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주가 돈으로 나를 조련한다 (10)화
본문
10.
카시안이 준비한 드레스와 베일이 살짝 드리워진 모자까지 쓴 뒤, 그와 함께 마차에 올랐다.
머리가 신경 쓰여 가발을 쓰지 않아도 되냐고 했더니 카시안은 이상한 소리를 했다.
“로즈의 예쁜 머리카락을 그런 걸로 감출 순 없지.”
모자만으로 충분하단 이야기로 알아들었다.
“그런데요, 전하.”
“전하는 금지.”
“그럼 뭐라고 부를까요, 저기요?”
내 말에 카시안이 어이없다는 듯 픽 웃음을 터트렸다.
“오늘 나와 로즈가 무슨 관계지?”
“…부부요.”
정말 마음에 안 드는 설정이지만 가장 무난하긴 했다.
왕국에서 상업적으로 성공한 사업가 부부가 제국 수도에 관광을 왔다, 라는 거니까.
“그렇다고 전하의 이름을 부를 순 없잖아요.”
“얼마든지 괜찮은데, 로즈라면.”
“황족모독죄로 잡혀가긴 싫습니다. 전하.”
“…예전에는… 말이지.”
내 거부에 카시안이 잘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안.”
“네?”
“이안이라고 불러.”
카시안의 이름과는 좀 거리가 멀어진 이름에 마음이 놓였다.
아무리 내가 뻔뻔하고 반쯤 간을 내놓고 산다고 해도 역시 황자의 이름을 마음속도 아니고 입 밖으로 막 부르는 건 좀 그랬다.
왜인지 익숙한 울림이란 생각이 들었지만.
“아무튼, 이안.”
“응.”
…왜 또 거기서 그렇게 미소를 환하게 짓는 건데.
그의 얼굴 공격에 잠시 숨을 참았다가 다시 본론을 끄집어낼 수 있었다.
“원래 도박장은 반년은 뒤에 단속할 예정이지 않으셨어요?”
“응, 맞아.”
“황비 전하가 자숙에 들어간 지금, 또 그쪽을 겨냥하면….”
“귀찮아지겠지.”
내가 머뭇거린 말을 카시안이 아무렇지 않게 마무리 지었다.
물론 황비의 자금줄은 여럿 있었고, 이 도박장은 그중에서 아주 큰 것은 아니긴 했다.
하지만 그녀의 심기를 거슬리게 하기엔 충분할 터였다.
“그래서 좀 더 시간을 들이기로 하신 거잖아요.”
황제 또한 이번에는 카시안을 탓할 가능성이 있었다.
황비의 자금줄에 황제가 완전히 무결한 건 아니었으니까.
카시안의 말대로 황제는 아둔한 군주는 아니기에, 국고를 채울 수 있다면 다소 불법적이어도 눈을 감아 줄 때가 있었다.
황비의 도박장 역시 비슷한 맥락이었다.
카시안이 변장한 것처럼 신흥 계급으로 떠오르는 사업가들의 돈을 국고와 고위 귀족들에게로 흡수해 갈 수 있는 장소.
그런 곳을 치면 겉으로는 황비를 책할지언정, 속으로는 카시안에 대한 미움만 더 키울 가능성이 있었다.
“내가 그렇게 걱정돼, 로즈?”
“당연하죠, 전하, 아니 이안이 없으면 제 월급은 누가 줘요.”
내 당당한 답에 카시안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손을 뻗어 모자 아래로 늘어트린 내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이야기했다.
“걱정하지 마, 로즈. 이번 단속은 그저 단순 단속에 가깝고 목적은 황비가 아니니까.”
그 말에 나는 크게 안심했다.
카시안이 원작 모드가 된 줄 알았다.
난 정정당당한 것보다 계략으로 손해를 덜 보는 남주가 더 좋다.
“황비 전하가 아니면…. 사업가들 쪽인가요?”
“응.”
