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본문
2.
“네?”
태너의 말에 평온했던 샤를의 나날이 와장창 부서졌다.
“저도요?!”
“본관 시종들 사이에서 독감이 퍼져, 당분간 제로분들이 본관 시종들의 업무를 맡아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물론 샤를 양도 포함해서요.”
그래, 헥터는 극심한 결벽증이시니깐. 게다가 자신은 돈 받고 일하는 처지가 아니던가.
하지만 갑자기 날아든 사망 플래그는 당혹감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원작에 등장도 하지 않는 자신이니, 사망 플래그라 하기 뭐하긴 했다.
그러나 그 미친 광공 헥터의 눈 밖에 찍히는 날엔 최소 퇴출이었다.
낯빛이 잿빛이 된 샤를을 잠시 응시하던 태너가 말했다.
“각하에 대한 소문이 좋지 않은 건 알지만, 샤를 양은 유독 각하를 두려워하는 것 같군요.”
순간 빙의자의 가슴이 뜨끔했다.
진짜 태너의 이능은 관심법이 아닐까?
물론 황제인 카이시스의 이능이기에 태너가 그럴 리 없지만 말이다.
만약 그랬더라면 태너가 황제였겠지.
‘헥터 병신.’
그러나 의심스러운 건 어쩔 수 없으니, 샤를의 가늘어진 눈초리가 태너를 흘끔거렸다.
‘헥터 결벽증.’
난데없이 쏘아보는 시선에 태너가 당황한 듯 눈을 깜빡였다.
‘헥……. 헥터는 그랜드 마스터!’
용기 내어 속으로 중얼거린 찰나, 태너의 얼굴로 실금 같은 미소가 번졌다.
설마……!
“그렇게 쳐다보아도 특별수당은 없습니다. 임금에 계산된 노동이니까요.”
아, 뭐야. 저를 진짜 무슨 속물로 아는 거야?
실망을 감추지 못한 샤를이 어깨에 힘을 풀었다.
“주면 좋은데 안 줘도 어쩔 수 없죠.”
사실 속물 맞으니깐 뭐.
* * *
얼마 지나지 않아 선발된 제로들이 본관으로 향했다. 대부분이 남자였는데 샤를처럼 여자인 제로들도 있었다.
본관 로비에 모인 이들은 하나둘 태너의 지시하에 제 위치를 찾아 이동했다.
그렇게 남은 것은 샤를과 여자 제로들뿐이었다.
“여기 계신 여러분은 조금 중요한 일을 맡게 될 겁니다. 그러니 주의 사항을 듣고 각별히 유념하여 행동하길 바랍니다. 만약 이를 어기고 개인적인 행동을 한다면 계약서상에 명시되어 있는 내용대로 처리하겠습니다.”
샤를의 귀가 쫑긋거렸다.
대체 그놈의 계약서엔 뭐가 적혀 있기에 저래?
혹시 위반 사항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나. 열심히 작은 뇌를 뒤져 보았지만, 딱히 생각나는 것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작은 글씨가 빽빽하게 적힌 계약서는 무려 열 장이 훌쩍 넘었다.
게다가…….
[사용인별로 임금 및 처우가 상이하게 책정되기 때문에 계약상의 내용은 기밀입니다. 이를 어길 시, 위약금 십억랑이오니, 참고 부탁드립니다.] 라고 되어 있어 다른 이에게 읽어달라고 부탁할 수도 없었다.
“여기 두 분은 각하의 목욕 시중을 들게 될 겁니다. 각하께선 누군가 몸을 보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시니, 최대한 시선을 조심하길 바랍니다.”
“네.”
휴-
샤를이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목욕 시중이라니. 조금만 삐끗해도 사망, 아니 쫓겨나기 딱 좋은 자리였다.
“여기 두 분은 각하와 정화를 나눌 영애들의 시중을 들게 될 겁니다. 영애들이 무슨 말을 하든 반응을 보여서도, 말을 섞어서도 안 됩니다. 질문을 받거나 곤란하다 판단되면 조금도 망설이지 말고 문 앞에 대기 중인 기사에게 말하세요.”
“네.”
어라? 잠깐만.
왜 점점 강도가 올라가는 느낌이지?!
몰려드는 불길함에 샤를이 팔뚝을 쓸어내렸다.
하지만 쌔함의 촉은 과학이라 하던가.
언제나 그와 같은 직감은 빗나가질 않음이니, 태너는 샤를을 보며 빙긋이 웃음 지었다.
“그리고 샤를 양.”
“……네?”
“샤를 양은 제 보조입니다. 앞으로 모든 것에 조심하면 됩니다.”
뭐라고, 역시 이 악마 새끼가?
* * *
앉으나 서나 조심.
숨 쉬는 것도 조심.
페로몬은 극 조심.
그렇게 있는 듯 없는 듯 살얼음판을 걷는 샤를의 하루하루가 이어졌다.
매일 아침 스스로를 세뇌하며 이너피스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나는 릴리아나가 아니다. 헥터가 미친 듯이 좋아했던 은발도 아니고, 뽑아서 으깨버리고 싶다던 자안도 아니다. 나한테 사망 플래그 따윈 없어. 내 페로몬이 아무리 좋아봤자, 결벽증에 불감증인 헥터다. 그래, 나 따위는 관심 두지 않아.’
본관은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궁전이었다.
여길 보아도 골드, 저길 보아도 골드. 사방이 황금빛으로 물든 내부는 화려함의 극치였다.
겉으로 보아도 그러했지만, 베르사유의 궁전쯤은 뺨 때리고도 남으리라.
한 층의 높이만 해도 4층은 훌쩍 넘는 것 같았고, 천장을 가득 채운 벽화들과 조각들은 성스럽기까지 했다.
그리고 다행히 샤를은 헥터와 부딪히는 일이 거의 없었다.
정확히는 헥터를 대면한 적도 없었다.
살짝 열린 문틈 사이, 헥터로 추정되는 인영을 본 것이 다였다.
모든 시중은 태너가 도맡았으며 샤를은 문밖에서 대기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거 가져오세요. 저거 가져오세요.’라는 태너의 지시에 도도도- 넓은 궁을 돌아다니는 것이 전부였다.
이렇게라면 본관에서도 일 년은 버틸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오늘은 정화가 있는 날입니다. 각하의 심기가 좋지 않을 테니, 조심. 또 조심해야 합니다.”
이 악마 새끼. 너 이능 있지. 할 만하다는 내 속 읽고 그러는 거지.
