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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 내가 개처럼 무릎 꿇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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쿵푸벳

06. 내가 개처럼 무릎 꿇을까

온갖 사고 끝에 시작한 지훈과의 연애는 세정의 예상보다 훨씬 더 자연스럽게 진행되었다. 지훈은 그녀와 마찬가지로 연애가 처음이라고 말했다. 세정은 내심 놀랐지만 그녀에게 접근하려 했을 때 그의 기행들을 떠올려 보면 그 말에 신빙성은 충분했다.

상대가 서로에게 처음이라고 해서 그들의 배경이 바뀌는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지훈은 도경물산의 막내아들이었고 세정은 간판도 없는 시장 골목 순대국밥 집의 손녀였다. 하지만 연애를 시작한 후, 세정은 그동안 모르고 있었던 지훈의 모습들을 하나둘씩 발견하게 되었다.

그는 여전히 여러 면에서 그녀를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가끔씩 세정이 과외를 할 때면 할머니의 가게에 홀로 나타나 국밥 한 그릇을 뚝딱 먹고 돌아갈 때도 있었다.

세정이 다시 한번 돈 가지고 장난을 치면 당장 끝이라고 엄포를 놓은 탓에 전처럼 수표를 내밀지는 않았다.

대신 어두침침한 가게 조명을 환하게 바꾸어 주고 타일을 깔아 주는 것까지는 거절할 수가 없었다. 지훈이 돈을 주고 일거리를 준 사람들이 모두 한 시장에서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너, 누가 이런 짓 하라고 했어?”

“나는 너한테 많이 양보하고 있으니까, 너도 양보하는 게 좋아.”

“네가 나한테 뭘 양보하는데?”

“난 솔직히 너랑 당장 동거하고 싶어. 네 할머니만 아니었다면 그렇게 했을 거야.”

“야, 너 미쳤니? 진짜?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런던에서는 애인끼리 같이 안 사는 사람들을 찾기가 더 힘들어.”

“그래서 지금 여기가 외국이야?”

“내가 말하는 포인트가 그게 아니잖아. 너한테 해 주고 싶은 게 산더미 같은데 참고 있으니까, 이 정도는 하게 해 달라는 말이야. 내가 지금 여기, 시장 바닥에서 개처럼 무릎 꿇고 빌어야 해?”

결국 세정은 그의 호의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지훈은 어떻게든 그녀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으려 그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었고, 세정 역시도 그러한 그의 모습에 솔직히 말해 조금은 감동을 받은 것도 사실이었다.

지훈이 서툰 행동으로 진심을 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부터 세정은 그에게 점점 마음을 열었다.

그와 가까워지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일 수밖에 없었다. 지훈과 사귀기 시작한 이후, 세정의 곁에는 늘 그가 있었다.

지훈은 놀랄 정도로 세정에게 모든 것을 맞추어 주었다. 도서관에서 함께 공부를 했고,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그녀와 마주 앉아 학식을 먹었다.

과외 아르바이트를 가는 세정을 늘 목적지까지 태워다 주었고 끝날 때도 집까지 데려다주었다.

속력을 내면 세정이 질색을 하는 것을 경험한 후로는 그녀를 옆에 태우고 서울 시내를 미친 듯이 질주하는 일도 없었다.

지훈의 입에서는 여전히 그녀를 좋아한다는 말 한마디 없었다. 그렇지만 그가 그녀에게 하는 모든 것들은 세정에게 웬만큼 푹 빠지지 않으면 나올 수가 없는 행동이었다.

“이제 가. 더 이상 차 못 들어가잖아.”

세정의 집이 있는 좁은 골목에는 차가 들어오지 못했다. 신호등 앞에서 내려 달라고 했지만 지훈은 늘 그렇듯 기어코 큰길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그녀와 나란히 걸었다. 인적 없는 골목에 가로등 아래로 두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천천히 움직였다.

“매번 느끼는 건데 여기는 너무 어두워.”

지훈이 툭 내뱉듯 중얼거렸다. 세정의 손을 잡고 걷는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너는 이런 데 밤에 걸으면 무섭지도 않냐?”

“글쎄. 어렸을 때부터 계속 다녔으니까.”

세정이 작게 대답하자 지훈이 그녀의 손을 끌어당겨 허리를 감쌌다. 작은 스킨십에 긴장하는 것은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지훈은 한참 말없이 걷다가 흠, 하고 거칠게 헛기침을 하며 목을 가다듬었다.

