놓치기 전에-1화
본문
00. 서열 정리
강은호, 김서희 13세
아이들이 거의 다 빠져나간 한적한 교실.
책가방과 실내화 가방을 챙겨 일어서는 은호에게 교실에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남자애들 무리가 우르르 다가왔다.
“은호! 우리 운동장에서 옆 반 김준우네랑 축구 한판 하기로 했는데 같이 가자.”
축구?
은호의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5학년 때 이곳으로 전학 온 은호는 전에 있던 학교에서 축구부 주전으로 활약했었다. 당연히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이내 아쉽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안 돼. 나 오늘 못 해.”
“이거 지는 팀이 떡볶이 사기로 내기했단 말이야. 김준우 반에 공찬이라고 졸라 잘하는 놈 있어서 우리가 좀 밀려. 은호 너 축구부였다며. 실력 좀 발휘해 줘.”
이름도 무려 ‘공 찬’이라니. 얼굴도 보지 않았지만 매우 잘할 것 같은 느낌이 확 온다.
“맞아, 은호가 있으면 공찬 정도는 우리 팀이 가볍게 바를걸?”
순간 은호의 몸 안에 내재되어 있던 강한 승부욕이 꿈틀거렸다. 전학 오고 나서 최근 1년 동안 그 좋아하는 축구를 실제로 못 하고 고작 온라인 축구 게임으로 참아야 했기에 더욱더 강렬한 유혹으로 다가왔다.
그런 은호의 시야에 한 책상이 눈에 들어왔다. 교탁과 가장 가까운 앞줄의 복도 쪽 끄트머리 자리. 빈 의자를 단정히 넣은 그 책상 위에는 주인 없이 짙은 녹색 가방만이 반듯하게 올려져 있었다.
“……안 된다니까.”
은호가 옅은 한숨을 쉬며 축 처진 목소리로 거절했다.
“왜 안 되는데?”
“김서희 집에 데려다줘야 돼.”
그 말에 무리 중 오른쪽 끝에 있던 한 녀석이 개구쟁이 같은 미소를 빛냈다.
“나 전부터 궁금했는데, 은호 너 김서희랑 사귀어?”
“뭐?”
은호가 미간을 사납게 구겼다. 드센 반응에 녀석은 움찔하면서도 입을 계속 놀렸다.
“왜 맨날 같이 집에 가? 그리고 김서희는 너랑만 말하던데. 걔 다른 애들 앞에선 진짜 조용하고 말 없잖아.”
“하긴, 벌써 2학기인데 난 걔 목소리도 모른다니까.”
“김서희랑 있으면 답답해서 어떡하냐? 아무 말도 안 해서 더럽게 재미없을 듯.”
이제 다른 녀석들까지 이 화제에 흥미를 보이기 시작한다. 은호는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헛웃음을 흘렸다.
“같이 집에 가면 다 사귀는 거냐? 나도 걔랑 같이 가기 귀찮고 싫은데 엄마가 시켜서 억지로 하는 거거든? 우리 엄마 아빠가 김서희 할아버지한테 잘 보여야 할 일이 있는지, 걔 친구 없으니까 나더러 챙기고 놀아 주라고 해서 그런 거라고. 안 그래도 짜증 나는데 너네 이상한 소문 내면 죽는다, 진짜.”
발끈한 마음에 평소와 달리 여유라곤 없는 목소리가 튀어나오는 것을 은호 스스로도 자각하고 있었다.
여자애와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둥 엮여서 친구들에게 놀림받는 건 절대 참을 수 없었다. 놀리는 건 몰라도 놀림을 받는 건 은호와 전혀 맞지 않았다. 자신은 그렇게 만만한 존재가 아니다.
이 녀석들은 특히 더 짓궂은 놈들이었다. 여기서 확실히 부정하지 않는다면 강은호와 김서희가 야릇한 사이라며 반 애들은 물론, 수업 시간에 들어오는 선생님들에게까지 얼레리꼴레리 소문을 내고 다닐 게 분명했다. 그런 건 질색이었다.
은호는 여전히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심하는 친구들을 향해 더욱 단호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나 김서희 데려다주고 놀아 줄 때마다 엄마한테 용돈 십만 원씩 받아. 이 정도로 수지맞는 장사인데, 내가 그깟 축구 때문에 십만 원을 포기해야겠냐?”
“시, 십만 원? 그럼 5일 만에 오십만 원……, 한 달이면 이백만 원이네?”
“헐, 죽인다. 은호네 부자여서 그런지 진짜 장난 아니네. 완전 꿀이다.”
“와아, 강은호 열라 부럽다.”
은호는 어깨를 으쓱하며 거들먹거렸다.
“요즘 대학 졸업한 성인들도 월급으로 이백 벌기 어려운 거 알지? 난 김서희랑 대충 놀아 주면 그 돈 바로 꿀꺽이야. 나도 솔직히 축구 하고 싶은데,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먼저 아니겠어? 너넨 나 같은 상황에서 축구 할래, 귀찮고 지루한 거 꾹 참고 김서희랑 있을래?”
그제야 녀석들이 납득한 표정으로 부러움 가득한 감탄을 보냈다.
속으로 안도한 은호는 무심코 열려 있는 앞문 쪽으로 시선을 뻗었다가 얼굴이 하얗게 굳어졌다.
“……김서희.”
은호의 무의식적인 중얼거림에 일제히 고개를 돌린 다른 녀석들도 교실 앞문에 덩그러니 서 있는 서희를 발견했다. 얼어붙은 은호를 가만히 응시하던 서희가 문에서 가까운 자신의 책상으로 조용히 걸어갔다.
눈을 내리깐 채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가방을 챙기는 서희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건지, 거칠 것 없던 짓궂은 녀석들조차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은호에게 어색하게 인사했다.
“우, 우린 이제 가야겠다.”
“그, 그래. 다음에 시간 나면 축구 한판 하자, 은호야.”
“늦었다. 얼른 준우네 가야지!”
약빠른 놈들이 정신 사납게 교실을 빠져나갔다.
이제 남은 건 은호와 서희뿐이었다. 은호는 붉은빛이 도는 아랫입술을 신경질적으로 물어뜯으며 잠잠한 서희의 등을 살폈다.
‘저 분위기로 봐선…… 다 들었겠지?’
에이 씨, 운도 지지리도 없지.
아니다. 운을 탓하기엔 자신이 너무 경솔하게 굴었다. 하교하기 전, 가방을 두고 화장실에 간 서희가 금세 교실로 돌아오리란 것을 잠시 간과하고 있었다. 같잖은 조무래기들한테 서희와 사귄다는 놀림을 들을까 봐 너무 경계하고 흥분한 탓이었다.
“큼, 흠.”
