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죽일 집착남주가 이상해졌다-4화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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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기야 여자는 리온을 거절하고 자신에게 춤 신청까지 했다.
‘브록버크 공작의 딸이 리온의 춤 신청을 내 앞에서 거절하고, 나한테 춤을 추자고 한다?’
브록버크 공작이 어떤 자인가.
공작은 실력과 인품, 그리고 그 세력으로 인해 에버레티안 제국에서 가장 신망이 두터운 인물이었다. 그랬기에 그가 황후와 손을 잡아버린 것은 황태자인 자신에겐 뼈가 아픈 손실이었다.
그런데 공작이 황후와 손을 잡은 이유가 바로 저 딸 때문이라는 것은 이미 공공연히 알려진 사실이었다.
공식적인 발표는 없었지만 저 여자는 리온과 결혼을 앞두고 있다고 했다.
그런 여자가 리온을 거절하고 자신에게 춤을 추자 한 것은 그야말로 이해가 안 가는 상황이었다.
그 이후에도 그녀의 시선은 줄기차게 자신에게 머물러 있었다.
그녀의 끈질긴 시선을 참아주는 데 한계를 느끼던 찰나, 이든 다커스 황태자가 도착했다.
여자는 뭐에 놀란 것인지 이상하고 얼빠진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여자를 포함해서 사람들의 이목이 이든에게 집중됐을 때, 칼릭스는 조용히 연회 홀을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이 정도면 충분히 황태자로서 예의와 의무는 지킨 셈이었으니까.
한 가지는 제대로 못하고 말았지만.
이든 다커스가 에버레티안을 방문한 표면적인 이유는 철광석 거래에 관한 협상이었다. 그러나 칼릭스는 그 외에 이든 다커스의 잦은 외유와 에버레티안 제국 내에서의 장기 체류에 어떤 다른 목적이 있지는 않을까 의심하고 있었다.
그랬기에 그는 이 연회에 이든의 속내를 파악해 보려는 목적을 가지고 참석했었다.
그러나 뜻밖의 이상한 복병인, 옆의 여자의 부담스런 눈빛이 도저히 그를 더 버틸 수 없게 만들었다.
여자의 목적이 칼릭스 자신의 퇴장이었다면 여자는 제대로 성공한 셈이었다.
*****
황궁 연회에서 리온에게 이전과는 180도 달라진 태도로 대했음에도 불구하고, 리온과 케일린이 키워온 10여 년간의 사랑이 워낙에 공고했던 모양이었다.
연회가 끝나고 며칠 뒤, 약혼을 언제 발표하는 게 좋겠냐는 리온의 편지가 집으로 도착한 걸 보면 말이다.
아니면 내 태도에 놀란 리온이 더 급하게 편지를 보낸 것일 수도 있고.
어찌 됐든 그의 편지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나는 아버지에게 달려갔다.
“아버지, 전 리온 대공과 결혼하지 않을 거예요.”
아버지는 무언가를 잘못 들은 것인가 하고 눈만 껌뻑거리시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내게 되물으셨다.
“린, 그게 무슨 말이냐? 너와 리온 대공의 결혼은 이미 기정사실이지 않으냐?”
결혼한 것도 아닌데, 기정사실이 어디 있어!
그 전개 내가 바꿀 거라고.
“마음이 바뀌었어요. 저는 리온 대공을 사랑하지도 않고 그를 황제로 만들고 싶지도 않아요.”
이번에는 아버지의 눈이 제대로 커졌다.
그는 내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린. 몸이 안 좋으니? 아비는 도대체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하루아침에 대공을 사랑하지 않는다니. 진심이… 아니지? 대공과 무슨 일이 있는 거냐?”
그래, 내 상태가 이상한 게 아닐까 의심할 만도 하지.
하루아침에 마음이 변했다고 하니.
그래도 별수 없었다.
“칼릭스는 저를 좋아해요. 그리고 저도 그를 좋아할 거예요.”
“린!”
아버지는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격한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시며 사색이 되셨다.
흥분하신 건지 매우 높은 톤이었다.
바로 얼마 전까지 리온을 사랑한다고 하다가 대뜸 칼릭스를 좋아한다고 하니 당연한 반응이긴 했다.
그러나 나는 얼굴빛 하나 바꾸지 않고 차분하고 단호하게 말했다.
“칼릭스 황태자가 저를 좋아해요. 저도 그를 황제로 지지하고 싶고요.”
그러나 아버지는 얼토당토않은 소리를 들은 표정이었다.
하긴, 칼릭스는 케일린을 향한 애정과 집착을 공공연히 드러내지 않았다.
속으로만 자신의 외사랑에 괴로워하고 점차 집착을 키워갔을 뿐.
작가인 나니까 알지, 다른 이들은, 심지어 케일린조차도 그에게 죽임을 당하기 직전에야 칼릭스의 마음을 알았을 지경이었으니.
당연히 칼릭스의 마음을 전혀 모를 내 아버지, 브록버크 공작에게 내 말은 뜬금없게 들릴 수밖에 없었다.
“린, 정말 어디가 아픈 게 아니니?”
