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화 〉0화. 프롤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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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화 〉0화. 프롤로그
시야 한쪽이 붉다. 피가 부족해져 어지러운 머리를 털어낸다. 머리를 흔들수록 더 어지러워지는 것 같아 그만뒀다. 아직 멀쩡한 한쪽 눈으로, 야만족 최고의 전사라는 자식을 바라본다.
‘썩을 놈의 여편네.’
욕을 하고 싶어도 소리내서 할 수 없다. 이 망할 놈의 백작가에는 벽에도 귀가 달렸으니, 여백작의 귀에 들어간다면 바가지가 긁히는 정도로는 끝나지 않을 터. 쫓겨나면 갈 데도 없으니, 속으로 삭히는 수밖에 없었다.
“후…”
발코니에서 시가를 꺼내 입에 문다. 이 발코니는 내가 유일하게 혼자 있을 수 있는 곳. 매일같이날 무시하는 여백작도, 그 눈과 귀가 되어주는 하녀도 집사도 없다. 다닳아 맨질맨질해진 발화석으로 불을 붙이자, 연기가 머릿속을 뿌옇게 물들인다. 부정적인 감정이 연기처럼 흩어진다.
‘판단력이 흐려지면 결혼을 하고, 인내심이 바닥나면 이혼을 한다 했던가.’
결혼을 해도 이런 여자랑 하다니, 판단력이 흐려졌던 게 분명하다. 이 쓰디쓴 시가가 달게 느껴지는 걸 보면, 지금도 멀쩡하지 않은 것 같다.
하긴, 매일같이 쿠사리만 먹으며 자존감만 낮아지는데, 정신이 어찌 멀쩡하겠는가. 이런 부부관계에서 자식이 생길 리도 없다. 차라리 다른 남자라도 들이면 내게 관심이 줄어들 텐데. 백작가의 데릴사위, 여백작의 정실 남편으로, 진열장 속 인형처럼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삶. 죽기 전까지 내 처지가 바뀔 일은 없을것이다.
“콜록, 콜록”
“풋.”
사레가 들렸다. 이를 놓치지 않고 비웃는 소리가 들린다. 뒤를 돌자, 백작이 새로 들였다는 메이드가 서 있었다.
“에드워드 경. 백작님께서 말씀을 전하라 하셨습니다.”
또 이건가. 신입 메이드가 들어올 때마다, 아무것도 모르는 신입을 놀려먹기 위한 행사. 이런 말을 해도 되는 건지, 불안한 눈빛이 보인다.
“…무슨 말인가?”
“백작님께서, 밤도 깊었는데 궁상 떨지 말고 들어가서 잠이나 쳐자라고 전하셨습니다.”
눈을 꼭 감으며 내지르듯 말하는 메이드를 보고, 복잡한 심경이 들었다. 하긴, 이 어린 메이드에게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곧 들어갈 거요.”
“전 그럼, 이만.”
메이드가 도망치듯 물러갔다. 이렇게 하고도 별 일 없는 걸 보고, 그녀도 다른 사용인들처럼 날 무시하게 되겠지. 이 성에서 나를 귀족으로 대해 주는 이는 거의 없었다.
짜증 때문에 두 번째 시가를 입에 물자, 뒤에서 인기척이 났다.
“추운데 여기서 왜 이러고 계시나요.”
“장모님, 여긴 어쩐 일로…”
베라 율스타인.내 편 하나 없는 율스타인 백작가에서, 내가 유일하게 마음을 터 놓고 얘기할 수 있는 내 장모님이 나를 찾아왔다. 내가 유일하게 혼자 있을 수 있는 발코니에서, 궁상을 떨며 시가를 태우고 있을 때였다.
“제 딸아이가 또 말썽인 것 같아서요. 미안해요. 내가 잘못 키워서…”
“아닙니다, 장모님께 뭔 잘못이 있다고…”
장모님은 외모도, 마음도 곱고 우아하신 분이었다. 딸 앞에서 내 편을 들다 여백작과 사이가 틀어질 뻔한 적도 있는 분에게,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애가 어렸을때는 말도 잘 듣고 착했는데, 아버지를 여의고 나서는…”
장모님이 다시 신세 한탄을 시작하셨다. 쌓인 게 많으실 만도 하지. 적당히 건성건성 대답하며 흘려들었다.
“전 아들이 없는 거 알잖아요. 제가 에드워드 경을 아들처럼 아끼는 거 알죠? 딸아이가 힘들게 하면 바로 와서 얘기해요. 이렇게 혼자 있지 말고.”
“하하, 네 그러겠습니다.”
장모님이 나를 아들처럼 여긴다는 얘기는 십 년도 넘게 들었지만, 나는 장모님을 한 번도 어머니처럼 생각한 적이 없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내 와이프보다 대여섯살 많아 보이는데, 어떻게 어머니로 여길 수가 있겠는가.
“전 이만 들어가 볼게요. 늦었는데 어서 들어가서 주무세요.”
“예, 장모님도 편안한 밤 되십시오.”
“그럼 이만…”
그렇게 베라가 떠난 자리에서, 홀로 쓸쓸히 시가를 태우던 게 어젯밤 일이었다.
쿨럭.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야만족의 습격으로 영지 북부를 잃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영주성 코앞까지 쳐들어왔다 했을 때도 별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이 거지 같은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으니, 반기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죽기는 싫었는데…’
북부 야만족 사이에서 최고의 전사가 나왔다 했을 때도 별 감흥은 없었다. 지금까지 내 검에 쓰러진 ‘최고의 전사’가 몇인데. 하지만 이번의 녀석은 달랐다. 북부의 모든 야만족을 규합한 전사는 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강했다.
“하얀 피부의 기사여, 이미 승패가 갈린 것 같은데 그만하지않겠는가?”
“그럴 수는, 없다.”
야만족 놈들에게 항복? 기사로서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정 그러하다면 어쩔 수 없군.”
야만족 전사가 목에 걸고 있던, 붉은 빛이 나는 돌을 손에 쥐었다.
“내 이름은 우잘, 북쪽에서 온 바람이다. 하얀 피부의 전사여, 그대의 이름을 밝혀라.”
“야만족 따위에게 알려줄 이름은 없다.”
“그렇다면 자네는 이름도 남기지 못하고 죽게 되겠지.”
야만족의 역사에 남는 이름따위, 영광은커녕 모욕이다. 우잘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힘이 없었다고 할 수도 있겠지.
“대신 이 어머니의 피를 담은 우물로 끝내주겠다. 이돌은 강한 전사의 피를 담는 그릇. 그대 정도의 전사라면, 이름은 아니어도 피는 남길 수 있겠지.”
저건 또 무슨 개소리일까. 웬일로 말을 할 줄 아는 야만족이다 싶었는데, 역시 같은 언어를 쓴다고 야만족이 아닌 것은 아닌 것 같다.
쓰러진 내 앞에 야만인이 앉았다.
“잘 가라, 이름모를 전사여.”
내 눈에 마지막으로 비친 것은, 내 머리를 향해 빠르게 접근하는 붉은 돌이었다. 이후 시야가 암전되고, 잠에 빠져들 듯 의식이 가라앉았다.
그렇게 나는 회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