은호는 어색한 헛기침을 연발하며 서희의 책상 쪽으로 다가갔다.
“가, 가자.”
살짝 더듬긴 했지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최대한 평소처럼 말을 건넨 후 먼저 교실 밖으로 나왔다. 서희가 느릿느릿 뒤따라오는 소리가 들리자 은호는 겨우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래, 뭐. 솔직히 틀린 말도 아니잖아.’
무거웠던 마음이 슬슬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지루하고 귀찮고 짜증 난다고, 조금 지나치게 말한 감은 없지 않아 있지만 어쨌든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서희를 자신이 챙기고 놀아 주는 건 사실 아닌가.
“서희야, 오늘 떡볶이 먹고 갈까?”
학교 정문을 나서며 은호가 다정하게 물었다. 나름대로 화해의 손길을 내민 거였다. 뭐, 정확히는 싸운 것도 아니지만.
도도하고 새침한 외모의 서희는 사실 투정을 부리거나 화를 내는 법을 전혀 모르는 순둥이 중의 순둥이였다. 모든 일에 늘 인자하게 허허 웃는 외할아버지의 유한 성격을 쏙 빼닮았다.
그런 서희와 싸울 수 있는 녀석이 만일 세상에 존재한다면, 그 녀석은 아주 악랄하고 비열한 인간임이 틀림없다.
서희가 가장 좋아하는 떡볶이를 먹으러 가자고 했으니 당연히 고개를 끄덕일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걸음을 살짝 늦춰 옆에 나란히 서자, 서희는 아까처럼 또다시 눈을 내리깔며 고개를 휘휘 저었다.
“……안 먹어? 진짜로?”
조금 충격을 받은 은호가 재차 물었다. 서희는 대답 대신 집이 있는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은호가 제자리에 멍하니 서 있는 것을 알 텐데도 서희는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걸음이 느린 서희가 은호보다 앞서가는 건 함께 하교를 하면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김서희, 설마 너 화났…….”
다급히 서희를 따라잡은 은호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망울을 마주하고는 멈칫 굳었다. 커다란 눈물방울이 볼을 스치지도 않고 그대로 툭, 바닥으로 서럽게 떨어진다. 서희는 은호를 외면하듯 몸을 살짝 돌렸다.
“……이제 됐어.”
“뭐?”
“앞으로는…… 나 안 데려다줘도 돼. 귀찮은데 놀아 줄 필요도 없어.”
은호의 눈빛이 파르르 흔들렸다. 뭐, 뭐야. 갑자기.
말문이 막히는 경험은 잘 없었는데 지금은 왠지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서희는 다시 은호를 놔두고 쭉쭉 걸어가기 시작했다. 은호 따위 이제 정말 필요 없다는 듯.
꼭 버림받은 기분이다.
‘내가 김서희를 버리는 것도 아니고, 김서희가 나를 버려?’
서희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은호가 멈췄던 다리를 황급히 움직였다.
“야, 김서희!”
괜한 오기가 차오른다.
“나는 뭐 너랑 가고 싶어서 가는 줄 알아? 너도 아까 들었잖아, 용돈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하는 거라고!”
지금 벌어진 상황이 전부 자신의 잘못 때문이라는 걸 알면서도 말이 곱게 나오지 않았다.
이 내가 같이 있어 주는 걸 고마워하지는 못할망정 고작 그깟 일로 이제 데려다주지 말라는 소리나 하다니.
떡볶이 먹으러 가자는 말로 어느 정도 미안한 마음을 전했는데도 받아 주지 않고 툭 튕겨 낸 서희가 괘씸했다. 태어나서 지금껏 잘못했다, 미안하다, 라는 말을 내뱉어 본 적 없는 자신에겐 이게 최선인데.
화가 났으면 화가 났다, 은호 네가 그런 식으로 말을 해서 기분이 상했다, 따지면 되지 대뜸 앞으로는 데려다주지 말라고 한 게 곱씹을수록 신경질이 났다.
자신은 서희의 하나뿐인 친구였다. 그렇게 중요하고 소중한 존재인 저를 쉽게 내버리려는 서희에게 따끔한 맛을 보여 줘야 했다.
“나도 매일 너 데려다주는 거 완전 귀찮아 죽겠거든?”
“앞으로 아주머니한테는 나 데려다줬다고 해. 나한테도 물어보시면 말 맞춰서 네가 데려다줬다고 할 테니까.”
방금까지 울었다고 믿기 어려울 만큼 냉정하고 이성적인 목소리에 은호는 움찔 놀라면서도 눈썹을 확 구겼다. 얘가 어떻게 감당하려고 자꾸 나보다 더 세게 나오는 건지.
“추잡하게 거짓말 같은 건 하기 싫어.”
“간단한 거짓말이야. 그거면 친구들하고 마음껏 놀 수 있어. 내일부터 애들이랑 축구도 실컷 해. 돈도 받고 축구도 하고. 그게 훨씬…… 수지맞는 장사야.”
잠시 토라져서 홧김에 던진 말이 아닌 건 확실했다. 내일부터는 은호와 절대 함께 가지 않겠다고 결심한 듯 빈틈없는 말투였다. 조용조용하면서도 맑은 서희의 음성이 이렇게 차갑게 들릴 수도 있다는 걸 은호는 오늘 처음 깨달았다.
어느새 녹이 슨 초록색 대문이 가까워졌다. 서희의 집이 눈앞에 보이자 마음이 초조해졌다.
“김서희, 너 정말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초등학생치고 상당히 진지하고 서늘한 목소리였다. 그렇다는 대답이 들리는 순간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겠다고 경고하듯이.
이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서희가 제발 눈치채고 이쯤에서 좀 기세를 꺾었으면 했다. 자신이 자존심을 굽히는 것은 불가능하니까.
평등하다는 친구들 사이에서도 서열은 분명히 존재한다.
은호는 유치원 시절부터 지금까지 늘 아이들 사이에서 대장 같은 존재였다. 단순히 대장이라고 표현하니 유치하게 들리지만 사실이었다. 대놓고 나서서 괴팍한 우두머리 흉내를 내지 않아도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모든 아이들이 은호의 기분을 살피며 잘 보이기 위해 사근사근히 굴곤 했다.
아이들도 세속적인 어른들과 다를 바 없었다. 얼굴이 빼어나게 잘생기거나, 특출나게 공부를 잘하거나, 집이 부자거나, 운동을 잘하고 힘이 세거나, 성격이 호락호락하지 않으면, 그 애의 서열은 가만히 있어도 올라간다.
저 다섯 가지 중 두 가지 정도만 갖춰도 그럴진대, 은호는 다섯 가지를 전부 충족한 아이였다. 목소리를 높이거나 힘을 쓰지 않고도 반에서 군림하게 되는 건 당연했다.
