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결혼은 다정한 원수와-42화

42화

눈을 뜬 렌티아는 망막을 짓누르는 어둠에 겁먹었다. 아직 새벽까지 한참 남은 밤중이었다.

그녀가 가늘게 떨며 습관적으로 옆을 더듬자, 커다란 침대 위에 빈자리만 느껴졌다.

“…흑.”

기어이 울음이 터졌다. 렌티아는 입술을 깨물며 배를 껴안았다. 태중의 아기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아무리 애써도 눈물은 그치지 않았다.

‘제발, 어서 돌아와.’

그녀는 속으로 간절히 빌었다.

혼자서 뭐든 잘하던 냉정하고 강인한 그녀는 한 사람 한정으로 연약하게 물러져, 타인의 온기 없이는 곤히 잠들 수 없는 몸이 되었다.

‘그대가 곁에 없으면 너무 힘드니까, 제발…….’

렌티아는 자신을 껴안고 자장가를 속삭이는 키르타를 상상하며 겨우 다시 잠들었다. 이번에 악몽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단꿈도 없었다.

강철 같은 황제도 외로움 앞에서는 그저 위로가 필요한 한낱 인간이었다.

* * *

다음 날 아침, 엘리제는 황제궁 주방에 갔다. 세숫물을 올리기 위해 황제를 찾아갔을 때, 그녀의 안색이 너무 퀭한 탓이었다.

‘따뜻한 꿀물이라도 타 드려야겠어.’

충성스러운 시녀는 즉시 주군의 건강을 걱정했고, 안절부절못하는 시녀에게 황제는 단지 악몽을 꿨을 뿐이라고 침착하게 대답했다.

그러나 엘리제는 안심할 수 없었다.

평소처럼 차분하고 고상한 와중에도 렌티아는 아슬아슬해 보였다. 대공이 출정한 뒤로 늘 그런 모습이었다.

‘이제 홑몸도 아니신데 걱정거리가 산더미처럼 쌓였으니 위태로울 만도 하시지.’

엘리제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녀는 아랫사람으로서 주제를 알고 감히 황제 앞에서 대놓고 걱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누군가를 염려해 주는 것 또한 때로는 동등한 관계에서만 허락된 특권이므로.

그런 이유로 엘리제는 키르타의 신속한 무사 귀환을 바랐다.

사용인들과 신하들 앞에서 늘 강한 모습만 고집하는 황제가 유일하게 마음 편히 기댈 수 있는 존재가 그녀의 남편이라는 사실을 알았기에.

‘황제 폐하뿐 아니라 베리타를 위해서도, 떠난 사람들이 어서 무탈히 돌아와야 할 텐데.’

대공의 부하 아사카 리카르도 문제였다.

그가 출정하기 몇 주 전부터 베리타와 미묘한 기류를 흘리고 다녔다는 걸 눈치 빠른 엘리제가 모를 리 없었다.

진압군이 출정한 후 렌티아만큼은 아니지만 묘하게 기운이 없어 보이는 베리타를 보고 엘리제의 의심은 확신으로 굳어졌다.

‘황제 폐하야 그렇다 치고, 베리타 그 애마저 이민족 사내와 사랑에 빠지다니.’

하필이면 사랑하게 된 남자들이 전부 여기 없는 바람에 힘이 쭉 빠진 주군과 친구를 생각하며 엘리제는 재차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주방에 도착했다.

평소에는 직접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황제의 측근 시녀가 예고 없이 나타나자 주방장은 당황한 기색으로 그녀를 맞이했다.

“안녕하십니까, 엘리제 님. 좋은 아침입니다. 무슨 일로 찾아오셨는지요?”

“좋은 아침입니다. 별일은 아니고, 황제 폐하께 올릴 꿀물을 요청하러 왔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혹시 괜찮다면 꿀물을 타는 건 제가 직접 해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엘리제 님.”

엘리제의 구체적인 요청에 주방장은 불쾌한 기색 없이 고개를 깍듯하게 숙였다.

주방장에게 아예 미안한 마음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엘리제는 단호했다.

