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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 돌게 만들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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쿵푸벳

08. 돌게 만들지 마

세정은 핼쑥해진 얼굴로 회의실이었던 지훈의 사무실로 들어갔다. 큰 걸음으로 실내를 왔다 갔다 움직이던 그가 그녀가 들어오자마자 창문의 블라인드를 내렸다.

바깥에서 움직이는 사람들의 시선을 완벽하게 차단한 후, 그가 팔짱을 낀 채 세정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회사 때려치운다고?”

세정은 마른침을 삼킨 후, 애써 침착한 얼굴로 그를 마주했다.

“응. 그럴 거야.”

지훈의 잘생긴 미간에 주름이 깊게 팼다. 방금 박 부장에게 세정이 사직서를 냈다는 소식을 들은 후였다.

“누구 맘대로?”

“…광고주가 대행사 직원 인사이동까지 신경 쓸 정도로 한가하니?”

“이죽거리지 말고 묻는 말에 대답해. 누구 맘대로 회사 그만두는 거냐고 물었어.”

지훈이 그녀에게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오는 바람에 세정은 그를 피해 빠르게 걸어 그의 책상 앞에 있는 기다란 소파로 가서 앉았다. 준비했던 서류철을 탁자에 올려놓으며 세정이 입을 열었다.

“진행하고 있는 기획에 차질은 없을 거야. 팀원들한테 확실하게 인수인계할 테니까…!”

슈트를 걸친 지훈의 긴 다리가 눈앞에 보인다 싶더니 세정의 턱이 위로 휙 들렸다. 한 손으로는 소파의 등받이를 짚고, 다른 한 손으로는 그녀의 얼굴을 받쳐 든 채 지훈이 그녀를 보며 눈썹을 들어 올렸다.

“도망가게?”

그의 예리한 질문에 곧바로 대답이 나오지 않아 한 템포 쉰 후, 세정은 간신히 입을 열었다.

“그런 거 아니야.”

“아니기는. 지금 또 도망가려는 거잖아. 나한테서.”

입술을 비뚤게 올려 웃는 지훈의 목소리가 어딘가에 긁힌 듯 거칠었다. 그런 그를 애써 무시한 채 세정은 어렵게 입을 열었다.

“…대행사가 광고주를 이길 수는 없지. 네가 이 회사에 1년에 쏟아붓는 광고비를 생각했을 때 누가 갑인지는 당연하고.”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지훈이 그녀에게 얼굴을 붙였다. 그의 눈매가 가까워질수록 의지와는 다르게 세정의 가슴이 두근두근 빠르게 뛰었다.

“네가 이렇게 회사에서 나한테 들이대는 것도, 갑질이라면 갑질이야. 지금 네 자리에 너 아니라 다른 사람이 와서 나한테 추근거렸으면, 그냥 눈 딱 감고 대충 받아넘겼을지도 모르겠는데….”

지훈의 인상이 순식간에 험악하게 바뀌는 것을 알면서도 세정은 멈추지 않았다.

“너랑은 아니야.”

“마음에도 없는 헛소리 하지 마.”

그의 말에 움찔한 것도 잠시였다. 세정의 속눈썹이 바짝 위로 들렸다.

“네가 내 맘을 어떻게 알아? 누구 맘대로 회사 그만두냐고 물었지? 내 맘대로야. 내가 조직 생활을 해 본 결과 이 상황을 끝낼 수 있는 건 내가 회사를 관두는 것뿐인 것 같아서 결정한 것뿐이야.”

“그렇게 말을 하니까 꼭 나와의 섹스가 싫었던 사람처럼 들리네.”

지훈의 입술이 차갑게 비틀렸다. 어떻게 다시 잡은 기회인데 그에게서 또다시 벗어나려고 하는 눈앞의 그녀에게 화가 나서 미칠 것만 같았다. 그가 비릿하게 웃으며 속삭였다.

“넌 나 거부 못 해.”

세정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녀는 입 안의 살을 꽉 깨물며 결심을 다잡았다.

“그래. 네가 언제 어디서 들이대든, 내 몸은 너 거부 못 할 것 같아. 그래서 떠나려고. 더 큰 사고 일으키기 전에.”

“안세정이 지금 있는 자리까지 올라오려고 얼마나 노력했을지 안 봐도 눈에 뻔한데, 나 때문에 네 청춘을 다 바친 이 회사를 그만둔다고.”

“…….”

지훈이 그녀를 비웃었다.

“…내가 그렇게 싫어?”

“싫어.”

“웃기지 마.”

그녀의 거짓말을 지훈은 쉽게 간파했다. 지훈은 그의 시선을 피하려는 세정의 목덜미를 커다란 손으로 느리게 쓸었다.

“흣….”

단번에 굳어지는 그녀의 몸을 인지하며 그의 손가락이 블라우스에 감춰진 젖가슴 위를 덧그렸다.

“내 손길 하나에 이렇게 반응하면서, 내가 싫다고.”

“하지 마.”

“네 다리 사이에서 축축한 게 흘러나오는 냄새가 내 코끝까지 스치는데, 내가 싫다고.”

그의 말이 사실일 리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세정은 저도 모르게 무릎을 꽉 붙였다. 지훈이 그런 그녀를 앞에 두고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었다.

“네가 싫어도 내가 널 내 옆에 두겠다면 어떡할래.”

“…무슨 말이야?”

세정의 눈동자가 불안에 가늘어졌다. 지훈의 시선이 점점 위험하게 짙어지고 있었다.

“회사 때려치우려면 때려치워. 맘대로 해. 네가 가는 곳 어디든 따라다니면서 내가 너 가지겠다면, 너 어쩔래.”

“도망갈… 흡…!”

그녀의 입술이 그에게 단번에 먹혔다. 거칠게 빤 후 떨어지며 그가 차가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 돌게 만들지 마.”

목소리는 소름 끼치게 잔인했지만 시커먼 눈동자에는 이글거리는 불꽃이 튀었다. 지훈이 그녀가 앉아 있는 소파로 올라왔고 순식간에 세정의 몸이 뒤집혔다.

“뭐… 뭐 하는 거야… 흣….”

갑자기 엎드린 자세가 된 그녀의 뒤에서 지훈이 타이트한 스커트를 엉덩이 위로 말아 올렸다. 반항할 새도 없이 지훈이 세정의 팬티 위를 혀로 핥았다. 얇은 옷감을 통해 축축하고 뜨거운 혀가 그대로 느껴졌다. 바들바들 떨리는 세정의 허벅지 안쪽에도 그의 입술이 닿았다. 여린 살갗이 쭉 빨렸다가 떨어지자 세정의 입술에서 희미한 애원이 흘렀다.

“안 돼, 지훈아. 여기서 이러지 마.”

“저번에도 말했지. 난 원래 안 되는 거 없다고. 널 보면서 어디서나 안고 싶고 키스하고 싶은 걸 안간힘을 쓰면서 참고 있는데 날 폭발하게 만든 건 바로 너야.”

