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본문
15.
샤를이 한바탕 뒤집은 신전은 고요했다.
마치 폭풍우가 휘몰아치기 전처럼.
그리고 샤를은 또 다른 난관에 봉착해 있었다.
“…….”
방긋방긋.
사르륵 접힌 눈꼬리가 고운 호선을 그리고, 즐거운 듯 갸웃거리는 고개에 맞춰 청옥색 머리카락이 가볍게 살랑거렸다.
이건 또 무슨 상황일까.
노엘을 보는 샤를은 눈을 끔뻑였다.
“일전의 감사 인사를 드리고자, 결례를 무릅쓰고 이리 찾아왔습니다.”
보다 못한 키란이 한숨을 쉬듯 말했다.
노엘이 샤를을 찾아가겠다고 말했을 때, 키란은 제 귀를 의심했다.
평소 정치적으로 얽힐 만한 일은 모조리 피해 다니던 노엘로서는 이례적인 행보였다.
더구나 이 시기에 샤를을 찾아온다는 건 카이시스에게 맞서는 것과 진배없었다. 헌트 가문과도.
그런데 그 어려운 걸음을 하고 와서 그저 방실거리기만 하다니. 한숨이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군요.”
샤를이 대답한 것이 아니었다.
원형의 테이블 위, 키란과 정면으로 마주 앉은 미카엘이 한 말이었다.
헌트 기사단을 맞이한 것처럼 미카엘은 노엘의 방문을 막지 않았다. 그리고 샤를 역시 키란과 함께 왔다는 노엘을 만나겠다고 했다.
조쉬의 일도 있었고 자신을 찾아온 이유가 궁금한 까닭이었다.
“인사는 들었으니 용건이 끝나셨을까요.”
미카엘이 뭐라고 하든지 말든지.
노엘은 이 자리에 단 한 명만 있는 것처럼 샤를에게 향한 시선을 떨어트리지 않았다.
방긋방긋-
코끝을 파고드는 이 향기. 헥터의 향으로 가려져 있지만 달콤함마저 숨길 수 없었다.
성녀라.
처음엔 잃어버린 황녀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조쉬의 일도 그렇고 원정 일정 때 일도 그렇고, 헥터의 사람이라 여겼다.
한데 샤를은 신전으로 향했다.
더욱이 지금, 헥터와 카이시스는 당장 전쟁이라도 일으킬 것처럼 일촉즉발의 대치 상태였다
그 와중에 성녀는 신전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이보다 흥미로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좋아하는 거 아니야?”
가볍고 싱그러운 음성이 테이블을 가로질렀다.
다짜고짜 두서없이 던져진 노엘의 질문에 샤를의 미간이 구겨졌다.
“뭐요?”
“당근케이크.”
콕콕.
노엘이 커다란 케이크를 가리키듯 눈짓했다.
“이거 좋아한다고 그래서 특별히 만들어 온 건데.”
샤를은 그제야 제 앞에 놓인 케이크를 내려다보았다.
“아니야? 다른 거 좋아해?”
사슴고기를 가져올 걸 그랬나. 노엘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
샤를은 딱히 당근케이크를 좋아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마테오 때문에 당근을 하도 먹어서 싫어졌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리고 당근케이크를 보자 헥터가 떠올라 방금 더 싫어진 참이었다.
“근데요.”
샤를이 시선을 들어 올려 노엘을 쳐다보았다.
“응.”
“초면에 왜 반말이세요?”
“우리 초면 아닌데.”
찰랑-
우로 기울어진 노엘의 고개로 인해 긴 귀걸이의 보석들이 부딪히며 청아한 소리를 냈다.
“…….”
노엘의 말이 맞았다.
원정대에서 크고 작은 일을 겪으며 마주쳤던 사이니까.
하지만 제대로 대화를 나눈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말 놓기로 한 적 없는데요.”
“그런 걸 말하고 해야 해?”
도리어 말문이 막혀버린 샤를이 어버버거렸다.
지켜보던 키란은 에휴- 하고 탄식을 흘렸다. 미카엘은 무슨 상황인가 싶어 둘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노엘은 대공. 샤를은 제로였다. 비록 성녀의 작위를 받더라도 노엘과 동급이었다.
“그럼 너도 말 놔.”
“…….”
서로 존댓말을 한다는 선택지는 없는 것인가.
샤를은 소설을 읽어 노엘의 성격을 아는 탓인지. 화가 나진 않았다.
아니, 오히려 상상했던 모습과 너무 닮아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서론은 빼고 본론만 말하는 어투, 자유로운 영혼, 그리고 오만함까지.
“마음대로 하세요.”
샤를이 포기했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노엘은 더 짙고 밝게 웃음 지었다.
그리 얼마나 흘렀을까.
웃음기가 옅어진 노엘이 입을 열었다.
“키란을 구해줘서 고마워.”
“예에.”
샤를은 노엘을 보지도 않고 무성의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미안해.”
“……?”
의외의 말에 놀라 커진 샤를의 눈동자가 노엘을 바라보았다.
천하의 노엘이 사과라니?
그는 키란 역시 마찬가지였다.
허나 노엘의 다음 발언으로 그 감정은 오래가지 못했다.
“헌트 대공이랑 결혼할 거야?”
“에에?!”
* * *
[우리 가문 올래? 공비자리 비어 있어.]
노엘이 폭탄 발언을 남기고 떠난 에스페논 신전 안.
방으로 돌아온 샤를은 머리를 쥐어뜯었다.
[재미있어.]
재미있다고 자기 부인이 되라는 거야? 왜 아주 재미에 목숨도 걸지.
“아, 맞다. 그랬다가 죽었지.”
원작에서 흥미를 쫓아 릴리아나를 탐하다 죽었으니. 영 틀린 말도 아니었다.
그런데 갑자기 왜.
자신한테 왜 그런단 말인가.
“릴리아나한테나 하라고.”
샤를은 벌러덩 침대에 드러누웠다.
“내가 키란을 살려줘서?”
퍽 그럴싸한 유추였다. 제 목숨보다 아끼는 가족이고 릴리아나보다 더 우선시했던 키란이었으니까.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해. 언제든.]
미카엘은 노엘을 말리지 않았다. 어느 곳에 머물든 선택은 샤를의 몫이었고 미카엘은 그에 개입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대체 왜 이리 꼬이는 거야.”
카이시스부터 대신전. 그도 모자라 노엘까지 말이다.
[키란을 구해줘서 고마워.]
그러다 노엘의 사과가 떠오른 샤를은 구겨져 있던 미간을 풀고 입술을 삐죽거렸다.
그래도 키란이 죽지 않고 살아, 노엘이 더 이상 울지 않아도 되는 건 다행이었다.
“일단 일주일만 잘 버티자.”
샤를은 그리 생각하며 눈꺼풀을 감아 내렸다.
아직 해가 떨어지진 않았지만, 기력을 모두 소진한 탓이었다.
* * *
어느새 붉어진 노을이 대신전을 비추었다.
다니엘은 창문 너머 뉘엿뉘엿 떨어지는 해를 바라보았다.
[사람 면전에다 개소리를 지껄일 거면 그 뒷일도 각오했었어야지.]
샤를이 떠오른 다니엘이 허허- 웃음을 흘렸다.
살아생전 알렉산드리아가 했던 말과 비슷한 까닭이었다.
