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요괴가 산다-25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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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9화
대신녀는 크나큰 위기감을 느끼고 열매의 손목을 세게 당겨 잡았다.
“…윽!”
열매는 아득한 힘에 이끌려 자설신녀와 몸을 맞댔다.
“너는… 누구냐…!”
자설신녀가 빛 덩어리에게 물었다.
빛 덩어리가 물끄러미 자설신녀를 바라보았다.
눈, 코, 입이 어디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것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건 분명했다.
빛이 말했다.
「네 눈에 나는… 이랬구나.」
「네 눈에는… 이렇게 보였구나.」
빛 덩어리가 시선을 돌려 궤를 보았다.
두 눈을 감은 천주의 모습을 그것이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감회라도 젖은 것 같은 눈빛이었다.
자설신녀가 화들짝 놀라 그 앞을 막아섰다.
“아름답고 완벽하신 천주시니라! 온전하고 결함 없으신 분이니라!”
「아름답고 완벽하구나.」
「온전하고 결함이 없었구나.」
「너의 눈에… 나는….」
빛 덩이가 대신녀의 말을 중얼거렸다.
「무엇하러 너는 저것을 되살리려 하느냐? 무엇을 얻겠다고? 무엇을 찾겠다고?」
빛 덩어리의 물음에 자설신녀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나의 주인은 천지만물을 모두 만드시고, 그것에 생명을 불어넣어주신 분이니라! 세상을 사랑하고 온정으로 돌보신 분이니라! 모든 것을 지극정성으로 돌보신 분이니라!
생명 있는 모든 것이 천주를 경배하고 그분을 찬양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며,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의무이자 책임이니라.”
자설신녀의 입술이 바들바들 떨려왔다.
“그러니 나는 내 모든 것을 그분께 바치고 모든 것을 희생할 것이다. 내 가장 소중한 자매일지라도… 주인을 위해서라면….”
자설신녀는 어딘가 고장 난 것 같았다.
“그분을 위해서라면… 찌르고, 베고, 죽이며… 끔찍한 짓을 행할지라도… 주인을… 주인을 위해서라면….”
그녀의 머릿속에 광명과 무명의 모습이 자꾸만 떠올랐다.
세 사람이 한곳에 모여 재잘거리던 순간이 자꾸만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그녀들과 나누었던 실없는 이야기들이….
아무 의미 없는 시간들이….
서로를 바라보던 눈빛이….
아득하게 심장을 뒤흔들었다.
「…미안하구나….」
빛 덩이가 흔들렸다.
파르르… 파르르….
마치 꺼질 것처럼 뒤흔들렸다.
꺼지기를 바라나, 영원히 꺼질 수 없는 촛불처럼.
「나는 무엇도 사랑한 적 없고, 무엇도 돌본 적 없는 형편없는 주인인 것을. 너는 그리도 나를 어여삐 바라봐주었구나.」
「미안하구나, 자설아. 미안하구나, 나의 제자여. 미안하구나, 나의피조물아.」
「너를 이때껏 홀로 버려두어 정말 미안하구나.」
“아아… 아아… 아아아아아…!”
자설이 벌벌 몸을 떨었다.
움켜쥐고 있던 열매의 손을 놓고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설마… 설마… 설마….”
이제야 그녀는 깨달았다.
그녀를 찾아온 저 빛이 무엇인지. 그녀와 문답을 나눈 이가 누구인지. 연신 미안하다 말하는 이가 누구인지를.
이제야 뒤늦게 깨닫고 말았다.
“천주시여! 나의 주인이시여!”
대신녀의 몸이 바닥으로 무너졌다.
쉴 새 없이 떨어대는 어깨와 등이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당신이 돌아오셨으니 되었습니다. 죄 많은 제자는 이제 그만 쉴 수 있게 되었나이다. 나의 신이여, 나의 주인이여… 그것으로 모두 되었나이다.”
그녀가 은빛 단검을 치켜올렸다.
너무나 힘들고, 너무나 고통스러운 나날이었다. 너무나 길어서 견디기 어려운 시간이었다.
천신께서 돌아오셨으니 그녀는 마지막 남은 안식을 얻고자 했다.
생명을 잃고 영혼으로나마 남아 제 손으로 죽인 자매들의 발아래 영원토록 짓밟히기를 바랐다.
그것으로 살아서 지은 죄를 탕감할 수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영원토록 되갚을 수 있었다.
그녀가 은빛 단검을 이마 한가운데에 박아 넣었다.
그대로 찔러 머리를 터뜨려 죽기를 바랐다.