기다란 중지가 그녀의 팬티 위 음핵과 질구를 쓸어내렸다 올리며 마찰했다. 울컥, 하며 뜨거운 것이 막을 새도 없이 그녀의 몸 안에서 흘러내렸다.

“아…. 흣…!”

세정은 가죽 소파를 그러쥐고 앞으로 도망가려 했지만 지훈이 더 빨랐다. 애액으로 흥건한 팬티가 그의 손에 의해 단박에 아래로 내려갔다.

“이렇게 나만 보면 좋아서 젖는데, 도망을 가시겠다고?”

“하아….”

부끄러운 자세로 그에게 음부를 내보인 채 세정이 이를 악물고 신음을 참았다. 지훈이 말할 때마다 그의 뜨거운 숨결이 질구에 닿아 의지와는 달리 몸속 깊은 곳의 근육이 움찔거렸다.

“세정아. 난 이 회사가 아니라 어디에서도 널 안을 수 있어. 그게 단지 내가 내 위치를 이용해서 그런 거라고 생각해? 네가 날 거부할 수 없는 이유가 그것 때문이라고 생각해?”

지훈이 하아, 하고 뜨거운 숨을 그녀의 음부에 뱉으며 지독하게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착각하지 마.”

“흡…!”

그의 혀가 그녀의 질과 회음부, 항문을 동시에 쓸었다. 세정은 울음 섞인 신음을 간신히 참으며 앞으로 무너져 내리려고 했지만 그것마저 여의치 않았다.

지훈은 그녀의 양 허벅지를 틀어쥔 채로 풍만한 엉덩이 골 사이에 얼굴을 박았다. 그는 치덕거리며 혀에 달라붙는 애액을 음미하듯 빨았다.

“지… 지훈아… 제발.”

“소리 질러 봐. 바깥에 있는 책상이 몇 개더라? 한 오십 개 되나? 구해 달라고 소리쳐 봐. 그럼 멈출게. 싫다고, 저리 꺼지라고 한번 악을 써 봐. 그럼 너한테서 떨어져 줄게. 말로 하는 것보다 실제로 보여 주는 게 더 낫잖아. 도지훈 개씨발 새끼가 광고주 갑질도 모자라서 너한테 발정이 나서 강제로 덮쳤다고. 그래서 사표 쓰는 거라고, 거하게 나한테 엿 한번 먹여 봐.”

세정은 이를 악문 채 고개를 흔들었다. 그럴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녀 자신의 안위와는 별개로 세정은 지훈을 난처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이 그와의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면 더욱 그를 밀어낼 수가 없었다. 이별을 인지해서인지 그의 손길에 단박에 젖어 드는 세정의 몸뚱이 역시 아프도록 그를 원하고 있었다. 지훈이 그녀의 뒤에서 복부를 감아 올려 몸을 겹치며 귓가에 속삭였다.

“안 그럼, 나 지금 너한테 박을 거야.”

벨트 버클이 끌러지는 소리가 났다.

“나한테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는 지금뿐이야.”

지퍼가 내려가는 소리가 똑똑하게 들렸다. 엉망진창으로 발기한 그의 물건이 세정의 속살에 닿자 그녀의 여린 어깨가 움찔거렸다.

“…못 하겠지?”

지훈이 그녀의 귀 뒤를 핥으며 속삭였다.

“협상은 결렬이야.”

말과 동시에 그의 성기가 그녀의 속살을 비집었다.

“흑…!”

단번에 끝까지 밀고 들어온 지훈이 길게 숨을 내쉬며 그녀의 가슴을 주물럭거렸다. 퍽, 하고 치고 들어오는 움직임에 세정의 내벽이 날뛰며 그를 반기듯 조여들자 지훈의 잇새에서 한숨이 샜다.

“내가 아직도 스물한 살 애송이라고 생각해? 착각하지 마.”

“흣, 아흣!”

이른 오전, 광고주가 버티고 있는 회의실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예상할 수 있는 직원은 아무도 없었다. 퍽, 퍽, 하고 젖은 소음이 피어났다. 살과 살이 부딪히면서 애액이 끈적하게 그녀의 허벅지를 타고 흐르자 성난 페니스가 들락이는 움직임이 수월해졌다.

세정은 이를 꽉 깨물고 신음을 참았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수십 쌍의 눈과 귀가 두려웠다. 지훈은 그런 그녀를 마치 시험이라도 하듯 뒤에서 거칠게 몰아치듯 그녀를 박아 대고 있었다.

“그때는 등신처럼 널 보냈었지, 나도 자존심이란 게 있었거든. 어떻게 네가 나 같은 남자를 거부할 수 있는지 인정할 수가 없었거든. 하아….”

지훈이 그녀의 골반을 붙잡고 사정없이 그에게로 내려찍으며 거친 숨을 내쉬었다.

“우리가 연애했던 그 짧은 기간만큼의 시간만 지나가면, 널 잊을 수 있을 줄 알았거든. 근데… 씨발… 말도 안 되는 멍청한 착각이었어.”

“흑, 흐읏! 아흑!”

박아 오는 세기가 너무 강해 저절로 무릎이 꺾였다. 그 와중에 성난 성기는 세정의 민감한 부분만을 정통으로 찔러 대고 있었다. 방광까지 자극되어 당장이라도 오줌을 쌀 것 같았다. 세정은 뒤를 돌아보며 울먹이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지훈아… 흑….”

눈물 젖은 그녀의 얼굴을 보는 순간 지훈은 참을 수가 없었다. 한 갈래로 바짝 올려 묶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손으로 돌려 꽉 움켜쥐고 세정의 입술에 자신을 묻었다.

“흐음!”

지훈은 그녀를 원하는 만큼 혀를 쭉쭉 빨고, 타액을 뒤섞으며 허리를 쳐 댔다. 세정이 자근자근 깨물리며 쾌락과 불안감이 뒤섞인 신음을 입술 새로 토해 냈다.

먼지 한 점 내려앉지 않은 가죽 소파에 애액이 투두둑, 떨어지고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깎아 놓은 것 같은 지훈의 옆얼굴에도 작은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흣!”

퍽, 하고 깊숙이 허리를 움직여 치고 들어가자 세정의 온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세정은 오르가슴 직전이었다. 그는 세정이 절정에 오르는 순간을 매우 잘 알았다. 손을 뻗어 그녀의 음핵을 빠르게 자극하며 세정을 쾌락의 낭떠러지 아래로 밀어 떨어뜨렸다.

“넌 그냥 날 사랑하는 널 인정하면 돼. 그럼 모든 게 편해져.”

“아, 응! 아읏!”

숨이 막히게 조여 오는 비부를 느끼며 지훈은 그녀의 등에 이마를 묻고 인상을 엉망으로 찌푸렸다. 지훈의 허리가 저절로 미친 듯이 움직이며 이미 절정에 오른 세정을 끝까지 몰아붙였다.

세정은 양손으로 제 입을 틀어막았지만 그 사이에서 높은 신음이 새어 나오는 것은 막을 수가 없었다. 그의 손길에 속절없이 흔들리며 긴 절정에 몸을 떠는 세정의 뒤에서 지훈이 짐승같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하…!”

