는 잠깐 머리를 긁적였다가, 아무튼 칭찬이라는 생각에 미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때였다.
내가 웃은 순간, 무표정했던 한별의 얼굴에 미약한 홍조가 어리는가 싶더니 곧 입가에 어렴풋한 미소가 그려지는걸 볼 수 있었다.
웃음이 드문 아이라 생소하기는 했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옅은 미소가 무척이나 어울린다는 것.
'아름답네.'
그렇게 아무 말도 않은 채 서로 미소만 짓고 있을 즈음이었다.
우당탕! 다다다다!
갑작스레 복도 계단 쪽에서 뭔가 굉장한 소리가 나더니.
“오빠아아아아! 큰일났어어어!”
이내 찢어지는 소리가 복도를 타고 들어와 창고를 왕왕 울렸다.
우리는 동시에 눈살을 찌푸렸다.
*
일단 결론부터 말하자면 목소리의 주인공은 이유정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말한 큰일이란 바로 식당에서 치고 때리는 싸움이 났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머셔너리 하우스 내부에서.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속으로 기함했고, 바로 식당으로 달렸다.
지금껏 내부 불화가 아주 없었다고는 말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주먹다짐까지 연결된 경우는 없었다.
'홀 플레인'이라는 세상은 현대와 다르다. 각 사용자들은 '능력치'라는 설정이 있기 때문에 단순한 싸움이 한순간 목숨을 앗아갈 수도 있다. 물론 정말 격한 경우가 아니라면 마지노선은 지키겠지만….
문제는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이것은 자칫 잘못하면 클랜 내부의 불화로 번질 소지가 매우 크기 때문에, 이유를 불문하고서라도 최대한 빠르게 진화해야 한다.
단숨에 1층에 다다라 식당으로 향하는 통로를 달리자, 앞쪽에서 격한 소리들이 동시다발적으로 흘러나왔다. 나는 급한 마음에 달리는 속도를 높였고 식당 문을 세게 밀어젖혔다.
그리고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확인한 순간, 나는 바로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식당 안에는 여러 클랜원들이 있었는데 가장 먼저 보인 사람은 바로 무척이나 화난 얼굴을 하고 있는 정하연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앞쪽 테이블의 위로, 꼬리를 일자로 빳빳이 세운 채 으르렁거리는 아기 유니콘이 보였다.
'…….'
순간 혼미해져 오는 정신을 붙잡으며, 나는 일단 상황을 파악하려 애썼다.
둘은 현재 한창 말다툼을 벌이는 중이었다.
“너. 진짜 자꾸 이렇게 나올 거니?”
“뀨!”
“오냐 오냐 봐주는 것도 한두 번이지. 그동안 너 때문에 얼마나 속상했는지 알아?”
“뀨뀨!”
…하지만 상황이 파악되지 않는다.
그저 정하연이 무척 화가 나 있다는 사실과, 그녀의 말에 오히려 눈을 똑바로 뜨고 대응하는 아기 유니콘이 보일 뿐. 이러한 상황에서 내가 뭘 추론할 수 있다는 말인가?
멍하니 시선을 돌리자, 한 쪽 구석에서 끅끅 소리를 내는 고연주가 보였다. 그녀는 웃겨 죽겠다는 얼굴을 한 채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있었다. 오죽하면 눈물까지 흘려댈 정도였다.
그 순간, 한층 높아진 정하연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게 어디서 눈 똑바로 뜨고 대들어! 얼른 잘못했다고 해!”
“뀨뀨! 뀨뀨뀨뀨뀨!”
“이 녀석이 정말!”
결국 정하연은 참지 못했는지, 한 걸음 성큼 다가서 아기 유니콘을 번쩍 치켜들었다.
“뀨, 뀨뀨?”
아기 유니콘은 깜짝 놀란 얼굴로 다리를 마구 휘저었지만 정하연은 꿋꿋이 녀석을 왼쪽 옆구리에 끼었다. 그렇게 엉덩이를 드러내게 만들더니 이내 오른손을 한껏 치켜들었다.
“이 녀석!”
찰싹!
그리고 손이 바람을 가르는 것과 동시에, 아기 유니콘의 엉덩이에서 차진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것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이 녀석! 이 녀석! 이 못된 녀석!”
찰싹! 찰싹, 찰싹!
“뀨! 뀨뀨! 뀨뀨뀨!”
