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첫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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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 첫눈에
* * *
미술관 앞에서 잡아탄 택시가 어느덧 그녀를 목적지로 데려다주었다. 스튜디오K. 강승재의 회사 앞이었다.
채원은 먹먹한 가슴을 애써 누르며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단 한마디 상의도 없이 멋대로 혼자 일을 처리한 상대에게 화부터 내야 할지 고맙다 눈물을 흘려야 할지, 본인의 감정조차도 제대로 파악할 수 없어 혼란스럽기만 한 지금.
“어? 윤 대리님! 같이 가요!”
닫히려던 승강기 문 틈새로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조 실장이었다.
“어머, 조 실장님! 오랜만에 뵙네요. 8층 올라가는 길이세요?”
“아, 저는 6층이요. 연락도 없이 웬일이세요? 강 감독님 만나러 오신 거죠?”
“네. 팀장님께서 선물을 좀 전하라 하셔서….”
“강 감독님 스튜디오에 계시거든요. 저랑 같이 내리시죠. 안내해드릴게요.”
예상치 못한 채원의 등장에 반색을 표한 조 실장은 그녀를 6층 스튜디오로 안내했다.
“아, 저는 사무실에서 기다리고 있어도 괜찮은데….”
“괜찮아요. 어차피 거의 마무리 단계라….”
승재가 촬영 중 얼마나 집중을 필요로 하는지 익히 알고 있었기에, 채원은 함부로 그의 작업장에 발을 들이는 게 조심스러웠다.
무턱대고 그를 찾아가 콜라보를 제안했던 작년 가을. 당시 기억을 떠올리면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다.
어디서 그런 무모한 용기가 나왔던 걸까. 극으로 치달은 그리움 때문이었겠지. 회사의 절박한 사정은 그저 핑계였을 뿐.
“모노톤으로 들어갈 거니까 포즈는 과하지 않게 해주세요. 오케이. 좋습니다. 시선 카메라. 미간 살짝만.”
몇 걸음 다가가자 촬영이 한창인 승재의 목소리가 또렷이 들렸다.
“윤 대리님, 여기 앉아서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막 컷이라 곧 끝날 거예요. 저는 잠깐 창고에 좀.”
“아, 네. 다녀오세요.”
채원에게 간이의자를 내어준 조 실장은 금방 돌아오겠다는 말과 함께 자리를 비웠다.
스튜디오 한쪽 구석에 얌전히 자리를 잡은 채원을 재차 확인한 조 실장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사무실로 안내할 걸 그랬나.
“뭐, 괜찮겠지.”
평소 살얼음판을 걷던 윤 대리와 강 감독이었지만, 전시회도 끝난 마당에 무슨 큰일이 나겠나 싶었다.
촬영 중 갑작스레 휴대폰이 울린다거나 하는 불상사만 생기지 않는다면.
“고개 살짝만 돌려볼까? 그렇지. 좋아요 지금.”
띠링, 띠리링.
그러나 조 실장의 과한 염려에 보답이라도 하려는 듯, 숄더백 속 채원의 휴대폰이 눈치도 없이 울려댔다.
“어머, 죄, 죄송합니다.”
화들짝 놀란 채원이 빛의 속도로 가방을 뒤적여 소리의 근원을 황급히 차단했다.
하지만 이내 멈추어버린 카메라 셔터음. 기어이 사고를 치고 만다. 잔뜩 겁을 먹은 스태프들의 표정을 보자, 채원의 등줄기에서 주르륵 식은땀이 흘렀다.
승재와의 거리는 채 3m가 되지 않았다. 멀찌감치 서 있었더라면 그나마 덜 방해가 되었을 텐데. 카메라를 쥔 승재의 모습에 빠져들다 보니 저도 모르게 자꾸만 발이 앞으로 나갔나 보다.
어찌할 줄 몰라 머뭇거리는 사이.
“마침 뒤에서 알람을 울려주네. 모델 고생 그만 시키라고.”
남자의 유쾌한 농담과 함께 쥐죽은 듯 고요하던 스튜디오에 안도의 웃음이 번졌다.
“오늘 촬영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수고했어요.”
“고생 많으셨습니다!”
박수 소리와 함께 스태프들의 분주한 인사가 시끌시끌하게 이어졌다.
그리고 내내 발끝만 바라보던 채원이 호흡을 누르며 겨우 고개를 들었을 땐.
“언제 왔어? 놀랐잖아.”
세상에서 가장 따뜻하고 근사한 미소를 띤 한 남자가 채원을 향해 웃고 있었다.
애써 참아온 눈물이 왈칵 솟구쳤다.
* * *
“전시회도 끝났는데 또 무슨 볼일이 남았습니까?”
따뜻한 홍차와 쿠키를 내오던 조 실장이 불안한 듯 승재와 채원의 표정을 번갈아 살폈다.
“저희 팀장님께서 감사장과 기념품을 전하라고 하셔서요.”
“그 이상한 머그컵 말입니까? 얼마 전에도 넘치게 받은 것 같은데.”
8층 사무실 문을 열자마자 미간을 찌푸리는 강 감독. 한숨을 쉬며 눈을 내리까는 윤 대리.
또 시작이네.
제 직원들은 살뜰히 챙기면서 남의 회사 직원은 왜 저리도 못 잡아먹어 안달인지, 조 실장 입장에서는 승재의 행동이 여전히 이해 불가인 영역이었다. 사진전까지 잘 마무리된 마당에 서로 날 세울 일이 뭐가 있다고.