샤를이 태너를 노려보았다.
“지금도 충분히 잘하고 있으나, 어떤 것을 보게 되더라도 비명과 우는 것은 절대, 금물입니다. 알겠습니까.”
알아, 인마.
헥터는 그 둘을 극히 혐오했으니깐.
* * *
소설을 읽어서 그런가. 샤를은 비명은커녕, 크게 놀라지도 않았다.
사실 그럴 만한 일도 없었다.
가운만 걸친 채 방에서 끌려 나오며 헥터의 이름을 부르짖는 여자들의 모습은 퍽- 놀랍긴 했다.
하지만 사지가 잘린 시체가 나오지 않을까 했던 샤를의 걱정에 비하면 모두 양호한 것이었다.
‘여주인공 한정 미친 광공인가.’
하긴, 결벽증이니 어떻게 보면 여주인공 한정이 맞으리라.
이왕 한정일 거면 다정공 하지. 왜 집착 광공으로 빠져 베드 엔딩을 맞이했나 싶어 한편으론 안타까운 마음이 일기도 했다.
섹스를 통한 정화가 특히나. 인간의 존엄성이 훼손당하는 느낌이랄까.
원치도 않는 성관계를 맺어야만 정상적으로 살 수 있다는 것이 매우 모순적이니 말이다.
“흐읏, 어흑, 하으윽.”
들려오는 거친 신음에 태너와 함께 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샤를이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3분. 시작한 지 고작 3분 되었다.
“어휴…….”
오늘은 좀 크게 화나겠다 싶어 샤를이 긴 한숨 내쉬었다.
대체 어떻게 생겨 먹은 좆이기에 여자들이 5분을 못 버티나? 그녀들 또한 우성일 텐데 말이다.
샤를은 여자의 애액이 더러워 제 살이라도 베어내려고 할 제 주인, 헥터를 위해 욕실로 향하기 전 빠르게 닦아낼 용도인 수건에 물을 적셨다.
“하윽, 으흐윽…….”
아냐, 좀만 더 버텨봐. 그래도 5분은 넘겨야지.
샤를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손놀림을 더욱더 빠르게 움직였다.
이 정도면 안타까운 게 아니라 불쌍한 수준이다.
사정 못하는 고통이 어마어마하다던데.
더군다나 이능의 후유증 때문인지, 헥터는 매일 밤 독한 술을 찾았다.
정화는 둘째치고, 저 대단한 물건을 가지고 있으면서 싸질 못한다는 건 진정 고문이 아니겠는가? 강제 고자행이니 말이다.
샤를은 물기를 짜낸 수건 두 개와 마른 수건 한 개를 말없이 태너에게 건네주었다.
태너는 그런 샤를이 신기하고 퍽 기특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딸랑-
역시나 헥터의 부름이자, 이번 섹스도 망했음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 * *
샤를은 방에서 나올 여자와 뒤이어 나올 태너를 기다리며 페로몬 막기에 집중했다.
섹스 후, 문이 열릴 때마다 풍겨져 나오는 향기가 꽤나 설렜기 때문이었다.
아주 고급스럽고 섹시한 남성의 향.
어디에서도 맡아본 적이 없는.
아니, 이건 향수로 절대 구현할 수 없는 향이었다.
정말이지 너무 좋아 온종일 얼굴을 파묻고 있고 싶은 정도랄까.
레온과 태너. 그리고 다른 우성들의 페로몬이 각각의 향 하나라면 헥터는 향수가게를 통째로 옮겨 온 듯한 느낌이었다.
정말 독하고 거칠다 싶은 날도 있었고 중압감이 느껴질 정도로 무거운 날도 있었다.
하지만 그 베이스는 같았다.
미칠 듯한 매력과 퇴폐적인 관능.
제로인 자신이 이만큼 느낄 정도라면 다른 여자들은 오죽하랴.
왜 헥터에게 미쳐 날뛰었는지 샤를은 이해가 되었다.
자신도 멱살 잡고 킁킁- 거리고 싶었던 것이 한두 번이 아니니 말이다.
‘근데 왜 이렇게 안 나와?’
보통 들어가고 얼마 후 문이 열려야 정상이었다.
한데 잠잠해도 너무 길게 잠잠했다.
그때였다.
쿠당탕-!
들려오는 소리에 샤를의 등줄기로 으스스- 소름이 돋쳐 올랐다.
“샤를 양!”
아, 신이시여…….
* * *
“…….”
어둠이 내려앉아 있는 방안은 얼핏 보아도 난장판이었다.
나체 상태인 여자는 눈이 뒤집힌 채 헥터에게 달려들고 있었고, 태너는 여자를 죽이려 하는 헥터를 막느라 여념이 없어 보였다.
기사를 부르는 게 더 빠를 테지만, 상대는 페로몬이 폭주한 상태의 여성 마스터였다.
게다가 오늘은 레온의 휴무 날이었다.
태너와 눈이 마주친 샤를은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제가 이 여자를 후딱 끄집어낼 테니, 저는 제발 살려주십시오.’
샤를은 서둘러 헥터에게 매달리는 여자를 잡아끌었다.
“한 번만 더……. 한 번만…….”
어우, 미쳤나 봐.
젖가슴을 덜렁거리며 헥터의 가운을 부여잡는 여자의 모습은 가히 제정신이 아닌 듯 보였다.
“……놔라.”
“……!”
헥터의 낮은 목소리가 방안 전체를 무겁게 짓눌렀다.
그 순간, 숨이 턱 막힐 정도로 공기가 텁텁해졌다.
꼭 산소를 모조리 빼앗고 이산화탄소만 남겨놓은 느낌이었다.
‘안 돼. 당신의 어둠 이능은 비밀이잖아.’
샤를은 젖 먹던 힘까지 끌어 모아 여자를 끄집어냈다. 헥터의 이능이 까발려지는 날에는 사용인인 저도 온전치 못할 일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여자와 옥신각신했을까.
퍽-!
여자의 손이 샤를의 안면을 강타했다.
그리고…….
“아이 씨X.”
샤를이 저도 모르게 뱉은 욕설이었다.
그 순간, 당장이라도 여자의 숨통을 막아버릴 것만 같았던 어둠의 기운이 삽시간에 수그러들었다.
그러나 분노에 휩싸인 샤를은 그를 느끼지 못했다.
“아악-!”
여자가 샤를의 머리끄덩이를 잡아당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여자가 미쳤나.”