‘원칙적으로 그 누구도 섣불리 믿어서는 안 돼. 누가 폐하의 음료에 뭘 탈지 어떻게 알아?’

황제의 최측근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주군을 위해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까지 의심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진정한 수족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내전이 시작된 뒤로 신경이 바짝 곤두선 건 황제 하나만이 아니었다.

그녀를 가까이서 모시는 이들도 언제 어디서 암살이나 독살 시도가 있을지 몰라 항상 눈을 부릅뜨며 지냈다.

엘리제는 주방의 하녀가 맹물을 펄펄 끓이고 밀봉된 항아리에서 꿀을 푸는 모습을 눈앞에서 똑똑히 지켜본 뒤에야 안심하고 숟가락을 쥐었다.

넉넉하게 푼 꿀을 물과 섞어 천천히 저으며 엘리제는 무심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때 주방 맞은편에서 쟁반을 나르던 어느 하녀가 엘리제와 눈이 마주치더니 흠칫 놀랐다.

쨍그랑!

“……?”

“죄, 죄송합니다!”

하녀가 쟁반을 떨어트리자 엘리제는 당황했고, 하녀는 황급히 사과하며 고개를 연거푸 숙였다.

다른 하녀가 서둘러 다가오더니 쟁반을 떨어트린 하녀를 나무라기 시작했다.

“이벨라, 칠칠치 못하게 이게 무슨 짓이야? 다 준비된 음식을 이렇게 떨어트리면 어떡해!”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바로 치우겠습니다.”

“치우는 것도 치우는 거지만, 지금 당장 식사를 날라야 하는데……!”

이벨라라는 하녀를 매섭게 꾸짖던 선임 하녀는 엘리제의 존재를 뒤늦게 깨닫고 얼굴을 붉혔다. 그녀가 서둘러 좀 더 차분한 목소리를 냈다.

“민망한 모습을 보여 드려서 죄송합니다, 엘리제 님.”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그나저나 저건 누구한테 가는 음식이죠?”

엘리제의 예리한 시선이 바닥에 쪼그려 앉아 깨진 그릇과 어질러진 음식을 정리하려고 애쓰는 젊은 하녀에게 닿았다.

아까 그 하녀가 저와 눈이 마주쳤던 게 마음에 걸렸다.

‘나와 시선이 닿자마자 쟁반을 떨궜다고? 어째서?’

의도적으로? 아니면 너무 놀라서, 뭔가 찔려서 저도 모르게? 그렇다면 정확히 왜?

“신록의 궁에 계신 코니엔 자작님의 아침 식사입니다. 매일 그분의 식사를 나르는 건 이 아이가 전담하고 있습니다.”

선임 하녀가 대답했다. 엘리제의 눈매는 신록의 궁이라는 말을 듣고 한 번, 코니엔 자작의 이름을 듣고 또 한 번 가늘어졌다.

‘하필이면 그 사람의 전담이라고.’

신록의 궁은 황궁의 여러 별관 중 하나로, 황제궁 옆에 바로 붙어 있었다.

지난겨울 렌티아가 잡아들인 기존 황제파 귀족들이 숙식하는 곳이기도 했다.

그렇게 별궁에 갇힌 사람들은 평소에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실제로 죄를 지어서가 아니라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감금된 자들이기에, 렌티아도 그들의 자유를 제한했을지언정 신변을 험하게 다루지는 않았다.

그들을 위해 매일 꼬박꼬박 푸짐한 삼시 세끼가 준비되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리고 황제궁 주방에 소속된 하녀들이 하루에 총 세 번씩 음식을 날랐다가 식사가 다 끝나면 빈 그릇을 치우러 또 세 번씩 신록의 궁에 방문했다.

“이벨라 양.”

“네, 네!”

엘리제는 코니엔 자작에게 배정된 음식을 떨어트린 하녀를 상냥한 목소리로 불렀다. 하녀는 화들짝 놀라며 가느다란 고음으로 대답했다.

“놀라게 해서 미안해요. 그럴 의도는 없었어요. 어디 다친 데는 없나요?”