하지만 신은 허락하지 않았다.
영원한 고통도, 영원한 죄 갚음도 허락할 수 없었다.
「나를 기다리는 그 긴 나날 동안 너는 매일이 고통이고, 매일이 두려움이었으리라.」
「그런 너를, 나를 기억하는 자들을, 내가 만든 세상을, 그 모든 것을 잊고자 한 나의 잘못이니라.」
「미안하다. 미안하다, 자설아.」
하얀 빛 덩어리가 크게 입을 벌렸다.
자설신녀를 한입에 삼키고도 남을 거대한 입이었다.
그것이 꿀꺽.
대신녀를 삼켰다.
단 한입에.
조금도 고통스럽지 않도록.
열매는 그 모든 과정을 코앞에서 지켜보았다.
쩌적… 쩌저저저적….
쩌저저저저저저적!
세상천지가 무너지는 것 같은 굉음이 울려 퍼졌다.
그것은 얼음산을 막고 있던 결계가 사라지는 소리였다.
결계가 파훼되는 순간, 불새를 탄 바다마루가 얼음산 꼭대기로 솟아올랐다.
“열매야!”
“오, 오라버니!”
열매는 마루의 품에 안겨 사위를 바라보았다.
방금 전까지 있던 모든 것이 사라져버렸다.
자설신녀도, 검은 궤도, 완벽히 아름다웠던 신위도.
얼음산 아래 하얀 소의를 입은 신녀들의 모습도.
마치 모든 것이 환상이었던 것마냥 사라졌다.
무엇보다 눈부시게 빛나던 거대한 빛의 덩어리가 보이지 않았다.
모든 것이 꿈인가 싶었다.
***
삐익. 삐익.
호르르르르….
날 맑은 이른 아침. 부지런한 새들이 하루를 시작했다.
우거진 수풀 속, 이름 모를 새소리를 들으며 철구는 일찍이 일어나 방을 나섰다.
이른 아침이었으나, 이미 누군가가 마당을 쓸고 있었다.
스윽… 스윽….
싸리비가 스칠 때마다 마당에 싸리 금이 생겨났다.
“훈장님, 일어나셨어요?”
철구가 후다닥 달려가 훈장님 곁에 다가섰다.
“일어났느냐? 더 자지 그랬니?”
“아니에요. 실컷 잤습니다.”
“그래, 그럼 세수나 하든지.”
비질을 대신하려는 철구의 등을 훈장님이 부드럽게 두드렸다.
“예에…!”
훈장님은 비질을 멈추고 뒷마당으로 달려가는 소년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벌써 일 년이 지났다.
세상이 하얗게 점멸한 뒤로, 모든 것이 뒤바뀌었다.
지옥과 이승의 혼란은 씻은 듯 사라지고, 세계를 혼란에 빠지게 했던 구멍들도 깨끗하게 사라졌다.
갈라졌던 땅은 흔적도 없이 원상 복구되었다.
이미 생명을 잃은 이들이 다시 살아나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다행히 살아남은 사람들은 금세 기력을 되찾았다. 망가진 집과 길도 빠르게 재건되었다.
그리고 손주가 늘어났다.
열매로 인해 잃어버린 손발을 되찾게 되었다는 철구. 그 아이가 또 다른 식구가 되었다.
걱정과 달리 서당 아이들과 철구는 이내 친해졌다.
손발이 검은 그 아이를 누구도 타박하지 않았다.
본래 마음이 따스한 아이라서 마을 사람들과도 금세 가까워졌다.
다다다….
세수를 끝낸 철구가 달려와 기어이 빗자루를 빼앗아 들었다.
“훈장님, 오늘이지요?”
“으음, 그래. 오늘이구나.”
봄이 찾아오는 길목에서 두 사람은 차가운 하늘로 하얀 입김을 뿜었다.
“누나는 잘하고 있겠죠?”
“그 녀석이야 잘하겠지. 제 오라비가 있으니 걱정할 필요 없을 거야.”
“네, 분명 그럴 거예요.”
철구가 그리운 듯 눈을 깜빡거렸다.
며칠 전 떠난 열매가 몹시도 보고 싶었다.
겨울이 오면… 다시 만날 것을 알기에 그리운 마음이 아주 시리지만은 않았다.
***
솟은 산봉우리 같은 거대한 성이천년학당 신입들을 맞았다.
백학의 성 아래 옹기종기 모여든 신입들의 얼굴은 벌겋게 상기되어 있었다.
신력을 증명한 자만이 들어올 수 있는 비밀스러운 장소에서 그들은 희망과 두려움에 범벅이 되어 있었다.
