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 마주하다
본문
#08. 마주하다
* * *
샤워를 마친 채원은 네이비와 레드 컬러가 교차된 체크무늬 원피스 잠옷 차림으로 소파에 겨우 엉덩이를 붙였다.
캐리어를 끌고 그의 집으로 들어온 것은 그나마 천만다행인 일이었다. 하마터면 갈아입을 속옷도 없이 난감하게 앉아 있을 뻔했으니.
“거기서 뭐 해?”
“어?”
“소파 처음 앉아보는 사람처럼.”
강승재의 장난기 섞인 웃음소리에도 긴장이 영 풀리지 않는다. 어쩐지 더욱 주눅이 드는 기분… 아무래도 이 평범한 파자마 때문일까.
누군 뭐 이런 상황이 닥칠 줄 알았겠는가. 남자와 헤어져 펑펑 울다 청주집까지 내려간 마당에 하늘하늘한 잠옷이나 레이스 달린 팬티 따위가 있을 리 없잖아.
‘다음부턴 씻고 와. 속옷도 좀 신경 쓰고.’
그 언젠가 되는 대로 지껄였던 강승재의 가시 돋친 말이 떠올랐다.
욕실 물 한 방울조차도 내주는 게 아깝다는 듯 차디찬 음성을 잘도 뿜어대던 남자가.
“몸은 괜찮아? 커피는 밤이라 좀 그렇고, 따뜻한 차라도 줄까?”
이렇듯 갑작스레 꿀이 뚝뚝 떨어지는 문장을 살뜰히 건네니, 적응을 하지 못해 얼굴이 굳긴 마찬가지.
“승재 씨. 꼭 다른 사람 같아.”
“누가… 내가?”
“응.”
“무슨 뜻이야 그게.”
“아니 그냥… 하루아침에 너무 친절해져서….”
“그래서, 별로야? 예전처럼 막 대해줘?”
필요 이상으로 긴장을 하고 있는 채원의 모습이 어처구니없으면서도 귀여웠는지, 승재가 손가락을 들어 톡 불거진 이마를 장난스럽게 튕겨냈다.
“아얏… 아프잖아.”
“겨우 이 정도로 엄살은. 더한 것도 잘 참으면서.”
농담처럼 던진 말이었으나 확연히 얼어붙은 공기. 남자의 어금니가 지그시 물린다.
단어 선택을 조금 더 주의했어야 했는데….
“미안. 말이 헛나왔다.”
“됐어. 내가 농담도 구분 못 할까 봐.”
“이젠, 괜찮은 거야?”
“응?”
“나 없을 때 또 혼자… 상처 낸 적 있냐고.”
승재가 채원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 아니.”
“정말?”
“응. 하도 울어서 그런가, 아무 생각 안 들더라 신기하게.”
생각에 잠긴 듯 한동안 말이 없던 채원이 무릎에 올린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입을 열었다.
“나… 심리 상담 받아 볼까 생각 중이야.”
“상담?”
“응. 내가 좀 찾아봤는데 상담치료 효과가 꽤 좋다고 하길래.”
“그런 결심도 하고 기특하네.”
채원의 옆에 어느샌가 자리를 잡은 승재가 어린아이 어르듯 그녀의 머리를 보드랍게 쓰다듬었다. 느릿한 동작으로 팔을 움직일 때마다 향긋한 샴푸 향이 잔잔히 번져온다.
“나만 자꾸 만져주면 보리가 질투할지도 몰라.”
손바닥의 따스한 온기가 거듭될수록 눈물이 차오른 탓에, 채원은 괜스레 보리 핑계를 대며 슬그머니 승재의 손길을 피했다.
“보리 쿨쿨 자. 신경 안 써도 돼.”
“그래도….”
“언제까지 뜸 들일 건데.”
“응?”
“오늘 남자 하나 말려 죽이기로 작정한 거야?”
가벼운 타박과 함께 머리칼을 쓰다듬던 커다란 손바닥이 자연스레 채원의 목선을 간질였다.
“손이 왜 이렇게 뜨거워?”
“태연하게 묻지 마. 주차장부터 한 시간 다 되도록 애를 태우는데 그럼, 열이 안 나게 생겼어?”
승재의 손가락이 원피스 표면을 천천히 스쳤다. 채원은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쓸데없는 걱정이 한꺼번에 밀려든다. 환한 불빛 아래 맨얼굴, 특별할 것 없는 잠옷과 속옷, 눈치도 없이 꼬르륵거리는 배 속의 사정. 이 모든 자질구레한 것들이 오늘 밤 분위기를 망쳐버릴까, 채원은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나 할 말 있어.”
“안 돼.”
“승재 씨….”
“나중에 해.”
반듯한 쇄골 위로 열띤 입술이 내렸다. 촉촉한 숨결과 함께 조금씩 아래로 미끄러지는 혀끝은 새하얀 피부를 농밀하게 물들이며 붉은 자국을 만든다.
톡, 톡, 가슴 부위를 가리고 있던 서너 개의 단추가 차례로 힘을 잃어갈 때쯤.
“승재 씨, 나 속옷….”
얼굴 전체가 발갛게 달아오른 채원이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이며 작게 목소리를 냈다.
“하아, 뭐?”
“속옷이… 안 예쁘다고…. 오늘 승재 씨랑… 이렇게 될 줄 몰라서 미처 준비를….”
길지도 않은 문장을 띄엄띄엄 겨우 내뱉고선 남자의 가슴에 콩 이마를 대는 이 여인을 어찌하면 좋을까 정말.
“솔직한 반응을 원해?”