그에 질세라 샤를도 여자의 머리채를 잡았다.
“……?”
보통 제로는 플래티넘만 봐도 벌벌 떤다.
아니, 계급을 불문하고 저보다 높은 급에 경외를 느끼는 것이 정상이었다.
그런데 급도 없는 제로 따위가 마스터의 머리채를 잡았다? 그것도 눈에 살기를 띠고 공격을 하기 위해서 말이다.
이는 극렬하게 타오르던 헥터의 분노마저 사그라뜨릴 정도로 놀라운 광경이었다.
“샤…… 샤를 양?”
태너가 불러보았지만 눈이 돌아간 샤를에게 들릴 리 만무했다.
“이, 시XX이.”
“…….”
그렇다. 샤를은 사실 성격이 매우 더러운 여자였다.
더군다나 그동안 쌓인 울분이 어디 한두 가지겠는가?
“어딜 처잡고 지X이야.”
“…….”
샤를은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그리곤 잡은 여자의 머리채를 바닥으로 내리꽂으며 질질 끌어내렸다.
그때, 정신을 차린 여자가 마력을 사용하여 샤를을 튕겨냈다.
“……!”
공중으로 붕- 떠오른 샤를의 몸.
왜 하필 자신은 헥터에게로 날아가고 있는 것인지.
아니, 왜 태너는 헥터에게서 떨어져 있는 것인지.
‘안 돼. 닿으면 난 죽어!’
샤를은 헥터와 부딪히지 않으려 몸을 한껏 웅크렸다. 그리곤 잽싸게 방향을 틀었다.
인간의 살고자 하는 욕구는 강렬했고, 초인적인 힘을 발휘함이니…….
쿵-!
결과는 가까스로 헥터를 비켜나 바닥에 떨어진 세이프였다.
“…….”
헥터는 바닥에 웅크린 채 미동도 하지 않는 샤를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 얼마 전 ─
“가이드?”
목욕을 마치고 나온 헥터가 태너를 돌아보았다.
젖은 머리카락을 쓱 쓸어 올리는 모습이 퇴폐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벌어진 옷깃 사이로 드러난 잘 다듬어진 근육은 보는 것만으로도 육감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같은 남자가 보아도 참으로 매력적임이니, 태너의 얼굴로 실금 같은 미소가 번졌다.
“선례에 의하면 황실에서 성력이 있는 제로를 정화 가이드로 사용해왔다 합니다.”
정화 가이드.
그 성력이 부족하여 정화의식, 즉 섹스를 통한 사정 및 노팅은 어려우나 페로몬을 뿌려줌으로써 접촉 가이드를 돕는 보조자 역할이었다.
“그래서였나. 저택 여기저기 페로몬을 뿌려뒀던 게.”
페로몬에 민감한 헥터가 샤를의 존재를 모를 리 만무했다.
그동안 샤를이 만진 문만 몇 개요, 지나다닌 복도만 얼마던가.
공기 중에 떠다니는 페로몬이야 금세 사라질 테지만, 접촉으로 남겨진 페로몬은 그 정도가 더 농후하고 오래 유지되었다.
제집에 찾아온 낯선 손님. 그리고 그 페로몬을 헥터가 알아차리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단지 태너가 또 무슨 수작일까, 지켜본 것일 뿐.
더구나 여성의 페로몬이 확실함에도 역겹게 느껴지지 않아 기이하기도 했다.
레온에게서 비슷한 향이 풍겨올 때면 헥터는 이유 모를 불쾌감이 밀려들기도 했다.
“알고 계셨습니까?”
헥터가 무심히 의자에 몸을 묻었다.
“알아차려달라 대놓고 묻히고 다닌 주제에 잘도 지껄이는군.”
“…….”
게다가 태너는 샤를과의 수업 후, 페로몬을 씻어내지 않고 종종 헥터를 알현했었다.
그러다 점점 강도를 높여가며 샤를이 만진 만년필을 가슴에 꽂고 오기까지 하였더랬다.
헥터의 말에 태너가 빙긋이 미소 지었다.
“익숙해지는 데 시간이 필요한 법이니까요.”
끼릭- 헥터의 몸을 감싼 커다란 의자가 창문으로 돌아섰다.
“뱀 같은 노인네가 따로 없군.”
“노인이라 하기에는 아직 많이 젊습니다만.”
돋움발로 껑충거리며 정원을 가로지르는 인영이 헥터의 시야를 파고들었다.
“동의는.”
거의 납치 수준으로 레온을 끌고 왔던 전적이 있는 태너였다.
“……계약서에 명시해 두었습니다.”
물론, 그를 확인했을지는 모를 일이지만.
태너가 조용히 허공으로 눈동자를 돌렸다.
“하겠다고 했다라…….”
헥터의 손끝으로 돌려지는 언더락 잔에서 얼음이 부딪히며 서늘한 소리를 내었다.
그 속내라도 읽은 듯 태너가 말했다.
“첩자일 가능성은 없습니다.”
“확실한 건가.”
“예. 헤론 산맥에 위치한 데이몬드 마을을 벗어난 적이 없는 거로 확인됩니다. 또한, 성력이 낮기에 보고가 올라가지 않아 황실이나 신전 쪽과의 접촉도 없었습니다.”
본래 제로가 성력을 가진 경우 모두 황실로 가게 된다.
그러나 데이몬드 마을의 노신관은 샤를을 황실에 보내지 않기 위해 보고를 누락했다. 샤를의 어머니 또한 마찬가지였다.
마스터급 이하의 성력을 가진 제로가 황실로 가게 될 시 그 생은 매우 비참했기 때문이었다.
황제의 유흥거리로 전락하여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으니 말이다.
더욱이 샤를은 외모가 아름다워 틀림없이 하렘에 들어가게 될 터였다.
제로임에도 성력이 있는 이들이 극소수인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실존하는 존재가 맞나 싶을 정도로 주위에 없고 제대로 파악조차 되지 않는 것은 이와 같은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태너는 이를 침묵했다.
이는 황실에서도 극비 중의 극비였다.
게다가 성력이 있는 제로를 황실이 독점하고 그들과 관련된 일련의 기록을 덮은 걸 알게 되면 카이시스와 대립하게 될 것이 자명한 까닭이었다.
“실버급 정화 가이드라…….”
“성력을 떠나, 곁에 두실 이유는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태너가 저를 조감하는 헥터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다.
“유일하게 역겹지 않은 페로몬이 아닙니까. 그로 인해 조금이라도 정화가 이루어진다면 좋은 것이고요. 접촉하지 않고도 말입니다.”
