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결혼은 다정한 원수와-43화

43화

어마어마한 밀고를 들은 베리타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렌티아는 다시 생각에 골몰하느라 조용해졌고, 엘리제는 주군의 눈치를 살피며 잠잠히 기다렸다.

“…엘리제, 이건 네가 직접 알아봐야 할 것 같아. 너에게 믿고 맡길 테니, 알아낼 수 있는 데까지 알아봐 줘.”

“감사합니다, 폐하.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진지한 밀명이 떨어지자 엘리제는 즉시 고개를 꾸벅였다. 렌티아가 베리타를 돌아보았다.

“베리타, 너는 할 수 있는 데까지 엘리제를 도우렴.”

“네, 황제 폐하.”

“둘이 필요하다면 같이 움직이고, 각자 편의에 맞춰 일을 분담해도 돼. 신록의 궁에 억류된 귀족이나 기타 인물이 혹 불경한 마음을 품고 있는지, 정말로 황제궁 사용인까지 연루된 일인지, 만약 그렇다면 몇 명쯤 엮여 있는지 살펴봐 줘.”

“언제까지 알아내서 말씀드릴까요?”

“가능한 대로 빨리.”

갑자기 생각지도 못한 업무가 확 늘어난 셈이었지만, 수석 시녀와 호위 기사는 불평하지 않았다.

그저 언제나처럼 공손히 고개 숙여 주군께 응답할 뿐이었다.

“명 받들겠습니다, 폐하.”

“명 받들겠습니다.”

서부에서 사내들이 창칼로 싸우는 사이, 궁에 남은 여인들도 바빠졌다.

* * *

원래 이벨라라는 하녀는 자신이 그렇게 심약한 성격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딱히 대범한 편이라고 믿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딱 남들이 하는 만큼만, 평균적인 소심함과 평균적인 무모함 사이에서 그럭저럭 가늘고 길게 살아갈 운명이라고 스스로 늘 생각해 왔다.

그런 그녀의 소박한 꿈을 깨트린 건 그녀의 아비였다.

도박에 정신이 팔린 이벨라의 아버지는 거액의 빚만 유산으로 남긴 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벨라에게는 딸린 동생이 둘이었고, 심지어 모친은 병약해 일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황궁 하녀의 봉급이 넉넉한 편이긴 해도, 갑자기 자기 외에 세 식구를 먹여 살리게 된 이벨라가 안심할 수 있을 만큼은 아니었다.

차라리 생계유지만이 문제였다면 이렇게까지 절박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아비의 빚쟁이들에게 갚아야 할 돈이 남아 있었다.

만약 기한 내에 이자까지 합쳐 돈을 갚는 데 실패한다면 네년을 사창가에 팔아서라도 빚을 받아 내겠다는 저열한 독촉 앞에서 이벨라는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죽었다던 선황제가 살아 돌아왔다는 둥, 곧 내전이 일어날 거라는 둥 나라가 시끄러웠지만, 그런 건 이벨라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저 내일 당장 버텨야 할 하루가 막막할 뿐.

그러던 참에 그녀는 새로운 업무를 맡게 되었다.

어느 날 갑자기 신록의 궁에 머물게 된 귀족 나리에게 매일 음식을 나르는 일이었다.

코니엔 자작이라는 그 귀족은 이벨라가 돈이 궁하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는지 차근차근 그녀를 꼬드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저 별 의미도 없어 보이는 잔심부름이 전부였다. 그러다 조금씩, 하나둘씩 일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이 쪽지를 복도 모퉁이에 있는 경비병에게 전해 다오. 사례는 충분히 하겠네.’

‘내일 음식을 가지고 올 때 다른 것도 같이 전해 줄 수 있겠나? 어제 쪽지를 전한 그 경비병에게 가서 ‘준비된 물건’을 좀 달라고 하게. 그 물건이 정확히 뭔지는 알 필요 없고.’

‘이 꾸러미를 달의 정원에 있는 떡갈나무 밑에 몰래 묻어 두고 오게. 물론 이번에도 사례는 제대로 할 거야. 왜, 돈이 더 필요한가?’