“우리 그거 하자.”

“…뭐?”

“휴대폰에 서로 위치 확인하는 앱.”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세정이 그에게서 떨어지려고 했지만 지훈은 팔에 힘을 풀지 않았다.

“불안해서 안 되겠으니까 그냥 해.”

“싫어. 감시당하는 기분이야.”

“그럼 같이 살래?”

세정의 걸음이 딱 멈추었다.

“…뭐? 너 지금 무슨 말도 안 되는….”

그녀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늘 그렇듯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정도로 깊고 검었다. 세정은 그의 말을 헛소리로 치부하며 말을 얼버무리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같이 살자고.”

지훈이 그녀를 응시하며 다시 진지하게 말을 했다. 세정은 그의 어깨에 걸린 그녀의 가방을 얼른 낚아채고 황급히 걸음을 옮겼다.

“이상한 소리 하지 마. 나 갈게. 조심해서 잘 가.”

“안세정.”

“내일 강의 시간에 봐.”

지훈이 그녀를 붙잡기 전에 세정은 빠르게 뛰었다. 골목이 끝나는 곳에 집에 가기 위한 마지막 관문이라고 할 수 있는 계단이 보였다. 어렸을 때 눈이라도 오면 그다음 날 빙판이 되어서 동네 사람들이 중간에 있는 난간에 끈을 묶어야 했던 곳이다.

“아아!”

그가 내뱉은 이상한 소리에 가슴이 두근거렸던 건지, 아니면 긴장을 했던 것인지 세정은 그만 계단을 올라가기도 전에 발을 접질리고 말았다.

“괜찮아?”

지훈이 인상을 쓴 채 긴 다리를 성큼성큼 움직이며 그녀에게 다가왔다.

“어, 괜찮아. 가끔씩 나 발목 잘 삐어.”

“어디 봐.”

그녀의 앞에 서슴없이 주저앉아 지훈이 그녀의 발목을 잡았다. 다친 정도를 확인하는 그의 눈이 날카로웠다.

“살짝 접질린 거야. 집에 가서 파스 바르면 돼.”

세정은 그의 손에서 겨우 빠져나왔다. 계단을 오르려고 하는데, 지훈이 그녀의 가방을 빼앗아 어깨에 걸치더니 세정의 앞에 등을 보이고 앉았다.

“…뭐 해?”

“업혀.”

“어?”

세정은 당황해 눈을 깜빡였다. 삔 발목은 조금 욱신거리긴 했지만 심각한 정도는 아니었다.

“야, 나 진짜 괜찮아. 그 정도였으면 병원을 갔지…. 어어…!”

지훈이 그녀의 가방을 어깨에 교차하게 고쳐 메더니, 세정을 번쩍 들어 안았다. 순식간에 신부처럼 그에게 안긴 자세가 되어 놀라 당황해하는 그녀를 안고 지훈이 성큼성큼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뭐 하는 거야. 무거워. 내려 줘.”

“집에 도착하면 내려 줄 테니까 버둥거리지 마. 위험해.”

지훈은 힘이 들지도 않은지, 끝이 없는 계단을 오르면서도 숨소리 하나 변하는 게 없었다. 세정은 앞만 보고 전진하는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입을 다물었다.

환한 가로등 불빛 아래 작은 날벌레들이 떼를 지어 윙윙거렸다. 캄캄한 하늘에 고개를 빼꼼히 내민 초승달이 유달리 새초롬하게 보였다.

오늘따라 평소에도 길었던 계단이 더욱 길게 느껴졌다. 원래도 인적이 없었지만 골목은 더욱 조용했고 어디서 개가 짖는 소리만 컹컹 희미하게 울려 퍼졌다.

“…다 왔다. 이제 내려 줘.”

페인트칠이 벗겨진 초록색 대문 앞에서 세정이 입을 열었다. 가슴이 콩닥거리고 얼굴이 빨개진 것을 감추고 싶었지만, 집 바로 앞에 있는 희미한 가로등 불빛은 오늘따라 더욱 밝게만 느껴졌다. 지훈은 순순히 그녀를 조심히 내려 주었다.

“찜질해. 근육 손상에는 처음은 차갑게 해 주는 게 좋아.”

