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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빠] 디 포 더티(D For Dirty) (외전)
4월. 서울.
삭막하리만큼 널찍한 회의실 중앙의 가장 상석을 차지하고 앉은 광고주가 손에 끼워진 만년필을 빙글빙글 돌렸다.
“별론데요?”
회의가 진행되는 내내 비협조적인 태도였던 그의 간단한 한마디에 프레젠테이션을 주관한 팀장의 표정이 얼어붙었다.
“특별할 게 없잖습니까. 모델이 식상하기도 하고.”
음료업계에서 오래도록 최정상을 차지하고 있는 외국 기업 N사의 국내 첫 주류 시장 진출이었다. 무슨 수를 써서건 광고주의 컨펌을 받아 내야 앞으로의 작업이 수월해질 것은 당연한 이야기였다. 그러기 위해 팀원들이 오랜 고민 끝에 만장일치로 선택한 모델이 스타들의 스타라는 톱 배우 강재준이었다.
“자료를 보셔서 아시겠지만, 저희 쪽에서는 충분한 회의를 거쳐서 최선의 결과를 내기 위해 선택한 모델이라….”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는 팀장이 말을 더듬었다. 그는 광고주의 깔아뭉개는 태도에 이미 기가 팍 죽어 아까부터 상관인 세정의 눈치만 슬금슬금 보고 있었다. 흐트러짐 없는 태도로 꼿꼿이 등을 세우고 앉아 침묵을 지키고 있던 세정이 마침내 신중한 표정으로 입을 뗐다.
“강재준의 이미지 파워는 무시할 수가 없습니다. 실제로 H전자에서 프리미엄 레이블인 서눔을 론칭할 때 강재준의 광고 효과로 일찍이 시장 선점을 한 후, 업계에서 골리앗 급으로 덩치를 불렸던 것이 단적인 예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월한 피지컬을 자랑하듯 몸에 딱 맞는 푸른 슈트를 입은 광고주, 도지훈이 불량한 자세로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약하게 코웃음을 쳤다. 그는 겉모습만 봐서는 N사의 한국 지사 대표가 아니라 그 자신이 모델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외모였다. 문제는 그가 잘난 얼굴값은 물론이고 광고주로서의 압박 또한 톡톡히 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게 본인이 잘해서 그랬던 겁니까? 광고가 잘 나와서 그랬던 거지. 덕분에 당시 신인이었던 강재준 몸값이 열 배로 뛰었던 기현상이 그해 연예 뉴스 연말 핫이슈에 나올 정도였지 않습니까.”
“당시 해외에 계셨던 대표님께서 그렇게 잘 알고 계실 정도라면 그 광고가 서눔의 엄청난 매출 증가로 이어졌다는 사실도 이미 파악하고 계시리라 생각되는데요.”
이미 N사와 수년간 광고를 진행해 오고 있는 세정은 그의 삐딱한 말투에는 익숙해진 듯, 별다른 동요 없이 설명을 이어 나갔다.
“또한 광고가 잘 나왔던 건 당시 신인에 불과했던 강재준이 광고 콘셉트를 완벽하게 파악하고 소화해 낸 결과입니다. 그 점이 바로 그가 가진 능력이기도 하고요.”
지훈의 손 위에서 빙글빙글 돌아가던 빛나는 만년필이 움직임을 딱 멈추었다. 지훈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차분하게 대응하는 세정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바라보는 시선이 너무도 강렬해 세정의 옆자리에 앉은 팀장이 오히려 흠칫 당황할 정도였다. 가로로 길쭉한 입술이 비틀리며 날카로운 말투가 느릿한 속도로 흘러나왔다.
“그 유명했던 서눔 냉장고 프로젝트를 이끌었던 게 당시 갓 차장 달았던 안세정 부장 본인이죠?”
세정이 긍정하듯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과장이 조금 섞여 있긴 해도 그의 말이 아주 거짓은 아니었다.
“승진한 직후 보란 듯이 자신의 능력을 입증한 성과였으니 자신감이 하늘로 치솟을 정도로 행복했겠습니다.”
칭찬인 건지 깎아내리는 건지 알 수 없는 교묘한 그의 말투에 세정은 따로 대답하지 않았다.
“따라서 해당 모델에 대한 애정과 신뢰도가 각별할 거라는 사실을 이해 못 할 정도로 내가 속이 좁은 사람은 아닙니다만….”
“콜록.”
세정이 헛기침을 하듯 고개를 돌리며 입을 가렸다. 얼핏 봐서는 웃음을 감추기라도 하는 모양새였다. 팀장은 마치 자신이 죄를 지은 것 같은 기분에 고개를 숙였고, 맞은편에 앉은 지훈의 날카로운 눈썹이 꿈틀거리며 위로 들렸다.
