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주가 돈으로 나를 조련한다 (9)화
본문
09.
비슷한 시각, 황궁에서도 사소한 소란이 있었다.
1황자의 보좌관이었던 이레놀 자작가의 장남이 카시안의 명에 끌려 나온 탓이었다.
“화, 황자 전하! 저, 저는 억울합니다!”
명령한 건 카시안인데, 자작가의 첫째는 자기를 구해 달라는 듯 1황자 찰리에게 애원했다.
하지만 찰리는 그런 첫째의 목소리는 외면한 채 권태로운 눈으로 카시안에게 이야기했다.
“카시안, 기왕 데려갈 거면 저쪽이 나는 더 좋았는데.”
그는 공작가의 장남을 가리키며 상대를 잘못 골랐다는 듯 굴었다.
“쟤는 내 좋은 놀이 상대란 말이야, 매번 일하라고 잔소리하는 예비 소공작과 달리.”
그런 찰리의 말에 ‘예비 소공작’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서류나 처리하고 있었다.
분명 그 황비가 이리저리 힘을 써서 겨우 들어앉힌 보좌관이었을 텐데. 그것도 딱 한 주에 세 번, 오전에만 일하는 조건으로.
“형님께서 원하시면 언제든 바꾸실 수 있을 텐데요.”
잠시 예비 소공작의 손이 멈췄다가 다시 움직였다.
불안이 아니라 기대감의 표시라고 카시안은 생각했다.
“하하, 그건 어려운 건 알면서. 카시안은 너무하네. 어마마마에게 내가 혼나는 모습이 보고 싶은 거야?”
찰리가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기울이자 황비를 빼어 닮은 붉은 머리카락이 아무렇게나 어깨를 타고 흘러내렸다.
그에 맞춘 듯 예비 소공작의 어깨도 조금 처졌다.
카시안은 제 형의 긴장감이라곤 없는 태평한 소리에 낮게 웃으며 이야기했다.
“그럴 리가요. 황제 폐하께 형님이 불려 갈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아픕니다만.”
“아아아, 그러게에. 카시안 너무하네. 너 때문에 아바마마께 또 혼이 나겠어.”
조금은 빈정거린 말이었는데도, 찰리는 바보처럼 실실 웃어 댔다.
“그래도 괜찮아, 뭐. 카시안 너는 네 일을 한 것뿐이니. 이런 걸로 널 미워할 만큼 난 속 좁은 형은 아니란다.”
“…….”
어쩌면 이 인간이 황비보다 상대하기 더 까다로울 수도 있겠다고 카시안은 잠시 생각했다.
“그러니 이제 슬슬 딱딱한 호칭은 관두고 어릴 때처럼 불러 보지 않겠니, 카시안? 형아, 라고 말이야.”
아니, 그냥 이 인간은 바보일 뿐이다.
무엇보다 자신은 저렇게 낯간지러운 호칭 따위 단 한 번도 부른 적이 없었다.
카시안은 한숨을 푹 내쉬고서 대충 상황을 정리해 찰리에게 인사했다.
“그럼 물러가 보겠습니다. 형님.”
“벌써~? 모처럼 너와 점심 식사라도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어쩔 수 없지, 넌 바쁘니까.”
점심시간은 이미 지난 지 한참이었다. 분명 로젤리타가 들었다면 시간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고 잔소리를 했을 거다.
카시안은 대꾸 없이 고개 숙여 인사한 뒤, 그대로 그 자리에서 물러섰다.
찰리는 그런 제 동생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 흐느적거리며 중얼거렸다.
“부럽네~, 나도 예쁜 보좌관이랑 일하고 싶은데 말이야아.”
예비 소공작의 미간이 어이없다는 듯 찌푸려졌다.
*
1월 7일.
수도 중앙귀족의 명부에서 이레놀 자작가의 이름이 지워졌다.
흔한 죄목에, 귀족으로서는 해선 안 될 죄목까지 드러났다.
횡령, 탈세, 영지민 착취.
그리고 거기에 지난해 왕국을 상대로 한 무역 중 그들이 담당한 향신료 무역에서 계약 사기를 친 정황마저 알려진 것이다.
이번에 밝히지 않았다면 왕국에 제대로 덜미를 잡혀 손해를 보았을 터였다.
‘원작에서는 실제로 나중에 드러나서 카시안이랑 로젤리타가 힘들게 뒷수습해야 했지.’
하지만 미리 밝혀냈고 기간이 오래되지 않아 적당한 보상으로 왕국과도 원만히 협의가 될 듯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 과정에서 황비 또한 황제에게 크게 질책을 받아야 했다.
‘이런 걸 눈감아 주려 했다니! 황비, 그대가 어찌 이런 짓을 한단 말이오.’
‘저는, 저는 몰랐습니다, 폐하. 제가 시녀로 거둔 자의 부군이 멋대로 한 일인 것을요.’
물론 꼬리 자르기를 해 버렸지만.
이레놀 자작가는 영지 대부분을 빼앗기고 준남작이라는 사소한 작위만을 간신히 지켜 냈다.
저건 세습도 안 되는 작위였다.
이레놀 자작은 아예 작위를 박탈당하고 기나긴 노역형을 살아야만 했다.
‘악랄한 것! 가족이 될 수도 있던 자들에게 어떻게 이럴 수 있단 말이냐!’
자작 부인은 망상을 멋대로 떠들어 댔지만 다행히 그 재판이 비공개 재판이라 소문날 일은 없을 듯했다.
그러게 좀 가만히 있었으면 반년 정도는 더 자작 부인으로 지낼 수 있었을 텐데.
물론 처벌은 이 일이 없었어도 받았겠지만.
2황자께서 워낙 일 귀신이라서 이미 연말에 낌새는 눈치챘었거든.
나는 그런 자작 부인을 향해 미소로 화답해 줬다.
‘죄송합니다만, 고작 남작가도 안 되는 분들에게는 관심이 없습니다.’
내 다정한 말에 이레놀 자작 부인은 황비를 불러 달라는 둥 소란을 피웠지만 꼬리 자르기를 당했단 걸 안 뒤로는 잠잠해졌다.
장남의 약혼자 집안에도 도와 달라고 외쳤으나, 내가 자작가를 압류 수색 들어가기 전, 미리 알려 준 덕에 그들 또한 원만히 파혼으로 화답할 수 있었다.
‘고마워요, 살리체 양. 그대가 아니었다면 우리 딸 아이가 큰일을 겪을 뻔했어요. 마침 당신이 말해 준 날 우리가 예물 교환에 서명을 하기로 했었거든요.’
그쪽도 남작가라 딸이 좀 더 귀한 집에 시집가길 바라는 부모의 마음으로 가치 높은 광산 등이 포함된 예물을 약속할 예정이었다고 한다.
사람을 구했다는 사실에 내 마음은 더욱 뿌듯해졌다.
뭐, 예상대로 황비에 대한 처벌은 잠깐의 자숙 정도로 그칠 것 같았지만.
하지만 사소하게 내게도 재난은 있었다.
[겨울궁의 악마, 제국을 위기에서 구하다!
-왕국과의 평화를 지켜 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