케일린은 시골에서 요양을 해야 했을 정도로 몸이 약했다.
아버지는 몸이 약한 딸이 급기야 정신까지 아픈 건가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아니요! 아버지, 그런 거 아니에요.”
“린!”
나는 내 말을 막으려는 아버지에게 개의치 않고 계속해서 말했다.
“전 칼릭스를 지지해요! 애초에 아버지께서 리온 대공을 지지하기로 한 것도, 저 때문이었잖아요. 그러니 이제 칼릭스를 지지해 주세요. 칼릭스가 황제가… 될 거라고 저는 믿어요.”
이미 알고 있는 것이지만 그렇게 말해 봐야 믿지도 않을 테고, 오히려 정말 내 정신 상태를 걱정할 테니 이 정도로밖에 말할 수 없었다.
내 강한 어조에 아버지는 무언가를 말하려다 입을 꾹 닫아버리셨다.
그러나 아버지가 마침내 침묵을 깨고 꺼낸 말은 내 기대를 한참 벗어났다.
“린, 리온 대공과의 협약은 이미 시작되었다. 돌이킬 수 없어. 수레는 수레바퀴가 서로 맞물려 굴러가는 거야. 이미 수레의 모든 바퀴가 굴러가기 시작했단 말이다.”
!!!!!
모든 바퀴? 그런 게 어디 있어? 앞으로 2년이나 뒤에 일어날 일인데 왜 못 돌이켜?
아직 여유가 있잖아. 계획을 바꿀 시간이 많다고.
케일린과 칼릭스의 관계와 그들 사이의 사건은 남주의 트라우마를 만들기 위한 초반부 내용이었기에 대략적인 사건들을 쓰긴 했으나 세세하게 쓰지는 않았었다.
그랬기에 칼릭스를 상대로 한 모반의 시작이 되는 케일린의 아버지와 황후 사이의 비밀 협약이 언제부터 시작되는지 명확히 알 수는 없었다.
그저 결혼 이야기가 오갈 때 정도쯤이라고 했다.
그런데, 벌써 시작됐다고?
이미 돌이킬 수 없다고?
말도 안 돼!
“아니요! 수레가 망가지든 말든, 우리가 그 수레바퀴가 돼서는 안 돼요! 무조건 계획을 바꾸셔야 해요.”
무조건이야. 무조건 칼릭스를 지지해야 해. 죽지 않으려면 바꿔야 해!
난 흥분하여 외치듯 말했으나, 아버지는 거기서 입을 닫아버렸다.
나는 마지막으로 말했다.
“저는 칼릭스를 지지해요. 그러니 아버지는 황후 세력과 결별하셔야 해요. 제 말을 믿으세요.”
“.......”
왜 아무 대답이 없으시지?
돌이켜야 하는데….
아버지는 끝까지 침묵하셨다.
나는 그 침묵이 무서웠다.
내가 쓴 소설 속이라 빙의에 신속하게 적응했고, 공작이 내 아버지라는 것에도 빨리 익숙해지려 노력해왔는데, 완고한 반대에 부닥치니 새삼 붙어가던 정이 떨어지려고 했다.
*****
아버지와 기가 막히는 대화를 하고 방으로 돌아온 나는 머리가 더 복잡했다.
죽지 않기 위한 계획을 실행할 시간이 충분하다고 생각했었는데 빙의한 시점이 이미 칼 맞기 위한 스텝을 착실히 밟기 시작한 이후라니.
게다가 아버지가 저토록 완고하게 원래의 계획을 고집하리라는 것도 생각지 못했던 반응이었다.
어떡하지….
어떻게 해야 안 죽고 살아남지?
칼릭스가 나를 사랑하고 내가 그를 사랑하는 척한다 하더라도, 내 아버지가 칼릭스를 쳐내려는 반역을 일으킨다면…….
사랑한다고 해서 반역자의 딸을 살려줄 수 있을까?
머릿속이 복잡하던 그때,
‘똑똑’
누군가가 방문을 두드렸다.
하녀겠거니, 하며 들어오라고 말하기가 무섭게 문이 열렸다.
빨간 머리가 인상적인 상당히 예쁘고 귀엽게 생긴 여자가 얼굴이 빨개진 상태로 내 방으로 들어왔다.
누구지?
하녀가 아닌 게 분명한 내 또래 여자의 등장에 상황 파악을 미처 하기도 전에 그 빨간 머리의 입이 열렸다.
“린!! 얼마 만이야!!!!”
그리고는 나에게 돌진해 와서는 나를 덜컥 안아버렸다.
“린. 정말 보고 싶었다고. 나 어제야 에버렌에 돌아왔어. 너도 내가 보고 싶었지?”
고민하던 것도 잊을 만큼 격하고 요란스런 여자의 행동에 나는 순간 어안이 벙벙했다.
그렇지만 빨리 뭐라고 반응을 해야 했다.
나를 잘 아는 사람인 것 같은데, 모르는 티를 낼 수는 없었다.
빨간 머리라….
“에이비?”
마침내 나는 인물 관계도에서 내 오빠인 루크의 옆에 조그맣게 써놓았던 여자 이름이 떠올랐다.