쿡, 눌러 박으며 그녀의 내벽 깊숙한 곳에 지훈이 사정했다. 힘이 빠진 그녀가 소파 위로 엎어지듯 쓰러졌다. 지훈이 그녀를 끌어안고 괴로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나는 아직도, 너를 사랑해.”

그녀의 머릿속이 깜깜해졌다. 사표를 쓰고 회사를 그만두는 일이 지훈을 자극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몰랐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에게 다른 선택권은 없었다.

이런 식으로 계속 지훈을 보게 된다면 세정은 완벽하게 무너질 수도 있었다. 지훈은 지금 그녀에게 마지막 패까지 꺼내 들며 매달리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가 그녀에게 사랑한다고 말로 명백히 표현한 것은 처음이었다.

그리고 그 말에 가슴이 미치도록 뛰는 것은 그녀가 이성으로 제어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어렸던 그녀가 그렇게도 그의 입으로 듣고 싶어 했던 말이었다.

세정은 눈을 감고 입술을 아프도록 꽉 깨물었다.

“네 수준에 맞게 놀아, 아가씨.”

다시 나타난 그를 보며 예전의 기억을 수백 번 곱씹었다. 오래전 그의 가족이 그녀에게 말했듯, 지훈은 그녀의 수준에 맞는 상대가 아니었다.

어렸던 그녀가 지훈을 밀어낼 수 있었듯이 지금도 다르지 않을 거라 생각했지만 착각이었다. 그가 그녀의 앞에 다시 나타난 지 채 한 달도 안 된 이 시점에서 세정은 엉망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막무가내로 그녀를 안아 오는 지훈을 막아 내지 못했던 것 역시 마찬가지였다. 처음은 실수라 치부할 수 있었지만 그 다음은 아니었다. 뒤에서 그녀를 안고 숨을 고르는 지훈의 뜨거운 열기가 옷자락을 넘어 그녀의 등을 타고 번져 왔다.

“섹스가 끝나도 네가 이렇게 날 꽉 안고 있으면, 왠지 감동이야.”

“왜? 내가 너무 끝내줘서?”

“아니. 도지훈이 단지 꽉 찬 정액을 정기적으로 배출하기 위해서 날 만나는 건 아닌 것 같아서.”

“하루에 딸도 두 번 이상 쳐 본 적 없어. 근데 너랑은 몇 번이고 섹스할 수 있을 것 같아. 말 나온 김에 기록 한번 세워 볼래?”

“…진짜 짐승 같아.”

“꼼지락거리지 마. 또 섰잖아.”

그와 함께 나누었던 바보 같은 대화들이 모조리 떠올랐다. 잊고 지내려고 노력했고, 다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었다.

세정은 그를 하나도 잊지 못했다.

그녀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던 그에 대한 그리움이 얼마만큼 컸는지를 자각하는 순간 눈물이 터져 나왔다. 이래서는 그에게 매달리고 말 것 같았다.

그녀가 오랜 시간 동안 간신히 붙잡고 있었던 현실을 송두리째 뒤흔들고 마는 도지훈에게 과거에는 말하지 못했던 진심을 몽땅 말해 버릴 것 같았다.

널 받아들이기에는 네가 가진 것들이 너무 많아서 그 곁에 서기가 부담스러워 그럴 수가 없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속물처럼 네가 날 잡아 주기를 원하는지도 모르겠다고.

작게 흔들리는 그녀의 어깨를 느끼고 지훈이 몸을 천천히 떼어 냈다.

“…세정아.”

세정은 눈물 어린 눈가를 훔치며 소파에서 일어났다. 엉망으로 젖어 허벅지 아래로 내려간 팬티를 다시 올리고 스커트를 내렸다. 소파에 등을 기댄 채 헝클어진 머리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지훈을 마주했다.

버클은 풀려 있고 바지 지퍼는 내려간 흐트러진 차림에도 초라해 보이지 않는다. 그는 늘 그렇게 완벽하고 자신감이 넘치는 모습이었다. 세정은 입술을 깨물었다.

허울뿐인 마지막 자존심이라고 해도 상관없다. 그러니 내가 스스로 너를 떠날 수 있게 해 줘. 유아독존인 도지훈이 유일하게 져 주는 사람이 안세정이라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충분해.

“억지로 하니까 좋니?”

“…그래서 못 느꼈어?”

지훈이 턱을 치켜들며 오만함이 떨어지는 목소리로 덧붙였다.

“너도 갔잖아. 나만 좋았던 거 아니잖아?”

세정은 립스틱이 번진 입술을 손등으로 훔쳤다.

“넌 지금 그게 중요하다고 생각해?”

“그럼 뭐가 중요한데. 섹스에서 그것보다 중요한 게 어디 있는데.”

그녀의 눈에 다시금 눈물이 번졌다. 그녀가 지훈의 몸에 반응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가 그녀를 묶어 두고 억지로 젖지도 않은 속살을 비집고 들어오지 않는 이상.

그리고 지훈이 세정에게 그러지 않으리라는 것은 그녀가 가장 잘 알았다. 지훈의 섹스는 모조리 그녀와 함께 알아내며 배운 것이었고, 그는 예전과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다.

“넣기 전에 흥분시켜 줘. 응. 좋아. 좋아, 지훈아.”

“도지훈. 그렇게 막무가내로 너 혼자만 즐기려면 차라리 자위를 하는 게 낫다고 생각 안 해?”

“섹스가 끝나고 네가 날 끌어안으면 따뜻해. 지훈아, 난 추운 게 싫더라.”

“지훈아, 내가 절정에 오르려고 할 땐 내 귀에 달콤한 말을 속삭여 줘.”

지훈이 그녀를 보며 인상을 쓴 얼굴로 숨을 들이쉬었다.

“그럼 대체 뭐가 중요한 거냐고 물었어.”

세정은 눈물을 애써 참으며 그에게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넌 진짜 하나도 안 변했다. 변한 것처럼 행동하지만 아직도 내 눈에 넌 애송이고, 여자 기분은 생각도 안 하는 막무가내야.”

“…….”

“날 사랑한다고 했니? 그럼 더 이상 나 힘들고 곤란하게 하지 말아 줘.”

“…그게 네 대답이야?”

지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응. 사표는 일주일 뒤에 수리될 거야. 그동안 밀렸던 휴가 쓸 거니까 출근하는 일도 없을 거고.”

“세정아.”

“너는 네 인생 살고, 나는 내 인생 사는 거야. 내가 예전에 너 찼던 거, 내가 직장 그만두는 걸로 용서해. 너한테는 별거 아니겠지만 나한테는 이거 굉장히 큰일이거든.”

“안세정!”

그가 버럭 소리를 쳤다.

“너, 지금 나 버리고 가면 정말로 끝이야. 두 번 차이는 일, 내가 감당하고 너 용서할 거라고 생각하지 마.”

지훈의 목소리가 떨렸다. 세정은 멈칫했지만 문 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지훈이 초조한 손짓으로 그의 머리칼을 움켜쥐었다.

“나 사랑하잖아. 너. 그냥 나만 보고 올 순 없어?”