“죄송합니다, 말씀 계속하시죠, 이사님.”
광고주와 상사의 신경전을 처음 지켜보는 팀장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둘이 붙으면 분위기가 살벌하기 이루 말할 데가 없다는 동료들의 증언을 눈으로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지훈이 상체를 길게 뒤로 기대며 팔짱을 끼자 푸른 슈트 아래 몸을 감싸고 있는 새하얀 셔츠가 팽팽히 당겨졌다. 같은 남자가 봐도 완벽하게 느껴지는 날렵한 육체. 그 장점을 가장 잘 아는 이는 도지훈 본인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길쭉한 검지가 느리게 움직이며 일정한 속도로 그의 팔꿈치를 두드렸다.
“강재준이 요즘 본업은 뒤로 제쳐 두고 광고만 찍는다고 소비자들도 질려 하는 추세인 것, 안 부장님께서는 설마 모릅니까… 아니면 모르고 싶은 겁니까?”
말끝을 기묘하게 늘이며 올리는 말투에 확연히 드러난 비웃음을 모를 수는 없었다. 굴지의 대기업 오너들의 심리 상태를 분석한 결과, 한 군집에서 소시오패스적인 면모를 가진 이가 나타날 확률이 일반인의 그것에 비해 월등히 높았다는 어느 통계가 떠올랐다.
겨우 30대 초반에 세계적인 브랜드 N사의 한국 지사 대표 이사 자리에 올랐다는 것은 그 주인공의 성격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과 일맥상통했다.
그것을 몸소 증명하듯 상대의 기를 꺾으려 혈안이 된 악독한 광고주라니. 팀장은 갑질을 숨 쉬듯 하는 광고주를 향해 항거하듯 두 주먹을 불끈 쥐었지만 파이팅이 넘치는 양 주먹은 테이블 아래에 감춰져 있을 뿐이었다.
“소비자들이 정말 질려 한다면, 과연 강재준이 지금까지 광고계에서 러브콜 영순위, 광고비 원톱을 유지하는 게 가능할까요?”
팀장은 광고주의 횡포에도 의연하게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는 상사 세정이 그저 존경스럽게만 보였다.
부장인 안세정과 광고주 중 매출 넘버원인 N사의 한국 지사 대표 도지훈이 부부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는 이 팀에 들어온 게 매우 행운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오산이었다. 그들이 법적으로만 부부 관계이지 일터에서는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라는 사실은 광고를 하나만 집행해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술자리에서는 갑질의 대명사인 광고주가 대행사를 쥐락펴락하기 위해, 혹은 상대에게 빅엿을 먹이기 위해 결혼까지 감행했고, 을의 위치에 있던 안세정 부장(당시 기획 2팀 차장)이 인당수에 몸 던지는 심정으로 희생양이 된 거 아니냐는 우스갯소리까지 나오고 있었다.
그녀가 심청이를 자처한 속사정에는 일중독이라고까지 불렸다던 그녀의 야망이 있었다고 했지만 그조차도 이제 한계에 다다랐다고 입을 모았다.
N사가 광고 대행사를 진작 갈아타지 않은 이유는 그들이 아직 이혼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그들의 이혼이 임박해 있다는 소문은 업계에서 정설로 퍼진 지 오래였다.
안세정 부장이 매번 마지막인 것처럼 N사의 광고에 사활을 거는 이유도 그들의 결혼이 언제 파탄 날지 모르기 때문이라고 했다. 매출 VIP를 잃을 가능성을 늘 염두에 두고 있다는 말이었다.
“현재 대한민국에서 가장 잘생긴 연예인 1위, 봄에 함께 벚꽃을 보러 가고 싶은 남자 1위, 밸런타인데이에 초콜릿을 선물하고 싶은 남자 1위, 크리스마스이브를 함께 보내고 싶은 남자 1위.”
세정이 사무적인 말투로 서류에 적힌 자료를 읊어 대자 지훈이 소리 내어 코웃음을 쳤다. 까딱거리는 긴 다리 끝에 걸린 고급 구두가 반질거리며 회의실의 삭막한 조명을 비추어 냈다. 그는 매우 못마땅한 표정으로 어디 더 해 보라는 듯 세정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20, 30, 40대 여자가 모두 한 번씩 데이트를 꿈꿔 봤다고 대답한 남자.”
세정이 서류를 툭 책상 위에 내려놓으며 잠시 말을 끊었다. 붉은 립스틱이 빈틈없이 발린 예쁜 입술이 이내 둥글게 가운데로 모였다.
