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화 〉1화. 청혼(1)

〈 2화 〉1화. 청혼(1)

“에드워드 경, 일어나세요!”

아내의 목소리에 화들짝 정신이 들었다. 이 나이 먹고 늦잠이라니, 어제 뭘 했더라?

“경기 전에 뭐 하고 있나 한 번 보러 왔더니, 이러다 시작할때까지 퍼질러 주무시겠어요.”

이 여자가 왜 갑자기 존댓말이지? 나 자는 건 꼴도 보기 싫다더니, 왜 옆에 있는거야?

“어… 여보?”

“여보라니, 벌써 우승이라도 하신 것처럼 구시네요? 아무리 가문 간 협의로 정해진 기정사실이라지만, 그런 호칭으로 부르고 싶으면 우승이나 하고 오세요.”

이게 뭔 소리지? 우승? 뭘?

가만히 서 있자, 아내가 나를 예의 그한심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바라본다.

“그렇게 멍청하게 서있지 말고요. 제가 직접 승리의 부적을 달아 드릴테니, 우승 못하면 내 손에 죽을 줄 알아요. 쪽팔리니까.”

여백작, 아니 모니카 율스타인이 자신의 손수건을 꺼내 들었다. 옆에 세워져 있는 랜스의 위쪽에 달아보려다가, 키가 닿지 않는지 아래쪽 손잡이에 묶는다.

“이거 비싼거니까, 찢어지거나 하면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알았어요? 여기에 묶었으니까 랜스가 부러져도 손수건은 사수하라는 말이에요.”

갑자기 사람이 변하면 죽을 때가 다 된거라던데, 이 여자가 왜 이리 싱겁게 굴까. 평소에 반말로 나를 무시하듯 말하는 거에 비하면, 이 정도는 상냥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다. 생각해보니나는 야만인 전사에게 패배해 죽었던 것 같은데. 그럼 지금 이 장면은 꿈인가?

당황한 내가 반응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자, 짜증이 나는지 인상을 쓰는 모니카. 무안함을 감추기 위함인지, 눈을 질끈 감으며 연극조로 과장되게 말했다.

“에휴. 나의 기사 에드워드 경, 율스타인 가문의 적법한 후계자인 나, 모니카 율스타인을 위해 승리를 바치겠습니까?”

기억 속에 남아있는 문장이다. 분명 15년 전, 내가 율스타인 백작령의 토너먼트 결승에 나가기 직전, 아내에게 들었던 말. 여기서 나는,

‘물론이죠, 나의 레이디.’

덜 떨어진 그때의 나는,한쪽 무릎을 꿇으며 내밀어진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췄었다.

기억과 정확히 같은 상황. 무릎 꿇은 내 눈 앞에 내밀어진 그녀의 손을 잡았다. 입을 맞추지 않고 그녀를 올려다본다. 이마에도, 미간에도 주름 하나 없는 매끈한피부. 내가 첫눈에 반했던, 처음 본 모습 그대로다. 손등에 느낌이 없자 실눈을 뜨고 나를 살핀다. 더 이상 기다리게 했다가는 짜증을 낼 것 같아, 서둘러 입을 맞췄다.

쪽-

“물론이죠, 나의 레이디.”

“...흥.”

모니카가 뒤돌아 대기실을 나섰다. 그제서야 혼자가 된 나는, 차분하게 상황을 정리할 수 있었다. 시가를 물고 불을 붙였다. 시가가 썼다.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가? 분명 나는 야만인 전사에게 패해 죽었다. 투박한 돌덩이가 내 머리를 부수던 감촉이 생생하다. 그럼 내 눈앞에 이 상황은 뭘까? 주마등이라도 겪는 것인가?

주마등이라고 하기엔 이상했다. 내 어린 시절이 아니라 젊은 시절부터 시작하는 주마등이 어디 있는가. 지금 내가 결승까지 올라온 이 토너먼트는, 내 인생의 첫 잘못 끼워진 단추였다. 출생부터 순탄하지는 않았지만, 그건 내가 끼운 단추가 아니니까. 내가 이 짜고 치는 판에서 우승을 하지 못한 순간부터, 모든 게 꼬였었다.

“에드워드 경, 출전하셔야 할 시간입니다.”

