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모라이즈-1화
본문
00001 제로 코드(Zero Code), 10년의 시간을 되돌리다. =========================================================================
< 사용자 정보(Player Status) >
1. 이름(Name) : 김수현(10년 차)
2. 클래스(Class) : 일반 검사(Normal, Sword User, Master)
3. 소속 국가(Nation) : 테라
4. 소속 단체(Clan) : -
5. 진명 · 국적 : 세상을 관조하고 은둔을 원하는 자, 정상(頂上) · 대한민국
6. 성별(Sex) : 남성(33)
7. 신장 · 체중 : 181.5cm · 75.5kg
8. 성향 : 질서 · 혼돈(Lawful · Chaos)
[근력 86] [내구 92] [민첩 96] [체력 78] [마력 48] [행운 36]
(잔여 능력치 포인트는 0포인트입니다.)
< 업적(21) >
< 특수 능력(1/1) >
< 잠재 능력(4/4) >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는다. 그저 멍한 기분으로 왼손에 쥐고 있는 작은 구슬을 굴려본다.
“사용자 김수현.”
10년. 그 기나긴 시간 동안 그토록 열망하고 꿈꾸었던 것을 이루었다. 하지만, 그래도 사라지지 않는다. 지금 내 안을 가득 채우는 상실감과 시리도록 아픈 마음은 여전히 나를 괴롭히고 있었다.
“사용자 김수현. 다시 한 번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나직하지만 아름다운 미성이 내 귓가를 두드린다. 그 소리에 끌려 나는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고개를 들수록 잿빛 벽돌로 이루어진 바닥이 눈에 밟혔다. 그러다가 이내 서른 평에 달하는 공간을 시야에 담았을 즈음, 조금씩 올라가던 시선이 멈췄다.
모든 것의 시작을 알리고, 모든 것을 마무리 짓는 ‘소환의 방’. 그리고 방의 중앙에 놓인 직사각형 제단 위에는, 하얀 빛을 뿌리는 날개가 희미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나는 공허한 기분을 느끼며 제단에 앉아있는 ‘천사’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사용자 김수현의 요청을 재확인 하겠습니다. 당신은 진심으로 홀 플레인의 시간을 되돌리는 것을 원하고 있습니까?”
“그래.”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눈앞의 천사를 응시한다. 미의 절정이라 불릴만한 아름다운 외모도, 티 하나도 보이지 않는 매끈한 피부도, 언뜻언뜻 속살을 비추어주는 아슬아슬한 옷차림도. 그 모든 게 오직 나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어떠한 욕망도 일지 않는다. 천사의 아름다운 자태도, 애틋한 눈길도. 그 어느 것도 이미 죽어버린 내 가슴을 흔들지 못했다. 나는 ‘그날’ 이후로 모든 감정을 잃어버렸다.
“도저히 납득 할 수 없습니다. 저를 비롯한 모든 천사들은 당신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아니, 틀렸어. 나는 너희들의 이해를 바라는 게 아니야. 세라프.”
귀에 들리는 내 목소리가, 너무나 사늘하다. 천사, 세라프의 음성은 평소와는 다르게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나는 오늘을 제외하곤 단 한 번도 세라프가 동요하는 모습을 본 기억이 없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한 말이 그만큼 충격적이라는 소리일까.
잠깐 동요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세라프는 곧바로 무표정한 인상을 회복했다. 그리고 예의 나직한 목소리로 나를 차분히 타이르기 시작했다.
“사용자 김수현, 당신은 홀 플레인의 모든 임무를 달성했고 정상을 거머쥔 첫 번째 사용자입니다.”
“그런데.”
“그런데 가 아닙니다. 그토록 소망했던 제로 코드를 얻었습니다. 당신은 ‘자격’이 있습니다. ‘자격’이 허락하는 안에서, 원하는 모든 것을 이룰 수 있습니다.”
“세라프. 얘기는 이미 끝났어.”
“지구로의 귀환? 좋습니다. 지금의 능력을 유지한 채 지구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홀 플레인에 남는다? 그것도 좋습니다. 제로 코드만 있다면 당신은 모든 대륙을 다스리는 왕, 아니 그 이상의 존재도 될 수 있을 겁니다.”
