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모라이즈-395화
본문
00395 1. 천사들의 걱정(1/1) =========================================================================
이른 아침.
탁한 빛으로 물들었던 하늘은, 말간 태양이 떠오르는걸 기점으로 동쪽 하늘부터 서서히 밝아지고 있었다. 이내 열어놓은 창문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이 서늘한걸 보니 아직 새벽의 흔적은 남아있는 모양이다.
바람이 담은 신선한 공기는 머릿속을 상쾌하게 만들었고, 나는 천천히 자리에 앉으며 오른손을 내뻗었다. 손에 뜨거운 찻잔이 만져졌다. 오늘 아침 식사 후 입맞춤 한 번을 대가로 지불한 고연주표 허브 차.
앞으로 차를 마시고 싶으면 꼬박꼬박 대가를 지불하라고 으름장을 놓던 그녀의 모습을 떠올리자, 입가에 절로 미소가 배어져 나온다.
한동안 향긋한 차 향기를 음미하다가 일순 가볍게 한 모금 들이켰다. 이내 잔잔한 목 넘김과 함께 몸 안으로 퍼져나가는 기분 좋은 뜨거움을 느끼며, 난 조용히 입을 열었다.
문밖에 서 있는 누군가에게 들릴 수 있을 정도로.
“들어와.”
확실히 들렸는지 문밖에서 흠칫하는 기척을 감지할 수 있었다. 그에 이어 주춤주춤 망설이는 기척을 보이고는, 이내 빠르게 복도를 달려나가는 소리가 이어서 흘러들었다. 이제는 내가 흠칫할 차례였다.
“……?”
잠깐 쫓아나가 볼까 생각해봤지만, 그냥 놔두자는 생각에 반쯤 일으켰던 몸을 도로 앉혔다.
기척의 정체는 대충이나마 추측할 수 있다. 식사 시간 때 나를 연신 흘끔흘끔 쳐다보던 안현, 비비앙 중 한 명일 터. 아마 신상용을 소원으로 되살리겠다는 말을 들은 이후, 어떤 식으로든 나에게 볼 일이 생겼을 것이다.
한순간 그 문제를 떠올리자, 나는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한 번 죽은 사용자는 다시는 지구로 돌아갈 수 없다.'
이 사실은 나도 시간을 역행하기 직전에서야 알 수 있었던 사실로, 애들에게 말을 꺼내기 조심스러운 면이 없잖아 있었다.
들어보니 안현은 신상용의 죽음에 깊은 책임감을 느끼고 있다는데, 지금은 소원을 사용하겠다는 목표로 다시 일어선 상태였다. 헌데 그 사실을 알게 됐을 경우 어쩌면 평생 동안 죄책감을 안고 살아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그 사실이 제로 코드와 밀접하게 연관이 있는 만큼, 천사들이 순순히 얘기해줄지도 의문이었다.
천사들이 1회 차에서 왜 그 사실을 내게 말하지 않았는지에 대해서는 나도 정확히 모르는 상태이다.
나는 당연히 돌아갈 수 있겠지 라는 생각에 묻지 않았고, 천사들은 어떠한 생각으로 말해주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내가 “돌아갈 수 없다.”라고 얘기하면 애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여태껏 홀 플레인에서 0년 차 답지 않게 굴었던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변명은 할 수 있었다. 한때 자주 도서관에 들락날락했던 모습을 보였던 만큼, 대부분의 정보는 '기록'에 적혀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원으로 되살아난 사용자가 돌아갈 수 없다는 말은 그 어디에도 적혀있지 않다.
사실상 '귀환'에 대한 직접적인 키워드는 '테라'를 공략할 때 밝혀지기 때문에, 만일 애들이 사실에 대한 출처를 물어온다면 지금 내 입장은 꽤나 곤란해질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난 신상용을 되살릴 생각은 없다. 그게 바르다고 생각했고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안현이 소원을 사용하겠다는 것도 허락만 했을 뿐, 나는 어디까지나 도와주는 입장에서 지켜볼 예정이었다.
아무튼 그걸 차치하고서라도, 미리 말할 수 있다면 말해주는 게 좋다고 생각하고는 있다. 안현이 신상용을 진심으로 생각한다면, 내가 겪었던 아픔을 똑같이 겪게 해주고 싶지는 않으니까.