헥터가 피식하고 조소했다.
“성력이 있다면 타인의 페로몬 또한, 느낄 테지.”
다른 여자들과 같을 것이란 헥터의 자조적인 반응에 태너가 옅은 웃음을 머금었다.
“제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만.”
헥터의 붉은 눈동자가 태너를 응시했다.
“조만간 연무장에서 샤를 양의 페로몬 개방 연습을 할 예정입니다. 정 미덥지 않으시다면 한번 참관해보시겠습니까.”
“준비성이 철저하군.”
“헌트가의 집사라면 이 정도는 되어야지요.”
헥터의 눈길은 그 후로도 폴짝거리는 인영이 사라질 때까지 집요하게 따라붙었다.
* * *
‘악마 새끼.’
그리 믿었건만.
태너는 마법을 사용하여 여자를 수습한 뒤, 빛의 속도로 방을 빠져나갔다.
즉, 방안에는 바닥에 널브러진 샤를과 그를 가만히 내려다보는 헥터. 이 둘뿐이란 소리였다.
‘차라리 부딪히고 죽을걸.’
자신을 신기한 동물쯤으로 취급을 하는 헥터의 시선은 보지 않아도 또렷하게 알 수 있었다.
이는 짐작이 아니었다.
헥터는 분명 저를 보며 ‘흠.’하고 비웃음 섞인 숨을 내뱉었다.
‘……시X.’
샤를은 형용할 수 없는 쪽팔림과 자괴감이 휘몰아쳤다.
접시에 코를 박고 죽는다던가, 쥐구멍에 숨고 싶다는 옛말이 결코 과언이 아니리라.
지금 자신이 딱, 그러고 싶으니 말이다.
‘아니야. 생명은 소중한 거니깐. 겨우 이깟 거로 죽으면 안 돼.’
그래, 살자.
이 몸은 그 대단하신 2회차 인생이 아니겠는가. 창피함이고 뭐고 일단 살고 보는 것이 중요했다.
결심을 다진 샤를이 벌떡- 자리를 떨치고 일어났다.
“……?”
헥터가 자신을 주시하는 것이 느껴졌지만 샤를은 돌아보지 않았다.
그저 문틈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빛이 구원이라도 되는 양 오직 앞만을 바라보며 성큼성큼- 걸어 나갈 뿐이었다.
“잠깐.”
아, 이건 진짜 X됐다.
샤를의 몸이 그대로 얼어붙었다.
자의로 멈춘 것이 아니었다. 어둠으로 속박된 몸은 가위라도 눌린 듯 손끝 하나 까딱할 수가 없었다.
겨우 이딴 곳에 이능을 쓰다니.
아니, 애초에 이건 극비가 아니던가?
그리 생각하던 찰나, 강력한 향이 샤를을 덮쳐왔다.
“……!”
헥터의 페로몬 개방이었다.
‘악마 새끼, 페로몬 방어하는 법은 안 가르쳐줬잖아!’
공기 대신 정신이 아찔하리만큼 매혹적이고 농밀한 향이 샤를의 폐 안을 가득 채워 나갔다.
뒤이어 뇌쇄적이고 관능적인 향이 밀려들었다.
물속에 들어가 있기라도 한 것처럼 꽉- 막힌 숨통에 샤를은 입으로 숨을 몰아쉬었다.
“하아……. 하…….”
하지만 산소는커녕, 더 짙은 향기만 들어오며 입안을 말려낼 뿐이었다.
그리고 곧 샤를은 자신이 페로몬을 방출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연무장에서 느꼈던 무언가가 빠져나가는 그 느낌이 확실했다.
아니, 제 몸속에 있는 페로몬이란 페로몬은 모두 긁어모아 뿜어내는 것만 같았다.
또한 레온과 달리 헥터의 페로몬은 샤를의 전신을 진동시켰다.
그냥 향수를 시향하고 기분이 좋아 설레는 정도가 아니었다.
향기가 섹시해서 심장이 뛴다면 믿어질까.
이건 가히 지배적인 느낌이었다.
뿐만 아니라 태너가 음부가 두근거리니 뭐니, 그딴 소리를 지껄인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그저 향만 맡았을 뿐일진대, 온몸의 신경이 곤두서고 예민해졌다.
그렇게 감각을 타고 흘러든 헥터는 샤를의 머릿속까지 파고들어 점령해갔다.
이건 단순히 신체의 흥분이나 반응 따위와는 차원이 달랐다.
관능으로 사람을 매혹시켜 애를 태운 뒤, 이어질 쾌락을 갈망하게 만듦이랄까.
질질 끌려 나가던 여자가 왜 정신을 잃었는지, 단박에 이해가 되는 순간이었다.
자신도 지금, 사막 아래 있는 것처럼 타는 듯한 갈증이 일고 있으니 말이다.
페로몬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좋은데 키스라도 하게 되면 대체 얼마나 좋을까.
만약 정말 섹스라도 하게 되면…….
‘아냐, 정신 차려!’
샤를은 더는 헥터를 원하지 않으려 최대한 정신을 집중했다.
떠오르는 헥터를 지워내고 상상되는 모든 것들을 지워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 또한 방금 그 여자처럼 미쳐버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평정심을 찾자. 평정……!’
그때, 번뜩이는 생각 하나가 샤를의 뇌리로 스쳐 지나갔다.
이왕 취할 거 헥터보단 국뽕이 낫지 않겠나. 덧붙여 이것은 어떠한 마법보다도 강력한 K-주문이니 말이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이윽고 샤를의 등 뒤에서 흡사 짐승의 포효와도 같은 섬뜩한 소리가 들려왔다.
“흐음.”
헥터가 깊은숨을 들이마시고 잠깐 멈추었다가 천천히 내쉬었다.
샤를은 새빨간 눈동자에 잡아먹히는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포식자 앞에 놓인 피식자가 된 양 눈꺼풀이 파리하게 떨어졌다.
그리 얼마나 흘렀을까.
헥터의 입매가 미세하게 올라갔다. 혀끝은 입맛이라도 다시듯 입술을 훑었다.
곧이어 낮고 굵은 음성이 샤를의 가슴을 나락으로 끄집어 내렸다.
“달군.”
시X……. 페로몬 역겹다면서요.
* * *
“믿었는데…….”
별관 샤를의 방.
배신감이 가득한 눈망울이 태너를 노려보았다.
