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화 〉3화. 청혼(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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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화 〉3화. 청혼(3)
“제가 청혼을 거절하는 건 에드워드 경이 싫어서 그러는 게 아니에요. 젊고 잘생긴 청년이 청혼을 하는데 어찌 기쁘지 않을 수 있겠어요. 하지만 그래도 거절해야 하는 건, 저와 제 딸 모니카, 그리고 에드워드 경까지. 셋 모두를 위해서예요.”
홍차로 입술을 적신 베라가 말을 이어간다.
“에드워드 경이 저랑 결혼을 하면, 백작가의 부군도 아니고 그냥 늙어가는 과부의 남편이 되는 거예요. 저도 남편을 떠나 보낸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결혼을 하겠어요? 내연남을 숨기고 있다가 남편이 죽자마자 데려와서 결혼시켰다는 소리나 듣지 않으면 다행이겠네요. 또 마운트베른 가에는 뭐라고 전할 건가요? 가문의 주인이 될 여백작과 결혼하라고 보냈더니, 이상한 아줌마랑 결혼을 한 셈이 되잖아요.”
“그 점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마운트베른 가는 저를 쫓아내는 게 가장 큰 목적이었을테니까요. 율스타인 가문과의 혈연 관계는 부수적인 것 쯤으로 취급하고 있을 겁니다.”
“그래도 가족인데 어찌…”
“가주 그 놈도 혈연에 의한 동맹을 그리 기대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 자도, 저도 서로를 딱히 가족이라고 여기지 않으니말입니다. 혈연이 아니라 악연이라고 하는 게 더 가까울것 같습니다만.”
본가의 가주는 현재 배다른 형 놈일테지. 그 인간이 내게 혈육의 정을 기대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회귀 전에도 결혼식에도 오지 않았던 놈인데. 결혼을 하면 나는 출가외인이다. 가족 같지도 않은 놈, 엿이나 먹으라지.
“…어찌됐든, 어젯밤 저에게 했던 청혼은 농담이라고 생각할게요. 저 같이 애 딸린 유부녀가 아니라, 젊고 꽃다운 제 딸에게 다시 청혼해 주세요.”
“어젯밤 제 청혼은 진심입니다. 베라 당신이 과부건 뭐건 신경쓰지 않습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얼굴은 딸과 자매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이니 말 다했다. 베라의 몸을 한 번 훑어본다. 바깥 생활을 하지 않았음에도 옷으로 가려지지 않는 육감적인 몸매. 일어난지 얼마 되지 않아 편한 복장을 입은 것인지, 얇은 드레스 슬릿 사이로 보이는 탄력적인 허벅지와 그 허벅지가 받치고 있는 풍만한 골반, 탐스러운 과실과같은 젖가슴. 그 사이를 이어주는 가는 허리까지, 아름답다는 수식을 넘어 야하고 음탕하다고까지 할 수 있는 몸매다.
“베라 당신도 젊고, 모니카보다 훨씬 탱탱하고 야한 몸매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직도 제 눈에는 꽃다워 보이시는데요.”
“그런 말 하는 거 아니에요.”
서둘러 부정하는 입과는 달리 기분이 썩 나쁘지 않은지, 베라의 입가에 숨길 수 없는 미소가 새어나온다. 내색하지 않으려고 하지만 같이 살아온 세월이 몇 년인데. 마음속으로는 기뻐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다.
“애가 딸리다 못해 장성한 유부녀에게는 과분한 말이네요. 하지만 그렇게 띄워줘도 안돼요. 토너먼트에서 우승한 자가 율스타인 가문의 영애, 모니카와 결혼할 거라고 이미 영지 내에 소문이 자자해요. 이런 상황에서 갑자기 결혼 상대가 바뀌면, 사람들이 제 딸을뭐라고 생각하겠어요? 제 딸을 시집도 못 가게 할 셈이에요?”
확실히 반품됐다는 이력은 이미지에 꽤 타격이 크다. 하지만 그게 중요한가?
“모니카 양의 혼담이 파투난 것이 제가 아는 것만 해도 네 번인데… 한 번 추가된다고 뭐가 달라지나요?”
“그건 다 상대 가문에서 데릴사위라고 모질이들을 보내서 그런 거예요! 우리 모니카한테는 문제가…”
베라가 말을 하다 말고 한숨을 내쉰다. 문제가 없다고 하기에는 양심에 찔렸나보지.
“… 솔직히 말해서 문제가 없는 건 아니지만, 상대 가문은 하자가 좀 컸단 말이에요. 후계자인 데다 하나뿐인 딸을 그런 반푼이들과 맺어줄 수는 없었어요. 우리 가문에 도움이 하나도 되지 않을 게 분명하다구요.”
그게 중요한 게 아닌데. 모니카에게 남성에 대한 혐오라는 결함보다 훨씬 중대한 성격이라는 하자가 있지만, 얼굴 본지 이틀 된 시점에서 그걸 말할 수는 없었다. 레이디의 험담을 하는 기사라니, 쓰레기 취급받기 딱 좋다.
목이 타는지 차를 마신 베라가, 간곡한 어조로 얘기했다.
“저희 딸 내년이면 스물이에요. 귀족 영애라는 사람이 스무 살이 될 때까지 결혼을 못 하면 어떤 취급을 받는지는 에드워드 경도 귀족이시니 잘 알잖아요.”
잘 알고 있지만, 이번 기회까지 써서 내 인생을 묶이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데. 결혼도 하지 못하고 쓸쓸히 늙어가는 인생이라. 모니카에게 어울리는 인생인 것 같은데 뭐. 그 성격을 버티면서 같이 살 수 있는 남자가 있을 리가 없으니, 혼자 사는 게 서로 좋을 일이다.