'결국 해답은 세라프한테 있는 건가.'
1회 차에서, 나는 당연히 돌아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묻지 않았다. 그리고 세라프는, 나를 위해서 말하지 않았다고 이야기했다.
물론 세라프의 말을 온전히 믿는 건 아니지만, 아무튼 조만간 신전을 한 번 방문할 필요성은 느꼈다. 그녀의 대답에 따라 애들에게 말해줄 수 있는지 아닌지에 대해 판가름할 수 있으니까.
'그냥 지금 바로 가볼까?'
문득 떠오른 생각에 나는 까닭 없이 하늘을 바라보았다.
생각을 너무 깊게 했던 걸까? 시간이 제법 흘렀는지, 부옇던 하늘은 어느새 선명한 색을 띠고 있었다. 이내 약간 식은 찻물을 한 입에 들이킨 후,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
“한 번 사망한 사용자는 더는 사용자로 살아날 수 없습니다. 그런 만큼, 아예 새로운 거주민으로 생성된다고 보셔도 무방합니다.”
“…그럼 질문 하나 더. 거주민이 지구로 가는 경우는 있는 건가?”
“없습니다. 지구와 홀 플레인은 양방향이 아닌 일방행적인 관계로 구성되어있습니다. 지구인은 한 번 들어온 통로가 있으니 다시 돌아가는 게 가능하지만, 거주민은 애당초 이동이 불가능합니다.”
홀 플레인, 소환의 방.
미약한 어둠이 내려앉은 공간에 제단에는 하얀 날개를 일렁이는 천사가, 그리고 바로 그 앞에는 한 남성이 주저앉아 있다. 바로 세라프와 김수현이었다.
“그렇다면….”
한 차례 대화가 끝난 후.
이윽고 김수현은 살짝 말끝을 흐리며 쳐다보자, 세라프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소원으로 되살린 사용자는 거주민입니다. 다르지 않습니다.”
세라프의 대답에 일순 김수현의 눈동자에 이채가 스쳤다.
“…그런가.”
곧 담담히 대답한 김수현은 짧은 한숨을 내쉬었고 차분히 몸을 일으켰다. 큰 충격은 받은 얼굴은 아니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꽤나 복잡한 기색이 어려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럼 그 사실은…. 왜….”
이윽고 김수현은 잠깐 입을 열었다가, 뭔가를 고민하는지 다시 한 번 말끝을 흐렸다.
“…….”
그렇게 김수현이 고민하는 동안, 세라프는 그의 눈동자를 응시했고, 또한 생각했다.
자신을 대하는 말투나 태도는 여전히 차가웠지만 적어도 살기는 보이지 않는다고. 그리고 무엇보다 살얼음 같던 눈빛이 약간은 다감해진 것 같다고.
그것이 설령 자신을 향한 시선은 아닐지라도, 그녀는 안도감과 함께 뜻 모를 만족감을 느꼈다.
“쯧. 아니다. 아무튼 말해준 사실에 대해서는 지키도록 하지.”
“그래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직 뭔가 묻고 싶은 게 남은듯했지만, 이내 훌쩍 몸을 돌린 김수현은 파란 포탈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지체 않고 몸을 묻는 그를 보며 세라프는 나직이 콧숨을 쉬었다.
“…후.”
이윽고 다시 홀로 남아버린 공간에서 세라프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이제 조금은 안정됐는지, 어느덧 날개의 일렁임 또한 다시 원상태로 되돌아와 있었다.
그때였다.
번쩍!
한순간 제단의 옆으로 밝은 빛이 터지더니, 이내 허공을 물들일듯한 휘황찬란한 빛 무리 사이로 한 천사가 걸어 나왔다.
“!”
어떠한 전조도 없는 일이었기에, 깜짝 놀란 세라프는 감았던 눈을 떠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소환된 천사를 확인한 순간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여기는 어쩐 일이십니까. 우리엘 님.”
“내가 온 게 그리 달갑지만은 않은 모양이군. 세라프.”
“…….”
“상급 천사 주제에 꽤나 건방지다고 생각하지 않아?”
약간 웨이브 진 단발을 한 천사의 노골적인 비난에도 불구하고, 세라프는 묵묵히 침묵을 지켰다. 그런 그녀를 한껏 노려보던 우리엘은, 가느다란 숨과 함께 칠흑 색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뭐 좋아. 그건 그렇다 치고…. 조금 전 그 사용자가 왔었지?”
