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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라이즈-6화

본문

쿵푸벳

00006 특전을 사용하다.  =========================================================================

식도를 타고 넘어가는 화정은, 뜨거웠다. 그리고 쭈룩 내려간 그것이 몸 안에 유유히 흐르는 마력에 닿은 순간, 화정은 처음으로 반응을 보였다.

화륵! 화르륵!

마력과 반응한 화정은 이내 거센 불길로 변하더니 겉잡을 수 없는 기세로 불어나기 시작했다. 구슬 안에 잠재된 염(炎)의 냄새를 물씬 느낄 수 있을 만큼 화정의 기운은 순수하면서 강력했다.

쾅…!

그나마 미약한 첫 반응.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몸은 이리저리 불룩히 솟아오르며 염화를 토해낸다. 신체가 갑자기 폭발하는 기운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외부로 발산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한 번 꿈틀 일 때마다 사방으로 불똥이 튀기고, 몸이 간헐적으로 움찔거렸다.

그런 내 모습을 보았는지, 세라프가 주문을 외우는 소리가 어렴풋하게 들렸다. 나는 어디 있는지도 모를 그녀에게 간신히 손을 들었다. 끼어들지 말라는 신호였다.

세라프의 말에 틀린 점은 없었다. 내 능력으로 화정의 기운을 억지로 <통제>하는 건 요원한 일이었다. 물론 고대 무녀의 문신을 이용한다면 어떻게든 성공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아직은 문신의 힘을 이용할 생각이 없었다. 아니, 무엇보다 나는 애초에 그것을 통해 화정을 억제할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다고 보는 게 옳으리라. 고대 무녀의 문신은 앞으로 내 동반자가 될 화정의 기운이 머무를 장소를 제공할 용도.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내가 원하는 건 억압도 통제도 아니다. 지옥의 겁화와 맞먹는 힘을 도대체 어느 인간이 받아들일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단순히 힘을 빌리는 용도로 이야기를 바꾸면 상황은 달라질 수 있다.

언뜻 눈을 뜨니 세라프가 희미하게 보였다. 그녀는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천사의 그런 모습이 자못 신선했지만, 나는 바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지금까진 전조에 불과했다는 것을, 그리고 지금부터 시작이라는 것을. 그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으니까.

화정이 일으키는 폭발을 일반적인 폭발과 비교하면 곤란하다. 물질적 폭발이 아닌 순수한 기운의 폭발. 그만큼 비교할 수 없는 기운과 고통을 동반한다. 그리고 화정은, 비로소 내부서 본격적인 행동을 개시했다.

쾅! 쾅! 쾅! 쾅!

"끅. 끄륵."

이어진 폭발에 나도 모르게 잠깐 눈을 까뒤집고 말았다. 제대로 행동을 개시한 폭발에 의한 고통은 상상을 초월했다. 10년 동안 홀 플레인에서 활동하며 수많은 상처를 입고 고통을 느꼈지만, 지금과 비교하면 애교라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더욱 강도가 세질 고통에 소름이 끼쳤지만 그럴수록 나는 이를 바득바득 깨물었다.

나는 속으로 수없이 되뇌었다. 난 홀 플레인의 끝을 본 사용자 김수현이다. 그 기간 동안 나는 끝없이 참고 인내해야만 했다. 그 10년 이라는 시간은, 어느 누구도 얻지 못한 제로 코드를 손에 쥐었다는 자부심은 단순한 딱지 치기로 얻은 건 절대로 아니었다.

폭발 소리가 새어 나오는지 아니면 세라프가 말하는지. 주변이 굉장히 소란스러웠다. 하긴 제대로 들리지도 않는다. 그리고 매 순간마다 화정은 자신의 기운을 착실하게 키우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폭발을 일으키려는 순간, 나는 있는 힘을 다해 마력을 일으켜 화정의 기운을 북돋아주기 시작했다.

90에 다다르는 방대한 마력이 힘을 보태자 화정의 기운은 순간 터지려던 폭발을 잠시 멈추고 말았다. 그리고 그 순간은 단 한 번에 불과했지만, 미약한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내 마력이 화정의 기운에 무리 없이 섞여 든 것이다.

순수한 불의 집합체. 영원히 타오르는 염화. 화정은 의지를 가진 기운이다. 스스로 자아를 갖고 주인을 선택하는 에고 장비와 비슷하면서 다른 점이 있다. 그건 바로 의지의 차이였다. 자기 자신의 의지대로 힘을 행사할 수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다. 자아는 없지만 감정은 살아있다. 그리고 나는 지금 마력의 합일을 통해 불의 기운과 교감하고 있었다.

현재 느껴지는 화정의 감정은 황당함이었다. 보통 내부 파괴활동을 하고 있다면 그 기운을 통제하는 게 일반적인 맥락이다. 그러나 난 오히려 화정이 활동을 편하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손을 내밀고 있었다. 너를 꿇리려는 게 아니라, 동급의 존재로서 힘을 빌리고 싶다고. 간절한 감정을 담아 마음속으로 외치고 있었다.

