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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장. 가을 그리고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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쿵푸벳

10장. 가을 그리고 겨울

사조와 나의 하루는 어느 정도 비슷한 패턴을 가지고 있었다. 오후 느지막이 일어나 먹고 싶은 메뉴를 생각해 둔다. 각자 생각한 메뉴를 말한 뒤 회의를 거쳐 한 가지로 통일하면 사조는 몇십 분 뒤에 재료를 구해 온다. 같이 굽거나 같이 끓여서 먹고, 뒷정리는 나도 모르는 누군가에게 맡긴다. 나는 사조에게 이것들을 어디서 갖고 오는 거냐고 누가 우리의 빨래를, 뒷정리를, 청소를 대신 해 주는 거냐고 묻지 않는다. 혹여나 진실을 알았을 때 나의 감정이 달라지게 될 것 같아 무서웠다. 나는 지금이 좋았다. 아무것도 모르고 사조만 사랑하는 지금이 좋았다. 다시 사랑을 시작했으니 이것을 절대 실패로 끝내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내가 노력한다고 하는 새에 여름이 끝나 버렸다.

나는 가져온 가을옷이 없어 사조가 만들어 둔 옷 가게에서 카디건과 입을 만한 옷 몇 벌을 가져와 이 층 사조의 서랍에 말아서 개켜 두었다. 이제 우리는 일 층에 있는 내 방이 아니라 이 층에 있는 사조의 비단 이불을 함께 덮고 잤다. 거기서 잠도 자고, 섹스도 하고, 그러고 하루를 보낸다. 그러다가 무료해지는 날이면 나는 사조에게 한글을 알려 준다. 다른 날엔 사조가 나의 손을 잡고 서예를 가르친다. 여름을 보내고 찾아온 우리의 첫 가을을 특별하게 보내고 싶어서 오늘같이 날씨가 좋은 날은 자전거를 타기도 했다.

“나, 무서워.”

“안 놓는다고 했지. 이리 서방을 못 믿어서야.”

“놓지 마. 진짜야. 정말로.”

자전거는 보통 남이 가르쳐주지 않는다. 엄마가, 아빠가, 혹은 형제가 가르쳐준다고들 한다. 할아버지는 내가 다치는 것을 너무도 싫어해서 자전거나 인라인스케이트 같은 걸 허락해 주지 않았다. 나이가 드니 배울 기회가 없어 늘 아쉬웠는데, 마침 카페 앞에 세워져 있는 크림색 자전거가 마음에 꼭 들어 그저 바라만 볼 순 없었다. 내 사연을 들은 사조는 나를 가르쳐준다고 독학해서 자전거 타는 법을 배웠다. 약속대로 그가 자전거 타는 방법을 숙달한 뒤 나를 가르쳐주는데 생각보다 중심을 잡는 게 무서웠다. 나는 무릎이 까지는 게 싫다는 이유로 포기하려 했지만 사조는 한 번만 더 해 보자며 나를 응원했다. 생각보다 별거 아니니 절대 포기하지 말라고. 그래서 날이 좋은 날마다 나와 자전거를 탔다.

사조는 오늘 손을 놓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면서 벌써 두 번이나 놓았다. 신뢰감이 바닥임에도 마지막으로 한 번만 믿어 달라는 애원에 응했다. 보조 바퀴가 없어 기우뚱 넘어지는 게 무서웠다. 그나마 사조가 뒤에서 잡아 준다고 하면 무사히 손잡이를 잡고 페달을 밟을 수 있었다. 자전거를 타고 바람을 쐬는 게 좋았다. 하늘을 나는 새의 심정을 엿보는 기분이다. 바람을 느끼면서 페달을 밟다 보니 어느덧 빠른 속도로 자전거를 타고 있었다. 사조가 강조한 중심도 잘 잡았다. 이 정도면 놓아주어도 된다는 생각에 뒤를 돌았을 때 정자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는 사조가 보였다. 속았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자전거가 흔들거리면서 중심을 잃었다. 자전거 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몸이 옆으로 넘어갔다. 다리 한쪽을 내밀어 안전히 넘어지려던 게 실책이었다. 누가 보아도 발목이 삐끗할 각이 나왔다. 짧은 악 소리와 함께 넘어지는 순간이었다. 기우뚱 넘어지던 자전거가 원상 복귀됐다. 털끝 하나 안 다치게 해 준다더니 이런 뜻이었나 보다.

“김사조. 이리 와.”

사조는 성이 없었다. 자기는 기분이 나쁠 때마다 성까지 붙여 송정인이라고 부르면서 말이다. 그래서 나도 기분이 나쁘거나 속이 상하면 김 씨를 그의 이름 앞에 붙였다. 사조도 내가 성까지 붙이면 굉장히 기분이 나쁘다는 신호임을 알고는 웃음으로 무마하려고 했다. 저건 커피에 미쳐서 여자친구를 버린 나쁜 녀석이었다. 상황 파악이 덜 된 사조는 천천히 바다 구경까지 하시며 걸어왔다. 자전거 옆에 선 사조는 커다란 손을 내 머리에 얹고 쓱쓱 쓰다듬었다.

“잘 타더라. 이제 서방 없어도 되겠네.”

“믿으라면서. 캐러멜 마키아토가 나보다 중요하지?”

“어디 감히 가베 따위에 너를 비교하나.”

“가베가 아니고 캐러멜 마키아토.”

사조는 끝까지 캐러멜 마키아토를 좋아하는 자신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나마 좋아한다고 인정한 것은 풍선껌이 최초이자 마지막이었다. 술도 소주보단 옛날 동동주 같은 걸 최상으로 치는 남자지만 옷 같은 것은 현대 옷이 편하다고 생각하는지 한 번도 한복을 입는 걸 본 적이 없었다.

“김사조. 나도 한 입만.”

“이리 업혀.”

곧장 자전거를 뿌리치고 몸을 낮춘 그에게 업혔다. 나를 동여매듯 업은 그가 자신의 커피를 내게 맡기고 카페 쪽으로 걸어갔다. 나는 그의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면서 사조의 머리에 뺨을 비볐다. 동백꽃을 갈아 넣은 샴푸 향이 풍겼다. 그의 등에 있으면 세상이 높아져 안 보이던 것들도 볼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오곡이 익는 가을이 오는 게 눈에 보였다. 단순히 날씨만 쌀쌀해지는 것이 아니라 항구 정자 옆에 심어 둔 나무가 노란 잎으로 물들고 있었다. 시간은 배려심이 없다. 시간이 사람만큼 감정이 풍부했다면 가을을 오래오래 붙들어 두었을 텐데 말이다. 늦봄, 초여름. 그를 처음 본 계절을 나는 아직 품고 있었다. 여름 같은 그와 보내는 첫 가을이 기대됐다.

사조는 나를 업고 다니는 게 행복한 모양이었다. 밥만 잘 먹이는데 피골상접하다며 업히라고 난리였다. 사조의 마음을 알 것도 같았다. 이 섬에선 사조가 옆에 보이지 않으면, 그리고 그와 닿지 않으면 미아가 된 기분이었다.

카페에 도착해서 그가 나를 내려주었을 때였다. 카페 안에 사람이 있었다. 사조는 우뚝 멈추어 선 나를 보지 못하고 카페 안에 들어갔다. 카페 안에 어떤 나이 든 여자가 있었다. 나의 단골 메뉴인 토마토 주스를 믹서기에 갈고 있었다. 사조는 카페 안으로 들어가 여자가 토마토 주스를 만들길 기다렸다. 나는 꿈을 꾸는 심경으로 천천히 의자에 앉았다. 귀신 같은 게 아니다. 사람이 커피 머신을 다루는 중이었다. 오랜만에 사조가 아닌 다른 사람을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무심한 얼굴로 토마토 주스를 만드는 걸 기다리고 있는 사조가 낯설었다. 짜장면, 토마토 주스, 우럭 회가 저 여자의 손을 거친 것일까.