“아… 알았어.”

세정은 얼른 들어가려고 했지만, 그가 가방을 줄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지훈이 고개를 슬쩍 기울이며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가방, 줘야 들어갈 거 아냐.”

마침내 세정이 토마토처럼 붉어진 얼굴로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지훈이 그런 그녀를 향해 툭 내뱉듯 중얼거렸다.

“빠트린 거 없냐?”

“…뭐?”

“…굿나잇 키스 안 했잖아. 만날 때마다 적어도 한 번씩은 키스하기로 한 거, 잊었어?”

세정은 당황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야, 그건 네가 일방적으로….”

그의 커다란 손이 다가왔다. 부끄러워 입을 딱 다문 그녀를 끌어당겨 안고서, 지훈이 세정의 옆얼굴을 감싼 채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여기까지 왔는데 내가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갈 거라고 생각했어, 설마?”

씩 웃던 입술이 부드럽게 부딪쳐 왔다. 달콤하게 다가오며 아까 마셨던 커피 향이 흐리게 남아 있는 혀가 그녀의 입 안을 맴돌았다.

오톨도톨한 입천장을 간질이고 수줍은 세정의 혀를 찾아내 뒤섞으며 빨았다. 아래로 내려간 세정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몇 번이나 키스했지만 할 때마다 가슴이 터지게 두근거렸다. 코끝에 닿는 지훈의 숨결과 타액을 부드럽게 빼앗기는 감각에 손끝이 찌르르 짜릿하게 떨려 왔다. 지훈의 고개가 점점 더 아래로 숙여졌다.

컹컹 개 짖는 소리가 그녀의 귓가에서 점점 희미하게 들렸다. 대신 커다랗게 심장 뛰는 소리는 점점 더 커져만 갔다.

지훈과 처음 학교 계단에서 마주쳤을 때는 이런 상황을 상상하지도 못했었다. 그녀의 동네, 낙서가 가득한 벽에 끝없이 늘어진 계단을 도지훈과 함께 걷게 될 줄은.

아니, 지훈의 품에 안겨서 이 계단을 오르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한 일이었다. 이제껏 아무 느낌도 없이 지나다니던 오래된 길이었지만 그와 함께 있으면 모든 것이 달랐다.

지훈은 여전히 주변의 모든 이들을 허수아비 취급했고 예의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게 굴었지만 그녀에게는 달랐다. 그는 오직 세정에게만 관대했고, 그녀에게만 다정했다.

아직까지 좋아한다는 말 한마디 없는 것은 솔직히 서운했지만, 그의 이러한 행동들은 그녀의 마음을 비집고 들어오기에 충분했다. 지훈은 누구에게도 세정에게 하는 것처럼 하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특별한 존재가 된다는 느낌은 바로 이런 걸까.

“앱 깔 거지?”

“…생각해 보고.”

“깐다고 말할 때까지 키스한다.”

지훈이 거친 숨을 내뱉으며 그녀의 입술을 다시 잠식했다. 세정이 떨리는 손을 들어 그의 너른 등을 꽉 끌어안았다.

희미한 가로등 아래 붙은 두 그림자가 오래도록 떨어질 줄을 몰랐다.

***

“오픈 북이 난 제일 싫어. 솔직히 책 한 권을 모조리 파라는 뜻이랑 다를 게 없잖아. 아아. 시험을 또 얼마나 까다롭게 내려고 그럴까.”

세정이 한숨을 푹푹 쉬었다. 책상 옆 침대에 길게 누워 책을 보던 지훈이 고개를 들어 그녀를 보며 피식 웃었다.

그녀가 지훈의 집에서 함께 시험공부를 한 적이 처음은 아니었다. 도서관보다 그의 집이 더 쾌적하고 편안하다는 것을 세정이 인정하고 난 후부터였다.

지훈의 책상에서 양반 다리를 하고 제집처럼 앉아 있던 세정이 동그란 안경을 코끝에 걸친 채 펜 끝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뭔가가 맘에 들지 않으면 나오는 행동이었다. 지훈이 그것을 눈치채고 그녀를 불렀다.

“이리 와서 좀 쉬지?”

“뭘 쉬어. 또 무슨 이상한 짓 하려고?”

세정이 눈을 흘기며 그를 보았다. 지훈이 양손을 들어 보이며 고개를 저었다.

