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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비싸게 굴어도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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쿵푸벳

04. 비싸게 굴어도 돼

돈통을 여는 세정의 손길이 분주했다. 그녀는 생긋 웃으며 천 원짜리 지폐 몇 장을 내밀었다.

“아저씨. 맛있게 드셨어요? 여기 거스름돈이요.”

“음식 나오기 기다리다가 배고파 돌아가실 뻔했어.”

“죄송해요, 오늘 좀 바빠서. 담에 오시면 제일 빨리 드릴게요.”

“엉. 갑니다, 할매!”

탁, 하고 미닫이문이 닫혔다. 세정은 한숨을 감추며 이마에 솟은 구슬땀을 팔로 훔쳤다.

시장통 초입에 커다란 식당이 생기고 난 후, 깊숙한 골목에 위치한 순댓국집에 찾아오는 손님들은 이제 익숙한 단골들이 다였다.

세정의 할머니의 가게가 있는 재래시장은 대학가에서 두 정거장 떨어진 동네에 위치해 있었다. 집값이 싼 까닭에 이 동네에는 자취하는 학생들이나 혼자 일하는 젊은 사람들도 많이 살았다. 단골들도 좋지만 그런 뜨내기들을 잡아야 매출이 늘어남은 당연한 말이었다.

문제는 오래된 가게의 상태였다. 세정이 아무리 테이블을 깨끗하게 닦고, 식기류를 뜨거운 물로 소독해 봤자 누레진 천장이나 타일이 벗겨져 시커먼 시멘트가 보이는 바닥은 어쩔 수가 없었다.

가끔 오던 젊은 손님들이 오래된 순댓국집보다 깔끔한 인테리어의 체인 식당을 선호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아가씨, 여기 깍두기 좀 더 줘.”

“네, 갑니다아!”

하지만 웬일인지 아침부터 쉴 틈 없이 바쁜 일요일이었다. 테이블은 다섯 개밖에 없었지만 홀에서 일하는 사람은 세정 한 명뿐이었다. 주방에서 연신 불 앞에 선 채 일하고 있는 사람도 그녀의 할머니 혼자였다.

아르바이트생을 쓸 만한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세정은 홀 서빙을 하면서도 중간중간 주방으로 들어가 싱크대 안에 쌓여 있는 설거짓거리를 처리해야 했다.

“우리 세정이, 배고프지?”

그녀와 할머니 모두 맞은편에 있는 분식집에서 산 김밥 두 줄로 아침 겸 점심을 때운 것이 다였다. 깍두기를 접시에 퍼 담으며 세정이 생긋 웃어 보였다.

“이제 한 테이블만 가면 다 끝날 것 같아요. 할머니. 그럼 같이 나와서 밥 먹어요.”

“그래, 아가.”

“깍두기 안 줄 거야?”

철물점 이씨 아저씨가 주방을 보며 소리를 치자 세정의 조모가 눈을 부라렸다.

“순댓국 하나 묵으면서 깍두기를 몇 접시를 처묵는 겨?”

“네, 지금 갑니다!”

세정은 할머니에게 눈짓을 해 보이며 얼른 깍두기 접시를 들고 밖으로 튀어나왔다.

세정의 어머니가 집을 나간 것은 그녀가 초등학교 5학년에 갓 올라갔을 때였다. 그해 가을, 쉬는 날에는 집 안에서 소주만 마시고 일하는 날에는 공사판을 전전하며 일용직 생활을 이어 나가던 그녀의 아버지가 실족해서 초상을 치렀다.

그 이후 세정은 하나뿐인 가족인 친할머니와 함께 살게 되었다. 그녀와 할머니 단 두 식구만 생활한 지가 벌써 9년째였다.

가난은 부끄러운 게 아니라 불편한 것이라는 사실을 머리로는 알았지만, 사춘기 때 세정의 마음은 그렇지 못했다. 가난은 여러모로 사람을 부끄럽게 하는 것이었다.

급식비를 제때 내지 못했을 때뿐만이 아니었다. 집에 놀러 가도 되냐는 같은 반 친구의 초대를 거절하지 못했을 때, 집에 들어선 친구의 표정을 보고 세정이 느껴야 했던 감정은 수치심에 가까웠다.

세정이 공부에 매달린 이유는 그것 때문이었다.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어서 빨리 탈출하고 싶었다. 방이 두 개인 집으로 이사도 가고 싶었고, 나이 드신 할머니도 식당에서 일하는 대신 이제는 집에서 쉬게 해 드리고 싶었다.

새벽에 스탠드 불빛 하나에 의지해 참고서를 들여다보고 있다가 코피가 뚝뚝 떨어진 적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그녀는 고등학교 때부터 저녁에 패스트푸드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대학 등록금을 모았다.

대학에 입학하고 난 후에도 빠듯한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녀는 더욱 바빠졌다. 강의 시간에는 맨 앞자리에 앉아 교수의 말을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 애썼고, 밤새도록 과제를 했다. 성적 장학금을 놓치지 않으려는 발버둥이었다.

과외 아르바이트로 들어오는 수입은 생활비에 몽땅 보탰다. 아침부터 밤까지 불 앞에서 움직이는 할머니에게 조그마한 도움이라도 되고 싶었다.

그녀에게는 친구와 흔하게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수다를 떨 시간도, 동아리 활동을 할 여유도 없었다. 신입생 때 세정에게 관심을 보이며 다가왔던 몇몇 이들의 고백도 받아 줄 수가 없었다.

그들은 시간이 없다는 세정의 말을 변명으로 생각하는 듯했지만 그녀에게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연애는 그럴 만한 여유가 있는 사람들의 몫이었고, 그러기에는 그녀의 생활이 너무나 빡빡했기 때문이다.

세정의 목표는 대학 졸업반일 때 대기업에 취업하는 것이었다. 인턴을 나가려고 해도 해외 봉사 활동이나 교외 활동이 요구되는 이 상황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학점을 최상위로 유지하는 것뿐이었다.

취직을 하면 그녀와 할머니를 위한 조그마한 보금자리를 마련할 날이 앞당겨질 것이다. 세정은 그날만을 위해 달려가고 있는 중이었다.

철물점 이씨 아저씨가 소주 한 병을 비우고 일어섰다. 그녀는 재빨리 자리를 정리하고 행주로 테이블을 닦았다.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정산을 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오늘은 근 한 달간을 비교해 봐도 가장 바쁜 날이었다. 매주 주말이 오늘 같기만 하다면 과외 아르바이트를 뺀 보람이 쏠쏠하게 느껴질 텐데.