“부동의 1위.”
마치 키스하듯 천천히 움직이는 그녀의 입술을 보며 지훈이 미간을 꿈틀댔다. 그리고 쫙 찢어진 눈으로 낮게 되물었다.
“그 말도 안 되는 유치한 통계에 안세정 부장도 동의한다는 뜻이겠군요.”
“동의하지 않았다면 저희 팀에서는 그를 모델로 추천드리지 않았을 겁니다.”
세정이 망설임 없이 건조하게 대답하자 지훈이 짧은 한숨과 함께 잇새로 욕설을 지껄였다. 크지 않은 소리였지만 분명히 ‘씨발’이라고 또렷하게 중얼거린 것을 회의실에 있는 셋 중 못 들은 이는 없었다.
팀장이 소리 없이 숨을 훅 들이쉬었다. 신성한 회의실에서 쌍욕이라니. 텔레비전이나 인터넷 뉴스로만 접했지 실제로는 처음이었다. 귀를 의심하게 하는 광고주의 천박한 언행에 팀장이 세정의 눈치를 살폈지만 그녀는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지훈 역시 여상한 표정으로 그녀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펜촉이 뾰족한 만년필을 빙글빙글 돌릴 뿐이었다. 내가 잘못 들었나 생각하며 팀장은 자꾸만 식은땀이 차는 주먹을 테이블 아래에서 쥐었다 폈다.
“대표님. 저희는 광고주가 만족하는 최선의 결과를 위해 일하고 있습니다.”
세정이 덧붙인 한마디는 나직했지만 힘이 있었다. 잠시 숨 막히는 정적이 회의실에 흘렀다. 단발성 광고에 집행비 20억이 걸려 있는 건이었다. 지독한 침묵이 견딜 수 없이 불편해질 무렵, 도지훈이 마침내 갈라진 목소리로 입을 뗐다.
“광고 콘셉트는 나왔습니까?”
“네.”
“뭡니까.”
주저함이 없는 세정의 대답에 지훈이 짧게 되물었다.
“강재준, 벗길 생각이에요. 콘셉트는 무인도에서 자유로운 휴가를 즐기는 톱스타 강재준, 그 자신입니다.”
세정이 거두절미하고 본론을 꺼내 놓았다. 지훈의 지시 탓에 프레젠테이션도 중간에 끊긴 이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성적 대상화라.”
“그렇습니다. 그동안 섹시한 콘셉트는 의도적으로 피해 왔던 모델의 숨겨 왔던 이미지를 드러냄으로써 구매 타깃이 되는 성인 여성들에게 강한 어필이 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강재준이 순순히 벗겠다고 할 것 같습니까? 여태껏 안 벗었는데?”
의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지훈이 되물었다. 강재준은 광고계의 블루칩으로 서로 모셔 가려고 안달인 모델이었다. 그가 벗는다면 온갖 매체가 떠들썩해지는 부가 효과는 당연한 이야기였다. 기회만 노리고 있던 팀장은 이때다 싶어 냉큼 끼어들며 세정을 거들었다.
“강재준 측에서는 서눔 냉장고를 함께했던 안세정 부장님께 강한 신뢰를 보이고 있습니다. 다른 광고에서 볼 수 없던 새로운 이미지를 선점할 수 있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이 프로젝트를 꼭 진행시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강한 신뢰?”
줄곧 세정에게 꽂혀 있던 지훈의 시선이 팀장에게로 옮겨졌다. 계속해 보라는 듯 그를 바라보는 지훈을 향해 팀장이 마비가 된 것 같은 얼굴에 애써 미소를 띠며 말을 이었다.
“네. 강재준과 저희 부장님이 연이 깊은 게 행운입니다. 지난번 사석에서 강재준이 안 부장님과 또 한 번 같이 일할 수 있다면 올누드도 감행할 수 있다고 우스갯소리 한 걸 저도 옆에서 분명히 들었거든요.”
“올누드라고요.”
지훈이 입술을 가로로 쫙 찢으며 되물었고, 팀장은 고개를 격하게 끄덕이며 광고주의 의미심장한 미소에 화답했다.
“예! 그렇습니다!”
“…장 팀장.”
옆자리의 세정이 그를 노려보며 조용히 그만하라는 신호를 보냈지만, 패기 넘치는 팀장은 그의 상관이 얼마만큼 능력이 있는지 광고주에게 떳떳이 알리고 싶은 욕구를 참지 못했다.