지훈은 아프게 중얼거렸다. 6년 전, 세정이 이별을 말했을 때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난생처음, 미치도록 좋아했던 여자가 지훈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그를 밀어냈을 때 그는 자살 충동까지 느꼈다.

처음에는 화가 났고 나중에는 자괴감이 들었다. 그의 연애를 달가워하지 않던 가족 중 누군가가 그녀를 만나서 지루하고 재미없는 일을 벌였다고 생각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를 더욱 화나게 만든 것은 세정이 겨우 그따위 협박 혹은 구슬림에 넘어가 그를 놓기로 결심했다는 것에 있었다.

그녀는 평범하게 행복한 삶을 원한다고 말했다. 재벌인 그의 배경이 버겁다면 지훈은 다 내던지고 그녀와 함께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의 능력을 믿을 수 없다며 밀어냈다. 그가 가진 배경을 뺀 도지훈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라며, 따라서 세정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없다고 그의 가슴에 대못을 박았다.

억울하고 분했지만 더 많이 좋아하는 사람이 약자였다. 그는 도저히 그녀와의 이별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지난 시간 동안 이를 악물고 그녀의 앞에 다시 나타날 준비를 했다. 이제 다시는 그의 손을 놓을 수 없게 하려고 가능한 모든 수를 다 써서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위치에서 그녀의 앞에 나타났다.

세정이 그녀의 일을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하는지 알고 있는 그였다. 그런 그녀가 회사를 그만두면서까지 그를 밀어내려고 하는 것이다.

“나 하나만 생각하고, 나한테 올 수는 없는 거야?”

지훈이 내뱉는 아픈 말투에 세정의 가슴이 쿡쿡 찔린 듯 시려 왔다. 그녀는 뒤를 돌지 않았다. 숨 막히게 짙은 그의 시선을 마주하면 결심했던 모든 것들이 한꺼번에 무너져 버릴 것 같았다.

“나는 가능한데, 너한테는 그게 불가능해?”

그의 말투 하나하나가 그녀의 발길을 잡아끌었다. 스물한 살의 도지훈은 애원하는 법을 몰랐지만 지금의 그는 달랐다. 그리고 그것이 그녀가 그를 떠나는 것을 더욱 힘들게 만들었다.

“마지막으로 부탁이 있어.”

뒤통수에 떨어지는 그의 묵직한 시선에 목덜미가 움츠러드는 것 같았다. 세정은 그를 보지도 않고 낮게 내뱉었다.

“우리 사적인 감정, 앞으로 남은 일에 연관시키지 말아 줘. 회사에 폐 끼치고 싶지 않으니까.”

그녀는 잠시 머뭇하다 결국 문을 열었다. 높다란 하이힐이 흔들리며 앞으로 움직였다.

그 옛날, 그녀가 처음 그의 집에 갔던 날이 떠올랐다. 닫히려는 엘리베이터에서 지훈이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을 때, 세정은 기묘한 기분에 사로잡혔었다.

한 발짝 내딛기가 힘이 들었던 것은 그때 이미 그녀가 그가 살고 있는 위험한 세계와 편안한 현실의 경계에 서 있다는 사실을 직감했기 때문이었는지도 몰랐다.

그녀는 결국 지훈의 손을 잡지 않고 스스로 그의 세계로 걸어 들어갔다. 모든 것은 그녀가 결정한 일이었기 때문에 후회할 수도 없었다.

물과 기름처럼 섞이기 힘든 세상에 서로가 살고 있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어렸으니까 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세상을 알아 버린 지금, 그를 사랑해서 견뎌 내야 하는 모든 것들을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세정은 강하지 못했다.

회의실의 문이 닫혔다. 단지 그가 있는 세상에서 빠져나왔을 뿐인데, 허탈감과 상실감이 그녀의 온몸을 덮쳤다.

쨍그랑.

지훈이 있는 회의실 안에서 뭔가가 깨지고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세정에게 쏠렸던 시선들이 그가 있는 사무실로 향하는 것을 보며, 그녀는 웅성거리는 공간을 빠져나왔다.

건물을 나서는데 뾰족한 햇살에 눈이 부셨다. 따가운 눈가를 훔치는 그녀의 손등에 물기가 짙었다.

***

지훈이 테이블 위에 엎드려 세정의 손을 만지작거렸다.

“방해하지 말고.”

세정이 전공책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집중해서 뾰족하게 오므라드는 그녀의 입술을 보며 지훈이 속삭였다.

“섹스하고 싶다.”

“죽을래?”

세정이 그제야 동그란 눈을 부릅뜨며 그를 보았다. 그제야 그녀의 주의를 끄는 데 성공한 지훈이 기다란 제 팔에 옆얼굴을 기대고서 소리 없이 웃었다. 이를 드러내고 웃는 모습이 햇살에 빛났다. 세정은 저도 모르게 두근거리는 심장을 느끼며 애써 표정을 갈무리했다.

“공공장소에서 이상한 말 하지 말라고 했어, 진짜.”

“크게 말하지도 않았잖아. 어차피 구석에 처박혀 있어서 잘 들리지도 않아.”

지훈이 그녀의 손가락을 입술에 가져가 잘근거리며 중얼댔다. 그와 사귄 지는 벌써 1년이 넘었다. 1주년을 맞아 그와 함께 제주도로 여행도 다녀왔다.

지훈은 지중해 쪽 휴양지를 가고 싶어 했지만 세정은 그렇게 멀리 여행을 갈 시간이 없다고 그의 제안을 딱 잘랐다.

차선책으로 선택한 것이 제주도였다. 처음 가 본 섬은 근사했다. 호텔에 틀어박혀 하루 종일 섹스만 하러 온 것같이 굴었던 지훈을 끌고 이른 새벽에 한라산을 등반했고 아침에 떠오르는 해를 함께 보았다.

세정이 운전대를 잡고 렌트한 차로 해안 도로를 신나게 달렸다. 지훈은 조수석에서 긴 다리를 앞에 올리고 선글라스를 낀 채, 속력을 더 내 보라며 곁에서 소리를 질러 댔다.

장롱면허 신세를 탈출하게 해 주겠다고 지훈이 서울에서도 운전 연습을 자주 시킨 덕에 세정은 자신 있게 달릴 수 있었다. 그들의 첫 여행은 고스란히 사진과 동영상에 담겼다.

지훈은 틈만 나면 그녀의 사진을 찍었다. 휴대폰 용량이 모자랄 정도였다. 그의 사진첩에는 온통 세정의 모습으로 가득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정작 사진 찍히는 것을 싫어했는데, 사진이 그의 실물을 완전히 담아낼 수 없다는 터무니없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런 지훈에게 예외가 있다면 침대 위에서였다. 그들은 섹스하면서 그녀의 휴대폰으로 함께 영상을 찍고 그것을 돌려 보며 또다시 섹스를 했다.

가끔은 세정이 그의 위에 올라타 움직이면서 지훈에게 렌즈를 들이댈 때도 있었다. 그러면 지훈은 킬킬거리며 보란 듯이 음란한 말을 더욱 심하게 지껄이곤 했다.