[나한테 덤빌 거면 죽을 각오 정도는 했었어야지.]
그러다 다니엘 얼굴에 서려 있던 웃음이 점점 사그라졌다.
회의 때, 확실히 샤를의 기세는 좋았다. 순발력도 있었고 영특하다 할 만했다.
하지만 다니엘이 본 샤를은 순수해 보였다.
신의 계시. 당장 시간은 벌어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완전한 해결책은 되지 못한다.
이대로 물러설 바엘이 아니었다.
[죽을 때가 되니 후회만 늘어. 그중에서 가장 후회되는 게 뭔지 알아?]
다니엘은 알렉산드라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리며 두 눈을 지그시 감아 내렸다.
[바로, 비겁했던 나 자신이야.]
* * *
늦은 밤.
로브를 깊게 눌러쓴 인영 하나가 발길을 재촉했다.
“제길.”
젠장. 제기랄. 젠장맞을.
인영은 한 발 내디딜 때마다 나직이 뇌까렸다.
그러나 더 심한 욕설은 뱉지 않았다. 이미 이 정도도 아주 불경스러웠다. 여기서 더 한다면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할지 모를 일이다.
그런데도 ‘젠장.’질을 멈추지 못하는 건 처한 상황이 너무나도 절망적이기 때문이었다.
이 정도 욕은 용서해 주시겠지.
“어떻게 거길 다시…….”
젠장.
차마 입에 담지도 못하겠는지 바드득 이를 간 문장의 끝은 욕설로 마무리되었다.
“진짜 너무하십니다.”
너무하시죠. 해도 해도 이건 정말로 너무하신 거죠.
“차라리 죽으라고 하시지. 거길 다시……. 젠장할.”
다시금 바드득 이를 간 인영이 짜증스레 발을 끌었다.
하지만 나아가는 걸음은 멈춤이 없었다.
아니, 멈출 수가 없었다.
자격을 박탈당한 추기경이라고는 하나, 한번 신의 뜻을 담은 몸이었다.
또렷이. 그리고 콕 집어 ‘대신전’으로 가라는 신탁을 무시할 방도는 없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다시는 보고 싶지 않던 대신전의 지붕이 보일 때 즈음 인영의 걸음이 멈춰 섰다.
[감히 신의 뜻을 거스르고 삿된 행위를 한 요한나의 추기경직을 박탈하며, 대신전에서 추방한다.]
자신은 아무것도 한 것이 없었다.
정확히는 부패한 신전에 치가 떨려 딱 한 마디 했을 뿐이었다.
[목숨줄 붙어 있는 걸 다행인 줄 알거라.]
제아무리 교황이라 하더라도 추기경을 함부로 죽일 수 없다.
해서 딱 죽지 않을 만큼만 두들겨 맞고 빈털터리로 쫓겨난 자신이었다.
요한나는 두 손을 고이 맞잡았다.
“아아, 신이시여. 다시 한 번만 신탁을 내려주실 순 없으실까요.”
중얼중얼.
“추기경직을 박탈당했지만, 하루 여덟 번의 기도를 단 한 번도 빼먹은 적이 없습니다. 찢어지게 가난하여 내일 먹을 빵이 없어도 굶주린 아이들을 지나치지 않고 나눔을 행하였습니다.”
중얼중얼중얼.
“잘한 짓은 아니나, 제가 다 먹고살려고 한 것임을 아시지 않습니까. 앞으로 다시는…….”
그때였다.
“그래도 점술집은 너무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요한나 추기경님.”
“……!”
들려오는 목소리에 기도를 올리던 인영이 획 고개를 돌렸다.
“오늘 안에 안 오시면 신탁을 어긴 죄를 물으려 했습니다.”
미카엘이 요한나를 보며 빙긋이 미소 지었다.
* * *
“불가합니다!”
대신전 안.
역시나 요한나의 복귀를 거세게 반대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요한나는 밀려드는 공포감에 손끝을 부여잡았다.
두려웠다.
저들이 두려운 것이 아니었다.
정말 죽기 직전까지 몰매를 맞았던 기억이 떠오른 탓이었다.
내려치는 몽둥이에 피가 터지고 살점이 떨어지며 뼈가 부서졌다.
형용할 수 없는 고통에 차라리 죽여달라 빌었다.
신은 없다고. 있어도 당신은 신이 아니라 악마라고 속으로 욕까지 지껄일 정도였으니.
“한번 신의 뜻을 어겨 자격을 박탈당한 이를 다시 불러들이다 못해 추기경이라니요!”
“이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고함에 가까운 음성에 요한나는 두 눈을 질끈 감아 내렸다.
미카엘은 그런 요한나를 보며 깊은숨을 내쉬었다.
[이거 먹어, 난 맛없어서 도저히 못 먹겠다.]
요한나는 몰렉 전, 미카엘이 모신 추기경이었다.
다른 추기경이나 신관들과 달리 요한나는 신분에 차별을 두지 않았다.
자신의 음식을 나누어 주었고 매질도 하지 않았다.
말이 걸고 호탕한 성격이긴 했으나 대신전에서 그 누구보다 따스한 인물이었다.
해서 미카엘은 교황은 저런 분이 되어야 한다며 신께 기도를 올리기까지 했었다.
[이 아이가 무엇을 잘못했습니까. 신께서 언제 이 아이를 핍박하라 하였단 말입니까?! 신께서는 분명 모두가 평등하다 하였습니다. 황실이 내린 작위 따위로 신분을 나눌 거면 신이 아닌 황제를 모시지 그러십니까!]
몰렉에게 괴롭힘당하던 자신을 막아주다 벌어진 일이었다.
자신이 아니었더라면 피를 토하는 고문을 당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옛정은 알겠으나, 이는 아니지요.”
바엘이 미카엘을 응시했다.
“뭐라.”
미카엘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아무리 그래도 신탁이라니.”
쯧.
같지도 않다는 듯 바엘이 혀를 찼다. 그에 추기경들이 동조했다.
“신탁을 받아 자격을 박탈당한 추기경을 다시 불러오라, 그리 신탁이 내려졌다니 말이 됩니까.”
“맞습니다. 차라리 보상금이면 믿겠습니다.”
“지금 내가 거짓 신탁을 논한다는 말인가!!”
결국, 미카엘이 참지 못하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누가 거짓 신탁이랍니까.”
“아무도 그리 말한 적 없거늘.”
“그러게나 말입니다.”
되레 제 발 저린다는 듯 추기경들이 미카엘을 흘기며 이죽거렸다.
“자격을 박탈당한 추기경에게 ‘대신전으로 가라.’는 신탁이 내려와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그를 받아주라 했다?!”
“내일은 해가 서쪽에서 뜨겠습니다.”
피식-
여기저기서 비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때였다.
“해가 서쪽에서 떠오른다면 그 또한 신의 뜻.”
일순, 얼음물을 끼얹은 듯 장내가 조용해졌다.
모두의 이목이 일제히 다니엘에게 쏠렸다.
“그를 따르는 것이 신을 모시는 자로서 해야 할 일이 아니겠소.”
항상 허허실실 가볍던 다니엘이 아니었다.
웃음기가 사라진 얼굴은 고압적일 정도로 근엄한 모습이었다.
“다니엘 추기경, 지금…….”
바엘의 표정이 뒤틀리며 다니엘에게 향하던 찰나였다.
“맞습니다.”