“안 부장님께서 기획하신 콘셉트라면 다 받아들이겠다고 호언장담을 했습니다. 개런티는 상관없으니 대신 광고 제작할 때 안 부장님께서 처음부터 끝까지 다 봐 주셔야 한다고, 그 자리에서 일어나 웃통이라도 벗을 기세로 나와서 매니저까지 화들짝 놀랐….”
탕!
“하하하!”
지훈이 책상을 쾅 치며 날카롭게 웃음을 터뜨렸다. 말 그대로 화들짝 놀란 팀장은 엉덩이가 의자에서 10센티 정도는 튀어 오르는 것 같았다. 지훈은 소리 내어 웃고 있었지만 분위기는 살얼음판처럼 얼어붙어 있어 팀장은 차마 따라 웃을 수가 없었다. 옆자리의 세정은 골치 아프다는 표정으로 입술을 꽉 깨물었다.
“아아.”
마침내 웃음을 멈춘 지훈이 쥐고 있던 만년필을 툭 책상 위로 굴렸다. 대칭이 완벽한 입술에서 느릿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세정아.”
앞뒤 다 자르고 부드럽게 부르는 목소리에 팀장이 당황해 얼어붙었다.
“지금 나랑 뭐 하자는 거야?”
지극히 다정한 말투였지만 찢어진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싸늘함에 회의실 공기가 순간 1도쯤 낮아지는 느낌이었다.
“재미없으니까 그만하자. 응?”
그와 눈을 마주칠 자신이 없어 시선을 아래로 내린 팀장의 시야에 그의 커다란 손이 들어왔다. 핏줄이 툭툭 불거진 손으로 책상을 다 때려 부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도대체 뭐가 그의 심기를 건드린 걸까. 팀장은 곁눈으로 세정을 몰래 보았다. 그녀 역시 당황한 것은 마찬가지인 듯했다. 여간해서는 얼굴색이 변하지 않는 그녀의 목덜미가 달아올라 있었다.
“대표님. 지금 저희 회의 중입니다.”
이 상황에서도 침착함을 잃지 않는 세정을 뚫어져라 응시하며 지훈이 제 관자놀이를 짚었다. 웃음기가 싹 사라진 건조한 말투가 칼날처럼 날아들었다.
“대행사와 매니지먼트사 사이에 뒷거래가 있을지도 모르는 이 상황에서 광고주보고 돈이나 뱉으라는 소리인데, 내가 이 회의를 계속 진행할 필요가 있습니까?”
팀장은 그제야 자신이 엄청난 실수를 저질렀다는 것을 인지했다.
“오해십니다. 절대로 그런 게 아니라….”
“그쪽은 좀 나가 계시는 게 어떨까 합니다.”
지훈이 그를 보지도 않고 차갑게 명령했다.
“아뇨, 장 팀장 역시 이 프로젝트 주관입니다. 계속 있으세요.”
떠나려는 그를 세정이 붙잡자 지훈이 하, 하고 뾰족한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성질 나쁜 짐승처럼 지훈이 목표물을 향해 꽉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뭐, 그럼 그러든가.”
지훈이 폭이 좁은 푸른 넥타이를 느슨하게 잡아당겼다. 툭 불거진 그의 울대뼈가 위험하게 일렁였다.
“내가 안 부장과 어떤 식으로 갈등 해결을 하는지 지켜봐도 상관은 없을 것 같군요. 이 기회에 잘못된 루머도 좀 바로잡고.”
다분히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목을 이리저리 꺾는 지훈을 보는 팀장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지만, 반대로 세정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
세정의 명령에 따라 팀장은 시체 같은 얼굴이 되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정은 죽을죄를 지은 것 같은 표정을 짓는 팀장에게 괜찮다는 뜻으로 고개를 한 번 끄덕여 보였지만 그리 효과는 없는 것 같았다.
묵직한 회의실 문이 닫히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지훈이 널찍한 테이블을 돌아 그녀에게 다가왔다.
드르륵.
바퀴 달린 의자에 앉은 세정이 그를 피하며 뒤로 죽 물러나자 지훈의 미간에 주름이 깊어졌다.
“뭐 하는 거야.”
“카메라 있잖아.”
세정이 천장에 힐끗 시선을 주며 건조하게 답했다.
“뭔 상관이야. 내 공간에서 내 와이프랑 키스를 하든 섹스를 하든.”
지훈이 입술을 비틀며 거침없이 내뱉었다. 세정의 부하 직원이 함께한 자리에서 발휘했던 극도의 인내심은 이미 흔적도 없이 날아가 버린 지 오래였다. 세정이 다시금 그에게서 도망치듯 공간을 벌리며 고개를 저었다.
“난 상관있어. 여기 우리 집 아닌 거 명심해.”
