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네가 눈앞에 어른거리는데, 내가 어떻게 참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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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네가 눈앞에 어른거리는데, 내가 어떻게 참아
지지대를 잡은 지훈의 팔이 부들부들 떨렸다. 여름에 사고가 난 이후, 한 번의 수술을 더 받고 가을에 퇴원을 했다. 요양을 위해 새로 산 집은 서울 근교에 있는 전원주택이었다. 집 바로 앞에 보이는 산에 울긋불긋한 단풍이 만발이었다.
어제 점심을 먹은 후, 그와 함께 발코니에서 차를 마시던 세정이 예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진짜 예쁘다. 그치, 지훈아.”
지훈은 그 말이 가슴에 사무쳤다. 단풍이 한창인 이 시기에, 더 추워지기 전에 그녀를 데리고 좋은 숲에 구경을 가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예전에 그들이 사귈 때처럼 쏟아지는 은행잎을 배경으로 그녀의 사진도 찍어 주고 싶었고, 인적 드문 숲속에서 도망치는 그녀를 붙잡고 키스하고도 싶었다.
“씨팔….”
지훈은 작게 욕설을 내뱉었다. 현실은 지지대를 붙잡고 겨우 세 발짝을 내딛는 수준이었다. 그의 이마를 타고 땀이 주룩주룩 흘렀다. 얼굴뿐만이 아니라 온몸에 비 오듯 땀이 흘러 실내복이 척척하게 젖어 든 것이 여실히 느껴졌다.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의사는 너무 무리하지 말라며 앵무새도 지껄일 수 있는 개소리를 했다. 밤에는 잠도 잘 오지 않았다. 그의 품 안에서 새근새근 잠에 빠진 세정을 보면 하루라도 빨리 걸어야겠다는 일념에 투지가 불탔다.
문제는 조급한 그의 의지와는 달리 말을 듣지 않는 몸뚱이였다. 의사는 휠체어에서 이 정도로 빨리 일어난 것도 놀라운 일이라며 그를 격려했지만, 지훈은 하루하루가 피가 마르는 기분이었다.
세정은 회사를 관두고 아예 그의 곁에서 지훈을 돌보았다. 집 안에 재활 치료사와 일을 도와주는 아주머니가 드나들었지만 밤이면 모두 퇴근을 했다. 세정이 그와 단둘이 있는 시간이 소중하다고 말한 탓이었다.
세정은 일하는 사람을 부리는 것도 탐탁지 않아 했지만, 지훈의 고집은 꺾을 수가 없었다. 그는 세정을 고생시키기 위해 함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하루빨리 그녀에게 일상을 찾아 주고 싶었다. 좋아하는 일을 하고, 바쁘게 사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세 걸음만 더.’
지훈은 지지대를 잡은 손에 힘을 꽉 주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다친 왼쪽 다리로 바닥을 짚자마자 무너질 것 같았지만 이를 악물고 1초를 버틴 후, 다시 오른발을 내디뎠다.
‘다음 걸음은 2초만 더.’
어릴 적 테니스 코트에서 하루에 열 시간씩 서브를 받는 연습을 했을 때처럼 숨이 턱에 찼다. 그는 숨을 몰아쉬며 다시 한 발짝을 내디뎠다.
“…흣…!”
다리가 뻣뻣해지며 중심을 잃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지지대를 붙잡으려 했지만 땀이 범벅이 된 손바닥이 미끄러져 지훈은 바닥에 엉덩이를 세게 찧었다.
“제기랄….”
“지훈아, 괜찮아?”
세정이 그에게 달려왔다. 지훈은 걷는 연습을 할 때 그녀가 곁에 있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으므로 늘 문밖에 숨어서 지켜봐야 했지만 그가 넘어지는 것을 보고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일어나 봐.”
땀에 흠뻑 젖은 그의 앞에 무릎을 대고 앉아 그를 부축하려는데 지훈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쪽팔리니까 여기 들어오지 말라고 했지.”
“…뭐가 쪽팔리는데, 대체. 넌.”
“비틀거리며 걷는 거 보여 주기 싫다고 말했잖아.”
세정이 그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지훈의 얼굴은 흘린 땀으로 범벅이었다.
“너 휠체어에서 일어난 지 이제 고작 사흘이야. 그런데 이 정도로 하는 거 정말 대단한 거잖아. 나는 네가 너무 자랑스러워 죽겠는데 넌 왜 자꾸 속상한 말만 해?”
그녀의 커다란 눈동자에 삽시간에 눈물이 들어찼다. 울지 않으려 눈을 부릅뜬 그녀의 모습을 보며 지훈이 입술을 씹었다.
“나, 네가 칭찬해 주고 얼러 줘야 하는 어린애 아니야. 그러니까….”
세정의 입술이 다가와 그를 막는 바람에 지훈은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떨린 입술이 부딪치자 지훈이 머뭇했던 것도 잠시였다. 그의 뜨거운 혀가 그녀의 입술 안을 비집었다. 지훈의 커다란 손이 그녀의 어깨를 강하게 붙잡았다.
“하아….”
세정은 혀를 부딪치며 타액을 강하게 빨아들이는 지훈의 열기 어린 키스에 화답하듯 그를 꽉 끌어안았다. 동그란 코끝에 닿는 그의 숨결이 거칠었다. 한참을 놔주지 않다가 겨우 떨어진 입술 새로 타액이 가느다란 실처럼 늘어났다.