반면 서희는 솔직히 학교의 서열로 따지자면 최하위였다. 제법 예쁜 외모를 가지긴 했지만 지나치게 숫기가 없었다. 그렇게 조용하고 얌전한 성격은 활발하고 나대는 녀석들의 먹잇감이 되기 십상이다. 만만하니까. 실제로 서희는 5학년 때 왕따를 당하기도 했다.
그런 강은호와 그런 김서희다.
둘은 애초에 서로 비등하게 싸울 만한 위치가 아니었다.
지금까지 은호는 서희가 자신보다 한참 아래라고 굳이 의식한 적은 없었다. 서희가 워낙 순하고 착해서 부딪칠 일이 없었으니 둘 사이는 늘 평화로웠다.
그런데 항상 고분고분하던 서희가 이렇게 반란을 일으키자 신경이 예민하게 곤두섰다.
은호는 자신이 서희와 있을 때 친구 간의 서열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처럼 서희 역시 그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인기 많은 자신이 마땅한 친구도 없는 서희와 친히 ‘놀아 주고’ 있다는 명백한 사실을 상기시킬 필요성을 느꼈다.
“김서희. 너 이런 식으로 나오면 나 다시는 너랑 말도 안 섞을 건데. 나 뱉은 말 꼭 지키는 거, 너도 알지?”
대문 앞에 선 서희의 등에 대고 은호가 차갑게 말했다.
자신이 서희를 놓아 버리면 이제 서희는 학교에서 친구 한 명 없는 외톨이 신세가 된다. 그걸 빤히 알면서 협박하듯 말하는 게 스스로도 조금 비겁하게 느껴졌지만 신경 쓸 바 아니다. 자신이 서희에게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 일깨우는 게 급선무였다.
“……잘 가, 은호야. 내일은 친구들이랑 꼭 축구 해.”
서희는 그 말을 끝으로 망설임 없이 대문을 닫고 들어가 버렸다. 은호의 동공이 붙잡힌 것처럼 멈췄다.
멍해진 표정으로 낡은 대문을 응시하던 은호의 얼굴이 곧 일그러졌다. 달리기를 한 것도 아닌데 숨을 거칠게 씨근덕거리기 시작했다.
“네가 하라면 내가 못 할 줄 알아? 그래, 좋아! 내일 축구 실컷 해야지!”
은호는 마당을 가로지르고 있을 서희를 향해 크게 떠들어 댔다.
“안 그래도 엄청 귀찮았는데 이제 김서희 안 데려다줘도 되네? 거기다가 축구도 하고 돈도 계속 받을 수 있잖아. 와, 신난다!”
유치함이 철철 흐를 만큼 되는대로 지껄이고 있는데, 담벼락 안쪽에서 집 현관문이 여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온몸에 힘이 탁 풀리는 기분에 은호는 괜스레 더 어깨를 굳히고 눈에 힘을 주었다.
“그래, 한번 해 보자 이거지? 난 상관없어. 김서희 너만 손해지. 난 너 없어도 친구 많으니까.”
으름장을 놓듯 중얼대면서도 은호는 서희가 잘못했다며 사과하러 나올지도 모른다는 착각에 허우적거리느라 한참 동안 대문 앞을 떠나지 못했다.
* * *
은호는 눈알이 시큰거릴 만큼 어느 한 곳을 맹렬하게 노려보고 있었다. 서희가 앉은 자리였다. 어제 그렇게 싸운 이후로 오늘 서희는 은호와 눈 한 번 제대로 마주치지 않았다.
사실 평소에도 교실 안에서 은호와 서희가 친근하게 대화를 나누는 경우는 거의 없긴 했다.
은호는 늘 다른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있었고, 어제처럼 사귄다는 오해를 받는 게 싫어서 교실에서는 특히 자제했다. 무엇보다 은호와 둘이 있을 때는 곧잘 말을 하던 서희가 주변에 애들이 가까이 온다 싶으면 바로 입을 다물어 버리기 일쑤였다.
그러나 교실에서 친한 친구처럼 말을 나누지 않는다고 해도 그동안은 눈빛만으로 충분했다.
서희는 혼자 가만히 있다가도 은호와 얼핏 시선이 마주치면, 치켜 올라간 눈꼬리가 부드럽게 휘어지고, 은은한 미소가 입가에 퍼졌다. 같은 반에 은호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든든한 듯한 얼굴.
그 표정을 볼 때마다 은호는 자신이 서희에게 아주 중요한 존재라는 사실을 강하게 느끼며 우쭐하곤 했다. 그랬는데.
‘뭐야, 김서희…….’
학교 수업이 다 끝나고 담임 선생님이 종례를 마칠 때까지도 서희는 잘못했다는 사과는커녕 우연히라도 눈이 마주치면 못 볼 걸 본 사람처럼 시선을 휙 피하기까지 했다. 선생님이 앞문을 열고 나가자 서희는 은호가 있는 뒷자리에 눈길도 주지 않은 채 가방을 챙겼다. 오늘부터 진짜 혼자 갈 생각인 거다.
반성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서희의 맹랑한 태도에 은호는 의자에 편히 앉아 있는데도 불구하고 숨이 뜨거워졌다. 자신이 먼저 잘못을 저질렀다는 객관적 사실은 이미 머릿속에서 날아간 지 오래였다. 주제도 모르고 감히 자신을 내팽개친 서희의 행동이 괘씸할 뿐이었다.
나 아니면 이제 친구도 없으면서 뭐가 저렇게 꼿꼿하고 당당한 건지.
“야, 너네 오늘은 옆 반 애들하고 축구 안 해?”
은호는 서희의 귀에 또렷이 닿도록 커다란 목소리로 어제 축구를 같이 하자 권했던 녀석 중 한 명에게 물었다.
“오늘도 하는데 왜? 참, 은호야. 공찬 걔 진짜 잘하더라. 어제 우리가 완전 발렸어. 자존심 상해서 또 하자고 하긴 했는데, 그 자식이 너무 잘해서 오늘도 질 거 같아.”
“그래? 오늘은 나도 끼자.”
“진짜?”
제 앞으로 다가온 녀석과 대화를 하면서도 은호의 집요한 시선은 한 곳에 붙박여 있었다.
“공찬인지 뭔지 제대로 이겨 줄 테니까 걱정 마.”
서희는 잠시 그대로 앉아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자를 책상 안에 완전히 집어넣고 가방끈을 손으로 꼭 쥔 채 사뿐한 발걸음으로 교실을 떠났다.
“하.”
저게 진짜 끝까지 해 보자는 거지?