낮게 한숨을 쉰 지훈이 인상을 찌푸린 채 손을 뻗어 인터폰의 버튼을 눌렀다.
- 네, 대표님. 중앙 관리실입니다. 무슨 일이십….
“대표 이사 회의실에 있는 카메라 꺼요.”
상대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손을 뗀 후, 지훈이 뚜벅뚜벅 걸어오며 벌어졌던 공간을 단박에 줄였다. 그리고 그녀의 의자 팔걸이를 양손으로 꽉 잡아 움직이지 못하게 압박한 후, 세정을 그의 시야에 가두었다.
“이제 됐지?”
“대표면 원래 그렇게 마음대로 해도 돼?”
세정이 마침내 그를 보며 길게 한숨을 내뱉는 동시에 미소 지었다. 끓어넘치는 그의 속도 모르고 웃고 있는 그녀를 보자 지훈은 목이 활활 타는 것 같았다.
“당연한 걸 왜 물어.”
“장 팀장 앞에서 욕은 대체 왜 한 건데? 이런 대형 프로젝트는 처음이라서 긴장했을 텐데 네가 그렇게 나와서 얼마나 놀랐겠니?”
세정이 눈을 흘기는 표정마저도 지훈을 흥분시키기에 충분했다.
“강재준인지 뭔지가 네 앞에서 꼬리를 쳤다는 소리를 지껄이는데, 내 성격에 거기서 다 뒤집어엎지 않은 것만 해도 많이 참은 거라고 생각 안 해?”
“그런 식으로 이야기한 게 전혀 아니거든? 그냥 웃자고 한 소리야.”
“그래서 넌 그 이야기 듣고 그 자식한테 웃어 줬어?”
“뭐?”
세정은 기가 차서 가볍게 탄식했지만 그는 심각한 얼굴로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웃었냐고. 강재준 보고.”
“아뇨, 대표님. 취중에 하는 말은 안 믿으니까 나중에 계약서 쓸 때 같은 말 해 줬으면 좋겠다고 매우 사무적으로 말했는걸요.”
그래야 안세정이지. 속으로 생각하면서도 지훈은 도무지 화가 누그러지지 않았다.
“넌 사무적인 표정일 때 섹시해. 집중하고 정색할 때 야하다고.”
“흐음. 역시 웃어넘기는 게 나았으려나?”
“누구 죽는 거 보고 싶어?”
지훈의 목소리가 쫙 갈라졌다. 집중하는 표정도 사람을 긴장시킬 정도로 예쁘지만 표정이 싹 풀리며 환하게 웃는 세정의 모습을 상상만 해도 그는 피가 아래로 몰렸다. 지금도 그녀를 안고 싶어 안달하고 있는 그의 마음도 모르고 세정이 어이없어하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정색하지도 말고, 웃는 것도 안 되고. 그럼 어떻게 했어야 해? 네가 말해 봐.”
아. 당장 얼굴 붙잡고 키스하고 싶다. 지훈은 아랫배에서 치밀어 오르는 욕망을 느끼며 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다음에는 성희롱하지 말고 꺼지라고 얼굴에 술을 끼얹어 버려. 뒤처리는 내가 할 테니까.”
“네에. 잘 알겠습니다.”
세정이 고분고분 대답했다. 지금 그녀에게는 서류에 사인을 받아 내는 일이 무엇보다 급했다. 일부러 생글생글 웃어 가며 그의 기분을 맞추어 주는 노력이 무색하게도, 지훈은 전혀 수그러들 기세가 아니었다. 그가 그녀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입 안의 살을 잘근거리다가 답답한 듯 손목의 커프스를 차례로 풀었다.
“다른 사람 다 써도 그 자식은 안 돼.”
“지훈아.”
세정이 표정을 거두고 심각한 얼굴로 입을 열어 보았지만 지훈은 막무가내였다. 꾹 참으며 자제해 왔던 천박한 욕설이 우아한 입술을 타고 툭 터지듯 흘렀다.
“감히 누구 앞에서 자지를 깐다고? 씨발 새끼가. 다시는 그딴 소리 못 지껄이게 좆을 뭉개 버릴라.”
하아. 내가 이럴 줄 알았지. 세정은 입을 딱 다문 채 뜨끈해지는 이마를 손으로 짚었다. 이미 강재준의 이름이 나온 프레젠테이션 시작부터 치밀어 오르는 화를 꾹꾹 눌러 참는 게 그녀의 눈에 보일 정도였으니 그의 반응을 이해 못 할 것은 아니었다.
