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화 〉4화. 청혼(4)

〈 5화 〉4화. 청혼(4)

“예언이 아니라… 아니다.”

예언이 아니라 신탁이라고 몇 번을 설명했지만, 그녀의 친구는 그게 그거지 하며 두 단어를 혼용해 쓰고 있었다.

“그게 내 마음대로 볼 수 있는 게 아니라니까. 저번에 봤을 때는 바로 알려줬었잖아.”

“그래, 물론 그 때는 큰 도움이 됐었지만…”

위니는 얼마 전 율스타인 백작의 죽음을 예견했었다. 모니카는 이를 알고 대비할 수 있었기 때문에, 큰 혼란이나 분쟁 없이 백작가를 휘어잡을 수 있었다.

“마녀님, 마녀님. 그러면 그냥 제가 결혼생활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려주세요.”

“결혼생활 별거 없어. 신혼 때 기선제압을 콱 해버리면 돼.”

“기선제압?”

“결혼도 결국 인간 사이의 일. 상하관계가 생길 수밖에 없고, 초반에 유리한 고지를 선점해 놓으면 그게 쭉 가는거야.”

“유리한 위치를 어떻게 가져오는데?”

“뭐, 꼽을 주는거지. 처음에는 이것도 못하냐, 저것도 못하냐 하면서 구박을 막 해. 그렇게 주눅이 들게 한 다음에, 중간중간 칭찬이랑 상을 섞어서 주는거야. 데릴사위니까 더 쉽겠네.”

“그건 완전 길들이는 거 아니야…?”

“남자를 길들이는 게 뭐가 어때서. 그 남자… 에드워드라고 했나? 데릴사위로 들어온 주제에 너한테 방해가 될지도 모르는데, 미리미리 길들여 두는 게 좋지 않겠어?”

확실히 길들이는 데 성공만 한다면, 결혼생활이 훨씬 편해질 것 같았다. 남편이 방해만 되지 않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길들여서 패로 쓸 수 있다면 그렇게 하는 게 더 낫지 않겠는가. 토너먼트에서 우승도 할 정도니, 나름 쓸만할 것이라고 모니카는 생각했다.

“그런데 너는 그런 걸 어떻게 다 알아? 결혼 해봤어?”

“어머니께서 알려 주셨지.”

“오…”

물론 어머니도 제대로 결혼 생활을 한 적은 없다는 말은, 굳이 덧붙이지 않았다.

“뭐 그래봤자 나한테 청혼을 하지 않으면 써먹을 일도 없는데.”

“상식이 있다면 너한테 다시 하겠지. 어제 그것도 수작질 같다면서.”

“그렇겠지? 아으, 결혼 같은 거 진짜 하기 싫다.”

나도 네가 결혼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위니 멜버른은, 이 말을 속으로 삼킬 수밖에 없었다.



베라와의 물밑 협의가 이루어진 후, 모니카를 찾았다.

‘청혼을 해야겠지…’

호랑이 굴도 아니고 호랑이 아가리에 제 발로 걸어들어가는 기분이었지만, 베라와 협의된 것이 있으니 어쩔 수 없다. 갈 곳이 없는 나는 어떻게든 율스타인 가문에 붙어야 했고, 율스타인 가에 남은 자리는 여백작의 부군 자리밖에 없으니 말이다.

회귀 전과 비슷해 보이지만, 그래도 상황이 나았다. 이번에는 패배자라는 낙인도 없고, 내 편이 되어 줄 베라라는 존재도 있으니까. 미래에 대한 기억도 얼추 가지고 있으니, 능력 있는 모습을 보여주다 보면 어느 정도의 발언권은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상황을 정리하며 멜버른 저택 앞에서 기다리자, 모니카를 만날 수 있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율스타인 영애.”

“…무슨 일이시죠?”

모니카가 싸늘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본다. 저 시선을받을 때마다, 분노와 억울함보다는뱀 앞에 선 개구리처럼, 심장이 오그라드는 게 느껴진다. 정신 차리자. 그래도 할 말은 해야지.

“드릴 말씀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뭔데요?”

“저와 결혼해주십시오!”

눈을 질끈 감고 질렀지만, 반응이 되돌아오지 않는다. 눈을 반쯤 떠 표정을 살펴보니, 모니카는 애매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당혹스러움 조금에, 니가 그러면 그렇지 하는 체념, 희미하게 깔린 경멸과 희열이 섞인 표정. 어젯밤 그 난리를 쳐 놓고 오늘 낮에 바로 청혼 받을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기색이다.

“이럴 거면 어제 그 난리는 왜 친거야…”

“어, 그것이…”

“됐어요. 안 들어도 다 알 것 같으니까.”

한숨을 내쉰 모니카가 반지를 받아든다. 다행히 그걸 내던지지는 않고, 얌전히 자신의 왼손 약지에 끼웠다.

“감히 백작 앞에서 얕은 수작질을 부리다니. 평민이었으면 그대로 손목이 잘렸을 거야.”

에이 설마. 모니카가 나를 때린 적은 있어도, 신체에 영구적인 손상을 준 적은 없었다. 기사로서 못 써먹게 될까봐 그랬던 것 같지만.

“앞으로 자주 볼 거지? 이제 내 가신이잖아. 그러니까 말 편하게 할게. 알았지?”

“예…”

마음은 마흔 살인데, 스물도 안 된 처녀한테 반말이나 듣는 신세라니. 회귀 전에도 반말 듣고 살긴 했다만.

“흠, 에드워드 경은 우리 영지의 기사가 될거지? 그러면 나한테 기사 서임을 받아야겠네?”

