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모라이즈-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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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02 제로 코드(Zero Code), 10년의 시간을 되돌리다. =========================================================================
쉴 새 없이 눈꺼풀을 두드리던 빛이 서서히 미약해진다 느껴질 즈음, 나는 꾹 닫고 있던 눈을 슬며시 열었다. 방 전체를 가득히 메우고 있던 빛들은 어느새 미미한 광채만을 남긴 채 조금씩 사그라지는 중이었다. 한두 번 눈을 깜빡이자 뿌옇던 시야가 조금씩 초점이 잡혔다. 이윽고 사물을 판단하는데 무리가 없을 만큼 회복되자, 나는 차분히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다르다.’
잠시 눈을 감고 있었을 뿐인데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다. 오른손에 쥐고 있던 칼도, 입고 있던 장비들도 모두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렸다. 텅 비어버린 손에서 시선을 내리자 얼룩무늬가 그려진 군복이 보인다. 그리고 왼쪽 가슴에 부착된 부표를 보는 순간 나는 잠시 숨을 멈추고 말았다. 그때였다.
“Code Name Zero. Complete. 제로 코드의 발동을 확인합니다. 정상 발동을 확인했습니다. 사용자 김수현, 축하합니다.”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자, 여전히 제단에 앉은 상태로 나를 바라보는 세라프가 보였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약간 눈살을 찌푸리고 말았다. 그녀의 몸 상태는 척 봐도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로 심각한 상태였다.
“왜 그렇게 보시는 겁니까?”
아름답게 일렁이던 하얀 날개는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희미해져 있었고, 몸 전체는 반투명한 상태로 뒤편을 여과 없이 비치는 중이었다. 오직 예의 표정 없는 얼굴만이 예전과 동일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조용히 침묵을 지키고 있자, 세라프는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오랜만에 당신의 걱정 어린 눈빛을 받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괜찮습니다. 지금은 지구의 시간으로 2011년 12월 27일 목요일 입니다. 당신의 요청에 따라, 지구의 김수현이 처음 소환의 방으로 들어온 시점으로 돌아온 상태입니다. 거듭 말씀 드리지만 사용자 김수현의 요청은 성공적으로 처리 및 완료된 상태입니다.”
“그래…. 그렇구나. 그럼 세라프, 너는 나와 함께 돌아온 건가?”
나직이 입을 열자, 세라프는 고개를 천천히 좌우로 저었다.
“정확히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일단은 No 라고 대답하겠습니다. 사용자 김수현에게 설명해야 할 부분이 남아있어 제로 코드에 아주 잠시 동안 억지력을 요청했습니다. 제로 코드는 제 의견을 타당하다고 여겼는지 다행히 요청을 수락해주었습니다.”
“설명해줄게 있다고?”
“네. 그렇습니다.”
여전히 눈가를 찡그린 채 반문하자, 세라프는 오히려 부드러운 미소로 화답했다. 그것은 내가 홀 플레인에서 활동한 10년을 통틀어 처음 보는 천사의 미소였다. 갑작스럽지만 너무도 산뜻하게 다가오는 느낌에 나도 모르게 찌푸렸던 눈가를 풀고 말았다.
잠시 동안 어색한 분위기가 내려앉았다. 하지만 먼저 말문을 연 것은 내가 아니라 세라프였다. 그녀는 은백색의 머리칼을 귀 뒤로 쓸어 넘기며, 눈을 반쯤 감은 채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저는 사용자 김수현이 홀 플레인에 처음 소환되었던 날을 기억합니다. 그때 당신이 저를 보고 처음 꺼냈던 말을 기억하십니까?”
“몰라.”
그런걸 기억할 리가 없잖은가. 도대체 뭔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를 하려고 이러는지 모르겠지만, 일단은 묵묵히 들어보기로 했다. 세라프는 적어도 ‘도우미’ 입장으로 따지면 항상 적절한 조언을 해주는 존재였다.