야외 테이블에 엎드려 눈을 비볐다. 나이 지긋한 여자는 온데간데없고 토마토 주스를 들고 오는 사조만 보였다. 사조는 토마토 주스를 가져다 내 앞에 두고 앞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맡겨 두었던 캐러멜 마키아토를 가져가 빨대로 쭉 빨아서 마셨다. 가을을 맞이해서 베이지색 바지와 하얀 셔츠를 맞춰 입었더랬다. 패션과 머리 스타일에 부쩍 관심이 늘었다.

“우리 정인이. 왜 조잘거리지를 않아?”

“내가 새니. 조잘거리게?”

“훨 예쁘지.”

나는 토마토 주스를 빨대로 휘적거리며 분위기를 잡았다.

“사조야.”

“응.”

“나 생리를 안 해.”

사실 생리는 이 섬에 들어오기 전부터 주기가 불안정했었다. 여름에는 그래도 달마다 했었는데 가을에 들어서면서부터는 뚝 끊겨 버렸다. 이럴 때 여자가 예상할 수 있는 것은 단 한 가지밖에 없었다. 임신. 오늘까지 안 하면 말해야지, 내일까지 안 하면 말해야지. 그런데 그 결심이 일주일을 넘어섰다. 사조를 못 믿는다기보다 그냥 이 상황이 무서웠다. 피임 같은 걸 왜 신경을 안 썼을까. 반복되는 일상에 약간의 변주를 주는 지금과는 다를 터다. 아이라는 존재가 우리의 사이를 바꿔 버릴까 걱정이었다.

“아기 갖는 거, 싫어?”

그런데도 은근히 기대가 됐다. 손도 발도 작은 아이. 나는 엄마, 사조는 아빠, 딸이든 아들이든 이 섬에서 잘 길러내고 여차하면 학교도 데려다주고. 그런데 커피를 조용히 마시고 있는 사조의 표정은 내가 기대한 표정이 아니었다. 사조의 표정은 기대나 흥분, 또는 당황스러움 같은 것이 없었다. 담담해 보이는 사조가 나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아이가 아니야.”

“아이가 아니면?”

“산 것에서 멀어졌다는 뜻이지.”

“아기가, 아니라?”

전혀 뜻밖의 이야기에 기대는 해변가 모래성처럼 무너지고 말았다. 모래로 만든 것이라고 해도 진종일 모양을 잡고 정성을 들여 완성해 놓았더니, 파도가 다가와 꿀꺽 삼키고 가 버린 느낌이었다. 일주일 동안 정성을 쏟은 모래성이 사라지고 없어진 자리에 나 혼자 주저앉아서 궁상을 떨고 있었다. 사조는 생각에 빠진 내 손을 잡으며 웃었다.

“겨울 지나면 그때는 정인이 궁금한 거, 미심쩍은 거 다 풀어 줄게.”

팔찌를 벗으면 정확히 어떻게 되냐는 물음에 사조는 단 한마디로 대답해 주었다. 영원한 죽음. 그 말이 솔직히 웃겼다. 죽으면 죽은 거지 영원할 건 무언가 해서.

“나, 그럼 아이는 못 가져?”

사조는 곤란한 것처럼 천천히 미소를 지웠다. 손깍지를 건 그가 위로하듯 엄지로 손등을 긁었다. 나는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했다. 사조의 감정은 지금 불안이라는 폭풍우 한가운데에 있었다. 그걸 앎에도 나는 이 질문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죽은 자가 된다는 게, 그러면 나는 여기서 멈춘다는 거네.”

“싫어?”

그의 말이 맞았다. 왜 그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아기는 생명이었다. 죽은 자가 생명을 가질 수 없는 건 당연했다. 죽으면 끝이니 나의 외모도 여기서 크게 바뀌지 않을 터였다. 그럼 내년에 봄이 와도 나이를 먹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나는 여기서 모든 게 멈춘다. 생명의 변화는 더 이상 나의 영역이 아니게 된다. 한 가지 확실한 건 그 모든 사실이 싫었다. 싫냐는 사조의 물음에 그렇다고 답하고 싶었다.

“괜찮겠지.”

사랑의 힘이 대단하긴 한가 보다.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가슴 속 심연으로 되돌려 보냈다.

“그건……. 지금은 괜찮지 않다는 뜻으로 들리는데.”

“괜찮을 거야.”

나는 토마토 주스를 들고 일어섰다. 우연히 사조가 잡은 손을 사르르 풀어 버렸다. 미소가 미소가 아니었다. 아무 맛도 나지 않는 토마토 주스를 목으로 넘겼다. 입안으로 들어온 토마토 알갱이를 씹으며 카페를 나섰다. 쫓아서 온 사조가 달려와 내 어깨에 손을 둘렀다. 사조의 발치에 노란색 잎이 떨어졌다. 사조는 나뭇잎이 떨어지는 나무를 올려다보며 세상을 가진 것처럼 웃었다.

“곧 겨울이다.”

“응, 벌써 가을이야.”

사조는 쪽쪽 입을 두 번이나 맞추었다. 그럼에도 내 마음이 가벼워지지 않았다. 사조에게 웃어 주면서 들고 있는 컵을 구겨지도록 쥐었다. 바보 같은 송정인. 네 입으로 겨울에, 섬에, 그의 곁에 오겠다고 말했으면서 의리도 없기는. 팔찌고 뭐고 다 버리기로 했으면서 아직도 미련이 남은 거야?

“정인아.”

“응?”

“겨울만 이 섬에서 보내고, 봄이 오면 우리 떠날까.”

“어디로?”

“보여 주고 싶은 곳. 너를 보여 주고 싶은 사람도 있는 곳.”

웃음으로 가을을 반겼지만 사조도 나도 알고 있었다. 내 마음에 부는 바람을 아니까 자꾸 좋은 것이 있다며 환심 사려는 것이었다. 그래. 어차피 원래는 생각도 않던 것들이었잖아. 그런데 나는 왜 저 나뭇잎이 떨어지는 것을 아쉬워하는 걸까.

“정인아. 나 좀 봐.”

“응?”

“네 옆에 내가 있는데 나무가 눈에 들어오는 게 신기하다.”

“그냥 가을이 온 게 신기해서. 벌써 가을이구나, 해서.”

“가을이든 여름이든 너밖에 없는 나는 억울하여서 어디 상소라도 쓰고 싶네.”

그의 눈이 낙엽으로 향하는 나의 눈을 묶었다. 능청스레 전하는 그의 진심이 나를 웃겼다. 웃음이 번지는 나의 입가로 그의 입술이 다가왔다. 그는 나무를 보지 못하게 하려는 것처럼 나의 입술을 가졌다. 혀를 오가는 그의 입술이 아주 부드럽고 좋아서, 나를 사랑한다는 그 말을 한 개도 어기지 않고 지켜 주어서. 그래, 내가 있을 곳은 그의 옆이었다. 그의 말대로 외롭고 명도 짧은 인생인데,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인생인데 사조의 옆에 있는 게 무엇이 어떻다고. 아기, 그거 좀 못 갖는 게 어떻다고. 나는 주저하지 않고 그의 허리를 안았다. 서로를 위하는 이 감정, 이 순간에 집중해야 했다. 가을이 오든 겨울이 오든 나의 마음은 언제나 그의 것이어야 하니까.