“더 세게 들썩거려 봐. 내 젖꼭지도 씹어 봐.”

결국 웃음보가 터진 세정이 그의 위에 무너지고 지훈이 그녀를 휘몰아치듯 박아 대는 것이 그들의 일상이었다.

거친 정사가 끝나면 세정은 그의 셔츠를 걸친 채 키득거리며 영상을 삭제하고, 지훈은 나체로 주방에서 그녀를 위해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요리인 라면을 끓여 주었다. 거칠고 긴 섹스 후에 먹는 라면은 말 그대로 꿀맛이었다.

세정의 일상에 그가 스며든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녀는 많은 시간을 그의 아파트에서 보냈다. 그것은 물론 지훈의 요구에 따른 것이었다.

함께 있는 시간이 너무 부족하다는 그의 성화에 과외 아르바이트를 하나 줄여야 했지만 경제적으로 큰 타격은 없었다. 데이트 비용이나 식비는 모두 지훈이 냈으므로 오히려 아르바이트를 두 개 뛰며 바쁘게 지낼 때보다 더 잘 먹고 다니는 느낌이었다.

할머니의 가게에는 병석에 누운 남편 대신 일터로 나온 주방 아주머니와 미혼모 아르바이트생이 들어왔다.

월급을 주는 사람은 물론 지훈이었다. 그가 어디서 어떻게 구했는지 모르겠지만 낡은 가게를 쓸고 닦고 광을 내며 제 가게처럼 열심히 일해 주는 사람들은 일을 하게 해 주셔서 감사하다며, 할머니와 세정에게까지 연신 고개를 숙였다.

지훈은 세정이 어떤 것에 약한지, 어떤 상황을 거절할 수 없는지 빠른 속도로 간파하고 있었다. 네가 눈 한번 딱 감으면 되는데, 저 사람들 일자리를 뺏을 거냐고 묻는 지훈의 앞에서 자존심을 더 세울 수는 없는 일이었다.

“…고마워. 장사 수입이 조금만 더 늘어나면 그 사람들 월급은 내가….”

“응. 몸으로 갚아.”

“뭐?”

“섹스 열 번으로 까 줄게. 대신 내가 하고 싶을 때, 언제, 어디서나. 장소 불문하고.”

“바깥에서 변태 같은 말 제발 하지 말라고 했지?”

세정에게 등짝을 세게 맞으면서도 그는 좋다고 킬킬거리며 그녀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바로 지금처럼.

“세정아.”

“왜.”

“그때 약속한 섹스 열 번 있잖아.”

동그란 안경을 코끝에 걸치고 머리를 하나로 묶어 촘촘하게 땋은 세정이 귀엽게 인상을 쓰며 그를 노려보았다.

“이미 그 계산은 오래전에 끝났거든요?”

지훈이 흠, 하고 고개를 갸웃했다.

“그때 차 세우고 한 게 아홉 번째 아니었나?”

“야. 그게 마지막이었잖아. 어디서 약을 팔고 있는 거야?”

그는 밖에서는 싫다고 학을 떼는 그녀에게 키스를 퍼부으며 끝까지 흥분시켰다. 그날 결국 한강 변에 차를 세워 놓고 안아 놓고선 시치미를 떼는 것이 웃기지도 않았다.

“아… 안 넘어가네.”

손에 쪽쪽, 뽀뽀를 하다 이제는 아예 테이블 아래로 손을 떨어뜨려 허벅지를 더듬어 오는 그를 보며 세정은 난감해져 얼굴만 붉혔다.

공공장소에서 애정 행각을 멈추지 않는 지훈 때문에 카페나 레스토랑에서는 항상 사람들이 잘 보이지 않는 구석 자리에 앉아야 했다.

“내가 그쪽으로 갈까?”

아예 옆자리에서 편하게 그녀를 주물럭거리겠다는 소리나 다름없었다. 세정이 손바닥을 모로 세워 엑스 자를 만들었다.

“절대 안 돼.”

“그럼 나가자. 모텔이라도 가자. 안 되겠어.”

지훈이 인상을 쓰며 그녀의 손을 끌었다. 학교 앞에서 조금만 걸으면 즐비한 게 모텔촌이었다. 가끔 공강 시간에 지훈이 도저히 못 참겠다며 그녀를 데리고 간 적도 있었다.

“됐거든요. 또 사람을 얼마나 기운 빠지게 하려고 그래. 조금 있으면 강의 시작이야. 어차피 시간도 없어. 참아.”

세정이 그의 손등을 찰싹, 두드리자 지훈이 끄응 하더니 잘 세팅된 머리카락을 신경질적으로 헝클었다. 그래도 예전처럼 막무가내로 굴지 않는 것을 보면 그도 많이 인간이 되었다고 생각하며 세정은 미소를 감추었다.

“너 클럽에서 만난 애 S식품 손자라며. 걔 하나 잡으면 인생 피는 거 아냐?”

뒷자리에 자리를 잡은 여자들의 수다에 세정과 지훈이 동시에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구석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 자리에 다른 이들이 앉아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완전 꽝. 아침에 일어나 보니까 돈은 둘째 치고 얼굴이 진짜 너무 아니었어.”

지훈이 픽 웃으며 눈썹을 들어 올리며 작게 속삭였다.

“세정아, 넌 좋겠다.”

“이상한 말 할 거면 그냥 하지 마, 알았지?”

“난 돈도 많고 얼굴도 잘생겼잖아.”

세정은 하, 하고 소리 없이 턱을 아래로 떨어뜨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지훈의 사전에는 겸손이나 겸양 따위의 단어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아… 안세정 걔는 도지훈을 어떻게 꼬셨지, 대체?”

뒷자리에 앉은 여자들에게서 흘러나온 그들의 이름에 세정의 얼굴이 굳었다. 지훈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눈썹을 들어 올렸고, 뒤에서는 계속 말소리가 이어졌다.

“뻔하지 뭐. 몸으로 들이대지 않았을까? 공강 시간에 도지훈 손 잡고 모텔 들어가는 거 본 애들이 한둘도 아니고. 도지훈이 걔한테 용돈 주는 거 유명하다잖아.”

“얌전한 고양이인 척, 고고한 척 혼자 다 하더니…. 안세정, 스폰서 하나 잘 잡은 거지, 뭐. 창녀야 뭐야?”

순식간에 창백해진 세정의 입술이 바들바들 떨렸다. 펜을 쥐고 있는 그녀의 손 역시 마찬가지였다. 세정은 눈을 깜빡이며 애써 책으로 시선을 내렸다.

“학점도 잘 받으려고 교수한테 알랑거리는 거 짜증 나 죽겠는데. 설마 교수랑도 잔 거 아냐?”

후두둑, 눈물이 떨어져 그녀의 동그란 안경알에 자국을 남겼다. 입술을 아프게 깨물어 보았지만 급하게 들이마시는 숨을 참을 수가 없었다. 펜을 내려놓고 소리 내지 않으려 손으로 입가를 가리는 그녀의 숨결에 울음이 번졌다.

“저것들이 진짜….”

