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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본문

쿵푸벳

7

크루즈 선박에서의 크리스마스 파티는 대성공이었다. 하루미는 스태프들과 아침까지 축배를 들었다. 돔 페리뇽 로제를 몇 병이나 비웠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다음 날, 아오야마 자신의 집에서 눈을 떴을 때는 가벼운 두통이 남아 있었다.

침대에서 기어 나와 텔레비전을 켰다. 뉴스 방송 중이었다. 어딘가의 건물에 화재가 난 것 같았다. 멀거니 화면을 바라보던 하루미는 뉴스 자막에 눈이 번쩍 뜨였다. ‘화재로 불탄 아동복지시설 환광원’이라고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깜짝 놀라 귀를 바짝 세웠지만 그 뉴스는 금세 지나가버렸다. 채널을 바꿔봐도 다른 곳에서는 그 뉴스가 나오지 않았다.

서둘러 옷을 갈아입었다. 신문을 가져오기 위해서였다. 방범이 철저한 건 좋지만 이 맨션은 우편물이며 신문을 일 층까지 가지러 가야 하는 게 번거로웠다.

일요일이라서 신문이 두툼했다. 엄청난 양의 전단지가 들어 있어서 더 두툼해진다. 그 대부분이 부동산 관련 광고지였다. 신문을 빠짐없이 살펴보았지만 환광원 화재에 관한 기사는 눈에 띄지 않았다. 도쿄 내의 사건이 아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할머니에게 전화를 해보았다. 지역 신문이라면 실려 있을 것이다. 그 추측은 맞아떨어졌다. 할머니의 말에 따르면 환광원 화재 기사가 사회면에 나왔다는 것이다.

화재가 일어난 것은 12월 24일 밤이고, 사망자 한 명, 중경상자는 십여 명이라고 했다. 사망자는 시설 쪽 사람이 아니라 크리스마스 공연을 위해 찾아온 아마추어 뮤지션이었다.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었지만 현장 상황이 어떤지 알 수 없어서 잠시 기다렸다. 한참 혼란스러운 때에 외부인이 몰려오면 도리어 폐가 될 것이다.

초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아동복지시설 환광원을 나왔지만 그 뒤에도 몇 번 인사를 하러 찾아갔었다. 고등학교 진학 때, 취직이 결정되었을 때 등이다. 하지만 클럽 일을 시작한 뒤로는 아무래도 발길이 뜸해졌다. 어디선가 호스티스 냄새를 풍기게 될 것 같아서였다.

다음 날, 하루미의 사무실로 할머니가 전화를 해주었다. 조간신문에 추가 기사가 실렸다는 것이다. 그 기사에 의하면 시설의 직원과 아이들은 인근 초등학교 체육관에 임시로 가 있는 모양이었다.

12월의 차가운 날씨에 체육관에서 지내야 하다니, 상상만 해도 등줄기가 써늘해졌다.

회사 일을 일찌감치 끝낸 뒤, BMW 차를 몰고 현장으로 향했다. 도중에 약국에 들러 한 박스 분량의 손난로와 감기약, 위장약 등을 사들였다. 분명 몸이 아픈 아이들도 적지 않을 터였다. 바로 옆에 슈퍼마켓이 있어서 레토르트 식품도 대량 구입했다. 식당이 없어서 직원들이 힘들어하고 있을 게 틀림없었다.

BMW에 짐을 싣고 다시 달렸다. 라디오에서는 서던 올스타즈의 <우리 모두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신나는 노래였지만 하루미의 마음은 환해지지 않았다. 올해는 내내 좋은 일만 이어졌는데 막판에 이런 일이 터지다니.

두 시간여 만에 환광원에 도착했다. 하루미의 기억 속 하얀 건물은 시커먼 숯덩어리로 변해 있었다. 소방서와 경찰에서 조사를 하고 있어서 가까이 가볼 수는 없었지만 아직도 그을음 냄새가 풍겨오는 것 같았다.

직원과 아이들이 가 있는 초등학교 체육관은 거기서 일 킬로쯤 떨어진 곳이었다. 관장 미나즈키 요시카즈는 하루미가 찾아온 것에 놀라고 감격해주었다.