태너는 침대 옆에서 머쓱하게 앉아 있었고, 샤를은 여자에게 맞아 벌겋게 부어오른 뺨을 얼음찜질하고 있었다.
“전 도와주려고 했는데…….”
샤를은 얼굴을 가격당하고 머리채를 잡힌 것보다, 아니 이 세계에 떨어진 이후 겪은 모든 일을 통틀어 헥터의 달다는 말이 가장 충격적이었다.
물론 헥터는 재앙과도 같은 말을 남기고 자신을 스쳐 지나 그대로 방을 빠져나갔지만 말이다.
그래도 이건 그냥 넘어가선 안 되는 문제였다.
“절 버리시고 가시다니…….”
“…….”
태너는 어째서 마스터인 자신이 제로의 눈치를 보고 있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마음이 꺼칫거리는 건 맞으니 일단 조용히 입을 닫았다.
도망친 것이 아니라 부정할 수도 없었다.
여자는 계약을 어기고 헥터의 성기를 입에 머금는 펠라티오를 시도했다. 따라서 헥터는 그야말로 폭주 상태였다.
샤를이 그 여자를 막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진 않았다. 그저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어 헥터를 진정시키고 수습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그런 상황이 벌어지리라곤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그래도 결과적으로 헥터의 폭주가 순식간에 일단락되지 않았던가?
“천이요.”
난데없는 발언에 태너의 고개가 기울어졌다.
“천이라니요?”
“목이 날아갈 뻔했는데 천 트랑은 주셔야죠. 솔직히 이 정도면 억 단위인데 많이 봐드린 거예요.”
“…….”
샤를은 인심 쓴다는 어투로 말했다. 흥- 하니 돌아선 고개는 단단히 화가 났음을 표명했다.
과실에 대한 비율을 명명백백 밝히자면 참지 못한 자신에게도 잘못이 있었다.
그렇지만 이게 어디 보통 일인가? 제 페로몬이 달다는데.
마법 계약서만 아니라면 정신적 피해보상금으로 한몫 단단히 챙겨 야반도주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깽값이라고, 원래 사람 치면 돈 줘야 해요.”
“제가 샤를 양을 때린 것이 아닐 텐데요.”
“절 버리고 가셨잖아요. 따지자면 원인 제공자시고.”
샤를은 콧대를 세우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이건 근무시간에, 그것도 엄연히 업무상의 사유로 발생한 노동자의 피해니깐 산재죠.”
태너는 새어 나오려는 웃음을 참느라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 자신이 무엇을 저지른 것인지는 알까?
[흥미롭더군.]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헥터는 분명 웃고 있었다. 마치 즐겁다는 듯.
헥터가 태어난 이후부터 지금까지 곁에서 모셔온 태너였다.
그런 자신조차 손꼽힐 정도로 본 것이 바로 헥터의 웃음이었다.
헥터는 무언가를 보며 즐거워하지도 않았고, 애초에 관심을 두지도 않았다. 분노 이외에는 감정이 없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정서의 변화 자체가 거의 없었다.
그런 제 주군의 입에서 흥미롭다는 단어가 나왔다.
그것도 사람을 향해 말이다.
태너는 샤를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솔직히 이런 상황까지 바라고 샤를을 데려온 것은 아니었다.
대체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짐작조차 되지 않음에 불안감마저 밀려들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이것이 최선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도록 하죠.”
너무나 쉬운 합의에 샤를은 되레 놀란 듯 태너를 바라보았다.
쳇- 이럴 줄 알았으면 더 부를걸.
샤를은 속으로 혀를 차며 아픈 볼을 쓸어 만졌다.
“그리고 전달 사항이 있습니다.”
“뭐, 뭔데요?”
쌔- 하다 못해 오소소- 돋쳐 나는 소름. 설마, 염라대왕이랑 방금 하이파이브하고 온 사람인데 자비 좀 베풀자.
샤를이 이건 아니라는 듯 살며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래도 기어코 뱉어냄이니…….
“각하의 수행 시녀가 된 것을 축하합니다.”
뭐가 어쩌고 어째?
기함한 샤를을 향해 태너는 낯익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이 또한 계약서에 명시되어 있는 사항인데 보지 못하셨나요?”
이런 개XX,
넌 영원히 악마 새끼다.
* * *
다음 날. 중앙 정원의 한 모퉁이.
“똑. 똑. 똑…….”
쭈그려 앉은 샤를이 나뭇가지에 매달린 잎사귀를 하나씩 떼어내고 있었다.
본래 꽃잎을 떨어트리며 점치는 것이 맞았다.
하지만 주인을 닮아 그런 것인지, 이 거대한 공작저에는 풀때기만 가득할 뿐 꽃은 단 한 송이도 존재하지 않았다.
“똑. 똑. 똑…….”
“읏흠.”
레온이 기척을 내며 샤를 곁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바닥으로 떨어지는 나뭇잎은 멈춤이 없었다.
“하아…….”
“…….”
땅이 꺼지라 뱉어내는 한숨이 깊었다. 비구름이라도 낀 듯 샤를의 주변은 온통 우중충했다.
풍겨오는 암울한 페로몬에 레온의 눈매가 쓱- 올라갔다.
제 페로몬으로 무마시켜보고자 살짝 흘려도 보았지만, 눅눅함은 도통 가셔지지 않았다.
결국 레온이 샤를 곁에 쭈그려 앉으며 물었다.
“샤를 양. 뭐 하고 있습니까?”
“제 어디가 먼저 잘려 죽나, 점쳐보고 있었어요.”
잘려?
레온이 샤를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초점 잃은 눈동자는 싱그러운 잎사귀만 하염없이 바라볼 뿐이었다.
“각하께선 보통 어디부터 자르는 걸 좋아하시나요.”
레온의 입술이 호선을 그리며 휘어졌다.
“머리부터 자르시나요. 아니면 팔부터 자르시나요.”
이 망할 신분제 사회에서 제로 하나 죽는다 한들, 누가 눈이라도 깜짝할까.
아니, 다 떠나서 이 캐릭터 붕괴는 무어란 말인가.
시체 썩은 냄새가 난다던 페로몬 부적응자는 어디 가고 달다 하지 않나.
여자는 치가 떨리게 싫다던 미친 광공은 대체 어떤 헥터였단 말인가.
“음……. 보통 손가락부터 자르십니다.”
사뭇 진지하게 내놓은 레온의 대답에 샤를이 들고 있던 나뭇가지가 툭-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또 그리 믿었건만, 너마저…….