“진짜 아무 짓도 안 할게. 맹세.”

“웃기고 있네.”

저번에도 그의 말에 깜빡 속아 진득하게 키스를 당한 기억을 떠올리며 세정은 고개를 저었다.

“넌 종교인이 아니라서 맹세 같은 거 효력이 없다면서요.”

그녀의 반격에 지훈이 다른 구실을 꺼내 들었다.

“너 두 시간 동안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도 않았어. 네 엉덩이가 불쌍하지도 않아?”

“내 엉덩이 걱정 해 줄 필요 없네요…. 엄마!”

결국 육탄전이었다. 지훈이 그녀를 번쩍 들더니 책상 바로 옆에 위치한 커다란 침대로 안고 풀썩 쓰러졌다. 푹신한 이불이 두 사람 몸 아래에서 짓눌리며 기분 좋은 향기를 뿜었다.

“야! 이상한 짓 안 한다며.”

“안 할게. 그리고 해 봤자 내가 키스밖에 더 해?”

지훈이 그녀를 마주 보고 모로 누운 채 속삭이며 세정의 긴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세정은 그와 사귀는 데 있어서 또 다른 조건을 걸었는데 그것은 그녀가 준비될 때까지 섹스하자고 조르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녀의 말을 귓등으로 흘려듣는 것 같던 지훈은 그녀의 예상을 깨고 인내심을 가진 채 세정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벌써 사귄 지 세 달이 넘었고 이제 곧 100일이었지만 그들의 스킨십은 입술에 하는 키스와 조금 야한 페팅에 머무르는 수준이었다. 그의 커다란 손이 티셔츠만 입은 그녀의 가슴을 부드럽게 주물렀다.

“또, 또 이런다.”

“원래 여자 가슴은 다 이렇게 부드러운 건가?”

지훈의 손길은 집요했다. 처음에는 너무 꽉 잡는 바람에 세정에게 등짝을 얻어맞았지만 이제는 어떠한 강도로 주물러야 아프지 않고, 그녀의 귀여운 유두를 단단하게 만들 수 있는지도 알 수 있었다.

“…엄마 젖 안 드셔 보셨나요?”

세정이 부끄러워 장난처럼 내뱉자 지훈이 고개를 저었다.

“아마 우리 집안에 모유 수유 하는 사람 없을걸? 기억에도 없고.”

“응? 왜?”

지훈의 뜻밖의 대답에 세정이 숨을 몰아쉬며 눈을 깜빡였다.

“가슴 모양 처지니까.”

“농담이지?”

“큰누나가 그런 소릴 웃자고 할 것 같진 않은데.”

세정이 그의 손길에 어느새 달아오른 얼굴을 손등으로 지그시 눌렀다.

“너 누나도 있었구나.”

“형 하나에 누나 둘이야. 다들 재수 없지.”

세정이 예쁜 이마에 주름을 잡았다.

“…무슨 가족 이야기를 그렇게 살벌하게 해.”

“원래 서로 재수 없어 해. 큰누나는 대놓고 나한테 개 같은 새끼라고 부르는데 뭘.”

“아….”

지훈이 놀랄 만한 이야기를 대수롭지 않게 꺼내자 세정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그저 말을 흐렸다. 그의 친구 태환에게 미리 귀띔을 받은 적은 있었지만 지훈이 그녀에게 직접 꺼내는 가족 이야기는 처음이었다.

서로 싫어한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태환이 했던 말이 더욱 이해가 쉬웠다. 어릴 때부터 지훈에게는 모든 일이 협상이고 거래였다는 소리가 떠오르자 세정은 왠지 그가 조금 안쓰러워졌다.

세정은 그녀의 가슴을 주무르는 데 골똘히 집중하고 있는 지훈의 얼굴을 바라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왠지 내가 예상했던 거랑은 되게 다르다.”

돈이 많은 집에서 금수저로 태어나면 걱정거리가 하나도 없을 줄 알았는데. 그를 보면 돈이 많다고 집안이 화목한 것은 아닌 것처럼 보였다.

“뭘 예상했는데?”

쑥, 하고 그의 손이 세정의 티셔츠 안으로 들어왔다.

“하지 마.”

세정이 눈을 흘기자 지훈이 피식 웃으며 그녀에게 높다란 콧날을 부딪쳐 왔다.

“조금만 만지자.”