중립파의 일원인 추기경이 의견을 얹었다.
“신께서 요한나 추기경을 용서하시어 다시 대신전으로 불러들인 것에 대해, 이견이 필요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신탁을 거스르겠다는 것이 아니면 말입니다.”
중립파 추기경들이 하나둘 말을 보태기 시작했다.
황실파 추기경들의 표정이 삽시간에 굳어졌다.
교황은 황제와 대립 중이다.
그런데 중립파가 교황에게 힘을 싣는다? 이는 곧 황실과 전쟁을 의미함이었다.
실제로 다니엘은 그를 각오한 상태였다.
다니엘이 미카엘을 지그시 응시했다. 그리곤 천천히 시선을 돌려 요한나를 보며 옅게 미소 지었다.
“요한나 추기경. 대신전에 돌아온 것을 환영합니다.”
* * *
에스페논 신전.
오늘도 거하게 늦잠을 잔 샤를은 세 번의 기도를 몰아서 하는 중이었다.
“으아아악!”
“엄마야!”
“왜 그러십니까!!”
“으억!!”
드높은 기도실로 별안간 네 명의 비명이 얽혀 들어갔다.
미카엘이 소개해주려 데려온 요한나를 보고 놀란 샤를의 비명.
그에 더 놀란 요한나의 비명.
그리고 미카엘과 뒤따라온 라파까지였다.
“이, 이, 이……!”
말을 잇지 못한 샤를은 요한나를 손으로 가리키며 어버버거렸다.
샤를은 똑똑히 기억해냈다.
아니,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는 얼굴이었다.
그리고 다시 만날 수 있다면 만나고 싶은 인물이기도 했다.
“점쟁이!”
“…….”
그 순간, 기도실로 정적이 흘렀다.
“어디까지 진출하신 겁니까.”
미카엘은 한숨처럼 나직이 말하며 요한나를 쳐다보았다.
“내가 좀 용했다니까.”
이 와중에도 요한나는 천연덕스럽게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샤를은 그런 요한나의 손을 부여잡았다.
“알고 있는 거죠.”
다짜고짜 던져지는 질문에 요한나가 주춤거렸다.
“다 알고 있는 거죠?”
* * *
그로부터 얼마나 흘렀을까.
기도실 안.
샤를은 허탈감에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자매여.”
미카엘은 그런 샤를을 부축했다.
요한나는 샤를을 기억하지 못했다. 자신이 보았던 점술의 내용 역시 마찬가지였다.
“거짓말.”
“하루에 점을 봐주는 사람만 해도 몇 명인데……. 그들의 점괘까지 기억하면 제가 머리가 터져 살 수가 없습니다. 성녀님.”
요한나는 머쓱하게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리고 회개하고 나면 신기하게도 정말 기억이 안 나는 걸요.”
빙의자인 걸 알고 있는 듯한 발언. 그리고 희한하게 그 점괘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발에 치일 정도는 아니나 당장 노엘만 봐도 그러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니, 어떤 일이 벌어질지만 알아도 괜찮았다.
“다시 봐주세요.”
그래, 잊어버렸으면 다시 보면 되는걸.
샤를리 요한나의 손을 움켜잡았다.
“그건 안 됩니다. 자매여.”
미카엘의 말에 샤를이 가자미눈을 했다.
“왜요!”
“신관은 점술을 보아선 안 됩니다.”
“잠깐만, 한 번만 보면 되잖아요.”
한 번만.
딱 한 번만 보자고.
“아무한테도 말 안 할게요. 우리끼리만 알면 되잖아요.”
“신께서 보고 계십니다.”
“신이 벌인 일이니까 눈감아주실 거예요. 이 정도는 그래, 용서해줘야지. 날 여기로 떨어트렸는데.”
“네?”
미카엘의 말을 살포시 무시한 샤를이 요한나의 손을 붙잡고 흔들었다.
“딱, 한 번만요. 내가 성녀인데. 신의 자식인데!”
샤를의 눈이 희번덕거렸다.
“저기……. 그게…….”
요한나가 뒤로 주춤거렸다.
“봐드리고 싶어도 봐드릴 수가 없습니다.”
“왜요!”
“점술 도구를 다 불태워 버렸거든요.”
그걸 왜 태워!
“새로 사면 되잖아요!”
“그리고 이미 추기경의 신탁을 받은지라……. 봐드려도 안 나올 거예요.”
“…….”
* * *
“망했어.”
이후, 비 맞은 고양이처럼 방에서 늘어진 샤를은 옴짝달싹하지 않았다.
식자재를 싣고 온 헌트 기사단도 만나지 않았다.
하루 여덟 번의 기도도 중지했다.
미카엘 역시 강요치 않았다. 샤를의 낯빛은 잿빛이었으며, 반짝거리던 눈동자 또한 흐리멍덩한 까닭이었다.
샤를에게 제공되는 식사도 거의 그대로 되돌아 나왔다.
“다 끝났어.”
왜인지 그런 기분이 들었다.
아무런 힘도 나지 않았다.
바엘이고 신전이고 성녀고. 세상이 다 귀찮았다.
정확히는 여기는 책 속이고 자신은 이방인이란 사실이 새삼 각인되며 무기력함이 밀려왔다.
그래, 무기력했다.
바꿨다고 생각했는데. 그래서 기뻤는데. 일은 자꾸만 꼬여갔다.
그러다 요한나를 만나는 순간 맥이 탁 풀린 기분이었다.
“신은 날 버렸어.”
샤를은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 인간은 왜 코빼기도 안 보여?”
괜스레 화살이 헥터에게로 날아갔다.
“좋다고 할 땐 언제고 눈앞에서 사라지니까 시원한가 보지?”
아닌 걸 알면서 말이 튀어나왔다.
“왜, 아주 릴리아나 만나면 좋다고 홀라당 나 버리고 달려가겠어.”
X자식.
끝내 욕설까지 뱉고 나서야 분했던 마음이 조금은 가라앉았다.
키란도 레온도 자신을 찾아오는데.
하물며 노엘도 왔는데 헥터는 왜 안 온단 말인가.
백번 양보해서 신전하고 사이가 더럽게 나쁘다 치자.
그럼 편지 한 장이라도 할 수 있는 거 아닌가?
“난 자기 살리자고 이러고 있는데.”
퍽퍽퍽!
이성을 잃은 주먹은 감정에 휩싸여 베개를 내리쳤다.
한번 터지기 시작한 섭섭한 마음과 불만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이해했던 일도 끄집어 올리고 괜찮았던 기억도 변질시켰다.
“안 가. 오라고 해도 안 돌아가.”
퍽퍽퍽!
가나 봐라.
“헤어져! X!”
퍽퍽! 퍽퍽!
그때였다.
통통 통통-
들려오는 노크 소리에 분노로 이글거리는 눈이 문을 응시했다.
“안 해요!”
“…….”
카랑카랑 날카로운 목소리에 정적이 흘렀다.
“신은 개뿔.”
악마겠지.
그리 씩씩거리고 있는데 다시금 문이 울림을 냈다.
통통 통통-
“기도 안 한다니까요! 아니, 성녀고 나발이고 안 해!”
샤를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X. 내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말이야. 머리끄덩이 잡히고, 죽을 뻔하고, X 같아서 진짜. 성녀고 나발이고 지랄……!”
구시렁구시렁 혼잣말처럼 욕설을 내뱉으며 문을 열던 찰나.