은호는 서희의 자리를 노려보았다. 열이 받아 당장 쫓아가서 따지고 싶지만 참아야 한다. 어제 다시는 말도 섞지 않겠다고 했으니 먼저 말을 걸면 강은호의 빳빳한 자존심이 와락 구겨지는 거나 다름없었다.
마음을 다스리며 참고 기다리다 보면 분명 서희가 먼저 다가오게 될 것이다. 자신은 서희가 없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서희는 유일한 친구인 자신이 없으면 아주아주 힘들고 곤란해질 테니까.
애써 찜찜함을 뒤로 밀어 버린 은호는 아이들과 운동장에 몰려 나가 정말 오랜만에 축구를 했다. 초반엔 몸이 덜 풀려 움직임이 좀 둔했지만 금세 운동장을 주름잡으며 연신 공을 시원하게 발로 때려 댔다.
이 학교에서 축구를 가장 잘한다는 공찬조차 은호의 상대가 되질 못했다. 뭐, 어느 정도 예상했던 결과였다.
그러나 혼자서 다섯 골이나 넣은 은호는 이겼다며 환호하는 같은 반 녀석들과 달리 조금도 신난 얼굴이 아니었다.
“에이 씨, 더럽게 재미없네…….”
그토록 하고 싶었던 축구를 1년 만에 하게 되었지만 하나도 재미가 없었다.
* * *
서희와 싸운 지 열흘이 지났다.
일주일 안에 항복하고 쭈뼛쭈뼛 다가올 줄 알았던 서희는 요지부동이었다. 아니, 처음부터 은호와 조금도 친하지 않았던 것처럼 이젠 시선이 잠시 마주쳐도 그 맑은 눈동자는 동요 없이 무감하기만 했다.
더 이상 든든한 구세주가 아니라, 반에 널리고 널린 평범한 애들 중 한 명을 보는 눈빛.
그게 은호를 더욱 충격에 빠지게 했고, 그만큼 또 화가 치밀었다. 열흘 동안 그런 단순한 사이클의 반복이었다.
“오늘 우리 집 갈 사람?”
청소 시간, 창가 끝에 등을 비스듬히 기댄 은호가 입꼬리를 당기며 여유롭게 물었다. 은호의 주변에 있던 아이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달려들었다.
“갈래! 너희 집 엄청 크지?”
“은호 아빠가 대따 큰 회사 사장님이라서 진짜 부자잖아. 집도 완전 성 같을걸?”
“와, 진짜 짱이다. 나도 가도 돼, 은호야?”
별로 친하지 않은 녀석이 조심스럽게 묻자 은호는 제법 상냥하게 웃어 주었다.
“당연히 되지. 오늘 시간 되는 애들은 다 와도 돼. 아, 집에 연락해서 자주 시키는 출장 뷔페 불러 달라고 해야겠다.”
“뷔, 뷔페?”
“되게 유명한 셰프가 차린 곳이라 거긴 원래 미리 꼭 예약해야 하는데. 뭐, 그래도 내가 어떻게든 당장 불러 달라고 하면 불가능하진 않을 거야. 다들 우리 집 처음 오는 건데 맛있는 거 먹고 가야지.”
스스로 느끼기에도 재수 없을 만큼 젠체하고 있었지만 은호의 신경은 앞문 쪽을 빗자루로 세심하게 쓸고 있는 서희에게 완전히 쏠린 상태였다.
거의 모든 아이들이 청소 도구도 팽개치고 은호에게 몰린 탓에 창가 쪽은 요란 법석했다. 은호의 집이 얼마나 멋지고 웅장할지 기대감이 가득한 아이들의 말소리가 워낙 커서 은호가 반 아이들을 집에 초대한 사실이 서희의 귀에도 들리지 않을 리가 없었다.
‘어때, 김서희?’
은호가 심술궂은 표정으로 유유히 미소를 그렸다.
이 학교에 오고 나서 집에 친구들을 데려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서희를 제외하고.
예전 학교를 다닐 때 친구들이 놀러 온 적은 있었지만 집안끼리도 잘 아는 몇 명이 전부였다.
누군가를 집에 데려올 때는 그 정도로 까다롭게 선별하는 은호였다. 즉, 은호의 집에 오게 해 준다는 건 친구로서 어느 정도 특별 대우를 받는 것과 같았다.
서희를 처음 집에 데려갔을 때도 그 점을 강조했다. 내가 집에 데려가 주는 게 네가 지금 얼마나 감격할 만한 상황인지 조곤조곤 일깨워 주자, 서희는 은호의 생색내는 말투가 재수 없지도 않은지 활짝 웃었다.
‘고마워, 은호야.’
그날 서희의 환한 미소와 고맙다는 말에 은호의 어깨는 더욱 하늘 높이 치솟았다. 강은호의 특별한 친구가 되었다는 사실에 서희는 얼마나 기쁘고 벅찼을까.
서희의 그런 소중한 기억을 지금 은호는 부서뜨릴 작정이었다. 반 아이들을 집에 데려가서 서희에게 너는 이제 내 특별한 친구가 아님을 간접적으로 알려 주려는 것이다. 싸운 지 열흘이나 지났는데도 서희가 굽히고 들어올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자 결심하고 띄운 승부수였다.
서희가 비질을 마치고 굽히고 있던 등을 반듯하게 폈다. 무심결에 고개를 돌린 서희와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계속 서희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은호의 눈이 마주쳤다. 은호는 얄미울 만큼 느릿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질투 나지? 내가 다른 녀석들과 더 친해질까 봐 불안하지? 그러니까 이쯤에서 적당히 하고 얼른 나한테 사과해. 난 너 없어도 친구 많다니까. 나 없으면 너만 외롭고 힘들잖아?
그런 말이 들릴 것 같은 표정으로 서희를 응시했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움찔하거나, 아니면 원망스럽게라도 쳐다볼 줄 알았던 서희는 도로 고개를 떨구며 은호를 외면했다. 은호의 눈빛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저 고집쟁이가 진짜…….
“민주야, 나도 오늘 은호네 가고 싶어.”
교탁을 정리하던 아영이 발그레 핀 얼굴로 은호가 있는 쪽을 보며 말했다. 칠판을 지우고 있던 민주는 대번에 뾰로통해졌다.
“너 오늘 끝나고 나 도서실 일 도와주기로 했잖아! 나랑 한 약속이 먼저 아니었어?”
“오늘 아니면 은호네 못 갈 거 같단 말이야. 차라리 너도 땡땡이치고 나랑 같이 은호네 집 놀러 가자. 응?”
“말이 되는 소리를 해. 넌 도서 위원 아니어서 상관없지만 난 땡땡이치면 혼난단 말이야. 너 진짜 배신할 거야?”
“미아안. 다음에는 꼭 도와줄게!”