“이번엔 컵은 아니고, 볼펜이랑 달력이에요. 저희 회사 굿즈가 다양하질 않아서 죄송합….”
“달력? 조 실장, 우리 회사 달력 남은 거 있지? 가져와 봐. 퀄리티 차이를 확실히 알아야 이런 허접한 굿즈 안 만들 거 아냐.”
“가, 감독님도 참… 숫자 크고 요일 잘 보이면 됐지, 뭘 그러세요? 기린 볼펜도 귀엽기만 한데.”
“괜찮아요, 조 실장님. 회사 예산 때문에 기념품이 딱히 정교하진 않아요. 저도 익히 알고 있는 부분이니까 신경 안 쓰셔도 돼요.”
채원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화를 삭인 채 억지로 미소를 보이는 중이었다.
‘승재 씨, 잠깐만….’
조금 전 몇 걸음 뒤에서 쭐레쭐레 승재를 따라 걷던 채원이 그의 팔을 잡아당긴 게 문제였다.
‘조 실장님은 아직 모르시지? 우리 관계….’
‘응. 안 그래도 지금 가서 말할까 하는데…. 들으면 아마 깜짝 놀랄걸. 사실은 9년 전 헤어진 연인이었다, 분위기라도 잡아야 하나?’
‘꼭 오늘 해야 돼?’
쿡쿡 웃던 승재가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왜, 싫어?’
‘응. 좀 민망해서. 승재 씨 혼자 있을 때 슬쩍 흘리든지, 암튼 나중에 밝히면 안 될까? 오늘은 그냥 하던 대로 하고….’
‘하던 대로?’
‘응.’
‘흐음… 평소 미팅 때처럼 대해 달라 이거지?’
의미심장하게 치켜뜬 한쪽 눈썹의 의미를 좀 더 일찍 알아챘어야 하는 건데.
“우리 쪽 액자 두 개는 언제쯤 변상해줄 겁니까?”
“네? 무슨 액자 말씀이신지.”
“전시회 철거 작업 중에 프레임 금 간 거 말입니다. 조 실장, POA 측에 아직 전달 안 한 거야?”
“가, 감독님께서 분명 저희 쪽 스태프 실수로 처리하라고 하셨잖습니까…. 왜 이제 와서 그 얘길 또….”
“생각이 바뀌었어. 국내에서는 찾기 힘든 디자인이라.”
“후우, 조 실장님. 뭐가 얼마나 금이 갔는지 모르겠지만 영수증 보내주시면 바로 처리해 드릴게요. 전시회 마무리까지 제가 꼼꼼히 살폈어야 했는데 하필 병가를 내는 바람에….”
채원은 광대에 힘을 주며 또박또박 말을 이어갔다.
물 만난 물고기처럼 채원을 갈구는 것에 재미가 들린 강승재. 알고도 속아주는 연극이었지만 불끈 치밀어 오르는 부아까지 컨트롤할 만큼 채원의 아량은 넓지 못했다.
“참, 조 실장, 오늘 중요한 약속 있다며? 일찍 퇴근한다고 하지 않았나?”
“아, 그래도 윤 대리님 배웅은 해드리고 가는 게….”
“됐어. 불시에 찾아온 윤 대리 잘못이지.”
“마, 맞아요, 조 실장님. 제가 연락도 없이 오는 게 아니었는데…. 저 신경 쓰지 말고 얼른 퇴근하세요. 감독님께 몇 가지만 물어보고 저도 금방 갈 거예요.”
선을 넘는 승재의 빈정거림에도 끝까지 꽃미소를 잃지 않는 불굴의 윤 대리.
머뭇거리던 조 실장이 묵례를 하고 사라질 때까지, 채원은 포커페이스를 유지한 채 생글생글 광대에 힘을 주었다.
쿵, 문이 닫힌 후 조 실장의 발자국 소리가 멀어지자 승재가 참았던 웃음을 터뜨리며 채원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억지로 입꼬리 안 올려도 돼. 조 실장 지금쯤 엘리베이터 탔을 거야.”
“신경 끄시죠, 감독님. 입꼬리 방향을 어디로 두든 제 맘이니까.”
어쩐지 비딱하게 틀어진 목소리.
채원은 눈을 가늘게 뜨고 승재를 쏘았다. 두 눈동자에 장난을 그득히 담은 저 남자가 오늘따라 특히나 더 얄밉게 느껴진다.
“윤채원 성질 많이 죽었네. 언제 뒤집어엎나 은근 기대하고 있었는데.”
화를 버럭 내며 얼떨결에 커밍아웃을 해주길 바랐던 승재는 채원의 침착한 대응이 내심 아쉬운 모양이었다.
“별 기대를 다 해. 난 앞으로도 승재 씨랑 붙을 생각 없으니까 괜히 혼자 기운 빼지 마.”
“그렇게 물러나면 내가 뭐가 돼? 누가 들으면 여자 하나 못 이겨 먹어서 안달 난 놈인 줄 알겠다.”
“싸움도 급이 맞아야 하는 거라고. 매번 신세 지고 받기만 하는 주제에 성질까지 나쁘면 되겠어? 승재 씨가 나한테 해준 거에 비하면 이 정도 장단 맞추는 건 일도 아니지.”