“…속상한 말만 내뱉는데도 도지훈이 너무 좋아서 큰일이야, 진짜.”
세정이 작게 속삭였다. 지훈이 한숨을 쉬듯 옅게 웃었다. 그가 사랑스러운 그녀의 뺨을 어루만지며 중얼거렸다.
“너 안고 싶은데 지금 땀으로 흠뻑 젖어서 먼저 씻어야 할 것 같아.”
지훈은 다리를 다친 이후, 그녀에게 조심스러웠다. 몸이 불편한 그 때문에 섹스를 할 때, 세정이 적극적으로 움직여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이후부터 더욱 그랬다. 세정은 그 점이 속상하고, 못마땅했다. 그녀는 마른침을 꿀꺽 삼킨 후, 그의 손을 붙잡았다.
“싫어.”
“…뭐?”
지훈이 그녀를 보며 제 입술을 잘근 씹었다. 얼굴이 토마토처럼 온통 빨개진 세정이 하는 짓이 영 심상치 않았다. 그녀가 치마 아래로 그의 손을 가져가며 귀까지 달아올라 중얼거렸다.
“나도 젖었어. 그러니까 그냥 해.”
세정의 수줍은 도발에 그의 얕은 인내심은 바닥이 났다. 지훈이 엄청난 힘으로 그녀를 끌어안고 자신의 위로 올린 후 뒤로 누웠다. 세정이 기다렸다는 듯 그의 트레이닝 바지를 아래로 내리자 이미 잔뜩 발기한 페니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리 와.”
그가 꽉 잠긴 목소리를 내뱉으며 그녀의 치마 속을 파고들다 멈칫했다. 그가 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속옷, 안 입은 거야?”
세정이 부끄럽다는 듯 그를 끌어안고 지훈의 목에 얼굴을 감추었다. 달아오른 체온이 마주 닿아 더욱 뜨거워졌다. 지훈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그녀의 엉덩이를 벌리고 그 안에 자신을 들이밀었다. 그녀의 말마따나 잔뜩 젖은 입구가 선단에 닿았다.
“아응!”
쑥, 진입하자 세정의 입술에서 새된 신음이 터졌다. 쭉 빨아들이는 느낌을 만끽하며 지훈은 그녀의 엉덩이를 꽉 쥐고 허리를 들썩이기 시작했다. 찰박이는 소리가 실내에 진동했다. 마룻바닥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고, 사방이 온통 거울로 된 곳에서 두 인영이 쉴 새 없이 흔들렸다.
“다리가 아니라 좆을 다쳤으면 난 그대로 자살했을 거야.”
“자꾸 그런 말, 흣, 하지 말라고 했지, 진짜! 하응!”
세정이 숨을 헐떡이며 인상을 엉망으로 찌푸렸다. 퍽, 퍽, 올려 치는 힘은 점점 더 거세지는 것 같았다. 매일같이 그의 위에 올라타는데도 할 때마다 어쩌면 이렇게 매번 설레고 아찔하게 기분이 좋을까.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후의 섹스는 열정적이고 뜨거웠다. 그들은 스무 살, 스물한 살로 돌아간 것처럼 시도 때도 없이 사랑을 나누었다.
“네가 눈앞에 어른거리는데, 내가 어떻게 참아.”
“흣! 아아!”
깊게 넣고 비비듯 내벽을 쑤시자 세정의 몸이 덜덜 떨렸다. 지훈은 보란 듯이 더 격하게 그녀를 끝까지 몰아붙였다.
보여 주고 싶었다. 비록 휠체어 없이는 아직도 외출이 불가능한 상태지만 아직도 그는 그녀를 원하는 남자라는 사실을 증명하고 싶었다.
“아흣!”
절정에 오른 그녀가 부들부들 떨며 그를 조였다. 지훈은 세정의 입술을 빨아들이며 그녀의 깊숙한 곳에 사정했다.
“이번에 단풍은 보러 못 갔지만, 내년에 벚꽃 구경은 꼭 시켜 줄게.”
그의 품에 안겨 숨을 고르고 있는 세정의 귀에 그가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그의 진심을 알아챈 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단풍을 보고 예쁘다고 한 말을 마음에 두고 있었던 거구나. 세정은 뜨거워진 미간을 식히며 그를 불렀다.
“지훈아.”
아직도 삽입한 채로 지훈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었다.
“왜.”
“나는 벚꽃 필 때면 그때 생각밖에 안 나.”
“언제.”
“네가 처음 나한테 부딪쳤던 날.”
세정이 그의 말투를 따라 했다.
“‘너 내가 누군지 알아? 나 도지훈이야.’ 그러는데 그 말이 얼마나 웃기면서 재수가 없던지.”
지훈이 그녀를 안은 채 피식 웃었다.
“그럼 내가 도지훈인데 뭐라고 날 더 소개해.”
“그래. 맞아.”
세정이 그에게 눈을 맞추었다.
“그리고 도지훈은 성격이 엄청 나빠서, 가지고 싶은 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다 가지고 하고 싶은 것도 결국에는 다 해내잖아.”
“욕이야, 칭찬이야?”
“나는 그런 도지훈을 진짜 사랑한다는 소리야.”
“하… 씨발…. 네가 이럴 때마다 난 정말 계속 좆이 서서 미치겠다.”
