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본문
16.
샤를은 몰렉의 처분을 미카엘에게 맡겼다.
그리고 무너진 에스페논 신전 대신, 파레온 신전에 머물렀다.
미카엘과 추기경들이 불침번을 서며 호위를 보았다.
죽을 뻔했는데 쉽게 잠이 오겠나 싶었지만, 샤를은 눕자마자 곯아떨어졌다.
아침부터 카이시스한테 시달린 탓도 있었고, 헥터를 보자 마음이 홀가분해진 탓도 있었다.
카이시스가 자신을 해치지 않을 거란 사실에 안심한 것도 한몫했다.
자신을 죽일 생각이었다면 진즉 죽게 내버려뒀을 테니 말이다.
그렇게 늘어지게 늦잠을 자고 일어난 것이 지금의 상황이었다.
“아침이라 하기엔 너무 늦었고.”
파레온 신전 식당 안.
앉아 있는 카이시스의 심기가 좋지 않아 보였다.
샤를이 깨어나길 기다린 지 벌써 몇 시간째였다.
“점심이라고 해야 하나?”
누가 기다려달라고 했나, 샤를이 입술을 삐죽였다.
“잠자리가 불편한가.”
오른편에 있던 헥터가 태연히 샤를의 잔에 물을 채워주며 물었다.
“일찍 깼군.”
잘 재단된 검은 제복이 헥터의 움직임을 더욱더 고고하게 만드는 것만 같았다.
샤를은 자연스럽게 헥터가 채워준 물잔을 받아 들며 대답했다.
“불편하진 않았어요.”
“어제 험한 꼴을 봐서 잠을 설쳤을 수도 있다.”
누구 때문에.
딱히 지칭하진 않았지만, 카이시스는 저를 두고 하는 말이라는 걸 단번에 알 수 있었다.
허-
카이시스가 실소를 흘렸다.
둘의 대화는 둘째였다. 처음 보는 헥터의 모습에 기가 찬 까닭이었다.
“저택에 배 들어왔다.”
카이시스가 경악에 휩싸이든지 말든지, 헥터의 온 신경은 샤를에게 쏠려 있었다.
“배요?”
앞뒤 다 잘린 말에 샤를이 갸웃거렸다.
그러다 오래된 기억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
[뱃놀이하게 배도 준비하고.]
뒤이어 충격을 받고 몸을 휘청거리던 태너가 떠올랐다.
[원정 끝나고 돌아오면 뱃놀이하기 딱 좋을 겁니다. 그맘때쯤 되면 강의 경치가 끝내주거든요. 물론 태너 경은 죽어나겠지만요.]
레온이 쌤통이라는 듯 히죽거리던 기억도 이어졌다.
“온실에 수국도 가득 폈다.”
헥터는 그렇게 말하면서 샤를의 접시 위에 잼을 바른 빵을 올려주었다.
샤를은 그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냥 빨리 오라고 하지.’
하여간 말 한번 살갑게 해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올라가려는 샤를의 입꼬리는 연신 실룩거렸다.
“하…….”
카이시스는 더는 못 보겠다는 듯 얼굴을 돌려버렸다.
소속 가이드.
그 힘은 카이시스가 거스를 수 없는 영역이었다.
아마, 자신이 튕겨 나갔던 것도 그 때문이었겠지.
물론 샤를을 죽인다는 선택지도 있었다. 죽일 수 있을진 잘 모르겠지만.
여하튼 지금으로서 샤를을 손에 넣을 방법은 납치하거나, 샤를의 선택을 받는 것뿐이었다.
“의상실에서 드레스도 왔더군.”
헥터가 말했다.
“드레스요?”
“그래.”
헥터의 의사를 적극적으로 반영한 이사벨은 샤를의 오프숄더 드레스를 하이넥으로 바꾸었다.
레이스 아래로 살결이 보인다는 것이 썩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네크 중앙. 붉은 보석으로 장식되어 있어 그나마 되돌려 보내지 않았다.
그 외 카탈로그에 있던 옷들도 모두 도착했다.
속이 훤히 비칠 것 같은 잠옷을 봤을 땐 심장이 떨어져 내리는 줄만 알았었다.
하지만 헥터는 그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일상복도.”
손을 잡고 입을 맞추고. 보고 싶었다. 그리 속삭이고 싶은 마음을 애써 삭히며 시선을 돌렸다.
그런 둘을 보며 카이시스는 입안 내벽을 긁어내렸다.
남의 연애사를 훔쳐보는 취미는 없었다. 보기에 썩 좋은 장면도 아니었다.
그러나 카이시스는 자리를 떨치고 일어나지 않았다.
샤를의 페로몬이 더없이 청아하고 달콤했기 때문이었다.
이대로 눈을 감고 몸을 기대 쉬고 싶을 정도로.
열댓의 마스터들이 내뿜는 페로몬에 뒤엉켜 수없이 사정하던 정화와는 다른 차원이었다.
나른할 정도의 편안함. 그리고 매우 따스했다.
‘그래서 강제하지 않은 것인가.’
카이시스가 헥터를 응시했다.
샤를의 선택을 받는 것. 카이시스는 그 선택지에 흥미가 생기고 있었다.
* * *
식사를 마치고 식당을 나오는 길.
“폐하.”
문 앞을 지키고 있던 세드릭이 카이시스를 향해 머리를 조아렸다.
표면상의 이유는 황제의 호위와 대신전의 복구공사 준비 때문이었고, 실제론 바엘의 시신을 찾은 까닭이었다.
카이시스는 예상했다는 듯 손을 휘휘 내저었다.
“기도 시간인데 공도 함께 기도를 올릴 참인가.”
카이시스가 헥터를 돌아보았다.
헥터가 기도라니. 몹시 궁금한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헥터는 미처 생각지 못한 듯 미간을 구겼다.
“가자고. 함께 기도드리러.”
비죽- 입매를 늘어트린 카이시스가 앞장섰다.
샤를도 돌아서려던 찰나. 그녀의 눈동자가 세드릭과 맞부딪혔다.
* * *
파레온 신전 기도실 안.
샤를은 기도를 빙자한 상념에 잠겨 있었다.
기도실에 들어오기 전 보았던 세드릭 때문이었다.
‘이상하단 말이지.’
세드릭은 절도 있는 동작으로 샤를에게 짧은 묵례를 한 뒤 돌아섰다.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정제된 몸짓, 용맹과 경신. 명예를 중시하며 기사도 정신이 투철하고 신사적이었던 인물.
원작을 읽으며 세드릭을 상상했을 때 떠올랐던 딱 그 모습 그대로였다.
하지만 샤를은 오히려 그 점이 이상했다.
샤를을 보는 세드릭의 시선엔 일말의 감정도 어려 있지 않았다.
마치 조각상에 인사하는 느낌이었달까.
저번 날, 자신을 보며 기쁨과 슬픔이 섞인 오묘한 표정을 지었던 세드릭과는 꼭 다른 사람인 것만 같았다.
단 1초도 머무르지 않고 스쳐 지나간 시선과 망설임 없이 돌아서서 가던 발걸음까지.
그러다 문득 떠오른 생각에 샤를이 설레설레 고개를 내저었다.
‘어우, 내가 도끼병이 걸렸나.’
헥터와 카이시스. 거기다 노엘까지 자신에게 다가와 단단히 착각에 빠진 게 틀림없다.
성녀 성녀거리며 관심을 쏟는 카이시스와 두 눈 벌겋게 뜨고 있는 헥터가 있는데 말이다.
‘갑자기 웃는 게 더 이상하잖아.’
고작 몇 번 보았을 뿐, 제대로 된 대화도 나눠본 적 없는 사이였다.
‘미쳤지, 제가 무슨 여주인공이라도 되는 줄 아나 봐.’
샤를이 자조적인 조소를 지으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을 넘기던 찰나였다.
“자매여.”
미카엘의 목소리에 샤를이 반사적으로 자세를 고쳐 잡았다.
기도실엔 샤를과 미카엘만이 있었다. 카이시스와 헥터는 미카엘에 의해 기도실 안으로 들지 못했다.
“…….”
뭐라 하려던 것이 아니었는데.
미카엘이 빙긋이 미소 지었다.
“오늘이 자매께서 대신전에서 머무르는 마지막 날입니다.”
“벌써요?”
잊고 있던 날짜에 되레 놀란 샤를이 미카엘을 돌아보았다.
“내일 정오에 있을 성녀식만 마치면 떠날 테니까요.”
미카엘이 온후하게 웃어 보였다.
“거처는 결정하셨는지요.”
“뭐…….”
당연히 헥터에게 갈 생각이었지만, 입 밖으로 꺼내려 하니 쉽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카이시스도 그렇고 노엘도 그렇고.
원작에선 릴리아나가 성녀였는데 자신이 먼저 성녀가 된 것도 그렇고.
어차피 릴리아나가 각성하면 관심이 죄다 그리로 쏠리겠지만, 어딘가 마음이 찝찝했다.
“자매께서 원한다면 신전에 더 머무를 수도 있습니다.”
샤를의 속을 들여다보기라도 한듯 미카엘이 말했다.
“제가 있으면 불편하실걸요.”
샤를이 거절의 뜻을 담아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불편하다니요.”