아무렇지도 않게 입술을 오물거리곤 있으나 확실히 뼈가 있는 대답이었다. 승재는 미소를 거두고 채원을 응시했다. 그녀의 문장을 곱씹을수록 왠지 모를 헛헛함이 밀려들었다.
“준 게 없는데 뭘 항상 받기만 했다고… 아니 것보다, 우리가 무슨 갑을 관계야? 왜 윤채원이 성질까지 죽여 가며 내 비위를 맞춘다는 건데 대체.”
“그런 뜻이 아니라….”
한층 가라앉은 남자의 저음에 채원은 당황한 듯 말을 얼버무렸다.
차라리 처음부터 본론만 간단히 꺼낼 것을 그랬나.
딴에는 그에 대한 고마움을 에둘러 표현한 것인데, 핀트가 한참 엇나가고 말았다.
“미안. 이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일 줄 몰랐어. 난 그냥 생각 없이….”
“윤채원.”
승재가 짧은 한숨과 함께 채원의 말을 끊었다.
“내가… 무서워?”
“뭐? 그럴 리가.”
“그럼, 어려워?”
“무슨… 아냐, 그런 거.”
“근데 왜 그래.”
“…….”
“왜 자꾸 습관처럼 사과하는데. 툭하면 눈치 보고, 얼버무리고.”
한결 나긋해진 음성은 여인의 경직된 눈동자를 따스하게 녹였다. 어딘가에 꼭꼭 숨어있을 당찬 윤채원을 끌어내기 위해서는 아직 한참의 시간이 필요해 보였다. 승재는 한없이 작아진 그녀를 마주하는 것이 가슴 아팠다.
“아무리 모진 소리 퍼부어도 내가 먼저 떠날 일 없어. 윤채원이 나 싫다고 도망가기 전까진 절대, 무슨 일이 있어도, 등 돌리지 않을 테니까.”
채원이 앉아 있는 의자를 자신의 곁으로 바짝 끌어당긴 승재.
“그러니까 앞으로는 참지 말고 말해. 싸울 일 생기면 싸우고. 기분이 좋다, 나쁘다, 티를 좀 내란 말야. 알겠어?”
커다란 남자의 손이 여인의 정수리를 쓰다듬었다. 변함없이 따뜻한 체온으로. 그 부드러운 손길에 목이 메어버린 채원은 대답 대신 두어 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아직 채원에게는 마지막 과제가 남아 있었다.
“승재 씨… 정윤호 회장 만났다면서.”
과거를 털어내기 위해 반드시 한번은 짚고 넘겨야 할 이름. 그리고 서일그룹과 얽힌 이야기들.
“어떻게 알았어?”
승재가 놀란 듯 되물었다.
“엄마한테 들었어. 관장님한테도.”
“아… 그랬구나.”
“미안해. 괜히 나 때문에….”
“너 또 이렇게 사과할까 봐 내가 비밀로 한 건데.”
“오늘까지만 들어줘. 오늘은 꼭, 해야 한단 말야.”
내 짐을 대신 지게 만들어 미안하다고.
그리고 고맙다는 말도. 또 사랑한다는 말도.
그에게 재차 잔소리를 듣는다 해도 이번만큼은 정말로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오늘은 꼭, 내 의지대로.
온 진심을 담아 전하고 싶었으니까.
“돈은 꼭 갚을게.”
확고한 채원의 어조에 승재가 피식 입꼬리를 올렸다.
“당연한 말을 하고 있어.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다고. 중도 상환 불가. 무조건 100년 할부로 갚아.”
“100년? 그런 법이 어딨어! 평생 돈만 갚다가 죽으라는 거야?”
얼토당토않은 승재의 신소리에 달랑달랑 맺혀있던 눈물이 쏘옥 들어가 버렸다.
“10년 안에 갚을게. 저축금 꽤 돼서 아마 가능할….”
“중도 상환 수수료는 원금 열 배.”
“뭐어? 노예 계약이야 뭐야. 김 비서보다 더한 악질이 여기 있었네.”
“비약이 너무 심하잖아. 윤채원 발목 묶어두려는 수작은 맞지만….”
장난 섞인 말을 주거니 받거니 하던 승재가 코끝을 긁적이며 중얼거렸다.
“중도 상환 불가에 100년 만기면 딱 노예 계약이지. 그게 아님 뭔데?”
갑작스레 풀죽은 남자의 모습이 귀엽게만 느껴지니 큰일이다 정말. 암튼 강승재, 애초부터 싸움이 불가능한 상대였….
“프러포즈.”
“…뭐?”
“아까부터 계속, 난 그런 의도였다고.”
“아….”
스튜디오 사무실에 오랜 정적이 흘렀다. 채원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농담이지?”
30분 남짓할 시간 동안 벌써 몇 차례나 분위기 반전이 있었지만 그 끝이 청혼이라니….
“농담으로 들려?”
“뭔데 정말… 장난치지 마. 프러포즈를 누가 그렇게 즉흥적으로 해?”
“때 되면 말하려고 했어. 정 회장 독대하고 왔다, 윤채원 마음의 빚도 덜어냈으니 이젠 홀가분한 마음으로 시작하자 우리. 나한테 올래? 아니, 내가 갈게. 그냥 넌 그 자리 그대로 가만히 서 있기만 하면 돼. 어디 도망갈 생각 하지 말고.”
“…….”