“여, 여긴 어디야? 어? 너, 넌 누구세요! 라고 했습니다.”
“나 참, 말 더듬는 것까지? 별걸 다 기억하네.”
“후후. 이것뿐만이 아닙니다. 그 외에도….”
파직!
그 순간 공간이 찢어지는 소리가 나더니 시답잖은 얘기를 잇던 세라프의 전신이 크게 비틀렸다. 그것은 흡사 연결 상태가 불량한 TV를 켰을 때 나오는 잡신호 현상처럼 보였다.
“흑!”
비틀렸다가, 다시 원상태로 돌아간다. 세라프는 고통에 젖은 신음을 내뱉었다. 그 현상이 반복될수록 반투명한 상태가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이 너무도 낯설게만 보인다. 눈 한 번 감았다 뜨면 당장에라도 원래의 고요한 태도를 보일 것 같은데, 지금 눈앞의 세라프는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로운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이윽고 노이즈 현상이 잦아들 즈음, 간신히 몸을 추스른 세라프는 씁쓸한 표정을 내비쳤다.
“제로 코드에게 인정을 바라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래도 10년을 함께 했는데…. 석별의 정을 나눌 시간도 허락하지 않습니다.”
‘아 진짜 적응 안되네.’
예전 같았으면 저런 말을 하기는커녕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을 것이다. 세라프 말마따나, 천사들은 언제나 합리적으로 행동하는 종족이니까. 10년 동안 한결 같은 태도만 보아오다가 갑자기 변한 모습을 보니 도저히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그래…. 그럼 얼른 설명해주고 끝내야지.”
결국, 나는 퉁명스럽게 쏘아붙이고 말았다. 세라프는 서글퍼 보이는 눈동자로 나를 응시하더니 이내 짧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사용자 김수현은 중반부부터 GP를 거의 소모하지 않았습니다. 그 동안 벌어들인 포인트를 어느 정도 소모해서 다시 시작하는 당신에게 몇 가지 특전을 부여할 생각입니다.”
“응? 특전?”
“물론 남은 GP도 그대로 남겨두겠습니다."
“특전이라….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한번 끝을 본 만큼 대우는 해주는구나. 이것 참 고마워서 눈물이 나는군.”
비아냥거림이 다분히 담겨있는 말투였지만, 세라프는 그게 아니라는 듯 살짝 고개를 저었다.
“대우라기보다는 호의로 생각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저를 비롯한 모든 천사들은 당신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하고, 공감하며, 동정하고 있습니다.”
“동정? 하하하….”
“동정이라는 말이 기분 나쁘게 들리셨다면 사과 드리겠습니다. 당신을 비하하려는 의도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홀 플레인 안에서 천사들은 사용자들을 돕는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제가 사용자 김수현에게 단 한번이라도 해롭게 들릴만한 조언을 드린 적이 있습니까? 잘 생각해보십시오. 이 호의를 받아들일지, 아니면 그냥 넘길지는 사용자 김수현에게 전적으로 맡기겠습니다.”
전적으로 나한테 맡긴다고는 했지만, 세라프는 어떻게든 ‘특전’을 받게 만들려는 듯 조금의 반박할 여지도 주지 않고 있었다. 더구나 여기서 더 몰아붙이려고 해도 딱히 할말이 생각나도 않아, 나는 떨떠름한 기분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훌륭한 선택입니다. 지금 이 선택이 사용자 김수현이 이루려는 바를 한층 손쉽게 만들어줄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동의를 표하는 순간, 세라프는 한결 안도한 눈빛으로 가느다랗게 웃었다. 그리고 이제 거의 보이지도 않는, 희미한 날개를 한 번 힘차게 펄럭였다. 곧 그녀와 나 사이의 거리가 삽시간에 줄어들고, 이내 머리 위로 보드라운 손길이 느껴졌다. 살며시 눈을 치켜 올리자, 세라프는 느긋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싫어도 잠시만 참기를 바랍니다. 남은 시간이 별로 없습니다. 머리 속으로 내용을 직접 입력 및 전달하도록 하겠습니다."