오늘 아침, 침대에서 그녀를 끌어안고 목덜미에 얼굴을 문질러 대면서도 “모델이 혹시 서눔 그 새끼는 아니지?”라고 잠에 취해 속삭였던 지훈을 생각하면 그녀를 향한 그의 배신감도 충분히 이해가 되는 것이었다.
그나마 그녀가 오늘 미팅에 희망을 걸었던 이유는 그가 일적인 면에 있어서는 자신의 고집을 꺾어 준다는 점이었다. 대학 시절 헤어지고 수년이 지나 다시 재회한 후, 지훈은 세정이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는지에 대해 파악한 듯했다.
예전에도 그랬듯 그는 습득력이 빨랐다.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싶다는 그녀의 욕망을 인정해 주었고, 일에서 성취감과 행복을 느끼는 그녀를 이해하고 받아들였다. 세정이 회사 사람들과 술자리가 어우러진 회식을 하거나 미팅을 가지는 것을 달갑지 않아 하면서도 입을 꾹 다물어 주었다.
“아, 이런 우연이 다 있을까요.”
광고주가 광고 대행사 사무실 뒷골목에 숨겨진 선술집에 우연히 비를 피해 들어오거나, 갈매기살을 파는 야외 식당 테이블 앞에 우연히 차를 댈 가능성은 과연 몇 퍼센트일까.
지훈은 가끔씩 불쑥 회식 자리에 나타나 그녀와 회사 사람들을 뜨악하게 만들기도 했지만 친절한 미소와 함께 와이프를 잘 부탁드린다며 회식 비용을 결제하는 그에게 딱히 불평을 할 수도 없었다.
“와이프를 이렇게 챙기는데 그런 개 같은 루머는 왜 퍼지는 거야, 대체.”
“광고주가 대행사 회식 자리에 불쑥불쑥 나타나면 좋아할 사람이 있겠어?”
“난 광고주가 아니라 네 남편 자격으로 거기 참석한 건데?”
“언제는 우연이라며.”
“그걸 누가 믿어. 키스하게 이리 와.”
집으로 돌아와 그와 키스하며 키득거리는 시간은 웃기면서도 달콤했다. 세정은 한동안 잠잠했던 지훈이 갑자기 이 정도로 고집을 부리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가 가장 최근 분노했던 것은 반 년 전, 체력 증진을 위해 등록했던 수영장의 남자 회원이 세정에게 보낸 메시지를 우연히 발견했을 때였다.
“여긴… 갑자기 왜 왔어?”
“출근하기 전에 갑자기 와이프가 보고 싶어져서.”
“네가 이 시간에 출근한다고?”
이른 새벽,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벽한 차림으로 스포츠 센터 앞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가 보란 듯이 끌어안고 뺨에 가볍게 입 맞추는 그를 밀어내지 못했던 것은 지훈이 그녀의 귀에 속삭였던 말 때문이었다.
“여기서 밀어내면 입술에 딥키스할 거야. 관객도 많고. 좋네, 아주.”
그뿐일까. 세정이 다니는 수영 초급반에 상담을 빙자해 찾아온 후, 같은 클래스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눈도장을 찍었다. 덕분에 세정에게 가끔 안부 메시지를 보내던 직장인 회원에게서는 자연스레 연락이 끊어졌다.
그녀는 지훈이 오버한 거라고 생각했지만 만약 백번 양보해서 그 남자가 그녀에게 관심이 있었더라면, 지훈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많이 참고 신사적으로 처리한 일이었다.
“사람 열받게 하지 말고 걘 그냥 빼. 내 인내심 테스트 하려는 거 아니면.”
하물며 강재준과는 일로 얽힌 사이이건만 그가 왜 갑자기 이토록 심하게 과민 반응을 보이는 건지 세정은 도무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지훈아. 여보. 강재준은 오래 사귄 애인이 있어요.”
“안세정은 남편 없고?”
달래듯 입을 여는 그녀를 향해 지훈이 무표정하게 되물었다. 도저히 무논리라고밖에 할 수 없는 그의 대꾸에 세정은 말문이 턱 막혔다.
“너, 너 지금 설마 내가 바람이라도 피울 거라고 의심하는 거야?”
“그럴 리가. 네 시력이 심각하게 잘못되지 않은 이상, 나같이 완벽한 유전자를 법적으로 소유한 네가 다른 데 눈 돌릴 순 없겠지.”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어이없는 말을 심각하게 내뱉는 지훈을 보며 세정이 반문했다.
“그럼 뭔데?”
“내 소유에 다른 거지새끼들이 침 흘리는 걸 미연에 방지하고 싶을 뿐이야. 상상만 해도 기분이 더러워지거든.”