뻐근한 어깨를 주먹으로 탁탁 두드리며 허리를 폈을 때는 오래된 벽시계 안의 시곗바늘이 벌써 9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이쯤 되면 통닭집을 비롯한 시장 사람들이 모두 다 빠져나갈 시간이었다.

슬슬 정리를 해야겠다고 생각하는데 미닫이문이 덜컹거리며 다시 열렸다. 손님이 끊이지 않는 걸 보니 오늘이 날이긴 날인 모양이었다.

“어서 오세….”

방긋 웃으며 힘차게 인사를 건네던 그녀의 목소리가 중간에 뚝 끊겼다. 문이 낮아 고개를 푹 숙이고 들어온 지훈이 잠시 주변을 둘러보더니 입구에서 가장 가까운 테이블에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뭐야?”

앞치마를 두른 세정이 행주를 손에 꼭 쥔 채, 지훈을 향해 인상을 썼다.

“손님한테 인사가 뭐 그따위야?”

그가 긴 다리를 꼬며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발목까지 떨어지는 슬랙스에 고급 구두를 신고, 추상적인 형태의 그림이 어지럽게 그려진 티셔츠를 걸친 그는 어디 런웨이를 뛰고 온 모델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때가 낀 형광색의 플라스틱 의자와 꽃무늬가 그려진 촌스러운 철제 테이블, 오래된 흙벽에 못질되어 박혀 있는 커다란 달력을 배경으로 한 그가 지독히도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비유를 하자면 마치 할렘가를 배경으로 촬영을 하는 슈퍼스타 같은 포스였다.

“왜 그렇게 뚫어져라 쳐다봐? 새삼 내가 너무 잘나서?”

지훈이 그녀를 보며 입술을 씩 올렸다. 세정의 얼굴에 벌겋게 피가 몰렸다. 할머니가 20년이 넘게 이어 온 생활의 터전을 부끄럽다고 생각할 나이는 지났다. 하지만 전혀 어울리지 않는 장소에 불쑥 나타난 지훈을 보자 왠지 치부를 들킨 듯한 기분이었다.

누가 봐도 한 번쯤 쳐다볼 정도로 눈에 띄는 그의 모습이 그녀가 속한 순댓국집과 이질적으로 보이면 보일수록 그와 그녀의 수준 차이가 두드러지는 것 같아 자존심이 상하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세정은 들고 있던 행주를 꽉 쥐고 낮게 내뱉었다.

“나가.”

세정의 말을 간단히 무시하며 그가 회칠이 된 시멘트 벽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그녀가 손으로 적은 메뉴를 힐끗 쳐다보았다. 세정은 이유 없이 목덜미가 뜨끈뜨끈 달아올랐다.

“순대 전골 하나 줘. 배고프다.”

몇 개 되지 않는 메뉴에서 가장 비싼 것을 시키며 그가 그녀를 다시 쓱 훑듯이 바라보았다.

“너한테 줄 밥 없으니까 나가라고.”

“소비자 보호원에 신고한다.”

그의 대꾸에 세정이 코웃음을 쳤다.

“맘대로 해, 난 너 영업 방해로 신고하면 되니까.”

“내가 지금 네 영업을 방해하고 있어?”

“응. 정답이야. 그러니까 나가 줘.”

“왜, 내가 오니까 흥분이 돼서 일에 집중이 안 돼?”

지훈이 기분 나쁘게 입꼬리를 씩 올렸다.

“야!”

“세정아, 뭔 일이여?”

세정이 소리를 빽 지르는 바람에 주방에서 일을 하던 그녀의 조모가 얼굴을 쑥 내밀었다. 세정은 주방 쪽으로 얼른 다가가 할머니의 시선을 가리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할머니.”

“안세정. 주문 안 받을 거야? 배고파 죽겠는데.”

지훈이 홀에서 목소리를 조금 높였다. 세정은 속에서 부글부글 끓는 화를 간신히 참으며 이를 꽉 깨물었다.

“세정이 늬 아는 사람인 것 같은디, 어디 친구여?”

“아, 네. 할머니. 같은 학교.”

“아이고, 공부 잘했나 보네. 갸도. 우리 세정이처럼.”

세정은 난감한 표정을 애써 지우며 고개를 끄덕였다.

“할머니, 순댓국 하나만 빨리 해 주세요.”

“응 그러마.”

그녀는 재빨리 주방을 나왔다. 냉장고에서 보리차가 든 플라스틱 병과 컵을 꺼내 들고 그가 앉은 철제 테이블에 탁, 놓았다.

“전골은 양이 많아서 너 다 못 먹으니까 대충 순댓국 하나 먹고 돌아가.”

“뭐, 아무거나 상관없어.”

어깨를 으쓱한 지훈이 바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하릴없이 손을 까딱이기 시작했으므로 세정은 뒤를 돌았다. 배고파서 왔다는 그의 말에 신뢰가 가는 것은 아니었지만, 딱히 그와 얼굴을 마주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아니, 더 솔직히 말하자면 세정은 그와 부딪칠 만한 일은 최대한 피하고 싶었다. 그녀가 그의 아파트에서 다분히 충동적으로 그와 키스한 것은 열흘 전의 일이었다.

뽀뽀만 하고 끝내려고 했지만 결과는 그렇지 못했다. 키스는 끝도 없이 길어졌고 세정의 입술에서는 연신 이상한 신음 소리가 터져 나왔다. 지금 생각해도 부끄러운 일이었다.

지훈이 화장실에 간 사이 그의 침대에서 멍하니 어둑해진 밖을 바라보고 있던 세정은 문득 정신을 차리고 허겁지겁 도망치듯 그의 아파트를 떠났다. 그 와중에 USB를 제대로 챙긴 것은 지금 생각해도 대단한 일이었다.

집에 와서 떨리는 손으로 열어 본 지훈의 파일은 완벽했고, 발표도 성공적으로 끝났다. 연락 한 통 없던 팀원들은 미안하다며 그녀에게 상품권을 내밀었고, 세정은 그들을 싸늘히 노려보면서도 그것을 마다하지 않고 다 받았다.

그러면서도 지훈이 그녀에게 말을 붙일 기회는 주지 않았다. 그녀는 그가 다가오기만 해도 도망가는 것처럼 자리를 피했다.

지난 열흘 내내 그날 일에 대한 생각이 떠나지가 않았다. 불을 켜지 않은 실내가 어둑해질 때까지 키스하며, 거친 언행 안에 숨겨져 있던 그의 떨림이나 진심 같은 것을 살짝 엿본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생각의 끝은 언제나 같았다.