도저히 멈추지 않을 것 같아, 나는 한숨을 내쉬며 오른손을 허리춤에 짚었다. 손아귀에 들어오는 검의 손잡이가 익숙하게 느껴졌다.
“후유, 그런 감언이설에 넘어간 건 10년으로 충분해. 이제는 지친다. 세라프? 더는 말하지 않을게. 너희들이 어떤 말로 나를 꾄다고 해도, 내가 제로 코드의 사용을 재고하는 일은 없을 거야.”
손잡이를 바스라 지도록 쥐고 회로를 따라 마력을 일으킨다. 내 전신에서 피어오르는 기운을 읽었는지 세라프는 일순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곧 나를 보는 그녀의 얼굴에 안쓰러워하는 감정이 물들었다. 아직 설득을 포기할 생각은 없는 모양이다.
“제로 코드의 소유권은 오롯이 사용자 김수현에게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건드릴 권한이 없습니다. 그래서 더욱 안타까운 겁니다. 그 대단한 힘을 간직한 물건을 단순히 시간을 되돌리는데 사용하겠다는 건 어불성설입니다.”
“…….”
“마지막으로 확인하겠습니다. 사용자 김수현은 정말로, 그 10년의 고통스러웠던 시간을 반복하고 싶다는 겁니까?”
말을 마친 세라프의 말투는 이젠 거의 애원조에 가까워져 있었다. 문득, 내부서부터 까닭 없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건 말 그대로 아무 이유 없는 웃음이었다.
나는 한동안 소리 없이 웃었다.
*
이곳은 지구가 아니다. 현대인들이 누리는 일상과는 판이하게 다른, 비일상적인 생활이 이루어지는 ‘홀 플레인’이라는 또 하나의 세상.
나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내가 지금껏 겪었던 일들을 하나씩 되짚으며 거슬러 올라가 보기 시작했다.
처음 홀 플레인에 들어왔을 때는 10년 전 아직 앞날이 창창하던 23살일 때였다. 지구에 있을 때의 마지막 기억이라고 하면, 2년 동안의 군 생활을 마치고 기분 좋게 집으로 돌아오던 생각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전역 신고를 하고 집으로 귀가하던 도중 기차 안에서 곤히 잠들었고, 정신을 차려보니 바로 이곳 ‘소환의 방’으로 소환되어 있었다. 그리고 정신을 차린 내 눈앞에는 오직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던 하얀 날개를 일렁이는 천사가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것도 알 수 없었던 상황. 말 그대로 드디어 집으로 돌아간다는 꿈에 부풀어있던 나에게는 날벼락이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꿈도, 상상도 아니었다. 그것을 겨우 현실로 받아들였을 즈음 나는 천사에게 다시 돌려보내달라고 애원했다. 하지만 내가 다음으로 이동된 곳은 ‘통과의례’로 불리는, 사용자의 자격을 증명하는 장소였다. 나는 그곳에서 난생 처음 보는 괴물들에게 쫓기며 강제로 시험을 치러야만 했다.
정해진 시험 기간은 7일. 그곳은 오롯이 생존만을 위한 전쟁터였다. 무수한 생명의 위협 속에서, 간신히 일주일을 버티고 나서야 비로소 ‘홀 플레인’이라는 세상에 입장할 수 있는 ‘사용자(User)’의 자격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통과의례는 끝이 아니었다. 홀 플레인이야말로 진정한 시작이었다. 통과의례가 7일 동안의 생존 전쟁이었다고 한다면, 홀 플레인은 언제 죽을지 모르는 기약 없는 지옥이었다.
그리고 시작된 홀 플레인에서의 생활.
그저 살고 싶었다. 나는 살고 싶었기 때문에 홀 플레인이라는 비상식적 세상에 필사적으로 적응했다. 끝에 다다르면 돌아갈 수 있다는 천사의 말 한마디에 모든 희망을 걸었고, 자그마치 10년이란 세월을 활동했다. 그래, 단지 살고 싶었고 돌아가고 싶었을 뿐이었다. 끊을 수 없는 내 인연들과 함께.
“사용자 김수현.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고 있는 겁니까? 혹시 생각이….”
‘인연’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는 순간, 울컥하는 감정이 솟아오른다. 나는 세게 머리를 흔들었다. 지금 중요한 것은 회상에 잠겨있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아, 잠깐 옛날 생각이 나서. 그나저나 고통스러운 10년의 반복이라…. 그렇게 말해주는 것을 보니, 그래도 최소한의 양심은 있나보지?”