“또 저번처럼 코피 터지려고?”

지훈이 브래지어 안에 감춰진 그녀의 가슴을 처음 본 날, 그의 깎아 놓은 것 같은 코에서는 주르륵 검붉은 피가 터졌다. 지금은 웃으면서 그를 놀릴 수 있었지만 그 당시에 세정은 무척이나 당황했었다. 그녀가 입고 있었던 하얀 티셔츠는 그의 피로 범벅이 되었다.

“너 그때 나 걱정하는 얼굴 되게 꼴렸는데. 브래지어랑 청바지만 입은 채로 당황해서는. 수건 찾아서 이리저리 뛰고.”

“그럼 갑자기 코피가 나는데 그 상황에서 놀라지 안 놀라?”

지훈이 그녀의 브래지어 사이로 손을 집어넣더니 본격적으로 그녀의 맨젖가슴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아아. 진짜 너무 부드러워. 여기는 꼭 인간 피부가 아닌 것 같아.”

지훈은 예전에 테니스를 오래 쳤다고 했다. 지금도 운동을 게을리하지 않는 까닭에 그의 몸은 모델처럼 슬림하지만 근육이 붙어 탄탄했다.

그런 그의 가슴과 유선이 발달된 그녀의 가슴은 신체 구조상 다를 게 분명한데도 지훈은 늘 홀린 것 같은 표정으로 같은 말을 중얼거리곤 했다. 세정은 붉어진 얼굴로 작게 그를 저지했다.

“진짜 이제 그만 만져.”

“나 이제 코피 안 나잖아.”

“그게 아니라….”

“왜, 너도 흥분돼?”

그가 작게 속삭이자 그녀의 귓불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당황하는 그녀를 보며 지훈이 옳다 싶었는지 남부끄러운 말을 이어 나갔다.

“이렇게 만지는 것만으로도 갈 것 같아? 어. 여기 젖꼭지가 딱딱해졌다.”

세정이 미간을 찌푸리며 그의 어깨를 아프게 꼬집었지만 지훈은 씩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나는 진짜… 너 정도 돈 있는 재벌 집 사람들은 아무리 만들어진 가식이라 해도 품위가 좀 있을 줄 알았거든? 근데 너랑 있으면 내 그 환상이랄 것도 없는 이미지가 완전히 박살이 나는 것 같아.”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 그녀의 가슴을 집착하듯 주물럭거리며 지훈이 피식 웃었다.

“품위는 개뿔. 돈 많으면 사람 아닌가? 바깥에서 가면 쓰고 살아야 되니까 오히려 집에서 더해. 형수가 신혼 첫날 아침에 식탁에서 놀라서 눈물 뚝뚝 흘렸던 거 생각하면 지금도 웃겨, 난.”

세정이 알기로 지훈의 형인 도경건설 상무 이사는 밝고 명랑한 이미지로 유명한 스포츠 아나운서와 결혼을 했다.

“…왜 우셨는데?”

“우리 엄마가 한 소리 했거든.”

“뭐라고 하셨길래?”

“아들은 엄마 머리 닮는데 애가 골 비었다는 소리 듣기 싫으면 얼굴 고칠 시간에 책 한 자를 더 파라고.”

“와아.”

그녀의 입이 딱 벌어졌다. 아무래도 사람 혈압 오르게 하는 지훈의 거친 말버릇이 괜히 나온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형이 말조심하시라고 숟가락 팽개치고, 옆에 있던 큰누나는 위아래도 모르는 씨발 새끼가 어디서 회장님한테 대드냐고 소리 지르고… 작은누나는 그 와중에 아줌마한테 국이 짜다 그러고… 하하, 암튼 진짜 웃겼어.”

세정이 뜨악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다가 흣, 하고 숨을 몰아쉬었다.

지훈이 그녀의 젖가슴을 손으로 꽉 쥐었기 때문이다. 그의 손가락 사이에 끼인 작은 유두가 팽팽하게 솟았다.

그의 손이 아까부터 계속 가슴을 주무르는 통에 몸에 열기가 퍼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이상했지만 이제는 지훈의 손길이 싫지 않았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그의 손길에 닿는 유두가 민감해지며 스치기만 해도 찌릿한 기분이 드는 것이 사실이었다.

“근데 세정아, 나 궁금한 게 있는데.”

“흣… 응.”