“그래도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샤를 양. 입만 잘 놀리면 목부터 날아가기도 하니까요.”
“…….”
“그리고 샤를 양은 아주 작고 귀여우니 더 빨리 죽어 고통이 덜할 겁니다.”
이 새끼나 저 새끼나. 여긴 정상이 없어.
* * *
본관 헥터의 집무실.
‘허……. 미쳤나 봐.’
헥터를 제대로 처음 마주한 샤를은 그대로 넋을 잃었다. 어디가 먼저 잘리는지 따위는 잊힌 지 오래였다.
대체 저 얼굴이 어딜 봐서 미친 광공이란 말인가?
여자들이 날뛴 건 사실 얼굴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빛을 등진 헥터는 그야말로 조각이 따로 없었다.
아니, 태어나 본 사람, 그림, 조각, 그 모든 것을 통틀어서 단연 최고였다.
아름답다 못해 신성하다고 느껴질 정도였으니 말이다.
입고 있는 옷 또한 한몫했다.
무슨 신전에서 떨어진 듯한 토가 같은 가운을 걸치고 있었는데 가슴을 훤히 드러내고 있는 것이 너무나도 오예스러웠다.
‘누가 몸 보는 거 싫어하신다면서요. 근데 그렇게 헐렁하게 입고 있으면……. 제가 감사합니다.’
빙의한 보람이 있음이라.
‘이 주식은 성공한 주식이야!’
샤를의 페로몬이 집무실 안으로 포로롱- 튀어 올랐다.
“……?”
태너는 웃지 않기 위해 고개를 숙이며 이를 악물었고, 헥터는 어이가 없음에 허- 하니 헛숨을 내뱉었다.
그도 그럴 것이, 어제 헥터가 개방했을 땐 멀쩡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지금은 헤실거리는 모양새가 꼭 침이라도 흘릴 기세였다.
보다 못한 태너가 입을 열었다.
“……샤를 양?”
화들짝 놀란 샤를이 그제야 헥터를 빤히 보고 있었다는 사실은 인지한 듯 서둘러 시선을 돌렸다.
“아, 네.”
샤를을 지그시 바라보던 헥터의 고개가 비스듬히 기울어졌다.
그리고 곧 샤를은 자신이 얼마나 안일했는지 깨닫게 되었다.
* * *
“제가요?”
샤를의 입이 방금과는 조금 다른 의미로 벌어졌다. 퐁퐁- 퍼져 나오던 페로몬 역시, 싸늘하게 굳어 가라앉았다.
가이드라니.
수행 시녀인 것도 모자라, 정화 가이드라니?!
무슨 계약서가 도라에몽 주머니도 아니고 말이야. 뭐가 이렇게 밑도 끝도 없이 나와?
여긴 불공정거래위원회 같은 거 없나? 이 정도면 신체 포기 계약이 따로 없었다.
그 순간, 서 있던 태너가 샤를만 보이도록 뒷짐 진 손을 슬그머니 펼쳐 보였다.
“……?”
3을 가리키듯 펼쳐진 손가락.
[그럼, 특정한 사유 없이 일방적 계약 해지 시, 위약금 30억 랑이란 조항도 보지 못했나요?]
어머머, 저 악마 새끼 보소?
지금 자신한테 삼십억 랑 내놓으라고 협박하는 건가?
경악에 휩싸인 얼굴이 한껏 일그러졌다.
허나 어쩌겠나. 저가 아주 기꺼이 사인하였거늘.
다시금 샤를의 시선이 헥터에게로 향했다.
“…….”
저를 뚫어지라 응시하는 새빨간 눈동자가 숨을 옭매는 것만 같았다.
머리털이 곤두서고 절로 몸이 부르르- 털어졌다.
“저, 저는 성력도 별 볼 일 없고, 그……. 하찮은데요. 네. 맞습니다. 전 가이드를 하기에 매우 부족하고 하찮습니다.”
잔뜩 갈라진 목소리가 볼품없이 새어 나왔다.
저가 말해놓고 주억거리는 샤를의 모습에 헥터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갔다.
첩자일 리는 당연히 없고, 저와 얽혀보고자 애를 쓰던 다른 여자들과도 확연히 달랐다.
반대편으로 늘어지는 고개. 혀끝은 힘이 들어간 입안 내벽을 살며시 긁어내렸다.
“그리고 어……. 저는 제로라서 그게……. 제로니까…….”
왜 뇌 용량이 제로가 된 것만 같을까.
새하얘진 머릿속은 마비가 온 것처럼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때였다.
“일억.”
“……?”
낮고 굵은 음성에 샤를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는 태너 역시, 마찬가지였다.
“임금으로 일억 랑을 주지.”
아, 감미로워라. 어쩜 목소리마저 저렇게 완벽할까.
지난밤엔 경황이 없어 잘 몰랐으나, 공기 전체를 진동시키는 것이 동굴이 따로 없음이었다.
역시 작가의 로망을 다 때려 박은 남주가 맞다.
‘정신 차려!’
그러나 남주는 남주일 뿐.
제 남자가 될 것도 아니고, 어차피 릴리아나가 나타나면 미칠 사람이었다.
샤를은 흐트러지려는 정신을 고쳐 잡았다.
‘다 죽이는 미친 광공이다. 내 눈앞에 저 미남은 사람을 찢어 죽이는 헥터다. 떠올려라, 머리여. 릴리아나에게 어떤 짓을 했었…….’
근데 잠깐.
그러고 보니 자신을 돈에 미친 뭐로 보는 것도 아니고 말이지.
솔직히 속물이 맞긴 하다만, 이건 좀 아니지 않나?
명색이 유교걸인데 남 섹스하는 거 지켜보면서 페로몬을 뿌려준다는 것이…….
“월 일억.”
“……!”
헥터의 발언은 샤를의 이성을 박살 내버렸다.
월 일억이라니. 이는 연봉으로 계산했을 때 세후 로또였다.
어차피 악마의 계약으로 결국 일 년은 하게 될 거. 월 오백 받고 하는 것보단 지금 승낙하는 게 더 이득이지 않겠나?
게다가 자신의 페로몬 개방에도 헥터는 태연했었다.
릴리아나가 나타나면 정화 가이드 따윈 필요 없어질 것이고.
‘그래, 고작 몇천 안 되는 연봉 받고도 개같이 일했었는데, 일 년만 나 죽었다 하고 버텨보자.’