난 그 말에 미간을 찌푸렸다.
“그럼 단속이라고 하지 마셨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이건 고의잖아!
한마디로 카시안은 도박장에서 사업가들을 둘러보고 포섭할 자들을 찾겠다는 소리였다.
귀족 층을 황비가 잡고 있는 한, 카시안은 신흥 계급으로 떠오르는 그들을 꼭 잡아야만 했으니까.
“…괜히 걱정했어요.”
내가 투덜거리자 카시안이 내 머리카락을 놓아주며 부드럽게 이야기했다.
“사피르에서 하나 더 사 줄게.”
정말 넌 돈이면 다 되는 줄 알지 마라.
이번에는.
되지만.
*
도박장은 서쪽 지구에 있는데 마차는 어째서인지 중앙 상점가로 향했다.
“바로 도박장으로 가시는 거 아니었어요?”
“아직 해가 안 졌잖아.”
“낮에도 영업합니다만.”
무엇보다 카시안이 포섭할 만한 건실한 사업가들은 낮에 드나들 텐데.
밤과 낮의 성격이 달라지는 장소였으니까.
밤이 깊을수록 불법적인 이야기들이 오가고 배팅률이 올라가 위험해지는 장소.
낮엔 관광객들이 즐기는 정도 선에서 끝나지만 밤에는 주먹다짐이 오갈 정도라고 들었는데.
내가 의아한 얼굴로 바라보자 카시안은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이야기했다.
“아직 해가 정중앙에도 오지 않았어, 로즈.”
어째서인지 오늘 그의 말이 온통 모순덩어리 같았다.
“그리고 그대에게 먼저 선물하고 싶었거든.”
카시안은 그렇게 말하며 타이밍 좋게 멈춰 선 마차 문을 직접 열었다.
정말 저 황자 전하는 내가 부하직원으로서 해야 할 일을 매번 잘도 빼앗아 가고 있었다.
당연한 것처럼 그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평소보다 드레스 자락이 길어, 그 손을 거절하지 않고 조심조심 마차에서 내렸다.
“사피르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그대의 눈이 반짝거리는데 차마 외면할 수가 없었어.”
“…제가요?”
평소처럼 그럴 리가 없다고 딱 잘라 말할 수 없었다.
내가 그렇게나 물욕에 차 있다니, 너무나 사실이긴 했다.
내가 고민하는 사이, 머리 위쪽에서 카시안의 낮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는 내게 팔을 내밀며 정말 소름 끼치게 이야기했다.
“그럼 가실까요, 부인.”
*
사피르 안은 정말로 황홀했다.
특이하고 예쁘고 귀엽고!
나무를 통으로 깎아 만들었다는 사랑스러운 외형의 시계에, 반씩 나눠 빚었다는데도 접착면이 보이지 않는 아름다운 도자기.
왕국에서만 난다는 특이한 빛깔의 석재를 소재로 한 공예품까지.
하나하나 너무 예뻐서 도무지 고를 수가 없었다.
“…그거면 돼?”
정말 많은 갈등 속에서 내가 고른 것을 보고 카시안은 불만족스럽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이게 뭐 어때서? 엄청 예쁜 만년필인데.
집에 사랑스러운 장식품을 가져다 둬 봐야, 볼 수 있는 건 아침과 밤 잠깐뿐이었다.
좋아하는 건 역시 최대한 가까이 두고 보고 싶었다. 물론 장식품을 집무실에 가져다 놓는 것도 괜찮겠지만.
“이게 좋아요.”
무엇보다 예쁘게 세공되었으면서도 쥐었을 때 손이 아프지 않았다.
이런 거라면 울퉁불퉁해진 내 손가락에 평안이 찾아올 수도 있겠다 싶을 만큼.
“여기에 쓰인 소재는 잉크가 엉기거나 굳는 일이 없다고 하는걸요.”