지훈이 이를 뿌득 갈다가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것은 그때였다. 그가 휙 뒤를 돌아 테이블로 다가가자 대화하고 있던 여자들이 화들짝 놀랐다. 그들은 지훈과 세정의 학과 동기였다.

“어머, 도지훈….”

“야! 이 개 같은 년들아.”

지훈이 숨을 몰아쉬며 내뱉자 테이블에 앉아 있는 여자들의 눈이 경악에 휘둥그레졌다.

“뭐, 뭐라고?!”

다가온 세정이 지훈의 팔을 세게 잡아당겼다.

“도지훈, 하지 마.”

그에게 욕설을 들은 여자들의 입술이 파들파들 떨렸다.

“너…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니야?”

한 명은 그나마 지훈을 노려보며 반박했지만 다른 한쪽은 눈을 부라리고 있는 지훈의 기세에 눌려 입도 뻥긋하지 못하고 있었다. 지훈이 그들을 죽일 기세로 노려보았다.

“심해? 말이 심해? 니들이 방금 지껄인 말은 심하지 않아?”

그가 테이블 앞으로 한 발자국 더 가까이 다가섰다. 세정이 목소리를 높였지만 지훈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지훈아, 그만!”

“교수한테 뭐가 어쩌고 어째? 니들이 봤어? 니들이 직접 봤냐고!”

지훈은 참을 수 없이 화가 났다.

“하아…. 스폰서? 창녀? 씨발…. 어떻게 그따위 말을 지껄여. 어디서… 감히 누구 여자한테!”

그에게는 세정이 너무나 소중해 말 한마디, 감정 한 조각 전하기가 어려운데, 그러한 여자에게 쓰레기 같은 폭언을 듣게 한 것이 견딜 수가 없어 가슴속에 불길이 치솟았다. 그의 거친 손길에 테이블에 있던 물잔이 엎어졌다.

“내 애인한테 내가 돈을 퍼붓건 집을 사주건 니들이 무슨 상관이야, 이 씨발년들아!”

목이 긴 유리잔이 그의 손에 잡혀 바닥에 내팽개쳐지자 잔이 산산조각으로 깨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아악!”

여자들이 겁에 질려 소리를 질렀다.

“신고… 누가 신고 좀 해 주세요!”

멀리서 직원이 달려와 그를 막았지만 지훈은 눈이 완전히 돌아 막무가내였다.

“말이면 단 줄 알아? 그딴 헛소리 못 지껄이게 입을 찢어 버려야겠네.”

“그만해! 제발!”

결국 세정이 악을 쓰며 소리를 질렀다. 지훈이 숨을 몰아쉬며 그녀를 보았다. 바들바들 떨리는 목소리가 그녀의 입술에서 샜다.

“그만…. 그만 좀 하라고…!”

세정은 그 자리에 웅크리고 주저앉아 얼굴을 감쌌다. 그녀는 차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은 단지 분노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동안 작게, 혹은 크게 지훈이 할머니의 가게를 도와줄 때마다 그의 진심을 알기에 받아들이면서도 마음 한구석에는 빚을 지고 있다는 기분이 있었다.

데이트를 할 때마다 모든 비용을 지훈이 낼 때도 가슴속에서 고개를 비죽 쳐드는 열등감을 애써 눌러야 했다.

사귀는 사이에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며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않으려 애를 써 왔지만, 그녀의 내면에서는 못 이기는 척 그의 금전적 지원을 받아들이는 자신에 대한 죄의식이 싹을 틔워 자라나고 있었던 것이다.

두려워서 모른 척하고 묻어 두려고 했던 실체를 정면으로 마주한 기분이었다.

“흐흑… 으흐윽….”

나는 창녀가 아니야. 지훈이랑 나는 그런 거 아니야.

당당하게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없는 말들이 울음이 되어 벌어진 손가락 사이로 새어 나왔다. 세정은 그들이 보통 연인들처럼 예쁘게 사귀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착각이었고 자기 최면이었다.

그녀가 지훈과 사귀기 전, 가장 주저했던 이유는 바로 이런 것들이었다. 그와는 처음부터 시작해서는 안 되는 사이였을지도 몰랐다.

학교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유명 인사인 도지훈, 그리고 그런 그의 곁에 선 자신이 다른 이들에게 객관적으로 비치는 모습은 아까 그녀들이 했던 말과 그리 다르지 않을 것이다.

재벌인 도지훈에게 대가를 바라고 붙은 꽃뱀 같은 안세정.

“왜 울어, 네가 뭘 잘못했다고 울어?”

지훈이 무릎을 굽혀 앉아 그녀의 어깨를 붙잡고 소리를 질렀다.

“아니라고 말해. 소리 지르고 뺨 때려. 못 하겠어? 그럼 내가 해. 내가 네 대신 한다고. 나 눈에 뵈는 거 하나도 없어. 너 모욕한 사람들 남자고 여자고 그런 거 나 안 따진다고!”

“으흑….”

세정은 그의 손을 꽉 붙잡고 서럽게 흐느낄 뿐이었다. 커피를 마시고 있던 다른 이들이 웅성거리며 그들을 둘러쌌다. 그녀는 오르고 싶지 않은 무대에 억지로 오른 광대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창밖에서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울렸다. 세정은 결국 그들과 함께 나란히 경찰차를 타고 연행되었다.

“언어폭력도 폭력입니다. 고소당할 수 있어요, 학생.”

점잖게 말을 꺼내는 형사를 노려보며 지훈이 느리게 입을 열었다.

“제 여자 친구한테 저것들이 지껄인 말은 비폭력적이었습니까?”

“뭐요?”

“형사님은 와이프가 창녀 소리 들으면 어떻게 하실 거냐고 물었습니다.”

“저희는 그런 말 한 적 없거든요?”

상대 여자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반박했다. 세정은 푹 숙인 고개를 차마 들 수가 없어 아래로 떨어뜨렸다. 그들의 앞에서 경찰이 손으로 탁탁 책상을 두드렸다.

“자자, 조용히들 하시고. 학생. 지금 학생 때문에 저분들이 신체적 위협을 느낀 상황입니다. 뭐 이야기 들어 보니까 같은 과 동기인 것 같은데 서로 사과하고 합의하시죠. 일 크게 만들어 봤자 좋을 거 없잖아요, 예?”

짜증과 피로가 섞인 경찰의 말에 지훈이 분노가 섞인 목소리로 대꾸했다.

“합의 필요 없으면, 아까 못 했던 거 지금 이어서 해도 됩니까?”

“학생!”

지훈의 변호사가 등장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지훈과 세정은 동시에 경찰서를 나설 수 있었다. 침착하고 이성적으로 보이는 그의 변호사가 그와 시비가 붙은 여학생들을 어떻게 설득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캠퍼스 내에서 성격 더러운 도지훈이 하다 하다 결국 여자를 때렸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고 안세정이 돈 때문에 그를 만나고 있더라는 소문도 공공연하게 나돌았을 뿐이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학기는 곧 끝났고 방학이 되었다. 지훈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녀를 대했지만 세정은 도저히 그날의 악몽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와 팔짱을 끼고 걸어가면 거리의 모두가 그녀를 보고 창녀라고 수군거리는 것 같았고, 비웃는 것 같았다.