샤를이 거절의 뜻을 담아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샤를의 눈길이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카이시스와 헥터를 가리키듯 문 쪽으로 향했다.
“신전을 멀리하던 이들이 스스로 찾아오니 좋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미카엘이 초연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실제로 기도실까지 들어오겠다는 둘의 모습에 미카엘은 적지 않게 놀랐다.
특히, 헥터의 방문은 더더욱.
“여기 계신 분들하고도 싸울 텐데요.”
샤를은 자신이 오면 안 될 이유를 찾는 것처럼 말을 이었다.
그에 지지 않고 미카엘이 답했다.
“그 덕분에 어지럽던 신전의 질서가 바로잡혀 가고 있으니 그도 좋은 일이지요.”
물론, 아직 신전 내 황제파가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다.
아마 그는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침묵을 고수하던 중립파가 미카엘을 지지하고 움직이며 세력의 균형이 이루어졌다.
샤를이 의도한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미카엘이 자세를 고쳐 앉으며 샤를을 바로 보았다.
“그뿐입니까. 라파가 검술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검술이요?”
“헌트 기사단을 만난 이후, 무언가 깨달음을 얻은 듯합니다.”
정확히는 샤를이 몰렉에게 피살당할 뻔했던 일 이후였지만.
[신관도 스스로를 지킬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라파의 의견엔 틀림이 없었다.
신성력이 있다고 하나, 어디까지나 이능에 대한 무력화만 가능할 뿐 무기를 들고 덤비는 것은 막기 어려우니 말이다.
그간 신전에 위협을 가하거나 무력을 사용한 세력은 없었다.
하지만 힘이 없기에 눈치를 보았고 강한 자들을 두려워했다.
[검은 남을 해치기 위함만이 아니지 않습니까.]
무기는 남을 해치기 위해 만들어진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남을 지켜주기도 한다.
[기사단을 만들고 싶습니다. 헌트 기사단처럼 강한 기사단을 만들어 신전을 지키고 싶습니다.]
다니엘도 라파의 의견에 동의했다.
미카엘 역시 마찬가지였다.
해서 기사단을 창설하는 걸 정식으로 논의해볼 예정이었다.
미카엘은 몰렉과 바엘의 일을 샤를에게 거론치 않았다.
어떤 벌을 받게 되었는지, 어떻게 되었는지. 샤를이 알아봤자 마음의 짐만 무거워질 까닭이었다.
샤를도 구태여 그들을 묻지 않았다.
“그러니 누군가에게 얹혀서 의탁해야만 하는 존재라고 생각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돌아갈 곳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는 크다.
돌아갈 집이 있는 상태로 떠나는 것은 여행이 되겠지만, 돌아갈 곳이 없는 채 떠나는 것은 방황이 된다.
미카엘은 지금 샤를에게 그를 논하고 있음이었다.
“신의 자손인 자매의 집은 신전이지 않겠습니까. 언제든 돌아올 수 있는 그런 곳 말입니다.”
샤를은 괜히 울컥해 입술을 삐죽이며 웅얼거렸다.
“지붕도 부쉈는걸요.”
“아, 그 부분에 대해선 헌트 가문에 보상을 받기로 했습니다.”
본디 미카엘은 탐욕을 멀리하고 재물을 등한시했다.
불편하지 않았고 필요를 느끼지도 못했었다.
하지만 샤를이 대신전에 오고 미카엘은 생각이 달라졌다.
여기저기 부서져 바람이 새는 건물. 그리고 빈약한 식사.
본인은 괜찮았던 것들이었건만, 샤를이 저와 똑같이 지내야 한다고 하니 괜찮지가 않았다.
물론, 탐욕에 물든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정당하게 챙겨야 하는 것은 챙겨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매가 평생 이곳에서 먹고 자도 부족하지 않을 만큼 아주 많이 말입니다.”
미카엘이 씩-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 * *
“샤를.”
저녁 식사를 마치고 침실로 향하던 길. 헥터가 샤를을 불러 세웠다.
카이시스는 밀러의 눈짓을 받고 먼저 돌아간 뒤였다.
“잠시……. 할 말이 있다.”
헥터는 샤를을 인적이 드문 신전 내 작은 정원으로 이끌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이렇게 뜸을 들이는 것일까.
혹시 저택으로 돌아오라는 말을 하려는 것일까?
샤를은 머뭇거리는 진중한 헥터의 표정에 덩달아 긴장해 마른침을 삼켜 넘겼다.
그리 얼마나 흘렀을까.
잠시 숨을 고른 헥터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샤를, 사실 너는 나의 소속 가이드다.”
“소속 가이드요?”
영문 모를 소리에 샤를이 눈을 깜빡였다.
“처음 네가 저택에 온 날. 태너가 네게 주었던 계약서는 사실 나와의 소속 가이드 계약서였다.”
“그게 무슨…….”
“소속 가이드란 계약자에게만 가이드할 것을 서약하며 신의 보호를 받는 계약이다. 가이드를 쟁취하려 전쟁까지 불사하던 폐해를 막고자 고대에 만들어진 제도로 소속은 정화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계급부터 모든 것이 계약자를 따라간다. 타인의 소속 가이드를 강제로 취하려 든다면 신의 뜻을 어긴 것이기에 신전도 황실도 개입할 수 없지.”
잘게 떨리는 손을 움켜쥔 헥터가 말했다.
“계약 기간은 종신이다.”
“종신이요?”
“계약자가 원한다면 언제든 파기할 수 있으니 그 부분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헥터는 차마 샤를을 보지 못하고 말을 이었다.
“황실과 신전이 너의 존재를 알게 되면 어떤 수를 써서라도 내게서 떼어내려 할 것을 알고 태너가 미리 조취를 취한 것이다. 나는 태너가 너를 속이고 서명을 받아낸 걸 알면서도 계약을 맺었다. 그리고 너에게 알려주지 않았지. 이유가 어찌 되었든, 너를 속이고 계약을 맺은 것이니 정당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샤를은 말없이 헥터를 바라보았다.
“내겐 너에게 충분히 말할 기회가 있었다. 너를 지키기 위함이라고는 하나, 마땅히 네게 알리고 허락을 구함이 옮았다. 하지만 네가 사실을 알게 되면 거부할까 봐……. 너를 속인 나를 경멸하고 그리 떠날까 봐 두려워 말하지 않았다.”
두려웠다.
너를 잃을까 봐.
너를 놓칠까 봐.
“그래서 신의를 저버리고 너를 내 옆에 강제하려 하였다.”
하지만 그것이 헥터를 더 두렵게 만들었다.
“네 마음을……. 무시한 채.”
헥터가 샤를을 지그시 응시했다.
이윽고 커다란 손길이 샤를의 머리카락을 조심히 쓸어 넘겼다.
“그래서 오지 못하였다. 실망하고 돌아서는 널 마주하게 될까……. 겁이 나 오지 못하였었다.”
“…….”
“그러다 네가 위험에 처했단 걸 알았을 때,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몰렉이 샤를을 해치려 했던 날. 헥터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찰나의 순간, 헥터는 간절히 기도했다.
한 번만.
제발 한 번만 기회를 달라고.
“너를 기만한 나를 용서해 준다면……. 그런데도 다시 네가 저택으로 돌아와 나의 연인이 되어준다면 나는 기쁠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네 마음이 더 중요하다.”
자신을 보고 웃어주는 샤를을 보았을 때, 헥터는 깨달았다.
샤를의 웃는 모습을 계속해서 보고 싶다고.
어디에 있든 샤를이 진정으로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고.
“그러니 네가 원하는 걸 택해. 샤를.”
헥터가 샤를의 눈꺼풀 위에 살며시 입을 맞추었다.
“나는 언제나 여기 있을 테니.”
* * *
늦은 밤.
헥터가 떠난 뒤에도 샤를은 쉽게 잠이 들지 못했다.
[백작이라 그랬나……. 거기 가주가 어찌나 까다로운지, 평민의 페로몬을 못 맡나 보더라고.]
처음 시녀의 제안을 받아들였던 건 백작가라는 소리에서였다.
[헌트 공작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하지만 태너를 따라 샤를이 도착한 곳은 다름 아닌, 헥터의 저택이었다.
[특정한 사유 없이 일방적 계약 해지 시, 위약금 삼십억이랑 이란 조항도 보지 못했나요?]
당시엔 노바가 왜 백작저라 거짓말을 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었다.
그러던 어느 날, 헥터가 계약서를 가져오라 한 적이 있었다.
이후 실없이 ‘가이드’라 중얼거리며 실없이 픽픽- 웃는 모습이 이상했었다.
[방패 뒤에 있어.]
카이시스가 성녀를 운운했을 때. 어쩌려고 그러는 것인지 묻고 싶었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아 물어보지 못했다.
“소속 가이드…….”
샤를은 둔기로 머리를 맞은 듯 정신이 멍했다.
태너는 왜 자신을 속였을까.
성력을 가진 제로라서?
뭐가 어떻게 된 상황인지조차 모를 만큼 지나간 기억들이 얽혀 머릿속을 헤집었다.
신의.
헥터의 말을 들었을 때, 샤를의 심장은 쿵- 하니 주저앉았다.