세정이 지훈에게 예쁘게 눈을 흘겼다. 뭐라고 입을 떼기도 전에 아래에서 점점 단단해지는 그의 페니스가 느껴졌다. 지훈이 그녀를 끌어안고 키스하며 다시 느리게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창문 너머로 노란 은행잎이 햇살을 받아 예쁘게 빛나고 있었다.
***
벌써 몇 접시째인지 모를 코스 요리가 새롭게 들어왔다. 지훈은 포크를 달칵 소리가 나게 접시 위에 팽개치고 냅킨으로 입을 닦았다.
“뭐 하는 개매너야?”
큰누나 지민이 맞은편에서 그를 노려보았다. 지훈이 와인 잔을 들어 입술을 축였다.
“음식이 별로라서. 요즘 건강 생각해? 간이 하나도 안 되어 있는 걸 뭘 먹으라는 거야. 누나나 건강식 많이 먹고 오래오래 살아.”
“개새끼가 버릇없이 진짜….”
지민이 혀를 쯧, 차며 담배를 꺼내 들었다. 인정하기가 짜증 났지만 지훈의 말대로 음식은 간이 심심했다. 찰칵, 불을 붙인 후 그녀가 연기를 훅 내뱉으며 입을 열었다.
“다리는 좀 어때.”
“아까 다 확인 안 했어? 일부러 수영장으로 불러 놓고 웬 딴청이야?”
지민이 흠, 하고 헛기침을 하며 인상을 찌푸렸다. 끔찍한 사고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은 지훈의 다리에 남겨진 커다란 흉터뿐이었다.
사고가 있은 지 이제 8개월째, 지훈은 놀랄 만한 회복력을 보였고 지민은 아까 수영장에서 두 눈으로 그 사실을 똑똑히 확인할 수 있었다.
“다리 저는지 확인하려고 부른 거잖아.”
지훈이 보란 듯이 긴 다리를 꼬았다. 까딱까딱 발끝에서 반질한 구두가 흔들렸다. 지민과 똑같은 버릇을 눈앞에서 선보이고 있는 지훈을 보며 그녀가 본론을 꺼내 놓았다.
“불구 안 된 거 봤으니까 됐고, 이제 그만 들어와서 내 일 도와.”
“내가 왜?”
지훈이 그녀를 뚱하게 바라보며 되묻자 지민이 빽 하고 소리를 쳤다.
“누나가 하라면 좀 해!”
“큰누나는 그럴 때만 꼭 핏줄을 강조하더라. 좀 속이 너무 보인다고 생각 안 해?”
슬슬 속을 긁는 소리를 들으니 지민은 더욱 열이 뻗쳤다. 집안사람들 중 가장 싹수가 없는 것이 바로 막내인 지훈이었다. 그가 만약 그룹 내의 이권 싸움에 관심이 있었다면 지민의 최대 적도 바로 지훈이었을 것이다.
“도지석이 출소한다고 해도 이제 완전히 걔는 나가리야.”
“큰형보다 리베이트 더 많이 한 건 솔직히 누나 아냐? 축하해. 언제 들어갈진 모르겠지만.”
지훈이 박수를 치며 입술을 올려 웃었다. 지민은 그를 한 번 째려보았다.
세정과 헤어지자마자 미국으로 갔던 지훈은 N사에 평사원으로 취직하면서 그룹 회장인 어머니를 기함하게 했다. 권력 싸움에는 관심이 없는 척 살아가고 있다고 해도 지훈은 그룹의 주식을 상당량 소유하고 있는 최고 주주 중의 하나였다.
그 무렵 부회장이자 지민의 바로 아래 동생인 도지석이 뇌물 수수로 구속되는 큰 사건이 일어났다.
지훈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주식을 이용해 지민을 파격적으로 지원하며 뒷배를 벌였고 본격적으로 형인 지석과의 싸움을 붙였다. 물론 지훈이 그냥 지민을 도울 성격은 아니었다.
마침내 그룹의 알력 싸움에서 지민이 승리하고 임원들의 지지를 얻었을 때, 지훈은 약속했던 대로 지민이 가지고 있는 유통 채널을 이용해 N사의 한국 진출에 발판을 실었다. 사업 결과는 대성공이었고 지훈은 결국 한국 지사의 대표직을 안고 파견되었다.
“어차피 대표 자리도 잘렸잖아, 너. 실업자 된 거 구제해 주겠다는데 왜 말이 많아?”
“잘린 게 아니라 장기 휴직이었지. 누나도 조심해. 지금 장기 휴직 상태인 지석이 형, 형무소에서 성경책 읽는다던데.”
지훈이 참지 못하고 하하 크게 소리 내어 웃음을 터뜨렸다. 지석의 멘탈이 걱정되기보다 그가 출소했을 때 벌어질 상황이 더욱 흥미진진했다.
“아…. 아무래도 형, 나오자마자 큰일 벌어질 것 같지 않아?”
잘 관리된 지민의 눈썹이 위로 휘는 것이 그녀의 불안과 동요를 잘 보여 주고 있었다. 아마도 그녀가 지훈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려는 이유는 곧 2심 재판을 받고 출소할지도 모를 지석 때문일 것이다. 이 또한 지훈이 미리 계산한 바였다.
어릴 적부터 지석과 지민이 후계자 자리를 두고 피 터지게 싸우는 것을 두 눈으로 보아 온 그는 사실 둘 중에 누가 승리해도 상관은 없었다.