또 무슨 말로 상처를 주려고 이러나. 고개를 끄덕이지도 내젓지도 못한 채 승재의 눈치를 살피는 채원에게.
“기억 안 나. 하나도.”
뜻밖의 대답이 들려왔다.
“어?”
“지금까지 윤채원 속옷이 뭐였는지, 일일이 감상할 여유 없었다고.”
“그치만 지난번엔 분명 나한테….”
“예뻐.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부 다. 정말이야… 그러니까….”
나 좀 살려주라. 윤채원.
더 이상은 한계라는 듯, 남자의 입술이 조급하게 겹쳐졌다. 오물오물 말을 뱉던 자그마한 입술이 순식간에 잡아먹히고 말았다.
채원은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허스키하게 터지는 낮은 탄성에 쿵쿵 울리는 심장 박동은 이미 최고조에 달해 있었다.
상체를 여민 단추가 모두 풀린 원피스는 처음의 형태를 잃고 흐물거렸다. 잠옷 소매를 팔꿈치 아래까지 끌어 내린 승재는 탱탱하게 솟은 젖가슴을 손바닥 가득 움켜쥐고 입을 맞췄다.
“흐응….”
동그란 유두 끝을 살살 건드리던 뜨거운 혀가 진득한 타액을 묻히며 유륜 주변을 크게 핥자, 말캉한 연홍빛 꼭지가 절정을 맞이한 봄꽃처럼 단숨에 짙어졌다.
“처음엔 젤리 같더니 금세 딱딱해졌어.”
“하아, 그렇게,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마….”
“하지 말라니까 더 하고 싶잖아.”
억센 손가락에 눌려 검붉게 피가 쏠린 젖꼭지는 눈처럼 하얀 피부와 대조되어 그 색이 더욱 야했다.
“읏….”
“너 얼굴부터 목까지 새빨개져서 당황해하면, 그렇게 흥분되더라 난.”
“못됐어….”
“알아. 못된 놈한테 발목 잡힌 윤채원 잘못이지.”
“9년 전엔… 읏, 안 그랬던 거 같은데, 하아… 변했어, 완전.”
“그것도 역시 윤채원 때문이고.”
어느샌가 치마 속 팬티를 끌어 내리는 못된 손.
형식적인 밀당조차 없이 무방비 상태로 소파에 눕혀진 채원은 축축이 젖은 속옷을 환한 불빛 아래 고스란히 내보여야 했다.
“그만 좀 쳐다봐. 부끄러워 죽을 것 같단 말야.”
적나라한 토크를 이어가던 짓궂은 음성이 이상하리만큼 잦아들었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정적. 채원의 얼굴은 그의 바람대로 울긋불긋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승재 씨.”
이쯤 했으면 충분하잖아. 사람 민망하게 정말.
“많이… 아팠겠다.”
“응?”
“미련하긴. 이렇게 될 때까지… 소리 한번을 안 지르고.”
언제까지 짓궂은 장난이나 칠 거냐며 미간에 주름을 잡던 채원은 그의 가라앉은 음색을 듣고 표정을 폈다.
승재는 무거운 눈빛으로 그녀의 다리를 한참 동안 내려다보았다.
검푸르게 멍이 든 허벅지.
벌써 2주 가까이 지난 일이었으나 자국은 여전히 선명했다.
크리스마스 밤의 애달픈 광기를 잊지 않겠다는 듯. 그녀의 살갗은 독하게도 여태껏 새카만 멍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괜찮아.”
“버릇처럼 말하네. 하나도 안 괜찮아 보이는데.”
“정말이야.”
허벅지를 애처로이 매만지는 승재의 손을 슬며시 잡아 올린 채원.
“결국 다시 돌아왔잖아. 강승재.”
“…….”
“그러니까… 앞으로는 쭈욱 괜찮을 거야.”
어느 때보다도 확신에 찬 목소리가 크고 작은 모든 불안을 잠식시킨다.
“다시 해 봐.”
“어?”
“강승재 이름, 다시 불러 보라고. 오랜만에 들으니 설레네.”
“치이… 별게 다….”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에 조심스레 입술을 댄 승재가 어중간하게 걸쳐진 채원의 속옷을 발목 아래로 마저 끌어 내렸다.
“어쩐지 숙연해져 버렸지만, 그래도 하던 건 마저 해야지.”
여린 속살을 은근히 파고드는 단단한 손마디. 긴장이 풀린 하반신이 화들짝 놀라 다시금 조여든다.
“하아… 못 말려.”
“솔직해서 예쁘다. 얼굴색도, 여기 이곳 색깔도.”
억센 힘에 의해 인위적으로 벌어진 음부 사이로 발갛게 달아오른 클리토리스가 수줍게 드러났다. 미끄덩하게 젖은 틈을 빠듯이 벌린 승재는 허기진 들짐승처럼 얼굴을 묻었다.
열띤 숨이 다리 사이를 뜨겁게 달군다. 터질 듯 부푼 음핵과 그 주변을 샅샅이 핥고 빠는 야무진 혀끝에, 채원이 신음하며 몸을 비틀었다.
“흣, 승재 씨… 하지 마, 거긴….”
“가장 맛있는 부분인데 왜.”
“안 돼… 하읏….”
“앞으로 매일 먹을 거야. 윤채원이 좋든 싫든.”
남자의 적나라한 식사는 채원의 신음이 교성으로 변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손가락 두 개로 갈라진 속살을 한껏 벌리고는 집요하게 음핵을 핥던 혀가, 왈칵 액을 토해내고 있는 입구를 향해 서서히 방향을 틀었다.
“뭐부터 넣어줄까.”