지훈은 그녀와 금전적인 수준이 너무 차이가 났고, 아예 다른 세상에 사는 인물이었다. 세정은 안 그래도 바빠서 연애를 할 여유가 없는 데다가, 그 상대가 지훈과 같이 막무가내라면 더더욱 무리였다.

저돌적으로 밀어붙이는 그를 더 이상 만나고 싶지 않아 자꾸 마주치는 일을 피하고 있던 와중에 그가 이곳까지 찾아온 것이다.

“너 왜 학교에서 나 쌩까냐?”

지훈이 불쑥 물었다. 여전히 시선은 휴대폰에 둔 채였다. 세정은 뒷정리를 시작하며 그에게 퉁명스레 대꾸했다.

“내가 특별히 널 알은체해야 할 이유라도 있어?”

지훈이 눈을 들어 그녀를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지금, 먹튀하겠다는 거지?”

“…무슨 헛소리니?”

빈 물통에 보리차를 채워 넣고 플라스틱 뚜껑을 탁, 소리 나게 닫으며 세정이 인상을 찌푸렸다.

“나랑 진하게 딥 키스 하면서 뒹굴 땐 언제고 입 싹 닫는 게, 먹고 튀겠다는 거잖아, 지금.”

시한폭탄 같은 그의 말에 세정은 퍼뜩 놀라며 고개를 돌려 주방을 바라보았다. 다행히도 그녀의 할머니는 주방 깊숙한 곳에 있는 냄비에서 돼지머리 고기를 빼내고 있는 중이었다.

“야, 너 조용히 안 해?”

세정이 그를 향해 눈을 부릅뜨며 작게 내뱉자 지훈이 피식 웃었다.

“그러니까 나 피하지 마. 어. 여기 봐. 하나, 둘.”

그의 손에 들린 휴대폰에서 찰칵, 하는 소리가 났다. 세정은 당황해서 눈을 깜빡였다.

“야. 너 지금 뭐 한 거야?”

“사진 찍었는데.”

“죽을래? 당장 지워.”

“잘 어울려서, 앞치마.”

세정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지금 그녀의 꼴이 말이 아닐 거라는 것은 거울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소주 회사에서 경품으로 나온 촌스러운 초록색 앞치마의 허리끈을 질끈 동여매고 땀에 절어 있는 모습을 보며 잘 어울린다니. 드러낸 이마에서 뜨끈하게 김이 나는 것 같았다.

세정은 수치심에 귀까지 뜨거웠다. 그녀는 구멍이 숭숭 뚫린 슬리퍼를 끌고 성큼성큼 그에게 다가갔다.

“너 휴대폰 내놔.”

지훈이 바지 주머니에 제 휴대폰을 쑥 집어넣었다.

“지금 뭐 하는 거야?”

“가져갈 수 있으면 가져가 보든지.”

그가 양팔을 벌려 보였다. 원하면 직접 빼 가라는 소리였다. 세정은 폭이 좁아 긴 다리에 보기 좋게 달라붙는 그의 바지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그의 호주머니 안을 더듬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몰카는 범죄인 거 모르니?”

지훈이 어이없다는 듯 피식거렸다.

“네 눈앞에서 대놓고 찍었는데 무슨 몰카야.”

“너 진짜 유치하게 이럴래?”

“트레이드하자, 그럼.”

“무슨 헛소리야?”

세정이 눈을 가늘게 뜨자 지훈이 고개를 까딱거렸다.

“너도 침대에서 찍은 셀피 한 장쯤은 있을 거 아냐. 방금 찍은 네 사진이랑 교환하자고.”

“그딴 거 없거든?”

“그럼 어쩔 수 없네. 협상 결렬.”

“이 또라이가 진짜….”

“세정아, 음식 가져가라!”

주방에서 할머니가 소리를 치자 지훈이 그녀를 향해 입술을 올려 씨익 웃었다.

“부르시잖아.”

세정은 인생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엄청난 폭력을 휘두르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주먹을 부르는 얼굴이란 바로 도지훈의 면상을 뜻함이 틀림없었다. 세정은 흰 눈으로 그를 잔뜩 흘겨보며 주방으로 들어갔다.

쟁반 위에 오른 뜨끈한 순댓국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 나왔다. 할머니는 그녀의 마음도 모르고 있는 재료란 재료는 다 때려 넣었는지 푸짐한 순댓국을 준비한 참이었다.

“이건 특 순댓국보다 더 크잖아요, 할머니.”

세정이 못마땅한 표정을 짓자 할머니가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우리 세정이 친구라면서. 빨리 가져다줘라.”

솔직히 말하자면 지훈이 이런 음식에 손을 댈 것 같지도 않았다. 싸구려 커피는 먹지도 않는다고 말하던 그의 오만한 표정이 지금도 눈앞에 생생했다. 지훈이 그런 놈인 줄도 모르고 그녀와 같은 학교라는 이유로 이것저것 재료를 아끼지 않은 할머니의 정성에 미간이 시큰했다.

세정은 울컥거리는 마음을 애써 진정시키며 쟁반을 들고 주방을 빠져나왔다. 탁, 소리가 나게 테이블에 쟁반을 내려놓은 후 따끈한 순댓국과 공깃밥 하나를 그의 테이블 위에 놓았다.

“자.”

“이거, 인간이 먹을 수 있는 거 맞지?”

살살 긁어 대는 지훈의 말에 그녀의 속에서 천불이 일었다. 세정이 이를 꽉 깨물고 그를 보았다.

“너 진짜….”

“농담이야. 맛있겠다. 잘 먹을게.”

지훈이 피식 웃으며 옆의 수저통에서 숟가락을 하나 뺐다. 세정은 그가 휘, 휘, 숟가락으로 국밥을 젓는 모습을 벌게진 눈으로 바라보다가 다시 냉장고 앞으로 돌아왔다.

“억지로 안 먹어도 되니까 그냥 가. 제발.”

세정의 입술에서 일그러진 목소리가 흘렀다. 지훈은 그런 그녀의 말은 들은 척도 않고 우아한 손길로 뽀얀 국물을 떠서 입 안으로 삼켰다. 꿀꺽, 삼키는 입매가 얄밉게도 단정했다.

차락.

국물을 맛본 그가 수저통에서 젓가락을 꺼내 들었다. 젓가락에 걸린 순대를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한 김 식은 음식을 다시 입에 넣고 얌전히 씹었다.