그가 지석이 아닌 지민과 손을 잡기로 결정한 이유는 간단했다. 그의 형은 세기의 스캔들을 일으키며 떠들썩하게 아나운서와 결혼을 한 사실이 무색하게도 사생활이 문란했다. 아버지를 연상시키게 하는 형의 모습을 보며 지훈은 한심함을 느꼈다.
차라리 그룹을 위해 그녀가 가장 싫어하는 타입의 마초 같은 남자와 약혼까지 한 지민 쪽이 그에게는 훨씬 더 진정성 있게 다가왔다. 지민이 수장으로 있는 한 그룹의 주가가 떨어지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지훈은 지민을 보며 씨익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내가 도와주면 누나는 나한테 뭐 해 줄 건데?”
“도와 달라는 말을 한 적이 없는 것 같은데, 난.”
지민의 붉은 입술이 살짝 떨렸다.
“협상 결렬? 용건 끝났으면 갈게. 더럽게 맛없는 밥은 누이가 사세요.”
휙 일어나 자리를 뜨려는 그를 보며 지민이 눈썹을 찌푸렸다.
“뭘 원하는데.”
진작 그럴 것이지.
지훈이 외투를 손에 걸치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원래 더 많이 원하는 사람이 지기 마련이었다. 그가 그녀를 보며 빙긋 웃었다.
“세정이한테 사과해. 6년 전에 세정이 불러내서 막장 드라마 찍었던 거 사과하라고.”
“사과는 백번이고 할 수 있지, 물론…. 지금이라도 내가 전화할까? 선물이라도 한 트럭 보내? 세정이 걔 뭐 좋아하니?”
지훈이 기뻐하는 그녀의 앞에서 슈트 재킷에서 자신의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뭔가 불길한 예감에 지민의 표정이 싹 굳었다.
“뭐 하는 거야?”
“사과의 기본은 무릎 꿇기.”
“저 개새끼가 진짜…. 끝까지….”
“진심으로 사과해. 누나 때문에 나 세정이한테 차인 것만 생각하면 자다가도 다친 다리가 쑤시거든.”
지훈이 찢어진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동영상 모드로 전환된 지훈의 휴대폰이 지민의 눈앞에서 까딱, 까딱 움직였다. 지민이 눈을 질끈 감았다.
***
“그래서 정말 그 동영상을 찍었다고?”
“응, 보여 준다니까.”
운전대를 잡은 지훈이 키득거리며 세정을 보았다. 세정이 못 말리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와아. 너희 누나가 나 엄청 더 싫어하겠다, 이제.”
“상관있나? 어차피 얼굴 볼 사이도 아닌데.”
지훈이 아직도 웃음기가 담긴 목소리로 말하자 세정이 빤히 그를 보았다.
“넌 나만 신경 쓰면 돼. 내 가족들 좆 까라 그래. 난 그 집안 안 들어가도 잘 먹고 잘 사니까.”
어이가 없을 정도로 단순한 그의 결론에 세정이 하, 하고 웃었다. 지민이 전화를 걸어 쭈뼛쭈뼛 옛날 일은 미안하다고 사과한 것은 아무래도 말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지훈이 크게 웃으며 당장 지민에게 전화라도 할까 봐 두려웠다.
- 우리 가족들, 예전부터 하도 물어뜯고 살아와서 걱정을 해도 막상 상대한테는 티도 못 내요. 하지만 안세정 씨 덕에 지훈이가 그만큼이나 빨리 회복할 수 있었다는 건 우리 집안 사람들 모두 다 알아요. 지훈이, 잘 잡아 줘서 고마워요. 그리고…. 옛날 일은 미안하게 생각해요.
지훈의 가족 일에 대해서는 함부로 참견하지 말아야겠다, 생각하면서도 세정이 고개를 갸웃했다.
- 내가 안세정 씨 오해했어요. 지훈이와 헤어지고 나서 금방 조건 좋은 다른 남자 만나서 시집갈 거라고 생각했는데….
“근데 너희 누나가 나 6년 동안 싱글로 혼자 살았던 건 어떻게 안 거지?”
세정이 작게 중얼거리자 지훈이 그녀의 말을 알아듣고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세정이 그를 향해 휙 고개를 돌렸다.
“뭐야, 그 수상한 표정은?”
“내가 한국 떠나 있는 동안 널 누가 지켜봤겠어?”
“뭐?”
갑작스러운 지훈의 고해 성사에 세정이 눈을 크게 떴다.
“너 혹시 너희 누나 시켜서 나 감시했어?”
“워딩을 좀 바꿔. ‘보호’한 거야.”
여유롭게 받아치는 그를 보는 세정의 눈이 가느다랗게 길어졌다.
“스토커 같은 짓 내가 질색하는 거 알면서… 정말 끝까지 더티 플레이야, 너는.”
“안 들켰으면 됐지. 너 매일 밤 야근하고 밤늦게 집으로 돌아가는데, 내가 두 발 뻗고 편히 잘 수 있었겠어?”
지훈이 운전대를 잡은 채, 피식 웃었다. 세정은 그의 날렵한 옆모습을 바라보며 입술을 삐죽였다.
“그럼 왜 더 빨리 내 앞에 안 나타났어?”
“내가 온전히 내 힘을 얻을 때까지 기다렸을 뿐이야. 가족들 도움 안 받고도 잘 먹고 잘 살 수 있게.”