속았다는 배신감이 조금도 없다면 거짓일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도 자신이 빙의자란 사실이 떠오른 까닭이었다.
샤를은 헥터에게 이 세계는 소설 속이고 자신은 빙의자라는 진실을 말하지 못했다.
사실 나는 당신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고.
결벽증도, 정화 받지 못해 고통에 괴로워하는 당신도 모두 알고 있었다고.
그런데 나 살자고.
큰돈 준다길래 일 년만 버티고 떠날 생각이었음을 말할 수가 없었다.
헥터는 솔직히 고백했으나, 샤를은 끝내 고백할 수 없었다.
그래, 헥터처럼 자신에게도 충분히 말할 기회가 있었다.
물론, 다짜고짜 ‘실은 이곳이 소설 속이고 당신들은 등장인물들이오.’라고 했다면 미친 사람 취급을 받았겠지.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는?
헥터는 분명, 자신이 어떤 말을 하더라도 믿어주었을 것이다.
“헥터는 그런 사람이니까…….”
헥터를 위해서가 아니었다.
온전히 자신을 위해서였다.
두려웠다.
헥터를 잃을까 봐.
자신을 버리고 릴리아나를 택할까 봐.
미라클로 각성할 예정인 여주인공이 있다고 하면 헥터는 그녀를 찾았을 테니까.
솔직히 모든 걸 털어놓았다면 다른 대안을 마련했을 거니까.
충분히 카이시스보다 릴리아나를 미리 찾아 똑같은 결말을 맞이하지 않을 수 있었다.
“난……. 최악이야.”
위선자다. 그리고 이기적이다.
[그러니 네가 원하는 걸 택해. 샤를.]
“난 당신이 원하는 걸 택하라고 하지 못하겠어…….”
샤를은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 * *
“어디를 가십니까?”
샤를의 침실 앞을 지키던 라파가 샤를에게 물었다.
“기도실이요…….”
“이 시간에요?”
“아까 기도를 빼먹었거든요.”
라파는 더 이상 묻지 못했다. 샤를의 낯빛이 어두웠기 때문이었다.
내일 거처를 선택해야 하는 것이 착잡하겠지, 이런저런 일이 많았으니 더욱 그럴 것이다.
라파는 고개를 끄덕이며 기도실로 안내했다.
“신전 안에 개인 기도실이 있습니다. 안내해드리겠습니다.”
라파는 파레온 신전 내, 역대 성녀들이 사용했던 기도실로 샤를을 안내했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부르십시오. 앞에 있겠습니다.”
이윽고 라파가 나간 기도실로 적막이 내려앉았다.
샤를은 가만히 신상을 올려다보았다.
자애롭고 성스러운 여인이 한 손을 내밀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 손을 잡고 싶을 정도로 따스한 미소를 지은 채.
“절 왜 여기로 보내셨어요?”
샤를이 여신상을 보며 물었다.
자신이 이곳으로 오게 된 경위가 신의 뜻인지는 모른다.
애초에 신을 믿지도 않는 샤를이었다.
그러나 신성력이 있는 세상이니, 없다고 장담하지도 못하겠다.
“이유가 있을 거 아니에요.”
신상은 그저 미소만 머금고 있을 뿐, 어떠한 답도 주지 않았다.
샤를은 털썩 주저앉았다.
“진짜 너무한 거 아니에요? 온갖 개고생은 다 시켜놓고 가타부타 말도 없고.”
사실 개고생이라기엔 편한 삶이긴 했다.
뭐,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불렀으면 부른 이유라도 설명해 줘야죠. 그래야 이해라도 하지. 신의 자식이니 뭐니 하면서 나는 신탁 한번 못 들어보고……. 돌려보내 달라고는 안 할게요. 그건 진즉 포기했어요. 그러니까 내가 왜 여기 왔는지 이유라도 알려줘요.”
누구에게 하는 것인지 모를 하소연이 신전 안을 울렸다.
“글도 못 읽어, 거기다 제로야. 그리고 치사하게 곧 각성할 릴리아나는 미라클이고 나는…….”
됐다.
걔는 말해 뭐 하냐, 속만 아프지.
샤를은 어휴- 한숨을 내쉬었다.
“빙의 소설들 보면 글이 술술 잘만 읽히고 능력도 빵빵하게 쓰더니만, 나는 너무하다 이거죠. 뭐 꿩 대신 닭인가? 그럼 헥터를 만나게라도 하지 말든가.”
샤를은 무릎을 굽어 두 손으로 감싼 자세로 웅크렸다.
“이럴 거면 차라리 내가 릴리아나든가.”
그렇게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불만을 궁시렁거리며 얼굴을 묻었다.
죽고 싶어도 배는 고프다고.
허기와 잠을 이기지 못하고 슬슬 감기는 눈꺼풀에 샤를이 일어나려던 찰나였다.
“……?!”
엉거주춤한 자세로 굳어진 샤를의 고개가 천천히 돌아갔다.
스르륵- 어깨를 타고 바닥으로 떨어져 내리는 긴 머리카락.
분명, 자신의 것이 맞거늘.
“근데……. 왜…….”
은색이지?
넋이 나간 사람처럼 있던 샤를은 황급히 제 머리를 쓸어 만졌다.
“내, 내 것 맞는데.”
당겼을 때 아픈 거 보면 제 머리카락이 맞다.
하지만 눈을 씻고 다시 봐도 이건 갈색이 아니었다.
달빛에 반사되어 다이아몬드처럼 반짝이는 은발.
“은발?”
스치는 불안감에 샤를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거울.
지금 자신의 모습을 볼 무언가가 필요했다.
하얀 기둥? 저건 아니지.
벽? 왜 죄다 대리석이야!
그러다 제단 위에서 반짝거리는 물체가 샤를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은촛대였다.
샤를은 제단으로 달려갔다.
곡선 부분에 비추어진 모습만 봐도 자신은 지금 은발이었다.
하지만 다른 확인할 것이 남아 있었다.
뒤이어 태양과 달을 상징하는 듯한 평평한 모양에 샤를이 제 얼굴을 가져다 댔다.
“……!”
그리고 놀란 샤를이 뒤로 나자빠져야 했다.
보라색.
은촛대에 반사된 눈동자 색은 분명, 보라색이었다.
“미, 미친…….”
헥터가 미친 듯이 좋아했던 은발과 뽑아서 으깨버리고 싶다던 자안.
“내가…….”
진짜 릴리아나라고?
* * *
한편, 밖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던 라파는 꺾인 고개에 화들짝 잠에서 깨어났다.
쓰읍-
본능적으로 침이 고인 입술을 훔친 라파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어느덧 여명이 밝아오고 있었다.
몇 시지?
그러다 일순, 기도실을 돌아보았다.
“자매님.”
“…….”
“자매님.”
“네.”
무슨 일이 있는 건가 싶어 들어가려던 라파가 들려오는 음성에 멈춰 섰다.
“아직 계십니까?”
자정이 다 돼서 들어갔는데 아직도 기도 중이라고?
퍽 놀라움에 라파가 눈을 끔뻑였다.
“네.”
카랑한 목소리를 보아 별다른 일이 있어 보이진 않았다.
“곧 성녀식을 올릴 시간입니다. 조금이라도 눈을 붙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괘, 괜찮아요.”
한편, 기도실 안의 샤를은 라파의 목소리에 그제야 정신이 든 터였다.
“저는 이만 성하를 뵈러 가봐야 합니다.”
“아, 네네.”
샤를의 입에서 본능에 가까운 대답이 나왔다.
“밖에 다른 신관과 추기경분들이 있으니 필요한 것 있으시면 언제든 부르시면 됩니다.”
“네.”
얼마 지나지 않아 라파의 발소리가 멀어졌다.
샤를은 제 머리카락을 내려다보았다.
왜 몰랐을까, 이상한 점이 한둘이 아니었거늘.
“안 돼.”
이대로 성녀식을 진행하면 안 된다. 샤를은 오직 그 생각뿐이었다.
“미라클일 거야.”
샤를은 왜인지 그런 확신이 들었다.
성녀식엔 황제인 카이시스, 대공 헥터. 그리고 공작인 노엘까지 참석한다.
가뜩이나 카이시스와 노엘이 저에게 관심을 보이는데 미라클이란 걸 알면…….
샤를은 그대로 침실을 향해 뛰쳐나갔다.
* * *
침실로 돌아온 샤를은 거울을 통해 다시 한 번 자신이 릴리아나임을 확인사살 받았다.
“미쳤어.”
소속 가이드고 뭐고, 미라클이란 사실이 발각되면 카이시스는 절대 자신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 아주 눈이 돌아버릴 거다.
그는 비단 카이시스뿐이겠는가, 노엘은 또 어떠하고.
헥터는 흑마법까지…….
“일단, 안 돼.”
샤를은 빠르게 옷장을 뒤졌다.
미라클이란 그런 존재였다.
미라클의 페로몬은 거부할 수 없는 힘이었고, 이성조차 박살 내버린다.
원작에서 릴리아나는 희망이자 재앙. 그 자체였다.
그렇게 로브를 뒤집어쓰고 방을 빠져나가려던 걸음이 거울 앞에서 멈춰 섰다.
“…….”
목에서 반짝거리는 붉은빛.