“…….”
“맞아. 너희들 덕분에 겪을 필요도 없었던 고통들을 경험했지. 그것도 무려 10년 동안이나 말이야.”
“사용자 김수현.”
심리를 읽으려고 하는지, 세라프의 시선이 내 곳곳을 관찰한다. 관두라고 말하려는 찰나, 그녀의 아름다운 입술이 열리고 고요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혹시, 사용자 김유현과 사용자 한소영을 생각하는 거라면…. 당신이 원하는 바를 알 것 같습니다. 사용자 김수현. 저에게 매우 합리적인 생각이 있습니다. 현재 당신이 소유한 GP는 소원을 몇 번이고 발동시킬 수 있을 만큼 충분한 포인트를 쌓은 상태입니다. 굳이 제로 코드를 사용해서 과거로 돌아가지 않아도….”
‘인정하기 싫지만, 그놈 말이 맞았군.’
저 말이 나올 줄 알았다. 세라프의 말이 끝나기도 전, 나는 칼집에서 칼을 뽑아 전력을 다해 검을 휘둘렀다.
핑!
공기를 찢어발기는 날카로운 파공음. 내가 쏘아 보낸 파동은 세라프가 앉아있는 제단을 크게 뒤흔들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그녀가 일으킨 새하얀 보호막에 파동은 흔적도 없이 소멸하고 말았다.
“사용자 김수현…. 심정은 이해하지만, 무의미한 행동입니다. 아마 스스로도 알고 계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어차피 알고 있다. 사용자는 천사에게 해를 입힐 수 없다. 그럼에도 내가 검을 휘두른 것은, 절대 의지를 바꾸지 않겠다는 강렬한 의지의 표명이었다.
“아스타로트가 죽기 직전에 그러더군. 결국 너희들도 똑같은 연놈들이라고.”
“지금 악마의 말을 믿으시겠다는 겁니까? 다른 누구도 아닌 당신이?”
“사실이 그렇잖아. 이것도 안 된다, 저것도 안 된다. 결국 결론은 별 차이가 없는걸.”
“잠시만, 잠시만 대화를…. 당신의 요구사항에 대해서는 이미 충분한 설명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자격이 없다며. 자격이 없어서 안 된다며. 그래서 시간을 되돌려서, 다시 자격을 만들어오겠다고 까지 했는데 뭐가 그렇게 불만이 많아.”
“수현!”
핑! 핑!
“소리 지르지 마, 귀 안 먹었으니까. 그리고 사용자랑 성은 붙여서 불러. 네가 항상 그랬던 것처럼.”
또다시 파동이 날아가고, 사그라졌다. 세라프는 이런 돌발 행동을 믿을 수 없는지 서글픈 시선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그녀를 겨누고 있는, 서슬 퍼런 빛을 뿜어내는 검을 고쳐 잡았다. 그리고 힘껏 마력을 불어넣자, 검신에서 시퍼런 불길이 조금씩 솟아오르기 시작한다. 검 끝을 쳐다본 세라프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저야말로 마지막으로 경고하겠습니다. 지금 당장 검을 치우십시오. 아무리 설정을 사용할 수 있다고는 하지만, 당신의 근원은 인간입니다. 아득한 차원 계급을 가진 존재를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라고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그래? 그럼 어디 한번 시험해볼까? 싹 다 집어치우고 제로 코드에 너희들을 죽일 수 있는 권한을 달라고 하면 되겠네.”
“확실히 사용 권한은 당신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제로 코드의 발동은 무조건적으로 저희들을 거쳐야 이루어집니다. 헛된 꿈은 깨시기를 바랍니다.”
“자신하고 있군. 과연 방법이 없을까.”
“수…. 사용자 김수현. 하…. 의미 없는 언쟁입니다. 그래도….”
세라프는 뭔가 더 말하고 싶은 게 있는 듯 입을 달싹거렸다. 그러나 검에 피어오르는, 차가운 분노와 진심으로 점철된 감정을 느꼈는지 이내 입술을 꼭 다물었다.
“…….”
“…….”