༺♥༻

노랗게 물드는 것을 본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빨간 낙엽이 되어 바람만 불면 마당과 평상 위로 노랗고 빨간 물결이 인다. 카디건으로는 안 되어 사조의 얇은 점퍼를 빌려서 입었다. 가을 산책길을 나 혼자 걷고 있는 중이었다. 사조는 이번엔 회를 뜬다면서, 웬일로 나 보고 혼자 산책을 걷고 오라고 했다. 생선은 언제 잡아 온 것인지 칼을 들고 부엌에서 요리조리 애써 보려는 그가 손이라도 베일까 싶어 지켜보려고 했더니만 나 보고 나가라고 성질인 게 귀여웠다. 멋있는 모습은 밤마다 보여 주고 있으니 아침에도 멋있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릴 필요는 없는데.

‘하, 아으!’

어젯밤에는 심했다. 허리가 아프다는 말을 하면 그만둘 줄 알았지만 꾀병인 것을 어떻게 알아보고 내 허리 밑에 베개를 두고서 그 무지막지한 것을 연속으로 치받았다. 그럴 때면 사조는 싫다는 말을 하지 못하게 제 입으로 내 입을 틀어막는다. 말로는 사랑의 입맞춤이라지만 밤마다 폭군이 따로 없었다. 그래도 사조는 무척 행복해 보였다. 지친 나를 껴안고 입가에 행복을 담뿍 물고 잤다. 겨울이 오는 게 뭐가 그렇게 좋은지. 마당에 쌓인 낙엽을 청소할 때마다 사조는 콧노래를 불렀다. 나는 빈 나뭇가지가 사조만큼 기쁘지 않았다. 지난 이십몇 년간 할아버지 그 자체였던 팔찌를 내 몸에서 떼어 놓는 게, 영원한 끝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게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죽음이란 게 가까워질수록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하는 것들이 시샘 났다. 사람은 자기가 가지지 못한 것을 부러워한다더니.

어느새 싱그러운 여름의 초록을 잃어버리고 가을의 성숙함으로 물들어 가기 시작하는 들판을 바라본 뒤 어느 계절이든 변함없는 바다로 시선을 옮겼다. 아이는 봄, 청소년과 청년은 여름, 중년은 가을, 그리고 노년은 겨울. 삶이 변화하는 산 것이 모여 있는 들판, 그리고 그곳을 떠나 수천 년이 지나도 변함없는 바다로 들어가 나는 의연하게 살아 낼 수 있을까.

산책길 초입에 서서 나는 바다를 바라보았다.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넓은 바다가 오늘따라 무섭게 느껴졌다. 끝이 없다는 건, 사조의 옆에서 영원히 죽어 있다는 건 과연 우리의 생각만큼 아름다울까.

‘저는.’

그것은 영화 같았다. 영화관에 온 것처럼 검은 바다 위에 영상이 틀어졌다. 짤랑, 짤랑, 울리는 방울 소리에 맞추어 재생된 영상은 내 어린 시절을 보여 주고 있었다. 이게 현실인지 아니면 또 나의 망상인지 걱정하고 있을 때였다. 영상에서 나오는 나는 분홍색 책가방을 멘 초등학생이었다. 몇 학년인지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할아버지와 살 때의 나였다.

‘아이도 아들하구 딸하구 그리고 늙어서도 이렇게 손잡고 다니는 남편이랑 같은 날 같은 시간에 죽을 거거든요, 그러니까.’

기억났다. 할아버지가 이 팔찌를 채워 주고도 걱정이 끊이지 않자 내가 어버이날 할아버지 가슴에 카네이션을 달아 주면서 약속했다.

‘걱정하지 마요, 할아버지. 나중에 내가 증손녀랑 증손자랑 데리고 할아버지랑 놀이공원 갈게요.’

할아버지는 그 말에 웃었던가. 아니면 웃지 않았던가. 어릴 때 나는 결혼은 아니더라도 내 가족, 내 아이를 갖고 싶어 했다. 학교에 갔다 오면 따듯하게 맞아 주는 가족. 그리고 할아버지 할머니 될 때까지 정다운 부부가 되는 게 나의 꿈이었다. 꿈.

“정인아.”

산책길로 마중 나온 사조가 웃으며 달려왔다. 겨울이 다가올수록 꿈에 부푸는 그가 너무 아름답고 너무 슬펐다. 달려온 사조가 나의 허리를 안아서 한 바퀴 돌렸다. 차가운 바람에 눈물 자국이 말라서 다행이었다. 사조는 나를 내려주면서도 뺨에 쪽 뽀뽀를 했다.

“내가 뜬 회 먹기 싫지? 그래서 대답도 안 하고.”

“아니야. 난 네가 만든 건 뭐든 좋아.”

“거짓말을 이리 잘해서 어떡하나.”

사조의 손을 잡고서 노래진 언덕을 올랐다. 유치하게 손을 흔들며 걷는 우리가 노인이 되는 상상을 해 보았다. 사조와 아이도 갖고, 사랑도 하고, 학부모가 되어 같이 학예회 같은 것을 구경 가고.

“한데 정인아.”

“응.”

체력이 약해진 내 손을 끌며 언덕을 오르던 사조는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왜 울었어.”

사조는 날카롭게 인상을 구기고 있었다. 손에도 무의식중에 힘이 들어가고 있지만 사조는 모른다. 저도 분위기로 느끼고 있을 테지. 가을이 깊어질수록 나는 웃음이 없어지고 둘만의 약조는 늘어났다. 보여 줄 사람들, 보여 줄 장소들. 나의 머리로는 상상조차 되지 않는 곳을 사조가 시간 내서 설명하는 일이 늘었다. 사후 세상에 대해 기대감을 갖게 하려고 그러는 것을 알고 있었다. 네 생각보다 나쁜 것이 아니라며 나의 마음을 위로하는 일임을. 그래서 지금도 화를 내기보단 눈치껏 넘어가려고 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나는 사조의 마음을 잘 알면서도 기쁘지 않은 내가 미친 것 같았다.

“사조가 같이 산책 안 나오는 게 오랜만이라서. 슬프더라구.”

그래서 나는 그가 원하는 말을 녹음테이프처럼 들려주었다. 그러면 사조는 내게 매일 똑같은 질문을 했다.

“박동섭, 이라는 사람. 기억해?”

요즘 들어 내게 자꾸 박동섭이라는 사람을 물었다. 하지만 아무리 머릿속을 뒤집어 까 봐도 그런 이름을 나는 모른다. 전혀 알 수 없는 사람이라서 모른다고 대답하면 사조는 킬킬거리며 좋아했다.

“그게 누군데 자꾸 물어보는 걸까.”

“몰라도 되는 사람.”

“몰라도 되는 사람이면 그만 물어봐.”

사조의 원수라도 되는지 어쩔 땐 박동섭이 누구냐는 말을 듣기 위해 사는 사람 같았다. 그의 기대감에 부응하기 위해 나는 오만상을 찌푸리고 대답해 주었다. 그러면 더 좋아하니까.

오늘도 박동섭 효과를 톡톡히 본 사조는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평상에 자신이 준비해 놓은 것을 보여 주었다. 가을을 맞이해서 준비한 단풍 모양의 케이크와 사조가 손수 뜬 회, 밥알 동동 뜬 동동주까지 만반의 준비를 했다. 자기 손으로 요리를 해서 먹이는 게 좋다는 사조의 말을 따라 주고는 있지만, 열정에 비해 늘지 않는 실력이 언제나 미스터리였다.

내 자리라고 특별히 깔아 둔 방석 위에 앉았다. 사조는 자연스럽게 옆자리에 앉아 회를 한 점 집어 간장에 찍었다. 입으로 넣어주려는 몸짓에 웃으면서 입을 벌릴 때였다. 평상 밑에 다리 하나가 없는 강아지가 보였다. 까만 털에 눈은 빨간색이었다. 사조가 주는 회 한 점을 받아먹으며 그 강아지를 뚫어져라 보았다. 이번에도 내 헛것인가. 오늘 처음 본 녀석이 넉살 좋게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이번엔 초장에 회를 묻혀 내 입에 가져다주는 사조가 투정 부리는 투로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서방이 회를 주는데 어디를 그리 보냐.”