망설이던 샤를은 헥터의 마나스톤을 풀어냈다.
* * *
“하아, 하아…….”
로브를 뒤집어쓰고 머리카락을 가린 샤를이 대신전을 가로지르며 내달리고 있었다.
때마침, 파레온 신전을 지키는 추기경과 신관들이 교대를 하고 있어 몰래 빠져나오는 것에 성공했다.
얼마나 달렸을까.
[지닌 마력보다 이능의 대가가 클 시, 이능에 잠식되어 소멸한다더구나.]
순간, 스치는 기억에 샤를의 걸음이 우뚝 멈추어졌다.
“도망가면…….”
자신만 없으면 카이시스도 노엘도 헥터도. 서로 죽고 죽이는 싸움을 벌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재가 되어 사라지니, 죽음보다는 소멸에 가깝지.]
정화를 받지 못하면 헥터는 죽는다.
[길을 잃었나.]
초상 하나 남기지 못하고.
[그러니 네가 원하는 걸 택해. 샤를.]
샤를이 헥터를 찾듯 뒤를 돌아보았다.
[신의 자손인 자매의 집은 신전이지 않겠습니까. 언제든 돌아올 수 있는 그런 곳 말입니다.]
“미카엘.”
그래, 일단 미카엘에게 가자.
가서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성녀식을 미루자.
그리고 이후의 일을 생각하면 되지 않겠나.
어차피 도망가봤자…….
“리아!”
그때, 누군가에게 잡힌 샤를의 몸이 홱 돌려세워졌다.
“리아……. 역시 당신이.”
샤를 앞에 서 있는 것은 바로, 거친 숨을 몰아쉬는 세드릭이었다.
근데 리아?
리아는 원작에서 릴리아나의 애칭이었는데?
그걸 세드릭이 어떻게 알지?
놀란 샤를은 눈이 크게 찢어져 세드릭을 올려다보았다.
“어서, 어서 이쪽으로.”
세드릭이 샤를을 잡아끌었다.
“지금 황제가 오고 있습니다.”
“네?!”
* * *
“이……. 이 무슨…….”
샤를이 사라진 대신전은 발칵 뒤집혔다.
성녀식 준비로 신관들이 방을 찾아왔을 때 샤를은 없었다.
기도실에 있었다던 라파의 증언으로 파레온 신전, 그리고 대신전 전체를 뒤졌으나 샤를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결국, 그 사실은 카이시스와 노엘. 그리고 헥터의 귀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대체 경비를 어떻게 선 것이야!”
카이시스의 노성이 파레온 신전. 텅 빈 샤를의 침실을 뒤흔들었다.
뒤따라온 밀러와 황실기사단이 사색이 되어 몸을 납작 엎드렸다.
카이시스의 밀명을 받고 파레온 신전을 지키던 추기경들 역시 공포에 질려 손을 발발 떨었다.
“에단.”
카이시스의 불음에 기사단으로 위장하고 있던 친위대장 에단이 한쪽 무릎을 꿇었다.
“찾아.”
헥터와 노엘의 소행일 리 없다고 카이시스 확신했다.
샤를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성녀식을 참석하기 위해 함께 있던 셋이었다.
카이시스가 아니라는 것 역시 미카엘을 포함한 모두가 알 수 있었다.
“당장 찾아내!!”
카이시스의 외침에 주변 공기가 공명하며 거센 파장을 일으켰다.
헥터는 화장대 위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자신의 마나스톤을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 * *
뒤늦게 정신을 차린 샤를이 세드릭의 손을 뿌리치려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마스터의 힘을 태생이 제로인 샤를이 이기는 건 불가능 했다.
그렇게 대신전을 빠져나오자마자, 푸른빛에 집어 삼켜진 샤를은 낯선 곳에 도착해 있었다.
“…….”
빛 하나 새어 들어오지 않는 공간은 사방이 꼭 땅으로 막힌 듯 보였다.
그리고 벽면엔 정체 모를 마법진이 가득 새겨져 있었다.
희미한 등불과 마법진에서 뿜어져 나온 푸른빛이 말없는 세드릭의 뒷모습을 비췄다.
“저기…….”
눈치를 살피던 샤를이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곧 성녀식이 있어서요.”
“…….”
“그래서 말인데 이만……. 돌아갈까요.”
샤를에게 등을 보이는 세드릭에게선 아무런 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강하게 붙들린 손목도 그대로였다.
“릴리아나.”
세드릭이 샤를을 돌아보았다.
언제 냉정했냐는 듯 샤를을 보는 세드릭의 눈빛은 기쁨과 슬픔에 젖어 일렁이고 있었다.
“제가 당신을……. 얼마나 찾았는지 알고 계십니까.”
“……!”
샤를의 눈이 크게 찢어졌다.
세드릭이 릴리아나를 어떻게 알지?
아니, 자신을 왜 찾았다는 거지?
“당신은 저를 기억하지 못하시지요.”
“…….”
“괜찮습니다. 제가 당신을 기억하니까요.”
세드릭이 한쪽 무릎을 꿇으며 샤를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헥터 헌트는 당신을 죽인 간악한 자입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곧 그의 흑마법에서 당신을 깨워드리겠습니다.”
샤를은 그대로 얼어붙어 숨조차 내쉬지 못했다.
“이번엔 제가 당신을 반드시 지켜내겠습니다.”
천천히 당겨낸 샤를의 손등에 세드릭이 이마를 맞추었다.
표할 수 있는 최대 존경의 의미였다.
“나의 릴리아나.”
* * *
“이상합니다. 꼭 누가 고의로 지워놓은 것 같습니다.”
바람의 감각을 느끼던 노엘이 말했다.
대신전을 빠져나온 카이시스와 노엘. 헥터는 바로 이능을 사용하여 샤를을 찾기 시작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황제의 친위대와 윌킨스 기사단, 헌트 기사단까지 합세하였다.
본디 빛과 물이 닿는 곳엔 카이시스의 힘이, 바람이 닿는 곳엔 노엘의 힘이. 그리고 불과 어둠이 닿는 곳엔 헥터의 힘이 닿는다.
하지만 기이하게 샤를의 흔적은 어디에서도 느낄 수 없었다.
헥터의 마나스톤은 샤를만이 벗어낼 수 있다. 즉, 샤를 스스로가 도망쳤다는 것.
그것이 샤를의 선택이라면 헥터는 쫓아갈 수 없다.
그러나 샤를은 마력이 없는 제로였다.
제아무리 도망치기로 작정하고 숨는다 한들, 이렇게 모든 기척을 숨기는 건 불가능했다.
게다가 방안에 남아 있던 샤를의 페로몬이 매우 짙었다.
마치, 자신보다 더 상위급인 것처럼.
“그건 나도 알고 있다. 문제는 어떤 새끼가 끌고 갔냐는 거야.”
바드득 이를 갈아낸 카이시스가 덧붙였다.
“신전일 리는 없다.”
이미 카이시스는 황실 기사단부터 의심 가는 자의 생각을 모조리 뒤졌다.
허나 누구의 생각 속에서도 샤를의 행방을 찾을 만한 단서는 없었다.
“소속 가이드라며.”
카이시스가 헥터를 돌아보았다. 노엘 역시 놀라 헥터를 쳐다보았다.
“찾을 방법이 있을 거 아니야.”
마나스톤이 있다면 찾을 필요도 없이 샤를에게 갈 수 있다.
하지만 동등한 관계인 소속 가이드는 달랐다.
저번 몰렉의 사건처럼 샤를이 위험에 처한다면 느껴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때만을 기다리고 있을 순 없다.
[아……. 그저 떨어트린 것을 주워주려 했을 뿐입니다.]
줄곧 입을 열지 않던 헥터의 고개가 틀어지며 으득- 살벌한 소리를 내었다.
“세드릭.”
“……!”
무언가 떠오른 듯 카이시스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 새끼 대가리에 뭐가 들어 있었지.”
* * *
“없었다.”
카이시스가 생각을 읽을 수 있다는 것.
그는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애당초 정확히 아는 사람은 최측근 밀러와 에단. 그리고 헥터뿐이었다.
노엘과 세드릭은 그저 유추해낼 뿐이었다.
“없어?”
카이시스의 대답에 헥터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아예 없더군.”
마스터인 노엘과 세드릭은 어느 정도의 생각을 감출 수 있다.
하지만 정말 어느 정도일 뿐, 카이시스가 작정하고 뒤지자면 얼마든 캐낼 수 있었다.
샤를의 존재를 알았을 때, 당연히 카이시스는 세드릭의 생각을 읽었다.
원정에서 돌아온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샤를에 대한 생각은 언제나 같았다.
황제가 찾는 헌트 대공의 가이드. 개인적인 감정도 일말의 기억도 없었다.
“에드워즈 기사단도 마찬가지다.”
또한, 카이시스는 월킨스 기사단뿐만 아니라 에드워즈 기사단에도 첩자를 심었다.
허나 세드릭의 이상 행동은 없었다.
아니, 모든 게 이상해 그것이 샤를에 관련된 것이라 짐작하지 못했다.
카이시스가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생각은커녕, 기억조차 없었다. 원정대에서의 본 것이 전부야.”
“그럴 리가.”
헥터가 카이시스를 응시하며 말했다.