“여자 가슴도 커졌다 작아졌다 해?”

지훈의 표정은 진지했다. 세정은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당황해서 말을 더듬었다.

“뭐… 뭐?”

“페니스처럼 여자 가슴도 흥분하면 커지고 그러냐고. 네 가슴 사이즈가 일주일 전이랑 좀 많이 다른 것 같아서. 여전히 부드럽긴 한데 어딘가 좀 뭉친 것도 같고.”

세정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새빨개졌다. 생리 때가 다가오면 가슴이 부풀어 오르는 것이 정상이었다. 그런데 그런 말을 대놓고 들으니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너 지금 흥분해서 이렇게 가슴 부푼 거야? 나랑 섹스하고 싶은 거야?”

지훈의 표정은 농담이 아니었다. 그녀의 가슴을 만지는 커다란 손에 식은땀이 배고 슬쩍 떨리는 것을 느끼며 세정은 애써 표정을 가다듬었다.

대체 지훈이 20년 동안 어떤 환경에서 살아왔는지 모르겠지만 그는 정말이지 교육이 필요했다. 그는 머리가 좋은 것 같으면서도 어떤 면에서는 놀랄 정도로 지식이 전혀 없었다.

“지훈아. 여자들은 한 달에 한 번씩 생리라는 걸 하거든요.”

“…아. 그럼 역시 호르몬 변화 때문에 그런 건가?”

지훈의 표정에 약간 실망이 번지는 것이 왠지 조금 귀여웠다. 세정은 웃음을 숨기며 흠, 하고 헛기침을 한 후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

“잘 아네. 그게 다야.”

“그럼 너 지금 생리 중이야? 그 전에 에스트로겐 수치가 높아지는 건 알아.”

이렇게 보면 성교육이 전무한 건 아닌 것 같은데, 생각하며 세정이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아니야.”

“그럼 언제 생리해?”

“음… 한 사흘 후쯤?”

지훈이 그녀의 가슴을 주무르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세정이 그를 보며 물었다.

“무슨 생각 해?”

“네 배란일 계산했어.”

“그건 왜?”

세정이 그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지만 지훈은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임신이 잘되는 날짜 알아 두면 좋을 것 같아서.”

“야!”

세정이 기겁을 하며 그를 밀쳤다.

“왜 그래, 갑자기.”

그녀의 손길에 거칠게 밀려난 지훈이 못마땅한 표정을 숨기지 않으며 세정에게 다시 다가왔다. 세정은 그런 그의 팔을 꽉 잡고 심각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너… 내가 지금부터 하는 말 똑똑히 잘 들어.”

“해 봐.”

“너, 혹시라도 배란일 계산해서 피임할 거다, 뭐 이런 거지 같은 생각 절대로 하지 마.”

“야. 넌 뭘 나랑 섹스라도 하고 그런 말을 해.”

지훈이 픽 웃으며 그녀의 어깨를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세정은 세차게 고개를 저으며 티셔츠 아래로 드러난 그의 단단한 팔뚝을 꽉 잡았다.

그녀는 그에게 처음부터 확실하게 말해 주지 않으면 안 된다는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특히나 도지훈같은 성격의 사람에게는 더더욱 그랬다.

“너랑 자는 거, 계속 미루는 이유에는 내가 준비 안 된 것도 있지만 임신에 대한 두려움도 있어.”

세정의 커다란 눈이 진지하게 빛났다.

“어떻게 하다가 계획 없이 섹스하게 되고, 임신했을까 봐 두려워하는 친구들 여럿 봤어.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아. 절대로.”

지훈은 그녀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언제 섹스를 하게 될지 모르겠지만 난 피임은 똑바로 하고 싶어. 대학 졸업하기도 전에 엄마 되고 싶은 마음 죽어도 없고, 네 손 잡고 병원 가는 일도 절대 싫어.”

“알았다고.”

지훈은 열변을 토하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 주었다. 나중에 결혼할 때를 생각해서 물어본 건데, 세정은 진심으로 겁이 난 모양이었다.

“확실하게 피임할게. 너 걱정 안 하도록 하면 될 거 아냐.”

지훈이 그녀를 부드럽지만 강한 힘으로 당겨 끌어안았다. 그는 그녀의 뒤통수를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세정이 그의 가슴에 옆얼굴을 대고 잠시 머뭇거리다가 작게 입을 열었다.

