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본문
1.
“샤를, 집에 있니?”
동이 튼 지 얼마 되지 않은 이른 시각.
알람처럼 울리는 노바의 목소리에 샤를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아줌마 들어간다.”
‘이미 주방에 계시잖아요.’라는 예상처럼 아래층에선 분주한 소리가 들려왔다.
잠그면 뭐 하나. 어차피 이 집 현관문은 자동문 수준인 것을.
채 떠지지 않는 눈을 비비적거린 샤를이 몸을 일으켰다.
곧이어 스멀스멀 올라오는 스튜 향에 콧구멍이 벌름거리고, 남아 있던 잠이 달아났다.
“어서 내려와. 밥은 먹고 자야지.”
누가 보면 엄마라 착각할 법한 노바는 정확히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이자, 이웃 주민이었다.
“네.”
샤를은 꾸룩- 거리는 배를 부여잡고 1층 주방으로 향했다.
“어휴, 예쁜 얼굴에 이게 뭐니.”
어느새 다가온 노바가 샤를의 눈에 낀 눈곱을 떼어주었다.
그녀의 레드브라운색 머리카락이 후덕한 인상과 참으로 잘 어울렸다.
“배고프지? 조금만 기다리렴.”
마무리 동작처럼 샤를을 쓰다듬은 노바는 다시금 불 앞으로 향했다. 샤를은 착한 아이처럼 식탁에 앉아 제 몫을 기다렸다.
이윽고 퍽퍽한 빵과 닭고기가 들어간 스튜 그릇이 샤를 앞에 놓였다.
하지만 이어질 레퍼토리가 남아 있기에 숟가락을 들지 않고 기다렸다.
“얼마나 충격이 컸으면……. 이 불쌍한 것이.”
크흡-
역시나 노바는 눈물을 훔쳐내며 고개를 돌렸다.
“…….”
사실, 자신은 충격으로 기억을 잃은 것이 아니라고.
‘교통사고 후, 눈떠보니 여기.’라는 그 흔한 클리셰의 주인공이자 빙의자란 말이 목구멍까지 치올랐다.
하지만 샤를은 진실을 말하는 대신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괜찮아요. 아주머니.”
“괜찮긴. 이리 천사처럼 착한 아이인데…….”
크흐흡-
또다시 눈물 섞인 숨이 크게 들이켜졌다.
“…….”
샤를리즈 프레이저.
그것이 빙의한 이 몸의 이름이었다.
생전에 얼마나 착하게 살았던지. 사람들은 천사 같은 아이라며 몹시 어여뻐 했다.
평범한 초코브라운색 머리카락과 애쉬브라운색의 눈동자. 그러나 그 얼굴은 천사라 불릴 만큼 아름다웠다.
아마 금발에 청안이었더라면 사교계를 주름잡았으리라.
물론 마력이라곤 쥐뿔도 없는 제로였지만 말이다.
그래도 이렇게 예쁜 얼굴로 평생을 살아야 한다면 꽤나 만족스러운 삶이라 할 만했다.
처한 상황만 뺀다면.
“하늘도 무심하시지.”
노바가 눈물을 훔치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샤를은 그 말에 동의하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부모님의 사인은 마차 사고였다. 사람들은 샤를이 부모를 동시에 잃은 충격으로 기억을 잃은 것이라며 매우 안타깝게 여겼다.
이 몸에 빙의된 시점이 하필이면 부모님의 장례식 바로 다음 날이었기 때문이다.
전혀 다른 인성의 자신을 누구도 의심하지 않은 까닭 또한, 그 덕분이었다.
‘미쳤다고 생각하는 걸 거야.’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살던 집안이었기에 유산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가진 거라곤 제로인 몸뚱이와 낡은 오두막집뿐.
한순간에 가장을 잃은 샤를은 당장 먹고살 길이 막막한 신세가 되었다.
그렇다 보니 미친 집착 광공들이 난무하는 19금 떡 소설에 빙의했다고 주저앉아 울부짖을 시간이 없었다.
그리고 어차피 자신은 원작에 이름 한번 나온 적 없는 제국민 1이었다.
다행히 샤를을 불쌍히 여긴 이웃 주민들이 번갈아 가며 음식을 가져다주었다.
빵을 살 정도의 돈을 벌 수 있는 소일거리도 챙겨주었는데, 실상은 용돈을 주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자존심이 상하지 않다면 거짓이리라.
그러나 자신은 당장 구걸이라도 해야 할 처지였다.
그렇게 샤를은 가리지 않고 주민들의 호의를 감사히 받아들였다.
“전 정말 괜찮아요. 비록 어머니는 돌아가셨지만, 이렇게 저를 챙겨주시는 어머니 같은 노바 아주머니가 계시잖아요.”
샤를은 최대한 선량하게 보이기 위해 긴 속눈썹을 고이 접어 웃었다.
‘어머니’ 단어를 강조하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어흑, 샤를.”
국어책 읽는 것 같은 대사였음에도 감동에 젖은 노바는 샤를을 끌어안고 볼을 비비적거렸다.
“나는 예전부터 너를 딸처럼 생각했단다.”
노바 품에 안긴 샤를이 씩- 웃었다.
이로써 내일의 빵과 스튜도 확정이었다.
* * *
“또 봉투 받아왔어?”
가내수공업 거리를 들고 집으로 향하던 샤를의 걸음이 막혔다.
“그거 백날 붙여봤자 빵 한 쪽도 못 살걸?”
주근깨가 가득한 얼굴이 밉살맞게 실룩거렸다.
‘어디 몇 번 밟힌 감자같이 생긴 게 예쁜 건 알아서. 저리 안 꺼져?’라며 욕지거리를 뱉어주고 싶었지만, 토마스는 노바의 아들이었다.
‘빵이랑 고기 스튜. 내 눈앞에 저놈은 빵이랑 고기 스튜다.’
크게 숨을 몰아쉰 샤를이 토마스를 한번 흘기곤 걸음을 재촉했다.
그를 놓칠세라 토마스가 바짝 따라붙었다.
“그냥 빨리 결혼하는 게 낫지 않아?”
“너랑?”
“네, 네가 정 원한다면……. 불쌍하기도 하고, 어릴 적부터 친구기도 하니까…….”
직설적인 물음에 당황한 토마스가 횡설수설했다.
귓불은 적갈색 머리만큼이나 붉어져 있었다.
예전 같으면 부끄러움에 고개를 푹- 숙이거나 눈물을 보여야 하는 샤를이었다. 그런데 기억을 잃고 난 후로 예상할 수 없는 그녀의 반응에 당혹스러워지곤 하는 토마스였다.
“꿈 깨라. 난 결혼 안 할 거니깐.”
정확히 말하자면 너랑은 안 한다. 이지만, 샤를은 흥- 하니 콧방귀를 뀌었다.
“뭐? 왜? 왜 결혼을 안 해?”
청천벽력 같은 소리에 토마스가 얼굴을 쭉- 내밀었다.
반면, 샤를은 얼굴을 뒤로 쭉- 물렸다.
“하기 싫으니까.”
“왜 싫어?”
“그냥 싫으니까.”
“그럼 혼자 살려고? 이깟 봉투 붙여서는 절대 혼자 못 살아.”
“일자리 구할 거거든?!”
“넌 몸도 약하잖아. 얼굴 예쁜 거 말고는 할 수 있는 것도 없고.”
이게 팩트로 사람 뼈를 때려?
우뚝- 멈춰 선 샤를이 토마스를 노려보았다.
그 눈빛이 어찌나 매섭던지, 토마스는 뒷걸음질 치며 주춤했다.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샤를의 어깨가 이내 축- 늘어졌다.
