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죽일 집착남주가 이상해졌다-110화 (완결)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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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버레티안 제국은 다커스 제국이 멸망한 이후로 동대륙 유일의 제국이 되었다.
생각보다 단기간에 재건된 월든 공국이 대륙 서쪽의 방위를 전담해준 덕에 힘의 손실 없이 동대륙의 지배를 안정적으로 할 수 있었고 기세는 날로 강해졌다.
그러나 그런 만큼 칼릭스는 황제로서의 격무에 시달리며 쉴 새 없이 바빴다.
나와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을 내기도 어려워서, 같은 궁에 있어도 항상 그립고 보고 싶을 정도였다.
나는 황후의 업무를 마치고 나면 에릭스와 주로 시간을 보냈다.
에릭스는 아빠를 빼닮아서 어찌나 빠르게 쑥쑥 자라는지 크는 속도가 놀라울 정도였다.
네 살이었지만 또래 네 살보다 머리 하나는 더 있는 에릭스와 황궁 뜰에서 숨바꼭질을 하고 있었다.
내가 술래였다.
“에릭스, 이제 엄마가 찾으러 간다!”
한참을 감고 있던 눈을 뜨자 에릭스의 부드러운 흑발이 나무 위로 삐죽 솟아 있는 것이 한눈에 보였다.
에릭스 딴에는 숨는다고 숨은 것이었겠지만, 자신의 키가 얼마나 큰지 가늠이 안 된 모양이었다.
심지어 에릭스는 자기가 눈을 감으면 내가 자신을 못 볼 거라 생각한 것인지, 눈까지 꼭 감고 나무 뒤에서 숨을 죽이고 있었다.
나는 그런 에릭스가 너무 사랑스러워서 뒤에서 살짝 안아버렸다.
“앗! 어머니!”
에릭스는 놀람과 투정을 한꺼번에 보이면서도 내 품에 쏙 안겨 들어왔다.
기골만은 이미 장대한 네 살의 에릭스를 안아 올리는 것은 일찌감치 포기한 터라 나는 무릎을 꿇고 앉아 아이를 꼭 끌어안은 채 말했다.
“엄마는 에릭스가 어디 있든 찾을 수 있어. 제일 사랑하는 사람이라 엄마는 바로 알 수 있단다.”
“으음, 어머니.”
에릭스가 내 볼에 자기의 보드라운 얼굴을 비벼댔다.
이렇게 아이와 볼을 맞대고 사랑한다고 말하는 순간이 너무나 감사하고 행복했다.
그때였다.
“에릭스, 아버지도 안아주렴.”
칼릭스?
내 뒤에서 갑자기 칼릭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에릭스를 안은 팔을 풀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칼릭스가 환하게 웃으며 두 팔을 벌리고 있었다.
에릭스는 좀처럼 이 시간에는 볼 수 없는 아빠가 반가웠는지 한걸음에 칼릭스에게 달려갔다.
그들은 마치 약속이나 한 것처럼, 에릭스는 풀쩍 뛰어서 날아오르듯 칼릭스에게 안겨들었고 칼릭스는 마치 솜뭉치로 만든 가벼운 인형을 안아 올리듯 에릭스를 공중에서 끌어안고 있었다.
나는 그런 두 사람을 보면서, 행복을 눈으로 볼 수 있다면 바로 이 장면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 내 남편과 내 아들.
똑 닮은 두 사람이 내 앞에서 이렇게 환하게 웃고 있는 모습이 바로 행복이겠지….
“오셨어요? 에릭스와 숨바꼭질을 하고 있었어요.”
“그런 것 같더군. 좀 전부터 보고 있었어.”
그랬어?
전혀 몰랐는데… 어디서 보고 있었지?
“왔으면 얘기하죠.”
“그냥 두 사람을 보는 것도 좋아.”
칼릭스가 느끼는 감정도 내가 느끼는 감정과 똑같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은 여유가 있었나 봐요. 이 시간에 여기를 오시고.”
“여유가 있다기보다는 나도 같이 놀고 싶어서 왔어.”
그럼 그냥 땡땡이쳤다는 건가?