그렇게 합리화를 마치고 삽시간에 표변한 샤를이 공손히 두 손을 모아보였다.
“앞으로 성심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고객……. 아니, 대공 각하.”
헥터의 한쪽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그 모습이 어찌나 섬뜩하던지, 샤를의 등줄기로 한기가 돌았다.
마왕이다.
태너가 악마라면 여긴 마왕이었다.
“하하…….”
근데 이거……. 잘한 거 맞겠지?
* * *
스륵- 사락.
“…….”
헥터의 집무실 안.
나른함을 실은 오후의 햇살이 글라스를 뚫고 조각나 반짝거렸다.
그 빛을 등지고 앉아 있는 헥터의 모습은 그야말로 찬란함 그 자체였다.
반면, 멀뚱히 두 시간째 서 있는 샤를의 초점은 매우 흐릿했다.
사락- 사락-
“…….”
헥터의 잘생김은 비단 얼굴뿐만이 아니었다.
곧게 뻗어진 손가락부터 하다하다 귀 모양까지.
마치 내가 주인공이다. 라고 주장하는 것 마냥 모든 것이 완벽하다 못해 경이롭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그 모습을 감상하는 것도 이제 더는 한계였다.
덧붙여 퇴근까지는 아직 세 시간이나 남았더랬다.
삭- 스륵- 사락, 사락-
“…….”
유교걸이고 나발이고, 차라리 섹스 구경을 하는 게 이보단 나을 것이리라.
뭐라도 좀 시켜주든가.
종이 위를 스치는 펜촉의 소리만 무한반복으로 듣고 서 있자니 정말이지, 미쳐버릴 지경이었다.
사락- 슥- 사락-
“…….”
당연히 처음엔 온몸의 신경이 곤두서고 긴장이 되었다.
하지만 그 무엇도 지각 기관을 이기지는 못했다.
피가 쏠린 발끝은 감각이 무뎌진 지 오래였고, 아른거리는 햇살 때문에 잠까지 쏟아졌다.
어디 그뿐인가?
여기저기 가득한 금장식의 향연을 보고 있노라면 정신이 혼미해 아찔함마저 몰려왔다.
사락, 사락-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헥터는 엉덩이에 자석이라도 붙여놓은 듯 미동도 없이 앉아 일만 하는 중이었다.
사락- 스륵. 사락-
‘저 인간은 왜 저렇게 성실해.’
성실한 집착 광공이라니, 이것이 웬 말이던가.
당장 광공위원회에서 뛰쳐나와 사형을…….
아니, 애초에 이 소설 어디에도 이딴 장면은 없었다.
여기가 정말 자신이 읽은 그 19금 떡 소설이 맞는지. 아니면 그냥 이름만 같은 또 다른 세계인지 의구심이 밀려들었다.
[정화를 위해, 페로몬을 개방하고 있어야 합니다.]
딱히 개방이랄 것도 없었다. 그저 신경 쓰지 않으면 그만이니깐.
[그럼 각하를 잘 부탁드립니다. 샤를 양이 있어 든든하군요.]
태너는 그 말만 남기고 홀연히 사라져버렸다. 진성 악마 새끼가 따로 없었다.
여하튼 자신이 가이드와 수행 시녀를 한다고 그랬지, 언제 벌 받는다 그랬나.
‘아오, 다리 저려 미치겠네. 야옹- 야아옹.’
샤를은 쥐가 난 발끝을 말았다 폈다를 반복하며 속으로 구시렁거렸다.
“…….”
그렇게 온 신경을 발끝으로 집중한 탓에 멈춰진 펜촉의 소리도, 저를 주시하는 시선도 느끼지 못했다.
‘야오옹. 야아아옹.’
“시녀.”
“야옹.”
“……?”
난데없는 소리에 헥터의 미간으로 힘이 들어갔다.
“야아…….”
“…….”
일순, 마주친 두 눈.
“오…….”
그제야 속으로 되뇐 것이 아닌, 입 밖으로 뱉었단 사실을 자각한 샤를이 입술을 옹그렸다.
“…….”
그냥 죽을까?
* * *
“그 정도였다니…….”
샤를의 쉬는 시간.
헥터의 부름을 받고 온 태너와 레온은 충격에 휩싸여 있었다.
“제로가 약하다고는 들어 알고 있으나, 겨우 두 시간 서 있었다고 다리에 쥐가 나다니…….”
레온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집무실에 남아 있는 샤를의 페로몬은 그 반증처럼 몹시 흐리터분했다.
“……제로 고용인들의 근무량을 더 줄여야겠군.”
태너가 혼잣말을 하듯 나직이 중얼거렸다.
탁- 탁- 탁.
손끝으로 책상을 두들기는 헥터의 얼굴은 한껏 구겨져 있었다.
샤를의 페로몬은 헥터가 맡기에도 청량했다.
난생처음 숨을 쉬는 것이 산뜻하게 느껴질 정도였으니 말이다.
특히, 저를 대면하고 포로롱- 튀어 올랐을 땐 기분까지 상쾌해졌었다.
그러나 문제는 점점 기세가 꺾이더니 나중엔 거슬릴 정도로 탁해졌다는 것이다.
“후…….”
스스스- 퍼지는 검은 아우라.
헥터의 심기가 몹시 좋지 않음에 태너가 서둘러 입을 열었다.
확실히 이건 정화라 보기 어려운 상태였다.
“말씀드린 것처럼 샤를 양이 기억을 잃어, 페로몬 조절을 잘 할 줄 모릅니다.”
보통 유아기를 지나 성장기에 접어들면 페로몬과 감정을 분리하는 법을 터득한다. 그리고 성인 정도가 되면 페로몬에 감정을 투영시키지 않고 조절할 수 있게 된다.
물론, 제어하지 못하고 표출할 때도 있긴 하다. 감정과 같은 이치로 화가 나는 것을 참지 못하거나 웃음이 터지는 차원이었다.
그렇지만 빙의자인 샤를은 갓 태어난 아이와도 다름이 없어 페로몬이 감정의 거울과도 같은 수준이었다.
“일단, 샤를 양의 페로몬부터 좋게 만드는 것이 우선이지 않겠습니까.”
시각에 약한 샤를이었기에 태너는 그녀가 헥터를 보면 괜찮을 것이라 그리 여겼었다.
아니, 이렇게 빨리 식을 줄 몰랐다는 것이 더 맞는 표현일 것이다.
틀림없이 저가 나갈 때까지만 해도 더없이 좋았으니 말이다
“의자를 가져다 놓고 앉아 있게 하심이…….”