샤를에게 빙의자 특혜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지난 기억이 없는 것은 물론이오, 글조차 읽지 못했다.
능력이 마력이자, 마력이 곧 계급인 이곳에서 이 몸은 급도 없는 최하위 제로였다.
제로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누군가에게 빌붙어 사는 것이 전부였다.
자수, 빨래, 운반 등 잡일도 브론즈 급부터 시켜주니 말이다.
지금 손에 들고 있는 봉투도 샤를은 반나절을 꼬박 붙여야 했지만, 브론즈는 마법으로 5분 만에 끝낼 일이었다.
이왕 빙의할 거 성녀나 귀족 영애였으면 얼마나 좋은가.
차라리 악녀도 이보단 괜찮으리라.
“그래, 맞아. 난 제로니까.”
샤를이 시무룩해지자 토마스가 어쩔 줄 몰라 했다.
“그, 그래도 제로여도 넌 예쁘잖아. 페로몬도 귀엽고.”
이게 지금 그걸 위로라고.
샤를이 바드득- 이를 갈았다.
더 있다간 한 대 맞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는지 토마스는 서둘러 들고 있던 꾸러미를 건넸다.
“뭐야. 이건?”
“……네 집엔 과자 같은 거 없잖아.”
“뭐?!”
흥- 늬 집엔 이런 거 없지? 라는 같잖지도 않은 츤데레질에 샤를이 얼굴을 구겼다.
토마스는 도망치듯 자리를 떠나며 말했다.
“그리고 혹시 잊었을까 봐서 하는 말인데, 난 골드라고.”
꽁무니 빠지게 사라지는 토마스를 보며 샤를이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러다 진짜 저 감자랑 살아야 하는 거 아니야?
하……. 인생 X 같네.
* * *
때아니게 벌어진 샤를의 앞날 대책 회의.
샤를을 챙겨주겠다는 명목으로 삼삼오오 모인 동네 아주머니들이 진지한 논의를 펼치고 있었다.
“샤를을 신전에 보내는 건 어때?”
폴라의 말에 노바가 인상을 찌푸렸다.
“신전? 왜 멀쩡한 애를 신전으로 보내?”
“아무래도 계속 이렇게 혼자 사는 건 위험하잖아. 게다가 샤를은 성력만 있는 제로고.”
폴라의 의견에 테일러가 동조했다.
“맞아, 신전은 그래도 안전하니까. 강간당하거나 매음굴로 끌려갈 위험도 없고.”
“내가 있는데 샤를이 왜 혼자야!”
노바가 성을 내자 폴라는 별꼴이라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녀가 토마스의 짝으로 샤를을 점찍었다는 걸 이 마을에서 모르는 이가 없었다.
샤를은 토마스를 친구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도.
“원치도 않는 사람하고 결혼하는 것보다야, 신전이 낫지.”
“뭐?!”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중간에 낀 샤를이 슬금슬금 눈치를 살폈다.
여기 있는 사람 중, 샤를의 빵과 스튜가 아닌 사람이 없던 까닭이었다.
그리고 가장 큰 밥줄은 부동의 1위. 노바였다.
“……신전은 괜찮아요.”
“거봐. 샤를이 싫다잖아.”
샤를의 말에 노바가 반색했다. 폴라는 측은한 눈길로 샤를을 바라보았다.
“샤를. 잘 생각해보렴. 결혼하면 매일같이 상대방의 거시기를 물고 빨고, 그걸 네 구멍에 넣고 흔들기도 해야 한단다.”
“…….”
아……. 아무리 성에 대해 개방적인 세계관이라지만, 이건 너무한 거 아닌가?
샤를의 입이 쩍하니 벌어졌다.
그러다 불현듯 자신의 남편감 후보가 토마스라는 사실을 떠올리고는 몸을 부르르- 털어내었다.
토마스의 거기를 물고 빨…….
아니지. 그건 안 되지!
“어차피 신전에선 마력 사용이 금지기 때문에 제로도 마력으로 차별받지 않고 보수를 받으며 일할 수 있어. 먹여주고 재워주기도 하고 안전하기도 하고. 잘하면 좋은 혼처가 들어올 수도 있고 말이야.”
노바가 말을 얹었다.
그것은 샤를도 알고 있었다.
소설 속 여주인공이 각성 전, 신전에서 일했으니깐.
봉투를 붙여서 받는 수준의 월급을 받으며 숨만 쉬고 일만 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 또한 말이다
샤를은 ‘걱정은 감사하나, 정말 괜찮다.’라는 의사를 담아 입꼬리를 올려 보였다.
신전이 안전하고 자신에게 놓인 선택지가 딱히 있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박봉에 노예 같은 삶을 살 생각은 없었다.
“봉투를 두 배로 붙여볼게요.”
그때. 무언가 생각난 듯 아비게일이 샤를을 돌아보았다.
“샤를. 아니면 시녀는 어떠니?”
“제로인 샤를이 시녀를 어떻게 해. 아무리 못해도 플래티넘은 되어야 할 텐데.”
노바가 아비게일에게 의심쩍은 시선을 보냈다.
그는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아니야. 그저께 시내 나갔다 들었는데 분명 제로인 시녀를 구한다고 그랬어.”
“그게 말이 되니, 어디 이상한 곳에 팔려고 그런 거 아니야?”
“그럴 리가. 오드리 씨가 그랬는걸.”
“오드리 씨가?”
오드리는 이 마을의 유일한 다이아 계급이자, 의료 마법사로 선망이 두터운 인물이었다.
삽시간에 매우 믿음직한 정보가 되어버린 시녀 이야기는 그렇게 화두로 떠올랐다.
“백작이라 그랬나……. 거기 가주가 어찌나 까다로운지, 평민의 페로몬을 못 맡나 보더라고.”
“페로몬 부적응자인가?”
“그야 모르지. 귀족들이야 워낙 평민들의 페로몬을 싫어하니깐.”
페로몬 부적응.
그는 샤를도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왜냐하면 남주인공 중 하나인 헥터가 그랬으니까.
이 소설 속 계급은 마력과 성력으로 구분된다. 여기서 성력은 말 그대로 성(sex)이다.
18세 성인이 되면 황실 주관으로 마력과 성력 검사를 받는데, 보통 둘의 수치는 비례한다.
물론 마력은 없는데 성력만 월등하거나 성력은 없는데 마력만 월등한 예외도 존재하지만 이는 기적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브론즈로 시작해 미라클로 끝나는 계급. 후에 각성하는 여주인공 릴리아나가 최상위인 미라클이다.
그러나 지금은 원작이 시작되기 전으로, 그랜드 마스터인 황제가 최상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사실 헥터도 그랜드 마스터이나, 그는 이를 숨기며 살아간다.
아무튼 자신보다 낮은 급의 페로몬이 향기롭지 않게 느껴지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반응이었다.
그리고 유독 거부반응이 심한 이들을 페로몬 부적응자라 불렀다.
헥터는 그중에서도 증상이 매우 심각했다.
마치 시체 썩은 냄새 같다고 했던가?
그래서 그런지 여주인공 릴리아나를 보자마자 미쳐 날뛴다.
같은 급도 아니고 저보다 더 상위인 미라클을 만났으니 오죽할까.
태어나 처음으로 숨을 쉰 것 같다는 소설의 구절을 생각해 보면 헥터에게 릴리아나는 산소호흡기나 다름이 없었다.
“그런데 샤를은 페로몬이 있잖아.”
“에이. 샤를의 페로몬은 여자인 내가 느끼기에도 상쾌하고 좋은걸.”
그렇다.
이 몸도 제로이긴 하나 미약한 페로몬이 존재했다.
샤를의 어머니는 제로임에도 빼어난 미모와 실버급 성력을 가진 축복받은 케이스였다.