칼릭스의 말에 에릭스가 기분이 한껏 고조된 티를 팍팍 내며 칼릭스에게 물었다.
“우와, 아버지도 같이 숨바꼭질하시려고요?”
칼릭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렇게까지 여유가 있다고? 이상하네.
요즘 서대륙의 이민족들 사이에 벌어진 분란을 조정하는 문제로, 월든 공국에서 사절들이 와서 바쁜 것 같던데….
“그럼 아버지가 술래하셔요.”
에릭스가 신이 나서 칼릭스에게 술래를 하라고 했다.
그러나 칼릭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에릭스, 술래는 원래 키가 가장 작은 사람이 제일 먼저 하는 거란다.”
뭐? 그런 법칙이 어디 있어?
난 태어나서 처음 듣는 법칙에 어이가 없었지만, 칼릭스는 무슨 절대 법칙이나 되는 듯 엄숙하게 말하고 있었다.
“아이, 난 어머니랑 같이 숨고 싶은데….”
칼릭스의 품에서 내려선 에릭스가 갑자기 내게로 와서 내 손을 꽉 잡았다.
칼릭스의 눈이 에릭스가 잡은 내 손에 꽂혔다.
어쩐지 눈매가 날카로웠다.
왜 저래?
아빠가 돼서 말이야, 먼저 술래도 하고 그러는 거지. 유치하게!
“그래요, 오늘은 법칙을 반대로 바꿔서, 키가 가장 큰 칼릭스 님이 제일 먼저 술래하기로 해요.”
나도 에릭스의 손을 꽉 잡으며 말했다.
칼릭스가 그 순간 갑자기 팔을 벌리며 에릭스를 불렀다.
“에릭스, 아버지랑 저쪽으로 가서 잠깐 얘기 좀 할까?”
활짝 웃으며 팔까지 벌린 아버지를 보자, 에릭스는 신이 나서 칼릭스에게 다시 달려들었다.
칼릭스는 자신에게 다시 안겨든 에릭스를 안고는 저쪽으로 걸어가며 뭐라고 말을 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멀어져 버린 부자의 목소리는 내가 서 있는 곳에선 들리지 않았다.
뭐라는 거야?
둘이 무슨 얘기를 하는 거지?
한참을 얘기하던 부자는 내가 지루해질 때쯤 다시 내게로 다가왔다.
에릭스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어머니, 생각해보니 규칙은 지켜야 하는 게 맞는 것 같아요. 역시나 키가 제일 작은 제가 제일 먼저 술래를 하는 게 맞아요.”
뭐?
여태 둘이 가서 얘기한 게 그거야?
도대체 칼릭스는 애한테 뭐라고 한 거야?
나는 어이가 없어서 칼릭스를 바라보았지만, 칼릭스는 대견하다는 듯 에릭스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큰 가르침 주셨네, 큰 가르침 주셨어.
“그러면 아버지와 어머니가 먼저 숨어요. 제가 숫자를 셀게요.”
에릭스는 그렇게 말하곤 바로 눈을 감았다.
그런데 칼릭스가 눈을 감은 에릭스에게 더 황당한 규칙을 말했다.
“숫자는 10,000까지 세는 거란다.”
만?
이 아버지, 미쳤나 봐.
언제 만까지 세?
그러나 이미 눈을 감은 에릭스는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수를 세기 시작했다.
아니, 에릭스가 만까지 셀 수나 있나?
그러나 나만 어처구니가 없는 것인지, 부자는 전혀 문제가 없다는 듯 자연스러웠다.
“하나, 둘, 셋, 넷….”
뭐, 세다 말겠지. 그럼 숨어볼까?
어디에 숨으면 일부러 눈에 띄려고 한 티가 안 나면서도 에릭스의 눈에 잘 띌까 고민하며 주위를 둘러보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칼릭스가 내 손을 잡았다.
왜 이래?
그를 올려다보니 그는 다른 한 손을 자신의 입술 위에 올리고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하고 있었다.
왜, 왜?
내가 눈빛으로 물었지만, 그는 대답 없이 그저 나를 끌며 빠른 걸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어, 어, 어?