“요즘 매일같이 멘트 연습 중이었는데… 윤채원이 예고도 없이 나타나서 정윤호 이름 먼저 꺼낼 줄은 몰랐지.”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일까.
채원은 아무런 대꾸도 할 수가 없었다.
그와의 미래를 습관처럼 그려오곤 했지만 상상과 현실은 달라도 너무 다른 것이었다. 강승재의 실제 음성으로 ‘청혼’이라는 단어를 전해 들으니 머릿속이 하얗게 굳어져 간단한 사고조차 불가능했다.
“윤채원.”
“…….”
“표정 좀 풀어. 사람 민망하게.”
“아, 너무 갑작스러워서, 실감이 잘….”
“잠깐 나 따라와 봐.”
안 되겠다 싶었는지, 자리에서 일어난 승재가 채원의 팔을 슬며시 잡아끌었다.
“응? 어딜.”
“와보라니까 글쎄.”
얼떨떨한 눈빛으로 이끌려 간 곳은 사무실 안쪽에 위치한 작은 방이었다.
여기에 이런 공간이 있었던가.
몇 달 동안 들락거린 보람도 없이 건물 곳곳은 아직 낯섦이 더 크다. 그녀가 아는 장소라고는 8층 사무실과 미팅룸, 그리고 메인 스튜디오가 있는 6층 정도가 전부였다.
“승재 씨 개인 작업실이야? 아늑하네.”
“밤샘할 때 잠깐 눈 붙이는 곳. 공동 작업실은 따로 있긴 한데, 조용히 편집하고 싶을 때 오기도 하고.”
푹신한 패브릭 소파와 사이드 테이블. 널찍한 책상 위에는 컴퓨터 두 대와 복잡해 보이는 보조 장비들이 한가득 놓여 있었다.
“잠도 마음대로 자고, 일도 하고 싶은 데서 하고, 역시 대표가 좋긴 좋구나. 류정혁 사무실도 엄청 으리으리하던데.”
“그놈 사무실까지 접수한 거야?”
“류 야근할 때 몇 번. 바쁜 티는 혼자 다 내잖아. 아쉬운 사람이 질척거려야지 뭐.”
“류정혁 얼굴 자주 못 보는 게 그렇게 아쉬웠어?”
티 나게 비뚤어진 승재의 어투에 피식 웃음이 샌다.
“아니.”
소파 등받이에 살포시 어깨를 기댄 채원이 손톱 끝을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강승재 소식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이 류정혁뿐이라….”
“…….”
“언제쯤 한국 돌아오는지, 여자 친구는 생겼는지, 설마 결혼이라도 한 건 아닌지… 몰래 SNS 파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고. 그나마 믿을 만한 정보원이 하필이면 JH 대표님이셔서 말야.”
점점 기어들어 가는 그녀의 목소리를 잠자코 듣던 승재가 느슨히 입꼬리를 올렸다.
“윤채원, 예쁜 짓 한다.”
“응?”
“솔직하게 차근차근 말도 잘하고.”
“치이, 뭐야… 누굴 어린애로 아나.”
“애들은 원래 다들 솔직해. 나이 들수록 어려워지니 문제지.”
그런가.
어쩐지 납득이 가는 그의 논리.
“그럼 이제 상 줄게.”
“상?”
“벌도 주고 상도 달라며. 윤채원이 원하는 방식 아니었나?”
“옛날얘기 그만 좀 꺼낼래?”
볼을 붉히며 그를 흘기는 와중에도 괜스레 기분이 좋아진다. 칭찬에 이어 덤으로 상까지 주겠다니, 아무리 어른이어도 기대하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거라고.
스튜디오K 마크가 찍힌 볼펜 한 자루 쥐여주려나. 사람을 쥐락펴락, 요리조리 잘도 다룬다니까.
“눈 감아.”
“설마 아까 말한 달력은 아니지?”
계속되는 재촉에 채원은 마지못해 눈꺼풀을 내렸다. 달력이라면 POA 비품실에도 이미 많이 쌓였으니 정중히 사양하겠다, 재잘대며.
쪽.
채원의 구시렁거림을 막기 위함이었는지, 아님 그가 말한 ‘상’의 실체였는지, 남자의 도톰한 입술이 채원의 아랫입술을 보드랍게 눌렀다. 심장이 간질거렸다.
“…뭐, 달력보단 맘에 드네.”
스튜디오K 기념품보다는 훨씬 영양가 있는 선물이었다. 어느 정도 예상한 시나리오긴 했지만.
“아직 끝난 거 아냐. 눈 뜨지 마.”
“응?”
다급함이 묻어나는 승재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낯선 감촉이 채원의 손에 닿았다. 더 정확히는, 왼쪽 네 번째 손가락 마디가 간질거렸다.
“…….”
“말 참 안 들어. 눈 뜨지 말라니까.”
다시금 백지상태가 되어버린 머릿속.
왼손으로 시선을 내린 채원은 제 손가락에 딱 맞게 끼워진 반지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사실 디자인이 또렷이 눈에 들어오진 않는다. 자꾸만 시야가 흐려지는 탓에, 희뿌연 물기 사이로 반짝반짝한 빛을 감상하는 것이 전부였다.
“이렇게 반짝거리는 건… 처음 봐.”
스스로 생각해도 참 얼빠진 반응이었다. 차라리 입을 꾹 다물고 있을 걸 그랬나. 작게 한숨지을 무렵, 승재가 채원의 턱을 조금 들어 눈을 맞추었다.