대수롭지 않은 그의 대꾸에 세정은 왠지 가슴 한구석이 뜨거워졌다. 지훈은 예전부터 그랬다. 그녀의 말을 허투루 듣는 법이 없었다.
상처를 주려 일부러 내뱉은 말이었음에도 그녀에게 보란 듯이 제 힘으로 성공해서 눈앞에 나타난 그였다. 그는 여전히 N사의 대표 이사 자격으로 일을 하고 있었고, 지난달부터는 정상적으로 출근하기 시작했다.
늦은 밤 딱딱한 다리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아직도 가끔씩 땀을 흘리며 신음하면서도, 지훈은 훌륭히 그 모든 시간들을 이겨 냈다.
“성질 더러운 내 가족들한테 네가 고개 숙이는 일 없도록, 큰소리 땅땅 칠 수 있도록 말이야.”
지훈이 다시 그의 집안으로 돌아가 가업을 도와야 하는 일이 생길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나중 일이었다. 그는 말없이 눈만 깜빡거리는 세정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 후, 능숙하게 핸들을 돌렸다. 지금은 세상 무엇보다 중요한 순간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끼익.
지훈의 승용차가 멈춰 선 곳은 한적한 골목이었다.
“다 왔다. 내려.”
세정은 무심결에 그를 따라 내렸다. 눈앞에 보이는 것은 그녀가 그토록 꿈꿔 왔던 이층집이었다. 깔끔하고 아담한 2층짜리 단독 주택 앞에 선 세정의 눈동자가 흥분에 떨렸다.
“지훈아….”
세정의 목소리에 드러난 흥분을 눈치채고 지훈은 한숨을 삼키며 씩 웃었다. 그녀가 원한다면 눈이 돌아갈 정도로 호화로운 건물을 몇 채고 사 줄 수 있었지만 세정의 취향은 그쪽이 아니었기 때문에 오히려 더 골치가 아팠다.
보통 사람들처럼 평범하고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세정의 말은 그에게 어려운 수수께끼처럼 들렸다. 국내 최고의 건축가, 실내 인테리어 디자이너와 함께 고심하며 이 집을 설계하는 데에만 몇 개월을 소요했다.
“뭐 해, 안 들어오고.”
그가 그녀를 향해 고개를 까딱했다.
“으응. 가.”
세정은 홀린 듯 그를 따라 발을 움직였다. 현관을 열자 잘 정리된 정원이 보였다. 그 자리에 우뚝 선 세정의 눈이 촉촉하게 젖었다.
“여기… 뭐야?”
“뭔 거 같아?”
지훈이 대답 대신 그녀를 보며 물었다. 씩 웃는 웃음이 환했다. 세정은 떨리는 목소리로 그에게 물었다.
“여기, 네가 사는 집이야?”
“아니.”
지훈이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우리 집이야. 너랑 내 집. 공동 명의. 너 이제 빼도 박도 못해.”
“…그게 프러포즈는 아니지, 설마?”
“이거보다 더 완벽한 프러포즈가 존재해? 네가 원하는 거, 네 눈앞에 다 가져다줬는데, 그걸로 부족해?”
그가 자신감이 넘치는 얼굴로 씩 웃었다. 지훈은 세정과 떨어져 있는 시간 동안 이 순간만을 기다려 왔다. 세정의 마지막 말을 곱씹으며 고통스럽도록 그리운 시간들을 견뎌 냈다.
“나는, 평범하게 살고 싶어. 도지훈. 내 실력 인정받으면서 일하고, 나를 존중해 주는 사람과 결혼하고, 마당이 있는 이층집 지어서 커다란 개 키우면서, 그렇게 살고 싶다고.”
세정의 눈이 눈물로 젖어 들어가는 것을 보면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녀가 기뻐하고 있다는 사실을.
“끼잉… 낑….”
감동한 세정이 뭐라고 입을 열려는 순간 뒤에서 자그마한 소리가 들렸다. 세정은 소리가 나는 쪽으로 휙 고개를 돌렸다. 개집에 목줄이 묶인 새끼 강아지가 그녀를 보며 박수를 치듯 신나게 앞발을 흔들어 대고 있었다.
“어어.”
세정은 홀린 듯이 다가가 개집 아래 쭈그리고 앉았다. 털이 짤막하고 날렵해 보이는 강아지가 배를 까뒤집고 그녀를 보며 애교를 피웠다.
“지금은 작지만 엄청 커질 거래. 저래 봬도 사냥개거든.”
“너무 귀여워, 지훈아….”
홀린 듯 정신을 못 차리는 세정의 뒤에서 지훈이 그녀를 끌어안았다.
“너, 얘 이름 뭔지 알아?”
“…뭔데?”
“지민이.”
세정의 입술에서 헛웃음이 터졌다.
“어때, 잘 어울리지 않아?”
어이가 없어 그저 웃는 그녀를 보며 지훈이 다시 한번 덧붙였다.
“말 안 들으면 우리 누나라고 생각하고 마음껏 혼내. 알았지?”
지훈이 그녀를 일으켰다. 발그레해진 그녀의 뺨을 조심스레 감싸 쥐고 지훈이 속삭였다.
“섹스할까?”
“…우리 집에서?”
세정이 그에게 조심스레 묻자 지훈이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우리 집에서.”
“응. 하자, 지훈아.”