‘하녀복에 주머니가 그렇게 많은데 설마 이 작은 물건 하나 밖에 전해 주는 것조차 못 하지는 않겠지? 절대 들키면 안 되네. 만약 들키면 자네 목까지 위험해지는 거야.’

처음에는 쏠쏠한 사례금을 받을 수 있어서 기뻤다.

자기 같은 한낱 하녀가 어차피 대단하신 귀족 나리의 부탁을 거절할 길은 없다고 스스로 합리화하기도 무척 쉬웠다.

그러다 심부름의 빈도가 잦아지고 엮이는 사람이 많아지며 사례금의 액수도 점차 올라가자, 이벨라는 더는 마냥 기뻐할 수 없었다.

이건 절대 안전한 일이 아니다. 말 그대로 목숨을 건 높으신 분들의 위험천만한 곡예였다.

자기 같은 한낱 하녀가 여기까지 휘말린 이상 도중에 무사히 빠져나갈 구멍은 없어 보였다.

그렇다면 자기를 이용하는 쪽이 부디 끝까지 성공하기를 바랄 뿐이었다.

‘하지만 만약에, 그쪽이 실패한다면?’

오싹 소름이 돋았다. 돈을 위해 위험한 일에 손을 댔다가 쥐도 새도 모르게 없어질까 봐 두려웠다.

힘없는 사용인이 높으신 분들의 권력 다툼에 휘말려 나뭇잎처럼 쓸려 나간 일이 어디 한두 번인가.

가난 때문에 판단력이 흐려졌을지언정, 이벨라는 완전히 바보가 아니었다.

코니엔 자작을 비롯한 신록의 궁의 ‘손님’들이 무슨 이유로 여기 구금되어 있는지 이벨라도 대충은 알았다.

그런 그들이 말이 새어 나갈 위험을 무릅쓰고 황제궁 하녀를 매수하면서까지 뭔가를 꾸미고 있다면…….

‘안 돼. 아니야. 설마, 아닐 거야.’

그들이 반역을 꾸미고 있을 리가 없었다.

에이, 설마. 아직 황제 폐하가 건재하시고 현재 후계자까지 품고 계시는데, 그분의 바로 코밑에서, 감히?

하지만 사실, 안 될 이유도 없었다.

현재 이 나라에는 황제가 총 두 명이 있었고, 그중 어느 쪽과 이해관계가 더 맞는지에 따라 귀족들은 얼마든지 편을 바꿀 것이다.

이벨라는 차라리 황제 폐하께 직접 가서 모든 걸 털어놓고 용서를 구하면 어떨까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도무지 그럴 배짱이 없었다.

‘밀고자라고 해서 봐주지 않으시면 어떡해? 어차피 다 똑같은 공범이니 벌을 내리시면 어떡하냐고.’

반역자로 낙인찍혀 죽으면 어떡하지? 내 가족은?

황제 폐하께 싹싹 빌면 그나마 자비를 베풀어 주실까? 아니야, 그분이 얼마나 칼같은 분이신데.

없는 죄를 지어내 추궁하는 비열한 분은 아니시지만, 있는 죄를 무르게 눈감아 주시는 분도 절대 아닌걸.

이벨라의 갈등은 서부에서 진압군의 승전보가 들려오자 더욱 심해졌다.

루이크 레케온 폐하가 전투에서 참패했다는 건, 이벨라를 연락책으로 이용하는 세력이 불리해졌다는 뜻이니.

‘어떡하지? 어떡하지? 이제라도 모든 걸 털어놓고 용서를 빌까……? 하지만 용서를 못 받는다면? 이렇게 역모에 연루돼서 죽기는 싫어!’

안 그래도 날카로워질 대로 날카로워진 신경은 오늘 예상치 못하게 주방에서 황제의 최측근 시녀와 마주치는 순간 툭, 소리를 내며 끊어졌다.

이벨라는 그자가 보는 앞에서 쟁반을 요란하게 떨어트리고 말았다. 스스로 생각해도 머저리 같은 실수였다.

만약 다른 때였다면 창피해서 얼굴이 붉게 달았을 텐데, 이때 그녀는 오히려 창백하게 질렸다. 온 낯에서 핏기가 가시는 느낌이었다.