“제가 담당하는 사용자 김수현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맞습니다.”
“숨기지는 않네…. 좋아. 그럼 왜 그 사실을 말해준 거지? 홀 플레인에 관한 사실은 웬만하면 함구하는 게 좋을 텐데. 만일 그 사실이 북 대륙에 떠돌게 되면 천사들에 대한 사용자들의 신뢰도는 바닥을 칠 거야. 설마 모르는 건가?”
“저는 공개할 수 있는 정보만 공개했을 뿐, 결론 도출은 사용자가 스스로 이루었습니다. 물론, 우리엘 님의 말씀에도 일부 동의는 합니다. 그래서 사용자에게는 해당 사항에 대해서는 함부로 퍼뜨리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서약은?”
“…서약까지는 받지 않았습니다.”
세라프는 한 치도 주눅들지 않고 꼬박꼬박 대답했고, 그에 따라 일견 누그러졌던 우리엘의 얼굴이 다시금 미약하게 일그러졌다.
“세라프. 내가 분명 네 사용자가 들어왔을 때부터 누누이 말해왔을 거다. 그 인간은 수상하고, 위험하다고.”
“…그래서 저번에 저에게 Tanay급 특전에 대한 철회를 요청하신 겁니까?”
“그래. 그 특전은 우리가 건드릴 수 없지만, 검토 후 부당함을 밝혀 위쪽으로 철회 요청을 해볼 생각이었어. 물론 확실하지 않은 아닌 단순한 요청에 불과하겠지만…. 그래도, 그나마 그거라도 해보려면 어쩔 수 없잖아? 그리고 그걸 발의할 수 있는 자격은 담당 천사인 너밖에 없으니까.”
“그렇습니다. 그런데 제가 동의할거라 생각하시는 겁니까?”
세라프가 고요히 대답했을 때, 우리엘도 더는 참지 않았다.
“아무래도 말로 해서는 들어먹지 않을 모양이군.”
나직이 한 마디 뱉어낸 우리엘은, 이내 가볍게 손을 한 번 휘저었다.
이후 벌어진 일은 어떠한 소리도, 흐름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제단에 앉아있던 세라프의 몸이 순간 강제로 일으켜지더니, 이내 공중으로 떠올라 매달린듯한 모습이 되었다.
목 부근에서 뭔가 알 수 없는 힘이 압박하는 듯, 그녀는 거센 기침을 내뱉었다.
“큭! 콜록, 콜록!”
“세라프. 난 네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겠어.”
“무, 무슨! 콜록!”
“왜 그렇게 그 사용자를 보호하려는지, 집착하는 모르겠다고. 응? 애당초 화정을 준 것부터 시작해서. 담당을 바꾸겠다는 말도 거부하고, 체력을 올리지 못하게 유도하라 했음에도 오히려 반대로 얘기하고. 그리고 이제는 쓸데없는 정보까지? 지금껏 내 말을 뭐로 들은 거지?”
점점 죄어드는 압박에 세라프는 어떤 대답도 못한 채 속절없는 기침만 내뱉었다. 하지만 그렇게 고통스러운 와중에도 그녀는 굽히지 않았다. 오히려 눈을 치켜 떠 우리엘을 노려보았고,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그 모습은 절대로 말에 따를 생각이 없다는 하나의 의지 표현으로 보일 정도였다.
그러한 태도에 한층 화가 나는지, 우리엘이 한 번 더 손을 내저으려는 찰나였다.
번쩍! 번쩍! 번쩍!
그 순간 연이어 세 번의 빛 무리가 터져 소환의 방을 하얗게 물들였고, 이내 세 명의 천사가 동시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막 손을 내저으려던 우리엘은 황급히 고개를 돌리더니, 똑같이 걸어 나오는 천사들을 보자마자 아연한 얼굴로 움직임을 멈추었다.
“가브리엘 님…? 미카엘, 라파엘.”
“우후후. 지금 뭐 하는 거야? 우리엘.”
빛이 채 사그라지기 직전 한껏 여유로운 목소리가 공간을 울렸다.