그를 쏙 빼닮은 샤를 역시 매우 아름다웠으며 실버급 성력을 지녔다.
게다가 제로여서 그런가. 샤를의 페로몬은 청아하고 달콤한 향기를 풍겼다.
의사인 오드리 말에 의하면 제로가 성력을 지닌 경우 페로몬이 깨끗하고 매력적이란 기록이 있다고 했다.
그로 인해 혹, 자신이 여주인공이 아닐까 착각까지 일었더랬다.
하지만 이름도 다를뿐더러 이 세계에서 머리 색과 눈동자 색은 어떠한 마법으로도 바꿀 수 없는 고유한 것이었다.
“면접이라도 한번 봐보는 게 어떻겠니. 샤를?”
“그래, 듣자 하니 한 달 임금으로 오백 트랑을 준다더라.”
“오, 오백?!”
화들짝 놀란 얼굴들이 일제히 아비게일에게로 향했다.
오백 트랑.
그 값어치는 오백만 원 정도로, 골드 이상이 아니고서야 만져 볼 수 없는 임금이었다.
그 순간 샤를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저 사실, 예전부터 시녀가 꿈이었어요.”
이대로 토마스의 거시기를 물고 빨 순 없었다.
* * *
면접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면접관은 ‘나 엄청 깐깐한 집사요.’의 이미지를 풍기는 30대 후반 남성이었다.
각 잡힌 제복과 번쩍이는 구두. 짙은 카키그레이색 머리카락이 능숙한 솜씨로 쓸어 넘겨져 있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샤를 양, 집사인 태너라고 합니다.”
시녀의 조건 및 요구사항은 간단했다.
저택에서 일어나는 일을 발설치 않을 것, 성실히 일할 것, 지시 외 독단적인 행동을 금할 것.
임금은 아비게일의 말처럼 오백 트랑이었으며 휴가 및 휴식 시간도 후했다.
조건만 보자면 이보다 좋은 직장이 또 없었다.
옆에서 듣고 있던 노바조차 자신도 가능하냐고 물어볼 정도였으니 말이다.
심지어 마스터인 태너는 샤를에게 존대를 사용하였다.
이 세계에서 제로의 대우는 매우 박했다.
마을 주민들이야 어릴 적부터 보아온 샤를이기에 예뻐한 거지, 시내만 나와도 하대는 기본이고 인간 이하 취급은 보너스였다.
그런데 태너는 샤를뿐만 아니라 평민인 노바나 다른 이들에게도 깍듯하게 예의를 차렸다.
잔뜩 날이 서서 긴장하던 노바의 경계심을 단숨에 풀어버렸다. 그건 샤를 또한 마찬가지였다.
“매우 깨끗한 페로몬을 가지셨군요. 혹시 상대방의 페로몬도 느끼십니까?”
훑어보던 서류를 덮은 태너가 면접의 마지막 단계처럼 말했다.
“무슨 냄새가 나는구나. 정도는 알 수 있어요.”
“이성적으로 끌린다거나 하진 않고요?”
“……네. 아직 그런 적은 없어요.”
“잠시 제 페로몬으로 테스트를 해 보아도 괜찮겠습니까.”
샤를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뒤이어 샤를을 제외한 모든 이들이 오드리의 진료소 밖으로 나갔다.
이윽고 우드 향과 흡사한 향이 샤를의 전신을 감싸 왔다.
하지만 그저 향수를 시향하는 느낌일 뿐. 흥분이 인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향긋한 나무에 기댄 듯 심신이 편안해졌다.
“제로가 맞군요.”
무덤덤한 샤를을 보며 태너가 제 페로몬을 거둬들였다.
“방금 그게 페로몬인 건가요?”
촌구석에 빙의한 샤를은 마스터를 본 것도, 누군가의 페로몬을 느껴본 것도 처음이었다.
물론 골드인 토마스가 샤를을 볼 때마다 연신 뿌려댔지만, 샤를은 그것이 페로몬이라 자각하지 못했다.
샤를을 응시하던 태너가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를 따라 샤를의 시선도 이동했다.
“……!”
그곳엔 브론즈인 클라라가 눈이 풀린 채 주저앉아 몸을 움찔거리고 있었다.
이거 한 방에 간다고? 그것도 밖에 있었는데?!
샤를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런, 본의 아니게 피해를 줬군요.”
태너가 퍽 난처하다는 듯 눈썹을 살짝 추켜올렸다.
“자세한 사항은 계약서에 명시되어 있습니다. 마법 계약서이니, 서명 전 잘 확인하시길 바랍니다.”
태너는 합격을 알리는 계약서류를 샤를에게 건네주었다.
“그럼 내일 정오에 데리러 오도록 하겠습니다. 그전에 마음이 바뀐다면 미리 연락 부탁드립니다.”
초스피드 면접을 끝낸 태너가 자리를 떨치고 일어났다.
이내 그의 손끝에서 빛이 일며 이동 마법진이 펼쳐졌다.
그렇게 가는가 싶던 찰나. 그가 돌연 샤를을 돌아보았다.
“마지막 건강검진 날짜가 한 달 전이던데 그사이 성관계를 맺으신 적이 있습니까?”
“어……. 없는데요.”
시녀인데 그게 왜 중요하지?
샤를의 동공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요동쳤다.
그 속내라도 읽은 듯 태너가 대답했다.
“단체 생활이다 보니 병력은 매우 중요한 사항이라서요. 성병 중 같은 욕조를 쓰는 것만으로도 옮는 경우가 있으니 말입니다.”
태너는 그 말을 끝으로 검붉은 빛과 함께 사라졌다.
* * *
태너의 마지막 말이 걸리긴 하였으나 샤를은 결국 계약서에 사인했다.
토마스도 토마스였지만, 언제까지 빌붙어 살 수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제로인 자신에게 또 다른 일자리가 생길 것이란 보장도 없고.
아니, 이거야말로 빙의자 특혜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
“이동 마법진을 이용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손가방 하나만 덜렁 들고 온 샤를을 향해 태너가 물었다.
옷 제공, 생필품 제공, 숙식 제공. 모든 것이 제공인 터라 딱히 챙길 것이 없었다.
“아뇨. 어……. 이용했을지 모르겠지만 기억이 안 나서…….”
“그렇군요.”
오드리가 말하길 이 세계에서 기억을 잃는 건 매우 특이한 케이스라 하였다.
하지만 태너는 샤를의 사정을 듣고도 매우 태연했다.
“제로는 보통 마력 거부반응이 있으니 조심하는 게 좋겠습니다.”
태너가 샤를에게 손을 뻗었다.
“잡으시죠.”
소설에서나 보던 에스코트 같은 행동에 괜스레 머쓱해진 샤를이 쭈뼛거렸다. 물론 자신이 빙의한 이 소설의 분류가 로맨스판타지인 건 맞았다.
작은 손이 장갑 위로 올려진 순간, 태너의 눈매가 가느스름해졌다.
“왜요……?”
“아닙니다.”
태너는 샤를에게 향했던 시선을 거둬들이며 마법진으로 향했다.
샤를은 눈물범벅이 된 채 유리창에 매달려 있는 토마스를 살포시 무시하고 태너를 따라갔다.
* * *
“우욱…….”
낯빛이 잿빛이 된 샤를이 주저앉아 헛구역질했다.
난생처음 경험한 마법진은 꼭 롤러코스터를 타는 기분이었다.
“이런, 거부반응이 있나 보군요.”
태너가 걱정스러운 눈길로 샤를을 살폈다.
“더 가야 하나요?”
“아니요. 도착했습니다.”