세라프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그녀가 얹고 있는 정수리 부분에 뭔가 번쩍이는 충격이 느껴졌다. 아프지는 않다. 오히려 신기하게도, 세라프가 전달하려는 정보들이 머릿속으로 확실하게 들어오고 있었다. 나는 눈을 감은 채 그녀가 주는 정보들을 차분히 음미했다.
<사용자 김수현 전용 특권 설정(Tanay)>
1. 사용자 김수현이 본래 가지고 있던 능력치 정보에 관한 특전을 부여합니다. 첫 번째, 1회차 에서 이루었던 사용자 정보를 ‘로드’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 기본으로 갖고 있는 6가지 능력치 정보 중에서 4가지를 무작위로 선별해 수치를 상향합니다. 수치의 상향 정도 또한 무작위로 결정됩니다.
2. 클래스에 관한 특전을 부여합니다. 통과의례에 입장하기 전 미리 클래스를 결정할 수 있습니다. 일반 클래스뿐만 아니라 Rare, Secret 클래스를 포함, 비밀에 감싸여있는 모든 클래스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3. 특수 능력과 잠재 능력에 관한 특전을 부여합니다. 사용자들은 일반적으로 특수 능력 1슬롯과 잠재 능력 4슬롯을 가지게 되지만, 사용자 김수현에게는 잠재 능력 슬롯을 하나 더 추가로 개방하겠습니다. 이것 또한 숨겨진 능력 포함 특수 능력과 잠재 능력을 모두 개방하며, 본인이 원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방법으로는, ‘고유 능력’이란 슬롯을 개방할 수 있습니다. 고유 능력은 특수 능력 상위에 해당하는 능력입니다. 고유 능력을 포기한다면 특수 능력 1개와 잠재 능력 5개 전부를 본인이 원하는 능력으로 선택할 수 있습니다.(이 때, 개방 슬롯은 자동적으로 잠재 능력에 포함 합니다.)
그러나 고유 능력을 가지는 것을 선택한다면 잠재 능력 하나를 소비하고, 남은 4슬롯 중 절반만 본인이 원하는 능력으로 선택할 수 있습니다.(남은 2개는 랜덤으로 결정됩니다.)
4. 단 1회에 한해서, 신체 개조 시술을 받을 수 있습니다.
5. 사용자 김수현이 원하는 장비를 한가지 선택할 수 있으며, 종류에 제한은 없습니다. 다만 EX등급의 장비들은 선택할 수 없습니다.
쉴 틈도 주지 않고 머릿속을 빼곡히 채우는 특전에 관한 정보들. 복잡한 기분으로 눈을 뜨자, 어렴풋한 잔영만이 남아있는 세라프를 볼 수 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정수리에 얹은 손을 치우지 않고 있었지만, 아까와 같은 감촉이 더는 느껴지지 않는다.
입력된 정보의 정리를 간신히 마친 후 나는 조용히 탄성을 터뜨렸다.
“이건….”
솔직히 이정도 특전을 부여할지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기에 약간 어안이 벙벙해지고 말았다. 정말로 이런 특전들을 부여 받고 시작할 수 있다면, 게임을 시작하기 전 캐릭터 편집을 사용하는 것과 다름없는 출발이었다.
그런 내 기색을 읽었는지 세라프는 미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 특전들은 사용자 김수현이 벌어들인 포인트로 만들어낸 것입니다. 물론 제 호의도 일부 섞인 건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모든 천사들 전원의 동의를 이끌어냈기 때문에 조금도 문제될 것은 없습니다.”
“나야 좋기는 한데, 어차피 너는 곧 사라지잖아. 균형 문제로 제지 받지 않을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고 방금 전 사용자 김수현의 말투에서 약간의 자만심을 느꼈습니다. 제가 10년 동안 누누이 말씀 드렸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방심은 금물입니다.”
