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귀, 매화-185화
본문
185. 무인은 무(武)로써 이야기하는 법
“뭣이? 한데, 지금 이 사달이 벌어질 때까지 어찌하여 아무런 말조차 하지 않았느냐!”
당가의 장로로 보이는 노인이 버럭 소리치자 소녀는 움츠러들며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유선은 장로를 말리며 입을 열었다.
“너무 겁박하지 마시지요. 저 아이 역시도 자신이 본 장면에 확신이 없기에 말을 꺼내기 조심스럽지 않았겠습니까?”
그녀의 말에 조금 흥분을 가라앉힌 장로가 기세를 누그러트리며 입을 열었다.
“자네 말이 맞네. 내 나잇값을 못 하고 못난 모습을 보였구나. 미안하다.”
장로의 정중한 태도에 소녀는 오히려 더욱 당황하며 입을 열었다.
“아닙니다! 어찌 이 아랫것에게 장로님께서 사과를 하십니까!”
“그나저나, 무엇을 보았는지 말해다오. 터무니없는 것일지라도 어쩌면 사건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실마리가 될 수도 있다.”
유선의 말에 소녀는 무언가 다짐한 듯 입을 열었다.
그녀의 말을 듣자 당가의 장로와 무인들은 고개를 저었다.
“터무니없는 억측이다. 네가 말을 꺼내지 못한 이유도 납득이 가는구나.”
화를 내었던 장로는 소녀의 말을 부정했다.
신빙성은 둘째 치더라도, 그러할 이유도, 명분도 없는 이가 어찌 정협맹에서 찾아온 방문객을 납치하겠는가.
하물며 그자가…….
“제 생각에는 조금 다릅니다.”
소녀의 말을 듣고 한참을 생각하던 유선은 고민을 마치고 입을 열었다.
“등잔 밑이 어두운 법이지요. 당가에 속하신 여러분이시기에 오히려 생각하시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하물며, 그러할 목적도 없다 여기실 것이니까요.”
유선의 말에 당가의 무인들이 답했다.
“말씀을 가려 하시오! 우리는 당(唐)이오! 명예와 그 핏줄을 무엇보다 중요시 여기는! 그런 우리가 손님을 지키지 못한 것은 커다란 불명예요, 하물며 그 용의자가 그분이라니. 그 말이 사실이라면 당의 핏줄을 받은 그분께서 당가의 명예를 모욕하기 위해 그러한 행동을 한 것이 되는 것이오!”
그의 말은 합당한 것이었다.
상식적으로라면 그러한 행동을 할 이유가 만무했다.
하지만 유선은 확실할 수 있었다.
‘상식적이지 않은 경우이니 말이지…….’
“우선은 서신에 적혀 있는 장소로 가시지요. 별다른 일은 없을 것입니다. 제가 동행하겠습니다.”
정협맹의 무사로서 사천을 방문한 수영이 납치를 당했다.
그리고 적우는 자신의 무장을 챙겨 개인적인 일을 해결하러 떠났다.
마침 방문한 당가에는 그녀의 친우인 소명이 자리를 비웠다.
유선으로서 그것들은 이해할 수 없는 어처구니없는 사건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당가의 하인이 말한 용의자를 듣는 순간 유선은 사건을 제대로 이해하고 동시에 안심할 수 있었다.
겉으로는 침착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유선의 속마음은 들떠 있었다.
무영과 선혜, 그리고 세진에게 이 이야기를 풀어낼 생각으로.
***
“결국 이리되어 버렸구나.”
적우는 작은 한숨과 함께 혼잣말을 뱉으며 익숙한 건물의 문을 두드렸다.
수영이 납치되었다는 서신에 위치한 발신자와 적우를 소환한 장소.
그곳에 찍힌 직인을 보자마자 적우는 그것을 누가 보냈는지, 어째서 이런 짓을 하였는지 알 수 있었다.
이것은 사내답지 못했던 자신의 업보였으며, 자신의 망설임이 낳은 결말이었다.
아니, 아직 이야기는 끝이 나지 않았으니 결말이라 부를 수는 없을 것이다.
“도착하였습니다, 어르신. 그러니 지금이라도 수영, 그 아이는 돌려보내 주십시오. 저와의 개인적인 일이 아닙니까? 부디 당가와 정협맹의 입장을 고려하여 주십시오.”
적우의 말에 대답을 대신하는 날카로운 비도가 그의 발 앞으로 날아들었다.
서슬 퍼런 날붙이에 찌걱이는 균열.
담겨 있는 내력을 버티지 못한 비도는 그 날카로운 파편을 사방으로 날리며 폭발했다.
당가에 손꼽히는 고수들만이 사용할 수 있다는 비전, 폭뢰침(爆雷針).