길쭉하게 잘린 머리 고기와 내장이 연이어 그의 입 안으로 사라졌다. 세정은 물통에 보리차를 채워 넣는 것도 잊은 채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어디까지 하나 두고 볼 생각이었다.

자그마한 밥공기의 뚜껑이 열리더니 지훈이 따끈한 밥을 숟가락으로 커다랗게 떴다. 그가 국물을 한 번 먹고, 밥을 떠서 씹었다.

몇 술 뜨는 흉내만 내다가 수저를 집어 던질 것 같았던 그녀의 예상과는 달리, 지훈은 느리지만 깔끔하게 음식을 해치우고 있었다. 세정은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지었다.

씹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후루룩 국물을 들이켜는 소리나 흔하게 뜨거운 김을 부는 소리 역시 없었지만 그릇은 착실하게 비워지는 중이었다.

세정은 그런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냉장고를 열어 깍두기와 새우젓을 챙겨 그의 테이블에 턱, 턱, 차례로 놓았다. 수저로 국을 뜨던 지훈이 그녀를 향해 고개를 치켜들며 짙은 눈썹을 휘었다.

“뭐야? 사이드를 왜 이제 줘?”

“싸구려는 안 먹는다는 소리나 지껄이던 네가 그 커피 값이랑 별반 차이도 없는 순댓국을 진짜 먹을 줄은 몰랐으니까.”

지훈이 뭐라고 입을 열려는 순간 가게의 미닫이문이 둔탁한 소리를 내며 다시 열렸다.

“아유, 세정아, 오늘 너무 바빠서 우리 밥도 못 먹었는데, 혹시 순댓국 하나 포장 될까?”

앞집의 미미 분식집 아주머니였다. 세정은 얼른 표정을 풀고 그녀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아직 재료는 조금 남아 있을 터였고 다른 손님들이면 몰라도 시장 사람들에게는 야박하게 굴면 안 된다는 것이 그녀의 할머니가 늘 하는 말씀이었다.

“문 닫을 시간인데 미안.”

젊은 미혼모인 미미 아주머니가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양손을 모았다. 세정은 그녀를 보며 웃어 보였다.

“아니에요. 금방 해서 가져다드릴게요. 가게 못 비우시잖아요.”

“그럴래? 진짜 고마워. 간다. 우리 미미 혼자 있어서.”

서둘러 가게를 나가던 미미 아주머니가 순댓국을 먹는 지훈을 힐끔 바라보더니 인중을 쑥, 길게 늘이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세정은 눈짓을 보내는 그녀에게 난감한 얼굴을 감추고 씁쓸하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잡지를 뚫고 나온 것 같은 그의 외모가 가게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은 비단 세정 혼자만 느낀 것이 아닌 것이다. 이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행동하는 것은 지훈, 한 사람뿐이었다.

미미 아주머니가 돌아간 후, 세정은 할머니께 순댓국을 하나 더 부탁하고는 부지런히 뒷정리에 열중했다. 식사를 하고 있는 지훈이 계속 신경이 쓰였지만 가게 문은 닫아야 했다.

“세정아, 미미한테 포장 가져다주거라.”

“네, 할머니!”

그녀는 서둘러 순댓국을 포장 용기에 담고 테이프로 뚜껑을 꼼꼼하게 붙인 후, 비닐 봉투 안에 넣었다. 남아 있는 옛날 소시지 부침도 할머니 몰래 따로 챙겨 넣은 후 가게를 나섰다.

“배달도 가는 거야?”

지훈이 여전히 수저를 움직이며 뻑뻑한 미닫이문을 여는 그녀를 향해 물었다.

“알 거 없고, 금방 올 테니까 넌 여기서 딱 기다리고 있어.”

그의 순댓국 뚝배기는 거의 비워져 있었다. 할머니가 가득 담아 준 양이 적지 않았는데 그걸 결국 다 먹은 모양이었다.

“다녀와.”

지훈이 손을 들어 까딱, 흔들어 보이는 모습을 보며 세정은 가게 문을 나섰다. 돌아와서는 할머니께 잠깐 나갔다 오겠다고 말하고 그를 끌고 나온 후, 심각하게 이야기를 할 생각이었다.

그녀는 그와 더 이상 부딪치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다고. 그러니까 제발 사람을 쫓아다니면서 귀찮게 하지 말아 달라고.

탁.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으며 지훈은 마지막 한 숟가락을 끝냈다. 천장에 걸려 있는 냅킨 걸이에서 냅킨을 뽑아 입가를 정리한 후, 그는 바지 주머니 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아까 직접 찍은 세정의 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그의 입가에 소리 없는 미소가 걸렸다.

“우리 세정이네?”

주방에서 세정의 조모가 다가오더니 뒤에서 지훈의 휴대폰에 있는 사진을 보고 알은체했다. 지훈은 놀라지도 않고 씩 웃으며 그녀에게 응수했다.

“네, 맞아요. 제가 찍었어요.”

“우리 손녀 예쁘지? 텔레비전 나와도 되겠지?”

지훈이 그녀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애들이랑은 차원이 다르게 예쁘죠. 일단 골이 안 비었잖아요. 똑똑하고.”

“그건 그렇지. 근데… 혹시 그짝이 우리 세정이 애인이여?”

조모의 물음에 지훈이 찢어지려는 입꼬리를 애써 아래로 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잘 어울리죠?”

“근디… 우리 세정이는 애인 없다카든디?”

지훈이 헛기침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정의 조모는 천장에 머리가 닿을 정도로 키가 큰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가 가게에 들어오고 난 후 세정이 얼굴이 벌게진 채 당황해하는 것이 이상하다 생각해서 세정이 없는 사이에 그에게 말을 붙여 본 참이었다. 지훈이 대답 대신 그녀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잘 먹었습니다. 또 올게요.”

“왜, 벌써 가게?”

“네.”

“세정이 올 때까지 기다리지 왜?”

“좋은 말 들을 것 같지가 않아서, 미리 도망가려고요.”

지훈이 씩 웃었다. 조모는 피부가 하얗고 기생오라비같이 생긴 눈앞의 청년이 그의 말마따나 왠지 세정에게 썩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다.

굽실거리며 예의를 차리는 것은 아니었지만 기죽지 않는 자신감이 마음에 들었고, 다 떠나서 일단 먹성이 좋은 것부터가 합격이었다.

또한 옆으로 짝 찢어진 게 여자깨나 울리게 생긴 눈 안에 박힌 커다란 눈알이 제대로 된 여자를 볼 줄 안다는 점이 플러스 요인이었다.