“멀리서 이렇게 달려와주다니, 고맙네. 네가 올 줄은 생각도 못했다. 그나저나 이젠 정말 어른이 되었구나. 아니, 아주 훌륭한 사람이 되었다고 해야 하나?” 그렇게 말하면서 미나즈키 관장은 하루미가 내민 명함을 몇 번이나 들여다보았다.

갑작스런 화재로 속을 끓여서 그런지 미나즈키 관장은 전에 만났을 때보다 훨씬 여윈 것 같았다. 나이가 일흔이 넘었을 터였다. 예전에는 풍성했던 백발도 부쩍 숱이 줄었다.

하루미가 가져간 일회용 손난로며 약, 먹을거리 등을 미나즈키는 기쁘게 받아주었다. 역시 식사 준비가 가장 힘들었던 모양이다.

“그 밖에 필요한 것이 있으면 뭐든지 말씀해주세요. 제가 최대한 준비할게요.”

“고맙구나. 그렇게 말해주니 참으로 마음이 든든하다.” 미나즈키는 눈물을 글썽였다.

“사양하지 마시고, 꼭요. 이 기회에 저도 뭔가 도움이 되어드려야죠.”

미나즈키는 고맙다, 고마워, 하고 몇 번이나 되풀이했다.

돌아오는 길에는 반가운 사람도 만났다. 어려서 시설에서 함께 지냈던 후지카와 히로시였다. 하루미보다 네 살이 많고 중학교 졸업과 동시에 환광원을 떠났었다. 하루미가 부적처럼 항상 갖고 다니는 목각 강아지를 만들어준 사람이다. 그것이 ‘오피스 리틀 독’의 유래이기도 했다.

후지카와는 유명한 목각 장인이 되어 있었다. 하루미와 마찬가지로 환광원 화재 소식을 듣고 달려온 모양이었다. 어렸을 때 성격 그대로 여전히 말수가 적었다.

이번 화재를 걱정하는 환광원 출신들이 그 밖에도 정말 많겠구나.

후지카와와 헤어진 뒤, 하루미는 그런 생각을 했다.

해가 바뀌자마자 천왕이 세상을 떠나면서 연호도 바뀌었다. 텔레비전에서 오락 방송이 사라지고 스모 개장이 하루 늦춰지는 등 비일상적인 나날이 한동안 이어졌다.

그것이 잠잠해졌을 무렵, 하루미는 환광원의 근황을 알아보러 나갔다. 체육관 옆에 지어진 단출한 임시 사무실에서 미나즈키 관장을 만났다. 아이들은 아직도 체육관에서 지내지만 임시 숙소를 짓는 공사는 이미 시작되었다. 임시 숙소가 완성되면 우선 아이들을 그쪽에 보내놓고 원래 자리에 제대로 된 건물을 다시 지을 거라는 얘기였다.

화재 원인이 밝혀졌는데, 노후한 식당 쪽에서 가스가 새면서 불이 붙은 것이라고 했다. 겨울철의 건조한 공기 탓에 작은 정전기가 화재로 이어졌을 것이라는 게 소방 당국과 경찰의 판단이었다.

“좀 더 일찍 건물을 새로 지었어야 했어.” 화재 원인을 설명한 뒤에 미나즈키 관장은 안타깝다는 표정을 보였다.

특히 사망자가 나온 것이 무엇보다 가슴 아픈 모양이었다. 사망한 아마추어 뮤지션은 원아 한 명을 구하고 대신 숨졌다는 것이다.

“그분은 정말로 딱하게 되었지만 그나마 아이들이 모두 무사한 게 불행 중 다행이에요.”

하루미가 위로하자 미나즈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지. 한밤중이라서 잠든 아이들이 많았으니까 하마터면 대형 참사가 될 뻔했어. 그래서 직원들하고도 이런 얘기를 했네, 예전 관장님이 우리를 지켜주신 것 같다고.”

“예전 관장님이라면, 여자분이셨지요?”

희미하게 기억이 났다. 온화한 표정의 자그마한 노부인이었다. 언제 지금의 미나즈키 관장으로 바뀌었는지는 생각나지 않았다.

“응, 우리 누님이야. 환광원은 누님이 설립하셨어.”

하루미는 미나즈키의 주름 가득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와아, 그러셨군요.”

“아직 몰랐었구나. 하긴 하루미는 어렸을 때 이곳에 있었으니까 그런 건 모를 만도 하지.”