“학도들은 모두 예를 갖추어라. 대학장님이시다!”
벼락처럼 들려오는 목소리에 신입들이 일순 움직임을 멈췄다.
도열해 있던 선배들은 즉각 한쪽 무릎을 꿇어 인사했다.
“천상, 지상, 천하의 이치를 따르노라! 대학장님, 인사 올립니다!”
푸른 융복에 자주색 갓을 쓴 선배들의 모습에 신입들은 심장이 벅차오르는 느낌을 받았다.
열매도 다르지 않았다.
두근두근….
마루 오라버니를 비롯해 진달래와 구르미, 곡두와 독사군에게 이것저것 이야기 들었음에도 떨리는 가슴을 가눌 길이 없었다. 저도 모르게 어깨를 부르르 떨고 말았다.
멀리서도 진달래가 그 모습을 기가 막히게 알아보았다.
“열매야! 언니가 있잖아! 내 직속 후배, 이 선배만 믿으라고!”
“입 닥쳐, 진달래!”
“처음부터 애를 눈에 띄게 할 셈이냐?”
마루와 구르미가 달려들어 진달래의 입을 틀어막았다.
독사군은 차갑기 그지없는 눈빛으로 진달래를 일갈한 뒤, 사람들 사이에 폭 숨어 들어간 열매의 모습을 찾았다.
한바탕 소리 없는 아우성이 벌어지자 신입들의 시선이 절로 그곳을 향했다.
‘부끄러워….’
열매는 자신과 상관없는 사람들인 것처럼 고개를 숙이고, 그쪽을 보지 않으려 애썼다.
두근두근….
상상조차 못했던 일이 눈앞에 펼쳐졌다.
자설신녀가 사라진 후에도 열매의 신력은 그대로 남았다.
진달래가 미리 장담했던 것처럼 신관은 소녀의 능력을 ‘최상’이라 기록했다.
‘최하’ 등급을 받았다는 오라비와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입학 전부터 열매에 대해 귀띔을 받은 운봉 교수가 입매를 틀어 올렸다. 그러고는 자신도 모르게 손바닥을 비볐다.
진달래에 버금가는 인재를 선점할 생각에 흥분을 감추기 어려웠다.
“…모두들 잘 왔습니다. 그대들 모두를 환영합니다.”
천하지종 대학장께서 짧은 환영의 인사를 끝내고, 초록 비를 내렸다.
몽글몽글한 초록 비가 신입들의 머리와 어깨로 떨어졌다.
‘잘 왔구나. 참으로… 잘 왔구나.’
부드럽고 달콤한 환영의 말이 신입들을 맞이했다.
***
신입생들이 천년학당에 들어오고 며칠 뒤, 상상조차 못했던 이들이 천년학당을 찾아왔다.
초대받지 못한 해괴한 손님들은 심지어 무흔이 쳐놓은 결계를 가뿐하게 넘어서더니, 청명의 호수를 건너왔다.
무흔의 결계를 넘었다는 것은 그들의 마음에 사악한 의도가 전혀 없다는 의미이니 걱정할 것은 없었다.
문제는 그들의 정체였다.
찾아온 이들이 ‘요괴’란 것에 천년학당 학도들은 경악했다.
“감히 요괴들이!”
“네놈들, 예가 어딘 줄 알고 왔느냐!”
푸르스름한 피부, 과도하게 큰 체구, 숨기지 못한 비늘….
인간의 옷을 입기는 했으나, 인간으로 보기에는 어딘가 어수룩하기 짝이 없는 요괴들이었다.
그들이 완벽한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다손, 천년학당의 누구도 속아 넘어갈 리 없었다.
지독한 요괴향을 도저히 감출 길이 없었던 것이다.
요괴라면 치를 떠는 신력자들 앞에서 그들은 그저 사방으로 고개를 돌리며 천년학당을 구경할 뿐이었다.
뒤늦게 천하지종 대학장이 그들을 맞았다.
“흘흘, 귀한 손님들이 오셨군.”
요괴들을 환대하는 대학장의 모습에 학생들은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뒤이어 질린 표정의 곡두가 뛰어나왔다.
“너, 너희들…!”
「오오오! 태자마마시다!」
「태자마마, 인사 올립니다요!」
「곧 남해 용왕이 되실 분께 큰절 올립니다요!」
일단의 요괴들이 곡두의 발 앞에 무릎을 꿇었다.
“히익!”
“태자? 누가? 곡두가…?”
“남해 용왕?”
늘 어수룩하고 무던한 곡두만을 알고 있던 학도들이 경악했다.