더 이상 자기 최면은 효과가 없었다. 그동안 그녀가 지훈에게 가장 열등감을 느꼈고, 또 걱정했던 부분을 공식적으로 확인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뭐야, 네가 계산을 왜 해?”

“빨리 나가자.”

“왜 갑자기 쓸데없는 짓을 하냐고 묻잖아.”

“나는 돈 내면 안 된다는 법이라도 있어?”

한 달 치 과외비를 고급 레스토랑에서 식사비로 계산하며 세정은 눈을 부릅떴다. 그러한 세정을 보며 지훈은 길게 한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

“다음에 네가 내고 싶을 땐 장소를 정하기 전에 미리 말을 해.”

세정은 더더욱 비참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이제껏 애써 외면하려고 했던 지훈과 자신의 차이점이 구질구질할 정도로 극명한 현실감을 주며 다가왔다.

자격지심이라면 자격지심이었다. 데이트 비용 따위는 생각하지 않고 장소를 선택하던 지훈이 그녀 때문에 장소를 고민해야 한다는 사실조차 싫었다.

여태껏 그를 따라다니며 낯 두껍게 잘도 받아먹었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로 괴로웠다. 지훈에게 솔직하게 속내를 털어놓는 것도 불가능했다. 그것은 죽어도 꺾을 수 없는 그녀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바보라고 욕을 들어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였다.

혼자서 속을 끓이던 세정이 기나긴 고민 끝에 마침내 지훈과 헤어져야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그녀의 할머니가 주무시던 중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

갑자기 돌아가신 할머니의 장례를 치르며 세정은 차마 그와 헤어질 수가 없었다. 초라한 장례식장에서 상주로 자리를 지키는 그를 거절할 수가 없었던 탓이었다.

할머니의 죽음은 그녀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어머니의 행방도 모르는 그녀에게 유일한 가족은 할머니뿐이었다. 없는 살림에도 그녀를 끝까지 책임져 준 할머니였기에 세정은 할머니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다.

빨리 취업해서 할머니의 고생을 덜 시켜 드리고 싶었는데, 그럴 기회도 없이 떠나 버린 할머니가 원망스러운 동시에 미치도록 그리웠다.

“세정아. 내 강아지.”

“네, 할머니.”

“남들이 뭐라고 하든 세정이 니만 떳떳하면 되는 것이여. 알간?”

“…갑자기 왜요?”

“아녀. 나는 우리 강아지가 젤로 이뻐서.”

잠자리에 나란히 누워 할머니가 거칠거칠한 손으로 그녀의 이마를 쓸어 주며 했던 말뜻을 세정은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할머니의 가게 단골손님이었던 철물점 이씨 아저씨가 술에 취해 세정이 재벌에게 다리 벌리는 세컨드가 되었으니 앞으로 돈 걱정은 평생 안 하고 살 수 있겠다며 이죽거렸고, 그 말을 들은 할머니가 어디서 우리 손녀를 술집 여자 취급하느냐고 소리를 지르며 분노했다는 사실을 미미 아줌마에게 전해 들었다.

세정은 할머니까지 마음 아프게 했다는 사실에 더욱 죄책감이 들었다. 떳떳하지 못한 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없이 살았어도 평생을 남에게 욕먹고 살아온 적이 없는 할머니가 세정 때문에 가슴앓이를 해야 했다는 사실이 견딜 수 없이 힘이 들었다.

무엇보다도 끝까지 그녀를 믿어 주고 서로 의지했던 단 하나의 가족이 사라지고 이제 완벽하게 혼자가 되었다는 사실은 세정을 숨이 막히도록 외롭게 만들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지훈이 아니었다면 그녀는 무너졌을지도 몰랐다. 헤어짐을 생각할 때마다 그는 그녀의 마음을 눈치채기라도 한 듯이 행동했다. 지훈은 세정이 다른 생각을 할 틈을 주지 않고 그녀를 싸고돌았다.

지훈은 그녀에게 짐을 빼고 아예 그의 아파트로 들어오라고 몇 번이나 제안했지만 세정은 그것을 거절했다.

그녀의 내면에서는 갈등이 점점 깊어지고 있었다. 할머니의 부재로 힘든 이 시점에서 지훈의 존재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위로를 주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시간을 끌면 끌수록 그 끝이 더욱 힘들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졸업을 하고 취업을 해서 돈을 벌게 되면 지훈에게 의지하고 기대면서 느꼈던 열등감을 어느 정도 줄일 수 있을까 고민했지만 결론은 ‘아니오’였다. 그녀가 아무리 좋은 직장에 취업을 한다고 해도 지훈과의 갭을 줄일 수 없다는 것은 잔인한 현실이었다.

자존심과 사랑 둘 중 어느 것도 포기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것은 그녀에게 과분한 희망인 듯했다. 세정에게 낯선 번호로 전화가 걸려 온 것은 그해 겨울이었다.

“반갑다는 말은 안 할게요. 우리가 그리 반가운 사이는 아닌 것 같아서.”

지훈이 여자로 태어나면 저런 얼굴일까 싶었다. 세정은 호텔 라운지에서 칵테일 잔에 입술을 축이는 눈앞의 여자를 바라보았다. 지훈에게는 과외 시간이 갑자기 변경되었다고 거짓말을 한 참이었다.

“절 왜 보자고 하셨나요?”

지훈의 누나가 세정의 물음에 바로 답하는 대신 미니스커트 아래로 쭉 뻗은 긴 다리를 꼬았다. 그녀는 번쩍이는 클러치 백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며 흡연을 저지하려는 바텐더를 눈짓 한 번으로 물린 후 피식 웃었다. 붉은 립스틱이 빈틈없이 발린 입술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눈치가 없는 척을 하는 거야, 아니면 진짜 순진한 거야?”

세정은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묵묵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지훈과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그의 가족을 만나는 일이 벌어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지만 어찌 보면 이것은 예정된 수순과 같은 일이었다.

“지훈이 때문에 절 보자고 하신 건가요?”

“긴말 필요 없고, 얼마 줄까?”

지훈의 누나 지민이 세정을 보며 담배 연기를 길게 뿜었다. 세정은 앉은 채로 어깨를 움찔했다.

“철없는 우리 막내 때문에 내가 지금 여기까지 귀찮게 나오게 되어서 기분이 무척 안 좋으니까 장난칠 생각은 말고 분수에 맞는 액수를 말해.”

“…지훈이와 헤어지라는 말씀을 하시는 거면….”

“그 발정 난 개새끼가 안세정 씨와 결혼을 하겠다고 하네? 하아… 어이가 없어서….”

예쁜 얼굴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거침없는 욕설이 그녀의 입술에서 흘렀다. 세정은 인상을 찌푸렸다. 담배 연기에 눈이 매웠다.

“다른 건 엉망진창이었어도 여자 문제는 일으키지 않아서 그러려니 했더니, 이렇게 큰 폭탄을 던질 줄 누가 알았을까? 도경물산 막내아들이 수준 차이라고 말하기도 뭣한 쓰레기 같은 년이랑 결혼을 한다는데….”