앞으로 너와 함께 추억을 만들어 갈 우리의 첫 집에서.
세정이 마음속으로 속삭였고, 지훈이 그녀의 몸을 번쩍 들어 올렸다. 성큼 내딛는 그의 발걸음은 망설임이 없었다.
에필로그
“아… 씨발… 아아, 좋아… 세정아….”
세정이 느리게 고개를 뒤로 빼자 그녀의 입술에서 성난 지훈의 성기가 툭, 빠져 위아래로 흔들렸다.
“왜, 왜….”
“욕하지 말라고 분명히 말했지, 내가? 됐어. 끝.”
“안 돼. 절대 안 그럴게. 제발. 응? 제발.”
지훈이 애처로운 눈빛으로 재빨리 중얼거리며 안쓰럽게 그녀의 얼굴 앞에서 페니스를 꺼떡였다.
“미칠 것 같아, 빨리.”
침대 끄트머리에 앉은 세정이 그에게 예쁘게 눈을 흘기며 작게 중얼거렸다.
“한 번만 봐주는 거야. 다시 나쁜 소리 하면 바로 멈출 거니까 알아서 해.”
자그마한 혀를 내밀어 귀두를 핥다가 쪽, 하고 다시 빨기 시작하자 그녀의 앞에 선 지훈이 애써 터지는 욕설을 참았다. 탄탄한 복근이 움찔거리는 것을 보며 세정이 더욱 깊이 그를 머금었다.
“아… 아….”
지훈의 잇새에서 허스키한 신음이 터져 나갔다. 흥분하는 지훈을 보는 것은 세정을 달아오르게 만들었다. 세정은 입 안에 넣기 벅차게 큰 그의 성기를 혀끝으로 돌려 가며 쪽쪽 빨았다.
“…박고 싶어.”
지훈이 괴로운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세정이 입술에서 성기를 빼냈다. 젖은 소음을 내며 떨어진 페니스 끝에서 쿠퍼액이 퐁퐁 샘솟았다.
“얼마만큼?”
세정이 혀끝으로 선단을 살짝 맛보며 도발하듯 묻자 지훈이 인상을 찌푸렸다.
“덮쳐도 돼? 덮친다.”
지훈이 예고하자마자 그녀를 번쩍 들어 침대 위에 뉘었다. 잠옷만 입은 채로 세정이 기어서 도망가려 했지만 그래 봤자 지훈의 손안이었다. 그가 그녀의 몸을 잡고 넓은 침대 위를 빙글 뒹굴었다.
“이리 와.”
“내일 일찍 출근해야 한단 말이야. 나. 출장 있는 거 몰라?”
“수술하고 근 한 달 동안 수도승처럼 살았는데, 내가 불쌍하지도 않아 넌?”
세정과의 상의 끝에 2세를 계획하고 다시 병원을 찾은 후의 일을 말하는 것이었다. 세정은 결국 그녀가 원하는 대로 모든 것을 맞추어 주는 지훈을 끝까지 거부하기가 힘이 들었다.
“그럼 조금만 하는 거야.”
“상황 봐서.”
지훈이 씩 웃으며 그녀의 잠옷 바지를 끌어당겨 벗겼다. 언제 봐도 그의 몸속에 흥분을 부글거리게 하는 여체를 바라보며 그가 팬티 사이를 손으로 비집었다.
“으응!”
신음을 터뜨리는 그녀를 보는 지훈의 눈이 욕망에 취해 가늘어졌다. 이렇게 축축해질 정도로 달콤하게 젖어 들어 놓고선 마지막까지 튕기는 걸 보면 세정 역시 성격이 그리 좋은 편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음핵을 집요하게 괴롭히자 세정이 꿈틀거리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으응! 하으….”
“꽂아 줘? 아주 질질 흐르는데.”
상스러운 표현에 세정이 눈을 흘기기 전에 그는 재빨리 그녀에게 입을 맞추며 기다란 손가락으로 그녀의 질 안을 파고들었다.
세정의 허리가 위로 들리며 꿈틀거렸다. 혀를 뒤섞으며 손가락으로 기분 좋은 곳을 매만지는 데는 당해 낼 수가 없었다.
지훈이 가장 섬세하게 움직일 때가 있다면 바로 그녀의 몸을 만질 때일 것이다. 그는 늘 세정제로 손을 몇 번이나 씻고 손톱은 피가 나기 직전까지 짤막하게 잘랐다.
“하아… 아, 지훈아….”
달콤한 신음을 흘리며 세정이 흥분에 가늘어진 눈으로 그를 보았다. 지훈의 불끈 선 성기에서 쿠퍼액이 뚝뚝 흘러나와 세정의 허벅지에 떨어졌다.
“박아 달라고 애원해 봐.”
“으응, 그냥… 빨리…. 흣….”
손가락이 질척거리는 애액을 퍼 올리는 속도가 빨라졌다. 질 내벽의 근육이 욱신거리며 그의 손을 조여들었다. 지훈이 꽉 잠긴 목소리로 그녀에게 속삭였다.
“이대로 한 번 가고 시작할래? 뭐 좋아. 그럼 오늘 밤이 길겠네.”
“해… 해 줘.”
분명히 손가락으로 오르게 만들고 또 본격적으로 몸을 섞으며 그녀를 오르가슴의 늪에 뒹굴게 할 것을 알기 때문에 세정은 황급히 입을 열었다. 욕망 어린 그의 얼굴에 짓궂은 표정이 더해졌다.