“저기, 강아지가 보여서. 내가 또 헛것이 보이나 봐.”

회를 씹으면서 용케 살점이 많이 바른 것을 칭찬하려고 하는 찰나 사조가 흥이 나는 얼굴로 나를 보았다. 나와 강아지를 번갈아 본 사조가 뺨에 입을 맞췄다. 애정이 과하게 넘치는 사조의 태도에 나는 눈을 깜빡였다.

“사조, 너도 보여?”

사조는 씨익 웃고는 평상 옆에 앉은 강아지를 손으로 불렀다. 얌전히 엎드려 대기하고 있던 강아지는 쫄래쫄래 사조에게로 달려왔다. 크기가 웬만큼 크다고 알려진 대형견보다 컸다. 앉으라는 손짓에 바로 엉덩이를 흙에 문댔다. 사조는 재주가 많은 강아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었다.

“얘는 홍칠이.”

“홍칠이.”

살며시 손을 뻗어 홍칠이의 머리를 만지려고 했으나 실물이 아닌 허상을 만지는 느낌이 났다. 형체가 있기는 한데 복슬복슬한 털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데도 홍칠이는 좋다고 혀를 내밀며 헉헉거렸다. 애교가 참 많았다.

“정인이 네가 저를 발견한 게 좋은가 보다.”

“항상 있었어?”

“그렇지.”

그 말에 떠오르는 게 있었다. 배를 발견하고 마을을 뛰어 내려갈 때 빨간 눈알에 외다리인 머리 긴 여자가 나를 쫓아오는 것을 보았다. 그날 무서워서 마을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선착장에서 주저앉아 울었던 게 기억이 났다. 그 바람에 사조와도 대판 싸우고 말이다. 다리 하나가 없고 빨간 눈인 홍칠이를 보니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비슷한 경우가 또 있었으리란 생각에 과거를 돌아보았다.

“그럼, 그 카페에서 내 주스 만들어주신 분도 헛것이 아니라…….”

사조는 내 말에 홍칠이를 쓰다듬던 손을 거두고 해맑게 웃었다.

“눈이 트이고 있구나.”

“우리, 뭐 만들어 주시고 하는 거 다 그분인가? 그 꽃무늬 입고 막 이렇게 퉁퉁하고.”

“산 자는 죽은 자를 바로 볼 수 없어. 말도 다르고. 하여 기가 허약하여 보이거나 그것을 보게 타고난다고 하더라도 왜곡되어 보이는 경향이 있지.”

그렇다면 내가 홍칠이를 제대로 볼 수 있다는 건, 카페에서 음료 제조하던 아주머니를 볼 수 있다는 건, 어느덧 내가 산 자보다 죽은 자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소리였다. 눈을 감았다가 떠도 홍칠이는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때 방실거리는 사조가 달려들어 안겼다. 불안의 폭풍우에서 빠져나와 겨우 목을 축이고 사는 얼굴에 재를 뿌릴 순 없었다. 사조의 가슴에 머리를 기댔다. 그의 행복이 나의 행복이려니 한다. 그 생각만이 미련을 정리해 줄 수 있었다.

“오래도록 외로웠는데. 오래도록 이 세상을 등지고 살았는데. 정인이가 오려고 그랬나 보다.”

가을이 깊어지고 있었다. 내 마음도 같이 깊어지면 좋으련만 왜 나의 마음은 여름으로 역행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방금 본 영상은 할아버지가 내게 보내주시는 걸까. 만일 그렇다면 내게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셨던 걸까. 삶을 포기하지 말라고 그러신 걸까. 아침이고 밤이고 우리의 앞날을 이야기하는 사조에게 미안한 마음이 듦과 동시에 나는 우선 내 안에 일어나고 있는 이 혼란이 무언지 정확히 알고 싶었다.

단순히 죽음이라는 단어와 낯선 세상을 받아들이기가 힘이 들어서 그런 건지. 그것도 아니면 사조의 말대로 아무것도 없다는 저 바깥에 내가 두고 온 것이 있어서 이토록 미련이 남는 건지.

나는 사조의 허벅지를 톡톡 두드렸다. 뜻을 알아들은 사조가 평상 위에 다리를 폈다. 그의 허벅지를 베고 누운 뒤 홍색 저고리를 입은 나뭇잎을 바라봤다. 눕자마자 머리칼을 손으로 빗겨 주던 사조가 갑자기 자세를 바꿨다. 손을 뒤로 하고 하늘을 올려다본다. 심란한 그의 표정에 수치심이 한 방울 들어가 있었다. 그의 허벅지에 누운 나로서는 그 이유를 알아볼 필요도 없었다. 세워져 버린 그의 앞섶 모양을 보면 쟤 몸은 어쩜 저리 솔직할까 싶었다. 나는 그의 배꼽 방향이 아니라 무릎 쪽으로 돌아누웠다. 자기도 이 상황이 웃긴지 오늘 굶어서 그러니 봐 달라며 분위기를 풀려고 노력했다.

“어제 실컷 했으면서.”

“어제는 어제의 것이, 오늘은 오늘의 것이 있는 법이거든.”

나는 아주 뻔뻔하게 나오는 그에게 콧방귀 뀌며 일어났다. 사조는 더 누우라는 듯이 제 허벅지를 쳤지만 이미 흉물스럽게 변해 버린 아랫도리를 무시하고 눕는 건 연인이어도 불가능했다. 개인적인 취향이지만 남자의 성기 부분을 괜찮게 생겼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오래 쳐다보지 못하고 부끄럽기만 할 뿐이었다.

“정인아.”

“안 봐.”

“한번 쓰다듬어 볼래?”

“아으, 진짜.”

몸서리치며 도망가려 하자 사조가 내 허리를 안았다. 힘에는 당해 낼 수가 없어서 그의 허벅지 위에 앉고 말았다. 내 등에 셀 수도 없이 많은 입맞춤을 남기는데 저러다 입술 껍질 벗겨지면 어쩌려고 저러나 싶었다. 허리가 결리는 느낌이 들어 스트레칭을 하는데 사조의 손이 뺨을 쥐었다. 제 쪽으로 살금살금 돌린 뒤 입술을 가져갔다. 부드럽게 한번 빨고선 놓아준 그가 엄지로 입술을 닦아주었다.

“요 조그마한 입술에 어찌 이리 흉물스러운 것을 넣겠어.”

“말은 잘해. 밤마다 눈이 이렇게 되어 가지고 달려들면서.”

“서방이니까 그건 봐줘야지.”

나는 사조가 떠 놓은 회가 말라가고 있었다. 사조가 왜 나를 먹이는 일에 극성인지 알겠다. 예전엔 라면, 쫄면, 우동, 삼겹살, 한우 등 먹고 싶은 메뉴가 있었다. 하지만 요즘엔 아니었다. 사조는 맨밥만 깨작거리는 나를 위해 서툰 요리 실력이라도 발휘하는 것이다. 힘들게 했는데 안 먹을 거냐며 강짜 부리면 어쩔 수 없이 숟가락을 드니까 말이다.

“이리 와봐. 안아 주게.”

이젠 안아 주지 못할 만큼 커다란 사조가 나한테 맞는 사이즈인 것 같았다. 다른 생각 못 하게 평생 안아 주고 있었으면 좋겠다. 나는 사조를 안은 손을 풀고서 팔찌를 내려다보았다. 팔찌에 달린 방울 두 개 중 하나를 손으로 잡아 뚜둑 끊어 냈다. 사조는 두 손으로 내가 건넨 방울을 받았다. 지극정성인 서방에게 증표로 줄 것이 이것뿐이었다.