“구경하라고 끼워준 거 아니야.”
“…….”
“결혼하자고 준 거지.”
“…….”
“싫으면….”
원래는 짓궂은 말 한마디쯤 보태려 했다. 스크래치 나면 환불이 어려울 수 있으니, 싫으면 곱게 빼달라고.
하지만 결국 문장 끝을 맺지 못한 승재였다. 그녀를 야금야금 놀리던 행위도 이 순간만큼은 잘되지 않는다.
승재는 채원보다 몇 배는 더 긴장하고 있었다. 태연한 척 미소를 띠는 중에도 목의 맥박은 터질 듯 펄떡거렸다.
“싫지 않아.”
“…….”
“싫을 이유가 없잖아.”
“…….”
“무릎 아프겠다.”
“…….”
“강승재… 왜 이렇게 얼었어? 좋다고. 결혼하자고.”
채원이 용기를 내어 그의 이름을 불렀다.
한쪽 무릎을 짓이기듯 바닥에 댄 채 잔뜩 몸을 굳힌 남자.
뭉클한 온기가 그녀의 가슴을 적신다.
혼자만의 버릇이 아니었나 보다. 그 역시 언제나 내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는 것을, 오늘에서야 처음 알았다.
“내가… 많이 사랑해, 승재 씨.”
“채원아….”
보상의 효과는 뛰어났다. 매번 혀끝에서 흐지부지 사그라지곤 했던 쑥스러운 고백이 처음으로 온전히 흘러나와 승재에게 닿았다.
“승재 씨 혼자 지치지 않도록… 앞으로는 더 노력할 테니까….”
커다란 손바닥이 채원의 목덜미를 조급하게 끌어당겼다. 벅차오른 남자의 감정이 고스란히 입술에 겹쳐졌다.
“하아….”
촉촉한 타액이 뜨거운 열기와 함께 얽혔다. 키스를 나눌수록 이상하게도 목마름이 심해진다. 입술을 벌려 서로의 혀를 깊게 탐했다. 마르지 않는 갈증을 채워보려는 듯, 승재와 채원은 밭은 숨결을 번갈아 내쉬며 오래도록 눈꺼풀을 내렸다.
여린 입술 점막이 아릿하게 부어오를 때쯤, 승재가 자연스럽게 채원의 니트를 끌어 올렸다. 마치 작정한 사람처럼 오늘따라 예쁜 말만 골라 하는 이 여인을 더는 내버려 둘 수 없었다. 강승재의 인내심은 이토록 얄팍했다.
“안 돼. 여기서는.”
“괜찮아. 문 잠갔어.”
황급히 옷자락을 내린 채원이 승재의 가슴을 투박하게 밀쳐냈다. 열띤 키스만으로도 아랫배가 빠듯이 조여왔지만 그의 직장에서 도를 넘는 짓을 강행하는 것은 무리였다.
“자, 잠깐만, 승재 씨.”
“다른 스태프들도 거의 퇴근했어. 아무도 안 온다니까.”
“그래도 좀 그래. 여기서 홀랑 옷 벗기엔….”
“안 벗길게.”
“뭐?”
“조심히 하면 되잖아. 누가 들어오든 안녕하세요, 바로 인사 가능하게.”
“그걸 지금 말이라고… 흣.”
겨우 추스른 니트가 브래지어와 엮여 쇄골선까지 올라갔다. 탐스러운 가슴이 무방비 상태로 드러나자 남자는 굶주린 짐승처럼 보드라운 살결 위로 얼굴을 파묻었다.
“나 아침에 샤워해서 지금은….”
“그래서 더 좋아. 윤채원 살 냄새.”
꼿꼿이 뭉친 유두를 번갈아 빨던 승재가 가슴골에 얼굴을 묻고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단전 아래를 뻐근하게 하는 여인의 체향.
인내력을 상실한 남자의 손은 채원의 스커트를 아무렇게나 걷어 올린 후, 스타킹과 속옷을 무릎까지 끌어 내렸다.
“안 벗길 거라며.”
“스커트 내리면 안 보여. 속옷을 입었는지 벗었는지. 윤채원 스타킹이 어디쯤에 걸쳐졌는지, 아무도 모른다고.”
승재는 채원을 소파에 엎드리게 한 후 그녀의 자그마한 몸을 묵직하게 덮쳤다.
철컥, 벨트 버클이 끌러지는 마찰음과 함께 팬츠와 드로어즈가 엉거주춤 내려갔다. 하지만 예상 밖 난관에 봉착하고 말았다. 한껏 발기된 두꺼운 성기는 꽉 조여진 여인의 둔부를 쉽사리 뚫지 못했다.
속이 탔다. 검붉게 달아올라 말간 액을 뚝뚝 흘리고 있는 페니스 역시 여유가 없긴 마찬가지였다. 거추장스럽게 걸린 스타킹과 팬티를 지금 당장 찢어버리고 싶었지만, 옷을 벗고 싶지 않다는 그녀의 요구를 차마 무시할 수는 없었다.
“엉덩이 들고 가슴 더 내려.”
“읏, 싫어. 부끄럽단….”
찰싹. 문장이 채 끝나기도 전에 채원의 엉덩이에 열이 올랐다.
“친절한 섹스는 아무래도 재미없나 봐.”
“아얏, 아프다고.”
“엄살은. 스타킹 너덜거린 채로 나가고 싶어?”