시종이 들어와 시합 시간을 알린다. 저 사람이 젊을 때는 저렇게 생겼었군.

“알겠네.”

시종의 도움을 받아, 벗어 두었던 갑옷을 입는다. 투구는 쓰고 있으면 답답하니 경기장까지 시종이 들고 올 것이다. 저번 생에는 폼 잡는다고 투구를 쓰지 않았다가 얼굴에 흉터가 생겼었지. 마상창용 갑옷은 입어 본 지 꽤 된 것 같았는데, 몸은 익숙한 듯 어색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모니카의 손수건이 묶인 랜스를 챙기고, 말에 올라 시종과 함께 경기장으로 천천히 이동했다. 관중의 함성 소리와 사회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결승 첫 번째 선수! 마운트베른 백작가의 차남! 토너먼트에서 우승해 레이디 모니카에게 청혼하기 위해 쉬지 않고 달려왔다고 합니다! 이전 라운드에서 만난 상대들을 모두 낙마시켜 승리한 에드워드 마운트베른 경입니다!”

우레와 같은 함성 소리가 들린다. 애초에 마운트베른 백작가와 율스타인 백작가 사이에 이미 협의가 되어 있는 사항이다. 토너먼트는 구색 맞추기일 뿐, 내가 우승하는 것으로 결정되어 있었다. 내가 나오면 분위기 좀 띄우라고 바람잡이라도 풀어 놨겠지.

“그 상대는! 아무것도 밝혀지지 않은, 베일에 싸인 무명의 기사! 신비주의를 고수하는 푸른 투구의 기사입니다!”

이어지는 소개에 명백히 작은 함성이 들린다. 푸른투구의 기사는 개의치 않는 듯, 내 쪽만 주시하고 있었다. 활활 타오르는 눈빛. 저 눈빛에 압도당했던 적도 있지만, 지금의 내가 보기에는 애송이의 눈빛 같아 보였다. 젊어진 몸에 활력이 넘친다. 지금 당장 달려가면 절대 질 것 같지 않다.

시종에게 슈테흐헬름을 건네받아 쓰고, 신호를 기다린다. 붉은 깃발이 올라간 게 보였다. 박차를 가해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쥐는 랜스지만, 몸에는 익숙한 듯 꼭 맞았다. 고개를앞으로 내밀어 시야를확보하고, 겨드랑이에 껴 놓은 랜스를 꽉 쥔다. 엄지손톱만했던 상대가 순식간에 커져 온다. 왼쪽 어깨에 가해질 충격에 대비해서

지금!

캉-

랜스가 갑옷을 때리는 소리가 난다. 똑같이 타격하는데는 성공했지만, 힘을 흘려내지 못한 상대가 휘청거렸다. 이후 두 번의 추가 라운드에서도 큰 소득은 없었다. 그래도 아예 창에 맞고 나가떨어진 저번 생 보다는 나았다. 남은 건 도보전 뿐. 랜스를 쥔 상대가 빠르게 달려온다.

“으랏차!”

기합 소리와 함께 상대가 랜스를 던졌다. 가볍게 피한 후, 훨씬 가까운 거리에서 랜스를 던지고 검을 뽑아들었다. 상대도 검을 들고 달려오다, 가로로날아오는 창에 당황해 휘청인다. 가로로 긴 게 날아오면 피하기 힘들지.

이후 균형을 놓친 상대에게 공격을 몰아쳤다. 연속해서 이어지는 검격에 당황한 상대는, 검을 갖다대어 막아내는 것에 급급할 뿐이었다. 기억보다 너무 쉬웠다. 몸에 힘이 넘치는 것이, 검을 휘두를 때마다 그 힘에 상대가 밀리는 것이 느껴졌다. 연속되는 공격에 자세가 무너진 상대에게 강하게 검을 휘두르자, 결국 막아내지 못하고 검이 날아갔다. 상대에게 검을 겨누자, 경기가 끝났다.

“경기 종료! 승자는, 에드워드 마운트베른 경입니다!”

떠나갈 듯한 환호성이 들렸다. 살면서 누리지 못했던 승자의 기쁨. 살면서 내내 따라다녔던, 패배자라는 꼬리표가 존재하지도 않았다는 듯 떨어져 나갔다. 기쁨과 해방감에 소리를 질렀다.