잠시간, 나와 세라프 사이로 묵직한 침묵이 감돌았다. 나는 끓어오르는 흥분을 가라앉히고 천천히 검을 내렸다. 그리고 쓸쓸한 기분으로 왼손에 쥐고 있는 제로 코드를 들어보았다. 진한 청 빛을 뿜고 있는 작고 예쁜 구슬 한 조각. 이런 게 도대체 뭐라고….
“세라프. 더 이상 싸우기도 싫고, 말하고 싶지도 않아. 네가 내 심정을 이해해준다면, 그리고 정말로 나를 생각하고 있다면. 부탁한다.”
부탁이라는 말을 꺼낸 순간, 슬픔에 젖어있던 세라프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변했다. 나는 그녀를 향해 제로 코드를 쥐고 있는 손을 내밀었다. 이제는 확실하게 결심을 굳혔다.
“다시 한 번 부탁할게. 나는 10년 전으로 되돌아가고 싶어. 내가 처음 이곳에 들어왔던, 그 시절로.”
내 간절한 의지를 읽은 걸까. 그 순간 말간 빛을 내던 제로 코드가 환한 빛 무리를 발산하기 시작한다. 나는 담담히 꾹 쥐고 있던 손을 활짝 펴주었다. 그러자 이제는 광채를 뿜는 구체가 두둥실 떠오르더니, 가느다란 포물선을 그리며 세라프가 있는 제단으로 날아갔다. 그녀는 멍한 얼굴로 구체를 받아들였다.
세라프의 공허한 시선은 곧 내가 보내는 시선과 마주쳐 허공에서 복잡이 얽혔다.
그렇게 서로 보고만 있기를 얼마나 지났을까. 곧 그녀의 입술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열렸다.
“정말로 그것을 원한다면.”
“…….”
“당신의 의견을 존중하겠습니다.”
“세라프.”
세라프는 물끄러미 나를 보다가, 기운 없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오해하지 말고 들어주십시오. 아까도 말했지만, 사용자 김수현은 현재 상당한 양의 GP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이걸 그대로 없애는 건 전혀 합리적인 행동이 아닙니다.”
세라프의 말에 나는 좌우로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되돌아갈 건데 지금 와서 골드 포인트(Gold Point = GP)가 무슨 소용이랴. 그러나 세라프의 생각은 다른지, 그녀는 뭔가를 조작하는 듯 눈에 보이지 않을 속도로 손을 놀리고 있었다.
“믿을 수 없는 일이지만, 당신의 의지는 제로 코드의 반응을 일으켰습니다. 좋습니다. 도우미의 권한으로, 세부 사항은 임의로 조절하도록 하겠습니다. 물론 사용자 김수현에게 해가 되는 일은 손톱만큼도 없을 겁니다. 그럼 작업이 끝난 후 곧 뵙도록 하겠습니다.”
작업이 끝난다고? 곧 뵙겠다고? 당최 이해가 가지 않는 말에 도대체 무슨 수작을 부리고 있냐고 물어보려는 찰나였다. 막 입술을 떼려는 순간, 소환의 방 내부로 전에 듣지 못한 웅혼한 목소리가 가득히 차올랐다.
“사용자 김수현의 요청을 받았습니다. 27%, 58%, 77% 100%. Loading…. 승인 완료. 통과되었습니다. 지금 바로 Code Name, Zero의 실행을 알립니다. 모두 준비하십시오.”
끄긍, 끄그긍.
그 순간 어디선가 마치 녹슨 기계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와 동시에 세라프의 품안으로 들어갔던 제로 코드가 맑은 빛을 뿌리며 허공으로 비산했다.
파앗!
시야를 잔뜩 메울 만큼 환한 빛이 내부를 가득하게 물들인다. 여전히 녹슨 기계음이 들리고,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이상한 감각들이 전신을 빠르게 훑고 지나갔다. 낯설지는 않다. 공간이 비틀어지는 감각, 그리고 뭔가를 빠르게 지나치는 감각. 흡사 일전에 벌였던 아틀란타 탈환전에서 지옥의 대공이 등장할 때 느꼈던 세상이 일그러지는 감각과 비슷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강해지는 빛 무리에 가려져 이젠 세라프의 모습이 보이지도 않는다. 이윽고 나는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 작품 후기 ============================
1. 사용자 정보 창 수정.
2. 제로 코드 발동 조건 및 내용 추가.
3. 오타 및 문맥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