“똑바로 말해야지. 대체 나한테 뭘 해 달라는지 모르겠잖아.”
“바… 박아 줘, 얼른. 응?”
결국 세정은 그가 원하는 말을 뱉어 냈지만 지훈은 한술 더 떠 그녀를 자극했다.
“이대로 박고 흔들어 줘? 아주 엉망으로 만들어 줄까?”
세정의 인상이 일그러졌지만 지훈의 손가락이 지속적으로 움직이는 바람에 화도 제대로 낼 수 없었다. 울컥, 그녀의 내벽에서 애액이 샘솟았다.
“어쩔 수 없지.”
지훈이 손을 빼더니 말릴 새도 없이 쪽 빨아 그녀의 애액을 핥으며 그녀의 허벅지 사이를 무릎으로 열었다.
“아, 맛이 좋아. 역시.”
“더럽게 자꾸 그럴 거야?”
“더럽긴 뭐가 더러워. 넌 부부 사이에 너무 부끄럼이 많아.”
지훈이 받아치자 세정은 그 와중에도 어이가 없어 눈을 찌푸렸다. 부부가 아닐 때에도 그러지 않았느냐고 말하려 했지만 그럴 기회가 없었다.
세정의 양 팔목이 그에게 잡혀 위로 휙 올라가고, 흠뻑 젖은 질구에 지훈의 성기가 쑥, 하고 순식간에 머리를 디밀었다.
“흑!”
“하… 좋아서 질질 싼다. 내가.”
지훈이 중얼거리며 허리를 깊이 왕복하기 시작했다.
“소리 끝내준다, 세정아.”
“응! 하응! 아읏!”
철썩거리는 소리를 말하는 건지, 아니면 그녀가 신음하는 교성을 말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세정이 지훈의 늘씬한 허리를 탄력 있는 종아리로 꽉 감싸고 그를 조이자 지훈이 제 입술을 깨물며 욕설을 애써 삼켰다.
“쌀 뻔했잖아…. 혼나 볼 거야, 나한테?”
다정하게 속삭이며 퍽퍽 아랫도리를 찍어 내듯 박아 대자 세정이 정신없이 흔들리며 그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지훈아, 아아. 응! 좋, 좋아… 흣, 지훈아!”
“응, 나 여기 있잖아. 네 남편. 눈 돌아서 너랑 섹스하고 있잖아, 지금.”
지훈이 몸을 일으켜 그녀의 날씬한 종아리에 키스하며 앉은 채로 그녀를 들이받기 시작했다. 부드러운 매트리스가 사정없이 진동하며 그의 움직임에 따라 흔들렸다. 세정의 발가락이 움찔거리고 질 근육이 수축하며 애액을 뿜어냈다. 지훈의 성기가 왕복할 때마다 그녀의 내벽에서 일어난 애액이 마찰하며 거품이 일었다.
“끝내준다.”
지훈이 홀린 듯 그 광경을 바라보며 이마에서 땀을 흘리고 인상을 찌푸렸다. 그 모습이 숨이 막히게 관능적으로 느껴져 세정은 저도 모르게 절정에 오르고 말았다.
“벌써, 간 거야?”
쿡, 쿡, 찔러 그녀의 쾌감을 극대화시키고 지훈이 혀로 그녀의 종아리를 핥으며 후후 웃었다. 온몸을 간질거리는 절정감에 세정이 신음하다 축 늘어졌다. 그런 그녀를 끌어안아 제 위로 올리며 지훈이 그녀의 척추골을 쓰다듬었다.
“뭐, 괜찮아. 밤은 기니까.”
그의 목을 안아 오는 세정의 엉덩이를 기다란 손가락으로 어루만지듯 자극하며 지훈이 속삭였다.
“밤새도록 내가 더럽혀 줄게.”
외전
D. Nineteen. 봄.
“지각을 할 거면 차라리 들어오지 말라고 분명히 첫 강의 때 이야기한 걸로 아는데.”
날카로운 교수의 지적에 강의실 맨 뒷좌석에서 무료하게 앉아 있던 지훈이 고개를 들었다.
“죄송합니다.”
긴 머리를 질끈 묶은 여자가 얼굴이 빨개진 채 숨을 헐떡였다. 까다롭기로 유명한 전공 교수가 그녀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나가란 소리 안 들리나?”
“저희 동네 지하철역에서 사고가 있었….”
“자네한테 왜 늦었는지 설명하라고 한 적 없는데.”
교수의 정떨어지는 태도에도 여자는 의연했다. 머리카락이 땅에 닿을 만큼 고개를 꾸벅 숙인 후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지각에 대한 변명 하지 않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대신 여기 서서라도 청강하게 해 주세요.”
지훈이 옆에 앉은 태환을 쿡, 팔꿈치로 찔렀다. 어제 밤새워 술을 마셨다며 꾸벅꾸벅 졸고 있던 그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쟤 뭐냐?”
“누구.”
“쟤.”
태환이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눈살을 찌푸렸다.
“저 교수 또 사람 잡고 있네. 악질이야, 아주.”
“저 여자애가 누구냐고, 그래서.”
“쟤? 안세정이잖아.”
태환이 머뭇거림 없이 단번에 대답하자 지훈이 슬쩍 눈썹을 추켜세웠다.
“너 쟤 알아?”