조급하게 구겨지는 남자의 미간. 커다란 손이 채원의 등을 재촉하듯 눌렀다. 더 이상 시간을 끌다가는 정말로 눈물을 쏙 뺄지 모를 일이었다.
채원은 칭얼거림과 함께 느릿느릿 엉덩이를 들어 올렸다. 볼록 둔덕이 솟자 축축이 젖은 음부가 그나마 입을 벌렸다. 승재는 자신의 것을 단단히 잡고 급하지 않은 속도로 허리를 움직였다.
한껏 부푼 선단이 미끄덩한 음부 사이를 힘겹게 비집는다. 여전히 빠듯한 감은 있었으나 조금 전보다는 그나마 삽입이 수월해 보였다.
“흐읍….”
절로 내질러지는 소리에 채원이 황급히 소파 위로 얼굴을 묻었다. 천천히 밀려든 그의 성기가 비좁은 길을 겨우 뚫고 내벽에 닿았다. 생살이 쓸리는 느낌에 오스스 소름이 돋아났지만 틈 없이 밀려드는 전율감은 사소한 통증을 쉬이 덮었다.
그의 것으로 꽉 들어찬 자궁은 완벽한 충만감에 사로잡힌 채 수축했다. 바짝 조여드는 아랫배의 진동이 톡 불거진 음핵을 자극하며 미묘한 쾌감을 끌어 올렸다.
채원은 본능적으로 엉덩이를 움찔거렸다. 거대한 페니스가 피스톤질을 하는 것도 모자라 패브릭 소파의 거친 질감이 자꾸만 여린 살을 자극했다. 새하얀 허벅지와 무릎 전체가 덜덜 떨렸다.
“설마, 혼자 가는 건 아니지?”
“아냐, 읏, 그런 거….”
“여기선 절대 안 된다더니, 어딜 자꾸 비비는 거야. 음란하게.”
배려 없는 어투와 달리 그의 손길은 부드러웠다. 승재는 채원의 몸을 와락 끌어안으며 그녀의 다리 사이로 팔을 집어넣었다. 기다랗고 단단한 손가락 마디가 젖은 속살을 적나라하게 벌렸다.
“박히는 것만으로도 만족이 안 돼? 여기도 만져줘?”
“승, 승재 씨… 하윽….”
그녀의 격양된 신음을 좀 더 느긋이 즐기고 싶었지만 지금으로써는 자세를 바꾸는 것조차 버거웠다. 욕심을 덜어낸 승재는 강약 조절 없이 채원의 내부를 들쑤셨다. 눈시울이 소금기에 절어 아릴 때까지, 채원은 승재의 무게를 견뎌내야만 했다.
오르가슴의 절정을 넘어선 시점, 반듯한 남자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이 톡 그녀의 손등을 적셨다.
필사적으로 아랫입술을 깨물던 채원이 그제야 고개를 들어 제 왼손을 바라보았다. 손가락에 끼워진 청초한 다이아몬드 반지가 지금의 상황과는 너무나도 언밸런스하여 온몸이 화끈거렸다.
“하아, 이건 빼고 할걸….”
“왜? 불편했어?”
“아니, 그냥 좀, 반지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별소릴 다 한다. 오히려 예의와 격식을 갖춘 거지 우리가.”
“뭐?”
“웨딩 링이잖아.”
채원의 등을 꼬옥 껴안은 승재가 엷은 웃음을 흘렸다. 그 소리가 듣기 좋아 몸을 일으키기 싫었다.
이대로 조금만 더 있을래.
달콤한 보석 반지를 선물로 받은 아이처럼, 허공을 향해 반짝이는 손등을 쭈욱 내보이는 그녀.
오늘 채원의 어리광 지수는 최고조에 달해 있었다.
* * *
광화문, SJ미술관.
“아니, 왜 이렇게 꾸미고 왔어? 적당히 하라니까 정말….”
택시에서 내리는 수경과 명섭을 향해 손을 흔들던 채원은 엄마의 모습을 보고 이마를 짚었다.
눈두덩이에 펄을 흩뿌린 풀메이크업에 새파란 투피스, 하늘 높이 솟은 업스타일 헤어로 화룡점정을 찍은 수경. 그 옛날 신입 스튜어디스 시절을 생생하게 재현해 놓은 듯했다.
“아저씨가 좀 말리시지 그랬어요.”
“윤 사장님 고집 누가 말리겠냐. 부자들한테 밀리면 안 된다고 아주 그냥 새벽부터 난리였다, 난리.”
“부자들 얘기가 왜 나와. 그냥 평범한 사진전이라니까.”
“얘는. 승재 군이 평범한 사람이 아닌데 사진전이 평범할 리가 있겠니?”
“후우, 됐어. 내 입만 아프지. 류 대표는 벌써 도착했다고 문자 왔던데, 우리도 얼른 들어가요. 배고프다.”
채원은 수경과 명섭의 팔짱을 나란히 끼고 걸음을 재촉했다. 사진전 오픈 행사는 오후 5시. 일찍 가서 돕기는커녕 지각이나 안 하면 다행이었다.
어느덧 봄이었다. 미술관 관장의 요청으로 승재는 5월 예정이던 개인전을 조금 앞당겨 준비했다.
무심코 돌이키는 것조차 버겁기만 한 지난 가을과 겨울. 그 폭풍 같던 나날들을 무사히 흘려보낸 채원은 지극히 평범한 현재의 일상을 소소히 즐기는 중이었다.