*뉴토끼_우아샷 * 공금,갠소

“할머니, 여기 있던 애 갔어요?”

“그려, 후딱 먹고 갔어.”

이제 유치원에 들어간 꼬마 미미가 세정의 손을 붙잡는 바람에 분식집에서 조금 시간을 지체했을 뿐이었다. 서둘러 돌아온 가게에 지훈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세정은 난감해져 입술을 씹었다.

“얼른 정리하거라, 세정아.”

할머니가 가게의 문을 안에서 잠그며 목소리를 높였다. 세정은 서둘러 앞치마를 벗었다.

“네, 할머니. 얼른 돈 세고 설거지 제가 할게요.”

“그랴. 나는 밥 차리마.”

긴 하루였으므로 얼른 마감을 하고 집에 가는 것이 급선무였다. 내키지 않더라도 나중에 학교에서 지훈을 만나 따로 이야기를 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세정은 후, 하고 크게 숨을 내쉰 후 칠이 여기저기 벗겨진 돈통을 들고 식당 한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천 원짜리 지폐가 수북하고 만 원짜리도 제법 되었다. 지훈이 와서 그녀의 속을 긁었던 일도 잊고 세정은 즐겁게 돈을 셌다. 기분이 좋아서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 테이블에 앉아 지폐를 색깔별로 열심히 착착 분류하는 그녀의 손길이 문득 멈추었다.

“…….”

세정은 손등으로 눈을 비볐다. 심장이 갑자기 쿵쿵거리며 아플 정도로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입 안이 바짝 마르고 순식간에 머리털이 쭈뼛 섰다. 잠시 뚫어져라 수표를 바라보고 있던 세정이 마침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주방으로 들어갔다.

“하… 할머니.”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세정은 흠, 하고 목을 거칠게 가다듬고 그녀를 다시 불렀다.

“할머니.”

“응, 아가.”

“이거, 뭐예요?”

커다란 밥통을 열고 주걱으로 밥을 푸던 할머니가 세정을 힐끔 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손에 들린 수표를 발견하더니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아아. 아까 그 총각. 거스름돈은 한사코 필요 없다길래, 그냥 받았다. 국 먹을 거지, 아가?”

“할머니!”

세정의 얼굴이 엉망으로 구겨졌다. 머릿속이 지끈거리고 심장이 미치도록 빠르게 쿵쾅거렸다. 연말에 구세군 모금함에서 수표가 발견됐다는 미화를 뉴스로 들은 적이 있었다.

그때 그녀가 뭘 떠올렸더라. 미친 척하고 구세군 바구니에 손을 넣어 그걸 훔치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망상일 뿐이었다.

“아이고, 왜 소리를 질러!”

도리어 놀란 할머니가 그녀에게 호통을 쳤다. 세정은 울먹거리며 그녀를 보았다. 마른 입술이 파들파들 떨렸다. 온몸에 땀이 확 식는 것 같았다.

“이런 걸…. 덥석 받으면 대체 어떻게 해요!”

“세정이 네 친구라며? 거스름돈을 줘도 나중에 네가 챙겨 주면 됐지, 뭔 호들갑이여? 아니, 그리고… 막말로다가 잘 먹었으면 10만 원 정도 내는 게 뭐 그리 큰 대수여? 차려입은 꼴 보니까 있는 집 자식 같던데….”

“할머니이!”

그녀의 말을 자르며 소리치는 세정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세정의 조모가 놀라서 눈을 찌푸렸다.

“아니 너는 왜 울고 지랄이여!”

“이거 10만 원 아니잖아…! 이게 10만 원으로 보여요!”

세정이 수표를 쥐고 울부짖었다.

“그럼 뭐여? 100만 원이라도 되간?”

“이거 1억이잖아! 여기 쓰여 있잖아요… 여기, 한글로 똑바로 적혀 있잖아!”

쨍그랑!

세정의 조모의 손에서 철제 밥공기가 시멘트 바닥에 떨어졌다. 바닥에 하얀 밥알이 흩어졌다. 세정은 숨을 몰아쉬며 원망 섞인 눈으로 할머니를 보았다. 뚝, 뚝, 뜨거운 눈물이 그녀의 뺨을 적시며 아래로 흘렀다.

“이걸 받으면 어떻게 해요… 이런 걸… 흐윽….”

조모의 주름진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놀라고 당황한 그녀의 입에서 두서없는 말이 이어졌다.

“아이고야, 세정아. 나는 몰랐다. 나는 10만 원짜리 수표밖에 본 적이 없어 가지고… 확인도 제대로 안 하고 색깔만 보고 그냥 집어넣었다, 세정아. 그 총각이 널 맘에 들어 하는 것 같아 가지고… 그 정도는 받아도 되지 않을까 했는데… 이 할미가 미쳤는갑다, 세정아… 손녀딸내미 팔아먹어서 내가 무신 벌을 받을라고, 아이고. 세정아. 내가 노망이 났는갑다. 얼른… 얼른 가져다줘라, 세정아… 응? 이 할미 손 떨린다, 세정아. 아이고, 아가….”

세정은 그만 바닥에 주저앉아 소리 내어 엉엉 울고 말았다. 그녀의 할머니는 그런 사람이었다. 10만 원은 모른 척하고 받을 수 있어도 그 이상의 액수에는 두려움부터 앞서는 인생이었다.

일평생을 시장 바닥에서 고생만 하고 살아온 조모의 삶을 그녀가 가장 잘 알기에 세정은 더욱 서글펐고, 자신의 인생 역시 별반 다르지 않다는 지독한 현실감에 눈물이 멈추지가 않았다.

누군가에게 1억은 한 끼 밥값으로 지불할 수 있는 돈이지만, 그녀와 조모에게는 평생 만져 본 적도 없는 돈이었다.

“으흑… 으흐흑….”

두려워 차마 구기지도 못하는 수표 뒤에 오만한 필체로 휘갈긴 지훈의 글씨가 똑똑히 보였다.

내가 입에 대는 것 중에 싸구려는 없어.

그중엔 너도 포함이야, 안세정.

세정은 손등으로 뜨거운 눈물을 훔치며 바닥에 주저앉아 한참을 울었다. 자존심이 상해 견딜 수가 없었다.

그녀는 연애를 한 번도 해 본 적은 없지만 적어도 상대와 대등한 위치에 있고 싶다고 생각했다. 가진 것은 없지만 할머니도, 그녀도 누구에게 고개를 숙이고 산 적 또한 없었다.