“왜, 아주 침대를 가져다 놓지.”
가이드가 아닌 상전이 따로 없음이라. 헥터의 고개가 으득- 소리를 내며 비틀어졌다.
그때, 레온이 반색하며 대답했다.
“좋은 생각인 것 같습니다. 각하. 아무래도 편안한 상……. 컥!”
레온은 더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헥터가 어둠의 이능으로 목을 조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레온과 같은 의견이었던 태너는 조용히 침묵을 유지하였다.
“다……. 다른 방법이……. 있…….”
“허튼소리 지껄였다간 머리를 날려버릴 것이다.”
스르륵- 풀어진 그림자가 사라졌다. 레온은 제 목이 붙어 있나 확인하듯 목을 쓸어 만졌다.
“……샤를 양은 단것을 좋아합니다.”
“단것?”
“예, 맞습니다. 특히 딸기맛 마카롱을 좋아합니다.”
태너가 거들자, 다시금 레온이 받아쳤다.
“항상 단것을 먹고 나면 페로몬이 깨끗해졌습니다.”
그제야 선연하던 헥터의 살기가 거둬들여졌다.
“지금, 먹이를 주라는 건가?”
“…….”
먹이라고 하기엔 어감이 조금 이상했지만, 태너와 레온은 굳이 정정하지 않았다.
간식이나 티타임이라 한다면 지금의 헥터는 분명, 받아들이지 않을 까닭이었다.
“준비하는 데 시간은.”
“바로 가능합니다.”
“오기 전에 가져와.”
헥터는 이만 나가보라는 듯 의자를 돌렸다.
그때, 태너가 간절한 눈빛으로 레온을 응시했다.
“……?”
사실 딸기 마카롱 따위는 이 저택에 존재하지 않았다.
“…….”
더구나 남은 시간은 고작 15분 남짓. 이동마법을 써서 날아갔다 온다고 하더라도 시간이 촉박했다.
둘은 무언의 눈짓을 주고받으며 비장하게 끄덕거렸다.
그리고 서둘러 집무실을 빠져나가려던 찰나였다.
“제로는 동물과 언어가 통하나?”
* * *
“…….”
이건 무슨 신종 사망 플래그일까.
빛의 속도로 지나간 쉬는 시간을 마치고 돌아온 샤를은 사색이 되어 앉아 있었다.
잘라 죽이는 대신 배 터트려 죽이려는 것일까?
어쩌면 질려 죽는 것을 보고 싶은 것일지도 모른다.
족히 서른 개가 넘어 보이는 딸기 마카롱 산. 그를 보는 샤를의 동공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요동쳤다.
“먹어라.”
맞은편에서 한쪽 다리를 꼬고 앉아 있던 헥터가 말했다.
“네?”
“먹으라고 했다.”
어째서 저 소리가 ‘죽으라고 했다.’로 들리는 것인지. 샤를은 마른침을 삼켜 넘겼다.
하지만 뭐가 됐든,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하나였다.
“……네.”
샤를은 공손히 눈앞에 놓인 마카롱 하나를 집어 들었다.
제 몸을 뚫어버릴 작정이라도 한 듯 빤히 쳐다보는 눈빛은 어서 먹고 죽으라 재촉하는 것만 같았다.
일단 앙- 하고 베어 물었으나, 역시나 마카롱에선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찐득한 식감이 입안을 텁텁하게 만들어 점심 먹은 것까지 올라올 기세였다.
게다가 먹으라 해서 먹었는데 뭐가 마음에 안 드는지. 헥터는 미간을 한껏 구기고 있었다.
‘왜, 뭐가. 왜.’
샤를은 절로 울상이 지어졌다.
헥터는 샤를을 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후…….”
“…….”
둘 사이로 어색한 적막이 흘렀다.
“…….”
그냥 죽여달라고 할까? 아니면 오천 받고 섹스할 때만 불러달라고 할까.
오만 가지 생각이 교차하던 때였다.
“맛이 없나?”
갑작스러운 물음에 잔뜩 긴장한 목에서 우스꽝스러운 소리가 새어 나왔다.
“마, 맛있는데요.”
“그런데 왜 그러지?”
마카롱 한 번 저 한 번. 그리고 살짝- 틀어지는 고개가 불편한 심기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그 뜻을 파악하려는 샤를의 눈동자가 테이블 위를 굴러다녔다.
지가 준 건데 왜 다 안 먹냐는 걸까? 아니면 뭐, 고맙다고 하지 않아서 그러나?
어쨌든 이걸 다 먹으면 무조건 오바이트다.
샤를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밥 먹은 지 얼마 안 되어서……. 챙겨주신 건 정말, 감사합니다.”
소로록- 한껏 움츠러든 어깨가 작아졌다.
한편, 헥터의 미간은 더욱더 구겨져 내렸다.
“…….”
도대체 왜 저러는 거야.
* * *
그렇게 얼마나 흘렀을까.
일 분이 일 년같이 느껴진다고 하더라고 시간은 멈추지 않고 흘러, 드디어 대망의 여섯 시가 찾아왔다.
‘퇴근이다!!’
“……!”
그 순간, 퐁퐁- 거리는 샤를의 페로몬에 헥터의 눈썹이 쓱- 올라갔다.
들이켰다 내쉬는 숨으로 산뜻함이 느껴지고 머리를 쥐어짜내던 통증 역시 수그러들었다.
하지만 헥터는 서류에 고정된 시선을 움직이지 않았다.
저를 두려워한다는 것을 모르지 않음이었다.
그렇게 비눗방울이 터져 오르듯 포로롱- 거리는 샤를의 페로몬을 느끼며 답답했던 숨을 몰아쉬던 찰나였다.
부스럭- 부스럭.
“……?”
샤를은 주의를 끌려는 듯 일부러 부산스러운 소리를 냈다.
부스럭, 부스럭.
본디 칼퇴의 기본은 첫째도 철면이오, 둘째도 철면이리라.
더구나 자신은 정직원도 아닌 계약직이 아니던가?
헥터가 무섭긴 했지만, 이것만은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샤를이었다.
‘이 정도 눈치 줬으면 알아차렸겠지?’
이윽고 꼼지락거리던 샤를이 큼큼- 목을 가다듬었다.
“저…….”
처음으로 자신을 부르는 음성에 헥터가 고개를 들어 샤를을 응시했다.
샤를은 일어난 것도 앉은 것도 아닌 엉거주춤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