샤를은 눈부신 황금빛에 그대로 굳어버렸다.
“…….”
샤를을 내려다보는 카이시스의 입매가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미카엘은 태연하게 차를 음미했다.
“…….”
졸지에 둘 사이에 낀 샤를이 마른침을 삼켜 넘겼다.
카이시스를 처음 대면했던 상황의 민망함도 한몫했다.
그리 얼마나 흘렀을까.
카이시스가 퍽 온화한 얼굴로 샤를을 응시했다.
“먹지.”
“…….”
“황실 파티시에가 직접 만든 것이다.”
카이시스의 시선을 따라 샤를이 제 앞에 놓인 딸기 마카롱을 내려다보았다.
어떻게 알았는지, 카이시스가 가져온 디저트는 온통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뿐이었다.
그러나 안에 뭐가 들었을지도 모를 일. 제아무리 좋아하는 거라지만, 얼씨구나 그냥 먹을 바보는 아니었다.
신전에선 마법을 사용할 수 없다.
그는 이능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카이시스가 자기 생각을 읽지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자매에겐 신의 가호가 느껴집니다.]
예상은 하고 있었다.
지난번에도, 플래시라도 터트리는 것처럼 이채를 번뜩이다 당황해하던 카이시스였으니까.
하지만 혹시 모르니 샤를은 속으로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마하반야바라밀다…….
샤를을 가만히 지켜보던 카이시스의 입매가 말려 올라갔다.
“성녀.”
“예.”
샤를은 재빠르게 대답하곤 다시금 다른 생각을 떠올렸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살라 살라. 얄리얄라. 살어리 살다. 청산에 살리라…….
“다른 생각 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돼.”
“……!”
순간, 놀란 샤를이 그대로 얼어붙었다.
당황한 것은 미카엘도 마찬가지였다.
“놀라니까 눈이 더 크네.”
“…….”
이건 뭔 미친 소리일까.
샤를의 등줄기로 오소소 소름이 돋쳐 올랐다.
“겁먹지 마. 독 안 넣었으니.”
그 속내라도 읽은 듯 카이시스는 손을 뻗어 마카롱을 집어 들었다.
그리곤 한입 베어 물었다. 바스러진 마카롱 잔해가 카이시스의 새하얀 정복으로 떨어졌다.
“그러니 먹지.”
다시금 카이시스의 눈길이 마카롱을 가리켰다.
“좋아하는 거잖아.”
늘어진 입매가 아름다운 미소를 띠었다. 하지만 샤를을 응시하는 벽안은 조금의 움직임이 없었다.
“실력이 출중한 젊은 파티시에인데.”
툴툴- 털어낸 분홍빛 설탕 가루가 허공에 흩날렸다.
“이게 유작이면 슬프지 않겠어?”
“황제!”
미카엘이 카이시스를 가로막았다.
“이 무슨 행동이요.”
“무슨 문제라도?”
카이시스는 일말의 동요도 없이 태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저 성녀가 좋아하는 디저트를 권했을 뿐.”
카이시스가 샤를을 돌아보았다.
“아니 그런가. 성녀.”
샤를은 말없이 카이시스를 노려보았다.
대체 무슨 꿍꿍이인지. 헥터만큼은 아니나 카이시스 또한 여성을 경멸했다.
페로몬의 역함도 있긴 했으나, 정확히는 인간 자체를 혐오한다는 표현이 더 알맞을 것이다.
상대의 시커먼 생각까지 모두 읽히니 그럴 수밖에.
누군가 뒤에서 내 험담을 한다는 소리만 들어도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이 사람이거늘.
하물며 그를 눈앞에서 실시간으로 지켜보며 당한다면 오죽할까.
그도 믿었던 사람이라면 더욱.
카이시스 주변엔 그러한 사람들뿐이었다.
겉으로는 충성을 바치며 웃고 있지만, 속으론 칼을 갈고 있는.
권력과 이익. 그리고 탐욕이 가득한 인간의 밑바닥을 카이시스는 태어나고부터 봐왔다.
물론, 카이시스가 그간 저지른 일들이 정당하단 소리는 아니었다.
다만 책 속의 내용을 알고 있는 빙의자이기에 카이시스의 인간혐오 근원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일 뿐.
“밥 먹은 지 얼마 안 되어서요.”
샤를은 카이시스의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
헥터와 카이시스는 정반대의 인물이었다.
헥터가 사람을 압도한다면 카이시스는 가지고 논다고 해야 할까?
그래, 가지고 논다는 표현이 딱 맞을 것이다.
카이시스는 상대가 원하는 것과 약점을 알고 그를 이용했다.
그리고 처참히 버렸다.
“참, 지내는 곳이 에스페논 신전이라지.”
카이시스의 고개가 비스듬히 늘어졌다.
“성녀를 신전에 데려갔는데 하필 머무는 곳이 교황비 침실이라…….”
카이시스가 시선을 돌려 미카엘을 응시했다.
“그리고 이것도 신의 계시라.”
샤를을 보호하기 위해 교황비 침실에 머무르게 하였을 뿐. 분명, 신의 뜻과는 별개의 일이었다.
“이를 국민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
미카엘의 눈매로 힘이 들어갔다.
이미 오랜 부패로 신전의 위상은 바닥이었다.
이를 문제 삼는다면 가뜩이나 위태로운 신전의 입지는 더욱 흔들릴 것이었다.
거기다 더러운 추문까지 겹친다면 어떠할까.
본디 사람들은 진실을 궁금해하지 않는다.
얼마나 자극적이고 흥미로운지. 그것이 더 중요할 뿐이었다.
카이시스라면 신을 모독하고도 남을 인간이다.
아니, 무력으로 신전을 엎어버릴지도 모른다.
미카엘이 아무런 대답을 못하자 카이시스가 조소를 지었다.
“그러니 먹어.”
웃음기가 사라진 카이시스의 얼굴이 다시금 샤를에게 향했다.
“거짓말하지 말고.”
죽이고 싶어지잖아.
* * *
“어떤가.”
와앙- 마카롱을 베어 무는 샤를을 보며 카이시스가 물었다.
어느새 카이시스에게 미카엘은 투명 인간이 되어 있었다.
“맛있어요.”
샤를이 심드렁히 대답했다.
미카엘이 일어나자 권했지만, 샤를은 끝내 자리를 지켰다.
피하면 피할수록 카이시스는 더 들러붙을 것이다.
소설 속 카이시스는 제 손에서 벗어나고자 도망치는 릴리아나를 보고 심히 즐거워했다.
그리고 마카롱 하나 먹는 것이야 무에 대수겠나.
먹고 정 역하면 토하면 그만이지.
“표정은 그게 아닌데.”
다리를 꼰 카이시스는 티 테이블 위에 손을 올린 채 아예 턱까지 괴고 샤를을 빤히 관찰했다.
“무슨 생각 해?”
카이시스가 되물었다.
“아무 생각 안 하고 있습니다.”
샤를은 최대한 목을 뒤로 빼며 대답했다.
얼굴이 가까웠다. 색이 옅은 카이시스의 속눈썹 결이 보일 정도로.
“어서 일어나고 싶나?”
맥락 없는 질문에 샤를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
어이가 없는 것은 미카엘도 매한가지였다.
하지만 딱히 피해를 주거나 위협을 가한 것은 아니었기에 쫓아낼 명분은 없었다.