자신을 환영하는 격한 인사를 적우는 침착하게 막아내며 다시 입을 열었다.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어르신. 하나, 부탁드린 것은 다시 생각해 주시길 바라겠습니다. 어르신께서도 저의 개인적인 일에 정협맹과 당가, 그리고 무당이 엮이는 것은 부담이시지 않습니까. 부디 노여움을 푸시고 저와 이야기하시지요.”
문답무용(問答無用).
적우의 정중한 부탁에도 상대는 말없이 살초를 뿌려댔다.
코끝을 찌르는 듯한 극독이 대기를 타고 퍼져 적우의 주변을 물들였다.
눈에 보일 정도로 지독한 독무에 적우는 허리춤에서 검 한 자루를 뽑아 들었다.
가볍게 휘두르는 검.
그 안에 담긴 내력이 검풍(劍風)을 일으켜 건물 안의 독연을 날려 보냈다.
수영은 안전할 것이다.
상황이 이리될 것을 미리 예측하고 해독제를 먹여놓았을 테니.
하나, 적우는 이 상황을 타개할 마땅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상대는 대화를 거부하고 있다.
그렇다고 함부로 검을 휘둘러 그를 제압할 수도 없었다.
상황이 더 최악으로 치닫기 전에.
적우가 우려하는 그 순간이 오기 전에 해결법을 찾아야만 했다.
“…이곳에서 마주치게 될 줄은 예상하지 못했소.”
적우가 그리워했던 목소리.
그와 동시에 적우가 우려했던 최악의 순간.
사천당가의 가주, 독왕 당소명은 적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실은 알고 있었다.
어쩌면 내심 바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나, 이런 방식은 아니었다.
적어도 오랜 연인과의 재회는 말이다.
적우는 최대한 감정을 숨기며 입을 열었다.
“정협맹의 부맹주, 적우. 사천당가의 가주이신 당소명 대협을 뵙소이다. 그간 무탈하셨소이까?”
정중함이 담긴 적우의 말에 소명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무탈하였느냐 물었소? 어이가 없는 안부 인사로군. 정녕 내게 할 말이 그것뿐이오?”
어찌 할 말이 그것뿐이겠는가.
적우는 말하고 싶었다.
보고 싶었다고.
그대와 이렇게 마주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고.
힘껏 껴안고 체온을 나누며 그간의 그리움을 말하고 싶었다.
하나, 그것은 더 이상 적우에게 허락된 것들이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을 수도 없이 기다려 주었고, 기회를 주었다.
하지만 그는 머뭇거리며 그녀의 손을 붙잡지 못했다.
이미 힘들어하는 그녀에게 자신의 짐까지 함께 들릴 수 없었기에.
그는 소명을 사랑했던 사내임과 동시에 정협맹의 부맹주였으며, 몰락한 무당을 재건하는 것에 목숨을 맹세한 무인이었다.
사랑하는 여인에게는 항상 넓은 등만 보여주고 싶은 것이 사내의 마음인 것을.
적우는 소명이 피워낸 밝고 아름다운 웃음꽃이 자신의 어둠으로 인해 시들기를 원치 않았다.
그렇게 적우는 자신에게 건네진 소명의 손을 놓치고 말았다.
그리고 이미 떠나 버린 그녀의 손길은 이제 되돌릴 수 없는 후회로 남아 추억이라는 이름으로만 포장될 뿐이었다.
그런 그에게 지금 허락된 말은 정협맹의 부맹주로서 당가의 가주에게 건네는 안부 인사가 전부일 것이다.
오래전 헤어졌지만, 여전히 사랑하며 이별 중인 적우에게는 말이다.
“너는 항상 그런 식이야…….”
소명답지 않은 감정적인 목소리는 작게 떨렸다.
“항상, 그런 식으로 매번 도망만 치지. 그것이 최선이라고 여기면서 말이야. 말로는 그것이 나를 위한 것이라고, 강호를, 그리고 모두를 위한 것이라고 여기면서 정작 네 안에 감춰둔 중요한 마음은 드러내지 않아. 나는 기다렸어. 네가 언젠가 네 안에 담긴 슬픔도, 혼자 끙끙 앓는 고통도 내게 꺼내주기를 말이야.”
소명 역시도 알고 있었다.
미모와 무공만큼이나 현명함과 지혜로움으로 강호에 이름이 드높은 그녀가 어찌 모르겠는가.
적우는 늘 최선을 다했다.
그의 선택은 늘 합리적이었고, 또 이성적이었다.
하지만 그 모든 순간에는 정협맹의 부맹주만 있을 뿐, 적우 본인을 위한 선택은 존재하지 않았다.
소명은 그것이 싫었다.
그가 홀로 감내하던 아픔과 어깨를 짓누르던 책임을 함께하길 원했지만, 그 순간에도 적우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으로 그것을 거부했다.