짝-

눈 앞에 별이 번쩍한다. 정신은 맞았다는 사실에 익숙하지만, 몸은 그렇지 않은 듯했다. 전생에도 그랬지만, 모니카는 손이 맵다. 뺨이 빨갛게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원래 기사 서임 받을때는 죽을때까지 맞는다며? 내가 착해서 한 대로 봐주는 줄 알아.”

모니카는 그 말만을 남기고, 바쁘다며 자리를 떴다. 여자의 팔 힘이라 입 안은 터지지 않았지만, 입맛이 썼다. 담배 생각이 간절해져 자연스레 시가를 입에 물었다.

“씨발…”

무시당한 것 같아 기분이 나쁘다. 아직 모니카는 작위를 받은 것도 아니니 안 맞아도 되는데. 베라에게 청혼했다가 괘씸죄로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그날 저녁에는, 업무로 바쁜 모니카를 대신해 베라에게 영지 내부를 안내받았다. 이미 다 아는 장소들이라 안내라고 할 것도 없었지만, 다 알고 있다는 티를 낼 수도 없었으니 베라와 데이트를 한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좋은 저녁이에요, 에드워드 경. 그런데 그 뺨은…?”

“좋은 저녁입니다. 이건 그, 얼굴을 어디에 부딫혀서…”

따님 손바닥에 부딪혔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아직 베라는 나보다 모니카를 더 아낀다. 괜히 안좋은 말을 했다가 뒤에서 흉이나 본다는 인상을 주는 건 좋지 않다.

“이렇게 손바닥 자국이 선명한데 부딫혔다니요… 누구한테 맞은 거예요? 누가 우리 귀한 사위한테!”

준비한 변명이 통하지 않는다. 그렇게 자국이 선명하게 났다니, 어쩐지 사용인들이 내 얼굴을 흘끔흘끔 보는 게 느껴졌었다. 내 방에는 거울이 없으니 알 수가 있어야지.

“하하, 그리 신경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백작가의 손님이 뺨을 맞았는데 안주인으로서 어떻게 신경을 안 쓰겠어요.”

베라답지 않게 위로 올라간 눈초리를 보니, 누구한테 맞았는지 말하지 않으면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을 것 같다. 원래 처진 눈매라 그렇게 위압적이지는 않다만.

“그, 모니카 양에게 기사 서임을 약식으로 받아서 한 대 맞았습니다.”

“…”

내 대답에 베라의 미간이 찌푸려진다. 딸에 대해 안 좋은 얘기를 들어서 기분이 나빠진건가?

“그래도 뺨 한 대 정도면 괜찮은 편입니다. 다른 기사들은 몽둥이찜질을 당하거나, 피가 날 때까지 맞기도 하는데, 뺨 한 대 정도면…”

“아니, 아니에요.”

베라가 미안함이 가득한 표정으로 내 양 손을 잡았다.

“우선 제 방으로 가요.”

“예?”

“그런 꼴로 영지를 돌아다닐 수는 없잖아요.”

그렇게 베라의 손에 이끌려 그녀의 방으로 초대받은 나는, 방 안에 설치된 거대한 화장대 앞에 앉았다. 이렇게 보니 진짜 뺨에 붉은 자국이 선명하다.

“제 쪽으로 돌려서 고쳐 앉아요. 화장으로 빨간 부분만 가려줄게요.”

뺨을 맞은지 시간이 좀 지나서 그런지, 다행이 부어있지는 않았다. 베라가 어디서 분과 붓을 가져오더니, 내 뺨에 톡톡 바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화장을 받으며 곁눈질로 베라의 방 안을 살펴보자, 내 기억 속과 놀랍도록 비슷했다. 다른 점을 찾자면 기껏해야 꽃병이나 베개 정도? 나머지는 전부 회귀 전에 봤던 것들과 같은 물건이었다. 오래도 썼네.

“남자들은 화장하는 붓만 갖다대도 기겁한다고 하던데, 되게 얌전히 계시네요.”

“하하…”

그야 익숙한 일이니까. 회귀 전에도 모니카에게 얼굴을 맞은 다음날이면, 베라가 화장으로 가려주면서 내게 사과를 했었다. 당신이 때린 것도 아닌데 말이지. 그래도 베라 덕에 버틸 수 있었던 것 같다. 이런 얘기를 할 수는 없겠지만.

“익숙하진 않지만, 그래도 저를 위해서 해주시는 것아닙니까.”

“그렇게 말해주니 다행이네요.”

그렇게 얌전히 앉아있자, 금세 화장이 끝났다. 감쪽 같은 수준까지는 아니더라도, 자세히 보지 않으면 붉어진 뺨만 보일 뿐 손자국이라고는 알지 못할 정도다. 여인의 화장 실력은 역시 신기에 가깝다.

“정말 감쪽같네요.”

“얌전히 말 잘 들어줘서 그래요. 모니카는 항상 말을 안 들어서 힘들었는데.”

모니카의 성격상 다른 사람 말을 잘 들을 것 같지는 않다.

“이렇게 있으니까 말 잘 듣는 아들이 생긴 것 같아 기쁘네요.”

“어머니와 아들이라기에는 나이 차이가 너무 안 나는 것 아닙니까.”

“그래도 사윗감인데요 뭐. 제가 서른셋이고, 모니카가 열아홉. 모니카보다 여섯 살이 많다고 했으니까… 어?”

“여덟 살 차이밖에 안 나네요.”

생각보다 적은 나이 차에 당황하는 베라. 전에는 장모로서 의연하게 넘어갔었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누님이라고 불러도 되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