“아닙니다.”
“그럼 나랑 계속 같이 있고 싶어?”
“…….”
이 소설 속에서 미친X이 많은 건 알고 있었지만, 참으로 끝판왕이리라.
샤를이 옅은 숨을 내쉬었다.
“지금은 무슨 생각 하지.”
그만 좀 물어봐라, 이 새X야.
“아무 생각 안 했는데요.”
“내 욕이라도 했나?”
“예?!”
놀란 샤를을 보며 카이시스가 픽- 하니 웃음을 흘렸다.
전과 달리 눈매가 살짝 휘어지는 것이 진정 웃는 것이었다.
“아까 잘하던데.”
“…….”
“성녀가 욕을 잘할 줄은 몰랐어.”
쥐구멍이 있다면 자신은 아무런 망설임 없이 숨으리라.
아니, 차라리 그냥 쥐가 되고 싶은 심정이었다.
샤를의 볼이 불퉁거릴수록 카이시스의 발끝은 즐거움에 까닥거렸다.
“뭐라 그랬더라.”
카이시스는, 즐거웠다.
샤를과 함께 있자 머리를 지끈거리던 통증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들이마시는 공기가 상쾌했고 내쉬는 숨이 부드러웠다.
또한, 당황할수록 샤를의 페로몬은 흐트러지며 더욱 진한 향기를 풍겼다.
그에 섞인 헥터의 향은 당장 찢어버리고 싶었지만 말이다.
“시……. 뭐랬더라.”
“…….”
“아! X같다 그랬던 것 같군.”
아오 씨.
샤를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럴수록 카이시스의 웃음은 더욱더 짙어졌다.
“그걸 좋아하나?”
“네?!”
카이시스는 상체를 굽으며 샤를에게 한 뼘 더 다가왔다.
크게 들이켜는 카이시스의 숨결이 샤를의 팔에 닿았다.
“신전에서 지내며 필요한 것이 있으면 말해. 무엇이든 들어줄 테니.”
“말씀은 감사하나, 이미 충분하여 필요한 것이 없습니다.”
“붉은색이 취향인가. 아니면 검은색?”
“…….”
“그도 아니면 답답한 스타일이 취향?”
시X.
네 할 말만 하실 거면 질문은 왜 하세요?
샤를은 제발 제 속마음이 전해지길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카이시스의 푸른 눈으론 이채가 한 번도 돌지 않았다.
“한 번의 경험으로 모든 걸 판단하고 단정 짓는 것만큼 미련한 건 없지.”
질문이 아닌 영문 모를 소리에 샤를이 카이시스를 응시했다.
“궁금하지 않아?”
“뭐, 뭘요.”
카이시스는 느른하면서도 지독히 고혹적인 눈길로 샤를을 훑어보았다.
눈에서 코로, 코에서 입으로 떨어진 시선은 다시금 샤를의 눈동자를 담아냈다.
이윽고 시원하면서도 매혹적인 향이 샤를의 코를 간질였다.
이능의 사용은 금지였으나, 페로몬까지 금지는 아니었다.
“아…….”
샤를은 절로 낮은 탄식을 흘렸다.
헥터가 강한 남성의 향이라면 카이시스는 더 부드럽고 매혹적인 향이었다.
여성의 향수와 남성의 향수를 섞어놓은 느낌이랄까.
흥분된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정신이 아찔해지는 느낌이었다.
그것도 천사가 사람이 된 것만 같은 카이시스를 보고 있으니 더더욱.
“내가 널 더…….”
나직한 속삭임이 샤를의 귓가를 간질였다.
“만족시킬 수도 있잖아.”
“…….”
* * *
다음 날.
아직 통통 부은 눈이 채 가라앉기도 전. 샤를은 아침 식사를 맞이해야 했다.
“먹지.”
바로 해가 뜨기가 무섭게 찾아온 카이시스 때문이었다.
“어휴-”
샤를은 식당 테이블 가득 차려진 음식들을 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결벽증인 헥터에게 들이대는 것이 금지였다면 카이시스에겐 ‘싫어요, 하지 말아요, 당신은 정말 저질이야.’ 등등의 거부가 금지였다.
그럴수록 더 희열을 느끼고 집착할 테니까.
오죽하면 원작에서 릴리아나가 도망치길 기다렸다가 다시 잡아 왔을까.
‘제정신이 아니야.’
그러니 애초에 별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이 제일 좋았다.
네, 그러세요~
어이구 그러세요~ 하고.
‘이미 늦었나.’
카이시스를 거부하고 대신전으로 간 것부터 자극한 것 같지만.
그래도 될 수 있으면 더 이상 관심을 두지 않도록 하는 게 좋았다.
“네.”
샤를은 반만 감긴 눈으로 순순히 포크를 집어 올렸다.
미카엘은 자리에 없었다. 샤를이 괜찮다 돌려보낸 까닭이었다.
[모든 건 성녀의 선택이라 하지 않았나?]
미카엘은 카이시스를 상대할 재간이 못 됐다.
저라고 다를 처지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미카엘보단 나을 것이란 판단이 들었다.
그리고 자신 때문에 미카엘이 더 이상의 피해를 보는 것도 원치 않았다.
“맛이 없나?”
먹는 둥 마는 둥 음식물을 이리저리 흐트러트리기만 하는 샤를을 보며 카이시스가 물었다.
“맛있어요.”
“누가 만들었지.”
카이시스가 들려 있던 나이프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살벌한 물음에 식당 안에 서 있던 요리사 하나가 사색이 되어 무릎을 꿇었다.
“사, 사, 살려주시옵소서. 폐하.”
“…….”
시X.
먹다 체하겠네.
“우와 맛있다. 되게 맛있다.”
포크를 쿡- 찍어낸 음식물이 샤를의 입안으로 들어갔다.
우물우물.
꿀꺽 삼켜진 후에야 카이시스는 요리사에게서 시선을 떨어트렸다.
“상을 내리도록 해.”
냅킨으로 가볍게 입술을 닦는 카이시스를 향해 밀러가 머리를 조아렸다.
“예, 폐하.”
“…….”
끌어올린 샤를의 입꼬리가 파리하게 떨어졌다.
신종 고문인가.
감금, 강간. 그런 건 이제 너무 진부하니까 체하게 만들어 고통스러운 모습을 즐기는 것 말이다.
‘헥터랑 다르면서도 비슷하단 말이야.’
소설을 보면서도 느꼈던 생각이었다.
카이시스와 헥터는 다르지만, 어딘가 비슷했다.
결여된 감정. 결여된 세상.
오로지 둘만이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존재이자, 공존할 수 없는 존재이기도 했다.
샤를은 아침 햇살을 받아 눈이 부실 정도로 찬란히 빛나는 카이시스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자살이었지, 아마.’
카이시스는 헥터에게 죽임을 당할 때 분명 웃었다.
고작 한 줄도 안 되는 구절이었고 악역이었기에 카이시스의 죽음을 많은 이들이 신경 쓰지 않았지만, 샤를은 그렇게 생각했다.
죽어준 거라고.
혹시 헥터가 저와 온 힘을 다해 싸우길 기다린 것이 아닐까.
분명 찰나의 순간, 카이시스의 황금빛이 멈추었다고 했었다.
샤를은 그것이 꼭 틈을 내어주고 자신을 죽일 수 있게 의도한 것만 같았다.
