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화 〉9. 하지만 일은 이미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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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화 〉9. 하지만 일은 이미 벌어졌다.
어떡하면 좋지?
그냥 대충 무시하고 일을 진행하려 했는데 이거 일이 요상하게 꼬여버린 것 같다.
그 증거로 오늘 아침 그녀는 또 우리 집에 찾아와있다.
나에게 이 핑크색 리모컨을 맡기고 말이지...
“그러니까..... 왜 자꾸 이걸 나한테 주는 건데!!”
“쓰라고 주는 거 이외에 뭔가 의미가 있나요? 설마 제가 잃어버릴까봐 보관해달라고 줄 리는 없잖아요.”
“아니! 그렇게 말한들!!”
그녀가 내 손에 쥐어준 버튼 하나의 핑크 리모컨을 든 채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감싸 쥐며 한숨을 쉬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응?”
“저, 제대로 반응할 테니까.”
“그러니까 그런 문제가 아니라니까!!”
당장이라도 이 손에 들린 리모컨을 바닥에 집어 던져버리고 싶었으나 혹시나 잘못 던져 고장 나면 이걸 다시 구해서 사주기 힘들다.
애초에 내가 이게 고장 난다고 다시 사줘야 할 의무는 없지만 이 녀석 평범한 일반인이랑 생각 구조가 달라서 막무가내로 이걸 빌미로 사달라고 떼를 쓴다면 어쩔 도리가 없다.
“제대로 반응하는 게 문제가 아니에요? 역시 움찔움찔 하면서 어떻게든 참으려고 애쓰는 걸 좋아하는 타입?”
“하아......”
말을 말자...
이 녀석이랑 이야기를 계속 진행했다가는 내 멘탈만 계속해서 날아갈 뿐이다.
달칵
“응?”
위이이이이이잉...
“햐아아앗!!”
“너는 이런 아침부터 대체 무슨 짓거리를 하고 있는거야아아아!!”
한숨만 나오는 그녀의 반응에 내가 자리에 주저앉자 그녀는 내 손에 들려있는 리모컨을 조종해 그대로 바이브의 스위치를 켰다.
그리고선 본인이 작동시켜놓고 주변사람 듣기 부끄러운 신음을 헐떡이는 그녀의 반응에 나는 당장 바이브의 전원을 끄고선 그녀에게 소리쳤다.
“역시 이렇게 신음 반응을 하는 게 싫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그런 이야기가 아니라고 하잖아.”
“다시 켜보세요.”
“싫어! 작동 안 할 거야!”
“설마 애태우기 플레이?”
“플레이가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
“방치하는 걸 좋아하시는 거군요.”
“아니야! 맞지 않아! 메모하지 마!!”
그녀의 말에 태클을 걸수록 오히려 내 취향이 이상한 쪽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나 지금 태클만 걸고 있는데 자꾸 이상한 쪽으로 오해하면서 진지하게 메모하지 말라고...
전혀 맞지 않으니까!!
“제가 지금 메모한 게 맞지 않다면 정확히 어떤 취향인지 설명하도록 하세요! 그렇지 않으면 저 제대로 모르겠거든요?”
“아니, 애초에 남의 성적 취향을 그것도 이성에게 까라고 말하는 것부터가 이상한 거 아니냐..”
“참고로 전 언제 어떤 식으로 올지 모르는 랜덤 방식이 좋은 것 같아요. 뭔가 오싹오싹한 스릴감이 있잖아요?”
“정정하지! 상황과 행동이 이상한 게 아니라 단순히 네 녀석이 이상한 거였어!”
볼펜을 입에 살짝 물고는 진지하게 연구하는 자세를 취하는 이 녀석에게 나는 정말 어처구니가 없음을 느끼며 머리가 지끈거렸다.
하아... 정말이지 아무리 생각해도 종잡을 수 없는 녀석이다.
이젠 거의 이 녀석의 행동에 태클 거는 걸 포기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고민을 하던 와중 쓸데없는 연구를 하던 그녀가 갑작스럽게 내 손에 들려있던 바이브의 리모컨을 빼앗아갔다.