“저는 처음 들었어요. 누님께서는 어떻게 이런 시설을 설립하셨을까요?”

“그걸 설명하려면 이야기가 꽤 길어지지만, 한마디로 말하면 사회 환원이라고나 할까.”

“환원…….”

“이렇게 말하면 내 자랑 같지만, 우리 집안이 선조 때부터 대지주였어.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나와 누님이 그 재산을 물려받았지. 나는 회사 경영에 투자했지만 누님은 딱한 처지의 아이들을 돕겠다고 그 유산으로 환광원을 설립했어. 원래 학교 교사로 근무하던 분이라서 전쟁 통에 수많은 아이들이 고아가 된 것을 보고 누구보다 가슴 아프게 생각하셨거든.”

“누님께서는 언제…….”

“십구 년 전, 아니, 이제 곧 이십 년이 되나? 태어나면서부터 심장이 약했어. 마지막에는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조용히 잠들 듯이 떠나셨네.”

하루미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죄송해요. 저는 전혀 몰랐어요.”

“그럴 만도 해. 누님의 유지에 따라 아이들에게는 요양 중이라고만 말했었으니까. 내가 회사 경영을 아들에게 맡기고 누님의 뒤를 이어 이곳에 오긴 했지만 내내 관장 대리라는 직함으로 일했다네.”

“그 누님께서 지켜주셨다는 건 무슨 말씀인가요?”

“숨을 거두기 전에 누님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거든. 걱정하지 마라, 내가 하늘 위에서 모두를 위해 기도할 테니, 라고. 이번 화재로 아이들이 전원 무사한 것을 보고 그때 그 말이 다시 생각난 거야.” 미나즈키는 겸연쩍은 웃음을 내보이며 말했다. “뭐, 그냥 갖다 붙인 얘기야.”

“그러셨군요. 정말 아름다운 이야기예요.”

“그래, 고맙구나.”

“누님께서는 가족이 어떻게 되시지요?”

미나즈키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평생 독신으로 지냈어. 말 그대로 일생을 교육에 바쳤다고 해야겠지.”

“그랬군요. 정말 훌륭한 분이시네요.”

“아니, 훌륭한 분이라고 하면 하늘에서 누님이 질색하실 것 같구나. 그저 나 좋을 대로 살았을 뿐이라고 노상 말했으니까. 아 참, 그러고 보니 하루미는 어떻지? 결혼 소식은? 사귀는 사람은 있어?”

갑자기 자기 얘기를 묻는 바람에 하루미는 당황스러웠다. “아이, 없어요, 그런 거.” 손을 가로저었다.

“그런가. 여자가 일에서 보람을 찾다 보면 깜빡 혼기를 놓친다니까. 사업도 좋지만 어서 좋은 사람을 만나야지.”

“유감스럽게도 저 역시 누님처럼 그냥 저 좋을 대로 살고 있을 뿐이에요.”

미나즈키는 쓴웃음을 지었다.

“다부진 녀석이구나. 하지만 우리 누님이 평생 독신이었던 건 단순히 일에만 전념했기 때문이 아니야. 실은 젊은 시절에 딱 한 번, 어떤 남자와 사귄 적이 있어. 더구나 그 남자와 둘이서 도망까지 치려고 했네.”

“정말요?”

호기심이 나는 이야기였다. 하루미는 몸을 앞으로 내밀고 귀를 쫑긋 세웠다.

“그 남자는 누님보다 나이가 열 살쯤 많고 근처의 작은 공장에 다녔어. 누님 자전거를 수리해주다가 서로 알게 되었다고 했던가. 공장 점심시간 같은 때 몰래 만나곤 했던 모양이야. 그때만 해도 젊은 남녀가 나란히 걷기만 해도 소문이 나던 시절이었으니까.”

“둘이서 도망치려고 한 걸 보면 부모님께서 교제를 허락하지 않았던 모양이지요?”

미나즈키는 고개를 끄덕였다.

“음, 두 가지 이유가 있었어. 첫째로는 누님이 아직 여학교에 다니는 학생이었다는 거야. 하지만 그건 시간이 해결해줄 문제였지. 실은 그보다 더 큰 이유가 있었어. 아까도 말했지만 우리 집은 상당한 자산가였어. 재물이 쌓이면 그다음은 명예를 원하기 마련이지. 아버지는 명문가와 사돈을 맺고 싶으셨을 게야. 하물며 이름도 없는 기계공에게 딸을 줄 수는 없으셨겠지.”