왜.
대체 왜 그런 것일 걸까.
“맛이 슬퍼?”
“네?!”
카이시스의 질문에 샤를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지금, 슬퍼하고 있잖아.”
요동치는 샤를의 눈동자로 카이시스의 모습이 일렁였다.
카이시스는 자기 생각을 읽을 수 없다.
어제 확실히 깨달은 사실이었다.
그런데 대체…….
“아니면…….”
카이시스는 태연히 물잔을 집어 들며 손끝에서 빙글거렸다.
“내가 슬퍼?”
순간, 뇌리를 스치는 원작에 샤를이 얼굴을 돌렸다.
카이시스는 평생을 지겹도록 남의 생각을 읽으며 살았던 사람이었다.
굳이 이능을 쓰지 않아도 얼굴 근육 하나만으로 대략적인 감정을 파악할 수 있을 정도로.
‘조심해야겠어.’
“제 처지가 슬퍼서요.”
차라리 솔직히 말하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궁금하지 않도록, 너무 뻔해서 흥미조차 생기지 않도록.
카이시스가 헥터에게 집착했던 건 생각을 읽지 못해서였다. 지금 자신도 그럴 테고.
‘방법을 바꿔야 해.’
샤를은 억지로 끌어 올렸던 입꼬리를 내리며 표정을 풀었다.
“왜?”
“먹다 체할 것 같은 자리에서 식사 중이잖아요.”
순간, 카이시스의 눈매가 굳어졌다.
“그래?”
“네.”
“그럼 어떻게 하고 싶은데?”
“이대로 일어나 침대로 가서 자고 싶은데요.”
“…….”
카이시스가 입안 내벽을 쓸어내렸다.
식사는 진즉 멈춘 상태였다.
밀러와 식당 안에 있는 이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지만, 샤를은 깊은 한숨까지 내쉬어주었다.
“…….”
* * *
‘아오. 씨. 그냥 둘이 사귀지 왜.’
마카롱에 이어 강제 산책까지. 어디서 많이 본 전개에 샤를은 짜증스레 발끝을 툭- 툭- 내디뎠다.
“체할 거 같다 하지 않았나.”
샤를의 한발 뒤에서 걷던 카이시스가 말했다.
“그래서야…….”
뭐, 소화되게 빨리 걸으라고?
그래도 처음 헥터처럼 옆구리에 끼고 걷지 않는 건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 근데 왜 뒤에서 걸어. 사람 무섭게.’
설마 갑자기 칼로 찌르거나 하는 건 아니겠지?
샤를은 떠오른 생각에 어깨를 부르르- 털었다.
“네에.”
샤를이 건성으로 대답했다. 카이시스는 바람에 불어드는 샤를의 페로몬을 느끼며 입매를 늘어트렸다.
임시각인. 그것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옅어진다.
더욱이 그랜드 마스터인 카이시스였다.
헥터의 페로몬에 가려진 샤를의 페로몬을 느끼는 건 발을 내딛는 것만큼 쉬운 일이었다.
‘참 시시각각으로도 변하는군.’
카이시스 앞에 샤를은 세 살짜리 아이라고 해도 믿을 성싶은 정도였다.
화난다, 짜증 난다. 슬프다까지.
생각을 읽지 않아도, 표정을 관찰하지 않아도 샤를의 감정이 느껴졌다.
그런데 아까는 자신을 보며 왜 슬퍼했을까.
분명 연민이었다.
카이시스에게 있어 두려움과 공포가 아닌 감정은 오랜만이었다.
[내 아가, 엄마는 네가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단다. 몸도, 마음도…….]
아니, 모친의 사망 후. 아무런 대가 없는 걱정과 슬픔이 담긴 연민 자체를 받아본 적이 없던 카이시스였다.
‘재미있어.’
꼭 헥터처럼.
“마음에 안 드나 봐.”
카이시스의 말에 샤를의 페로몬이 확 탁해졌다.
나쁜 냄새라도 맡은 듯 카이시스의 미간이 찌푸렸다.
“좋진 않네요.”
“왜지.”
“원래 걷는 거 싫어하거든요.”
툭툭-
내딛는 발걸음만 보아도 그래 보였다.
“그래도 소화해야지.”
차라리 약을 먹는 편이 더 낫겠구먼, 병 주고 약 주고도 아니고 말이지.
아침 댓바람부터 깨워서 밥 먹이더니, 이제는 산책까지 하라신다.
샤를은 불만스레 콧잔등을 실룩거렸다.
“아니면 섹스할래?”
“에?!”
화들짝 놀란 샤를이 뒤를 돌았다. 덕분에 한 걸음 뒤에서 따라오던 카이시스 품에 폭 안긴 형세가 되고 말았다.
놀란 샤를의 시야 속. 사락- 불어든 바람에 황금색 머리카락이 살랑였다.
“어때.”
카이시스가 손을 뻗어 샤를의 허리를 당겨 안았다.
순간 정신이 든 샤를이 벗어나려 했지만, 카이시스의 힘을 이길 순 없었다.
“무, 무, 무슨…….”
이 미친 인간이 지금 뭐라는 거야.
너무 어이가 없어 샤를은 말조차 뱉어내지 못했다.
“아니면 키스?”
카이시스의 뒤로 펼쳐진 하늘과 똑 닮은 벽안이 샤를을 내려다보았다.
“허어…….”
샤를의 입이 쩍 벌어졌다. 반면, 카이시스의 눈빛은 더없이 진지했다.
“좋지 않아?”
“아, 안 좋은데요.”
“또 거짓말을 하는군.”
“제가요?!”
“그래.”
“거짓말 아닌데요.”
“그럴 리가.”
카이시스가 샤를을 더 당겨 안았다.
“난 너와 닿고 있는 것만으로 기분이 좋은데.”
들려진 한 손은 흐트러진 샤를의 머리카락을 넘겨주며 가볍게 귓불을 스쳤다.
“……!”
순간, 훅 끼쳐오는 카이시스의 페로몬이 전신을 집어삼키는 기분이었다.
“네 페로몬을 봐.”
맞닿은 얼굴 사이, 서로의 숨결이 느껴졌다.
“이렇게나 내 향을 좋아하고 있잖아.”
“……!”
카이시스가 샤를의 머리를 감쌌다.
거세게 움켜잡은 건 아니었으나, 뒤로 물러서지도 못했다.
아니, 무언가에 이끌리는 것처럼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맛있을걸.”
감미롭고 매혹적인 음성이 세뇌를 걸듯 샤를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천천히 내려지는 카이시스의 긴 속눈썹은 별처럼 반짝거렸다.
“미쳐버릴 만큼.”
조금씩 다가오는 입술이 겹쳐지려던 찰나.
‘싫어!’
쾅-!
거대한 소리와 함께 바람이 확 끼쳐왔다.
샤를과의 면회를 마치고 신전을 빠져나온 카이시스의 얼굴은 차갑게 굳어져 있었다.
분명 강력한 신성력이었다.
하지만 샤를이 밀쳐낸 것이 아니었다.
[어, 어……. 괜찮아요?]
그녀는 도리어 저보다 더 놀란 듯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카이시스는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무방비 상태로 넘어지면서 긁힌 흔적이 깊게 파여 있었다.
이 정도 상처쯤이야 마력으로 손쉽게 치유할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피, 피가.]