태너의 말에 샤를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곧이어 시야에 들어오는 광경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펼쳐진 담은 그 끝이 보이지 않았고 멀찍이 보이는 건물은 자신이 황실에 취직했나 싶을 정도로 휘황찬란한 궁전이었다.
“여기가……. 제가 일하게 될 집인가요?”
“일단은 그렇습니다.”
“일단은요?”
“이곳은 수도에 있는 거처이고 공작령에 있는 공작저가 본래 집이라 할 수 있을 테니까요.”
“아, 그렇구나. 공작…….”
잠깐, 공작?!
기겁한 샤를이 태너를 돌아보았다.
“공작이요?”
이 세계에서 공작이라 불릴 이는 단 세 명뿐이었다.
하나는 황실 1근위 기사장이자, 여주인공을 지키다 헥터에게 죽는 세드릭 에드워즈 공작.
또 하나는 사교계를 휘어잡는 대부호이자, 여주인공을 탐하다 역시나 헥터에게 죽는 노엘 월킨스 공작.
그리고 마지막은 황제 뺨도 때릴 만큼의 힘과 권력을 가진 그랜드 마스터이자, 모두를 죽이는 미친 광공. 헥터 헌트 대공이었다.
그러니까 결론은 셋 다 X같은데 그중 가장 X같은 건 헥터란 소리이다.
“고, 공작님이라니요? 헨……. 헨더스인가 무슨 백작님이라 들었는데요.”
그렇다. 이 망할 19금 피폐 소설 속에서 샤를이 안심하고 사인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백작저의 시녀라는 소리에서였다.
샤를의 물음에 태너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갔다.
“헨더슨 백작이라면 접니다만?”
“네?!”
백작이 왜 집사 따위를 하고 있어?
샤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태너는 난색을 표하며 샤를을 바라보았다.
“계약서에 명시되어 있었을 텐데. 제대로 확인하지 않으셨나요?”
글을 못 읽는 샤를을 대신하여 노바가 계약서를 읽어주었다.
그리고 분명, 백작저라 하였다.
노바가 자신에게 거짓을 말했을 리 없……. 혹시 토마스랑 결혼 안 하고 튄다고 먹인 건가?
아니, 뭐가 어찌 되었든 이럴 순 없었다.
공작이라면 어떤 놈이건 셋 다 사망 플래그에다 지뢰밭이니까.
샤를은 현실을 부정하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럼, 특정한 사유 없이 일방적 계약 해지 시 위약금 삼십 억 이랑이란 조항도 보지 못했나요?”
“삼……. 삼십 억 이랑이요?”
“마법으로 작성된 계약서인지라, 해지할 시 막대한 트랑과 인력이 소요됩니다. 게다가 일 년짜리여서 더 그렇고요.”
이건 뭔 악마의 계약이야?
샤를이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좌우간 대공이 아닌 공작이라는 거 보면 그나마 헥터는 아닐 것이다.
그러면 남는 공작은 둘.
세드릭은 이 소설에서 유일하게 신사적인 인물이었다.
노엘은 비록 섹스광이나, 여주인공하고 얽히는 일이 가장 적었다.
차라리 세드릭이라면…….
“일단, 들어가죠.”
태너가 경악에 휩싸인 샤를에게 손을 내밀며 빙긋이 웃음 지었다.
“헌트 공작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왜 하필이면 그 미친놈이야.
* * *
본래 떡 소설은 좀 날림으로 읽지 않는가?
특히 이 소설은 뒤로 갈수록 묘사 장면이 혐오스러워 건너뛴 편수까지 있었다.
그리고 누가 남주인공의 집사 이름까지 외우고 있겠는가.
남주만 네 명이나 되는데.
아니, 애초에 소설에서 ‘집사’로 표기되어 있었기에 이름을 알지도 못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정독할걸…….”
샤를은 태너가 안내해준 제 집만 한 방에 앉아 손톱을 까득- 씹어냈다.
노바는 왜 백작저라 말했을까.
분명 이 제국에서 헌트가를 모르는 이는 없다.
상황이 몹시 의심쩍었지만, 어쨌거나 사인을 한 것은 결국 자신이었다.
“진정하고 생각해보자. 그래, 처음은 잘 읽었으니깐.”
엎질러진 물을 주워 담을 수 없다면 살아남는 것이 우선이었다.
이 세계의 배경이자, 풍요와 다산의 신을 추앙하는 제국 그레이엄.
섹스는 신께 닿는 행위이며 축복이라 여기는 이곳은 성에 대해 매우 개방적인 곳이었다.
또한 페로몬과 알파는 존재하나, 베타나 오메가가 없는 오묘한 세계관이었다.
우성 알파가 우성 알파와 섹스하고 노팅하여 임신하는 곳.
뿐만 아니라, 마스터급 이상은 이능을 사용할 수 있었는데 그에 대한 대가가 있었다.
두통과 극심한 불면증. 그리고 불에 타는 듯한 통증을 수반한다는 것이다.
물론, 정화도 가능했다. 바로 성력이 높은 이와의 접촉. 가장 확실한 방법은 성관계를 맺고 사정하는 것이었다.
섹스 파트너가 곧 서로의 가이드가 되는 셈이다.
하지만 극우성인 그랜드 마스터의 경우는 암담했다.
그도 그럴 게 같은 급이 여주인공 릴리아나가 나타나기 전까진 황제와 대공, 겨우 이 둘뿐이지 않겠는가.
황실 주관으로 제국민들에게 성력검사를 시행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평민이라 할지라도 성력이 마스터 이상이라고 판명 나면 황실 소속이 되어 귀족의 작위를 얻는다.
그러나 이는 매우 희귀한 케이스였다.
여주인공 릴리아나조차 오백 년 만에 나타난 성녀였으니 말 다 했다.
해서 황족은 부모님을 제외한 친족간의 근친으로 명맥을 이어갔다. 덧붙여 황실은 이에 대한 대비책 또한 어느 정도 마련해놓은 상태였다.
그레이엄 제국은 우성이 태어나면 무조건 황자와 황녀를 알현해야 한다. 그렇게 황족은 나라 안에 우성이란 우성은 다 만나고 다니며 자신과 맞는 페로몬을 찾아갔다.
검증된 우성 가이드들이 엄청난 양의 페로몬을 뿌려주고 사정을 돕는다. 배우자를 얻어 노팅을 시도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하렘이 존재하기에 주기적으로 섹스, 즉 정화도 받았다.
하지만 헥터의 경우는 달랐다.
헌트 가문은 그랜드 마스터인 것을 숨기고 살았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아예 대책이 없는 건 아니었다.
헌트가의 숨겨진 이능이자, 흑마법 중 하나인 발정은 상대방의 성력을 일시적으로 최상까지 끌어올리는 것이 가능했다.
헌트가는 이능을 사용하여 순간적으로 우성을 극우성으로 만든 뒤, 노팅하여 겨우겨우 명맥을 이어왔다.
그러나 노팅 시 마력을 쏟아붓기 때문에 죽음에 이른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릴리아나에게 미치는 우성 남주가 네 명이 있는데, 그중 극강으로 미치는 두 명이 바로, 황제 카이시스와 대공 헥터였다.
“헥터는 결벽증까지 있어서 사정은커녕, 섹스도 힘들다고 했어.”
정화를 거의 받지 못하는 헥터는 이능의 대가가 쌓여 극심한 통증과 불면증을 달고 산다.
그러니 제정신일 리 만무했다.
오죽하면 칼질하고 싶다고 전쟁을 일으킬까.
그런 헥터에게 찾아온 기적이자, 릴리아나의 강력한 성력은 그야말로 사람을 돌아버리게 만드는 것이었다.
첫 만남부터 미친 집착을 보이며 납치를 저지르니 말이다.