'나는 네가 꼭 필요해. 그러니 어디 한 번 네 마음대로 휘둘러봐. 내가 너의 동반자로 너의 힘을 빌리는 자로 적합한지 아닌지, 스스로 판단하고 그 결과를 나한테 보여다오.'

그러자 겨우 한 번 숨돌릴 틈을 얻었다. 콧구멍으로 뜨거운 숨결을 뿜어낸다. 코에서 불이 화르륵 흘러나왔다.

‘좋아. 알았어.’

그리고 겨우 화정의 허락을 얻을 수 있었다.

잠시 내부를 가다듬은 후, 나는 빨리 놀자고 칭얼대는 화정이 뛰놀 공간을 안내했다. 첫 타깃은 오른팔과 왼팔이었다. 얼른 기운을 나눠 양방향으로 힘차게 보낸다. 회로와 혈도를 따라 통로를 안내하자 강대한 기운이 얼씨구나 파도처럼 달려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화정은 차마 인지할 틈도 없이, 순식간에 양 손가락 끝에 있는 미세한 경혈까지 점거해버리고 말았다.

보글! 보글!

툭! 툭! 툭! 툭!

몸 안의 혈도가 무언가 툭툭 터지는 기분 좋은 아픔이 느껴진다. 막힌 혈관의 구멍이 시원하게 뚫려 터지는 소리. 억지로 개통 시키는 거라 해도 효과는 훨씬 더 대단했다. 마스터를 이룬 과거의 육체로 뚫기 힘들었던 손가락 끝 미세한 경혈까지 확실하게 뚫어주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양팔의 피부 위로 싯누런 진물과 시꺼먼 액체가 보글거리며 배어 나오다가 이내 열기를 이기지 못하고 허공으로 산화했다. 내 몸 구석에 꽁꽁 숨어있던 노폐물, 불순물들은 화정의 통과가 방해된다는 이유로 날벼락을 맞은 셈이다. 평소라면 손뼉치고 좋아할 일이었지만 아쉽게도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단순히 팔에 밀어 넣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찔한 기분이 들었지만 나는 살살 달래듯 기운을 다시 중앙으로 돌려보냈다. 다행히 화정도 이미 점령한 지역은 관심이 다했는지 순순히 내 의지를 따라주었다. 이윽고 양 팔을 가득 채웠던 모든 기운이 빠져나가자마자 양팔을 축 늘어뜨리고 말았다. 말 그대로 엄청난 충격에 감각을 상실해버린 것이다.

이대로 팔을 잃는 게 아닐까 걱정이 들었지만 되돌리고 싶은 마음은 없다. 얼른 다른 데로 데려가 달라고 성화를 부리는 화정을 달래며 서둘러 두 다리를 향하는 통로로 이끌어주었다. 그리고 거의 다다랐을 즈음 살며시 등을 떠밀자, 무척 기다렸는지 다시 거친 파도처럼 내려가기 시작했다.

보글! 보글!

툭! 툭! 툭! 툭!

양팔과 다른 과정은 없다. 결과도 똑같다. 양다리를 점령한 기운이 모두 빠져나간 순간 버티려던 다리 역시 감각을 상실했다. 무기력하게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내가 현재 가지고 있는 내구, 체력, 마력의 능력치로는 간신히 몸이 부서지지 않고 형태를 유지하는 것이 고작인 모양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물 만난 고기처럼 신나게 뛰노는 화정은 연신 몸 안에서 펑펑 폭발을 터뜨리고 있었다. 진심으로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다. 온몸을 두드리는 고통에 당장 기절하고 싶었지만 초인적인 인내심은 내 정신 줄을 미약하게 붙잡아주고 있었다.

쾅! 쾅! 쾅! 쾅!

폭발이 들릴 때마다 심장이 요동치고 피가 뜨거워진다. ‘더 놀데 없어?’ 라고 의지를 전달하는 화정을 보며, 나는 마음을 다잡고 일단 더 기운을 모아달라고 부탁했다. 다음으로 이끌어줄 순서는 최종난관인 머리였다.

나는 머리를 앞두고 처음으로 두려운 감정이 들었다. 이건 다스려질 성질이 아닌 두려움이었다. 머리를 뚫어도 또는 뚫지 못해도 내가 느낄 고통은 상상조차 하기 싫을 수준이었다. 그때였다.

'싫으면 그만할까? 굳이 머리까지 올릴 필요는 없잖아? 지금만 해도 충분한데.'

그것은 흡사 화정이 은근한 목소리로 귓가에 속삭이는 것 같았다. 순간 고개를 끄덕이려고 했지만 나는 바로 고개를 흔들었다. 이성은 그만하라고 외치고 있었지만, 난 본능적으로 기운을 갈무리해 머리로 올라갈 통로로 인도했다.

'바보 같아. 죽을지도 몰라?'

“고작 이 정도로.”

들어갈 준비는 끝났다.

하지마. 하지마. 하지마.

머리는 하지 말라고 나를 말리지만 내 행동은 그에 아랑곳 않고 본능에만 충실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화정을 통로로 보내며 발악하듯이 고함을 질렀다.

“얕보지 말라고!”