하루미는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으로부터 육십여 년 전의 일이다. 딱히 미나즈키 집안만 유별났던 것은 아니었으리라.

“둘이서 도망치려다가 어떻게 됐죠?”

미나즈키는 어깨를 으쓱 치켜들었다.

“물론 실패했지. 누님은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근처 절에 들러 몰래 옷을 갈아입고 역으로 나갈 계획이었던 것 같아.”

“옷을 갈아입어요?”

“음, 집에 하녀가 몇몇 있었는데 그중 한 사람이 누님과 나이도 비슷하고 아주 절친했어. 그 하녀에게 절까지 옷을 한 벌 가져오라고 부탁했던 거야. 부잣집 여학생 옷차림으로는 금세 사람들 눈에 띌 테니까 허름한 하녀 옷으로 변장을 하려던 것이지. 기계공 남자 쪽도 재주껏 변장을 하고 역에서 기다리고 있었던가 봐. 그렇게 계획대로 둘이 역에서 만났다면 즉시 기차를 타고 사랑의 도피행에 성공했을 게야. 제법 주도면밀한 작전이었어.”

“그런데 잘되지 않았군요?”

“안타깝게도 누님이 절에 도착했을 때 하녀가 아니라 아버지가 보낸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어. 실은 하녀가 누님의 부탁에 고개를 끄덕이기는 했는데 막상 옷을 들고 나오려니까 겁이 덜컥 났던 모양이야. 그래서 손위 하녀에게 이걸 어쩌면 좋으냐고 물어본 거야. 그러니 결과는 뻔하지.”

하루미는 젊은 하녀의 심정도 알 것 같았다. 그 당시의 분위기를 생각하면 도저히 나무랄 수 없는 일이다.

“그럼 그 기계공은 어떻게 됐죠?”

“아버지가 심부름꾼을 역에 보내 편지 한 장을 전해줬어. 편지 내용은 ‘부디 나를 잊어주세요’라는 누님의 바람이 담긴 것이었지.”

“아버님이 다른 사람을 시켜서 가짜 편지를 써 보냈군요?”

“아니, 그건 아니야. 그 편지는 누님이 손수 썼어. 그놈을 해치지는 않을 테니, 라는 아버지의 엄포에 어쩔 수 없이 그런 편지를 썼지. 누님으로서는 따르지 않을 도리가 없었어. 아버지는 경찰 쪽에도 인맥이 있어서 마음만 먹으면 기계공 하나쯤 감옥에 보내는 건 아무 일도 아니었으니까.”

“그 남자는 편지를 받고 어떻게 했을까요?”

미나즈키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건 나도 잘 모르겠구나. 확실한 건 우리 마을을 떠났다는 것뿐이야. 원래 그 남자가 타지 사람이었어. 고향으로 돌아갔다는 소문이 돌긴 했는데 사실인지 어떤지는 확실하지 않아. 하지만 그 뒤로 딱 한 번, 내가 그 사람을 만났어.”

“어머, 어떻게요?”

“삼 년쯤 지났을 때였나, 학교에 가려고 집을 나와 한참 걸어가는데 뒤에서 누가 부르더구나. 서른 살 남짓한 남자였어. 누님과 사랑의 도피행을 하려던 그 기계공을 나는 본 적이 없었어. 그러니 그때 나를 부른 사람이 누구인 줄도 몰랐지. 그런데 그 사람이 편지 한 통을 내게 주면서, 부디 미나즈키 아키코 씨에게 전해달라고 하더라고. 그제야 아, 그 기계공이구나, 하고 눈치를 챘지.”

“그럼 그분은 관장님이 남동생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모양이지요?”

“남동생이라고 확신한 건 아니겠지만, 아마 집 앞을 지키다가 내 뒤를 밟았던 게 아닌가 싶어. 아무튼 내가 망설이고 있으니까 그 사람이, 뭔가 미심쩍다면 이 편지를 먼저 읽어본 다음에 아키코 씨에게 전해줘도 좋다, 부모님께 먼저 보여드리는 것도 좋다, 어쨌든 마지막에는 아키코 씨가 읽게 해주기만 하면 된다, 라고 하는 거야. 내가 그 말을 듣고 편지 심부름을 해주기로 마음먹었어. 내심 그 편지 내용이 궁금하기도 했거든.”