아영은 민주가 아무리 화를 내도 오늘 무조건 은호의 집에 가겠다고 결심한 것 같았다. 눈초리가 가늘어진 친구에게 살랑살랑 애교를 부리면서도 짝사랑하는 은호의 집에 갈 수 있다는 사실에 들뜬 마음을 제대로 숨기지 못했다.
아영이 은호가 있는 창가로 가 버린 뒤에도 민주는 여전히 불만스럽게 입술을 삐죽거렸다.
“뭐야, 심아영. 나더러 혼자 그걸 어떻게 하라고.”
도서 위원인 민주는 도서실에 새로 들어온 방대한 양의 책들을 분류하고 청구 기호 라벨과 바코드를 붙이는 일을 맡았다.
혼자는 도저히 할 수 없어서 단짝인 아영에게 도와 달라고 했던 건데. 재밌겠다며 선뜻 도와주겠다고 할 땐 언제고 반에서 가장 인기 있는 남자애가 집에 오라는 한마디에 홀랑 빠져서는.
“……저기.”
속으로 투덜거리고 있는데 누군가가 조심스럽게 민주를 불렀다. 옆을 보자 빗자루를 손에 꼭 쥔 채 긴장한 얼굴로 다가온 한 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응? 왜?”
백옥같이 하얀 얼굴에 고양이 같은 눈매, 차갑게 느껴지는 눈꼬리 아래에 작게 새겨진 갈색 점, 새치름하게 다물어진 분홍빛 입술까지. 얼굴만 보면 성격이 상당히 날카롭고 예민할 것 같은 서희다.
분명 예쁘긴 하지만…… 툭 까놓고 말하자면 좀 못되게 생겼다. 드라마나 영화에 나오는 전형적인 악녀들의 아역 같은 이미지랄까.
별 뜻 없이 무표정한 얼굴로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위축시킬 정도고, 설핏 입꼬리를 올려 미소를 지어도 착한 주인공을 골탕 먹일 나쁜 계략을 꾸미는 듯한 느낌이 풀풀 풍겼다.
그래서 민주는 처음 서희를 봤을 때, 분명 일진들과 어울리며 요란하게 노는 아이일 거라고 확신했다.
노는 아이는 무슨, 얼굴만 저렇지 평범한 애들과도 잘 어울리지 못할 정도로 기가 약하고 말수가 적다는 건 단 며칠 만에 깨닫게 되었다. 지금도 갖은 용기를 쥐어짜서 간신히 말을 건네고 있다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무슨 일인데?”
민주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가만 생각해 보니 2학기가 될 때까지 서희와 제대로 대화를 나눈 적이 없었다.
“……도서실 일, 내가 도와줘도 돼?”
“뭐? 진짜?”
눈을 동그랗게 뜬 민주가 되물었다. 서희가 기어들어 가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책 분류해서 라벨 붙이는 일…… 맞지? 한번 해 보고 싶어서…….”
“너는 강은호 집 안 놀러 가? 애들 다 가는 거 같던데. 그리고 너 은호랑 친하잖아. 그렇게 이 일이 하고 싶어?”
“으응.”
“별로 재밌진 않을 텐데. 아무튼 도와주면 나야 완전 고맙지.”
서희는 말없이 눈꼬리를 접으며 웃었다. 그러자 민주의 얼굴이 멍해졌다. 어색하게 입술 끝만 올려 웃을 때도 특유의 못된 분위기가 지워지지 않았는데, 눈까지 웃음이 닿는 순간 서희의 인상이 완전히 변했다. 도도한 악녀 같은 이미지가 와장창 깨질 만큼 순하고 부드러운 얼굴이었다.
“씨……, 저게 진짜…….”
서희가 민주를 향해 웃는 모습을 본 은호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서희가 처음으로 자신에게 맞서며 싸웠을 때보다 더 열이 뻗치는 것 같았다.
저렇게 활짝 웃는 얼굴을 남한테 보이면 어쩌자는 거야? 그동안 나한테만 보여 줬잖아!
서희에게 관심이 확 쏠린 게 분명한 민주의 반응을 보자 짜증이 밀려와서 참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왠지 모를 초조함에 속이 바싹바싹 타들어 갔다.
“자, 다들 자리에 앉아라.”
때마침 교실로 들어온 담임 선생님이 교탁을 두드리며 말했다. 짧은 종례가 끝나자마자 아이들의 눈이 은호에게 쏠렸다. 순간 피곤이 확 몰려왔다. 은호는 반 애들을 전부 초대한 것을 속으로 후회했다.
“인원에 맞춰서 차 불러 달라 했으니까 일단 다들 정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어. 나도 금방 갈 테니까.”
선생님보다 은호의 말을 더 잘 따르는 듯한 녀석들이 질서정연하게 교실을 빠져나갔다. 은호는 다시 서희의 자리를 매섭게 쏘아보았다.
“서희야, 난 얼른 사서 쌤한테 다녀올 테니까 잠깐 교실에서 기다려.”
“응.”
민주가 서희에게 손을 흔들고 나가자, 교실 안에는 은호와 서희만이 남았다. 입술을 잘근거리던 은호는 결국 의자를 뒤로 밀고 비장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앞문 쪽으로 걸어갔다.
오늘 저렇게 둘이 오붓하게 있도록 놔둔다면 분명 금방 친해질 거라는 극도의 불안감이 은호의 고고한 자존심을 잠시 접게 만들었다. 김서희가 강은호를 두고 다른 애랑 더 친해진다니. 있을 수도 없는 일이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다.
은호는 서희의 책상 앞에 딱 버티고 섰다.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뜬 서희가 은호를 올려다보았다.
“야, 김서희.”
“으응?”
“너 우리 집 안 올 거야?”
신경질적인 초대에 서희는 은호를 물끄러미 보았다.
“다른 애들 많이 가서…… 난 안 가도 될 거 같은데.”
조심스럽게 내뱉은 목소리가 어쩐지 겨울바람처럼 차갑게 들렸다.
“……뭐?”
은호의 눈에 불길이 일었다.
내가 자존심까지 접고 먼저 다가가기까지 했는데!
서희가 감격하기는커녕 저런 맥없는 반응을 보이자 머리가 어질어질할 정도로 화가 나는 동시에 마음에도 없는 말이 터져 나왔다.
“나는 뭐 너 데려가고 싶어서 그러는 줄 알아? 솔직히 예전에도 너 집에 데려가기 싫었는데, 엄마가 초대해서 놀아 주라고 해서 하는 수 없이 오게 한 거였어. 오늘도 반 애들 다 데려갔는데 너만 빠진 거 알면 엄마가 넌 왜 안 왔냐고 뭐라고 할 거 같아서 그러는 거거든? 그래서 나도 너랑 말하기 싫은데 억지로 물어본 것뿐이야. 그러니까 너 착각하지 마. 알겠어?”