“뭐야? 포기한 거야?”
“그럴리가요? 근데 뭘 그렇게 기뻐하시는 거죠?”
그녀가 내 손에서 리모컨을 빼앗아가자 살짝 기뻐했던 내 모습에 태클을 걸며 그녀는 다시 리모컨을 작동시켰다.
달칵
“그러니까 아침부터 뭐하는 짓이냐고!!”
“흐읏.... 어떤.. 취향을... 햐응! 좋아하시는지.... 하아... 파악 중인데요.”
다시금 리모컨을 작동시키는 그녀에게 태클을 걸자 그녀는 흘러나오는 신음을 참아가며 자신의 다리를 슬쩍 오므렸다.
다리를 오므린 그녀는 위이이잉 진동하는 바이브의 진동을 느끼며 최대한 신음을 흘리지 않기 위해 입을 틀어막은 채 몸을 움찔 움찔 떤다.
하아... 하아.. 같은 작은 신음과 숨소리가 새어나오며 그녀의 얼굴에 살짝 식은땀이 맺히기 시작한다.
붉어진 얼굴로 초대한 신음을 참으며 몸을 움찔거리는 그녀의 모습.
음... 에로 동인지에서나 많이 봤던 장면이지만 이걸 눈앞에서 실제로 보는 건 확실히 느낌이 많이 다르다.
귀로 전해지는 그 소리의 생생함과 그녀에게서 새어나오는 따뜻하면서 달콤한 숨결, 그리고 움찔 움찔이 단순 텍스트 문자로만 있는게 아닌 실제로 몸을 부들부들 떠는 이 역동감이 정말로....
“음, 참으려고 애쓰는 걸 좋아하는 타입이시군요.”
그녀의 모습을 한창 감상하고 있자 어느새 바이브의 전원을 끈 그녀는 내 고간을 바라보며 진지한 표정으로 메모를 이어갔다.
“어이?! 어딜 바라보며 메모를 하고 앉았어!!”
“원래 입은 거짓말을 하지만 몸은 솔직한 법이랍니다?”
“또, 무슨 능욕계 주인공이나 할 법한 대사를..”
이 녀석 진짜로 부잣집 아가씨에 인망 좋은 인싸녀 맞아?
내가 보기엔 그냥 에로 동인지 좋아하는 음란녀 타입인 것 같은데!!
“저는 무슨 일이든 노력하고 통달하는 노력형 재능러거든요. 그게 공부든, 운동이든, 에로동인지든!”
“아니, 거기에선 조금 노력을 덜 해야 하지 않을까?”
뇌가 에로 동인지에 절여져버린 일상생활 불가능이라고...
그리고 너무 자연스러워서 넘어갔는데 내 생각은 또 어떻게 읽은 거야?!
“대충 태양씨가 이 타이밍에서 음란녀가 아닐까 하면서 속으로 태클이라도 걸고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거든요.”
“어떻게 알았어?!”
“아무렴. 사랑하는 사람의 행동 패턴이나 사고 패턴 같은 건 이미 파악하고 있는 게 진정한 사랑하는 소녀의 기본 소양 아니겠어요?”
.....전혀 아닌 것 같다.
오히려 무섭다고.. 그런 거.
“뭐, 아쉽게도 태양씨가 이렇게나 완벽한 저의 가슴 형태를 보고도 그저 가슴의 크기만을 좋아하는 거유파인 건 생각하지 못했지만요.”
“아니, 딱히 거유를 좋아하는 건 아니라고. 그저 옷 위로 보이는 것보다 조금 작아서 의외라고 생각했을..... 그런 식으로 무섭게 노려보지 마!!”
나의 해명에 성난 고양이 같은 눈으로 날 노려보는 그녀의 행동에 나는 어제 그녀가 집을 나가며 나를 노려보았던 것과 같은 소름을 느꼈다.
일단 가슴 이야기는 금기인 건가.
아니, 애초에 딱히 그녀와 가슴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도 아니지만.
“그런데 말이지 너 저번부터 갑자기 자기자랑이 늘어난 것 같다?”