“그래서 읽어보셨어요?”

“물론이지. 편지를 봉하지도 않았더라고. 학교 가던 도중에 읽어봤어.”

“어떤 내용이었죠?”

“어떤 내용이었느냐 하면…….” 미나즈키는 말을 이으려다가 문득 입을 다물었다. 하루미를 지그시 바라보며 잠시 뭔가 생각하더니 무릎을 탁 치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건 말로 들려주는 것보다 직접 읽어보라고 하는게 빠르겠군.”

“엇, 직접 볼 수 있어요?”

“잠깐 기다려봐라.”

미나즈키는 옆에 쌓여 있는 상자들 가운데 하나를 내려 뭔가를 찾기 시작했다. 상자 옆구리에 ‘관장실’이라고 매직으로 써 붙인 종이가 보였다.

“처음 불이 난 식당하고 거리가 멀어서 다행히 관장실은 피해가 거의 없었어. 그래서 자료들을 무사히 이쪽으로 옮겨왔지. 이번 기회에 정리할 생각이네. 누님의 유품도 꽤 많으니까. 아, 이거야, 찾았어.”

미나즈키가 꺼내온 것은 네모난 통이었다. 그 뚜껑을 하루미 앞에서 열었다.

통 안에는 노트 몇 권이 들어 있었다. 사진들도 보였다. 그 속에서 미나즈키는 편지 한 통을 꺼내 하루미에게 건넸다. 봉투 앞면에 ‘미나즈키 아키코 님에게’라고 적혀 있었다.

“읽어보면 알 거야.” 미나즈키가 말했다.

“정말 제가 읽어봐도 괜찮을까요?”

“응, 괜찮아. 누가 읽건 무방하다는 생각으로 쓴 편지야.”

“그럼 잠깐 읽어볼게요.”

봉투 안에는 접힌 하얀 편지지가 들어 있었다. 펼쳐 보니 만년필 글씨가 줄줄이 이어졌다. 흐르는 듯한 달필이어서 기계공이라는 직업을 듣고 떠올린 이미지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미나즈키 아키코 님께

몇 자 적어 올립니다. 갑작스럽게 이런 모양새로 서찰을 보내게 된 점, 부디 양해해주십시오. 우편으로 보내면 안에 든 서찰을 읽지 않은 채 그대로 처분해버리지 않을까, 염려가 되었습니다.

아키코 씨, 건강하게 지내시는지요. 저는 삼 년 전에 구스노키 기계 회사에서 근무하던 나미야라고 합니다. 어쩌면 이제는 잊어버리고 싶은 이름인지도 모르겠으나 부디 이 편지를 끝까지 읽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이번에 펜을 들게 된 것은 다름이 아니라 꼭 한마디 사죄의 말씀을 드리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실은 지금까지도 몇 번이나 시도해보려고 했으나, 타고난 성정이 유약한지라 막상 결심을 하지 못하고 지내왔습니다.

아키코 씨, 그때 일은 참으로 죄송했습니다. 제가 저지른 짓의 어리석음을 깨닫고 이제야 새삼 깊이 후회하고 있습니다. 아직 여학생 신분이던 당신의 마음을 어지럽히고, 불측하게도 가족 여러분과의 인연마저 끊기게 할 뻔했던 것은 돌아보면 참으로 큰 죄를 짓는 일이었습니다. 어떻게도 변명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때 당신이 마음을 바꾼 것은 올바른 선택이었습니다. 어쩌면 부모님의 설득에 따라 내린 결정이었는지도 모르겠으나, 그렇다고 한다면 저는 당신의 부모님께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칫하면 돌이킬 수 없는 엄청난 과오를 저지를 참에 저를 바로잡아주셨습니다.

저는 지금 고향에서 농사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날 이후로 당신을 떠올리지 않은 날이 없습니다. 짧은 나날이었지만 지금까지 살아온 가운데 가장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또한 당신에게 사죄하지 않은 날도 없습니다. 그때의 일이 당신 마음에 큰 상흔으로 남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잠이 오지 않습니다.