“그만… 흐응, 승….”
“부드러운 것보단 좀 더 단단한 게 나으려나?”
혀 놀림만으로는 성이 차지 않았나 보다. 손가락에 힘을 주어 질 입구를 천천히 넓히던 승재는 철컥, 벨트 버클을 풀고 거추장스러운 것들을 단숨에 벗어 던졌다.
“말해 봐.”
“하아, 뭐를….”
“뭐가 가장 좋은지.”
어떻게든 피해 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섹스 중 강승재는 여전히 친절하지 않다는 것을 몸소 깨닫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거나 다… 읏, 다 좋아.”
“틀렸어. 하나만 택해야지.”
“승재 씨….”
“아직 여유가 넘치는 것 같은데, 좀 더 고민해보든가.”
“하윽!”
남자의 중지와 약지가 예고도 없이 좁은 입구를 불쑥 파고들었다. 채원이 고개를 젖히며 격한 숨을 뱉어냈다. 별안간 머릿속이 새하얘지고 아랫배가 빠듯이 옴츠러들었다. 갑작스러운 자극은 그녀를 몇 단계 너머의 절정으로 정신없이 몰아갔다.
“이제 그만 들어와.”
“아직 멀었어.”
열 번, 스무 번, 쉴 새 없이 내벽을 치는 손가락. 민망할 정도로 질컥거리는 하복부의 울림이 채원의 호흡을 더욱 가쁘게 만들었다.
“읏… 혼자 가기 싫단 말야. 제발.”
물론 그가 원하는 답은 아니었겠지만, 채원은 최선을 다해 애원하고 또 애원했다.
더 큰 파도가 밀려들기 전 강승재를 품고 싶었으니까. 오롯이 꽉 들어찬 충만함 속에서 그와 함께 절정의 끝을 느끼고 싶었다.
“하아, 정도껏 예뻐야지.”
남자의 인내심은 생각보다 길지 못했다. 너무 오랜만이기도 했고, 윤채원이 너무 아름다운 탓도 있었다.
나지막이 터지는 탄성과 함께 승재가 채원의 다리 사이로 골반을 밀착시켰다. 두꺼운 페니스를 억지로 맞춰놓고 강하게 허리를 튕기자, 비좁은 길이 탄력 있게 벌어져 강승재의 본능을 온전히 받아냈다.
“하윽.”
채원의 밭은 숨이 점점 제 속도를 찾아갔다. 살이 빠지더니 이곳까지 좁아진 거 아니냐며 승재는 짓궂은 소릴 내뱉었지만, 절대로 투박하게 짓치는 법이 없는 남자의 뭉근한 움직임에 아릿한 통증은 곧 시시하게 사라졌다.
지금 자신의 몸을 한껏 끌어안고 있는 이 남자는 아침이 되면 사라질 신기루도, 서글픈 꿈도 아니라고. 그러니 하루 정도는 철없이 마냥 행복해져도 괜찮다고.
참 멀리도 돌아온 길.
그렇게 강승재와 하나가 되는 순간, 채원은 겨우 붙잡아 두었던 이성의 끈을 망설임 없이 툭 끊어냈다.
운동화 속 모래알과 같은 자잘한 고민들은, 내일이나 모레쯤 다시 떠올리면 그만이었다.
* * *
“으음….”
타는 듯한 갈증에 겨우 눈을 뜬 채원.
끔벅끔벅. 기다란 눈꺼풀을 느리게 움직이던 그녀가 별안간 벌떡 몸을 일으켰다.
낯선 침실, 낯선 침대, 폭신한 거위털 이불마저 낯선. 심지어 입고 있는 옷조차도 본인의 것이 아닌….
어찌나 깊게 숙면을 하였던지 정신이 멍하여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는다. 남자 사이즈로 추정되는 큼지막한 맨투맨티를 걸친 채원은 지금이 몇 시인지도 어디인지도 모른 채, 실로 오랜만의 단잠을 만끽하고 눈을 뜬 것이었다.
하지만 벌렁대던 채원의 심장은 오래지 않아 안정을 찾아갔다.
‘익숙한 냄새….’
하얀 베갯잇과 사각거리는 침대 시트에 밴 청량한 스킨 향. 우습게도 베갯머리에 보리처럼 코를 박고 나서야 어젯밤의 일이 그녀의 멍한 머릿속을 가득 채운다.
발그레 양 볼이 붉어졌다. 강승재의 침실. 지금껏 단 한 번도 발을 들인 적 없는 공간이었기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아마도 그가 거실에 널브러져 있던 채원을 자신의 침대 위로 데려온 모양이었다. 업었는지, 안았는지, 아님 질질 끌고 왔는지조차 기억나지 않는다는 게 가장 큰 문제였지만.
이내 여유가 생긴 채원은 침대 헤드에 비스듬히 등을 기댄 채 찬찬히 그의 방을 둘러보았다.
혼자 살면서 왜 이렇게 매트리스가 너른지 이해할 수 없었으나, 방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는 킹사이즈 베드는 채원이 누워본 그 어떤 침대보다도 아늑하고 편안했다. 수년간 달고 살던 수면제를 잊을 정도로 단꿈을 꾸며 눈을 붙였으니….
사실 그의 침실은 예상외로 단출하고 심플했다. 침대 옆 협탁. 그레이 컬러의 장 스탠드. 비슷한 톤의 3단 선반. 그 위에 놓인 블루투스 스피커와 몇 권의 서적, 반듯하게 접힌 담요, 그리고 그의 카메라들.