“…우리 엄마는 열일곱 살 때 임신해서 열여덟에 나를 낳았대. 고등학교 1학년 때 임신한 거야.”

그의 손이 잠시 멈칫하다가 다시금 그녀의 자그마한 머리통을 다정하게 어루만졌다. 말없는 그의 품에 안겨 세정이 가느다랗게 자조하며 덧붙였다.

“더 기가 막힌 건 뭔 줄 알아? 중국집에서 음식 배달하던 스무 살짜리가 내 아버지였다는 거. 부모가 되기에는 어려도 너무 어리잖아.”

“…발랑 까졌던 부모님한테 나온 것치고, 작품이 너무 잘 나왔는데? 나같이 완벽한 유전자가 첫눈에 뻑 갈 정도면.”

세정이 하, 하고 한숨 쉬듯 흐리게 웃으며 그의 가슴에 이마를 댔다. 두근, 두근, 지훈의 강한 심장 박동 소리가 그대로 전달되었다.

“있지. 나는 우리 엄마처럼 그렇게 구질구질하게 안 살고 싶어. 번듯한 직장도 다니고 싶어. 내 능력 인정받으면서 살고 싶어. 우리 할머니도 더 이상 일할 필요 없이 쉬시게 하고 싶고.”

지훈이 뭐라고 입을 떼려다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참았다. 이 상황에서 나랑 결혼하면 모든 게 쉽게 다 해결될 거라는 말을 하면 안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세정과 사귀기 시작하면서 그녀가 뭘 좋아하고 뭘 싫어하는지에 골똘히 머리를 굴린 결과였다.

그는 말없이 그녀를 끌어안고 정수리에 뾰족한 턱을 문질렀다. 지훈은 직접 겪은 적도 없거니와 상상도 할 수 없는 삶이었다. 그런 힘든 시간을 오뚝이처럼 씩씩하게 버텨 온 세정이 대견하면서도 동시에 안쓰러웠다.

세정에게 그가 가진 걸 다 퍼부어 주고 싶은 마음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만 가고 있었다. 원하는 건 다 손에 쥐여 주고 싶은 것이 솔직한 그의 심정이었지만, 어렸을 때부터 기대는 법을 모르고 산 세정은 자립심이 지나치게 강한 성격이었다.

“그래서 나는 공부 열심히 할 거야. 누가 그러더라. 이 나라 법은 잘사는 사람들 편의를 지켜 주기 위해서 만들어졌다고. 그러니까 결국 그 사람들 이겨 먹기 위해서는 내가 더 많이 알아야 하는 거잖아. 그래야 적어도 아무것도 모르고 짓밟히지는 않을 거니까.”

지훈은 소리 없이 길게 한숨을 쉬었다.

“내가 본 사람 중에 너만큼 열심히 하는 사람 없어.”

진심으로 그는 그녀만큼 하루 24시간을 열심히 사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지훈은 그녀를 안은 손에 살짝 힘을 풀고 세정을 바라보았다.

“넌 틀림없이 네가 원하는 대로 잘 살 거야.”

“그걸 네가 어떻게 확신해?”

“넌 내가 선택한 유일한 여자니까. 난 내 완벽한 안목을 믿거든.”

아무런 근거도 없는 터무니없는 말이었지만 세정의 가슴이 뜨거워졌다. 그는 항상 그랬다. 아무리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내뱉어도 그 자신감 넘치는 오만한 표정을 보고 있으면 결국 설득이 되었다.

그녀 자신조차 확신하지 못하는 미래를 그녀보다 더 뚜렷하게 확신하고 있는 지훈을 보면 정말로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안심이 됐다.

세정은 그가 서툴게 내뱉는 말에 자신이 위로받았음을 부정할 수 없었다. 얼굴에 열이 오르고 심장이 조금 더 빨리 뛰었다. 세정은 그녀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지훈을 향해 떨리는 입술을 열었다.

“완벽한 도지훈 씨.”

“왜.”

그가 옅게 웃었다. 세정이 머뭇거리다 그에게 물었다.

“넌 내 이런 이야기… 듣는 거 싫지 않아?”

“왜 그럴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냥… 너랑은 내가 많이 다르니까. 살아온 배경도, 환경도.”