“죄송한데요, 지금 너무 말이 지나치신 것 같은데요.”

세정이 떨리는 아랫입술을 열어 대답하자 지민이 날카로운 목소리를 냈다.

“입 닥쳐. 내 말 안 끝났는데 어린 게 건방지게 어디서 말을 잘라?”

세정의 까만 눈동자에 분노가 일었다. 지민은 그런 그녀를 보며 입술을 올린 채 대화를 이어 나갔다.

“머리가 꽤 좋다고 들었어. 지훈이랑 언감생심 미래를 생각하면서 그 앨 만날 정도로 간이 컸다고는 생각 안 해. 풋내기 첫사랑이건, 정부이건 상관은 없는데, 우리 집안에 감히 발을 들일 정도의 레벨이 아니잖아, 안세정 씨는? 노는 건 좋지만 적어도 수준에 맞게 놀아야 하지 않을까?”

세정의 가슴이 미친 듯이 두근거렸다. 할 말은 많았는데 말이 목소리가 되어 튀어나오는 대신 머릿속을 웅웅거렸다.

“이제껏 지훈이가 얼마를 쥐여 줬건 그건 잊고, 일단 불러 봐요. 액수를.”

“…사람 잘못 보셨습니다.”

“아니? 난 사람을 잘 봤다고 생각하는데? 아가씨에 관해서는 이미 조사도 끝난 상태고.”

지민의 입술이 위를 향했다. 부들부들 떨고 있는 세정이 자존심에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는지는 한눈에 보였다.

지훈이 여자를 만난다는 사실을 보고받은 순간부터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몰래 감시했다. 막내가 만나는 여자는 한눈에 봐도 보통이 아니었다.

다른 건 몰라도 하나는 확실했다. 세정은 없이 산 주제에 자존심이 너무 강했다. 그리고 어렸다. 이런 취급을 받고도 지훈을 선택할 수 있다면 정말로 꽃뱀이거나 모자라거나 둘 중 하나였다.

“지훈이가 저랑 사귀려고 어떻게 했는지는 잘 모르시는 모양인데요.”

세정은 턱을 치켜들고 눈물을 간신히 참으며 눈을 부릅뜨고 말을 이었다.

“저한테 돈까지 주시면서 절 떼어 내려고 하시는 걸 보니까, 지훈이가 겨우 그딴 수준의 여자한테 눈이 뒤집혔다는 걸 인정하고 계시는 거죠?”

지민이 그녀를 보며 흥미롭다는 듯 잘 정리된 눈썹을 치켜세웠다. 세정은 흥분에 말을 이어 나갔다.

“저보고 쓰레기 같은 년이라고 하셨어요? 그런 년 만나는 지훈이도 그럼 쓰레기예요.”

“맞아, 그 새끼 쓰레기야.”

지민이 순순히 수긍했고 세정의 입술에서는 한숨 섞인 탄식이 흘렀다. 세정의 동그란 눈동자에 숨기지 못하는 분노가 서렸다. 지민은 술잔을 입에 대며 웃음을 감추었다. 세정의 꽉 쥔 주먹이 파르르 떨렸다.

“저는요, 지훈이가 가족 이야기를 했을 때도… 서로 험한 말을 하면서 대놓고 욕을 한다는 소릴 들었어도, 서로 본심은 그게 아닐 거라고 생각했어요. 지훈이가 그러니까요. 아무리 나쁜 말을 입에 달고 살아도 마음이 아주 나쁜 애가 아니니까, 가족들도 그럴 거라고. 서로 싫어하는 척해도 그래도 가족이니까, 겉으로만 그럴 뿐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지훈이가 진짜 불쌍해요.”

분한 듯 눈동자에 눈물을 그렁그렁 단 채로 세정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쓰레기 같은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온 그 애가 정말 불쌍해요.”

“그래서 그 애가 불쌍해서 못 떠나겠다는 그런 판에 박힌 지루한 말 하려는 거면 집어치우는 게 좋아.”

“아니요.”

지민의 도발에 세정은 고개를 저었다.

“굳이 오실 필요 없었어요. 이런 말씀 안 하셨어도 지훈이는 제가 찼을 거예요. 저는 싫거든요. 근묵자흑이라잖아요. 지훈이가 언젠가는 그쪽처럼 완전히 쓰레기처럼 변하게 되지 않을 거라는 보장이 없잖아요. 저는요, 그 옆에 제가 있기는 죽어도 싫거든요. 저는 쓰레기도 아니고, 꽃뱀도 아니고….”

울컥, 서러움에 차오르는 눈물을 세정은 애써 참았다.

“…돈 때문에 그 애와 자는 창녀도 아니에요.”

참으려고 했는데 눈물이 주룩, 그녀의 커다란 눈을 타고 뺨으로 흘렀다. 세정은 서둘러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민의 쭉 뻗은 다리 끝에 걸린 뾰족한 하이힐이 공중에서 까딱까딱 움직였다.

“정말, 돈 필요 없어? 미련한 짓 하지 말고 챙길 건 챙기는 게 좋아. 나중에 후회해 봤자라고.”

세정은 가방끈을 꽉 쥔 채 그녀를 쏘아보았다.

“돈이 그렇게 쓰고 싶으시면 밖에 불우 이웃 많아요, 아줌마.”

마지막 말을 내뱉은 후, 성큼성큼 호텔 라운지를 빠져나가는 그녀를 보는 지민의 입술에서 황당한 웃음이 흘렀다.

“누구더러 아줌마라는 거야, 저 깜찍한 년이….”

지민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담배를 아무렇게나 눌러 껐다. 지훈이 어디서 얼굴만 예쁘장한 여자에게 홀린 줄 알았는데, 세정을 직접 만나고 보니 여자를 경멸하다시피 해서 주변을 은근히 걱정시켰던 막내가 왜 그녀에게 매달렸는지 알 것 같기도 하다는 기분이 들었다.

유일한 피붙이였던 조모가 죽고 나서 천애 고아 신세가 된 세정을 보고 막내가 생각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은 결혼이었을 것이다.

집안이 뒤집어진 것은 당연한 결과였지만 집에서 지훈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미친놈처럼 들이대는 데에는 당할 장사가 없었다.

결국 지민이 나선 것은 마지막 시도였다. 지훈을 설득하는 것은 불가능했으므로 답은 여자 쪽을 자극하는 것뿐이었다.

“근데 저게 은근히 사람 엿 먹이는 재주가 있네.”

지민은 만약 나중에 시간이 지나서 세정을 다시 만나게 된다면 태도를 바꿔서 잘 대해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대드는 게 강단이 있어 보여 마음에 들었다.

“뭐 그럴 일은 없겠지만.”

지민은 담배에 찰칵 다시 불을 붙이며 가볍게 웃었다. 세정은 지훈의 짝이 되기에는 너무 꼿꼿했다. 세정은 사랑보다 자존심을 선택할 것이 틀림없었다. 다른 모든 어린 연인들이 그러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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