그 후, 헥터는 릴리아나에게 감금과 강간 물론, 흑마법까지 감행한다.
“그 장면은 정말 충격적이었지.”
마치 사람을 발정 난 동물로 만드는 것만 같았다.
이성을 잃은 릴리아나가 증오하는 헥터의 성기를 제 질 안에 넣고, 허리를 흔들며 탄성을 내지르는 장면은 차마 보지 못하고 덮어버렸으니 말이다.
하지만 원작에서 헥터는 끝내 릴리아나와 노팅하지 못한다. 릴리아나가 헥터보다 높은 급인 미라클이어서가 아니었다. 본래 노팅을 위해선 몸뿐만이 아닌 마음마저 동해야 했다. 그러니 불가능할 수밖에.
“누가 가르쳐준 사람이 있어야 말이지.”
노팅에 성공하더라도 이능의 사용으로 마력을 전부 소진한 헌트가는 1년 안에 죽는다. 우성이면서 극우성이 되었던 상대도 마찬가지였다.
“샤를 양. 태너입니다.”
“네!”
상념에 잠겨 있던 샤를이 벌떡 일어났다.
“저택을 안내해드리겠습니다.”
“네네. 지금 나갑니다.”
근데 그건 이 소설 속에 들어와 그 미친 대공저에서 일하기 전이고.
* * *
본집도 아닌 집이 뭐 이리 대단하실까.
태너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던 샤를은 점점 정신이 혼미해져 갔다.
더 정확히는 제 방을 나오고부터 들은 설명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한 층에 방만 해도 수십 개였다.
문들은 어찌나 똑같으신지. 팻말을 걸어놓지 않으면 화장실도 찾지 못할 것만 같았다.
게다가 이 방에선 어떤 신분이, 또 이 방에선 어떤 신분이라며 그 쓰임새도 매우 다양했다.
바로 지금 태너의 설명처럼 말이다.
“방금 나온 방은 알현실로 헌트 가문보다 신분이 높은 이를 맞이할 때 사용하는 방입니다. 각하께서는 대공이시니, 황제의 방문 이외에는 사용할 일이 없는 방이지요. 그리고 이 방은 응접실로 후작, 백작, 자작, 남작 등 하위 신분을 맞…….”
일순, 태너가 말을 멈추었다.
지친 기색이 역력한 모습의 샤를이 흐리멍덩한 눈을 끔뻑거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샤를 양.”
“네?”
“어디까지 기억합니까?”
“…….”
“방을 나온 이후부터 기억이 없는 것 같은데요.”
혹시 태너의 이능은 독심술이 아닐까?
샤를은 이는 의심에 최대한 머리를 비우며 대답했다.
“그러니까 지금 이 방이 접견실로…….”
“응접실입니다.”
“…….”
태너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샤를을 내려다보았다. 키 차이로 인해 샤를에게 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샤를 양이 제로인 걸 제가 잠시 잊었군요.”
“…….”
“고려하지 못한 제 불찰이니, 미안해하지 않아도 됩니다.”
별로 미안하진 않은데.
보니까 이 양반, 조곤조곤 사람을 팩트로 두들겨 패는 소질이 있다.
샤를은 태너를 마음에 들어 했던 과거의 제 생각을 살포시 지워냈다.
“어차피 더 설명해봐야 기억 못할 테니, 바로 샤를 양이 일하게 될 본관으로 가겠습니다.”
“네? 본관이요?!”
샤를의 걸음이 그를 거부하듯 우뚝 멈추어 서졌다.
분명 헥터는 여성을 혐오했다.
페로몬 향도 향이었지만, 자신에게 달려드는 여자들 때문이었다.
성력이 높은 릴리아나에게 남자들이 미친 것처럼 그랜드 마스터인 헥터에게 여자들이 미치는 건 당연한 이치였다.
그래서 본관엔 모두 엄선된 남자 시종들만이 있다고 했었다.
아니, 헌트가는 그냥 죄다 남자였다.
소설 속 금녀의 구역이자, 헌트가의 기사단을 매우 좋아했었기에 똑똑히 기억하는 사실이었다.
근데 이 캐릭터 붕괴, 아니 작품 붕괴는 무어란 말인가.
“저는 여자인데요.”
샤를의 발언에 날카로워진 태너의 눈빛이 뻗어 들어왔다.
“그게 지금……. 무슨 말이죠?”
살기가 어찌나 형형하던지, 샤를의 등줄기로 오소소- 소름이 돋쳐 올랐다.
헥터가 그랜드 마스터인 것과 함께 결벽증이 있다는 것은 극비 중에서도 극비로 최측근만 아는 사실이었다.
말실수한 것을 알아차린 샤를이 황급히 변명을 늘어놓았다.
“아, 그……. 페로몬 향이 싫어서 제로인 시녀를 구한다고 들었던 것 같아서요…….”
태너의 눈빛이 살짝 풀어지자, 샤를이 서둘러 말을 이었다.
“듣자 하니, 하위 계급의 페로몬을 역겹게 느끼는 페로몬 불감증이란 게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샤를 양의 페로몬은 역하지 않으니까요.”
그제야 태너가 살벌했던 시선을 거둬들였다.
“오히려 매우 좋습니다.”
“네? 제가요?!”
“몰랐습니까?”
“좋다는 말을 듣긴 했는데 귀족분들한테까지 좋을 줄은…….”
“뭐랄까…….”
태너가 샤를을 슥- 훑어보며 말했다.
“아주 작고 부드러운 순백의 새끼 고양이를 안고 있는 느낌입니다.”
“하하……. 고양이요.”
헥터는 그 새끼 고양이를 찢어 죽이려 들겠지.
샤를이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태너가 옅게 미소 지었다.
“오히려 각하께서 좋아하실지도 모르겠군요.”
뭐라고, 이 악마 새끼가?
* * *
다행히 샤를은 사지가 찢겨 죽지 않았다.
저택을 안내받는 동안 헥터의 그림자도 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태너는 장난이었다는 듯 웃고는 벌벌 떨며 주위를 경계하던 샤를을 안심시켰다.
이후 샤를은 본관 근처만 돌다 별관으로 돌아왔다.
“샤를 양은 페로몬을 제어하는 법부터 배워야겠군요.”
본래 태어나고부터 걸음마를 배우듯 부모에게 페로몬 조절을 교육받는다.
하지만 빙의자인 샤를은 그를 모름이니, 거의 늘 개방 상태나 다름이 없었다.
“본관은 이후에 투입하는 거로 하죠.”
그렇게 샤를은 놀면서 돈 버는 하루하루를 보내게 되었다.
태너 역시 악마 새끼에서 좋은 사람으로 다시금 호감도가 상승했다.
그렇게 지내는 동안 공작저의 공포 또한 조금씩 사라져갔다.
일단 밥이 매우 맛있었다.
빙의 후, 가난한 살림살이에 질긴 빵과 고기 맛이 살짝 나는 스튜만 먹던 샤를이 아니던가.
그런데 삼시 세끼 스테이크에 고급 음식을 접하자니 천국이 따로 없음이었다.
게다가 샤를은 성력이 있다는 이유로 고용인 숙소가 아닌 호화로운 별관에서 지냈다.
그리고 원작을 제대로 읽지 않은 것인지, 아니면 나오지 않았을 뿐인지 공작저엔 샤를 말고도 여자 시녀들이 몇 명 더 있었다.
물론 죄다 제로였지만 말이다.
“황실 요리사보다 이곳의 요리사가 더 대단하대.”
같은 제로이자 또래 시녀인 엠마가 말했다.
샤를이 지내는 곳은 별관이었으나 식사는 같은 고용인인 엠마와 함께했다.