이내 기다란 머리카락이 먼저 닿는 것에 이어, 한 점 티끌 없는 새하얀 발이 바닥에 닿았다. 또한 등에 달린 날개가 무려 12쌍에 이르는 것으로 보아, 가장 먼저 내려온 천사가 가브리엘인 듯했다.
“여긴 어쩐 일로….”
“지금 뭐하고 있냐고.”
“이, 이건.”
우리엘은 궁색한 얼굴로 입술을 질끈 깨물더니 곧 천천히 손을 거두었다. 그러자 허공에 매달려있던 세라프가 다시 제단에 떨어졌고, 그녀는 약한 기침을 하며 지친 얼굴로 목을 쓰다듬었다.
“세라프. 괜챃니?”
“네. 괜찮습니다. 약간의 사소한 다툼이 있었을 뿐입니다.”
말을 하면서도 세라프와 우리엘의 얼굴은 자못 어색함 그 자체였다. 가브리엘은 그런 둘의 얼굴을 번갈아 보고는 킥킥 웃으며 말했다.
“사소한 다툼이라. 거짓말하지 마. 그동안 우리엘이 보였던 행동을 생각하면 사소한 다툼은 아니지.”
“…부인하지는 않겠습니다.”
“시원해서 좋네. 그럼 약간의 처벌과 함께 다시는 이러지 않겠다는 서약도 해야겠지?”
가브리엘은 여전히 생글생글한 얼굴로 살짝 고개를 갸울였다.
“처벌은 감내하겠습니다. 하지만 서약은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무뚝뚝히 대답하는 우리엘. 어떻게 보면 대 천사장인 가브리엘의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일이었지만, 그녀는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입가에 지어졌던 미소가 더욱 짙어졌을 뿐.
“잘못된 행동을 해놓고도 따르지 않겠다는 건가?”
“잘못된 행동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 어째서?”
“이미 누누이 말해오지 않았습니까. 김수현이라는 사용자는 너무도 위험하고 수상합니다. 그러니 그에게 주어진 필요 이상의 힘은 거두어들이고, 최대한의 정보를 제한해야 합니다.”
여전히 뜻을 꺾지 않는 우직한 태도에, 가브리엘은 세라프가 앉아있는 제단에 차분히 엉덩이를 붙였다. 그러자 바로 몸을 일으키려는 세라프의 날개를 붙잡으며, 고운 입술을 열었다.
“우리엘아, 우리엘아. 나야말로 네가 그렇게 걱정하는 이유를 모르겠구나.”
“…시작부터 부여된 Tanay급 특전. 화정의 보유. 그리고 마치 뭔가를 알고 있다는 홀 플레인에서의 활동. 이래도 감이 잡히지 않으십니까?”
“궁금하기는 해. 그런데 현재 결과적으로 나쁜 건 없잖아? 그는 예전에 벨페고르를 없앴고, 이번에도 네르갈을 처치했어. 아니. 전체적으로 보면 악마들의 계획을 보기 좋게 저지했지. 도대체 이게 어디가 나쁘다는 거야?”
“확실히 현재로 보면 그렇습니다. 하지만 가브리엘 님.”
우리엘은 간곡한 어조로 한 번 더 입을 열려 했지만, 그녀는 순간 입을 다물고 말았다. 어느새 들이밀었는지, 가는 목 부근으로 뜨거운 열을 내뿜는 창이 겨누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더는 입을 열지 않는 걸 권한다. 우리엘.”
우리엘은 묵묵히 자신을 바라보는 미카엘과, 한 쪽에 쭈그려 앉은 채 벙글벙글 웃고 있는 라파엘을 번갈아 보았다. 그러더니 이내 분한 듯 이를 갈았다.
“말하는 도중이었다. 미카엘.”
“그래 그래. 말하는 중이었지. 미카엘? 창을 거두렴.”
가브리엘이 괜찮다는 듯 손을 내젓자, 미카엘은 담담히 우리엘을 응시하고는 이내 한 걸음 물러섰다.
이윽고 우리엘은 목을 한 번 쓰다듬더니 일순 세라프를 매섭게 쏘아보았다. 그러자 가브리엘은 느긋이 세라프를 감싸곤 태연한 음색으로 말을 이었다.
“우리엘. 얼마 전 담당하던 사용자가 죽었던가?”