“주의할게. 아니, 근데 균형이 문제라고. 생각해봐. 갓 들어온 사용자가 이런 특전을 부여 받고 시작한다면 뭐라고 생각하겠어?”
“그 부분은 Tanay로 해결할 수 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리고 균형은…. 물론 균형 생각도 한 건 맞지만….”
잠시 말을 멈춘 세라프는 내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이내 주저하는 목소리로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본래 사용자 김수현이 지니고 있던 잠재성을 생각하면, 오히려 이 편이 균형을 맞췄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세라프의 말은 수많은 뜻을 함축하고 있었지만, 무슨 의미인지는 곧장 알아들을 수 있었다. 사실상 ‘잠재성’이 ‘사용자 정보’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열쇠이기 때문이다.
세라프의 뜻을 헤아릴 순 있지만, 그럼에도 입안에서 쓴맛이 느껴지는 건 왜일까?
누가 뭐라고 해도 나는 홀 플레인의 정상에 오른 유일한 사용자다. 수많은 기적과 우연을 토대로 올랐다는 것을 부정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옛말에도 그런 말이 있지 않은가. 강한 놈이 살아남는 게 아니라 살아남는 놈이 강한 놈이라고.
일반적인 강함을 말한다면, 나는 자신 있게 강하다고 말할 수 있었다. 물론 최고, 최강을 칭할 수 없는 것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후유.”
“자만은 금물입니다. 방심하지 마십시오.”
결국 세라프가 하고 싶었던 말은 이 말이었던 것 같다. 정말로 그녀 말대로 내가 자만이라도 느꼈는지, 머쓱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짧게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틀린 말은 아니었으니까. 조금 자존심이 상하긴 했지만 그것도 거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희미해진 세라프를 보자 바로 누그러졌다.
“이제…. 정말로 헤어질…. 시간….”
세라프의 말대로 정말 끝이 온 모양이다. 그녀는 마치 바로 고장 나기 일보직전의 TV화면처럼 이리저리 비틀리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이제는 다시 원상태로 회복도 되지 않고 있다. 그것을, 나는 그저 하염없이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이별…. 당신…. 꼭…. 싶었던…. 있습니다.”
점점 세라프의 말이 들리지 않는다. 그녀의 존재감이 서서히 사라져간다. 그래도, 세라프는 필사적이라도 봐도 좋을 만큼 내게 말하고 있었다.
“그…. 정말….”
“세라프. 마지막까지 이래서 조금 미안한데, 잘 안 들려.”
그래도 내가 하는 말은 들리는지, 세라프의 얼굴에 슬픔이 물들었다. 그러나 지금 이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애당초 내가 바랬고, 또한 자초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다.
“부…. 디….”
팟!
노이즈가 더더욱 심해지는가 싶더니, 갑자기 하얀 빛이 팟 소리를 내며 번쩍였다. 세라프의 주위로 찬란한 빛살이 여러 갈래 생겼다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이제 진정으로 끝이 다가왔는지, 그녀가 입술을 한 번 짓씹는다. 그리고 눈동자에 힘을 주는가 싶더니, 입술이 서서히 떼어졌다.
“부디 행복하세요….”
사르르….
그 말을 끝으로, 세라프는 사라졌다. 더 이상의 노이즈 현상이 발생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녀가 있는 힘을 다해 내뱉은 최후의 말은 내 귓가에 확실히 들어왔다. 마지막 순간 나를 보며 활짝 웃은 것 같기도 하지만, 말에 집중하느라 그것을 자세히 살필 겨를은 없었다.
나는 아주 잠시 동안, 세라프가 있었던 자리를 우두커니 응시했다.
============================ 작품 후기 ============================
1. 김유현에 대한 회상 내용 삭제.
2. 홀 플레인과 김수현에 대한 내용 삭제.
3. 오타 및 문맥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