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귀, 매화-180화
본문
180. 저는 틀렸습니다, 어르신
“먼 길 오느라 고생이 많으셨소.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소?”
가슴에 당(唐)의 문자가 아로새겨진 무복을 입은 사내가 말을 마치고는 전각의 안쪽으로 달려갔다.
“알겠소.”
문중은 익숙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수영 역시도 과거에 겪어보았기에 잠자코 때를 기다렸다.
하지만 사천에, 그리고 이곳에 처음 오게 된 광무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상황을 파악하지 못했다.
전각의 출입구를 지키던 무인이 내부로 향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기다리고 있던 세 사람의 귀에 커다란 사자후(獅子吼)가 들려왔다.
“염병할, 왜 하필 지금이란 말이냐! 이제 곧 완성될 것 같은데!”
끔찍한 살기와 맹렬한 적의.
문중과 수영은 이마저도 익숙하다는 듯 잠자코 기다렸다.
오직 광무만이 ‘무언가 잘못된 것인가’ 혹은 ‘와서는 안 될 곳을 온 것인가’와 같은 걱정들로 표정이 어두워져만 갔다.
낮은 목소리로 투덜거리는 욕설, 그리고 이어지는 여러 명의 한숨 소리.
그리고 다시 울려 퍼지는 노호(怒號).
약간의 소란이 지나간 뒤, 전각을 지키던 무인이 돌아와 문중을 향해 말했다.
“오래 기다리셨소이다. 이걸 복용하시고 들어오시오.”
문중은 익숙한 듯 무인이 건네는 작은 영단들을 받아 수영과 광무에게 나누어준 뒤 남은 하나를 입으로 가져갔다.
수영도 그것의 정체를 이미 알고 있었기에 바로 입안으로 털어 넣었다.
광무는 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눈치껏 수영과 문중이 하는 것처럼 건네받은 영단을 한 입 베어 물었다.
독약이 틀림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통증에 가까운 쓴맛이 식도를 통과하며 위장에 닿을 때까지의 경로를 이렇게 선명히 핥을 리 없었다.
하지만 이곳에서 티를 내었다가는 크나큰 실례일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기에 광무는 두 눈 딱 감고 인내했다.
“괜찮으시오?”
광무는 자신을 향해 묻는 당가의 무인에게 고통을 참아내며 답했다.
“아, 소인은 괜찮소이다. 잠시 당황했을 뿐이오.”
대답을 들은 무인은 조금 놀랐다는 듯이 말했다.
“실로 굉장하시구려. 보통의 방문객들은 당과(糖菓)를 하나만 더 달라고 요청하는데, 그것을 생으로 버틴다니… 본가의 어린 제자들도 소협처럼 강한 정신력을 지녔으면 좋겠구려.”
당과라니.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감았던 두 눈을 뜬 광무는 당과를 양쪽 볼에 물고 있는 수영과 문중을 바라보았다.
그제야 광무는 언젠가 과거에 문파의 어른들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독을 다루는 사천의 당가 녀석들은 때때로 전각에 독무를 뿌리곤 한다. 새로 조합해 낸 독이 대기로 퍼지는 속도와 범위를 계산하기 위해 실험을 하는 것이지. 혹여나 네가 언젠가 당가에 방문하게 되었을 때, 입구를 지키는 이가 영단을 권하거든 주저 말고 삼키거라.’
광무는 자신이 삼킨 영단의 정체가 전각의 대기 중에 퍼진 독에 중독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해독제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만큼이나 중요한 이야기가 뒤늦게 떠올랐다.
‘문제가 있다면… 그 해독제는 네가 겪어본 그 어떤 것보다 쓴맛일 게다. 그놈들도 그것을 알고서 당과를 건네줄 것이야. 절대로 부끄러운 일이 아니니 쓴맛이 느껴지지 않을 때까지 당과를 입에 품고 있거라. 뭐, 당가의 그 독종들이 그러한 실험을 하는 것이 자주 있는 일은 아니니 그 끔찍한 맛을 느낄 일은 살면서 없을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어르신, 사람이 언제 죽는다고 생각하십니까? 독약만큼이나 쓰디쓴 해독제를 먹었을 때?
정답입니다… 정말 좋은 인생이었습니다.’
사경을 헤매는 광무는 닿지 않을 대화를 시도했다.
그를 바라보던 무인은 감탄했다.
당가의 핏줄을 물려받고 수많은 독을 가까이하는 그들도 해독제의 끔찍한 맛을 버텨내지 못했다.
그런데 외인(外人)이 그것을 버텼다.
마치 아무 일 없다는 듯이.
‘과연, 오랜 노력 끝에 단련한 근육은 배신하지 않는구나.’
당가의 무인은 알지 못했다.