마치 읽으라는 듯.
순간, 헥터를 보는 카이시스의 벽안으로 이채가 번뜩였다.
세드릭이 샤를의 리본을 주워주었던 것, 원정대에서의 일, 그리고
[어째서 샤를에 대해 보고하지 않았지.]
[넌 샤를을 몰라. 아니, 몰라야 해.]
헥터와 일촉즉발의 상황으로 치달았던 것을 끝으로 헥터의 생각은 다시금 어둠 속에 가린 듯 읽히지 않았다.
카이시스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 전부터 알고……. 있었다는 건가?”
이는 모두 카이시스가 모르는 일이었다.
* * *
홀로 정체 모를 벙커 같은 곳에 남겨진 샤를은 절로 실소가 흘러나왔다.
‘회귀자.’
세드릭은 회귀자가 분명했다.
판타지 소설을 읽을 때, 꼭 그런 인물들이 나온다.
미래의 기억을 안고 과거로 돌아가는 회귀한 자.
샤를이 있는 이곳도 판타지 소설이니 가능할 법한 이야기였다.
아니, 자신을 릴리아나라 부르고 찾아다닌 것.
그리고 헥터가 하지도 않은 원작의 내용을 안다는 건 회귀 말고는 설명이 불가능했다.
‘맛이 갔어.’
샤를은 세드릭을 설득하기를 포기했다.
세드릭의 눈빛을 보고 더 이상의 대화는 소용없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릴리아나를 구하려다 헥터에게 죽임을 당하는 원작의 내용이 세드릭의 마지막 기억일 것이다.
거기다 대고 ‘내가 빙의자요. 미래는 달라졌소.’라고 해봤자 통하지 않을 테다.
이미 자신은 그 일을 겪었고 헥터에게 죽었으니.
우선 이곳에서 빠져나가는 것이 가장 문제였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는 모르겠으나, 체감상으론 족히 반나절은 넘은 듯해 보였다.
‘이 병X.’
카이시스가 자신을 찾지 못할 리 없다.
그를 뒤늦게 깨닫고 미카엘에게 돌아가려던 참이었다.
‘왜 마나스톤은 벗어서.’
아마 찾지 못하는 것은 저 알 수 없는 마법진들 때문일 터.
그런데 생각을 읽는 카이시스가 왜 세드릭의 회귀는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이 등신, 병X.’
샤를이 제 머리를 쥐어박았다.
그때, 푸른 녹색 빛이 일더니 세드릭의 모습이 나타났다.
“리아.”
들고 온 음식을 황급히 내려놓은 세드릭이 샤를의 손을 움켜잡았다.
“지금, 무엇을 하는 겁니까.”
뭐 하긴 내 대가리 박고 있지.
샤를이 원망 가득한 눈초리로 세드릭을 노려보았다.
세드릭은 그런 샤를을 보며 안타깝다는 듯 낮은 숨을 내쉬었다.
“묶진 않으려 했었는데…….”
뭐? 묶어?
뭐 이 미친 자야?!
샤를이 거부하려 몸을 움직이기도 전, 푸른빛의 사슬이 샤를의 사지를 결박했다.
“……!”
샤를이 버둥거렸으나 세드릭의 이능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일단 식사를 해야 하니, 입은 막지 않겠습니다.”
세드릭이 다정한 표정으로 말했다.
경악에 휩싸인 샤를의 입이 쩍- 하니 벌어졌다.
‘이, 이거 완전히 맛이 갔잖아.’
세드릭은 그런 샤를이 보이지 않는지, 가져온 수프를 떠올려 샤를의 입 앞으로 가져왔다.
“손이 묶여 있으니, 제가 먹여드릴 수밖에 없겠습니다.”
“……!”
즐겁다는 듯 미소 짓고 있는 세드릭의 모습에 샤를은 소름이 돋쳐 올랐다.
납치, 감금.
소설 속에서나 본 상황을 실제로 맞닥뜨리니, 그 충격은 가히 형용할 수 없는 것이었다.
“리아, 먹어야죠.”
이 새X는 지금 제정신이 아니다.
반항하면 무슨 일을 당할지도 모른다.
살고자 하는 본능은 눈앞에 다가온 스푼을 덥석 물었다.
“하아…….”
그를 본 세드릭이 황홀감에 젖어 낮은 탄성을 흘렸다.
“묻으셨습니다…….”
세드릭의 손이 샤를의 입술에 묻은 수프를 닦아냈다. 그리곤 제 입으로 가져가 그대로 핥아 올렸다.
“……!”
풀린 녹안이 샤를에게 끈덕지게 달라붙었다.
샤를은 두려움에 절로 몸서리가 쳐졌다.
“흐음.”
세드릭이 깊은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그 순간, 차갑게 표변한 얼굴이 일그러졌다.
“어째서 헌트 대공작과 있을 때와 페로몬이 다른 걸까요.”
아, 신이시여.
“꼭, 그를 사랑하기라도 하는 것처럼요.”
시X.
X됐다.
* * *
어느덧 하늘엔 깊은 어둠만이 내려앉아 있었다.
어둠이 진해졌다는 것. 그건 곧 헥터의 힘이 강해졌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낮과 마찬가지로 샤를의 행적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세드릭 또한 같았다.
“그간 세드릭의 행적을 조사했으나 종적이 묘연합니다. 황제 쪽에서도 단서를 찾지 못한 듯합니다. 죄송합니다. 각하.”
“그 새끼, 저번부터 수상하다 싶었습니다!”
태너의 보고에 화를 참지 못한 레온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원정 때 제가 죽였어야 했습니다. 아니, 저번 날 샤를 양의 손을 놓지 않았을 때. 그때 죽였어야 했습니다.”
레온의 말에 태너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손이라니.”
“그 새끼가 샤를 양의 리본을 주워주던 날 말입니다. 다짜고짜 샤를 양의 손목을 부여잡길래 놓으라니까, 오히려 저한테 아는 사이냐고 묻더라고요.”
“그걸 왜 이제야 말하나.”
태너의 목소리가 커졌다.
“그야……. 샤를 양이 기겁하면서 뿌리쳤고, 각하가 일을 내실까 봐…….”
레온이 헥터의 눈치를 보며 머뭇거렸다.
태너가 되물었다.
“샤를 양이?”
“예, 무슨 트롤이라도 본 것처럼 소스라치더라니까요. 그리고 안 그러던 놈이 갑자기 그러니까 약을 처먹었나 싶어 넘겼죠.”
세드릭의 성정과 평판이야 레온도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오랜 기간 준비했겠군.”
태너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비록 제로이긴 하나, 샤를 양의 성력은 미라클입니다. 존재를 드러낸다면 분명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소속 가이드 계약으로 위험에 처한다면 바로 알 수 있지 않습니까.”
태너가 고저 없는 목소리로 헥터에게 말했다.
“미라클이요?”
영문 모를 소리에 레온이 태너를 돌아보았다.
“샤를이 스스로 마나스톤을 두고 갔다.”
헥터가 얼굴을 감싸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저는 샤를 양을 믿습니다.”
태너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나직이 뇌까렸다.
“본디 고양이는 목줄을 차지 않는 법이니까요.”
* * *
그 시각.
샤를은 다가오는 세드릭을 보며 만감이 교차하고 있었다.
생각해야 한다.
뇌야, 작은 뇌야. 어서 원작을 떠올리려무나.
샤를은 열심히 좁은 머리를 뒤지며 빠져나갈 방안을 궁리했다.
카이시스와 헥터는 그랜드 마스터이나, 세드릭은 레온과 같은 마스터다.
그래도 둘보다는 약하겠지.
“리아.”
세드릭이 샤를의 어깨에 살며시 얼굴을 기댔다.
단 한 번도 잊어본 적 없던 향기. 느껴지는 페로몬은 세드릭의 기억 속 릴리아나 그대로였다.
아니, 더 짙고 단전이 저릴 정도로 향긋했다.
“나의 리아……. 정화해줄게요.”
“시, 싫어. 오지 마.”
“리아, 당신은 날 사랑하는 거 압니다. 그저 지금은 흑마법에 걸려 있을 뿐이에요.”
“아니야!”
“리아.”
세드릭의 내민 혀끝이 목덜미를 핥아 올리고 뻗어진 손은 치맛자락을 들치며 허벅지를 쓸었다.
‘싫어!!’
쾅-!
찰나의 순간, 카이시스 때처럼 거대한 소리와 함께 바람이 확 끼쳐왔다.
“……!”
놀란 샤를의 눈이 크게 떠졌다.
튕겨 나간 세드릭은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이게 무슨…….”
세드릭이 고통스러운 듯 가슴을 움켜쥐며 말했다.
그러게.
이게 무슨 일이지 싶던 찰나, 샤를의 뇌리로 헥터의 말이 스쳐 지나갔다.
[소속 가이드란 계약자에게만 가이드할 것을 서약하며 신의 보호를 받는 계약이다.]
소속 가이드.
[타인의 소속 가이드를 강제로 취하려 든다면 신의 뜻을 어긴 것이기에 신전도 황실도 개입할 수 없지.]
혹시 그래서?
[황실과 신전이 너의 존재를 알게 되면 어떤 수를 써서라도 내게서 떼어내려 할 것을 알고 태너가 미리 조취를 취한 것이다.]