지훈은 이 수표를 남기며 뭐라고 생각했을까. 이 돈이면 안세정이 고개를 숙이며 못 이기는 척 그에게 넘어올 거라고 생각했을까?

“하아… 흐윽….”

세정은 미친 척하고 그의 손을 잡는 상상을 했다. 그러면 편해지겠지. 재벌 집 아들과 연애를 하면 적어도 데이트할 때 커피값을 걱정하지는 않아도 되겠지. 영화표 한 장에 벌벌 떨지 않아도 되겠지.

그 대가는 뭘까. 지훈이 하자는 대로, 원하는 대로 움직여 주는 인형 같은 삶일까.

눈물이 쉬지도 않고 그녀의 감은 눈을 타고 주룩주룩 흘러내렸다.

이로써 지훈과 절대로 사귈 수 없는 이유가 하나 더 늘었다. 그녀는 누군가에게 돈으로 살 수 있는 물건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문제는 그녀의 마음속에서 이런 미친 짓을 벌이는 지훈의 존재감이 점점 더 커져 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방법으로 다가오는 그에게 결국 휘말려 버릴 것 같은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가장 약한 부분을 치고 들어오는 도지훈이 치사하면서도 동시에 가슴이 뜨겁게 들끓었다.

자괴감이 그녀의 온몸을 휩쓸었다. 세정은 스스로를 벌하듯 입술을 아프게 꽉 깨물고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안 돼.

절대 안 되는 일이야.

***

“도지훈.”

세정은 강의실을 빠져나가는 지훈을 복도에서 불러 세웠다. 지훈이 걸음을 멈추고 삐딱하게 벽에 기댔다. 그가 흥미로운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나랑 잠깐 이야기 좀 하자.”

지훈의 옆에 서 있던 태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지난번에 세정에게 지훈의 마음을 귀띔해 주었지만 세정이 별다른 반응이 없어서 이대로 끝나는 듯했었다. 그렇기 때문에 세정이 갑자기 지훈에게 말을 건 것이 뜻밖이었다.

놀란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주변을 지나다니던 이들도 안세정과 도지훈이라는 뜻밖의 조합에 의외라는 듯 말없이 시선을 교환했다.

과에서 성적은 가장 우수하지만 늘 아웃사이더로 조용히 지내는 탓에 세정은 친구가 거의 없었다. 그런 그녀가 도지훈을 불러 세운 것이다. 지훈은 성질이 고약하고 제 맘에 들지 않으면 사람을 무시하기 일쑤였다.

세정이 그에게 무슨 볼일이 있는지보다도 지훈의 입에서 튀어나올 대답에 모두의 이목이 집중되어 있었다. 사람들의 시선을 그대로 느끼며 지훈이 세정을 향해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밥은 먹었어?”

복도에 조용한 술렁임이 일었다.

“뭐?”

세정이 인상을 쓰자 지훈이 태환을 힐끗 보았다. 그러더니 흠, 하고 목을 가다듬더니 다시금 정중하게 입을 열었다.

“안 먹었으면 나가서 같이 식사라도 하면서 이야기할까?”

그들을 둘러싼 수십 쌍의 눈동자가 동시에 커졌다. 지훈은 다가오는 여자들에게 하도 싹수없게 굴어서 여성 혐오증이 있는 것 아니냐고 수군거림을 받을 정도였다. 그런 그가 여자에게 같이 밥을 먹자고 청했다는 소리는 들어 본 적도 없었다.

비단 도경물산의 막내아들이라는 도지훈의 배경 때문이 아니더라도 그의 외모는 지나가다가 한 번쯤 멈추고 뒤를 돌아볼 만한 수준이었다.

날카로운 얼굴선과 오만할 정도로 잘 빚어진 이목구비는 까칠하면서도 화려한 매력을 풍겼고 모델처럼 큰 키와 훌륭한 인체 비율은 그의 외모에 빛을 더했다.

그가 사귀는 여자가 없다는 소리에 용기 내어 대시한 이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결과는 처참했다. 떨리는 고백을 못 들은 척 무시하는 것은 양반이었다.

자존심이 상해 그의 집까지 찾아간 선배 하나에게는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쌍욕을 지껄였다고 했다. 냉기가 뚝뚝 떨어지는 그가 세정에게 건넨 제안에 사람들이 놀라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밥은 됐고, 이거.”

세정이 줄곧 손에 들고 있던 봉투 하나를 그에게 탁, 밀치듯 건넸다. 지훈이 눈을 내리깔아 그의 손에 쥐어진 봉투를 보았다.

그녀가 이렇게 나올 줄 예상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이런 식으로 사람들이 다 보는 앞에서 공개적으로 돌려받게 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의 입술에 피식 작은 웃음이 걸렸다. 최대한 매너를 가장했던 지훈의 목소리에 순식간에 날카로움이 뱄다.

“왜, 액수가 작아?”

그를 마주한 세정의 눈동자에 조용한 분노가 일었다. 참으려고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녀는 지훈을 노려보며 입술을 아프게 꽉 한 번 깨문 후 입을 열었다.

“네가 먹은 밥값은 7천 원이야. 7천 원 제하고 거슬러 주고 싶었는데 생각해 보니까 대학 동기한테 밥 한 번 못 사 줄까 싶더라고. 어제 네가 먹은 건 내가 사는 걸로 할게.”

그녀는 그를 보며 웃어 주고 싶었지만 안면 근육이 마비될 것 같아 그만두고, 대신 흰 눈자위만 보일 기세로 그를 노려보았다.

“나는 누구한테 뭘 얻어먹은 적이 없어. 거스름돈 줄 거 아니면 그냥 가져가.”

1억에서 7천 원을 제하면 대체 얼마를 돌려줘야 할까. 세정은 지훈이 손가락에 끼워 귀찮다는 듯 도로 내미는 봉투를 보며 이를 갈았다.

“저리 치우라고.”

세정은 처음에는 정말로 밥값을 제하고 돌려주는 오기를 부려 볼까도 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수표를 바꾸러 은행에 갔을 때 혹시라도 이상한 문제가 발생할까 싶어 두려웠던 탓이었다.

수표 뒤에 그녀의 이름과 함께 적힌 문구는 그 돈을 마치 화대처럼 느껴지게 했다. 세정은 도저히 그 수표를 창구 직원에게 내밀 자신이 없었다.

그렇게 큰 액수의 돈을 남을 시켜서 전달하는 것도 마음에 내키지가 않았고 우편으로 보내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했다.