이야기를 하던 중 나는 갑작스럽게 늘어난 그녀의 자기자랑에 대한 의문을 느껴 그녀에게 해명을 요구했다.
“어머, 그거야 당연한 것 아닌가요?”
“너에게 당연한 건 일반인에게 당연한 게 아닌 게 많아서 잘 모르겠는데..”
“그거야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신의 장점을 어필하는 것은 면접을 보며 자기어필을 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법이니까 그런 것이죠.”
“아니, 너는 자기 어필이 아니라 자랑을 하잖아!”
“실례네요. 전 그런 적 없는걸요?”
“아니, 엄청 많거든?!”
그녀에게 해명을 요구하자 이야기는 다시 삼천포로 빠져들어 자기자랑을 했네, 안 했네. 같은 시시콜콜한 논쟁이 시작되었다.
“정말, 태양씨가 너무 쓸데없는 이야기로 시간을 끄니까 벌써 시간이 이렇게 돼버리고 말았잖아요.”
“아니, 이야기가 자꾸 이상한 쪽으로 가는건 전적으로 네 책임이 가장 크다고 생각하는데 말이지.”
말 그대로 쓸데없는 논쟁을벌이다 어느덧 시간이 꽤 지나버린 것을 알아챈 그녀는 그 녀석의 마중을 갈 준비를 하며 나에게 리모컨을 넘겨주었다.
“아니, 그러니까 이거 나한테 넘겨주지 말라니까. 애초에 너희 커플을 뒤에서 따라가며 등교할 생각도 없... 우읍!!”
그녀가 나에게 리모컨을 넘겨주자 투덜거리며 말하는 나에게 그녀는 귀찮다는 듯 그대로 나에게 키스를 날리며 내 입을 막아버렸다.
“푸하... 자꾸 말이 많아지면 계속 키스할거예요.”
“.............”
또 한 번 끈적 하게 늘어지는 타액을 혀로 핥으며 그녀는 나에게 엄포를 놓았고 따로 어떻게 반항할 방법이 없는 나는 그대로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리고 태양씨 같이 등교할 생각이 없다는 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죠? 애초에 당신이 좋아하는 NTR물에서 몰래 뒤에서 바이브로 가지고 노는 능욕 장면은 단골 소재일 텐데요?”
“너, 아무리 나 때문이라고 하지만 NTR물 그만 보는 게 어때?”
애초에 좋은 장르가 아니라고.
“아뇨. 태양씨가 만족할만한 시츄에이션이 어떤 것인지 정확하게 알아낼 때까지 저의 NTR 연구는 멈추지 않아요.”
“무슨.....”
“그리고 태양씨. 당신에게 거부권이 없다는 건 어제 제가 잘 말씀드리지 않았나요?”
히죽.
짜게 식은 표정의 나를 보며 해맑은 미소를 지은 그녀는 순간적으로 어제의 그 무표정한 얼굴로 바꾼 채 나에게 협박하듯 나지막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납치.... 감금당하고 싶으신 건 아니시죠?”
“..................네. 아닙니다.”
완전히 협박 모드인 그녀의 말에 나는 식은땀을 삐질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고 그제서야 다시 무표정에서 해맑은 평소의 그녀 표정으로 돌아왔다.
“그런 게 아니라면 제대로협력 부탁드린다구요. 마침 태양씨의 바이브 취향도 잘 알았으니 그를 만나면 제대로 반응해드릴 테니~”
“어..... 응.....”
스스로가 나서서 NTR물의 능욕 전개를 일으켜준다니 이건 복에 겨워해야 하는 걸까?
애초에 원래 세계로 돌아가려면 10명의 여자들을 NTR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얻은 것에서 뭔가 처음에는 기뻤는데 이런 식으로 협박 받으며 NTR을 하고 있으니 오히려 괴로움이랄까..
뭔가 내가 처음 생각했던 감정과는 다른 감정이 느껴진다.
좋아했던 취미가 일이 된다면 이런 감정이 느껴지는 걸까?
“....................”
에이, 아무리 그래도 이거랑 그거랑은 다른 이야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