‘휴식’과 ‘숙면’의 목적에만 부합하도록 의도적으로 여백을 남겨둔 것인지 침대 외의 큰 가구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9년 만에 처음으로 마주한 그의 공간은, 익숙한 향기와는 모순된 낯섦이 존재했다.
눈치채지 못한 사이 어른이 되어버린 남자의 방을 몰래 훔쳐보는 기분이랄까.
똑, 똑.
“어? 일어났구나?”
형식적인 노크 소리와 함께 벌컥 방문이 열렸다.
“깜짝이야….”
“놀라긴. 혼자 무슨 짓을 했길래.”
사자를 만난 토끼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는 그녀를 넌지시 비껴 보며 승재가 엷게 웃었다.
“가, 갑자기 문 여니까 그렇잖아.”
“내 방 노크까지 하고 들어왔으면 충분한 거 아닌가?”
승재가 한 톤 높은 웃음소리를 냈다. 별것도 아닌 일로 포르르 성을 내는 채원의 행동에 고개를 갸웃거릴 법도 하였지만, 지금은 그녀가 뭘 하든 마냥 좋을 때였다.
“자, 우선 이거부터 먹고 씻어. 커피는 블랙 괜찮지?”
“아, 으응. 고마워.”
따뜻한 커피와 토스트를 올린 트레이를 협탁 위에 내려놓은 승재는, 베개 두 개를 평평히 만진 후 그녀의 허리 뒤에 살포시 받쳐주었다.
“배 안 고파?”
“잘 모르겠어.”
“생각해보니 어제 우리 저녁을 안 먹었더라.”
“아, 그랬었나… 워낙 경황이 없어서.”
승재가 의미심장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하긴, 우리가 경황이 좀 없긴 했지.”
‘우리’라는 단어를 유독 문장마다 집어넣는 그의 어투에 채원의 심장이 간질거린다.
“고마워. 잘 먹을게.”
너의 침실에 발을 들인 것.
네가 타준 커피를 홀짝이는 것.
우리를 우리라 칭하는 것.
남들에겐 평범한 일상이 우리에게는 참 어렵고 힘들었구나.
“토스트는 남겨도 돼. 조금 있다가 점심 같이하자.”
“응.”
툭하면 목이 멘 탓에 눈을 똑바로 마주치는 일조차 버겁다. 자그마치 9년이나 걸렸다. 강승재와 내가 ‘우리’라는 단어로 묶일 때까지.
“근데 승재 씨가 이 옷 입혀준 거야? 내 파자마는 어쩌고….”
바삭한 토스트를 오물거리던 채원이 커다란 연보라색 티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어젯밤 캐리어에서 꺼낸 원피스 잠옷은 대체 어디로 사라진 건지. 술 한 방울 입에 대지 않았는데 이렇게 필름이 끊길 수도 있나 싶었다.
“아… 그게… 세탁기 돌리고 있어 지금.”
“세탁기?”
“그… 어제 뭐가 좀 많이 묻어서.”
푹 수그러진 고개와 함께 말을 더듬적거리는 남자. 멋쩍은 듯 긁적이는 뒤통수. 단순한 궁금증이 의도치 않게 강승재를 당황시켰나 보다.
“면 소재라 안 물어보고 물세탁 한 건데, 괜찮지?”
“으응. 막 빨아도 돼.”
순식간에 어색해져버린 분위기 속, 백 일도 안 된 커플인 양 얼굴을 뜨끈히 붉히는 서로가 우스울 뿐이었다. 숨 막히는 공기를 견디지 못한 채원이 결국 시트를 걷고 두 발을 바닥에 디뎠다.
“나 식탁에서 먹을게. 이불이 너무 하얘서 커피 흘릴까 봐 조심스러워.”
“굳이 그럴 필요 없는데.”
“아냐. 간만에 숙면했더니 몸도 개운하고….”
“그럼 트레이 이리 줘.”
“됐어. 안 무거워.”
“그래도 내가 옮겨줄….”
채원이 든 쟁반을 힘 있게 잡아당기던 남자의 손이 스르륵 풀렸다. 그와 동시에 아래로 떨구어진 시선.
“아… 보, 보지 마!”
“본 게 아니라 보여진….”
“뭐든! 눈 돌리라니까!”
당황한 채원이 목청을 돋우었다. 미처 알지 못했다. 맨투맨 티 아래 아무것도 걸치지 않았다는 사실을. 팔을 뻗어 그의 눈을 당장이라도 가렸어야 했는데, 트레이 때문에 두 손마저 묶인 상태.
“입히려면 제대로 입혔어야지!”
채원은 다짜고짜 승재에게 성질을 부렸다. 역시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미안… 티가 커서 충분하겠다 싶었는데….”
“아무리 그래도 소, 속옷도 없이….”
“속옷도 같이 넣었지. 세탁기에….”
“뭐?”
지나친 친절은 사양이다 정말. 누가 속옷까지 빨아 달라 했냐고!
“캐리어 뒤져보려다가 왠지 예의가 아닌 듯해서. 그렇다고 내 드로어즈 입힐 수는 없잖….”
“아, 그만해 그만. 진짜 창피하게 뭐야 이게.”
이 주제로 더는 길게 얘기하고 싶지 않았다. 불리한 쪽은 어차피 정해져 있었으니까.
“승재 씨, 거실에서 내 캐리어 좀 갖다 줘.”
승재에게 트레이를 건넨 채원은 퉁명스러운 한마디를 톡 쏘아붙이고는 걷어낸 이불 속으로 다시금 몸을 숨겼다. 토스트고 나발이고 기껏 감돌던 식욕이 싹 사라져버렸다.
탁.