마치 원래 이렇게 됐어야 한다는 듯, 너무나도 쉽게 내 단추가 제자리를 찾았다. 혹시 꿈이 아닐까. 꿈이라면 제발 깨지 말아달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우승자에 대한 시상이 간단히 치뤄지고, 백작가 내부로 초청되었다. 토너먼트참가자들이 참가하는 연회는 정원에서 진행되고 있었지만, 애초에 귀족이고, 승리가 예정되어 있었던 나는 율스타인 백작가 사람들과 따로 식사를 하기로 했다.

“정말 멋있었어요! 이런 기사님이 저희 영지에 장가를 온다니, 정말 든든하네요.”

장모님이 내 활약을 추켜세워줬다. 베라는 역시 기억 속에서처럼 상냥하네.

“짜고 친 판에서 그것도 못 하는게 이상하지...”

“모니카.”

우아하고 귀족적이신 장모님, 아니 장모님이었던 베라가 모니카에게 주의를 줬다. 기억 속의 모습보다 훨씬 젊어 보이시는 그 모습은, 모니카와 자매 사이라고 하는 게 더 어울릴 정도로 싱그러웠다. 이렇게 아름다운 장모님이 내 편을 들어주니, 모니카의 빈정거림 따위는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베라가 더 아름답단 말이지.’

전생에는 멍청하게 이리저리 끌려다니다 모니카와 결혼했었지.

“하하, 괜찮습니다. 딱히 틀린 말도 아니구요.”

“그래도 손님에게 저런 말을 하는 건…”

“알았어, 알았어. 잔소리 좀 하지 마, 엄마.”

전 율스타인 백작인 몽고메리 율스타인. 그는 슬하에 딸 하나를 두고 사망했기 때문에, 식사자리에는 베라와 모니카, 그리고 나 세 명이끝이었다. 셋의 단촐한 식사자리는 기억 속의 싸늘한 분위기보다는 훨씬 나은 상태로 진행되고 있었다. 모니카가 맨날 우승자와 결혼했어야 한다며 내 바가지를 긁곤 했었지. 토너먼트 우승자와 준우승자 정도의 차이. 지금 이 테이블의 분위기는, 딱 그 정도로 차이가 났다. 모니카에게 패배자 주제에 밥은무슨 낯짝으로 먹냐는 소리를 듣지 않을 정도, 딱 그 정도의 분위기.

잡담을 주고받으며 식사가 계속된다. 모니카가 무언가를 기다리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베라가 계속 눈치를 주는 게느껴졌지만, 나는 묵묵히 밥을 다 먹었다.

“잠시 담배 좀 피고 오겠습니다.”

“아, 네. 다녀오세요.”

익숙한 발코니로 나왔다. 식사 후 담배를 핑계로 시간을 벌었다. 둘 다 내가 모니카에게 청혼하는 것을 기대하는 눈치였지만, 순순히 그럴 수는 없었다. 원래는 결승에서 패배한 준우승자로서,철저한 을의 위치에서 청혼을 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난 당당히 우승을 했고, 같은 데릴사위지만 더 나은 조건에서 결혼생활을 할 수 있었다.

무언가를 요구하려면 지금 요구해야 한다. 청혼을 하고 결혼 도장을 찍는 순간, 계약서는 바꿀 수 없다. 모니카에게 시달린 15여년의 기억이 있는데, 아무런 고삐도 없이 다시 결혼을 할 수는 없었다.

‘남편에게 복종하도록? 아니면 아예 맹세라도 받아?’

“후…”

시가가 빨갛게 점멸하고, 내 속과 함께 타들어갔다.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한 머리는, 시가가 다 타기 전에 결론을 도출해 냈다.

시가를 잘라내고 다시 품에 넣었다. 아예 청혼 반지를 꺼내 들고 식당으로 들어갔다. 입 안에는 쓰디쓴 담배맛이 맴돌았다.

“토너먼트의 우승자로서, 마운트베른가의 일원으로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율스타인 가문의 레이디여, 저와 결혼해 주시겠습니까?”

모니카가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선다. 저 표정이 일그러지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네 물론…”

모니카가 반지를 받기 전에 손에서 빼낸다.

“제 말은, 따님 말고 어머님 말입니다.”

모니카의 표정이 일그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