김 비서는 더 이상 채원의 주위를 맴돌지 않았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동남아인지 남미인지, 아무튼 해외 지사로 발령을 받아 가족 모두가 한국을 떠났다고 했다.
정윤호 입장에서는 서일그룹의 가족사를 꿰뚫고 있는 김 비서를 가까이에 두는 것이 영 찜찜했던 모양이다.
채찍보다 당근을 택한 정 회장은, 주요 계열사 직책을 김 비서에게 맡기며 서일그룹 비서실 출입을 자연스레 막았다. 얽힌 가족사에 대해서는, 이미 어릴 적부터 아버지를 통해 들은 바가 있으니 주제넘는 간섭은 삼가라, 아예 쐐기를 박아버렸다.
정 회장은 어떤 의도에서인지 채원을 몹시도 만나보고 싶어 했지만, 채원은 끝내 그의 제안을 거절했다. 사실 고민조차 해보지 않은 문제였다. 그녀는 애초부터 정씨 일가와 안면을 틀 생각이 없었다. 그들과 대면하는 순간 김 비서보다 더한 족쇄가 채워질 수 있다는 일말의 불안감 때문이었다.
5억이 넘는 기부금을 주거니 받거니 했던 훈훈한 계기로, 강승재는 정윤호 회장과 좋은 비즈니스 관계를 유지해 나갔다.
어쩌면 승재를 통해 채원의 소식을 듣기 위함일 수도. 그것이 일종의 감시일 수도 있겠단 의심이 종종 들었지만, 채원은 승재와 정윤호 사이를 굳이 파고들진 않았다.
방패 역할이든 다리 역할이든 알아서 잘 해주겠지. 강승재는 절대로 나를 아프게 할 사람이 아니니까.
언제부턴가 채원은, 저 자신보다도 더 강승재를 믿고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자해의 빈도는 현저히 줄어들었다.
채원은 지난달부터 시작한 심리 상담이 효과를 보고 있다 생각했지만, 강승재는 자신의 차고 넘치는 관심과 애정 덕이라며 자화자찬을 일삼았다.
하지만 이따금씩, 버릇처럼 커터칼을 집어 들거나 손톱 끝으로 살갗을 찌를 때면, 채원은 어김없이 승재를 찾아갔다.
‘나 오늘 사고 칠 뻔했어.’
‘그래? 이미 저지르고 온 거야?’
‘아니. 미수.’
‘아쉽네. 5만 원 넣고 가.’
단순 생각만으로 그쳤을 경우엔 5만 원. 어딘가에 조금이라도 상처를 냈다면 무려 10만 원.
강승재의 책상 앞에 놓인 철제 과자통 안에는 그렇게 채원의 벌금이 차곡차곡 쌓여갔다. 싱거운 방법이라 여길 수도 있겠으나 NGO 대리의 열악한 월급을 고려해본다면 꽤나 가혹한 벌이었다.
‘그래서, 벌금 모이면 뭐 할 건데?’
‘카메라 사는 데 보태야지.’
‘뭐? 불쌍한 직딩 돈 뜯어서 카메라를 사겠다고? 내 연봉 한 달 만에 버는 남자가 치사하게.’
‘이게 무슨 커플 통장인 줄 아나 봐. 모을 생각 하지 말고 텅텅 비울 생각을 해야지. 예전처럼 제대로 앉지도 못하게 혼내줄까? 응?’
작년 크리스마스 이후, 강승재는 ‘벌’의 형식으로 그녀에게 고통을 가한 적은 없다.
그러나 가끔 스트랩을 말아 쥐며 으르렁 목소리를 깔 때가 있었는데, 그럴 때면 왜 또 심장이 발랑발랑 뛰는 것인지. 스스로 생각해도 참 별난 취향이었다.
“윤채원, 왜 이렇게 늦었어? 나더러 일찍 오라고 성화더니… 아, 안녕하십니까, 같이 오신 줄은 모르고, 류정혁입니다.”
채원을 보자마자 미간을 구기던 정혁이, 그녀와 함께 온 수경과 명섭을 알아채고는 이내 고개를 숙였다. 까칠하지만 예의 바른 대표님이었다.
“어머, JH 대표님을 이렇게 가까이에서 다 만나고. 채원이한테 얘기 많이 들었어요. 승재 군하고 정혁 군은 참 잘 어울리는데 우리 집 딸내미만 처져서 어떡하나…. 채원이 앞으로도 잘 좀 부탁해요.”
“엄마, 쫌!”
“걱정 마십시오, 어머니. 승재가 알아서 잘 보살펴 줄 겁니다.”
“나는 내가 알아서 잘 산다구요. 자꾸 누굴 부탁하고 그래 진짜.”
“그나저나 승재 군이 안 보이네. 주인공이라 많이 바쁜 모양이지?”
씩씩거리는 딸내미를 슬그머니 외면한 수경은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승재를 찾았다. 예비사위가 된 이후로는 아예 대놓고 애정을 쏟는 장모였다.
“잠깐 인터뷰 중입니다 지금. 승재 올 동안 천천히 전시회 구경 먼저 하고 계시는 게….”
“응. 그럴까요 그럼?”
“아, 맞다. 윤채원. 너 미리 변호사 선임해 놔라. 어영부영하다 당하지 말고.”
수경과 명섭을 에스코트하던 정혁이 채원을 힐끔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한마디를 던졌다.