그런데 이 남자. 이어지는 행동이 영 수상하다.
“나 여기서 먹을 생각 없대두.”
쟁반은 왜 도로 내려놓는 건데.
“내 말 못 들었어? 캐리어 가져다 달라니까. 옷 갈아입은 다음에 아침은 식탁에서….”
“나중에.”
“뭐?”
“30분만 뒤에 먹자. 아침.”
채원의 다리를 감싼 이불 속으로 슬그머니 손을 집어넣는 승재.
“왜 이래 아침부터….”
“아침이니까.”
그리고 어김없이 시작된 강승재의 엉터리 논리.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너 아직 모르는구나. 원래 아침에 하는 섹스가 만족도는 더 높은 법이라고.”
오늘의 아침은 유난히 길어질 것만 같다.
* * *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었으나 갑작스러운 손길에 다리 사이가 꽉 조여들었다.
“쓸데없이 힘쓰면 배 더 고프다 너.”
승재가 농담을 흘리며 채원의 동그란 무릎 위에 쪽 입을 맞추었다.
승재는 채원의 긴장을 녹여주는 것에 능했다. 커다란 손바닥을 자연스레 움직이며 그녀의 허벅지 안쪽을 찬찬히 쓰다듬자 잔뜩 굳어있던 근육이 신기하게도 조금씩 부드러워진다.
“승재 씨, 나 샤워….”
“어제 씻고 잤잖아.”
“그래도….”
빙그르르 몸을 돌려 슬금슬금 침대 끝으로 도망가려는 채원을 한 손으로 낚아챈 남자.
“꼼지락거리지 말고 가만히 있어.”
나지막한 한마디와 함께 채원의 등을 와락 껴안은 승재는 그녀가 입고 있던 커다란 맨투맨 티를 손쉽게 벗겨냈다.
보드라운 나신이 너른 품에 담쏙 안겼다. 단단한 가슴 근육이 톡 불거진 채원의 날개 뼈를 짓눌렀다. 동시에 탐스러운 엉덩이를 묵직하게 찌르는 강승재의 본능. 그 빠듯한 압박감에 쿵쿵 심장이 울린다.
“시도 때도 없나 봐 얘는.”
“얘가 누군데? 혹시 이놈 말하는 건가?”
자신의 물건을 의인화시킨 채원의 표현이 재미있었는지, 승재는 천연하게 웃으며 한껏 치솟은 페니스를 그녀의 엉덩이골 사이로 쑤욱 밀어 넣었다.
“하읏… 아파. 조금만 천천히….”
아직 삽입을 한 게 아닌데도 여린 살 주변이 따끔따끔 쓰렸다. 어젯밤의 격한 섹스 때문이었는지 채원의 다리 사이는 여전히 민감한 상태였다. 물론 번지는 자극 또한 어제보다 서너 배는 더 촘촘하고 예민했다.
“아픈 사람 소리가 너무 야한 거 아냐?”
“내가 언제… 읏….”
“지금 윤채원이 내는 신음, 그게 야한 소리 아님 뭔데?”
귓가를 간질이는 달달한 중저음톤 음색 때문이었는지, 목덜미에서 느껴지는 남자의 뜨거운 입김 때문이었는지, 원인은 분명치 않았으나, 채원의 음부는 금세 축축이 젖어 들었다.
별다른 스킨십이 없었음에도 이렇듯 솔직히 반응하는 제 몸이 부끄러웠다. 아무리 고개를 젓고 몸을 버둥대봤자 이제 강승재는 채원의 도리질을 더 이상 믿어주지 않을 것이다.
왈칵 흐르는 액으로 진득이 뭉친 음모 주변. 야릇하게 목을 긁는 탄성. 이미 그녀의 본심은 충분히 전달된 후였으니.
“젖꼭지 부풀었다.”
“일일이 설명 좀… 흐으, 그만… 읏, 그만하라니까….”
“어떤 식으로 괴롭히든 내 맘이지.”
피식 입꼬리를 올린 승재가 채원의 유두를 빙글빙글 돌리며 못살게 굴었다. 손가락 사이로 꾹 잡아채기도 하고 손톱 끝을 세워 꼭지의 정점을 살살 긁기도 하며, 점점 더 격해져 가는 채원의 반응을 참을성 있게 감상하는 이 남자.
모델이 지쳐 떨어질 때까지 몇 시간이든 촬영을 강행하는 그의 집요함이 예외 없이 발휘되는 순간, 참다못한 그녀가 먼저 신호를 보내왔다.
“이제 안 아프니까, 얼른….”
지금 상황에서는 긴 유희가 달갑지 않았다. 솔직히 유두를 짓이기는 자극만으로도 오르가슴이 금세 휩쓸 것 같아 호흡을 가다듬던 차였다. 채원은 허리 각도를 틀어 엉덩이를 그에게 바싹 밀착시켰다. 힘을 빼고 다리를 좀 더 벌리자 갈라진 틈새가 두꺼운 선단을 야금 물었다.
“왜 이렇게 급하실까.”
“하아,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뭘 모른 척 물어? 윤채원이 음란한 탓이지.”
페니스 기둥 끝을 손으로 부여잡은 승재는 채원의 엉덩이를 활짝 벌린 후 뒤에서부터 서서히 허리를 앞으로 밀었다. 발갛게 달아오른 질 입구가 굵은 성기를 힘겹게 받아들였다. 쓸린 속살의 아릿함에 척추 선을 따라 소름이 번졌지만, 곧 서로의 액이 뒤섞이며 움직임이 한결 부드러워졌다.