“부인께서 그리 말씀하셔도, 모니카 양이 저를 워낙 싫어해서 말입니다.”
“저희 딸이 남자를 좀 꺼리는지라… 남자 중에서 에드워드 경 정도면 좋아하는 편이에요. 다른 남자들은 시야에 들어오는 것도 싫어한다구요. 모니카 때문에 남자 사용인들을 반은 줄인 것 같아요.”
기억 속에서도, 남자 사용인들은 전부 영주 집무실 근처에도 가지 못했던 것 같다.
“하나밖에 없는 외동딸이라고 제가 너무 오냐오냐 키웠다는 건 인정할게요. 하지만 그 점만 빼면 얼굴도 이쁘고능력도 좋답니다. 다른 남자는 한 번도 겪은 적이 없고요. 이 정도면 괜찮지 않은가요?”
이제는 거의 흥정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모니카 율스타인. 얼굴 이쁨, 능력 좋음. 사용된 적 없음. 성격 살짝 문제 있음.
확실히 베라를 닮아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건 맞다. 몸매도 베라만큼은 아니지만 여성스러움은 충분히 가지고 있었고, 능력이야 전생에서도 이 넓은 백작령을 큰 문제없이 잘 다스려 왔었다. 남성을 혐오했으니 당연히 남성편력도 없고. 그래도 안사요. 내가 미쳤게.
내가 말이 없자, 베라가 아예 내 손을 잡는다.
“에드워드 경이 좋은 사람이라는 거 알고 있어요. 지금까지 들어왔던 혼담 상대 중에서 제일 좋은 사윗감이기도 하구요. 하지만 당신도 이번 결혼이 파토나면 갈 곳 없는 건 매한가지잖아요? 가문과 사이도 안 좋은데 본가로 돌아갈 수도 없고요. 서류상으로만 결혼한 거라도 괜찮으니까, 모니카랑 결혼하고 여기서 편하게 살아요.”
맞는 말이다. 율스타인 가문에서도 발붙일 곳이 없어지면, 평민들에 섞여 살거나 용병 노릇이나 해야 할지도 모른다. 이미 귀족으로 40년을 살아왔는데 하루아침에 평민 신세가 된다? 차라리 모니카랑 결혼하는 게 더 나을지도… 아니, 비슷한 것 같다.
“저는 그래도 베라 당신이 좋습니다만...”
말끝을 흐리자 베라의 얼굴에서 미소가 옅어진다. 항상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는 그녀가 저럴 정도면 상당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뜻. 여기서 더 밀어봤자 분위기만 안 좋아질 뿐이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면 뭐 어쩔 수 없겠죠.”
“결혼만 모니카와 하면 돼요. 그것만 해준다면 다른 원하는 건 뭐든지 다 맞춰 줄게요.”
“정말 뭐든지 해주시는 겁니까?”
“…제가 들어줄 수 있는 범위 내에서라면요.”
이렇게 여지를 남겨 주니, 고마울 뿐이다.
율스타인 백작가에는, 먼 옛날부터 백작가에 충성을 다해온 멜버른 자작가가 있다. 멜버른 자작가는 특이하게도 자작위를 전부 장녀가 계승하는 가문이었다. 율스타인 백작을 보조하며 백작가의 책사 노릇을 해온 멜버른 자작가의 현대 가주는, 율스타인 백작위에 오를 어린 영주(예정)와 독대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위니! 그 남자 완전 짜증난다니까!”
책사 겸 자작으로서 백작령 본성 옆 상대적으로 작은 별채에서 지내는 위니 멜버른 자작은, 아침식사를 그녀의 주군 겸 소꿉친구에게 방해받고 있었다.
“뜬금없이 우리 엄마한테는 청혼을 왜 하는데! 백작위를 물려받지도 못할 평귀족 주제에 날 무시하는 건지!”
일반적인 남작보다도 작은 저택에서 지내는 그녀였지만, 큰 불만은 없었다. 자작은 애초에 영지를 하사받지 못하는 작위이기도 했고, 그녀는 사용인을 쓰는 것도 귀찮아 자작위를 물려받으며 전부 내쫓아 버렸으니. 평민들은 그녀에게 방해만 될 뿐이다.
“이래서 남자들은 필요가 없다니까!”
“모니카 율스타인 백작 예정 님. 식사 중에는 품위를 지키셔야죠.”
이렇게 가끔씩 모니카가 찾아와 그녀를 귀찮게 하는 것이 유일한 불만이라 할 수 있었다.
“으, 그 이상한 반 존대 쓰지 마. 니가 그러니까 적응 안돼.”
“나름 백작이 되실 분에게 걸맞은 예의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건데. 너무하네.”
“안 그래도 그 남자 때문에 짜증나는데, 너까지 그러지 마.”
모니카가 푸념을 늘어놓으며 식탁 위에 엎드린다. 빵을 뜯어먹던 위니가 물었다.
“그 남자가 그렇게 싫어?”
“남자는 다 싫어. 엄마가 당부한 것만 아니었어도 진작 내쫓아 버렸을텐데.”
“죽여버려? 아니면 저주라도?”
“…그 정도는 아니야. 엄마 성격상 어차피 결혼은 해야 할 것 같은데, 그나마 얼굴이라도 반반한 게 낫지. 그 남자가 없어지면 진짜 이상한 남자랑 결혼해야 할지도 몰라.”
“…농담이야.”
“알아. 니 성격에 귀찮음을 무릅쓰고 그럴 리가 없지.”
나태한 그녀의 친구가 이런 사소한 일에 나서줄 리가 없다고, 모니카는 생각했다.
“어차피 결혼은 할 거 같은데, 결혼생활에 대해서 예언 좀 해주면 안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