“정말? 어쩐지 맛있더라.”
샤를은 소설을 읽어 뻔히 아는 내용임에도 엠마의 말에 맞장구를 쳐주었다.
이곳이 어디던가. 황제조차 함부로 못하는 대단하신 헌트 가문이 아니겠는가.
만약 헥터가 폭주하여 전쟁이라도 일으키는 날에는 제국이 불바다가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물론 소설 끝엔 정말로 그것이 실현되지만 말이다.
그러나 지금은 소설이 시작되기 일 년 전이었다.
시녀 계약도 일 년짜리였고.
‘일 년만 잘 버티다 릴리아나가 나타나기 전에 조용히 사라지는 거야.’
황성이 가장 큰 핵폭탄을 맞으니 일단 이곳을 뜨는 것이 최우선이었다.
샤를은 헥터를 개화시킨다거나, 원작을 바꾸겠단 생각 따위는 눈곱만치도 없었다.
잘생겼다는 남주인공들을 구경 다니며 눈 호강할 마음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오히려 할 수만 있다면 평생을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여기 오고 살이 너무 쪄서 걱정이야. 메이드복이 잘 안 잠긴다니깐.”
엠마가 통통하게 살이 오른 볼을 실룩거렸다.
배려일지, 아니면 무시일지 모르겠으나 제로에게 떨어지는 일의 할당량은 그리 많지 않았다.
청소하고, 빨래하고, 먹고, 자고. 또 청소하고, 빨래하는 무한 반복의 삶.
그도 하루 여덟 시간만 일했으며 나머진 휴식이었다.
하긴, 가진 게 권력이고 남는 게 돈인 가문에서 이 정도는 배려 축에도 끼지 못하리라.
샤를은 수북하게 쌓인 스테이크를 포크로 쿡- 찍어 왕- 하니 입속으로 밀어 넣었다.
“샤를은 먹는 모습도 인형 같아.”
엠마가 말했다.
“인형?”
“응. 고급 상점에서 봤던 인형하고 닮았어.”
엠마가 순진무구하게 웃었다.
이 저택 안에 머무는 제로 중 샤를을 제외하고는 모두 성력이 없었다.
그런데도 엠마는 본관에서 지내는 샤를을 질투하지도 이상하게 생각하지도 않았다.
“에이, 난 머리 색도 평범한 갈색이고 눈동자도 갈색인걸.”
엠마를 달래는 것인지, 저를 달래는 것인지 모를 웅얼거림이 샤를의 입안에서 맴돌았다.
“그래. 난 이름도 다르고 다이아몬드 같은 은발도, 자색 눈동자도 아니니깐.”
* * *
사방이 책들로 가득한 태너의 집무실.
샤를에게 페로몬 제어를 알려주던 태너가 자리를 떨치고 일어났다.
“오늘은 이만할까요.”
태너는 일을 시키지 않는 대신 제로이면서 성력을 가진 샤를을 연구대상으로 활용했다.
[알다시피 제로가 성력을 가진 경우는 극히 드뭅니다. 그에 대한 보고서도 매우 적고요. 샤를 양이 협조해 준다면 피해가 가지 않는 선에게 관찰해 보고 싶습니다. 대가로 한 달 임금 외 추가로 백 트랑을 지급하도록 하죠.]
말이 연구지 실상은 페로몬을 다루는 수업에 가까웠다.
돈도 돈이지만, 앞으로 살아갈 것을 생각하자면 페로몬 조절은 필수였기에 샤를은 기꺼이 받아들였다.
아니, 오히려 저가 돈 내고 배워야 할 판국이었다.
“오늘도 감사합니다.”
샤를이 태너를 향해 깍듯하게 인사했다.
“샤를 양은 제로인데도 밝아서 보기 좋습니다.”
태너가 인자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의 말처럼 제로들은 대체로 암울한 성격이었다.
원작에서도 그렇고 실제로 같은 제로인 엠마만 보아도 자존감이 바닥을 기어 다니니 말이다.
아마 누구라도 태어나고부터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한다면 그리될 것이다.
그래서 그런가.
원작의 릴리아나 역시 자낮여주라 불렸다.
하지만 샤를은 이 세계에 온 지 몇 달 되지 않은 빙의자였다.
“시골에서 살아서 그런가 봐요.”
샤를을 가만히 바라보던 태너가 서랍에서 작은 봉투를 꺼내 들었다.
“가져가 친구와 나눠 드세요.”
태너는 항상 수업이 끝나면 이렇게 간식을 챙겨주었다.
어느 날은 사탕이. 또 어느 날은 마카롱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매번 그 맛이 바뀌었는데 언제부턴가 샤를이 좋아하는 것만 주기 시작했다.
“어? 오늘은 딸기 맛이네요.”
샤를이 반가운 듯 생글거리자 태너가 꽤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즐거움이 가득한 샤를의 페로몬이 사방으로 퐁퐁- 퍼져 나온 까닭이었다.
“이곳의 생활은 좀 익숙해지셨습니까?”
“네, 너무 좋아요.”
“다행입니다.”
태너는 이만 나가보라는 듯 문을 열어주었다.
샤를은 이 거대하고 무거운 문을 낑낑거리며 겨우 밀어내기 때문이었다.
“감사해요.”
샤를이 이곳에 와서 알게 된 사실이 하나 있었으니. 계급은 비단 마력과 성력의 차이만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우성들은 외모, 신장, 그리고 체구까지 모든 것이 평민보다 월등했으며 그 힘 또한 강했다.
어쩌면 마스터인 태너에게 자신은 정말 새끼 고양이 정도로밖에 보일지도 모른다.
샤를은 저보다 한참 큰 태너를 올려다보며 한 번 더 감사의 눈인사를 전했다.
도도도- 짧은 다리로 멀어져 가는 샤를을 응시하던 태너는 나직이 중얼거렸다.
“페로몬은 기분에 따라 달라지니까요.”
* * *
샤를이 돋움발로 껑충거리며 본관의 거대한 복도를 걸어 나갔다.
“으흠, 으흐흠-”
우성들은 발도 안 아픈가?
끝이 보이지 않는 이 거대한 궁을 거니는 것만으로도 운동이 따로 없었다.
“태너 경을 만나고 오는 길입니까?”
어느새 다가온 헌트가의 기사단장인 레온이 샤를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레온 님.”
“그냥 레온 경이라 부르라니까요.”
레온의 적색 머리카락에 맞춘 듯 붉은빛이 도는 긴 속눈썹이 곱게 접혔다.
누가 우성 마스터 아니랄까 봐 잘생긴 것 좀 보소.
샤를은 올라가는 입꼬리를 주체하지 못하고 실룩거렸다.
“하지만 전 평민이고 제로인걸요.”
이윽고 레온의 페로몬인 감귤과 허브가 섞인 듯한 향기가 코끝을 살랑거렸다.
역시나 흥분이 일진 않았지만, 기분은 좋았다.
좋은 향기를 맡으면 그러는 것처럼 말이다.
게다가 페로몬은 꼭 제 주인의 생김새와 비슷한 느낌이어서 더욱더 그러했다.
“이곳에선 대공 각하 빼고는 다 제로랍니다.”
레온이 품에 있던 사탕을 꺼내 샤를의 손 위로 올려주었다.
“근데 오늘 수업도 대충 하셨나 보군요.”
“네?”
“샤를 양의 페로몬이 주변에 가득합니다.”
그제야 창고 대방출처럼 활짝 열어두었다는 걸 자각한 샤를이 황급히 페로몬을 추슬렀다.
타인의 페로몬은 느끼지만, 제 페로몬에 대한 자각과 조절 능력이 부족한 샤를이었다.
“어머……. 죄송해요.”