희한하게도 칼릭스는 뜰을 벗어나는 입구로 향하고 있었다. 여러 개의 입구 중에서 황후궁으로 나 있는 입구였다.
나는 몇 걸음을 따라가다 이윽고 에릭스에게 말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까지 와서는 그에게 물었다.
“어디 가요?”
“황후의 침실.”
“거기를 왜 가요? 숨바꼭질하다 말고?”
“침대 위에 숨으려고.”
“네에?”
무슨 말이야, 그럼 에릭스가 우리는 어떻게 찾아?
이 뜰 안에서도 잘 보이는 곳에 숨어야……!!!!!
어머나!
이 사람이 정말!
“칼릭스!”
나는 ‘님’자도 잘라먹고 그를 노려보며 외쳤다.
“쉿!”
그가 조용히 하라며 엄한 표정을 지었다.
“이게 무슨 짓이에요? 에릭스가 얼마나 놀라겠어요! 아니, 지금! 내가 에릭스랑 놀고 있었는데….”
“이미 에릭스는 그대와 많이 안았잖아. 이젠 내 차례지.”
“헐!”
뭐 이런!
“어차피 뜰에 있는 시녀들이 우리가 사라지는 걸 보고 있잖아?”
“그래서요?”
“에릭스가 10,000까지 세고 나면 시녀들이 알아서 에릭스랑 놀아줄 거란 말이야.”
“그게 무슨 상관이에요? 내가 내 아들이랑 놀아주고 싶은 건데!”
이 순 사기꾼 같은 아빠야!
내가 칼릭스를 흘겨보자 칼릭스가 똑바로 나와 눈을 맞추며 물었다.
“그럼 난 누구랑 놀지?”
“네?”
“난 딱 두 시간의 여유밖에 없어. 어렵게 낸 시간이야. 그 시간 동안 내가 황후가 아닌 에릭스와 숨바꼭질이나 하고 있을 수는 없다고. 그렇지 않아, 황후?”
꿀꺽.
나는 나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이상하게도 ‘황후’라는 호칭으로 계속해서 나를 부르는 그의 목소리에 새삼 어떤 엄격함이 깃들어 있었다.
쉽게 거스를 수 없는 단호함이….
“네, 생각해보니 그런 것 같아요.”
나는 이미 그렇게 대답하고 있었다.
아, 이상하게 매번 이렇게 되는 것 같은 기분인데….
“그럼 갈까, 린?”
다시 나를 황후가 아닌 린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칼릭스가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래, 에릭스와는 내일 또 놀면 되지 뭐.
나는 내 손을 잡은 칼릭스의 손을 힘주어 잡으며 조금 더 그의 보폭에 맞추어 빨리 걷기 시작했다.
내 마음도 이미 칼릭스와 함께 침실로 향하고 있었다.
그러나 조금 걷다 말고 칼릭스가 혼자서 중얼거렸다.
“두 시간뿐이라… 미안하지만, 도저히 그대의 속도로는 안 되겠군.”
“네?”
내가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 되묻는 동시에 내 몸이 공중으로 붕 떠올랐다.
그는 나를 안은 채로 지금까지보다 두 배는 빠른 속도로 걷기 시작했다.
“내려줘요. 다들 보잖아요.”
황궁의 모든 고용인들이 은근슬쩍 조심스럽게 그와 나를 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미안, 에릭스와 얘기하느라 이미 시간을 너무 많이 뺏겨서.”
그는 나를 좀 더 단단히 끌어안으며 대답했다.
어휴….
나는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이런 일들은 종종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이런 그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여러 번의 경험으로 알고 있었으니까.
발을 버둥거리던 나는 결국 포기하고 그의 목에 팔을 둘러 그에게 더 깊숙이 안겨들었다.
칼릭스가 살짝 웃는 것이 보였다.
나는 그의 품에 안겨, 그의 미소를 보며 문득 어떤 생각이 들었다.
나를 죽일 남주였는데….
정말이었구나.
이 남주 때문에 나는 정말 죽을 만큼 행복해졌구나.
내 입이 스르르 열렸다.
“사랑해요, 칼릭스.”
- 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