“예비 여왕 각성 자를 말씀하시는 거라면, 얼마 전 김수현에게 살해당했습니다.”
“굳이 김수현이라는 이름을 강조하지 않아도 좋아. 아무튼 이 일은 내 재량으로 묻어둘 테니, 새로운 사용자가 들어올 때까지 근신하고 있어.”
“알겠습니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한 마디만 드리고 싶습니다.”
“똑같은 말이라면 허락하지 않겠어.”
가브리엘은 딱 잘라 대답했다. 지금이 마지노선이라는, 여기까지만 참겠다는 의지를 느꼈는지, 우리엘의 목울대가 한 번 크게 움직였다. 그러나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우리엘은 기어이 입을 열고 말았다.
“화정은 무서운 힘입니다.”
그 순간, 등장한 세 명의 천사는 동시에 숨을 멈추었다. 가브리엘 또한 이 말은 의외였는지, 살며시 눈을 치켜 떴다.
그에 용기를 얻은 우리엘은 조금은 차분해진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는 얼마 전 화정의 1차 각성을 이루었죠.”
“우리엘.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이대로라면 그가 제로 코드를 쥐게 될 확률은 상당히 높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여 그가 제로 코드를 얻게 되는 불상사를 미연에 방지하고자 이런 행동을 하였습니다.”
“그게 무슨…? 아니 잠깐. 미연의 불상사라고?”
언뜻 들으면, 천사 입장에서는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러나 가브리엘은 바로 화를 내지는 않았다. 말을 곱씹으며 곰곰이 생각하는 낯빛을 비치더니, 이내 나직이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네 말은…. 그가 악마랑 손을 잡을 가능성이 있다는 건가?”
“그럴 가능성은 적겠지요. 놈들은 제로 코드를 사용해야 하는 입장이고, 사용자도 제로 코드를 사용해야 하는 입장이니까요. 그러므로 제로 코드는 하나에 불과하니, 둘의 목적이 상충하는 만큼 손을 잡을 가능성은 적다고 보입니다.”
“그렇지.”
“하지만.”
곧바로 대답한 우리엘은 약간 뜸을 들인 후, 깊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가 홀 플레인이라는 세상을 둘러싼…. 그러니까 우리와 악마. 그리고 지구의 비밀을 알게 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비밀, 그리고 반응이라.”
그제야 우리엘의 내심을 알아차렸는지, 가브리엘은 한두 번 머리를 끄덕였다. 그러다 갑작스레 고개를 좌우로 저어, 전보다 한결 차분해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제로 코드의 발동은 무조건 우리를 통해서 이루어져. 그러니 그가 멍청한 결정을 할 것 같지는 않아. 즉 한 마디로 네 걱정은 시기상조고, 기우에 불과해.”
“글쎄요. 물론 기우일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는 천사들을 적대하고 있습니다. 한때 담당 도우미 교체 문제로 거론됐던 만큼, 그의 태도가 어떠한지는 다들 알고 계실 겁니다.”
“…으음.”
“다들 너무 편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더욱 깊게 생각해보십시오. 체력을 100까지 올리면 화정의 2차 각성이 시작되고, 101까지 올리면 마지막 3차 각성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만에 하나…. 그 이상을 올릴 경우. 화정은 자체적으로 설정을 벗어나, 본인의 의지에 따라 본래의 힘을 되찾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
마침내 하고 싶은 말을 전부 꺼냈는지 우리엘은 천천히 한 걸음 물러섰다. 그러더니, 공간 내부에 있는 천사들을 한 번씩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그것은 그야말로 이 '세상'을 편집할 수 있는 힘.”
이윽고 그녀의 전신이 서서히 밝은 빛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만일 그가 모든 비밀을 알게 되었을 때. 부디 화정을 담은 칼끝이 우리를 향하지 않기를 기도할 뿐입니다.”
파앗!
잠시 후.
찬란한 빛 무리와 함께 사라진 우리엘이 남긴 말은, 이내 점점이 떨어지는 빛 가루와 함께 여운처럼 감돌았다.
============================ 작품 후기 ============================
오늘 내용을 보시고 의문이 생기신분은, 121회 'After' 부분을 보시면 약간이나마 감을 잡으실 수 있을 겁니다. 결국 회귀 직전 세라프는 김수현에게 또 한 번의 거짓말을 한 셈이지요. :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