“샤를 양의 페로몬은 괜찮습니다.”
페로몬을 가진 제로가 흔치 않다 보니, 공작저에 있는 사람들은 다들 샤를을 신기해했다.
그리고 정말 작고 연약한 동물을 대하듯 모두 샤를에게 호의를 베풀었다.
게중 가장 그런 것이 눈앞에 레온과 공작저의 기사단들이었다.
하지만 샤를의 페로몬은 전혀 유혹 기술이 없는지 다들 귀여워만 할 뿐, 흥분한 기색을 보인다거나 치근덕거리진 않았다.
“그거 칭찬 맞죠?”
경계심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샤를이 방글거렸다.
소설 속 인물 중 헥터 다음으로 좋아했던 것이 바로 레온이었다.
다들 릴리아나에 미쳐 있을 때, 레온은 유일하게 이성을 지켰던 인물이다.
“그럼요. 아주 깨끗한 느낌인걸요.”
기뻐하는 샤를의 페로몬은 레온에게 있어 시원한 공기를 마시는 느낌이었다.
냉혈한인 태너가 왜 과자를 주는지 알 것도 같았다. 자신도 매번 이리 사탕을 들고 찾아오게 되니 말이다.
“참, 오늘은 공작 각하의 기분이 몹시 좋지 않으니 뒷길로 돌아가는 게 좋겠습니다.”
“정말요?”
“예. 황궁에 갔다가 곧 돌아오실 시간이거든요.”
황궁이라니.
헥터는 황제를 만나고 오는 날이면 검은 분노의 오라를 미친 듯이 뿜어댔다.
이는 소설을 읽어 아는 것이 아니었다.
대공저가 온통 어두워져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감사합니다.”
“별말씀을.”
레온은 정보 제공의 대한 보상이라도 되는 듯 샤를의 머리를 조심히 쓰다듬었다.
* * *
마차가 멈추기 무섭게 벌컥- 문이 열렸다.
그와 동시에 검은 그림자가 내려섰다.
“다녀오셨습니까. 각하.”
레온의 말처럼 헥터는 누구 하나 찢어 죽일 듯한 저기압이었다.
풍겨내는 오라가 어찌나 강하던지, 태너조차 숨이 턱- 막힐 지경이었다.
황제인 카이시스는 헥터가 페로몬에 민감하단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헥터가 입궁하는 날이면 하렘의 우성들에게 페로몬을 개방시키도록 지시했다.
허니 헥터의 기분이 좋을 리 만무했다.
게다가 황제를 알현할 때는 이능까지 사용해야 하기에 그 고통 또한 상당함이라.
태너는 서둘러 마차에서 떨어지라는 듯 손짓했다.
쾅-!
이윽고 태너의 예상처럼 마차는 폭발하며 붉은 불길에 휩싸였다.
“…….”
헥터가 태너의 앞을 스쳐 지나갔다.
그의 그림자처럼 길게 늘어진 검은 망토가 위압적으로 펄럭거렸다.
역시나 더러운 것이라도 되는 듯 벗어 던진 망토에도 검붉은 불길이 일었다.
타들어 가는 연기 속에서 희미한 여성의 페로몬이 느껴졌다.
콰광-!!
그조차 역겹다는 듯 마차가 산산조각 부서져 내렸다.
헥터는 뒤 한번 돌아보지 않고 서둘러 씻기 위해 공작저 안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이능을 사용하는 고통보다, 느껴지는 페로몬이 더 참을 수 없었다.
그의 자취처럼 하나둘 벗어진 것들이 바닥에 떨어지며 불길이 일었다.
어둠의 이능을 사용해 당장이라도 황제의 목을 비틀어버리고 싶었다.
물론 그렇게 되면 제국을 날려버리는 전쟁을 치러야겠지만.
콰지직- 쾅!
황급히 뛰어오던 레온이 황제 대신 박살나는 분수대를 보고 주춤거렸다.
그 순간, 본관에 들어서던 헥터가 걸음을 멈춰 섰다.
“흠.”
숨을 들이켜는 헥터의 너른 가슴 근육이 크게 부풀어 올랐다가 천천히 가라앉았다.
“……!”
아차, 싶은 레온이 태너와 눈을 마주쳤다.
예상보다 더 일찍 도착한 헥터였다.
들리는 폭발음에 서두르느라 샤를을 만졌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이게…….”
헥터의 붉은 눈동자가 이채를 번뜩이며 레온을 응시했다.
“무슨 향이지.”
* * *
까르르.
샤를의 웃음소리가 공작저 연무장으로 울려 퍼졌다.
기사 중 한 명이 이능을 사용하여 검으로 저글링을 보여준 까닭이었다.
한껏 기분이 좋아진 샤를의 페로몬은 튀어 오르듯 퐁퐁거렸다.
그를 태너와 레온이 한 발짝 떨어져 지켜보고 있었다.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레온이 태너에게 말했다.
“혈기 왕성한 기사들입니다. 본성을 제어하지 못할 수도 있고요.”
“각하만 할까.”
“그건…….”
그렇지만. 레온이 긍정을 담은 침묵으로 답했다.
“어쨌거나 최대치를 보아야지 않겠나.”
“그래도 이건 좀 도박인 것 같습니다만.”
“궁금해 죽겠단 표정이면서 말은 반대니, 위선이 따로 없군그래.”
태너는 비소 섞인 말을 남기고 샤를에게 걸어갔다.
레온은 머쓱함에 뒷머리를 긁적였다. 샤를이 페로몬을 개방하면 어떨지 미치게 궁금한 것은 사실이었다.
태너가 다가오자 기사들이 길을 터주듯 샤를에게서 물러났다.
“오늘은 미리 말한 대로 개방 훈련을 할 겁니다.”
“지금요?”
샤를이 연무장 안을 가득 메운 기사들을 둘러보았다.
“괜찮습니다. 다들 마스터니까요.”
“하지만…….”
“본래 최대치를 알아야 제어가 가능한 법입니다. 컨트롤함에 있어 제가 도와드릴 수도 있고요.”
샤를이 움츠러들자, 태너가 안심시키듯 말을 이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결과가 어떻든 이곳에서 샤를 양에게 해를 끼칠 사람은 없으니까요.”
안면을 터 익숙한 얼굴들이 샤를을 향해 싱긋 웃고 있었다. 레온 또한 걱정하지 말라는 듯 손을 흔들거렸다.
샤를이 고개를 주억거리자 기사들이 샤를을 에워싸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레온이 곁에 섰다.
먼 곳을 응시하던 태너가 샤를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럼 상대의 개방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처음은 가장 익숙한 레온 경이 할 것입니다.”
태너의 눈짓에 레온이 자신의 페로몬을 개방하기 시작했다.
“……!”
그동안 잔향처럼 은은하게 느껴졌던 향이 코밑에 향수라도 분사한 듯 강하게 밀려들었다.
일전의 샤를이 알던 태너와는 확연히 다른 느낌이었다.
더 젊고 힘 있는 레온의 페로몬은 매우 진하고 또 강렬했다.
그 농도가 짙음에 잠깐 몽롱함이 일었지만, 불쾌하거나 흥분이 일진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농후한 남자의 향기에 살짝 설레는 정도?
그렇게 눈을 감고 레온의 페로몬을 느끼던 찰나였다.
“혹시 애무를 당한다거나 섹스와 비슷한 느낌이 있습니까?”
“…….”
“음부가 간지럽다거나 애액이 분비되는 반응 말입니다.”
여긴 진짜 왜 이러는 거야.
샤를의 기분이 상한 것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팍 식은 페로몬이 대변해주고 있었다.
“태너 경, 혹시 저 몰래 파멸의 이능이라도 있으셨습니까?”