“네 검에 달아 두든가. 아니면 그냥 간직하고 있든가.”

사조는 검 이야기를 꺼내자 놀란 것처럼 제 손에 있는 방울을 떨어트릴 뻔했다. 옷장의 보안이 허술한 게 맞았다. 사조는 제 능력을 너무 믿는 게 흠이었다.

“농을 열었구나.”

“봤어. 너 무슨 저승사자 같은 그런 거야?”

그러자 손에 쥔 방울을 주머니에 쏙 넣은 사조가 혀를 찼다.

“그것들은 나보다 한참 아래고.”

“와, 멋있네. 전설의 고향 같은 데서 보면 저승사자 엄청 무섭게 나오는데. 사조가 그 사람들보다 더 무서운 사람이라는 거잖아.”

“전설의 고향?”

“TV가 뭔지는 아시죠?”

내가 놀리자 사조는 젓가락을 들어서 회 한 점을 집어 왔다. 모르니까 고만 이야기하고 먹으란 뜻이었다. 그게 귀여워 보이는 나도 문제긴 하지만 말이다. 입을 벌려 그가 주는 회를 받아먹었다. 겉면이 말라도 살이 달아서 씹는 맛이 있었다. 그냥 사조가 주는 것은 달든 짜든 다 맛이 있었다. 나는 사조의 고운 손을 잡아서 요리조리 돌려보았다. 예쁜 손등에 뽀뽀를 하자 사조가 회 썰고 횡재했다며 웃었다.

“회 썰다가 손 다친 건 아니지?”

“다른 것은 몰라도 칼 쓰는 것은 자신이 있으니 걱정 마.”

“그래도 다음엔 회 같은 것 뜨지 않았음 좋겠는데.”

“왜. 맛이 별로인가?”

“다치면 안 되잖아. 내가 연모하는 남자라고.”

연모, 사랑. 고백에 익숙하지 않은 사조는 내 등 뒤로 얼굴을 숨겼다. 그는 매일매일 나의 날개뼈에 행복을 달아 주고 있었다. 길 잃은 단풍잎이 나풀나풀 팔찌 위로 떨어졌다. 이번 가을은 유난히 짧았다. 원래 가을은 여름, 겨울보다 날이 적어 아쉬운 법이라지만 끝나가는 느낌이 들지도 않았는데 날이 추워지니 일 년을 기다린 입장에선 계절 배치가 잘못됐다며 우울한 거다.

“곧 겨울이네.”

예전에는 사랑이 문제인 것 같았는데, 사랑만 해결되면 모든 게 편안할 줄 알았는데. 왜 사랑이 내 옆에 있는데도 마음은 항시 돌아가는 팽이를 보는 것처럼 불안한 것일까. 저게 언제 멈출까, 저게 내일은 멈출까, 멈추긴 할까. 이러다가 욕심 많은 나를 벌하고자 하늘이 사조에게 해코지하면 어쩌나.

“어!”

그때 다리를 절뚝거리며 다가온 홍칠이의 복슬복슬한 털이 발바닥을 간지럽혔다. 죽은 강아지치고 털이 원더풀이었다. 홍칠이는 기분 좋은지 그르렁거리며 주변을 맴돌았다.

“저리 가지 않으면 어찌 될지 알고 있지?”

사조의 차가운 목소리가 그를 막았다. 주인 말을 잘 듣는 홍칠이가 꼬리를 한껏 내리고 구석 자리에 가서 엎드렸다. 주인 닮아서 잘 삐치는 홍칠이가 어째 가여웠다.

“가여운 척은.”

“왜 그래. 그러지 마.”

“어여쁜 외모로 네 환심 사려고 그러는 거야. 속지 말아.”

모르는 남자의 이름을 아냐고 물어보거나, 홍칠이를 비롯한 누구도 마주치지 않게 하려는 것으로 봤을 때 사조는 독점욕이 강한 부류인 듯싶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지만 나는 질투가 일어도 상대에게 누구를 보지 마라, 같은 말을 전혀 할 수 없는 성격이어서 사조가 부럽기도 했다. 방금 온 줄 알았던 가을이 가고 있었다. 팔찌는 부적의 힘을 잃어 가는 것처럼 옥의 색이 바래지고 있었다. 사조에게 방울 하나를 주어서 그러한가, 오랜 세월 찬 팔찌임에도 낯설게 보였다. 하나둘 변화를 한다. 그리고 나는 그런 변화 하나하나에 기뻐하지 못하는 중이었다.

༺♥༻

날씨가 많이 추워서 이제는 보일러를 떼지 않으면 몸이 달달 떨렸다. 사조의 집은 보일러 기름값을 내지 않아 겨울을 비싸게 날 걱정은 없었지만 요즘 들어 사조와 나는 기름값보다 무서운 신경전을 하는 중이었다. 겨울이 왔다는 이유로 두꺼운 점퍼를 입고 목도리까지 꺼내어 입는데도 차일피일 날을 미루는 것에 사조가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겨울이 오면, 겨울이 오면 노래를 불렀던 나는 미안할 따름이었다. 하지만 사조 본인 말로는, 섭섭해하는 건 단순히 내가 날을 미루는 것 때문이 아니라 제 곁에서 도망을 간다는 이유였다. 나도 나름의 사정이란 게 있었다. 마음의 준비를 하고 싶었다. 사조가 자꾸 따라다니면 내 마음은 사조의 것이 된다. 한 번도 내 것이었던 적 없는 삶을 보내 주려면 준비가 필요하다고 말을 했는데도 사조는 믿지 않는 눈치였다.

“요 근방만 돌고 올게.”

“눈 올지도 모르는데.”

“계속 기다리는 눈이 나 나갈 때 온다고 말이라도 했어?”

사조가 편해졌다. 손을 잡아도 설레고, 포옹해도 설레고, 그가 눈에 없으면 보고파 미치겠지만 적어도 내 삶의 마지막이 될 순간만큼은 혼자서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지금껏 내 삶을 제대로 돌봐 준 적이 없었다. 떠나는 순간마저도 사조를 사랑하기 때문이라는 이유로 어영부영 보내고 싶지 않았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나의 삶이었다. 사조는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내게 따듯한 동글레 차가 담긴 보온병을 건넸다.

“나 어디 가는 것도 아닌데.”

“옆에만 가만히 있는 것도 귀찮으시다면서.”

“입 나온 것 좀 봐.”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오는 동안 사소한 내 몸에 변화가 생겼다. 이제 홍칠이는 아무렇지 않게 만질 수 있었고, 내 방에서 머리를 빗던 자그마한 여자아이 귀신은 매일 우리 집안일을 도와주시는 아주머니의 딸이란 것까지 알게 된 참이었다. 산 자에서 멀어지고 보니 그들은 매우 평범했고, 심지어 귀엽기까지 했는데 서로 간 소통이 불가한 바람에 베개로 때리고 돌을 던지고 그랬던 것이 미안쩍었다. 그럼에도 내가 아직 완전히 죽은 자는 아니라서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있었다. 홍칠이의 입에서 아저씨의 목소리, 혹은 젊은 여자의 비명과 같은 목소리가 나기도 했다. 내 표정에서 그 목소리를 무서워한다는 게 티가 나는지 그들은 웬만해선 입을 열지 않고 섬에서 묵묵히 제 할 일들을 하고 있었다.

내가 목록을 적어 전달하면 아주머니는 슈퍼에 물품을 채워 놓고 갔다. 지난번 파란 대문 부엌에서 설거지하는 모습을 보고 내가 까무러친 것을 기억하는지 내 앞에선 요리하는 모습이나 집안일 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한다는 게 시트콤 같은 일이긴 했다.