‘광무야, 일어서라. 상대는 당가의 녀석들이다. 딱히 무언갈 하지 않았지만 어쨌든 일어서라!’
‘저는 틀렸습니다, 어르신. 곧 따라가겠습니다.’
광무가 이런 어처구니없는 환청을 듣고 있는 것을 말이다.
***
화려한 비단의 옷감, 그 위에 금실로 수놓아진 무늬는 조명을 받아 더욱 빛을 내고 있었다.
서리가 내린 듯 하얗게 세어버린 머리칼은 고급진 동백기름이 발라져 우아한 은빛을 자아내고 있었다.
술잔을 거머쥔 손가락 사이사이마다 끼워진 가락지들은 못해도 집 한 채의 가격을 지닌 보석들이 박혀 있었다.
보통의 객잔이나 기루에서도 찾기 힘들어 황제만이 그것을 원할 때마다 마실 수 있다고 전해지는 술, 금존청(金尊淸)까지.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노인에게서 흐르는 여유와 기품은 감히 신분을 예측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네 이름이 무엇이더냐.”
그의 술잔에 술을 따라주던 기생은 매혹적인 미소를 그리며 답했다.
“향이라고 하옵니다, 나리.”
그녀의 대답이 만족스럽다는 듯 노인은 껄껄대며 빈 술잔을 들어 올렸다.
“얼굴만큼이나 이름도 참 곱구나, 클클클. 한잔 따라주겠느냐?”
“여부가 있겠사옵니까.”
향이라 자신을 소개한 기생은 노인의 술잔을 채우며 물었다.
“한데, 나리. 함께 오신 무사분께서는 술을 하지 않으십니까?”
식탁의 맞은편에 앉아 있는 무사를 힐끗 훔쳐보는 향이의 눈빛을 읽은 노인이 웃으며 물었다.
“저자가 마음에 든 것이냐? 클클클, 그렇다면 향이 네가 직접 권하는 것이 어떠하냐?”
노인의 말에 무사의 옆에 있던 기생이 투정을 부리며 말했다.
“아이참, 나리! 이 무사분은 제가 점찍어두었어요. 저는 예전부터 이렇게 훤칠하고 강인한 무인을 동경해 왔었거든요. 그러니까 향이 너도 단념하고 나리께 집중해!”
두 여인의 은근한 기 싸움에 노인은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자네에게 여복(女卜)이 넘치는구려! 기분 좋은 날이렷다. 향이야, 가서 루주를 모셔 오거라.”
노인의 말에 향이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어머, 나리. 루주는 어찌하여 찾으십니까?”
“너희와 같이 곱디고운 아이들을 내게 소개시켜 주었으니 내 사례라도 해야 하지 않겠느냐? 내 좋은 술을 함께 나누며 선물을 드리려 하는 것이니 바쁘지 않다면 모셔 오거라.”
기녀들은 잠시 눈빛을 교환하며 머리를 굴렸다.
이 근방에서 한 번도 보지 못한 얼굴이었다.
온몸을 치장한 사치품들과 기품이 묻어나는 언행.
그리고 한눈에 보기에도 그 실력이 심상치 않아 보이는 무사를 호위로 둔 노인.
딱 보기에도 그는 높은 신분과 어마어마한 권력을 지닌 것이 틀림없었다.
북경이나 낙양이 아닌 이런 시골까지 찾아온 것을 보아하니 분명 신분을 노출시키지 않고 향락을 즐기러 온 것일 터.
그녀들이 속한 기루의 주인, 루주를 부르는 것 역시 돈을 주어 자신의 방문을 함구시키려는 속셈일 터.
그리고 술자리를 함께한 그녀들에게도 비밀 유지를 대가로 한 콩고물이 떨어질 것이다.
맞은편의 기녀와 눈빛이 마주치는 찰나의 순간에 계산을 끝마친 향이는 고운 목소리로 노인에게 말했다.
“어머, 그렇다면 모셔 와야지요. 얘! 어서 가서 루주님을 모셔 오렴! 여기 귀하신 나리께서 보자 하셨다고 전해 드리면 분명히 오실 게야.”
객실의 밖을 지키고 있던 시종은 짧은 대답과 함께 발걸음을 옮겼다.
몇 번의 술잔이 오고 간 뒤, 간드러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찾으셨다 들었사옵니다.”
“오, 들어오게나!”
루주로 보이는 여인이 방문을 열고 들어와 예를 표했다.
“…과연 이토록 아름다운 아이들을 거닌 루주의 얼굴이 궁금하였는데, 그야말로 경국지색(傾國之色)이로구나. 나라를 기울일 만큼이나 수려한 미모야.”
루주는 노인의 칭찬에 매혹적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
“과찬이십니다, 나리.”
“아니야, 참으로 아름답구만그래.”
껄껄대던 노인의 목소리는 순식간에 차갑게 얼어붙었다.