샤를의 눈앞으로 얄미운 웃음 하나가 떠올랐다.
시X.
악마 새끼.
‘다 용서해줄 수 있어.’
아니, 여태까지 번 돈을 다 퍼줘도 괜찮을 정도였다.
[제로의 페로몬은 특히, 자료가 거의 없는 상황입니다. 만약 샤를 양이 개방에 성공한다면 연구 자료의 제공 대가로 오백 트랑을 지급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샤를은 헥터의 시녀가 되기 전. 태너와 수업을 함께했었다.
거기서 알게 된 사실이 하나 있었으니, 페로몬은 신성력으로도 무력화시키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당신 회귀했지.”
샤를의 말에 세드릭의 눈매로 힘이 들어갔다.
“과거에서 돌아온 거 아니야. 그럼 알 텐데. 내가 릴리아나가 아니라는 걸.”
모를 리가 있나.
몸 안에 다른 사람이 들어차 있는데.
정말 사랑했다면 더 모를 리 없을 것이다.
“리아……. 드디어 기억이 나셨습니까.”
허-
이 새X, 정말 맛이 갔다.
저 환희에 차올라 울 것 같은 표정을 보라.
하지만 세드릭이 릴리아나를 사랑했던, 안타깝게 죽었던, 그건 샤를이 알 바가 아니었다.
기억도 없는 사람 납치해서 강간하려는 세드릭을 안쓰러워해줄 만큼 넉넉한 형편도 아닐뿐더러, 애초에 이딴 건 사랑이 아니다.
“당신이 모르는 게 한 가지가 있는데.”
샤를이 말을 늘어트리며 숨을 가다듬었다.
“난 빙의자거든, 그러니까 여긴 소설 속이고…….”
소설?
의미를 알 수 없는 샤를의 말에 다가오려던 세드릭이 그대로 행동을 멈췄다.
“나는…….”
점점 격양되는 감정에 샤를이 거친 콧바람을 내쉬었다.
“원작을 안다는 거지. 악마 새끼도 알고.”
“……?”
세드릭의 고개가 기울어지던 순간, 샤를의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
“헥터!!!”
강한 자색 빛이 세드릭의 결계를 집어삼켰다.
미라클의 페로몬 개방이었다.
그 순간, 헥터의 입매가 살며시 올라가며 어둠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 * *
쩌적, 쩌적- 쾅-!
세드릭이 만든 결계가 부서지고 시원한 공기가 들이닥쳐 왔다.
“샤를.”
단숨에 세드릭의 사슬을 풀어낸 헥터가 샤를을 가벼이 안아 들었다.
그와 동시에 세드릭은 어둠의 이능으로 전신이 속박당했다.
“마나스톤.”
헥터가 샤를을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왜 풀었지.”
“…….”
당신에게서 도망치려 했다고, 사실 ‘나는 빙의자고, 원작의 이 몸에게 흑마법을 남발하며 공중에 띄워놓고 별짓 다 할 걸 안다고.’ 어떻게 말하겠나.
“가, 갑갑해서?”
이왕 위선자 된 거 계속하지 뭐.
샤를이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헥터가 샤를의 몸을 감싸며 제 품으로 한층 더 끌어당겼다.
“저딴 걸 원하나?”
헥터가 꼭 쓰레기를 보듯 세드릭을 눈짓했다.
이 짙은 기시감은 무엇일까.
샤를은 읍읍- 거리고 있는 세드릭 한번. 그리고 형형한 눈빛을 띠는 헥터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어…….”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납치가 아니라 자진. 아니, 저 미친놈이랑 계속 있어야 한다는 소리가 아니겠는가?
다 떠나서 ‘저딴 거’라 지칭하는 질문의 의도 자체가 부정을 원하고 있음이었다.
샤를은 설레설레 고개를 내저었다.
“아뇨.”
그 순간, 헥터의 얼굴 위로 실금 같은 미소가 번졌다.
“아니라는군.”
헥터가 세드릭을 깔아 보며 조소했다. 그러다 일순, 싸늘하게 표변한 얼굴이 비틀렸다.
붉은 눈동자로 짐승의 안광 같은 이채가 일었다.
지독하리만큼 매섭고 섬뜩한 모습이었다.
등줄기를 스치는 살기에 샤를은 오소소- 소름이 돋쳐 올랐다.
“다 놀았나.”
세드릭을 흘끔거린 샤를이 주억거렸다.
“그럼 이만, 집으로 돌아가지.”
검은 망토가 위압적인 자태로 펄럭였다.
이윽고 홀연히 사라진 둘의 자취처럼 시린 바람이 불어왔다.
* * *
헥터는 샤를을 데리고 대공저 침실로 향했다.
“샤를.”
높고 반듯한 콧대가 샤를의 볼에 비벼지고 약간 거친 턱이 목덜미를 간질였다.
“헥터, 간지러워요.”
비비적거리는 헥터의 행동에 샤를이 웃음을 터트렸다.
꼭 주인을 기다렸던 대형견이 다가와 애교를 피우는 느낌이었다.
흔드는 꼬리가 주는 충격이 퍽 커서 당황스럽지만, 기분 좋은 그런 느낌말이다.
너른 어깨에 손을 두른 샤를이 조심히 헥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샤를.”
쪽- 쪽- 쪽.
헥터의 입술이 온 얼굴을 뒤덮을 기세로 여기저기 쏟아져 내렸다.
그러다 헥터가 잘근잘근 샤를의 살결을 물었다.
“아읏.”
살짝 아플 정도로 깨물기도 해서 놀랐으나 통증은 금세 사라졌다.
뒤이어 휘몰아치는 헥터의 페로몬 때문이었다.
“하아…….”
밀려드는 페로몬이 온몸의 피를 달궈내는 것만 같았다.
그간 헥터는 샤를을 위해 페로몬을 조절해왔었다.
마스터인 샤를이 감당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최대한 억누르고 참는다. 참았지만, 한 번씩 자신도 모르게 터져 오를 때면 샤를은 여지없이 숨을 헐떡였다.
그런데 이젠 그럴 필요가 없지 않겠는가?
아니, 저보다 높은 미라클이니 최대치를 끌어 올려야 할 터였다.
그리고 느껴지는 세드릭의 페로몬에 대한 본능적 적대감도 한몫했다.
“하읏, 헥터.”
“응.”
응?!
돌아오는 짧은 대답에 놀란 샤를이 헥터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침대에 눕혀진 탓에 그는 오래가지 못했다.
“자, 잠깐.”
“싫다.”
풀썩 떨어진 몸 위로 올라탄 헥터가 샤를을 어루만질 때와는 달리 거친 손길로 옷을 벗어내기 시작했다.
한 손으로 샤를의 고개를 받치고 있는 터라 쏟아붓는 키스는 멈춤이 없었다.
“하아……. 하…….”
팽팽하게 핏줄이 돋아난 팔이 샤를을 휘감았다.
이윽고 세드릭의 손길이 닿았던 성녀복이 저 멀리 던져졌다.
뒤이어 화르르- 불이 붙어 순식간에 재가 되어버렸지만, 온 입안을 헤집는 헥터 때문에 샤를은 그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하읏.”
한 손으로 말랑한 가슴을 부여잡은 헥터가 유두를 이리저리 빙글거렸다.
서로의 타액에 젖어 뒤엉키는 입술이 색정적인 소리를 울렸다.
샤를의 허리 아래로 손을 넣은 헥터가 단전을 내리며 음부를 비비기 시작했다.
“하응!”
짙은 헥터의 페로몬에 가만있어도 숨을 쉬기가 버거울 지경이었다.
결국, 버티지 못한 샤를이 너른 가슴을 밀어냈다.
“하아, 헥터.”
겨우 트인 숨을 몰아쉬어 보지만, 들어오는 것은 더 진해진 헥터의 페로몬뿐이었다.
“하앙!”
그대로 얼굴을 내린 헥터가 샤를의 가슴을 머금었다. 그와 동시에 헥터의 손끝이 여린 살덩이를 헤집으며 비집고 들어갔다.
벌어진 살결이 머금고 있던 애액을 흘려내며 헥터를 반겼다.
음핵을 부여잡고 돌리는 손길에 맞춰 허리가 허공으로 떠올랐다.
발끝이 말아질 즈음 헥터는 샤를의 속옷을 벗겨냈다.
활짝 벌어진 다리로 여실히 드러난 여린 속살이 꿈틀거렸다.
그를 어르듯 헥터의 혀끝이 음부 위를 길고 부드럽게 핥아 올렸다.
“하으으…….”
샤를의 몸이 자르르 떨림을 냈다.
헥터는 세운 혀로 속살을 긁어내듯이 핥다가 단 한 방울도 남기지 않겠다는 듯 강하게 빨아댔다.
쭈압거리는 노골적인 소리가 고막을 진동시켰다.
“하으아앙.”
샤를의 교성이 터져 나왔다.
온몸이 성감대가 된 것처럼 예민한데 가장 민감한 부위가 마구 휘저어지니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벌써 눈가가 촉촉해진 샤를이 절정에 다다르며 다리를 떨었다.
“하앙!”