빨간 목도리를 두르고 사조가 준 보온병을 옆구리에 꼈다. 추우니까 이불 밑에서 등 지지고 가라는 사조를 뿌리치고 나온 참이었다. 사조는 신경을 꺼 버리려는 것처럼 내가 현관문을 나서자 이 층으로 올라가 버리는 소리가 났다. 석연치 않은 마음은 밖으로 나와 찬 공기를 마시자마자 나아졌다. 하얀 입김을 푸우 내뿜으면서 몇 달째 자리보전하는 걱정과 두려움이 모두 날아가기를 바랐다. 팔 운동을 하면서 산책로 쪽으로 걸어가려는데 홍칠이가 평상 밑에서 기어 나와 따라붙었다.

또 다른 변화. 나는 가끔 몸이 뿌예지고 투명해지는 현상을 겪는다. 이 세상에서 지워지는 것처럼 몸이 흐려질 때마다 사조를 부르면 그 증상은 금세 없어지지만 그러고 난 후에 아주머니나 아기, 그리고 홍칠이가 선명해지는 것으로 보면 나도 그들과 같아지고 있는 것일 터였다. 홍칠이가 쫓아 나오는 게 기특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아무리 추워도 홍칠이는 입김을 뿜지 않았다. 그래, 죽은 사람은 입김을 내뿜을 수 없지. 아무리 그들이 사람의 거죽을 가졌더라도 결국 죽은 사람이다. 나는 추운 겨울과 어울리지 않는 홍칠이에게 이만 가 보라고 말한 뒤 산책을 시작했다.

산책길은 겨울답게 냉골 같은 바람에 이기지 못하고 쓰러진 마른 풀들 천지였다. 바다는 추위에 질린 것처럼 까맣고 푸르렀다. 그 위로 회색 구름이 껴 있었다. 사조의 예견대로 얼마 안 있으면 첫눈이 내릴 것만 같았다.

사조가 첫눈을 기다리는 이유는 따로 없었다. 암묵적으로 첫눈이 오면 이 삶을 끝내기로, 영원히 사조의 옆에 있기로 약조한 셈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산책로 중간쯤 가다가 걸음을 멈췄다. 여름날 바닷물에 발을 담근 지점이 보였다. 여기서 사조가 나에게 처음으로 특별한 능력을 보여 줬었다.

그때와 똑같이 바다를 걸어가 발을 담갔다. 얼음물에 발을 넣은 것처럼 아차차 하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발이 어는 통증에 무감각했다.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얼마 전에 뜨거운 물을 마셔도 느낌이 없더니만 그게 우연이 아니었다. 사조의 손이 예전만치 따듯한 느낌이 들지 않았다. 사조의 난로 같은 입술이, 손이, 체온이 좋았었는데. 바위 위에 앉아 사조가 준비해 준 보온병을 열었다. 뜨거운 김이 펄펄 나는 동글레 차를 불지도 않고 마셨다. 그래봤자 입천장 훌러덩 까지는 느낌이 없었다. 속은 허한데 미지근한 느낌의 차가 들어오고 있었다. 생각에 잠겨서 팔찌를 내려다보았다. 거의 부서지기 직전처럼 금이 가 있는 팔찌는 굳이 내가 벗지 않아도 겨울이 끝나기 전에 산산조각 날 것만 같았다. 바람이 불어도 울지 않는 방울을 손으로 잡고 흔들어 보았다. 할아버지가 처음 내 손목에 채워 주었을 때처럼 짤랑, 짤랑 우는 소리가 마음의 위안을 주었다. 사후에도 새로운 삶이 있다는 것을 알았으니 할아버지도 거기서 잘 지내고 계시겠지. 아닌가. 손녀 때문에 속이 썩어서 거기서도 마음 편히 못 지내고 계시려나.

김이 빠져나가고 있는 보온병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방울이 마지막 힘을 쥐어짜는 것처럼 애처롭게 울었다. 이번엔 무슨 기억을 보여 주려나 싶어서 바다를 바라봤다. 전보다 화질이 떨어진 흑백 영화가 재생됐다.

‘정인이. 어떡할 거냐.’

이빨이 몽땅 빠지기 전인 할아버지 앞에 두 사람이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게 보였다. 젊은 시절의 엄마와 아빠였다.

‘저는 더 드릴 말씀 없습니다, 아버님. 새 가정도 있구요.’

‘봤죠, 아버지? 이 사람이 이런데 내가 어떻게 애를 봐요.’

서로 자기 역성을 들어 달라고 싸우는 부모를 보니 마음이 찢어졌다. 아빠는 친자식이니 내 편을 들어라. 엄마는 이미 이혼한 며느리이니 앞길 막지 마시라. 역시 죽음을 선택하는 게 낫다고 나에게 알려 주는 것일까. 그때 잠자코 이야기를 듣던 할아버지가 짧고 굵은 한마디를 했다.

‘내가 키울 거다. 정인이.’

‘아버님이요?’

‘아버지가 애 육아에 대해 뭘 안다고……. 게다가 툭하면 병들어서 병원비도 많이 들어요.’

‘너희가 부모냐?’

할아버지의 쓴소리에 아버지는 말이 안 통한다며 핸드폰을 꺼냈다. 계속 연락 오는 곳이 중요한 곳인 듯 할아버지 앞에서도 뽁뽁거리며 문자를 치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두 사람에게 긴말을 하지 않고서 안방에 들어갔다. 제삼자의 시점으로 본 할아버지는 소리 없이 꺼이꺼이 우셨다. 손이고 얼굴이고 새빨갰다. 그런 할아버지의 모습은 처음 보았다.

세 사람의 만남 장면이 사라진 뒤 나타난 것은 하얀 이불, 환자복을 입은 나였다. 이렇게 보니까 저 나이의 나는 작고 어리고 약했구나. 나는 내가 다 큰 줄 알았다. 할아버지는 걸음이 불편한 것처럼 절뚝거리며 걸어와 잠든 내 옆에 앉았다.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조심조심 쓸어 주던 할아버지가 인자한 얼굴로 말했다.

‘가여운 우리 정인이.’

보온병을 꽉 쥐었음에도 손이 떨렸다. 할아버지가 너무 보고 싶었다. 할아버지는 내 작은 손을 자신의 손으로 감싼 뒤 토닥토닥해 주셨다.

‘강해져야 해. 할아비가 꼭 그렇게 만들어 줄게.’

할아버지가 웃는 얼굴을 더 보고 싶은데 방울은 여기까지라는 듯이 재생을 꺼 버렸다. 짙푸른 바다만이 내 앞에 남았을 때 나는 보온병을 부둥켜안고 목메어 울었다.

“난 할아버지밖에 없는데, 왜 나만 두고 갔어. 할아버지, 나 그렇게 안 강한데…….”

마음이 박살 나는 소리가 파도 소리 같았다. 눈물이 청바지 위로 떨어져 까만색으로 변하고 있을 때였다. 하얀 눈송이가 보온병 위에 올라타자마자 녹아내렸다.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수만 개의 눈송이가 하얀 낙하산을 펴고 착륙하고 있었다. 아직 입김이 나오고 있는 것을 내 눈으로 확인했다. 하얀 눈이 머리카락에 달라붙어 나를 눈사람으로 만들려나 보다. 발이 동상에 걸릴 것처럼 아리기 시작했다. 차가운 바다에서 빠져나와 두 손으로 발을 감쌌다. 보온병의 따듯함도 느껴지기 시작했다. 일부러 깊은숨을 내쉬면서 입김이 나오는지를 확인했다.

‘할아버지, 입김 봐 봐. 용가리 같지.’

생각나는 게 많았다. 왜 눈물이 날 만큼 울적했는지, 왜 사조와 이곳에 사는 게 좋으면서도 돌아가야만 한다고 생각했는지 그 이유가 기억이 났다. 넘어지고 일어나고, 그것도 지겨웠었다. 나는 그냥 넘어져 있으려고 그랬다. 저 위에서 걷고 있는 사람들, 나보다 괜찮은 사람들 안 보고 살았다. 그렇게 살아도 되잖아, 생각했었다.