그제야 그들은 깨달았다.
반인반요라 무시하고 은근히 깔본 곡두가 후대 용왕의 자리에 서게 될 엄청난 존재라는 것을!
“흘흘… 귀한 손님이 들었으니 요괴숲으로 모시도록 하세.”
천하지종 대학장이 곡두의 어깨를 두드렸다.
「오오, 이곳입니까요?」
「여기가 태자마마의 궁이로군요. 용궁보단 못하지만 제법 보기가 좋습니다.」
「태자마마의 인간 신하들도 적지 않군요!」
곡두는 더벅머리를 벅벅 긁으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죄송합니다, 대학장님.”
“흘흘흘… 괜찮네. 괜찮아. 인간과 요괴가 무에 다를까? 싸우지 않으면 우리도 한편이 될 수 있지 않겠는가? 남해에서 자네가 그것을 보여주지 않았나.”
천하지종 대학장은 연신 미소를 지으며 곡두를 격려했다.
그들은 곧 요괴숲에 닿았다.
저편에서 서로 몸을 부딪치며 씨름하는 이들이 보였다.
한쪽은 매끈한 얼굴로 돌아왔으나 사자였을 때와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는 황광의 사자, 아니 지장의 문도들이고, 한쪽은 곡두의 요괴 신하들이었다.
“아니, 또….”
곡두가 그 모습에 고개를 흔들었다.
그만 싸우고 사이좋게 지내기로 했다더니. 이쪽이나 저쪽이나 지지 않으려 악을 쓰는 건 똑같았다.
「오오오! 저것이구나!」
「저희도 예서 강해질 수 있는 것입니까?」
「필사의 노력으로 반드시 대왕요괴가 되겠습니다요!」
곡두의 암담한 속내는 까맣게 알지 못하고 남해 요괴들은 속도 없이 지껄여댔다.
“아니, 그만들 오라고. 제발….”
곡두는 이를 악물며 중얼거렸다.
오지 말라 하는데도 어째서 요괴들이 느는 건지 통 모를 일이었다. 심지어 한번 발을 들인 요괴들은 좀체 나가려고도 하질 않았다.
“헐헐… 보기 좋군. 보기 좋아.”
빙긋이 미소 짓는 천하지종 대학장도 곡두의 마음을 몰라주기는 마찬가지였다.
***
“신력자님, 어서 오시지요.”
“부디 조심하십시오.”
“귀한 분을 모시게 되어 참으로 영광이옵니다.”
호화롭기 짝이 없는 마차가 진달래를 마중 왔다.
청명의 호수를 건너 마차에 오르는 데만도 어찌나 호들갑들을 떠는지 넌더리가 날 정도였다.
‘아니, 무슨 치료술사에게 이런 대접을…!’
진달래는 속으로 투덜거렸지만, 그녀를 마중 온 궁인들은 등에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출발 전, 귀가 닳도록 주의를 들은 까닭이었다.
“지금 네놈들이 모셔올 분은 무려 폐하의 머릿속에서 천두충을 꺼낸 분이시다!”
“그뿐인 줄 아느냐? 불편한 폐하의 다리를 멀쩡하게 만든 신격에 가까운 의원이시란 말이다!”
“어의들의 어의가 그분이니 일말의 불편함도 느끼셔서는 안 될 것이다!”
귀가 닳도록 잔소리를 해댄 궁인도 따지고 보면 제 잘못은 아니었다.
각별히 걱정하며 진달래를 모셔오라는 폐하의 엄중한 명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좌석은 놀라울 정도로 폭신폭신했고, 사두마차는 흔들림을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안락했다. 그러다 보니 절로 옛날 기억이 떠올랐다.
푸른 나뭇잎으로 뒤덮인 좁은 공간 속 그날이 떠올랐다.
“나의 여인이 되어다오. 나의 비가 되어다오. 진달래야….”
청환의 목소리는 조금 떨렸었다.
“폐하가 아니라 한 남자로, 내가 너를 한 여인으로 보듯이, 너도 나를 그리 보아주면 안 되겠느냐? 내 뒤에 걸린 이름 따위는 전부 버리고 나만 생각해주렴.”
보잘것없는 소녀를 향해 건네는 것으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말이었다.
청환은 시간을 줄 테니 천천히 생각하라고 했지만 진달래의 결정은 생각보다 빨랐다.
일 년 전, 그날.
자설신녀에게 붙잡힌 열매를 찾으러 떠나기 전, 진달래는 청환에게 답을 전했다.
그때도 이런 마차 안에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