빨간 머리는 일단 그 여자밖에 없었으니까.
“린. 너무너무 보고 싶었다고. 아버지가 괜히 여행에 나를 데려가시는 바람에, 이게 얼마 만이니!”
에이비라고 불러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걸 보니 내가 제대로 맞춘 모양이었다.
얘는 소설 속에는 등장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설정을 위해 이름과 외모만 정해둔 내 오빠 루크의 약혼녀, 에이비였다.
그냥 설정상의 인물이었는데….
맞다! 케일린의 친구라는 설정이기도 했었지.
<에이비 달튼 - 케일린의 친구, 루크의 약혼녀, 빨간 머리의 귀여운 외모. 거대 상단을 가진 부유한 달튼 후작가의 막내딸>
이게 내가 쓴 전부였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친하다니.
자체 발생 부대상황인가?
가까스로 빨간 머리의 정체를 파악한 내가 조심스레 말했다.
“에이비. 정말 오랜만이다. 보고 싶었어, 나도.”
“그러게 말이야. 나 없는 동안 리온 대공하고 진도는 좀 뺐니?”
아….
얘도 나를 리온의 연인으로 알고 있구나.
이렇게 케일린과 리온 대공이 연인으로 기정사실처럼 소문이 날 정도였으니, 내가 갑자기 마음을 바꿨다고 한들 쉽게 믿어지진 않겠구나.
“아… 그냥….”
진도야, 빼긴 뺐지. 손절하는 진도지만.
나는 대충 말을 얼버무렸다.
굳이 또, ‘리온 대공은 아니다’라고 말하기도 피곤했다.
그러나 막상 질문을 한 에이비는 내 대답에 큰 관심은 없었던지 다른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이번 주 금요일이다!”
“응?”
이번 주 금요일이라니? 뜬금없이 무슨 말이지?
내 어리벙벙한 반응을 보며 에이비기 눈살을 찌푸렸다.
“야시장 말이야. 금요일이 보름이잖아. 설마 잊고 있었어? 이번에 같이 가기로 했잖아. 내가 너랑 가기로 한 약속 지키려고 아버지를 얼마나 닦달해서 돌아온 건데!”
야시장? 그건 또 뭐니?
이제는 내가 모르는 설정과 부대상황에 익숙해져야 할 것 같았다.
처음 들어보는 야시장까지 이렇게 자연스럽게 나오니.
보름에 열리는 시장인가?
“아… 그렇구나.”
일단은 아는 척 대답했다.
“그날은 일찍 출발하자. 여러 권 살 수는 없으니까 못 사는 건 거기서라도 최대한 많이 보고 와야지.”
여러 권? 책 말하는 건가? 도대체 무슨 말인지.
“아, 그렇지. 최대한 많이 봐야지.”
나는 얼렁뚱땅 대답했다.
“치마폭에 숨겨서 사 오는 데는 두 권이 최대치잖아. 아, 내가 좋아하는 작가님 신작이 나왔으려나?”
치마폭에 숨겨서 사 온다고? 신작?
잠깐, 잠깐!
이거 뭐야?
설마……. 그런 책?
나는 에이비를 보며 슬쩍 말해보았다.
“치마폭에 왜 숨겨? 그냥 당당히 들고 와도 되지.”
에이비의 눈이 왕방울만 해지더니 나를 찰싹 때리며 말했다.
“린, 너 미쳤니? 네 아버지랑 오빠는 널 뭔 베이비 린으로 아는데, 네가 살색 가득한 책 보면 어지간히도 오오, 우리 어덜트 린… 하겠다! 정신 차려, 야!”
오호라! 맞구나! 19금!
이 세계에도 그런 ‘좋은’ 게 있다는 말인가? 살색 가득? 그럼 그림책인가?
“그림책을 사는 게 좋겠지?”
조심스레 에이비에게 물어보았다.
나는 그림이 좋거든.
“너 좋을 대로 해. 나는 이미 작품성이 높은 건 다 소장하고 있어서…. 사실 이 언니는, 이제 이론 말고 실전에 주력할 시기지.”
엥?
이론 말고 실전?
무슨 말일까?
이론은 책, 실전은…… 헐!
나는 눈이 커다래져서 에이비를 쳐다봤다.
그런 나를 보며 에이비가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린, 너도 이제 책은 볼 만큼 봤지 않니? 리온 대공과 실천 단계로 넘어가야지…. 공부를 했으면 실생활에 접목을 시켜야지.”
아이고… 얘가 아주 사람 잡네.
안 되겠네.
한 명 한 명, 대충 넘어가지 말고 내가 더 이상 리온 대공과 사랑하는 사이가 아니라고 말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이비. 그 리온 대공 말인데, 나는….”
그러나 내가 미처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에이비는 또 자신의 말만 쏟아냈다.
“너, 혹시 책 갖고 들어오다가 네 아버지랑 오빠한테 걸려도, 나랑 같이 야시장 간 건 비밀로 해라.”
하….
그래도 결혼할 남자랑 시아버지 될 사람은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네.
나는 에이비의 입단속에, 내가 리온과의 관계에 대해 하려던 얘기는 잊어버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