그러고 보니 무언가 이상했다. 사실 어젯밤에도 그랬다. 확연히 적나라해진 감촉. 절정의 끝, 허벅지를 타고 흐르던 뜨듯한 액체의 느낌.
“자, 잠깐만 읏… 승, 승재 씨… 잠깐, 콘돔이 없….”
“알아.”
“아, 안다고? 난 모르는데… 승재 씨만 알면 어쩌자는….”
“내가 책임져.”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하윽.”
채원의 몸을 옆으로 돌린 승재가 그녀의 매끈한 다리 하나를 손으로 받쳐 든 후 더욱 깊게 파고들었다. 갑작스러운 허릿짓에 종알거리던 음성이 탁한 숨으로 바뀌고 말았다.
자궁벽을 쿵 찍은 성기가 반쯤 빠져나가다 다시 박히기를 반복했다. 느릿하던 피스톤질이 조급한 호흡과 맞물려 빨라질수록, 열을 품은 채원의 내벽과 클리토리스가 각기 다른 자극을 받아 전율했다.
“나 엄청… 읏, 화났어….”
“내 것도 못지않게 화났는데, 천생연분이네.”
“그런 뜻, 윽, 그런 뜻이 아닌, 하읏, 아니라….”
성낼 틈도 없이 그의 페니스가 푹푹 밀려들었다. 상의 없이 피임을 하지 않은 그의 행동만 보면 분명 화를 내야 맞는 건데 자꾸만 어지러운 기분과 함께 신음이 터지니. 치사한 강승재. 섹스를 무기로 삼는 남자가 다름 아닌 여기에 있었다.
“나쁜 놈….”
“더 해 봐.”
“뭐?”
“윤채원 입에서 욕 듣는 것도, 하아, 꽤 괜찮겠다 싶어서.”
“강승… 읏.”
찌푸려진 미간이 희열에 휩싸여 묘하게 일그러졌다. 두 가슴을 움켜쥐고 허리를 강하게 튕겨내니 간질간질 달아오르던 채원의 내부가 단번에 바짝 조여든다. 비좁은 질 안은 더욱 팽팽히 부풀어 승재의 성기를 빨아들이듯 물었다.
그에게 이렇다 할 욕지거리 한번 못 내뱉은 채 엉덩이를 이리저리 비틀고 있는 채원은, 뜻대로 되지 않는 제 속의 본능에 더 화가 났다.
여인의 몸이 파르르 떨리자마자 절제된 탄성이 짧게 터졌다. 고스란히 느껴지는 묵직한 남자의 무게. 송골송골 이마에 땀을 매단 승재가 채원의 위로 풀썩 쓰러졌다.
“하아… 뜨거운 아침이었다.”
장난스럽게 키득거리는 낮은 웃음소리에도 어쩐지 상대의 반응은 조용했다. 채원의 목선에 가벼운 입맞춤을 남긴 승재는 그녀를 품에 안고선 넌지시 말을 건넸다.
“윤채원, 진짜 화난 거야?”
“응.”
“왜….”
“그걸 지금 몰라서 물어? 어떻게 피임을 자기 멋대로….”
“우리 나이쯤 되면 안 해도 돼. 안 그래도 저출산 문제가 전 세계적으로 심각한데.”
“농담하지 말고!”
“미안해.”
적당한 농담으로는 아무래도 그녀의 기분이 풀릴 것 같지 않았다. 채원의 허리를 자신의 곁으로 조금 더 잡아당긴 승재는 얼마간 숨을 고른 후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너 또 도망갈까 봐 무서워서.”
“…….”
“그래서… 치사한 짓 했어 내가.”
목소리는 왜 떠는데 정말.
진심이 담긴 남자의 목소리를 차마 내칠 수 없어, 채원은 속수무책으로 그의 온기를 품어야 했다. 벌컥 화를 내긴 냈지만 그러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가슴이 찌르르 울리니,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는 이 복합적인 감정을 어떻게 컨트롤해야 할지 막막할 뿐.
지척에서 느껴지는 강승재의 숨결. 스킨과 땀이 뒤엉킨 그 풋풋한 살 냄새에 자꾸만 마음이 약해진다.
“도망가 봤자 청주잖아. 또 데려오면 되지, 뭐가 무섭다고.”
채원이 시답지 않게 한마디를 던지고선 사르륵 눈꺼풀을 내렸다. 밀려드는 허기를 이겨낼 수 있을 만큼 그의 체향은 사람을 참 기분 좋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참 분하게도 말이다.
* * *
POA 본사.
보름의 휴가를 4일 남겨둔 시점, 더 이상 이불 속에서 끙끙거릴 이유가 사라진 채원은 아침 일찍 출근 카드를 찍었다.
“윤 대리, 이거 마셔.”
“아, 감사합니다.”
“이제 몸은 좀 괜찮은 거야? 휴가 마저 채우고 나오지 왜 이렇게 일찍 나왔어?”
오랜만에 보는 직원의 얼굴에 반가움이 가득한 박 팀장은 1층 카페에서 손수 커피까지 사다 주며 채원을 반겼다.
“보름 다 쓰고 나오면 제 자리 빠져 있을까 봐 얼른 나왔죠. 걱정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팀장님.”
“아냐, 아냐. 병날 만했지. 사실 윤 대리 애써준 덕에 전시회 끝난 뒤로 후원금도 어마어마하게 늘었거든. 우리 오늘 간만에 팀점 하기로 했으니까 메뉴 뭐할지 미리 생각해 두라고. 다들 윤 대리 오기만 목 빠지게 기다렸을 거야 아마. 윤 대리 복귀하면 뒤풀이하자고 해서 여태 미뤄둔 거라.”