아키코 씨, 부디 행복하게 살아주십시오. 제가 지금 진심으로 바라는 것은 그것뿐입니다. 모쪼록 좋은 인연을 만나시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나미야 유지 올림

고개를 든 하루미는 미나즈키와 눈이 마주쳤다. 어떠냐고 그가 물었다.

“정말 착한 분이시네요.”

그녀의 말에 미나즈키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둘이서 도망치기로 한 계획이 실패했을 때, 그 사람은 틀림없이 많은 생각을 했을 게야. 우리 부모님을 원망하기도 했을 것이고 누님의 배신에 환멸을 느끼기도 했겠지. 하지만 삼 년 동안 곰곰 뒤돌아보는 사이에 그것도 나름대로 잘된 일이었다고 이해하고 받아들인 게 아닌가 싶어.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던 게야. 정식으로 사죄하지 않고서는 누님의 마음에 큰 상처가 남을 거라고 걱정한 것이지. 피치 못해 한 일이라고는 해도 연인을 배신해버린 것을 누님이 스스로 책망하지 않을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말이야. 그래서 애써 이런 편지를 보내준 것이지. 그 심정을 나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 편지를 누님에게 전해줬어. 물론 부모님에게는 비밀로 하고.”

하루미는 편지를 다시 봉투에 넣었다.

“누님께서 이 편지를 평생 간직하셨던 모양이네요.”

“그런 것 같아. 누님이 돌아가신 뒤에 사무실 책상에서 이 편지를 발견했을 때는 나도 가슴이 뭉클했네. 평생을 독신으로 지낸 건 아마 이 사람의 존재가 너무도 컸기 때문일 게야. 마지막까지 다른 남자를 사랑한 일은 없었어. 그 대신 자신의 인생을 모두 환광원에 바쳤지. 누님이 왜 굳이 이 지역에 아동 시설을 만들었겠나. 원래 우리 집안과는 아무 인연이 없는 곳이었는데 말이야. 누님이 마지막까지 분명하게 밝히지는 않았지만 아마 그 사람 고향과 가까웠기 때문일 게야. 정확한 주소까지는 알지 못했어도 예전에 둘이서 나눈 대화로 대강 어느 지역인지 짐작할 수 있었던 모양이야.”

하루미는 조용히 고개를 저으며 감탄의 한숨을 내쉬었다. 두 사람이 맺어지지 못한 것은 안타깝지만 한 남자를 그토록 깊이 사랑할 수 있었다는 점은 부럽기도 했다.

“누님이 숨을 거두기 전에, 하늘 위에서 여러분의 행복을 기도하겠다고 말했지만 이 편지를 쓴 사람도 분명 누님이 어디선가 지켜주고 있을 게야. 그 사람이 아직 살아 있다면 말이야.” 미나즈키는 진심으로 그렇게 믿고 있는 것 같았다.

“네, 그러실 거예요.” 고개를 끄덕이면서 하루미는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그 남자의 이름이다. 나미야 유지, 나미야 유지…….

하루미는 나미야 잡화점과 편지를 주고받기는 했지만 주인 할아버지의 이름은 정확히 알지 못했다. 다만 시즈코에게서 들은 이야기로 보면 1980년 당시에 상당히 고령이었던 것은 확실하다. 지금 미나즈키의 이야기에 나오는 인물과 비슷한 나이일 터였다.

“왜?” 미나즈키가 물었다.

“아뇨, 아무것도 아니에요.” 하루미는 웃으며 손을 저었다.

“누님이 그토록 힘들여 운영해온 환광원인데 내가 간단히 문을 닫을 수는 없지. 어떻게든 다시 일으켜 세울 생각이라네.” 미나즈키가 이야기를 마무리하듯이 말했다.

“네, 꼭 그렇게 해주세요. 저도 열심히 응원할게요.” 하루미는 들고 있던 편지를 미나즈키에게 돌려주며 말했다. 그때 봉투에 적힌 ‘미나즈키 아키코 님에게’라는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깊은 결의가 담긴 듯한 글씨였다. 그 필체는 하루미가 받은 나미야 잡화점의 편지와는 전혀 달랐다.

역시 단순한 우연이야.

이 일에 대해 하루미는 더 이상 깊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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