“괘, 괜찮습니다, 엘리제 님. 다친 데는 없습니다.”

“그렇군요. 앞으로 더 조심하도록 해요.”

“명심하겠습니다.”

수석 시녀 엘리제가 다정하고도 엄격한 태도로 타이르자 말단 하녀 이벨라는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옆에 있던 선임 하녀도 엘리제에게 예를 갖췄다.

“이 아이의 실수를 너그럽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렇게 어설픈 모습을 보여 드려서 다시 한번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황제 폐하를 위한 그대들의 노고에 늘 감사할 따름이지요.”

“과찬이십니다. 혹시 꿀물을 나르는 데 도움이 필요하신가요? 원하신다면 주방 하녀를 붙여 드리겠습니다.”

“나 혼자로도 괜찮습니다. 별로 무겁지 않아요.”

엘리제는 빙긋 웃으며 꿀물이 담긴 주전자를 들고 돌아섰다.

나가는 길에 엘리제는 아직도 바닥에 쪼그려 앉아 있는 이벨라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자신이 그녀를 의식하고 있다는 걸 내색하고 싶지 않았다.

엘리제는 주전자를 들고 황제에게 돌아갔다.

렌티아는 볕이 잘 드는 별실에 앉아 다소 멍한 표정으로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베리타는 그녀의 뒤에 그림자처럼 서 있었다.

“폐하, 따뜻한 꿀물을 가져왔습니다.”

“고마워, 엘리제.”

엘리제가 주전자를 식탁에 내려놓고 선반에서 찻잔을 꺼내 꿀물을 따랐다.

렌티아는 금빛이 도는 투명한 액체를 천천히 홀짝였다. 뜨겁고 달큼한 음료를 마시자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주군의 뺨에 혈색이 돌아오는 걸 지켜본 엘리제는 그나마 한숨을 돌렸다. 그러나 아직 걱정거리는 남아 있었다.

“폐하, 긴히 아뢸 말씀이 있습니다.”

“말해 보렴.”

“아까 주방에 내려갔을 때 신경 쓰이는 일이 하나 생겼습니다. 신록의 궁에 음식을 나르는 어떤 하녀가 저와 우연히 눈이 마주치자 안색이 변하더니 쟁반을 통째로 떨어트렸습니다.”

“쟁반을 떨어트려? 너와 눈이 마주치고 나서?”

“네, 폐하. 표정을 보아하니 일부러 떨어트린 것 같지는 않고 그저 진심으로 놀라거나 당황한 것 같았습니다. 어쩌면 겁먹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요. 단지 기우일 수도 있지만, 뭔가 잘못한 상태에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듯한 사람의 표정이라 계속 신경이 쓰입니다.”

“…그 하녀의 이름이 뭔지 혹시 아니?”

“이벨라라고 들었습니다. 성은 모르겠습니다.”

“신록의 궁으로 음식을 나르는 아이라고.”

“네, 폐하.”

“누구 전담인지는 알아?”

“코니엔 자작 전담입니다.”

렌티아는 잠시 골똘한 표정으로 침묵했다. 엘리제가 전한 이야기는 확실히 거슬리는 부분이 있었다.

위험인물을 모아 놓은 별궁에 매일매일 오가는 하녀가 황제를 가까이서 모시는 최측근 시녀와 눈이 마주치자 소스라치게 놀랐다니. 마치 심하게 찔리는 점이라도 있는 것처럼.

“엘리제.”

“네, 폐하.”

“코니엔 자작이 별궁 밖의 세력과 결탁해 뭔가를 꾸미고 있다고 보는 거니? 이벨라라는 그 하녀는 연락책이고.”

렌티아는 엘리제의 의심을 두어 문장으로 정리해 침착하게 되물었고, 엘리제는 살짝 망설이는 태도로 끄덕였다.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폐하.”

만약 이 모든 게 정말로 단지 기우에 불과하다면, 괜한 일을 키워 생사람만 잡는 걸로 끝날 수도 있었다.

그걸 알면서도 엘리제가 무고죄의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의 의심을 고한 이유는 그녀의 우선순위가 늘 주군의 안위였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