팀장의 반김은 생각보다 더 호의적이었다. 오래 쉬다 와서 얼굴이 좋아졌다는 둥, 상사의 농담 섞인 빈정거림이라도 들을 줄 알았던 채원은 고개 숙여 인사를 하면서도 어쩐지 얼떨떨했다.
‘전시회 효과가 그렇게 대단했나.’
회사 최대 정보통인 최 대리는 안타깝게도 아직 출근 전이었다. 자세한 뒷얘기는 그녀를 통해 들어야겠다고 여기던 차.
“아, 참, 윤 대리.”
몇 걸음 돌아가던 박 팀장이 다시금 방향을 튼다. 중요한 이야기를 잊었다는 표정으로.
“네, 팀장님.”
“그 SJ미술관 말야. 내가 따로 그쪽 관장한테 전화를 하는 게 맞는 건지, 아님 서일그룹 쪽에 고맙단 말을 전해야 할지 감이 안 잡히네. 윤 대리 생각에는 뭐가 더 나을 것 같나?”
“네?”
“직접 가자니 바쁜 분들 괜히 시간 뺏는 것 같아서.”
“그게 무슨… 전시회 마지막 날 서로 인사하지 않으셨어요? 그 정도면 충분할 것 같은데요. 최 대리가 미술관에 머그컵이랑 저희 회사 달력이랑 이것저것 기념품도 보냈다고….”
채원의 천진한 답변에 절레절레 고개를 젓는 팀장. 전시회 끝난 지가 언젠데 왜 굳이 또 감사를 표한다는 것인지, 채원 역시 상사의 질문이 이해 가지 않는 눈치였다.
“한두 푼도 아니고 자그마치 5억 5천이라고. 정윤호 회장 개인 기부금 말야. 서일그룹 행사에서 모인 액수만 해도 어마어마한데… 이렇게 또 신세를 지니 참….”
커피를 홀짝거리던 채원이 일순간 굳은 눈동자로 팀장을 바라보았다.
“방금 뭐라고… 5억 5천을… 정윤호 회장이 기부했단 말씀이세요?”
“아직 소식 못 들었구만. 글쎄 그렇다니까. 강아지 두 마리 키운단 말은 들었는데 동물 사랑이 지극한 건지, 아님 강 감독 사진에 반했는지… 아, 이럴 게 아니라 강승재 대표한테도 전화를 해야겠어. 따지고 보면 스튜디오K가 크게 한몫을 해줘서….”
“제가….”
뜨거운 머그를 겨우 책상 위에 올려놓고 애써 호흡을 고른 채원은 팀장을 향해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제가 오후에 직접 가서 인사 전할게요. 미술관 관장님, 강승재 감독 모두.”
“그래? 허허, 그래 주면 나야 고맙지. 사실 윤 대리가 해주면 어떨까 생각 안 해본 건 아닌데, 복귀하자마자 귀찮은 일 시키는 것 같아 미안해서… 사실 친분 있는 사람이 얼굴 내비치는 게 가장 편하긴 하잖아. 서로 어색하지도 않고….”
팀장의 호쾌한 목소리가 아득히 멀어져갔다.
화장실 핑계를 대고 자리를 비운 채원은 휴대폰을 꺼내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얼마 전 강승재를 만나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우리의 가족사를 대체 어디까지 털어놓은 건지. 겁이 난 탓에 차마 자세히 캐묻지 못했던 그날의 만남.
이제 미뤄두었던 진실을 마주할 시간이었다.
* * *
「너 못지않게 입 무거운 사람 거기 또 하나 있었구나. 닮아도 어쩜 그런 건 닮아 둘이. 나중에 너희 싸우면 서로 말 안 하고 몇 달씩 갈까 봐 겁난다 얘.」
정윤호가 보내온 거액의 기부금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엄마의 연한 웃음소리가 휴대폰 너머로 들려왔다.
“무슨 말이야 그게. 알아듣기 쉽게 설명을 좀… 얼마 전에 승재 씨 만났다며. 설마, 전부 다 털어놓은 건 아니죠?”
「외삼촌에, 할머니에, 김 비서까지 알고 있는데, 정창길 이름 석 자 그게 무슨 비밀이라고, 이제껏 꼭꼭 숨겼나 싶더라. 김 비서 그놈이랑 너랑 이상한 관계로 오해받느니 차라리 속 시원히 터놓자 싶어서….」
“아무리 그래도 말할 게 따로 있지. 엄만 그날 승재 씨 처음 봤을 거 아녜요. 대체 그 남자 뭘 믿고….”
「카페 장사 십 년이면 사람 보는 눈 얼추 생기는 거야. 결국은 우리 모녀가 몇십 년 동안 끙끙대던 일 강승재 군이 해결해 줬잖니. 물론 그것도 다 빚이지만, 김 비서 눈치 보고 사는 것보단 백배 천배 낫지. 안 그래?」
누가 누구의 일을 해결해줬다는 건가 대체.
휴대 전화를 쥐고 있던 채원의 손바닥에 식은땀이 배어났다. 엄마의 설명을 전해 들은 후였지만 머릿속은 점점 백지가 되어갈 뿐.
「승재 군에게 꼭 전해줘. 오래 걸려서라도 신세는 꼭 갚겠다고.」
“갚겠다니… 나 지금 상황 정리가 좀 안 돼서 그러는데, 그니까 승재 씨가 5억 5천을 정윤호 측에 전했단 뜻이에요?”