“응. 착각 안 할게.”
서희는 은호와 마주했던 눈길을 옆으로 휙 돌렸다. 말을 걸지 말라고 경고하는 듯한 그 쌀쌀한 외면에 은호의 심장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 * *
초등학생 남자아이가 혼자 쓰기엔 극히 넓은 방, TV와 마주 보는 가죽 소파에 은호가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똑똑. 짧은 노크와 함께 방문이 열렸다.
“강은호?”
회색빛의 고급 정장 차림을 한 은호의 엄마, 경진이 방으로 들어섰다. 대형 로펌에서 근무하느라 늘 바쁜 그녀였다. 날이 깜깜하게 깊어진 지금에서야 겨우 일을 마치고 집에 도착한 참이었다.
“아주머니한테 들었는데, 너 오늘 저녁 안 먹었다며.”
소파로 가까이 다가온 경진이 터프한 손길로 은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은호는 신경질적으로 엄마의 손을 치웠다.
“머리 건드리지 마.”
“무슨 일 있어?”
은호에게서 한 발짝 뒤로 물러서 팔짱을 낀 경진이 아들의 상태를 예리하게 관찰하는 듯한 눈길로 물었다.
“별로 관심도 없으면서 신경 쓰는 척하지 말고, 얼른 내려가서 씻고 자. 잠 부족하잖아.”
버릇없는 말투긴 해도 그 속에 엄마를 향한 걱정이 깃든 게 느껴졌는지 경진은 흐뭇한 얼굴로 어린 아들을 보았다.
“우리 막내아들 일인데 내가 왜 관심이 없어? 뭔데. 말해 봐.”
“됐어. 참, 이번 주 금요일에 시간 맞춰서 간식이나 좀 보내.”
“간식?”
경진이 뒤늦게 짧은 감탄사를 흘렸다.
“맞다. 우리 은호 이번에도 반장 됐다고 했지?”
평소 같았으면 아들이 반장 된 것도 잊고 있었다며 길길이 날뛰어야 하는데, 은호는 무서울 정도로 잠잠했다.
“은호야, 간식 뭐 보낼까?”
“……떡볶이.”
은호의 대답에 경진은 황당한 듯 웃음을 터뜨렸다.
“학교 간식으로 무슨 떡볶이를 보내?”
“서희가 떡볶이 귀신이잖아.”
“어?”
내내 넋 빠진 녀석처럼 허공을 보고 있던 은호가 경진을 쌀쌀맞게 응시했다.
“엄마는 맨날 서희 챙겨라, 서희 챙겨라, 하면서 그런 것도 몰라? 김서희가 떡볶이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놀라서 저를 빤히 보는 엄마를 무시한 채 은호는 애답지 않게 깊은 한숨을 토했다.
* * *
금요일, 반에 도착한 간식은 간단히 먹기 편하고 애들 대부분이 호불호 없이 좋아하는 샌드위치와 생과일주스였다.
담임 선생님의 지시 아래 몇 명의 아이들과 함께 간식을 교실에 전부 돌린 은호의 시선이 오늘도 그렇듯 서희에게로 향했다.
선생님이 잠시 자리를 비운 동안, 교실 안은 간식을 먹으며 주변 친구들과 자유롭게 대화를 나누는 아이들로 인해 점차 시끄러워졌다. 다들 커다란 크기의 샌드위치를 맛있게 씹어 먹고 있는데 서희만이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은호는 미간을 찌푸린 채 서희에게 다가갔다.
“야, 김서희. 너 샌드위치 어디 있어. 아까 내가 분명히 줬는데.”
“옆에 있는 애 줬어.”
“뭐?”
은호는 서희 옆에 있는 책상을 사납게 노려보았다. 화장실이라도 갔는지 텅 비어 있는 책상 위엔 샌드위치 포장지 두 개만이 펼쳐진 채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저걸 그새 다 먹은 거야?
“쟤가 너한테서 억지로 뺏은 거지? 설마 또 누가 너 괴롭혀? 괴롭히면 바로 말해. 알겠어? 이 자리면 오진묵인데…….”
“뺏은 거 아니고 내가 준 거야. 하나 다 먹고도 배고프다고 해서.”
서희가 덤덤히 답하자 은호는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미간을 좁혔다. 성인도 하나 다 먹으면 배가 든든할 만큼 두툼하고 큼직한 샌드위치였는데.
“잠깐 기다려.”
은호는 속으로 오진묵을 욕하면서 남은 샌드위치가 있는 교탁 쪽으로 걸어갔다.
샌드위치를 받자마자 게걸스럽게 다 먹어 치우고 옆에 앉은 서희에게 눈치를 또 엄청 줬겠지. 저 착한 김서희는 배고프다는 녀석을 무시할 수가 없어서 당연히 제 몫을 건넸을 거고. 그건 뺏은 거나 마찬가지다.
뭐, 사실 남의 것을 빼앗아서 두 개를 먹든 말든 알 바 아니지만 감히 김서희의 것을 넘봤다는 건 아주 큰 문제가 된다.
“자. 이거 먹어.”
남은 샌드위치를 가져온 은호가 서희에게 내밀었다.
“……난 안 먹을래.”
은호의 눈썹 끝이 비뚜름하게 세워졌다.
“왜 안 먹어? 이거 싸구려 아니야. 하루에 100개만 한정 판매 하는 가게에서 주문한 거야. 맛있다니까? 얼른 먹어.”
“됐어.”
이 정도면 받아 줄 만도 한데 서희는 끝까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왜 안 먹는데.”
은호는 원망스러운 눈초리로 서희를 보며 물었다.
자존심 따위는 이제 버린 지 오래였다. 서희가 먼저 다가와서 마음을 풀어 주는 건 더 이상 바라지도 않는다. 대신 자신이 다가가면 밀어내지 말고 전처럼 상냥하게 웃어 줬으면 했다.
그러나 눈을 책상으로 내리깔고 있는 서희는 은호의 절박한 표정을 보지 못했다.
“먹기 싫어.”
서희의 대답과 동시에 은호의 손에 힘이 풀렸다. 툭. 포장된 샌드위치가 바닥에 떨어졌다.
‘이제 내가 주는 건…… 먹기도 싫다는 거야?’
눈앞이 깜깜해지며 왈칵 두려움이 밀려왔다.
* * *
서희 엄마의 기일이 다가왔다.
은호는 일곱 살 때부터 매년 부모님과 함께 제사를 지내는 서희의 집에 찾아갔다. 아주 어릴 때는 그냥 멋모르고 엄마 아빠 손에 이끌려서 따라갔지만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고 나서부터는 이따금 의아함이 솟아났다.