그것이 그들이 이별한 이유였고 오늘까지 가주로서, 그리고 맹의 부맹주로서 서로를 대할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소명은 듣고 싶었다.
그의 목소리로 다정하게 말하는 보고 싶었다는 말을.
소명과 이렇게 마주하며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는 말을.
그렇게 그리움이 묻어나는 말들에 자신 역시 그러했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의 넓은 가슴에 안겨 그의 심장 소리를 들으며 그간의 그리움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한데, 무탈하였느냐니.
이 상황까지 와서, 자신을 당가의 가주로서 대하는 적우가 싫었다.
여전히 그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이었다.
헤어진 연인을 대하는 지금 이 순간조차도.
그렇기에 소명은 한 걸음 그에게 다가갔다.
말도 안 되는 투정일지라도, 터무니없는 떼를 쓰는 것일지라도 상관없었다.
아직 늦지 않았다면, 그리고 그의 마음에 여전히 자신과 함께했던 그 순간이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다면 이번에는 자신이 먼저 다가가리라.
더 이상 바보같이 그가 돌아올 것을 기다리지 않고 소명이 그에게 다가갈 것이다.
수영이 당가에서 납치되었다는 서신을 받아 들었을 때.
그것이 가리키고 있는 장소가 이곳이었을 때.
소명은 직감적으로 느꼈다.
어쩌면 오늘 그를 마주하게 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
그리고 만약 그렇게 된다면, 운명이 그것을 허락한다면 오늘이야말로 그들의 이야기에 마침표를 찍을 것이다.
그리고 그 마침표가 결말을 의미할지, 혹은 다음 장을 위한 쉼표를 의미할지는 적우의 대답에 달려 있을 것이다.
“칼 뽑아.”
무인은 무(武)로써 이야기하는 법.
소명은 거친 기운을 내뿜으며 소매 속의 암기와 비도들을, 그리고 챙겨 온 독을 흩뿌렸다.
적우는 소명의 말에 마지못해 검을 고쳐 쥐었다.
비록 헤어졌음에도 아직 이별 중인 그에게 소명의 청은 거절할 수 없는 것이었기에.
***
과거 정협맹의 오걸이라 불리며 한때는 동료였던, 그리고 지금은 강호의 십대고수로 꼽히는 두 사람의 결투를 지켜보는 두 개의 시선.
수영은 마른침을 삼키며 눈앞에 펼쳐질 장면을 기대하고 있었다.
절대고수들이 진심으로 펼치는 대결이라니.
무의 길을 걷는 무인으로서 그런 대결을 두 눈으로 직접 보는 것은 하나의 기연(奇緣)이나 다름없었다.
손에 땀을 쥐며 다음 장면을 기대하던 수영의 귓가에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참, 오래도 질질 끄는구나. 후딱 싸우고 화해해서 진도나 나갈 것이지…….”
혀를 차는 노인의 말에 수영이 웃으며 말을 건넸다.
“강냉이라도 튀겨서 가져올 걸 그랬습니다. 그냥 보기에는 너무 아까운 광경입니다.”
순진함이 담겨 있는 수영의 말은 노인의 목소리가 아닌, 부드러운 여인의 목소리가 대신 답했다.
“그럴 줄 알고 내 미리 챙겨 왔느니라. 여기 한 줌 덜어 가거라.”
갑작스럽게 들려오는 여인의 목소리에 수영이 놀란 목소리로 답했다.
“청룡대주를 뵙습니다!”
수영이 예를 표하자 유선은 손사래를 치며 답했다.
“되었다. 나도 오늘 저 둘의 벗으로서 온 것이니.”
유선의 시선은 수영에서 그 옆의 노인을 향해 움직였다.
“결국 화끈하게 일을 해결하기로 결정하셨군요. 역시 어르신입니다.”
노인은 코웃음 치며 그녀에게 답했다.
“흥, 이제는 예마저 표하지 않는 게냐.”
유선은 미소를 지으며 노인의 투덜거림에 답했다.
“저희를 딸자식처럼 대한다고 말씀하신 것은 어르신이 아니셨습니까? 애초에 이 모든 사달은 어르신께서 벌이신 것인데. 그저 심술 난 딸아이의 투정이라 생각해 주시지요.”
노인은 유선이 능글맞게 대답하자 고개를 저으며 손바닥을 내밀었다.
“강냉이나 좀 나눠다오. 안 그래도 내 죗값을 치르러 오늘 각오하였으니…….”
유선이 웃으며 노인에게 가져온 강냉이를 나눠주려 할 때, 그녀를 뒤따라온 당가의 무인들이 노인을 향해 놀란 목소리로 외쳤다.
“태상가주님을 뵙습니다!”
사천당가의 태상가주, 당천두는 눈살을 찌푸리며 유선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