그리 전율하던 찰나, 살결을 비집고 몸 안으로 들어오는 헥터의 손가락에 샤를은 탄성에 가까운 신음을 내질렀다.
절정이 채 끝나기도 전에 넣어진 손끝으로 절로 고개가 꺾어졌다.
“허윽, 읏.”
찌걱거리는 소리가 맞춰 뻣뻣하게 힘이 들어간 몸이 바드드- 떨렸다.
절정에 절정이 더해진 몸은 쾌락을 이기지 못하고 흔들리는 손짓에 맞춰 애액을 뿜어냈다.
둔부까지 흥건해진 애액에 이젠 철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헥터는 샤를의 한쪽 다리를 잡아 올리며 단단해진 귀두로 음핵을 비비기 시작했다.
“하아으앙.”
주체하지 못한 몸이 이리저리 비틀렸다.
아직 채 가시지 않은 오르가슴에 헐떡이는 샤를을 지그시 바라보던 헥터가 기다릴 수 없다는 듯 허리에 힘을 주었다.
좁은 구멍 길을 젖히고 들어오는 불덩이에 놀란 몸이 벌떡 뛰어올랐다.
빠듯하게 벌어지는 느낌은 그대로 허리를 타고 머리를 박살 내는 기분이었다.
꾸역꾸역 끝까지 들어온 헥터는 그에 그치지 않고 벽을 꾸욱 누르며 비벼냈다.
“하윽! 하으읏.”
더 커진 것 같은 건 기분 탓일까.
샤를은 안 된다고 말하려는 듯 손을 휘적거렸다.
하지만 그를 잘못 이해한 헥터는 내민 손을 맞잡으며 입술을 맞췄다.
헥터가 밀어 넣은 것을 천천히 빼내었다. 딸려 나오는 살결이 그를 놓치지 않을 것처럼 늘어졌다.
그러다 다시 밀고 들어오는 감각에 샤를의 내벽이 잘게 떨리며 죄어왔다.
“하아……. 샤를.”
그냥 그대로 있었어도 미칠 것 같던 제 여인인데, 미라클까지 되어버렸으니.
제 것을 밀어 넣을 때마다 달빛에 흔들리는 다이아몬드 같은 은발과 빨려 들어갈 것 같은 자안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왜 자신을 이렇게도 돌아버리게 하는 건지.
헥터는 연신 허릿짓을 하며 샤를의 얼굴에 입 맞췄다.
“하앙, 하응.”
촉촉이 맺혀 있던 샤를의 눈물은 어느새 헥터가 모조리 머금어 사라졌다.
퍽퍽 박히는 성기를 비집고 하얀 거품이 새어 나왔다.
“하아, 하. 하윽.”
헥터의 숨소리가 점점 거칠어져 갔다.
너무 야한 소리에 샤를은 제 흥분도 잊고 헥터를 바라보았다.
고통과 환희. 어딘가에 걸쳐진 미간이 찌푸려져 있었다.
“미치겠어.”
쪽-
샤를의 귓가에 얼굴을 묻은 헥터가 속삭였다.
“각인하고 싶어. 샤를.”
샤를은 이제 미라클이다.
마스터일 땐 무리가 갈까 감히 엄두도 못 냈던 일이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노팅을 한다면 서로는 서로에게 완벽히 얽혀진 존재가 된다.
소유하고 싶다.
가지고 싶다.
자신을 새겨 넣을 수만 있다면 그러고 싶은 욕구는 흘러넘쳐 감당이 안 되는 수준이었다.
“나, 나는 그거 할 줄 몰라요.”
샤를이 당황하자 질안이 꽈아악 헥터를 물어냈다.
절로 인상이 찌푸려진 헥터가 싫지 않은 웃음을 흘렸다.
“나도 모른다.”
“에?”
“나도 안 해봤어.”
“그건…….”
그렇겠지.
근데 어떻게 하겠다는 건지 싶던 찰나, 그 대답처럼 아래에 들어찬 헥터의 성기가 두근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냥…….”
점점 뜨거운 열기가 샤를을 잠식했다.
“네게 나를 새겨 넣을 거야.”
낮고 굵은 헥터의 음성이 공명을 내며 샤를의 심장을 진동시켰다.
“하으으앙!”
퍽- 끝까지 들어오는 강렬한 자극에 샤를의 고개가 젖혀졌다.
꼭 시야가 새하얗게 점멸되는 기분이었다.
“하응, 하앙, 하으읏.”
“하아, 하……. 하아…….”
헥터가 샤를을 끌어안고 거친 숨을 쏟아내며 가녀린 몸을 타고 올랐다.
샤를은 터질 듯이 요동치는 심장과 아찔해진 정신에 헥터의 등허리를 쓸어내며 전율했다.
몇 번의 절정을 맞이하고, 몇 번의 사정이 이어진 건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온 신경이 몸 가장 안쪽. 서로가 서로에게 연결된 부위에 집중된 것만 같았다.
“샤를.”
“하으앙, 하아으앙.”
“샤를.”
헥터가 애타게 샤를을 부르며 입술을 찾았다.
서로의 입술이 얽혀지며 퍽퍽 깊숙이 들어차는 반동에 몸이 흔들거렸다.
그러다 헥터의 페로몬이 꼭 눈에 보이는 듯 검붉은 빛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샤를은 본능적으로 헥터를 더욱 꽉 끌어안았다.
“흐윽, 하윽, 흑!”
“읏…….”
그 순간, 터질 것처럼 부풀어 오른 성기에서 뿜어져 나온 정액이 힘있게 샤를의 몸 안으로 흩뿌려졌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허공에 온몸이 떠오른 것처럼 기묘한 쾌감이 전신을 휘감았다.
샤를과 헥터의 노팅.
즉, 진정한 각인이었다.
“흐으으……. 빼줘요.”
감각을 이기지 못한 샤를이 헥터의 가슴을 긁어내렸다.
헥터가 그런 샤를이 귀엽다는 듯 꽉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못한다.”
“에?”
“이러고 하루는 있어야 해.”
물론, 그는 거짓말이었지만.
헥터는 다시금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으음…….”
목이 까글거린 샤를이 잠결에 손을 더듬거렸다.
이윽고 무엇을 원하는지 안다는 듯 시원한 물이 입술을 지나 식도를 타고 넘어갔다.
후아-
이제야 살 것 같은 샤를이 성대한 숨을 내쉬었다.
“샤를.”
헥터는 그런 샤를의 어깨에 이불을 둘러주며 얼굴을 비볐다.
하지만 다시금 잠에 빠져든 샤를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샤를, 배고프지 않나.”
“으음…….”
귀찮은 기색으로 샤를의 얼굴이 한껏 찌푸려졌다.
그러다 헥터가 조용해지자 잔뜩 구겨졌던 미간이 사르륵 풀렸다.
“…….”
조금만 할 걸 그랬나.
미라클의 페로몬 개방과 마음 한편에 든 조바심에 전력을 다하긴 했다만.
도통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비몽사몽인 샤를을 보니, 헥터는 괜스레 죄책감이 밀려들었다.
평소에도 아침잠이 많은 샤를이었으나 벌써 해가 져가고 있었다.
사실 각성 후. 기도실에서 밤을 새운 여파도 있었다.
그러나 그를 모르는 헥터는 머쓱히 침대에서 일어났다.
기척을 죽이고 조심히 침실을 빠져나오자 문 앞에 기다리고 있던 태너가 헥터를 반겼다.
“입이 찢어지겠군.”
헥터가 나직한 목소리로 뇌까렸다.
입이 귀에 걸린 태너는 정말이지, 곧 찢어질 것 같은 모습이었다.
침실에서 한참이나 멀어지고서야 헥터가 입을 열었다.
“황군은 아직도인가.”
길게 말할 것도 없다는 듯 태너가 창밖 너머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엔 카이시스의 군대가 대공저를 에워싸고 있었다.
하지만 검은 결계가 쳐진 대공저 안은 그저 고요하기만 했다.
카이시스가 직접 오지 않는 이상. 아니, 직접 온다고 하더라도 헥터의 실드를 쉬이 뚫을 수 없을 것이다.
같은 그랜드 마스터라 하나, 이제는 그 급이 달라졌으니 말이다.
“각인했단 걸 모르나.”
“알렸습니다.”
“자존심인가.”
“제일 먼저 축하해주고 싶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즐비한 황군에게서 시선을 거둬들인 헥터가 말했다.
“세드릭은.”
“기사단이 도착했을 때 이미 재가 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카이시스의 짓이겠지.”
“그 성질에 어련하겠습니까.”
“샤를을 가둬두었던 땅의 정체는 알아봤나.”
“대지의 이능과 금지 마법으로 오랜 시간 공들여 만든 방어진인 듯합니다. 신전 측 조사에 따르면 성수를 사용한 것 같다 하니, 그 때문에 이능이 닿지 못한 것이라 판단됩니다.”
“미친 새끼.”
오랜만에 튀어나온 욕설에 태너의 눈매가 슥- 올라갔다.
“또한, 황제의 이능이 통하지 않은 건 금기 마법인 저주를 사용한 듯합니다.”
“자기 영혼을 스스로 갉아먹었다는 소리인가?”
저주를 사용하면 자신에 대한 기억을 지울 수 있다.