이럴 때마다 그녀는 타임머신을 타고 예전 대학 시절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솔직히 감탄이 나올 정도였다.
“도지훈, 너는 어쩜 그렇게 스무 살 때나 지금이나 한결같니.”
“알아. 그때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우월하지.”
지훈이 슈트 재킷을 벗어 테이블 위로 툭 던지듯 걸쳤다. 이마를 드러내어 세팅한 헤어스타일 아래 배치가 완벽한 이목구비는 해가 갈수록 섹시한 매력을 풍겼다. 코앞까지 다가온 지훈이 말없이 고개를 젓는 그녀를 똑바로 응시했다.
“그리고 넌 예나 지금이나 날 등신같이 쩔쩔매게 하는 유일한 상대고.”
낮게 속삭이는 그를 보자 저도 몰래 마른침이 넘어갔다. 뚫어져라 바라보는 그의 눈길에 지금도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은 그녀가 의지로 조절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세정이 후, 하고 짤막하게 한숨을 쉰 후 재빨리 입을 열었다.
“지훈아, 자기야. 이건 그냥 일이잖아….”
뾰족한 콧날이 그녀의 콧등을 부드럽게 스치자 세정의 뒷말이 흐려졌다. 지훈은 상체를 숙여 숨결이 닿을 듯 그녀에게 얼굴을 가까이 한 채, 말없이 세정을 바라보았다. 날카롭게 빠진 눈매 안 자신만만한 눈동자. 그 안에 담긴 때로는 무겁고, 때로는 벅찬 그의 진심. 몸이 얽히는 순간보다 이럴 때가 더 참기 힘들다는 사실을 지훈은 알고 있을까.
“일이라서 그나마 참아 주는 거야. 아니었으면 그 새끼 내 손에 진작 정리됐어. 몰라서 그래?”
인상을 찌푸리는 그의 시선에 빨려 들어갈 것 같았다. 질투의 불길을 활활 태우며 말도 안 되는 트집을 잡는 지훈이 어이가 없으면서도 무척이나 그다웠다.
“그러게. 내 남편 성질을 내가 아는데. 이제 공과 사를 구분할 줄도 알고. 어쩜 이렇게 마음이 넓은지 몰….”
호흡이 얽혔다. 체중을 실어 그녀의 입술을 비집는 지훈의 움직임에 의자가 뒤로 점점 밀려나 벽에 닿았다. 입술을 쭉 빨아들이며 혀를 길게 집어넣자 그의 입술에 립스틱이 엉망으로 번졌지만 늘 그렇듯 그는 상관도 하지 않았다.
“지훈아, 이제 그만….”
“빈정거린 벌이야.”
꽉 낮아진 목소리로 지훈이 속삭임과 동시에 조금 떨어졌던 입술이 다시 붙었다. 제 것같이 익숙하게 혀를 찾아내 뒤섞고 타액을 교환하는 동시에 그녀의 젖가슴을 덥석 잡아 주물렀다.
“으응…!”
뾰족한 콧날로 그녀의 동그란 콧날을 일부러 세게 문지르며 그녀의 호흡을 달아오르게 만들었다.
“하지 마.”
“아무것도 안 했는데 뭘 하지 마.”
커다란 손이 의자 등받이 사이로 쑥 들어오더니 그녀를 번쩍 들어 안았다. 세정은 쇳소리가 나려는 입술을 간신히 닫아 비명을 억눌렀다.
“뭐 하는 거야, 뭐 하는 거야, 이 사이코가 진짜!”
주먹으로 퍽퍽 그의 어깨를 두드렸지만 지훈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엉덩이를 받쳐 들자 폭이 좁은 치마가 허벅지 위까지 올라가며 그의 바지에 그녀의 속옷이 고스란히 닿았다. 흉흉하게 우뚝 솟아 그 윤곽을 확실히 드러내고 있는 아랫도리로 세정의 음부를 찔러 대며 지훈이 거칠게 숨을 내뱉었다.
“세정아, 그냥 회사 때려치울래? 열받아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는데.”
비단 강재준뿐만이 아니라 일을 하며 만나는 수많은 남자들이 세정에게 껄떡거릴 생각만 하면 심장이 펄떡거리며 온몸의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다.
“자꾸 말도 안 되는 소리 할 거야? 밖에 장 팀장 기다리고 있어. 이상한 걸로 회사에서 쓸데없는 소문 도는 거 싫으니까 빨리 내려 줘.”