왜 가족도 아닌 그들이 이날마다 서희 집에 가는 건지.
왜 부모님은 물론 어린 자신까지 검은 정장을 차려입고 서희 엄마의 죽음을 엄숙하게 기려야 하는지.
그러나 이번은 해소되지 않은 궁금증에 관심을 둘 정신이 없었다.
2주 전부터 오늘만을 손꼽아 기다렸던 은호는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뛰듯이 방으로 올라갔다. 입고 있던 옷을 빠르게 벗어 던지고 미리 준비된 정장으로 갈아입었다. 전신 거울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훑자 객관적으로 봐도 심각하게 잘생긴 소년이 거울 안에서 빙긋 웃고 있었다.
1년 내내 눈코 뜰 새 없이 바빠도 서희 엄마의 기일만큼은 최우선 순위로 두며 시간을 빼놓는 부모님이 어느새 집에 도착했다. 은호는 아래층으로 내려가 준비하는 부모님을 쫓아다니며 재촉했다.
“얼른, 얼른 가자니까?”
“아, 좀 기다려 봐.”
경진이 귀찮다는 듯 손을 휘휘 저으며 안방으로 들어갔다.
“아빠, 나 이것 좀 다시 매 줘.”
은호는 서툰 손길로 맸던 넥타이가 역시 마음에 안 든다는 듯 휙 풀어 버리고는 성한에게 내밀었다. 성한은 오늘따라 어수선하게 구는 은호를 의아하게 보면서도 까다로운 막내아들의 마음에 찰 만큼 깔끔하고 반듯하게 타이를 매 주었다.
“아빠.”
“응?”
“나 잘생겼지?”
“그럼. 누구 아들인데.”
성한이 다정하게 은호의 볼을 두드렸다. 그러나 은호는 그 대답이 썩 만족스럽지 않은지 입술을 비죽였다.
“그런 거 말고.”
“뭐?”
“그렇게, 내 아들이니 아무리 못생겼다고 해도 내 눈에는 잘생겨 보인다는 의미를 내포할 수 있는 말 말고. 진지하게 객관적으로 설명해 보라니까. 내 외모가 어떤지.”
잔망스러운 아들의 명령에 짧게 웃음을 터뜨린 성한은 이내 심사 위원처럼 깐깐한 눈빛을 만들어 내며 은호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훑었다.
“음.”
성한이 턱 끝을 손가락으로 매만지며 말했다.
“내 핏줄인 걸 다 잊고 객관적으로 따져도 너무 잘생겼는걸? TV에 나오는 멋있는 남자 주인공 아역 같은…… 아니, 그 애들보다 훨씬 더 잘났어. 전국 미소년 선발 대회 같은 게 있다면 강은호가 무조건 1등일 거야.”
과장이 심하다며 눈가를 찡그리면서도 은호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은호 너 정장 입었을 때 진짜 어른스럽고 멋졌어.’
언젠가 서희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은호는 기대감에 부풀었다. 서희가 수줍어하면서도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강조했을 정도니, 몸에 잘 맞는 정장을 착용한 제 모습은 확실히 빛이 나는 게 틀림없었다.
자신의 이 모습을 유독 좋아하는 서희이니 오늘은 그래도 화해를 할 수 있지 않을까.
은호는 이제 한계에 다다랐음을 스스로도 충분히 느끼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함께 집에 갔던 날 이후로 서희와의 사이는 계속 벌어지기만 했고, 이제 둘은 방과 후에 서로의 집을 오가며 놀 정도로 친했다는 사실이 흐릿할 만큼 소원한 사이가 되었다.
은호는 서희가 자신이 준 샌드위치를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먹기 싫다고 거부한 날부터 서희에게 한 마디도 말을 걸지 않았다. 또 괜한 자존심과 고집 때문이 아니었다. 그날을 기점으로 덜컥 겁이 났다. 서희가 온기 없는 차가운 눈동자로 이제 너와는 친구 하기 싫다고 말할까 무서웠다.
‘그래도 오늘은…….’
성한이 운전하는 차 뒷좌석에서 은호는 풍경이 빠르게 변하는 창밖을 조금 긴장한 눈빛으로 응시했다. 어느새 익숙한 초록색 대문이 보이기 시작했다.
할아버지 옆에 선 서희는 경진과 성한에게 깍듯하게 인사하면서도 은호와는 의식적으로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은호는 서러움이 가슴에 울컥 치밀었다. 태어나서 이런 감정은 처음이었다.
제사가 끝나고 어른들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 서희와 은호는 집 마당에 나와 있었다. 서희는 은호에게 등을 돌린 채 마당에서 키우고 있는 화분들에만 관심을 쏟았다. 아예 눈길도 한 번 주지 않고 저를 철저히 무시하는 서희로 인해 은호는 결국 속에 눌려 있던 무언가가 툭 끊어지는 걸 느꼈다.
“야, 김서희.”
서희가 돌아보자 은호는 맹렬한 눈길을 보내다가 입을 열었다.
“내가 그렇게 꼴 보기 싫어? 나는 뭐 여기 오고 싶어서 온 줄 알아? 너 착각하지 마.”
얼마 안 가서 후회할 게 분명한 홧김에 터뜨린 말은 은호의 마지막 발버둥이나 다름없었다.
“나도 어쩔 수 없이 억지로 끌려온 거야. 그러니까…….”
“그럼 앞으로는 여기 오지 마.”
서희가 등을 휙 돌리며 대꾸했다.
“뭐?”
“아주머니랑 아저씨한테 내가 이제 오지 말라고 해서 안 간다고 해. 나한테 물어보시면 나도 그렇게 말할 테니까.”
귀를 얻어맞은 것처럼 고막이 얼얼했다.
김서희 쟤가 지금 대체 뭐라고 한 거지. 오지 말라고? 앞으로 다신 오지 말라고?
“억지로 너 여기 오는 거, 나도 싫어.”
억지로, 라는 말은 빼고 네가 여기 오는 게 싫다는 말만 귀에 반복적으로 재생되었다. 은호의 눈동자가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처럼 파르르 흔들렸다.
부모님과 함께 서희의 집에서 나올 때까지도 은호는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상태였다. 감기 기운이 있는 할아버지는 안에 남고, 서희가 대문 밖으로 나와 세 사람을 배웅했다.
“안녕히 가세요.”
“그래, 서희도 얼른 들어가.”
경진이 서희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 주었다. 서희는 다시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했다가 은호와 눈이 마주치자 슬쩍 옆으로 시선을 피했다.
서희를 등지고 차가 있는 방향으로 걸음을 옮기며 은호는 이를 꽉 물었다. 여린 턱이 부들부들 떨렸다.