하지만 말 그대로 저주를 사용한 것이기에 영혼이 타락한다.
그리고 그것이 계속되면 결국, 미쳐서 폭주하기에 이른다.
“방어진에서 금지 마법이 있던 것을 고려하면 본인 스스로 저주를 내려 기억을 지운 방법밖엔 없습니다.”
“단단히 미쳤군.”
헥터가 질린다는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교황이 샤를 양의 안위를 확인해야겠다고 하도 성화를 부려, 일단은 각인으로 인해 깊은 수면 중이라고 진정시켜놓았습니다만.”
슬쩍 헥터의 눈치를 살핀 태너가 말을 이었다.
“결혼식도 올리지 않고 각인하였다 더 길길이 날뛰는 모양새가……. 오늘을 넘기면 대공저를 부수고 들어올 기세였습니다.”
“누가 보면 샤를이 제 자식인 줄 알겠군.”
“이미 그리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샤를하고 또래이지 않나?”
“자식이라 할 순 없으나, 그래도 각하보다는 나이가 많습니다.”
“뭐?”
놀란 헥터가 태너를 돌아보았다.
“신관들은 대체로 동안이니까요.”
태너는 진짜라는 듯 짧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 * *
“엠마,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제 머리에 무슨 짓을 하는 것인지, 샤를은 거울은 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로부터 꽤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다.
미카엘은 참지 못하고 결국, 신성력으로 결계를 부숴 대공저를 쳐들어왔다.
그 덕에 억지로 깨어난 샤를은 밍기적거리며 미카엘에게 얼굴을 보여야 했다.
[자매여, 이곳은 있을 곳이 못 됩니다! 저자는 짐승입니다!!]
샤를을 본 미카엘은 더 난리를 피웠다. 새하얀 목덜미 여기저기에 새겨진 울긋불긋한 자국 때문이었다.
그래도 헥터가 아니었더라면 세드릭에게 강간당할 뻔했단 샤를의 말에 미카엘은 순순히 돌아갔다.
시체 잔해라도 찾아 흔적도 없이 태워버리겠다는 헥터를 말리느라 태너가 고생이었지만.
카이시스와 헥터의 대치상태는 평화롭게 끝났다.
이미 각인을 해버린 샤를을 카이시스가 어찌할 방도는 없었다.
이후, 성녀식도 무사히 끝마쳤다.
노엘 역시 아쉬움을 표했으나, 별말 없이 키란과 함께 돌아갔다.
‘원작에서 릴리아나가 누구 한 명과 각인만 했었더라면 되는 거였네.’
샤를은 각인의 대단함을 새삼 느끼며 주억거렸다.
에드워즈 가문은 그의 친척 여동생인 아일리아 에드워즈가 뒤를 이어 가주의 자리에 올랐다.
그사이, 가장 큰 일을 꼽자면 신전과 헌트 가문의 관계 변화였다.
라파가 말한 신전 기사단은 정식으로 허가를 받았다.
샤를의 습격과 납치, 그리고 성수를 훔쳐 사용한 세드릭까지. 이는 황실파조차 반대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검술을 가르쳐주기로 한 이들은 바로, 헌트 기사단이었다.
[장인의 등쌀에 못 이긴 것이 아니겠습니까.]
언제부터 미카엘이 자신의 아버지가 되고 헥터에게 장인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잘된 일이기에 샤를은 말리지 않았다.
[가르쳐줘도 문제없습니다. 어차피 발끝에도 미치지 못할 테니까요.]
레온은 쿨하게 헥터의 지시를 받아들였다.
훈련 교관은 데릭이 맞았다.
어찌나 좋아하던지, 안 시켜줬으면 서운해서 어쩔 뻔했나 싶은 정도였다.
[뼈대가 좋아 조금만 키우면 맷집이 쓸 만할 겁니다.]
[전문용어로 몸빵이라고 하죠.]
[몬스터를 몸으로 잡는 겁니다. 신관님, 으하하.]
헌트 기사단도 원정에 끌고 갈 생각에 잔뜩 신이 난 모양새였다.
[성 기사단 어때요?]
기사단의 이름을 고심하는 미카엘에게 샤를이 툭 던져주었다.
‘그 이름 말고 더 있나.’
가부간 헥터가 그랜드 마스터란 사실도 만천하에 공개되었다.
다행히 새로운 맹약을 체결하는 것으로 제국의 평화는 유지되었다.
“샤를, 울면 안 돼.”
샤를의 땋아진 머리카락 사이사이, 작은 다이아몬드로 장식해주던 엠마가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어트리며 말했다.
“엠마, 네가 울고 있어.”
“내가?!”
그제야 울고 있었단 사실을 자각한 엠마가 손등으로 쓱쓱- 눈물을 훔쳤다.
“근데 엠마.”
“응?”
“은발이라 더 장식해도 티가 안 나지 않을까?”
“그, 그런가……. 그래도 신부는 반짝반짝 빛나야 하는걸. 아직 다이아몬드가 많이 남아 있어.”
다이아몬드로 머리카락 장식이라니, 참 헥터다운 발상이었다.
“이미 충분히 아주 눈부시게 반짝거리는 거 같아.”
제 머리가 무슨 꽃꽂이 화병도 아니고.
보석을 쑥쑥 꽂아놓는 것이 퍽 기분 좋지 않다는 말을 삼킨 샤를이 빙긋이 웃어 보였다.
“그건 그래.”
샤를의 말에 곰곰이 생각에 잠겼던 엠마가 끄덕일 때였다.
똑똑-
“태너입니다.”
“들어오세요.”
곧이어 둔탁한 문이 열리고 면사포를 손에 든 태너가 방으로 들어왔다.
집사한테 면사포를 받는 게 전통이라니. 참으로 특이한 문화가 아닐 수 없었다.
태너는 연습한 대로 조심조심 샤를의 머리 위에 면사포를 씌워주었다.
새하얀 면사가 웨딩드레스 위로 길게 늘어졌다.
“샤를, 너무 예쁘다.”
엠마가 펄쩍펄쩍 뛰며 손바닥을 맞부딪혔다.
“꼭 새하얀 고양이 같아.”
고양이?
샤를이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았다.
은발에 눈동자까지 보라색이 되어 그런가, 확실히 전보다 도도해 보이긴 했다.
“고양…….”
[아주 작고 부드러운. 순백의 새끼 고양이를 안고 있는 느낌입니다.]
순간, 샤를의 고개가 삐걱거리며 태너를 응시했다.
“태너 경.”
“예, 대공비 전하.”
“혹시, 회귀라고 들어보셨어요?”
샤를의 질문에 태너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그게 지금……. 무슨 말이죠?”
그에 뒤지지 않는 샤를이 되물었다.
“과거에서 돌아오는 거요.”
순간, 굳어 있던 태너의 표정이 사르륵 풀어지며 옅게 웃음 지었다.
“릴리아나 말씀입니까?”
“허어…….”
샤를의 입이 경악으로 쩍 벌어졌다.
반면, 태너는 태연하게 샤를을 일으키며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미카엘에게 안내했다.
“어차피 그분이 아니지 않습니까.”
“……!”
* * *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고.
어째서 이 버진로드마저도 태너의 계획인 것만 같은지.
‘악마 새끼가 맞았어.’
그러다 훌쩍이는 코 먹는 소리에 샤를이 미카엘을 돌아보았다.
대체 왜 우는 것일까.
아니, 애초에 아버지도 아닌데 왜 자신은 미카엘의 손을 잡고 걸어 들어가고 있는 것일까.
그리 한참을 걸어 헥터 앞에 다다른 샤를은 경탄을 금치 못했다.
‘허……. 이게 뭐야.’
잘 재단된 예복이 고고한 자태를 뽐내며 그의 몸을 감싸고 있었다.
깔끔하게 쓸어 올려진 머리카락과 붉게 빛…….
“흐읍.”
미카엘의 손을 놓고 헥터의 손을 잡던 샤를의 눈이 놀라 휘둥그레졌다.
당신은 또 왜 울어?!
“바람이 부는군.”
헥터는 눈물을 감추듯 빠르게 눈을 깜빡이며 샤를을 향해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바람은커녕, 미풍도 불지 않는구먼.
샤를이 픽- 하니 웃음을 흘렸다.
그리 다시 앞을 보는데 어느새 주례석으로 올라간 미카엘이 눈물을 찍어내고 있었다.
“…….”
어디 그뿐인가, 저 멀리 초대받고 참석한 노바와 함께 온 토마스, 레온과 루크. 거기다 엠마까지. 다들 아주 목놓아 꺼이꺼이 울고 있었다.
‘다들 왜 그러는 건데.’
결혼은 기뻐야 하는 거 아닌가?
여긴 결혼식 문화가 눈물 한 방울씩 흘려주는 건가.
샤를이 질색하는 표정을 짓던 찰나였다.
“샤를.”
헥터가 샤를의 손을 들어 검붉은 보석이 박힌 반지를 조심스레 끼워주었다.
“이제 갑갑하지 않을 거다.”
물기 어린 헥터의 눈매가 사르륵 접혔다.
뭐, 좀 울면 어떤가.
신부만 기쁘면 된 거지.
샤를이 헥터를 올려다보며 해사하게 웃음 지었다.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