지훈의 반듯한 이마가 잔뜩 구겨졌다. 바로 이런 것들이 그와 그녀의 차이점이었다. 그에게 항상 최우선 순위에 있는 대상은 세정이었다. 그런 자신과는 달리 늘 다른 것들을 더 신경 쓰는 것 같은 세정을 볼 때마다 지훈은 패배감에 사로잡혔다.
“우리 이혼한다는 개좆같은 소문보다는, 차마 입에 담기가 민망할 정도로 둘이 금슬 좋다더라는 소문이 훨씬 낫지 않아?”
세정이 말없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 안에서 번뜩이는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지훈은 길게 한숨을 쉬며 그녀를 회의실 테이블에 사뿐히 내려 앉혔다.
“만지기만 하자. 그럼.”
“…그 이상은 안 돼.”
한발 물러서는 그녀의 허벅지를 잡아 벌리는 손길에 진득한 욕망이 뚝뚝 떨어졌다.
“그럼 이번 프로젝트는 엎는 거지?”
지훈이 무릎을 굽히며 확인하듯 되물었다. 만지기만 한다고 할 땐 언제고 어느새 치마 속으로 얼굴을 슬며시 들이미는 그의 어깨를 짚으며 세정이 부드럽게 그를 불렀다.
“지훈아.”
“응?”
기대에 찬 그의 얼굴을 보며 그녀가 신중하게 눈썹을 들어 올렸다.
“광고 진짜 잘 나올 거야. 나 믿어 줘.”
“씨발, 진짜….”
실망한 지훈이 인상을 확 썼다. 몸에 저절로 힘이 꽉 들어가는 바람에 그의 손아귀에 부드럽게 잡혀 있던 세정의 스타킹이 찌익 찢어졌다.
“야!”
세정이 기겁해서 버럭 소리를 지르며 그를 밀쳐 냈다. 지훈이 그대로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인상을 찌푸렸다. 기다란 다리를 90도로 세운 채 허탈한 표정을 짓고 있는 모습이 충격이라도 받은 것처럼 보여 기가 다 찼다. 누가 보면 세정이 크게 잘못이라도 한 모양새였다.
“계속 어린애처럼 굴면 나 진짜 가만 안 있어. 앞으로 이런 일 있을 때마다 너랑 싸워야 하는 거, 난 싫다고.”
세정은 진심이 섞인 말투로 심각하게 말을 이었다.
“가만 안 있으면 어떡할 건데.”
굽힌 무릎에 팔꿈치를 대고 머리를 쥐어뜯던 지훈이 그녀를 올려다보며 조금 낮아진 목소리로 물었다. 다투는 건 정말 싫었지만 이번에야말로 그의 버릇을 단단히 고쳐 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정은 의지를 굳히고 냉랭하게 대답했다.
“어쩌긴 뭘 어째, 루머가 사실이 되겠지.”
“뭐?”
충격받은 척을 하던 지훈의 얼굴에서 표정이 서서히 사라졌다. 오랫동안 본 적이 없던 지훈의 맨얼굴이 그대로 드러났다. 날카로운 얼굴에 핏기가 사라지고 꼭 감정이 없는 이처럼 서늘하고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진심으로 지훈이 상처받았을 때 나오는 얼굴이라는 사실을, 세정은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오래전 그녀가 이별을 말했을 때, 겉옷도 입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눈 오는 거리 속으로 떠났던 그때의 얼굴이었다.
“넌…. 그따위 말이 그렇게 쉽게 나와?”
같은 표정으로 입을 여는 그를 보니 마음속에 죄책감이 밀려들었다. 세정은 애써 마음을 강하게 먹었다. 그녀는 자신이 지훈을 믿는 만큼 지훈 역시도 그러해 주었으면 하고 바랐다. 화르륵 타오르는 불꽃같은 사랑 후에는 은은한 열기가 지속되는 안정적인 시간이 찾아올 줄 알았지만, 지훈에게는 불가능한 이야기처럼 보였다.
“내가 지금 쉽게 말하는 거라고 생각해? 도대체 언제까지 그렇게 고집부릴래?”
지훈의 눈동자가 어둠 속으로 침잠했다. 매번 말도 안 되는 사안으로 지훈과 쓸데없는 에너지를 낭비하는 것은 그만하고 싶었다. 어쩌면 이번이 좋은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 몸에 좋은 약은 입에 쓴 법이니까.
“오늘 하루 줄 테니까 잘 생각해 봐.”
세정은 구멍 난 스타킹을 벗어 핸드백에 집어넣은 채,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떼며 지훈의 회사를 벗어났다. 그의 시선이 끝까지 그녀의 뒷모습에 달라붙는 것을 애써 외면하기 힘들었지만 눈을 마주하는 순간 마음이 약해질 것 같아 어쩔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