“송정인.”

언 발을 손으로 녹이고 털신을 신었다. 고개를 틀자마자 해변 길에 사조가 있었다. 하얀 패딩에 까만 바지가 죽음의 사자 같았다. 너무 예쁜 내 연인.

“하도 안 오길래.”

“그래서 왔구나.”

“보고 싶지도 않아?”

사조는 내가 보온병을 챙겨서 일어나자 해변 쪽으로 뛰어들었다. 까만 바위를 넘고 넘어서 그를 만났다. 하얀 눈이 우리 사이로 내리고 있었다. 사조는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다시 나를 내려다보았다. 웃고 있는 그의 얼굴에는 기대감이 서려 있었다. 사조는 내게 청혼하듯 손을 내밀었다. 우리는 손을 잡고 무사히 겨울 바닷가를 빠져나갔다. 나는 사조의 따듯한 손을 느낄 수 있음에 감사했다.

“잠깐만.”

나는 집으로 가려는 사조의 손을 놓았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 사조는 해변 길의 끝을 응시하며 물었다.

“더 걷고 싶어?”

“응.”

어딘가 실망한 것만 같은 사조의 표정이 눈에서 나가지 않고 있었다. 나는 다시 사조의 손을 잡고 반대 방향으로 걸었다.

“같이 걷자.”

“당연 그렇게 나와야지.”

사조와 첫눈을 맞으며 걷는 해변 길이 아름다웠다. 작고 볼품없다고 구박한 이 섬이 평생 그리울 거다. 왜 눈물이 나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건 아마도 이 섬에 살아갈 사조 때문이겠지. 사조와 걸으면서 생각을 해 보았다. 나는 과연 사조 없이 살 수 있을까. 사조와 매일매일 있다가 보니까 소중함을 잊은 것일까. 이제 좀 살만하니까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는 걸까.

“차가 다 식었다.”

사조는 제가 싸 준 보온병을 만져 보고 이야기했다. 그러고 보면 사조는 죽은 사람이 아닌 건가. 그는 뜨거운 것, 차가운 것을 느끼고 만질 수 있었다.

“사조 너는 죽은 자야, 산 자야?”

“경계에 있는 자지. 죽은 자에 가까운.”

사조는 나를 힐긋 보면서 뺨에 묻은 눈을 닦았다. 눈이 오는 게 기분이 좋은 사람처럼 하얀 눈송이를 손바닥에 받았다.

“내가 오늘 죽으면, 어떻게 돼?”

“영원히 나와 불귀의 땅에서 잘 먹고 잘사는 것이지.”

“그렇구나.”

“내 입으로 이런 말 하기는 쑥스러우나 나 귀한 집 아들이라서 그곳에 가 보면 깜짝 놀랄걸.”

“만약 가지 않으면?”

오늘은 영업하지 않는 카페를 지나쳐, 비가 오나 날이 개나 앉아서 떠들던 정자도 지나쳤다. 마침 항구에 가까워졌을 때였다. 사조가 실수인 양 나의 손을 놓쳤다. 찬 바람, 차가운 눈, 그리고 그것보다 차가운 사조의 눈동자. 오늘 들을 말은 그게 아니라는 듯이 부정하던 그의 미소가 녹아내리는 것이 보였다. 사조는 아직 헤어나지 못했다.

“농이지?”

“무서워.”

“하나 아플 게 없어. 그저…….”

사태를 파악한 사조는 팔찌에 우악스럽게 손을 뻗었다. 팔을 눈송이가 떨어지는 하늘로 치켜들었다. 팔찌를 흔들며 기억 안 나냐는 듯이 목청을 높였다.

“약조했잖아.”

“살고 싶어.”

“나랑 있으면, 아니, 나랑 있는 게 싫어서 그러해?”

“그게 아니야.”

“연모한다고 해 놓고.”

사조의 눈에 걷잡을 수 없는 원망이 차올랐다. 그는 어떻게 해야 제 감정을 없애는지 모르는 사람처럼 목을 조르는 시늉을 했다. 허리를 숙이고 밭은 숨을 토해 낸 뒤 자세를 바로 하고 멍한 뺨을 찰싹 때렸다. 자칫 냉정해 보이지만 눈을 보면 그의 감정이 어떤지 알 수 있었다.

“사조랑 영원히 사는 것도 좋아. 네가 변하지 않을 남자라는 것도 믿어. 그런데 사조야. 나, 바깥에서 하지 못하고 온 일이 있어.”

“그게 무엇인데.”

“잘 살고 오는 거.”

사조는 말문이 막힌 것처럼 아랫입술을 송곳니로 씹고 뜯었다. 겨울에 시들어가는 풀을 부러워하는 건 죽음은 다음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 풀은 봄에 다시 태어날 테지만 나는 태어날 수 없었다. 영원히 이 모습으로 도망가는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할아버지가 만들어 준 나의 삶을 그 모양 그 꼴로 두고 싶지 않았다. 사조와 함께 있으면 행복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두고두고 그 삶에서 도망쳐 버린 것을 후회할 터다.

“나가면, 정인이 너를 아프게 하는 것들밖에 없어.”

“알아. 그런데 꼭 그것만 있는 것은 아니야, 사조야.”

“나를 다시 못 만난다고 해도?”

“…….”

“그렇다고 해도? 나를 기억하지도 못해. 그래도 좋아? 그래도 갈래?”

사조는 초점 없는 눈으로 나의 입술과 콧잔등에 쌓인 첫눈을 보았다. 그건 안 된다. 사조를 잊는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 본 적 없었다.

“안 잊어. 안 잊을 거야. 그리고, 그리고 잘 살고 온 다음에…….”

“그때도 내가 너를 사랑할 거 같아?”

“사조야…….”

“아니, 네가 틀렸어. 넌 바깥으로 나가면서 외로워 울다가 쓸쓸히 생을 마칠 거야. 그리고 영원히 나를 떠나보낸 것을 후회하겠지. 그리 살고 싶어, 이 멍청아.”

말을 마친 사조가 분개하며 울었다. 빨개진 코끝과 그보다 더 빨간 목, 뜯어지고 갈라진 입술을 보며 나는 고개를 숙였다.

“할아버지한테 한 번은 잘 사는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어. 외로운 건 어쩔 수 없더라도, 그래도 가끔은 웃으면서 살다가, 그러다가 올게.”

“가면 끝이야. 여기에 너만 오는 줄 알아? 너 말고도 다른 사람들도 경계로 들어왔었어. 그중 너보다 잘난 이가 없을까.”

“그래도 사랑한 사람은 나밖에 없잖아.”

“앞으로도 없을까? 없을 듯싶어? 내가 너를 영원히 기다릴 듯싶어서 이리 자신만만한 거야?”

목에 핏대를 세운 사조가 우는 얼굴을 보이기 싫은지 뒤돌아섰다. 제 손으로 얼굴을 문지르며 한숨을 내쉬었다. 바다를 보며 서 있는 그의 뒷모습이 유난히 약하게 보였다. 이 외로운 섬에서 살며, 경계에서 오는 누군가를 죽음으로 인도하기 위해 있는 남자. 더 살아 보고 싶은 사람을 경계 밖으로 인도할 수 있는 남자. 그것이 내가 짐작한 사조였다.

울고 있는 그의 등으로 다가가 폭삭 안겼다. 사조는 내 손을 밀어내지 않고 바다를 바라만 보았다. 이 죽음과도 같은 바다에 갇혀 있는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사조는 눈물이 수습되지 않은 얼굴로 뒤돌아보았다.

“기다리지 않아.”