자신을 걱정하는 샤를의 시선을 받는 순간, 왜인지 그러고 싶지가 않았다.
‘내가 불쌍한가.’
어째서 자신을 연민하고 걱정하는 걸까.
샤를은 자신이 저를 죽이려 했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는다.
첩자인 조쉬를 제 손으로 잡아냈으니. 설령 모른다고 하더라도 헥터와 떨어트린 장본인이 바로, 자신이었다.
[먹다 체할 것 같은 자리에서 식사 중이잖아요.]
거짓이 아니었다. 그러나 완전한 진실도 아니었다.
분명, 저를 보는 샤를의 시선 기저엔 이해가 깔려 있었다.
마치 그럴 줄 알았다는 듯한 행동. 그리고 자신의 관심을 피하는 방법까지도 알고 있다.
‘성녀라서?’
성녀라서 자신을 이해하고 연민하며 신의 힘으로 저를 밀어냈다?
“하…….”
카이시스가 낮은 실소를 터트렸다.
어느 것 하나 말이 되는 부분이 없었다.
아니, 존재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성녀였다.
“잘 감시하도록.”
카이시스가 돌아섰다. 로브를 눌러쓴 신관이 조용히 머리를 조아렸다.
뒤이어 황금빛이 일며 황제와 그 일행이 자취를 감추었다.
그 시각.
“각하…….”
대신전에서 카이시스와 샤를의 만남은 헥터에게도 전해졌다.
태너가 어두운 표정으로 헥터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헥터는 그저 창밖 너머 샤를이 없는 빈 정원만 건너다볼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 * *
에스페논 대신전.
샤를은 멀뚱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고작 일주일이라고 가볍게 여겼던 시간은 하루가 일 년처럼 길었다.
“그나저나 진짜 왜 안 와…….”
샤를이 베개를 끌어안고 옆으로 돌아누웠다.
“상처받은 걸까.”
찾아오지 않는 헥터에게 섭섭했고 그러다 화가 났다. 그리고 이젠 걱정이 되었다.
꼬리에 꼬리를 문 생각은 영영 이대로 끝일인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두려움까지 밀려들었다.
“내일 오면 그동안 안 온 거 용서해줄 텐데.”
제대로 된 설명 없이 자신이 마음대로 대신전으로 가겠다. 했으니 그 정도는 괜찮을 거 같았다.
“자기도 그랬잖아.”
다짜고짜 일억을 준다면서 시녀를 하라질 않나, 원정까지 얼결에 함께 떠났다.
“이것도 줘놓고.”
샤를은 레온이 주고 간 붉은 마석을 내려다보았다.
“이것도.”
샤를의 손이 목에 걸린 마나스톤을 만지작거렸다.
“근데 왜 안 와.”
오늘 카이시스가 입을 맞추려 했을 때, 샤를은 순간적으로 불어든 힘이 헥터라 생각했었다.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려 헥터를 찾았다.
[치웠다.]
왠지 그리 말하며 눈썹을 추켜 올린 채, 저를 지그시 내려다보고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어디에서도 헥터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그것이 못내 아쉬웠다.
그러게. 왜 헥터가 자신을 구해주러 달려오리라 생각한 것일까.
오히려 헥터의 손을 놓은 건 자신인데.
물론 헥터를 위한 것이었지만, 헥터는 모를 터였다.
끼익-
그때, 두꺼운 문이 열리는 소리에 샤를이 고개를 돌렸다.
이 시간에 누구지?
샤를이 천천히 일어나 문 쪽으로 향했다.
노크도 없이 마음대로 들어올 사람은 없었다.
있다면 헥터랄까.
“헥터?”
그러나 샤를의 기대와 달리, 검은 그림자는 샤를을 뒤에서 끌어안은 채 입을 틀어막았다.
“읍!”
이윽고 서슬 퍼런 빛이 샤를의 눈앞에서 번뜩였다.
“……!”
* * *
콰광-!
거대한 굉음과 함께 검붉은 빛이 대신전을 집어삼켰다.
땅이 뒤흔들릴 정도의 위력이었다.
놀란 신관들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왔다.
“무슨 일이지?”
그 시각, 다니엘과 독대 중이었던 미카엘은 샤를을 찾듯 고개를 돌렸다.
“자매!”
분명 소리가 난 근원지는 에스페논 신전이 있는 방향이었다.
한편, 검붉은 불길 속에서 낮고 굵은 음성이 흘러나왔다.
“샤를.”
이윽고 자욱했던 연기가 가라앉자 헥터의 모습이 드러났다.
“……!”
샤를이 헥터를 올려다보았다.
어느 신전에서 떨어진 듯한 가운은 여전히 가슴을 훤히 드러내고 있었다.
여전히 오예스럽게.
“왜 이제 와요.”
샤를의 입가로 미소가 번졌다.
헥터는 예상치 못한 샤를의 반응에 놀란 듯 잠시 주춤거렸다. 그러나 이내 입매가 길게 늘어졌다.
“눈 감아.”
손으로 가려주고 싶으나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보기에 아름다운 장면이 아니다.”
샤를이 눈을 감아 내리자 헥터는 손에 쥔 검을 고쳐 잡았다.
대신전에선 이능을 사용할 수 없다.
하지만 몰렉이 샤를을 해치기 위해 칼을 꺼내 든 것처럼 검은 예외일지니, 헥터가 쓰러져 있는 몰렉에게 향하려던 순간이었다.
챙-!
황금색 빛과 함께 날 선 소리가 울려 퍼졌다.
* * *
“비켜.”
몰렉을 막아선 카이시스를 보며 헥터가 이를 짓씹었다.
그러나 카이시스는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손에 쥔 검에 힘을 실었다.
기기긱-
갈리는 검날에서 난 소름 끼치는 소리가 고막을 긁어내렸다.
“신관을 죽이면 신전이랑 전쟁이야.”
카이시스가 경고하듯 헥터를 응시했다.
“그건 나랑 먼저 해야 하지 않겠어?”
샤를이 에스페논에 거처를 정했을 때부터 바엘이 자기 뜻을 어기고 독단적으로 행동할 것이라 예상한 카이시스였다.
샤를을 죽이려 하는 살기는 굳이 생각을 읽을 필요조차 없었다.
그런 데다가 중립파까지 움직였으니, 조급함이 일어 앞뒤 가리지 않았을 테지.
물론, 바로 오늘이 될 줄은 몰랐지만.
“성녀를 죽이려 한 신관도 신관인가.”
“그거랑 네가 신관을 죽이는 거랑은 별개거든.”
챙-!
헥터의 검을 튕겨낸 카이시스가 몸을 돌렸다. 그리곤 그대로 쓰러져 있던 몰렉의 허벅지로 검을 내리꽂았다.
“으아아악!!”
“……!”
몰렉이 고통에 몸부림치며 비명을 내질렀다.
갑작스러운 카이시스의 행동에 헥터의 눈매로 힘이 들어갔다.
“내가 시킨 거 아니야.”
무기가 사라진 빈손을 내보인 카이시스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오히려 이 개새끼한테서 성녀를 구해주려고 왔다고.”
카이시스의 발이 몰렉의 허벅지를 짓이겼다.
“끄아아악!!!”
참혹한 광경에 샤를은 떠올렸던 눈꺼풀을 서둘러 질끈 감았다. 하지만 이미 너무 늦은 상태였다.