구질구질하다고 느껴지지는 않을까, 세정은 새삼 지훈에게 신경이 쓰였다. 그런다고 해서 그녀가 겪었던 과거가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데도.

세정의 떨리는 시선을 마주한 그의 눈빛이 그윽하게 짙어졌다. 지훈이 그녀의 이마 위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걷어 내며 입을 열었다.

“내 아버지는 죽을 때까지 바람을 피웠어.”

꿀꺽, 세정이 마른침을 삼키는 것을 보며 지훈이 옅게 웃었다.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를 대놓고 경멸했고. 아버지가 섹스하는 여자들의 사진을 보면서 어머니는 혼자 서재에서 술을 마시는 게 취미였는데… 화장기 없는 얼굴로 허무하게 그걸 보던 표정이 지금도 잊히지가 않아.”

세정은 느리게 말을 잇는 그를 보며 눈을 깜빡였다. 이 이야기는 태환에게도 듣지 못한 이야기였다. 누구에게도 하지 못했던 말을 꺼내고 있는 지훈의 표정은 왠지 쓸쓸하게 보였다.

“그러면서도 그룹의 이익 때문에 헤어지지 못하는 게 웃겼어, 난. 더럽다고 생각했어. 딸 같은 여자 끼고 놀았던 아버지도, 그걸 보고도 참은 내 어머니도.”

“…….”

그가 했던 것처럼 위로를 해 주고 싶은데 세정은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내 인생에 누구도 들일 생각이 없었어. 여자는 더더욱 필요 없다고 생각했는데….”

지훈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로 그를 바라보는 세정을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너 보는 순간 아무 생각도 안 들더라.”

“…지훈아.”

“난 그냥 널 가지고 싶었어. 너 말고는 아무것도 안 보이는 내 스스로한테 짜증이 날 정도로.”

낮은 목소리가 세정의 귓가에 부드럽게 감겨들었다.

“이런 이야기 듣는 거, 싫어?”

“아니.”

지훈의 물음에 세정은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지훈이 그녀를 끌어안자 세정이 그의 가슴에 가만히 얼굴을 기댔다.

“지훈아.”

세정이 가만히 그를 불렀다.

“응.”

“넌 왜….”

세정은 말을 하려다 잠시 머뭇했다.

“넌 왜 나한테 좋아한다고 말 안 해?”

오랫동안 참았던 그녀의 물음에 지훈이 소리 없이 웃었다. 그녀를 안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배를 갈라서 심장을 꺼내서 보여 주고, 다시 집어넣는 게 가능하다면 너한테 보여 주고 싶어. 너만 보면 펄떡펄떡 미친 것처럼 반응하는 거, 네 눈으로 확인시켜 주고 싶어. 그럼 넌 기겁을 하면서 싫어하겠지만 적어도 내 진심이 증명은 되겠지.”

그다운 말이라 생각하며 세정 역시 그의 가슴 안에서 작게 웃었다. 지훈이 세정의 귀에 또렷하게 내뱉었다.

“나한테는 너뿐이야. 내가 가진 모든 것들은 다 허상 같은데, 그중에 너만 생생해.”

“…….”

“난 아무에게도 아버지 이야기 한 적 없어. 내 치부 보여 주는 짓 같은 거, 안 해.”

그의 말에 세정의 눈가가 더 뜨거워졌다. 백 마디 좋아한다는 말보다 그의 진심이 더욱 확실하게 다가오는 것 같았다. 그의 말대로 오만한 도지훈이 속에 있는 말을 모두 꺼내 놓는 상대는 세정 한 사람뿐이었으니까.

“…알았어.”

“그런 의미에서 네 가슴 한 번만 빨아도 돼?”

“진짜, 죽을래?”

감동에 빠져 있던 세정이 인상을 쓰며 쿵, 하고 주먹으로 그의 등을 세게 때렸다. 지훈은 피식 웃으며 세정의 목덜미에 코를 박고 달콤한 살 내음을 깊이 들이마셨다. 그녀가 어이없다며 그의 품 안에서 바르작거렸다.

지훈은 그 느낌이 좋았다. 그녀가 도망치지 못하게 양팔과 가슴 안에 꽉 가두고 붉어진 장밋빛 뺨과 길고 가는 목, 여린 귓가에 버드 키스를 퍼부었다. 세정이 하지 말라고 그를 밀어내며 깔깔거렸다.

그 해, 여름이 깊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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