나는 사조를 놓아주었다. 사조는 내 눈, 코, 입을 기억에 새기듯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나는 나를 기억에 넣어 두려고 몸부림하는 사조를 바라보았다. 내 입술에 시선을 둔 사조가 자조하듯이 중얼거렸다.

“다른 이들보다 오래 걸린다 싶을 때, 그때 너를 보냈어야 했는데.”

사조는 업거나 손을 잡아 주지 않았다. 항구 쪽으로 걸어가면서 그는 자신의 마음을 덜어내는 것처럼 하얀 입김을 내불었다. 나는 그런 사조의 발자국을 신중히 따라서 걸었다. 바다를 거닐던 사조의 모습을 절대 잊지 않을 것이다. 사조가 훗날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하더라도, 혹여 나를 잊고 기다리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래도 나는 사조를 찾아갈 것이었다. 돌아와서 나는 그렇게 불행한 삶을 살지 않고, 할아버지가 자랑스러워할 만큼 강했고, 작지만 소소한 나만의 행복을 찾아서 살았다고, 하지만 사랑은 역시 너뿐이었다고, 그렇게 말해 줄 것이다.

사조에게 미안하지만 나는 미련이 많은 사람이었다. 삶에 미련이 많아서 떠나는 여자가 그에게 미련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면 안 되지 않나.

사조의 걸음이 선착장에 닿았다. 하얀 눈이 떨어지는 바다에 선 그가 나를 돌아보았다. 첫 만남처럼 시리고 무덤덤한 눈동자였다. 그제야 조금 겁이 났다. 정말 사조는 나를 잊겠구나. 나중에 만나도 미워하고 있구나. 나는 걸어가 사조의 옆에 섰다. 사조는 내가 옆으로 오자 얼굴을 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몸에 익은 습관이 사조의 손을 잡으려다가 말았다.

“여기에 사람이 자주 와?”

“아니.”

그는 짧게 대답을 하곤 바다를 무감정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나를 일처럼 처리하려고 하는 그의 생각이 보였다.

“위에서도 아래서도 처리하기 곤란한 사람이 이리로 오지. 하여 나는 그들에게 죽음을…….”

사조는 담담히 말하다가 고개를 숙였다. 내게 감정을 보이지 않으려고 하는 것만 같아 사조의 얼굴을 쳐다보지 않았다.

“저 사람들은 계속 있을 수 있는 거야?”

아랫동네로 들어가는 언덕 입구에 세 명이 쪼르르 선 게 보였다. 아주머니와 그의 작은 딸, 그리고 홍칠이가 나를 배웅하듯이 서 있었다.

“내 수하들이니까.”

“그랬구나.”

나는 사조의 옆에 서서 그들에게 웃어 주었다. 정작 보아 주었으면 하는 사조는 관심이 없었다.

“내가 바깥으로 가면 너는 날 볼 수 없는 거야?”

사조의 그 차가운 얼굴이라도 보고 싶어 애가 닳았다.

“내가 너를 왜 봐.”

“나 멋지게 살게. 사조를 여기에 잠시 두고 가는 만큼, 정말 멋있게 나이 들고, 많이 울지도 않고, 전과 다르게 살게. 그리고 미련 없이 너한테 올게.”

어떤 말이 비위를 거슬렀는지 모르겠지만 그는 차가운 비소만을 입에 머금었다. 지금 내가 하는 말은 전부 그에게 우습게 들리겠지.

“들어가.”

사조가 바라보고 있는 곳은 바다였다. 나는 바다로 들어가라는 말임을 알아들었으면서도 그를 보고만 있었다.

“지금 헤어지는 거야?”

“그리하면. 몇 년 더 머물다 가려고 했어?”

사조는 건조하고 감정이 마른 눈으로 나를 노려보곤 고개를 저었다.

“내가 싫어. 갈 거면 어서 가 버려.”

파도가 높이 뛰어오르고 있었다. 차가운 겨울 바다 위로 안개가 자욱했다. 정 살고프면 새까만 바닷속으로 들어가란다. 사조가 나를 위험에 빠트릴 리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두려웠다. 사조와 헤어지는 게 오늘일 줄은 몰랐다. 더 안아 주고, 더 사랑하고, 더 용기를 북돋아 주고, 그러고 헤어지고 싶었다. 하지만 사조도 알고 있을 것이었다. 떠나갈 이를 곁에 두고 하루하루 제 감정을 없애야 하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말이다. 이별은 아무리 좋은 말로 포장해도 오지 말라고 빌고 싶은 게 사실이었다. 내일이면 사조를 떠날 수 있을까. 모레면 사조가 납득할 만큼 그를 이해시키고, 나조차 모르겠는 이 마음을 그에게 설명하고 떠날 수 있을까. 왜 떠나야 하는지, 과연 저 삶에 내가 둔 미련은 무엇인지 말해 줄 수 있을까. 할아버지의 강하게 살라는 말을 지킬 수 있을지도 나는 확신 할 수 없으면서 바다에 섰다.

배는 필요 없던 것이었다. 이 파도를 헤쳐나갈 수 있는 것, 이 섬을 빠져나갈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나의 의지, 나의 손과 다리였다.

나는 바다로 뛰어들기 전에 그를 돌아보았다. 무표정한 얼굴에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사조는 아마 이 순간을 두려워했던 게 아닐까. 가는 날을 미루고 미루다가 나가고 싶어 하는 나를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첫눈이 왔다며 미소 짓는 그의 얼굴을 떠올리고 있을 때 거대한 파도가 나를 삼켰다.

파도가 눈을 가리기 전에 마지막으로 본 것은 내게 손을 흔들고 있는 아주머니와 아기, 그리고 꼬리를 흔드는 홍칠이, 하얀 눈이 쌓이고 있는 섬, 눈을 감아 버린 사조였다. 가지 마, 그 말이 파도에 밀려올 때 나는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바다에서 헤엄을 쳐 본 적은 없지만 두 팔을 써서 위로, 저 수면 위로 올라갔다. 검은 바다 뱃속에 사는 유일한 생명은 나뿐이었다.

“후아!”

수면 위로 올라와 섬이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섬은 나의 손보다 작아져 있었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을 작은 섬을 보자마자 흐느꼈다. 너무 작은 섬이었다. 사조가 저 섬에서 울고 있을 것을 생각하면 다시 돌아가고 싶었다. 파도도 섬이 있는 방향으로 몰아치고 있었다. 나는 흔들리는 몸을 돌려 팔을 뻗었다. 파도 반대 방향으로 어떻게든 팔을 휘저었다.

파도를 이기는 것, 그 물살을 거스르는 것은 온전히 자신의 몫.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다. 그럼에도 내가 바다에 빠져 죽지 않도록 응원해 주는 것, 잠시 쉬어 가는 섬이 되어 주는 것, 내가 그에게도 그런 존재가 되는 것, 그런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결국 나는 헤엄치고, 또 헤엄쳐 나만의 목적지로 떠나게 되겠지만 마음의 방향은 그와 같았다. 감히 영원 같은 그와 찰나를 꿈꿨으나 후회는 없었다.

입에 물이 들이칠 때마다 거품이 생겨났다. 어느덧 안개만이 지배하는 세상일 뿐이었다. 안개, 그리고 바다. 그곳에 혼자 떠 있는 나.

“사조야…….”

벌써 보고 싶은데 과연 이게 잘하는 짓일까. 그의 말대로 외로운 삶을 살게 될까. 나의 팔은 무엇 때문에 이렇게 나아가려고 애쓰는 걸까. 그때 미역 같은 검은 것이 발에 감겼다. 나를 아래로 훅 잡아당겼다. 바닷속으로 끌려간 나는 기나긴 어둠 속에서 숨을 토해 냈다.

“송정인 씨, 송정인 씨. 정신 드세요?”

“…….”

“선생님!”

그리고 눈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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