“구해?”
대신전은 이능을 사용치 못한다.
헥터를 상대할 수 있는 유일한 검으로 샤를을 해치려던 신관에게 사용했으니, 헥터는 섣불리 카이시스를 공격하지 않았다.
“그사이 우리 꽤 친해졌거든.”
카이시스가 샤를을 보며 싱긋 눈웃음을 보냈다.
“분위기 좋았어.”
뭐라는 거야 저 미친 인간이?
다시금 번쩍 눈을 뜬 샤를이 카이시스를 노려보았다.
카이시스의 입매가 비죽- 늘어졌다.
“아까 키…….”
“우아아악!”
샤를이 소리를 질렀다. 그와 동시에 시원한 기운이 휘몰아쳤다.
“자매여!!”
* * *
카이시스와 헥터가 대립하던 사이, 달려온 미카엘과 다니엘. 그리고 추기경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몰렉. 그를 밟고 있는 황제. 그리고 대공과 성녀까지.
무너진 지붕으로 쏟아져 내리는 찬란한 달빛이 눈앞의 상황을 더 비현실처럼 느껴지게 하였다.
“…….”
어안이 벙벙해져 있던 미카엘이 불현듯 샤를을 살폈다.
“자매여, 괜찮으십니까.”
멀쩡히 두 다리로 서 있는 샤를은 얼핏 보아도 괜찮아 보였다.
샤를이 머쓱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대체 이 무슨…….”
상황인 건지, 미카엘이 떠듬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대신전, 그것도 에스페논 신전은 강력한 신성력에 보호되고 있었다.
다시 말해 이능도 마법도 통하지 않는 곳. 게다가 샤를이 온 후, 미카엘은 방어를 강화했다.
즉, 제아무리 그랜드마스터인 황제라 하더라도 결계를 뚫는 건 불가능하단 것이다.
실제로 카이시스는 심어둔 첩자이자, 황제파 추기경에게 미리 일러두어 난입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몰렉이 움직였단 소식에 카이시스가 대신전에 도착했을 때, 결계 같은 건 없었다.
“내가 이래서 신전은 안 된다고 하지 않았나, 공.”
카이시스가 미카엘과 추기경들을 살포시 무시하며 헥터에게 말했다.
“바퀴벌레 새끼들이 득실거려서.”
“허윽!”
툭- 몰렉을 짓밟던 발을 떼어낸 카이시스가 샤를을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그래도 황궁은 안 되겠습니다만. 폐하.”
헥터가 그를 막아서며 말했다.
“거긴 개새끼들이 득실거려서.”
“그럼 대공저도 안 되지.”
카이시스는 저를 향해 겨눠진 칼날을 손끝으로 살며시 밀어냈다.
그러다 돌연, 샤를을 돌아보았다.
“아, 월킨스 공작저도 포함.”
“천하의 대공께서 어지간히도 불안했나 보군, 대신전까지 부숴버릴 정도로.”
대신전에서 쫓겨난 카이시스가 평상복 차림의 헥터를 훑어보았다.
샤를은 둘 다 돌아가길 원했다.
범인도 잡혔고 중립파와 미카엘이 호위를 서주기로 한 까닭이었다.
그리고 지금으로선 둘 중 누구에게도 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것도 고작 가이드가 다칠까 봐.”
헥터도 고개를 돌려 카이시스를 응시했다. 헥터와 마찬가지로 카이시스 역시 똑같이 평상복 차림이었다.
차가운 밤이슬이 둘 사이를 가로질렀다.
헥터는 만면에 희색이 가득한 카이시스에게서 시선을 거둬들였다.
“글쎄, 과연 누가 다칠까.”
헥터의 입술이 섬뜩하게 찢어지며 말려 올라갔다.
그러다 이내 싸늘해진 표정.
“내 가이드는 화나면…….”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던 고개가 틀어지며 으득- 살벌한 소리를 내었다.
“좀 거칠거든.”
헥터는 그대로 이동 마법진을 펼쳐냈다.
그러다 일순, 걸어가던 걸음을 멈추고 카이시스를 돌아보았다.
“참, 그 ‘고작’이 내 소속 가이드란 사실은 알고 있나?”
그 순간, 카이시스 눈동자가 흔들렸다.
황제인 카이시스는 소속 가이드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또한, 소속 가이드의 계약은 황실과 신전의 인장이 필요한 것도.
즉, 자신의 허락 없이는 절대 이루어질 수 없는 계약이라는 것이다. 더욱이 헥터와 관련된 보고가 올라오지 않았을 리 없다.
그런데 대체 무어란 말인가.
확고한 헥터의 태도는 분명, 허세로 보이진 않았다.
“나와 이전에 신전과 전쟁을 치르고 싶지 않다면 함부로 건들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점점 멀어져가는 헥터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카이시스가 이를 짓씹었다.
그리 얼마나 흘렀을까.
“건들 수도 없을 테지만.”
헥터의 모습이 사라지자, 카이시스의 절규가 밤공기를 흔들었다.
* * *
“헉헉-!”
한편, 에스페논 신전이 무너지자마자 대신전을 빠져나온 그림자 하나가 황급히 달리고 있었다.
죽는다.
황제는 분명 자신을 죽일 것이다.
헉헉-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 그림자가 힘겹게 산길을 올랐다. 그 와중에도 챙겨 나온 금은보화들이 그림자의 발길을 더욱더 더디게 만들었다.
그리 얼마나 달렸을까.
입구를 막고 서 있는 두 사람의 형체에 그림자의 걸음이 우뚝 멈추어 섰다.
“이곳으로 오는 게 확실합니까?”
의심 가득한 음성이 밤공기를 울렸다.
거참-
“확실하대도.”
벌써 몇 번째 되묻는 건지 귀찮은 기색이 역력한 남자가 답했다.
“대신전 지붕 부서진 지가 벌써 한참인데 코빼기도 안 보이지 않습니까. 하고 많은 길 중에 굳이 산길을 타다니, 처음부터 이상했습니다.”
투덜거리는 남자의 붉은색 머리카락은 어둠 속에서도 형형히 빛났다.
“그러지 말고 이제라도 찾으러 가보죠. 황제의 친위대가 먼저 찾으면 어떡합니까.”
레온이 당장 움직일 것처럼 자세를 잡았다.
짧은 한숨을 내쉰 태너가 타이르는 듯한 어투로 말했다.
“이 산에는 성물이 있어.”
“성물이요?”
“그래, 그래서 마법으로 추적할 수 없지. 아마 황제의 이능으로도 힘들 거야.”
“태너 경이 그걸 어떻게 압니까?”
그제야 레온은 퍽 신뢰 어린 눈길로 태너를 바라보았다.
“자고로 헌트가의 집사라면 이 정도는 되어야지.”
태너가 콧대를 세우며 으스댔다.
“그리고 내가 누누이 말하지 않았나. 자네는 실력은 좋은데 자만하는 게 문제라고.”
“자만이라뇨?”
“아직도 모르겠나.”
태너가 어둠을 향해 눈짓했다.
도대체 무슨 소리일까. 레온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바엘이 소스라치게 놀라 뒷걸음질 쳤다. 하지만 뛰어 달아나기엔 이미 늦었다.
“뭐가 있……!”
그 순간, 바엘의 기척을 감지한 레온의 입매가 죽 찢어졌다.
“진짜 왔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