“그 정도 아름다움을 얻기 위해 혈귀가 되어버린 것이겠지.”
루주는 노인의 말에 움찔거렸다.
“고생하셨습니다, 방주.”
노인의, 아니, 십만 거지들의 우두머리인 개방의 방주 관호는 무사의 말에 너스레를 떨었다.
“송충이는 솔잎만 먹어야지, 갈잎을 먹으면 죽는다더니… 이런 치렁치렁한 비단옷이나 으리으리한 상차림은 이제 불편해 죽겠소. 머리에 바른 이 동백인지 뭔지 하는 개기름도 얼른 닦아내고 싶소이다.”
관호의 말에 무사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입을 열었다.
“금방 끝낼 것이니 너무 염려치 마십시오.”
향이를 비롯한 기녀들은 두 사람의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와 루주의 일그러진 표정에 당황했다.
“개방의 거지새끼가 비단옷을 입고 귀족의 흉내를 내다니. 허를 찔렸구나, 제기랄.”
루주는 으르렁거리며 욕설을 뱉을 뿐,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관호와 함께 찾아온 무사.
그가 내뿜는 방대하고 강렬한 기운은 루주가 위치한 방 전체를 짓누르며 어떠한 움직임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 모습에 관호는 평상시의 거지다운 말투로 껄껄댔다.
“이 몸의 연기가 통했다기보다는 너희가 너무 허술하게 꼬리를 보인 게다. 아무리 이런 시골에 처박혀 있다 하더라도 중원 어떤 기루에 하오문도가 하나도 없겠느냐. 쯧쯧쯧, 세상이 돌아가는 순리를 몰라도 너무 모르는구나. 하오문의 눈을 피하려 순진한 기녀들만을 꼬드긴 것이 되레 독이 되었구나.”
말을 마친 관호는 술잔을 입에 가져다 대다 이내 표정을 찡그렸다.
“에잉, 금존청도 먹을 줄 아는 놈이나 맛을 아는 거지.”
무사는 그러한 관호를 뒤로한 채 입을 열었다.
“네놈들에 대해서 제법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다.”
루주는 무사의 기운이 잠시 누그러진 것을 느꼈다.
“물어볼 것이 있다.”
루주는 그가 방심한 것이라 여기며 품 안에 감춰둔 가면을 꺼내 들며 소리쳤다.
“질문은 지옥에 있는 네놈 부모에게나 하거라!”
가면이 얼굴에 씌워지기 직전 루주는 숨이 막힐 듯한 압박감이 온몸을, 그리고 단전의 기운마저 짓누르는 것을 느꼈다.
“나는 질문에 대한 답을 제외한 어떠한 말도 허락하지 않았다.”
무사의 오른손에 들린 검이 양(陽)을.
그리고 그의 뒤편에서 허공으로 떠오르는 또 한 자루의 검이 음(陰)을.
두 자루의 검이 만들어낸 파동이 중용(中庸).
루주는 무사를 중심으로 마치 거대한 태극의 무늬가 그들이 위치한 공간 전체를 집어삼킨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달았다.
태극혜검(太極慧劍).
정협맹의 부맹주, 적우.
이십여 년 전 혈교를 등에 업고 활동했던, 수많은 그녀의 형제들을 베어낸 무당의 태극검수.
루주는 분하지만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치밀한 전략가로 알려진 이 사내에게 선공을 허락하며 주도권을 넘겨주고 말았다.
기루에 모습을 감추고 있는 모든 형제들을 불러 모아 동시에 습격한다면 그녀는 몸을 빼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과 함께 힘을 합쳐 이자를 상대한다면 이기더라도 치명상을 입고 말 것.
정협맹의 맹주도 아닌, 고작해야 이인자인 이 사내를 제거하기 위해 그런 위험을 자처하는 것은 수지 타산에 맞지 않는 장사였다.
“…하문하십시오.”
루주는 재빠르게 머릿속에서 계산을 마치고 기다렸다.
적우가 질문을 꺼내는 찰나의 순간.
그 빈틈을 노려 형제들에게 신호를 보내고 몸을 빼내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녀의 예상대로 적우는 입을 여는 그 순간, 공간을 압박하는 기운을 조금이나마 누그러트렸다.
“네놈의 죄악은 무엇이냐?”
루주는 그 틈새를 놓치지 않고 기운을 퍼트렸다.
그녀의 기운에 반응한 수십의 혈귀들이 그림자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며 적우를 향해 달려들었다.
자신의 계획대로 상황이 전개되자 여인은 가면을 쓰고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루주는, 흑교련의 간부 칠악(七惡) 중 음욕(淫慾)을 상징하는 이 여인은 모르고 있었다.
자신이 상대하고 있는 사내가 누구인지를.
허공에 떠 있는 또 한 자루의 검이 무슨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