그녀는 하룻밤을 꼬박 새워 가며 고민했다. 이럴 바에는 그대로 수표를 찢어 버리고 지훈을 영영 무시할까 싶었지만 그녀에게 있어서 돈이란 천 원짜리 한 장이라도 함부로 다뤄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결국 그녀는 지훈에게 그대로 수표를 돌려주기로 마음을 먹었다. 집에서 마을버스를 타고 지하철역으로 이동하는 순간을 포함해 강의 시간 내내, 세정은 수표가 든 봉투에 신경을 바짝 곤두세워야 했다. 하얀 종이에 불과한 수표는 그녀가 들고 있는 것만으로도 너무도 무거운 액수였다.

“그래? 알았어.”

지훈이 어깨를 으쓱하더니 기다란 손을 움직였다.

찌익.

그녀가 밤새도록 신경이 쓰여 잠을 못 이뤘던 수표가 들어 있는 하얀 봉투가 길쭉한 손가락에 의해 반으로 찢기더니 복도 바닥에 나뒹굴었다.

세정의 눈이 경악해 확 크게 뜨였고, 작은 입술이 파들파들 떨렸다. 파랗게 질린 얼굴에서 가느다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너 지금 뭐 하는 짓이야?”

지훈은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너한텐 이제 필요 없는 거 아니었나? 나한테도 그렇거든.”

“야…. 너 당장 저거 못 주워!”

그녀의 목소리가 높아졌지만 상대는 태연자약했다.

“됐고, 밥이나 먹으러 가자. 어젠 네가 샀으니까 오늘은 내가 살게.”

미끈히 웃는 그를 바라보는 세정의 가슴속에서 뜨거운 불길이 치솟았다. 그녀의 어깨에 걸린 가방이 툭, 아래로 떨어졌다.

그녀는 진심으로 눈앞의 녀석에게 분노했다. 세정은 맹세코 만 원짜리 한 장에 전전긍긍하는 자신의 인생과 재벌 집 아들로 태어난 도지훈의 인생이 같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 그가 벌인 일은 애들 장난으로 치부할 일이 아니었다. 그가 찢어 버린 것이 1억이 아니라 천 원짜리 한 장이었다고 해도 그녀는 똑같이 분노했을 것이다.

수표 때문에 고민한 것은 비단 세정 혼자만이 아니었다. 말은 길게 하지 않았지만 할머니까지 걱정하며 밤에도 잠을 못 이루고 몇 번이나 문단속을 한 것은 바로 저 돈 때문이다.

밤새워 고민한 그들과는 달리 그 대상이 무엇이든 티끌만큼 가볍게 행동하는 지훈의 모습에 세정은 화가 머리끝까지 끓어올라 폭발하는 기분이었다.

“당장 저거 주우라고 했잖아!”

강의실 복도가 꽝꽝 울리도록 세정이 소리를 버럭 지르자 주변 사람들이 그녀를 보며 수군거렸다.

“쟤, 갑자기 왜 저래?”

“몰라. 미쳤나 봐.”

지훈이 그녀에게 한 발짝 다가서자 주위 사람들은 더욱 놀랐다. 혹시 그가 세정에게 손을 올리지는 않을까 생각했던 탓이었다. 지훈이 여태껏 학교에서 벌인 일련의 사건들을 생각해 봤을 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나는 땅에 떨어진 거 주워 본 적 한 번도 없는데. 거지도 아니고.”

팔짱을 낀 채, 부들부들 떠는 세정을 보며 나직한 목소리를 내는 지훈을 향해 세정이 쓴 약을 내뱉듯 중얼거렸다.

“입 닥치고 당장 주워.”

하얀 얼굴이 붉어져 잔머리가 삐져나온 동그란 이마까지 달아올라 있었다. 자그마한 귀와 목덜미까지 당근처럼 빨갰다.

지훈은 그녀의 보드라운 입술이 어떤 맛이었는지를 떠올리며 혀로 제 입술을 축였다. 그가 고개를 살짝 숙여 그녀에게 작게 속삭였다.

“주우면 뭐 해 줄 건데.”

“뭐?”

“이거 주우면 네가 나한테 뭐 해 줄 거냐고.”

“너같이 최악인 새끼한테 해 줄 건 아무것도 없어. 그러니까 빨리 주워.”

지훈은 바들바들 떠는 그녀를 보며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이번에도 협상 결렬이네.”

그는 바닥에 떨어진 그녀의 가방을 슥 들어 올렸다. 커다란 손으로 먼지를 한 번 툭, 털어 세정의 어깨에 걸쳐 준 후, 분노에 휩싸여 말을 잇지 못하는 세정을 두고 훌쩍 뒤를 돌았다.

“가자.”

그의 옆에 서 있던 무리들이 우르르 지훈을 따라나섰다. 시선을 나누던 주위 사람들이 대놓고 그녀를 힐끔거리며 수군거렸다.

“뭐야, 안세정도 도지훈한테 차인 거야? 저거 혹시 무슨 편지 같은 건 아니겠지?”

“돈 아니야?”

“에이 설마.”

세정은 그의 긴 다리가 뚜벅거리며 복도에서 멀어져 가는 것을 노려보고 있다가 주먹을 꽉 쥐었다. 복도 바닥에 두 조각이 된 봉투 안에서 찢어진 1억짜리 수표가 마치 그녀를 놀리듯 언뜻언뜻 보였다.

가슴속에서 이는 분노의 불길은 그녀의 머릿속을 새하얗게 태우고 있었다. 세정은 찢어진 수표를 주워 손에 그러쥔 후, 앞으로 빠르게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야, 도지훈 이 개새끼야, 너 거기 안 서?!”

복도에 그녀의 커다란 목소리가 꽝꽝 울려 퍼졌다. 복도 끝, 건물을 빠져나가려던 그가 멈춰서 뒤를 돌았다. 세정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달려오고 있었다. 꽉 올려 묶은 기다란 머리카락이 날릴 정도로 빠르게 뛰는 그녀를 보며 지훈이 입술을 올려 웃었다.

초여름 햇살이 창문을 뚫고 들어왔다. 세정은 눈이 부셔 인상을 찡그리며 지훈을 향해 뛰었다. 인생을 그따위로 장난같이 살지 말라고 따귀를 때릴 생각이었다. 1억이 장난 같으냐고, 너한테는 모든 것이 그렇게 다 쉬우냐고 소리를 지를 생각이었다.

“너… 너…!”