심지어 실용성까지 갖췄다니 어떻게 그냥 지나칠 수 있을까!
내 말에 카시안이 이유 모를 한숨을 지었다.
“정말로 로즈를 알다가도 모르겠어.”
“저는 이안이 조금은 절 몰라 주면 좋겠습니다.”
내 취향을 죄다 꿰고 있으면서 무슨 말이람.
카시안은 답하는 것 대신 만년필을 홀랑 들고서 계산부터 했다.
그는 보증서와 만년필을 건네더니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하나밖에 고르지 않았다는 건….”
“네?”
“다음에 또 내게 시간을 내어 주겠다는 뜻이겠지, 로즈.”
그게, 왜 그렇게 돼요!
나는 양심을 좀 챙긴 것뿐이었는데.
하지만 나는 왠지 입을 열 수 없었다.
카시안 아르테즈가 너무 즐겁고 기대에 찬 얼굴로 날 보고 있어서.
*
사피르에서 볼일이 끝났으니 이제 정말로 서쪽 지구로 갈 줄 알았는데.
카시안은 마부에게 뭐라고 이야기하더니 마차를 보내 버렸다.
“…이안, 서쪽 지구까지 꽤 먼 거 알고 계시죠?”
아무리 준비해 준 구두가 새것 주제에 신기할 정도로 편하다곤 하지만.
거기까지 한 시간 넘게 걸어가고 싶진 않았다.
“알아, 하지만 당장 서쪽 지구에 갈 것도 아닌데 마부를 계속 기다리게 하는 것도 미안하잖아.”
그렇게 말하더니 카시안이 내 손을 제 팔 위에 당겨 얹으며 이야기했다.
“부하 직원의 시간을 소중하게 생각해 달라고 로즈가 말했던 것 같은데.”
언제부터 내 말을 그렇게 잘 들어줬다고?
지금도 제대로 설명도 안 해 주고 하고 싶은 대로 굴고 있으면서.
카시안은 조금도 숨길 의도 없는 내 표정을 보며 뭐가 그리 즐거운지 빙글빙글 웃어 댔다.
“로즈는 배가 고프면 기분이 나빠지잖아, 내가 그대를 데리고 나왔는데 식사를 거르게 할 순 없지.”
“…그 정도는 참을 수 있어요.”
정말 도대체 뭘 나에 대해 모른다는 건지.
고작 1년 사이, 이렇게 내 취향이며 성격을 다 꿰고 있으면서.
정말 무서울 정도였다. 부려먹을 부하 직원을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카시안의 저 철저함이.
그는 내 말을 간단히 흘려넘기며 요즘 수도에서 제일 인기 있는 레스토랑으로 나를 데려갔다.
예약 대기만 두 달은 걸려 있는 곳이라고 했는데.
그 명성에 걸맞게 맛은 있었다.
“근데 스테이크는 이안이 준비해 주는 게 더 맛있는 것 같아요.”
내 말에 카시안은 무언가 참고하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에도 카시안은 도박장에 갈 생각은커녕, 중앙 상점가에서 가장 화제가 되는 가게에 나를 데리고 다녔다.
“로즈가 좋아하는 책도 슬슬 구경하러 가 볼까.”
그렇게 말하며 마차를 다시 불러, 집 근처 서점에 왔을 때는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을 때였다.
가뜩이나 겨울이라 해도 짧은데?
“…역시 절 속이신 거죠?”
내 말에 카시안은 그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는 로맨스 소설을 휘리릭 넘기며 답했다.
“응.”
너무도 산뜻하게.
“로즈가 나 없이 휴일을 즐겁게 지낼 생각을 하니 아주.”
“아주?”
“질투가 나더라고.”
도대체 뭐에?
너도 혼자 좀 뒹굴거리면 되잖아, 일 귀신이면서!
내가 어이없어하자 카시안은 내가 눈길을 줬던 소설들을 전부 들고서 계산하겠다며 도망쳐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