레온이 어깨를 들썩이며 끅끅거렸다. 다른 기사들도 입술을 물고 웃음을 참아냈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태너는 영문을 모르겠단 표정이었다.
“아니면 소멸의 이능이라든가요.”
레온이 덧붙이자, 결국 참지 못해 터진 웃음이 여기저기서 새어 나왔다.
덕분에 샤를의 입꼬리도 길게 늘어졌다. 딱딱하게 굳어 있던 페로몬도 풀렸다.
레온은 태너에게 들어 샤를이 기억을 잃었단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아니, 그를 모르더라도 그간 샤를을 보아왔다면 알 것이다.
꼭 이곳의 사람이 아닌 것처럼, 성에 관련된 이야기만 나오면 불쾌해한다는 것을 말이다.
“이번 수업에서는 빠지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만.”
레온이 나직이 속삭이며 태너를 밀어내고 앞으로 나왔다.
그대로 한쪽 무릎을 꿇어앉은 레온은 샤를의 손끝을 살포시 잡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
“레이디, 오늘은 제가 스승이 되어도 되겠습니까.”
항상 웃음기를 머금고 있던 것과 달리 한없이 진지한 눈매가 샤를을 응시했다.
황금으로 만든 듯한 레온의 금안엔 부드러움이 아닌 관능이 이글거렸다.
“아……. 그게…….”
샤를의 페로몬이 다시금 흘러나오니, 그제야 이해한 태너가 조용히 뒤로 물러섰다.
* * *
“자, 레이디. 이 중에서 누구의 향기가 그나마 괜찮았나요.”
기사들의 페로몬 개방을 모두 거친 샤를에게 레온이 물었다.
이 정도면 웬만한 우성도 맥을 못 출 것일진대, 샤를은 매우 멀쩡한 모습이었다.
물론 독한 향수를 오래 맡은 것처럼 머리가 띵한 느낌은 있었다. 하지만 역시나 흥분은 아니었다.
샤를은 망설임 없이 레온을 보며 씩- 웃었다.
“에이, 이건 너무 친분이 섞인 것 아닙니까.”
기사 하나가 툴툴거렸다.
레온에 비하자면 부족하겠지만 저도 어디 가면 꿀리지 않는 우성이거늘, 반응이 없어도 너무 없는 샤를의 모습에 자존심이 상한 까닭이었다.
또한 동성의 페로몬을 느낀 우성들의 본능이자, 경쟁심이 불타오른 이유도 있었다.
“맞습니다. 샤를 양. 친한 사람 말고 향이 좋은 사람을 골라야 합니다.”
기사들의 하소연이 이어졌다.
“죄송해요.”
샤를이 미안함을 담아 해사하게 웃어 보였다.
그저 친해서가 아니었다. 가장 오래 맡고 싶은 향을 고르자면 단연, 레온이었다.
해맑은 샤를의 미소에 기사들은 졌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잡아먹을 듯 달려들던 우성의 기세가 사그라지자, 레온이 다시금 샤를의 손을 잡아 올렸다.
“……!”
뒤이어 샤를의 새하얀 손등에 입술을 맞추었다. 깜짝 놀란 샤를의 볼이 살짝 붉어졌다.
“그럼 이제 레이디께서 한번 해보시겠습니까.”
레온이 찡긋- 눈을 접어 웃었다.
저도 모르게 한 발짝 걸어 나오던 태너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 * *
계속 몽글몽글한 귀여운 느낌의 페로몬만 연무장으로 떠오르자 레온이 작게 속닥거렸다.
“잘 모르겠으면 좀 야한 생각을 해봐도 됩니다.”
은근한 목소리에 섞인 숨결이 샤를의 귓가에 닿았다.
레온에게 특별한 감정이 있던 것은 아니었지만, 느껴지는 자극에 절로 등허리가 간질거렸다.
그는 레온도 알고 의도한 것이었다.
제로라 하여 감각이 없는 것은 아니니 말이다.
특히 샤를은 시각에 매우 약했다.
물론 태너가 원한 것은 아무런 신체 자극 없는 순수한 페로몬의 감도였다. 그러나 그저 해맑게 눈을 멀뚱거리고만 있으니 계기 정도는 필요함이었다.
잠시 망설이던 샤를이 눈을 감았다.
[제로의 페로몬은 특히, 자료가 거의 없는 상황입니다. 만약, 샤를 양이 개방에 성공한다면 연구 자료의 제공 대가로 오백 트랑을 지급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긴 했으나, 자그마치 오백 트랑이나 걸린 일이었다.
그리고 페로몬 여는 것쯤 무에 대수겠는가. 거의 매일을 그러고 다녔었는데.
샤를은 머릿속으로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딱히 몸에 감흥이 이는 건 아니었지만, 기분만은 퍽 므흣해졌다.
“……!”
점차 퍼지는 샤를의 페로몬에 태너의 입꼬리가 올라졌다.
깨끗하면서도 나른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렇지만 신체 변화까지 이끌어낼 정도는 아니었다.
그래도 이는 매우 기이한 현상이었다.
보통 평민 계급이 페로몬을 개방하면 우성은 불쾌감을 느끼는 것이 정상이었다.
아니, 백이면 백 역겨워했다.
누군가 허락 없이 더러운 손으로 자신의 몸을 탐하려 드는 기분이니 말이다.
그런데 샤를은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꼭 작은 새끼 고양이가 엉금엉금 기어 올라와 꾹꾹이를 해주는 것 같달까?
역시나 기사들은 우쭈쭈- 하는 눈길로 샤를을 보며 피식거리고 있었다.
“이제 닫으셔도 됩니다.”
레온이 말하자 샤를이 눈을 떴다. 퍼지던 페로몬도 거둬들여졌다.
“성공인가요?”
“음, 그건 태너 경이 판단하실 것 같네요.”
“아싸, 오백.”
“예?”
“아, 아니에요.”
잘했다는 레온의 눈빛에 신난 샤를이 태너에게로 향했다.
레온은 그런 샤를의 뒷모습을 가만히 응시했다.
샤를의 손등에 입맞춤한 레온이었다. 만약 그것이 아니었더라면 레온 역시 다른 기사들과 같은 반응이었을 것이다.
비록 그 강도가 미약했지만 레온은 분명 느꼈다.
입술이 닿는 그 순간 뻗어 들어오는 매우 청량한 정화의 기운을.
그리고 그것에서 떨어지고 싶지 않다는 충동을 말이다.
* * *
“으흐흐. 오백 트랑.”
입금 확인서를 들고 방에 돌아온 샤를이 침대 위를 이리저리 뒹굴었다.
뭔가 꺼림칙한 기분은 들었지만 오드리도 샤를을 연구해보고 싶어 하지 않았던가?
소설 속 릴리아나의 등장에 난리가 났던 이유도 그녀가 제로였다 각성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자신은 릴리아나에 비하자면 턱도 없는 성력일 것이다. 그런데도 이렇게 돈이 뚝하고 떨어지니 이 얼마나 좋단 말인가.
“오백 트랑이면 다섯 달은 먹고살겠네.”
샤를은 베개를 폭 끌어안고 헤실헤실 웃었다. 잔뜩 흥이 오른 탓에 페로몬이 통통 튀어 올랐다.
한번 개방해봐서 그런가. 정말 태너의 말처럼 조절함에 있어 조금 더 감이 잡히는 느낌이었다.
“흐암-”
샤를이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페로몬을 개방하고 닫는 것은 오롯이 정신력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꽤 피로해진 탓이었다.
“이렇게만 일하라면 평생도 하겠어.”
샤를은 스르륵- 눈을 감으며 이불을 끌어당겼다.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붉은빛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