「그건 나도 자세히 모르겠다. 잘 해결됐으니 걱정하지 마시라, 그렇게만 연락 왔어. 괜히 걱정할까 봐 그랬는지… 젊은 친구가 속도 참 깊지. 너 남자 하나는 잘 골랐더라. 엄마 닮아서 보는 눈이….」
“아, 암튼 일단 끊어요. 나중에 다시 전화할게.”
제 할 말만 툭 하고 끊어버리기 일쑤라며 구시렁거리는 수경. 하지만 지금은 엄마의 태평한 넋두리를 듣고 있을 만한 여유가 없었다.
자신이 청주에 틀어박혀 눈물을 짜내고 있을 동안 강승재와 정윤호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이 얼떨떨한 사건을 모른 척 덮기에는 얽힌 금액이 너무도 컸다.
채원의 심장이 무섭게 뛰어오르기 시작했다.
* * *
「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이오니, 확인 후 다시 걸어주시기 바랍니다.」
믿기지 않는 일은 계속되었다.
“뭐야 대체.”
주소록에 입력된 김 비서의 번호를 연거푸 누르던 채원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걸음을 재촉했다.
하루아침에 사라져버린 김 비서. POA 측에 보낸 정윤호의 기부금 5억 5천만 원.
오래 묵은 체증이 쑥 내려간 것처럼 마음이 홀가분해야 마땅하겠으나 어쩐지 불안함이 더 커져만 간다.
채원은 정윤호나 정윤진에 대한 막연한 편견이 있었다. 서일가 중심을 지탱하는 사람들이었기에, 그녀가 부정적인 감정을 품는 건 어찌 보면 당연했다.
어깨에 멘 숄더백 손잡이를 단단히 움켜쥔 채원은 SJ미술관 입구를 빠르게 지나쳤다. POA 대표의 감사장과 선물. 관장을 만날 구실을 넉넉히 챙겨 들고서.
“어서 와요, 윤 대리. 이렇게 다시 보니 반갑네.”
전시회 준비를 하며 제법 친분이 쌓여서인지, 관장은 처음과 달리 친절한 어투로 채원을 반겼다.
“바쁘실 텐데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희 직원 대표로 감사 인사드리러 왔습니다. 정 회장님 기부금 때문에 사실 너무 놀라서….”
서일그룹 어느 부서로 가야 할지 몰라 그나마 익숙한 이곳을 찾아왔다 양해를 구하자, 관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지었다.
“일단 차 한잔해요. 커피 괜찮죠?”
직원에게 따뜻한 커피를 부탁한 관장은 테이블 위에 놓인 몇 개의 팸플릿을 다짜고짜 채원에게 건넸다.
“이번에 서일에서 미혼모들과 한부모 가정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사회 공헌 프로젝트를 새로 시작했거든. 그중 경력 단절된 미혼모들의 경제 활동을 돕는 프로그램을 우리 미술관 측에서 맡기로 했어요.”
“아, 네. 그렇군요.”
“가장 인기가 좋은 게 바로 여기 팸플릿에 적힌 전문 큐레이터 양성 과정인데, 수료증 발급과 동시에 취업까지 도와주는, 아주 유익한 수업이에요. 주변에 누구 할 사람 있음 소개시켜 줘. 인원 제한이 있긴 하지만 윤 대리 지인이라면 특별히 한두 명쯤은 끼워줄 수 있으니까.”
관장의 뜬금없는 홍보 멘트를 잠자코 듣던 채원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 그런데… 말씀하신 프로젝트와 정 회장님 기부금이 무슨 관계인지 제가 잘….”
“아 그렇지 참, 이야기가 잠시 다른 데로 새버렸네. 내가 요즘 이래요. 정신을 똑바로 안 차리면 바로 주제가 빗나가. 확실히 나이 들었나 봐, 호호.”
한바탕 웃음을 흘린 관장은 하고자 했던 말을 뒤늦게 이어갔다.
“강승재 감독이 우리 쪽에 후원금을 먼저 보내 주셨더라고. 정확히 5억 5천.”
“네? 강 감독님이… 후원금을요?”
채원의 눈이 몇 배 가까이 커졌다. 믿기지 않아 몇 번이고 되물었지만, 들려오는 대답은 동일했다.
“그렇대두 뭘 자꾸 물어. 암튼 신세 지곤 못 사는 성격인지, 그 금액 그대로 정 회장님이 POA 측에 기부를 하셨더라고. 서로 참 마음도 좋지. 전시회 때 우리 강 감독을 내가 정 회장님께 소개시켜 드렸거든. 그게 그렇게 뿌듯하더라니까.”
손이 떨려 커피잔을 들기도 벅찼다.
내가 뭐라고 너는….
그렇게 큰돈을 아무 고민 없이 선뜻.
강승재의 무모함에 코끝이 시려 온다.
“요즘 우리 미술관 직원들, 만나기만 하면 죄다 후원금 얘기뿐이잖아. 이런 미담 흔치 않은데, 그래서인지 간만에 일할 맛도 나고. 윤 대리가 왜 NGO에서 버티고 있나 했더니, 이런 보람 때문인 거죠? 고맙단 인사는 내가 해야겠어. 이번 전시회 치른 덕에 좋은 거 많이 배워 가요.”
애써 눈물을 참는 채원의 속을 알 리 없는 관장은 테이블 위 커피가 미지근히 식을 때까지 수다를 멈추지 않았다.
적당한 미소. 간격을 둔 끄덕거림. 채원은 관장의 말을 건성으로 흘려듣고 있었다.
마음이 더욱 조급해졌다. 일분일초라도 빨리 강승재를 만나야 한다는. 머릿속엔 온통 그 생각뿐이었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