그에게 뛰어들며 수표가 잡힌 주먹을 휘두르는 세정을 지훈이 양팔을 벌려 꽉 품에 안았다.

“나이스 캐치.”

그녀가 그의 품 안에서 발악하며 소리를 질렀다.

“이거 안 놔! 놔!”

그의 어깨와 등을 주먹으로 두드리며 소리를 질렀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다만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목덜미와 등을 감싼 채, 그녀의 어깨에 날카로운 턱을 묻고 작게 웃으며 속삭일 뿐이었다.

“지금 우리 보는 사람들 표정 어떤 줄 알아? 다들 눈알 튀어나오기 일보 직전이야.”

“그러니까 놓으라고!”

지훈은 그녀를 놔주기는커녕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뒤통수를 달래듯 천천히 쓸었다.

“처음부터 조용한 데서 나랑 단둘이 밥 먹으면서 이야기했으면 남들 앞에서 이런 꼴 안 보이고 좋았잖아. 안 그래?”

“하아… 야, 도지훈. 넌 모든 게 장난 같지?”

“그럴 리가.”

세정이 그의 커다란 품에서 벗어나려 안간힘을 썼지만 몸을 안아 오는 팔은 단단했다. 코끝에 온통 지훈이 쓰는 향수 냄새가 가득했다. 새큼하고도 농밀한 향에 머리가 아찔했다.

“내가… 내가 네 눈에는 그따위로 우스워 보이지?”

“아니. 내 눈에 넌 그냥 존나게 예뻐 보여.”

“말로 할 때 이거 놔.”

“싫은데.”

세정은 이를 꽉 물었다. 머리에 과부하가 걸리고 속이 울렁거렸다.

“너… 후회할 거야.”

“내가 왜?”

세정은 차마 머릿속에서 곱씹을 여유도 없었다. 정제되지 않은 문장이 머리를 거치지도 않고 그녀의 입 밖으로 툭 꺼내졌다.

“지금 이거 안 놓으면, 너 평생 나랑 섹스할 기회 없을 줄 알아.”

그것은 어쩌면 말도 안 되는 협박이었다. 그리고 지훈은 그 협박에 보기 좋게 걸려들었다. 그의 짙은 눈썹이 꿈틀, 하더니 그녀를 꽉 안고 있던 큰 손에 힘이 살짝 풀렸다.

“지금 그거… 트레이드야?”

허스키하게 깔려 낮아진 그의 목소리에 흥분이 짙었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도지훈은 상종을 못 할 인간이었다. 어이가 없어져 세정은 숨을 몰아쉬며 이를 갈았다.

“마음대로 생각해.”

지훈이 팔의 힘을 완전히 푸는 순간, 세정은 그의 어깨를 밀친 후 세차게 그의 뺨을 날렸다.

짝!

그들을 지켜보는 사람들의 입술이 소리 없이 벌어졌다. 그의 옆에 있던 태환과 지훈의 친구들이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지훈의 뺨을 때린 세정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너, 다시는… 다시는 돈 가지고 장난하지 마, 이거 경고야.”

지훈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싸늘해지자 그의 옆에서 물러선 친구들이 불안한 시선을 나누었다. 얼굴 한쪽이 붉어진 그가 그녀에게 한 발짝 다가섰다. 세정의 눈동자에 물기가 번져 반짝반짝 빛이 났다.

“가… 가까이 오지 마.”

지훈은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서며 그녀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그는 벌써 두 번이나 그녀에게 뺨을 맞았다.

맞은 것이 충격이라면 충격이었지만 때릴 때마다 세정의 표정이 너무 볼만해서 화가 나기보다 어이가 없었다. 맞은 쪽은 그였는데 울먹이는 것은 늘 그녀 쪽이었다.

“흑… 가까이 오지 말라고…!”

지훈이 피식 웃더니 팔을 뻗어 그녀를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세정은 가늘게 떨고 있긴 했지만 그를 밀어내지는 않았다.

“세정아.”

그가 그녀의 귓가에 대고 이름을 불렀다. 세정이 다시금 움찔했다. 그는 그녀의 뒤통수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난 돈 가지고 장난한 적 없어.”

“…그게 장난이 아니면… 대체 뭔데.”

세정이 울음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내뱉었다. 그가 그녀의 귓가에 얼굴을 문질러 대며 그녀의 체취를 맡았다. 속삭이는 그의 목소리는 숨이 막히게 다정했다.

“너 열받게 해서 나한테 달려오게 만드는 데 1억 든 거야. 날 투명 인간 취급하던 네가 내 이름 먼저 부르게 만드는 데 딱 1억 든 거라고.”

“…하아….”

그의 대답에 뭐라고 답을 할 수가 없어 세정은 숨만 크게 몰아쉬었다. 그런 그녀를 끌어안고 지훈이 어깨를 들썩이며 키득거렸다.

“네가 생각해도 너란 여자, 꽤 비싸지?”

세정의 눈에 매달려 있던 무거운 눈물방울이 결국 지훈의 셔츠를 적시며 떨어졌다.

“그래도 괜찮아.”

“흑….”

눈물이 터진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가 즐거운 목소리로 세정을 달랬다.

“너 정도면 비싸게 굴어도 돼. 나는 싸구려는 취급 안 하거든.”

“너는… 도지훈 너는 진짜, 제정신이 아니야.”

“맞아. 싸대기를 쳐 맞았는데도 너랑 또 키스하고 싶어 뒈지겠는걸?”

지훈이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 다 들릴 정도로 또렷하게 내뱉었다. 세정은 그의 품 안에서 차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그녀는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그의 너른 가슴에 아예 확 묻어 버렸다.

지훈의 왼쪽 가슴에서 그녀의 뜨거운 호흡이 번졌다. 지훈이 그녀를 힘주어 안은 채, 주변을 보고 입을 열었다.

“뭘 봐, 이 씨발 새끼들아.”

끝이 잔뜩 올라간 그의 기다란 입꼬리에서 의기양양한 미소가 번졌다.

“커플이 사랑싸움하는 거, 처음 보냐?”

꽉 쥔 세정의 주먹에서 수표가 엉망으로 구겨져 떨렸다. 그녀는 그의 품에 안겨 눈을 감아 버리고 말았다. 두꺼운 창문을 뚫고 들어온 햇살이 엉망으로 그녀의 몸을 찔러 버릴 듯 내리쬐고 있었다.

매미가 방정맞게 쎄에, 울어 대던 초여름. 세정이 학교 내에서 공식적으로 지훈의 연인이 된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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