“그게 무슨 소리야? 갑자기 웬 변호사?”
“강승재 메인 작품 아직 못 본 모양이네. 초상권 침해가 상당하던데.”
“뭐, 뭔데 대체!”
초상권 침해라니. 설마….
미치지 않고서야 그가 그런 황당한 짓을 저질렀을 리 없다. 하지만 명색이 사진작가. 자유분방한 영혼의 대표 주자가 또 강승재 아닌가!
남들이 외설이라 해도 본인은 예술이 맞다, 주장할 수 있는.
벌떡이는 맥박. 채원의 발걸음이 점점 더 빨라졌다.
사실 그녀가 이토록 마음을 졸이는 데에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승재에게서 청혼을 받은 두어 달 전. 한바탕 거사를 치른 후 소파를 뒹굴거리는 채원을 향해 그가 불쑥 카메라를 들이밀었다.
‘찍어줄까?’
‘지, 지금? 안 돼. 너무 무방비 상태란 말야.’
‘아까워서 그래. 오늘 윤채원 너무 예쁘다고.’
누가 들어도 황송한 제안이긴 했다. 남자 친구가 유명 포토그래퍼인 것도 으쓱할 일인데, 그가 이런 일상의 사진을 전문가용 카메라로 직접 찍어주겠다니.
섹스 후 흐트러진 모습을 보인다는 게 민망하긴 했지만, 퇴폐적이면서도 나른한 아름다움이 배어 있다는 둥, 알아들을 수 없는 예술가 언어에 속아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인 채원이었다.
‘다음 작품 전시회 때 메인으로 걸어 볼까….’
‘감독님 마음대로 하세요. 저야 영광이죠.’
입꼬리를 실쭉거리며 대꾸했을 때만 하더라도, 강승재의 중얼거림에 진심이 담겨있을 줄은 전혀 몰랐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잖아.
엄마, 아저씨, POA 직원들까지 여럿 와 있는데, 어떻게 당사자 허락도 없이 그런 낯 뜨거운 사진을!
“어머, 얘. 채원아. 얼른 좀 와 봐. 저기 저 사진… 너 아니니?”
불행히도 엄마의 호들갑은 언제나 반 박자씩 빨랐다.
전시장 중앙에 걸린 강승재의 작품에 온통 시선을 빼앗겨버린 수경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채원의 팔을 잡아끌었다.
“아, 엄마. 이게 실은 어떻게 된 거냐면….”
서툰 변명을 더듬더듬 늘어놓으려던 채원은, 벽에 걸린 사진 한 점 앞에서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저게 언제 적이야 대체? 명섭 씨, 우리 채원이 너무 예쁘지 않아요? 어쩜….”
“그렇네 정말. 대학생 때 찍은 건가? 무슨 공원 같기도 하고….”
“메도우즈 파크….”
“뭐?”
“제가 미국에 있을 때… 자주 가던 공원이었어요.”
대충 벗어 던진 상아색 운동화. 양말조차 신지 않은 새하얀 맨발.
스물두 살 윤채원은 나무 벤치 위에 두 무릎을 세우고 앉아, 샌드위치를 한입 가득 베어 물던 참이었다.
‘저기요, 한국 분 맞죠? 이 벤치 계속 찍으실 거면, 제가 자리 비켜드릴까요?’
‘아, 구도가 맘에 들어서 저도 모르게….’
‘구도는 무슨. 저 뒤쪽이 죄다 묘지인데.’
‘삶과 죽음의 경계에 대해 찍고 있었습니다.’
로맨스와는 거리가 멀었던 첫 만남.
이후 억울함을 호소하며 공원 뒤 묘비 사진을 대문짝만 하게 뽑아왔길래, 정말로 생과 사의 경계인지 뭔지를 찍고 있었나보다 했다.
사심 없는 순수한 예술 청년인 줄 알았더니, 제대로 속았던 거야.
사실은 처음부터 나를….
“원래 이 사진 앞에서 청혼할 계획이었는데.”
어느새 다가온 승재가 채원의 허리를 살포시 끌어안으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내가 아니라 묘비 찍었다며. 무슨 삶과 죽음이 어쩌구 하더니….”
“틀린 말 아니잖아. 삶과 죽음의 경계에 윤채원이 우연히 앉아 있었던 거지.”
“스토커. 속았어 완전….”
채원은 파르르 떨리는 입술에 힘을 주어 겨우 말을 뱉어냈다. 금방이라도 후두둑 눈물을 쏟을 것 같아 눈꺼풀을 깜박이는 것조차 힘에 부쳤다.
“사진 타이틀… 봤어?”
“몰라. 영어 울렁증 있다고.”
“백인 멱살 잡던 분께서 설마. 모른다면서 울긴 왜 우는데?”
“안 울어.”
“안 울긴.”
“아, 글쎄 눈물 아니라니까 이건!”
채원이 코끝을 훌쩍이며 버럭 성을 냈다.
그의 6번째 개인전 메인작.
[At First Sight]
첫눈에.
언제나 예상을 훌쩍 뛰어넘는 강승재는, 매번 다른 방식으로 나를 보듬으며 사람의 마음을 울린다.
“심리 상담 그만 받아도 되겠다 너. 감정 표현이 갈수록 격해지는 것 같아.”
유쾌한 남자의 농담이 잔물결처럼 하얗게 부서지며 일렁거렸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