‘어떡하지? 날 수상하게 여길 거야……. 이제라도 달아나야 하나? 하지만 내 가족은 어떡하고? 내 일터는, 미래는……!’

유별나게 심약하지도, 그렇다고 유별나게 대범하지도 않은 그저 그런 소시민 하녀 이벨라.

그녀는 이도 저도 아닌 어중간한 상태로 고통받다가, 끝끝내 해가 질 때까지 아무런 결정도 내리지 못한 채 일과를 마무리했다.

이벨라는 지친 안색으로 터덜터덜 모퉁이를 돌아 처소로 이어지는 복도에 진입했다. 하지만 그녀는 더 멀리 가지 못했다.

“이벨라 양.”

“꺄악!”

“어머, 사람 무안하게 왜 그렇게 놀라요? 그저 인사를 나누고 싶었을 뿐인데.”

‘어둑한 모퉁이 너머에 숨어 있다가 그렇게 갑자기 튀어나오면 누구나 놀라지 않겠어요?!’

…라고 솔직하게 받아칠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불길하게 싱글싱글 웃는 낯으로 어둠 속에서 불쑥 등장한 이는 황제 폐하의 최측근 시녀였기 때문에.

심지어 그녀 옆에 있는 사람은 황제의 호위 기사 베리타 브리넬이었다.

두 사람이 황제가 황후였던 시절부터 가장 가까운 수족으로 일했다는 사실은 황제궁 주방의 말단 하녀조차 알고 있는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너무 놀라지 말아 주세요, 이벨라 양. 방금 말했듯 그저 인사를 나누고 싶었을 뿐이랍니다. 겸사겸사 그대에게 물어볼 것도 있고요.”

“무, 물어볼 거라니요? 저 같은 말단 하녀에게 뭐가 궁금하신지…….”

이벨라는 말을 더듬으며 뒷걸음질했다. 그녀가 한 걸음 물러서자 상대편이 두 걸음 다가왔기에 별 효과는 없었다.

엘리제는 한결같이 웃는 낯이었고, 베리타는 동상처럼 무표정했다. 어느 쪽이든 이벨라에겐 무시무시한 광경이었다.

“그렇게 자신을 비하하지 마세요. 아무리 말단 하녀라도 엄연한 황실 식구인데 설마 궁금한 게 하나도 없겠어요? 나는 그대에 대해 알고 싶은 게 산더미랍니다, 이벨라 양. 하고 싶은 질문이 아주 많아요.”

가여운 하녀 이벨라는 이제 얼굴빛이 송장처럼 해쓱했다.

엘리제는 얼어붙은 그녀에게 성큼 다가와 오래된 친구처럼 팔짱을 꼈다. 구속 같은 접촉에 이벨라가 흠칫 떨었다.

“그럼 우리와 함께 잠시 걷겠어요, 이벨라 양? 마침 날씨도 퍽 좋고, 벌써 들어가긴 아쉬우니까요.”

이미 해가 졌으니 들어가서 쉬는 게 마땅하다고 항의할 수도 없었다.

엘리제의 소름 끼치는 미소와 베리타의 서늘한 무표정이 이벨라의 상황에 쐐기를 박았다.

말단 하녀는 힘없이 끌려갔다. 엘리제가 말한 대로, 그녀에게 물어볼 게 산더미였다.

* * *

키르타는 첫 전투 이후로 거듭되는 승리에도 기분이 영 나빴다. 정작 적군의 수장인 루이크 레케온이 머리털 하나 보이지 않은 탓이었다.

루이크는 첫 전투에서 전세가 아군에게 불리하게 기울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줄행랑친 뒤로 내리 실종 상태였다.

덕분에 폐황제를 따르던 무리의 사기가 대폭 깎인 건 사실이었다.

그러나 혈통적 정통성을 지닌 그가 확실히 시체가 되어 나타나지 않는 한, 루이크 레케온을 구심점 삼아 렌티아에게 반발하는 세력은 끝까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지난번에도 시체를 찾지 못했는데 죽었다고 공표했다가 결국 그놈이 살아 돌아오는 바람에 일이 이 꼴이 됐지. 이번에는 안 돼. 그 누구도 폐황제의 죽음을 의심할 여지가 없어야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