“도지훈. 쟤 우리 동기거든? 네가 딴 사람들한테 아무런 관심이 없는 건 알지만 동기 얼굴 정도는 기억해 둬라. 아, 결국 쫓겨 나가네. 하여간…. 저 교수 씨발, 싸이코라고 악명 높다더니 진짜야.”
태환이 작게 혀를 찼다. 지훈은 강의실 문을 열고 다시 밖으로 나가는 세정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높게 올려 묶은 포니테일이 축 아래로 처져 힘없이 흔들렸다.
끼익.
“좀 비켜 봐.”
지훈이 일어서서 태환을 툭, 쳤다. 쫓겨 나간 세정의 뒷모습에 쏠렸던 시선들이 단번에 그에게로 돌아갔다. 전공 교수는 90분 동안의 강의 시간에 지각생도 받지 않았지만 학생이 중간에 나갔다 들어오는 것도 용납하지 않았다.
“야, 어디 가?”
태환이 소리를 죽여 물었지만 지훈은 대꾸 없이 헐렁한 가방을 챙겨 학생들로 꽉 찬 강의실 중간을 유유히 가로질렀다.
“자네, 지금 뭐 하는 건가?”
뒷문도 아니고 앞문으로 나가는 그를 보며 교수가 소리를 높였다. 지훈이 그에게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걸어가자 교수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자네 지금 나가면 앞으로 내 강의에 들어올 생각 하지 말게.”
문을 열려던 지훈이 마침내 자리에 우뚝 섰다. 그는 자신을 향해 콧김을 씩씩 내뿜고 있는 교수를 향해 툭 내뱉었다.
“교수님 강의, 서서라도 듣고 싶다는 사람은 쫓아내시면서 왜 저는 붙잡으십니까?”
“뭐, 뭐야?”
“혹시 저 좋아하십니까?”
지훈이 무표정하게 묻자 앞자리에 앉은 학생들이 웃음을 애써 참았다. 그는 얼굴이 벌게진 교수에게서 시선을 돌리고 성큼성큼 걸어 강의실을 나섰다.
“…….”
복도에 아까 그가 봤던 여자애가 있었다. 한 손에는 노트를 들고, 다른 한 손에는 펜을 들고서 뒷문 옆에 가방을 내려놓고 서 있던 세정이 그를 한 번 쳐다보았다. 지훈은 잠시 그 자리에 서서 그녀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강의실 안에서 교수가 제정신을 차리고 애써 강의를 시작하는 소리가 들렸다. 세정은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던 시선을 곧 강의실 쪽으로 돌렸다.
지훈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세정을 지나칠 때까지 그는 그녀의 옆모습에서 한 번도 눈을 떼지 않았다.
세정의 바로 곁을 지나치는데 그의 가슴에서 무언가 쿵, 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지훈은 속이 울렁거릴 정도로 급하게 뛰는 심장에 당황해 인상을 찌푸렸다. 그녀가 그의 눈에 거슬리기 시작한 것은 바로 그때부터였다.
***
D. Twenty. 봄.
세정은 고개가 푹 떨어지려다가 얼른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정이 가까워 온 늦은 밤, 인문대 도서관 안은 한적했다. 멀리서 잠시 엎드려 휴식을 취하고 있는 몇몇만이 눈에 들어올 뿐이었다.
‘세수라도 좀 하고 올까.’
아무래도 도서관 안이 너무 따뜻해서 잠이 더 오는 것 같았다. 세정은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 나지 않게 기지개를 켠 후, 바깥으로 나섰다. 창문 밖으로 키가 높다란 가로등에 비친 벚꽃이 유달리 환했다.
‘…뭐지?’
화장실에 다녀온 그녀는 책상에 놓인 캔 커피를 보고 잠시 눈을 깜빡였다. 캔 커피 아래 북 찢은 듯 보이는 수첩 종이 한 장에는 ‘D’라는 영문 모를 이니셜 한 글자가 적혀 있었다.
세정은 주위를 느리게 둘러보았지만 풍경은 전혀 바뀐 게 없었다. 책상에 엎드려 자고 있는 여학생 둘은 그녀의 눈에도 익은 사람들이었다. 타 과 학생들이었지만 늘 도서관에서 늦게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는 멤버들이기도 했다.
그녀는 잠시 그 자리에서 생각을 하다가 펜을 들었다. 잠시 후, 가방을 챙겨 일어선 그녀가 도서관 문을 나섰다.
세정이 나간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책장 사이에 무생물처럼 가만히 서 있던 지훈이 천천히 그녀가 앉았던 자리로 다가섰다. 세정이 주로 마시는 브랜드의 캔 커피 아래에 그대로 깔려 있는 수첩 종이에는 단정한 글씨가 적혀 있었다.
스토커 같은 짓 하지 말고 차라리 직접 얼굴을 보이세요, D씨.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서 있던 그는 마침내 종이를 조심스레 접어 지갑에 넣었다. 건물을 빠져나가는 그의 긴 다리에 고양된 흥분감이 묻어났다.
그녀의 소원대로 이제 슬슬 눈앞에 나타나 줘야 할 것 같았다. 어떻게 해야 드라마틱한 만남이 될지 고민하는 그의 얼굴에 슬쩍 웃음이 걸렸다.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리는 봄바람이 유난히 간지러운 밤이었다.
<끝> ● 뉴토끼_우아샷 ● 공금,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