“어디서 못된 것만 배워가지고! 누가 그렇게 협박하랬어. 어? 협박이 나쁜 거 알아 몰라?”
정하연은 아기 유니콘의 볼기를 쉴 새 없이 볼기를 두드렸다. 그야말로 인정 사정없는 손길이었다.
찰싹! 찰싹, 찰싹!
“뀨, 뀨뀨! 뀨뀨뀨뀨!”
그럴 때마다 아기 유니콘은 온 힘을 다해 버둥거렸지만 그녀의 힘을 이길 수는 없었다. 녀석은 아직 유아기에 불과한 힘 약한 동물이었으니까.
아니. 이럴 때가 아니지.
“그만!”
아직 내가 온 것을 몰랐는지, 대다수의 클랜원들이 깜짝 놀란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이내 나는 부러운 얼굴로 아기 유니콘을 쳐다보는 비비앙을 지나치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사용자 정하연.”
“수, 수현?”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아…. 이, 이게요….”
정하연은 어쩔 줄 몰라 하는 얼굴로 주변을 돌아보더니 곧 아기 유니콘을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뀨우…. 뀨우웅….”
그러자 아기 유니콘은 앙앙 울며 나에게 달려왔고, 난 녀석을 조심스레 안아 들었다. 어찌나 세게 맞았는지 하얗던 엉덩이가 발갛게 변했을 정도였다.
이윽고 약하게 입술을 깨문 정하연을 보며 나는 한 번 더 물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던 겁니까?”
“죄송해요. 클랜 로드.”
“…아직 유아기에 불과한 녀석입니다. 어떤 이유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소란까지 피울 필요는 없었을 텐데요.”
“그냥…. 속상해서요.”
속상하다 라.
나는 지그시 정하연을 응시했다. 평소 그녀의 성격을 알고 있는 만큼, 분명 아무 이유 없이 이러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여 추후에 자세한 연유를 듣기로 하고, 일단은 상황을 정리하는 게 우선이었다. 어쨌든 좋은 모양새는 아니었으니 말이다.
“뀨우웅…. 뀨우우웅….”
무에 그리 서러운지. 슬쩍 고개를 내리자 훌쩍훌쩍 울며 내게로 고개를 파묻는 아기 유니콘이 보였다. 하기야 소리가 차진걸 넘어서 짝짝 달라붙었을 정도니, 매우 아팠을 것이다.
나는 탱탱 부은 엉덩이를 부드러이 보듬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휴. 알겠습니다. 아무튼 이 녀석은 제가 잠시 데리고 있을 테니, 하연은 잠시 머리라도 식히는 게 좋겠네요.”
“네. 죄송해요. 부르실 때까지 자숙하고 있을게요.”
이내 차분히 숨을 고른 후 대답하는 하연을 보며, 나는 반대로 고개를 돌렸다. 이유정이 보이지 않는다. 과연 큰일이었을까 의문이 들었지만, 일단 추궁할 필요는 있을듯했다.
그때였다.
“오라버니이이!”
순간 등 뒤로 식당을 박차고 들어오는 소리가 귓가를 강하게 때렸다. 그리고 이어지는 안솔의 목소리.
“큰일났어요!”
그 말에 나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여기서도 큰일, 저기서도 큰일.
아까 현이랑 한별이를 봤을 때만 해도 기분이 잔잔했는데, 식당에 들어오고 나서부터 모든 게 변하였다.
'…큰일 아니기만 해봐라.'
하지만 안솔의 공식적인 역할이 수행 인원인 만큼 마냥 무시하기는 힘들었다. 해서 나는 속으로 단단히 마음먹으며, 여전히 눈을 감은 채 뒤를 돌아보았다.
이윽고 안솔의 말이 이어졌다.
“이, 이스탄텔 로우 로드랑…. 에…. 아무튼 손님 한 분이랑 방문하셨어요!”
그 순간, 나는 번쩍 눈을 떴다.
'손님이라고?'
============================ 작품 후기 ============================
1. 이번 파트는 탐험을 다룬 에피소드로, 총 4회로 예정되어있습니다. 다만 제 생각에 1회 추가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2. 몸은 거의 나았습니다. :)
3. 11월 23일(토요일)에 약속이 있어 휴재합니다. 저번 주부터 잡은 약속이라 필히 참석해야 할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