평생, 정말 평생 나랑 화해 안 하고 이렇게 완전히 끝을 낼 작정인 건가, 저 독한 것은.
안간힘을 써서 힘을 주고 있던 두 눈에 결국 뜨거운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여보, 은호 왜 이러지?”
은호를 가운데에 두고 걷던 부부의 눈길이 돌연 제자리에 멈춰 선 아들에게 쏠렸다.
“울어, 울어.”
은호의 머리 위에서 성한이 속삭이듯이 경진에게 전달했다. 아무리 목소리를 낮췄다고 해도 은호의 귀에 들어가지 않을 리 없었지만.
“어머, 정말. 왜 혼자 질질 짜고 있지?”
경진이 은호의 어깨를 살짝 쳤다.
“강은호, 너 갑자기 혼자 왜 울…….”
은호는 경진의 말을 무시한 채 다시 몸을 돌렸다.
“야, 김서희!”
막 대문을 열고 들어가려던 서희가 깜짝 놀라서 뒤돌아보았다. 눈이 빨갛게 충혈된 은호가 신경질적인 걸음으로 서희의 앞까지 성큼성큼 다가왔다.
“야!”
“……응?”
“너 애가 왜 이렇게 못됐어? 내가 말실수 좀 한 거 가지고! 어떻게 한 달 동안 말도 안 섞고 눈도 안 마주치는데!”
이미 그렇게 뱉어 놓고서는, 적반하장과 다름없는 말에 서희가 또 화를 내지 않을까 뒤늦은 걱정이 밀려왔다. 그러나 서희는 커다란 눈을 느릿하게 깜빡이더니 우물거렸다.
“나는…… 네가 나랑 있는 거 싫고 귀찮은 거 같아서. 은호 너 축구 하고 싶어 했잖아. 나 때문에 계속 못 했으니까, 그래서…….”
“귀찮긴 뭐가 귀찮아! 축구 하는 거 하나도 재미없다고! 난 너랑 노는 게 제일 재밌는데! 축구 그딴 건 그냥 진짜, 잠깐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거지!”
한 달 동안 차갑게 외면만 당하다가 예전처럼 서희가 순한 눈빛으로 저를 바라봐 주자 안심이 되어 온몸의 긴장이 확 풀리는 것 같았다.
“어떻게 이제 집에도 오지 말라고 해! 너 진짜 나랑 놀기 싫어졌어? 내가 그렇게 미워진 거냐고!”
“네가 억지로 온 줄 알고…….”
“억지로는 무슨 억지로야? 내가 오늘을 얼마나 기다렸는데! 너랑 화해하고 싶어서!”
은호는 자꾸만 눈물이 앞을 가려서 팔을 들어 눈을 거칠게 비볐다.
등 뒤에서 악마 같은 부모님이 웃음과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 성한은 연신 기침을 쏟으며 나름대로 숨기려는 노력이라도 하는데, 그 옆의 경진은 끅끅거리며 숨이 넘어갈 듯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아들이 하는 짓이 웃겨 죽겠는 건 알겠지만 은호가 지금 얼마나 심각한지를 안다면 저런 반응을 보일 수는 없었다. 서희에게 더는 오지 말라는 말을 들은 순간부터 세상이 와르르 무너지는 것 같았는데.
그래도 악마 같은 부모님과 달리 천사 같은 서희만은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서 은호의 말을 진지하게 들어 주고 있었다.
“나는 은호 너랑 노는 게 정말 좋은데, 너무 즐거운데……, 너는 나랑 있어서 힘들고 하나도 안 즐거운 거면 그런 건 나도 싫으니까. 은호야, 나랑 있어도…… 괜찮아? 정말 안 귀찮고 안 짜증 나?”
“안 귀찮아! 짜증이 왜 나? 난 너랑 노는 게 세상에서 제일 좋단 말이야!”
창피한 줄도 모르고 소리를 버럭 질렀다.
“……다행이다.”
눈물을 뚝뚝 떨구던 서희가 진심으로 기쁜 듯 활짝 웃었다.
언젠가 엄마가 했던 말대로 이 집안 식구들은 전부 날개 잃은 천사가 틀림없다. 그렇지 않다면 이 어두컴컴한 밤을 서희의 저 작은 미소 하나로 이토록 환히 비출 수는 없었다. 어둡게 가라앉아 있던 제 마음마저 단숨에 빛으로 가득 차는 기분이었다.
“왜, 그동안 왜 자꾸 내 눈 피했어?”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가서 투정 부리듯 물었다.
“은호 너랑 눈 마주치면…… 자꾸 눈물이 날 거 같아서.”
서희가 젖은 뺨을 닦으며 멋쩍은 듯 배시시 웃었다. 은호는 마음이 푹 놓이면서도 괜히 서희를 밉지 않게 흘겼다.
“내가 준 샌드위치는 왜 안 먹었는데.”
“그날, 배가 좀 아팠어.”
서희는 어린애처럼 배를 두 손바닥으로 감싸며 답했다.
“진짜?”
“응. 진짜.”
믿어 달라는 듯 맑은 눈동자가 절실하게 반짝거렸다.
“그럼 배 아프다 해야지, 왜 먹기 싫다고 그래? 내가 그때 얼마나…… 얼마나…….”
은호는 다시 소매로 눈물이 차오른 눈가를 벅벅 닦았다.
“다시는…… 오지 말라는 말 하지 마. 그 말 듣고 내가 얼마나 무서웠는지 너 모르지?”
“미안해.”
서희의 사과에 은호는 다급히 고개를 휘휘 저었다.
“아니야. 내가 미안해. 내가 다 잘못했어, 서희야. 앞으로는 절대 그런 나쁜 말 안 할게. 내가 진짜 잘할게. 그러니까…… 나 미워하지 마.”
친구 관계에서도 서열은 분명 존재한다.
서희와의 관계에서 자신이 더 우위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은호는 이번 일을 계기로 그 착각을 저 멀리 내던지게 되었다. 13년 동안 그토록 중요하게 여겼던 자존심 또한 서희의 앞에선 쓸데없는 것일 뿐임을 깨우쳤다.
자존심이 다 뭔가. 이렇게 쉽게 서희와 다시 마주하고 웃을 수 있었다면 처음부터 고집부리지 말고 잘못했다고 싹싹 빌었어야 했는데.
서희와 제대로 친구가 된 지 1년. 은호는 서희와의 치기 어린 기 싸움에서 자신의 패배를 순순히 인정하고 받아들이기로 했다. (물론 이건 서희는 전혀 모르는, 은호만의 기 싸움이었다.)
강은호는 그렇게, 기쁘고 벅찬 마음으로 김서희의 발닦개를 자처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