나도 모르게 내뱉은 말 이지만 내 의지는 확실하게 전달된 것 같았다. 그와 동시에 중앙의 기운이 활발하게 회전을 시작한다. 차곡차곡 기운을 모으더니 배꼽 아래 단전 부근까지 기운이 쭉 내려가 멈췄다.

그 순간 나는 젖 먹던 힘까지 뽑아내어 기운을 위로 솟구쳐 올렸다. 그렇게 장렬한 폭발을 남기며 화정이 순식간에 내 목을 통과하려는 순간이었다.

“컥!”

푸확!

코, 입, 귀, 눈 등. 몸에 있는 구멍 모두에서 검붉은 피가 터져 나온다. 내 직감이 경종을 울리고 있다. 이것은 흡사 죽음을 눈앞에 둔 기분이었다.

화륵! 화르륵!

목 부근에서 막힌 화정의 기운은 크게 성화를 부렸다 여기서 폭발이 터지면 상상만 해도 끔찍한 현실이 나를 덮칠 것이다. 현기증이 온몸을 덮치며 전신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이젠 마지막이라는걸 알 수 있었다. 나는 혼미한 와중에도 목 부근에서 돌아다니던 기운을 다시 단전 아래로 끌어 모았다. 천만 다행히도 기운은 내 의도에 따라 이동해주었다.

‘어떻게든 뚫어야 한다.’

한 번…. 두 번…. 세 번…. 총 열 번을 회전해 날뛰는 기운을 갈무리한 후, 난 마지막이라는 생각과 함께 있는 힘을 다해 다시 머리 쪽으로 솟구쳐 올렸다. 그 뒤로 찾아올 고통은 이미 안중에도 없었다.

꽝!

거친 충격음이 온 몸을 뒤흔든다. 목 부분이 시원하게 뚫리고 머리로 향하는 통로가 개척되자 아까 그랬듯 화정의 기운은 순식간에 머리 전부를 뒤덮었다.

*

말 그대로 눈 앞이 보이지 않았다. 단지 그 뿐이었다. 한 순간 점멸해버린 시야는 세상을 하얗게만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 어느 것도, 아무것도 느낄 수 없는 상태. 마치 기억의 중간을 뚝 끊었다가 절단면을 이어 붙인 것 같았다.

화륵! 화르륵! 화륵! 화르륵!

겨우 상황을 받아들였다. 왜 저항을 했냐고 심통을 부리듯 화정의 기운이 머리 속을 종횡무진 휘젓고 다니고 있었다. 말 그대로 뇌가 녹아 내리는 기분이 들었다.

고통? 솔직히 처음 뚫었을 때만 해도 무언가 뻥 뚫리는 시원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천천히 시야가 회복 되고 몸의 인지 감각이 조금씩 돌아오는 순간 나는 느낄 수 있었다. 평생 살면서 다시 겪기 싫은 고통을.

'흐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소리를 지를 수 있었다면 있는 힘껏 터져라 질러 냈을 것이다. 이미 평범한 인간이 견딜 수 있는 고통은 아득히 초월해버린, 차원이 다른 자극이 내 몸을 감돌았다. 뜨거운 용광로에 그대로 머리를 담근다면 이런 느낌일까? 석유를 듬뿍 묻힌 후 불덩이로 짚신을 이고 뛰어들면 비슷한 느낌이 날까? 아무리 산전 수전 공중전 시가전까지 겪었다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나는 진심으로 죽고 싶었다.

외부에서도 확인할 수 있을 만큼 거대한 기의 폭발이 내 전신을 뒤덮었다. 지금까지 터진 폭발과는 궤를 달리하는 폭발 이었다. 머리에서부터 시작한 영원히 타오르는 염화는 넌 이제 내 것이라는 듯 야금야금 내부를 점령해 나가고 있었다. 화정의 기운이 닿은 곳은 세포 하나 하나가 지글지글 끓어 올랐지만, 이젠 아프다기보단 따뜻한 느낌마저 들었다.

그렇게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고, 흐릿하게나마 시야가 돌아왔다. 몸은 여전히 움직일 수 없었다. 천근만근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올리니, 하얗게 질린 얼굴로 우두커니 날 내려다보는 세라프가 보였다.

‘살아는 있는 걸까…?’

다시 한 번 그런 끔찍한 고통을 겪으라고 한다면 그냥 죽는 게 좋을 텐데.

마무리 작업은 머리를 개방시키는 것과 비교하면 상당히 수월한 편 이었다. 나는 천천히 몸 전체로 퍼진 화정의 기운을 모아 심장 쪽으로 살살 보냈다. 내가 마음에 들었는진 모르겠지만 화정은 순순히 내 의도대로 움직여 주었다.

그리고 그때서야 고대 무녀의 각인 마법이 발동하기 시작했다. 화정은 실컷 날뛴 것에 만족했는지 순순히 심장 속으로 들어가주었다. 그리고 이내 얌전히 자리를 잡는걸 느낀 순간이었다.

“수현! 수현!”

나는 그대로 기절해버리고 말았다. 안도감을 채 느낄 새도 없이.

============================ 작품 후기 ============================

1. 오타 및 문맥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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