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놓치기 전에-2화

본문

쿵푸벳

01. 발닦개

깊어진 밤, 창문 너머로 보이는 야근 많기로 악명 높은 옆 회사 빌딩에서도 불이 하나둘씩 꺼지기 시작했다.

모두가 퇴근한 마케팅 2팀에 혼자 남은 은호는 기획서를 다듬으며 한숨을 쉬었다. 미움을 받는 게 아닌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일이 몰리고 있었다.

은호의 상사인 박 팀장은 위에서 뭔가 일을 받았다 싶으면 곧장 은호에게 맡겼다. 눈여겨보며 예뻐하는 부하 직원을 키우는 그의 방식이라고 했다. 확실히 그가 은호에게 맡기는 일들은 열심히 해 봤자 티도 안 나는 잡일이 아닌, 잘 성공시키면 차곡차곡 능력을 인정받을 수 있는 굵직한 기획들이었다.

입사한 지 고작 2년 차인 은호에게 이번에 중요한 신제품 출시 기념 행사를 담당하게 한 것 또한 같은 맥락이었다. 하반기에 NC전자에서 새로 출시할 인공지능 플랫폼과 연동이 되는 공기청정기의 론칭쇼를 실무 경험이 아직 적은 은호가 전부 맡아서 준비하게 되었다.

일이 늘어날수록 야근을 밥 먹듯이 하며 워라밸이 붕괴되고 있으니 기분상으로는 박 팀장이 자신을 엿 먹인다고밖에 생각이 안 들지만, 은호의 능력을 무조건적으로 믿어 준다는 것만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기획서 파일을 저장한 은호는 뻐근한 한쪽 어깨를 손으로 주물렀다.

‘혹시 어디서 미리 주워듣고 아는 건가?’

형들과 달리 평사원으로 입사한 은호가 NC전자 오너의 막내아들이라는 사실은 아직 사내에 소문으로 퍼지지 않았다. 박 팀장도 특출나게 정보력이 좋은 편이 아니었다. 게다가 저번 회식 때 은호를 붙잡고 NC그룹 총수 일가의 문제점에 대해 적나라하게 꼬집었던 것을 떠올리면 역시 아직 모를 확률이 99퍼센트다.

“어머, 은호 씨.”

마케팅 1팀에서 오늘 유일하게 늦게까지 야근을 한 윤 대리가 핸드백을 팔목에 걸치며 은호의 자리로 다가왔다.

“아직 다 안 끝났어요? 너무 고생이다. 나도 이제 겨우 퇴근이긴 하지만.”

나긋한 목소리로 말을 건넨 윤 대리가 싱긋 웃었다. 늘씬한 몸매가 자연스럽게 드러나도록 피트된 블라우스와 정장 치마 차림의 그녀는 NC전자 남사원들에게 지대한 관심을 한 몸에 받는 여자였다.

예쁜 얼굴과 사근사근한 성격, 스타일리시하면서도 너무 과하지 않은 패션 감각. 이성에게 인기를 끌 만한 요소는 많았다. 무엇보다 그녀는 단아한 외모와 달리 남자들을 알게 모르게 어장에 집어넣는 스킬이 상당히 뛰어났다.

하지만 은호가 윤 대리를 마주할 때마다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생각은 하나뿐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은호는 윤 대리가 목에 걸고 있는 사원증에 적힌 이름 석 자를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었다.

「윤서희 대리」

그녀의 아름다운 외모도, 늘씬한 몸매도, 유혹하듯 살랑거리는 목소리도 은호의 관심을 전혀 끌지 못했다. 저 이름만 제외하면.

서희.

서희라는 이름이 사실 그다지 특별한 이름은 아니었다. 오히려 흔한 편에 속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은호는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서희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을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다. 회사에 다니기 전까지 은호가 아는 서희는 김서희뿐이었다.

그렇기에 회사에 입사해서 정신없이 일을 배우기 시작할 무렵, 누군가가 “서희 씨!” 하고 부르는 음성에 깜짝 놀라서 주위를 이리저리 두리번거려야 했다. 자신이 바라는 ‘그 서희’가 여기에 있을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본능처럼 이름을 불린 사람을 찾아 헤맸다.

그때부터였다. 같은 팀은 아니지만 사무실이 이어져 있고, 회의를 함께 할 때도 종종 있어 꽤 자주 맞닥트리는 윤 대리를 볼 때마다, 정확히는 윤 대리의 사원증을 볼 때마다 은호의 머릿속을 꽉 채우는 생각이란,

‘김서희 보고 싶다.’

초등학생 수준으로 아주 단순한 것이었다.

“은호 씨?”

하긴, 하루하루를 버티면서 서희를 떠올리게 하는 게 고작 저 똑같은 이름 하나뿐이겠는가.

출근길에 차창 너머로 우직하게 버티고 선 가로수들을 스치듯 볼 때도, 일하다가 잠시 여유가 생겨 커피를 한잔 마실 때도, 퇴근이 늦어져 불이 꺼진 사무실에서 홀로 한숨을 푹 내쉬는 순간에도 그리운 서희의 얼굴이 가슴을 파고들곤 했다.

‘잘 있겠지. 못 본 지도 벌써…….’

은호의 눈빛이 아련함을 머금었다. 강은호와 김서희가 어떤 친구인데. 어쩌면 가족보다 더 가깝게 이어진 사이인데. 이토록 오랜 시간 동안 서희와 떨어져 있게 된 현실이 지독히 원망스러웠다.

‘벌써 열흘이나 지났잖아. 서희 못 본 지.’

은호가 오늘 평창동 본가에서 가족들과 아침 식사를 하며 혼잣말로 내뱉은 말에, 어릴 때나 다 커서나 동생을 놀리는 것을 가장 큰 즐거움으로 삼는 둘째 현호가 배를 잡았다.

‘진짜 명불허전이다. 명불허전이야. 야, 강은호. 누가 보면 서희랑 열흘이 아니라 10년은 못 만난 사이인 줄 알겠다.’

은호가 그냥 농담처럼 던진 게 아니라 정말 진지한 마음으로 힘들고 지쳐서 무의식적으로 중얼거린 말이라는 걸 알아차린 현호는 기가 막힌다는 듯 다른 가족들에게 동조를 구했다.

‘어머니, 저 녀석 표정 보세요. 저 아련함 넘치는 눈 좀 보시라고요. 아버지, 겨우 열흘 못 봤다고 밥도 제대로 못 넘기고 저렇게 그리워서 죽을 것 같은 표정인 게 정상이에요? 쟤는 진짜 약도 없어요.’

그러나 은호는 깐족거리는 현호의 놀림이 귀에 닿지 않았다. 그 정도로 서희를 향한 그리움이 극에 달해 있었다.

“으음, 일이 많이 힘들면 내가 좀 도와줄까요?”

은호가 지친 얼굴로 한숨을 쉬는 모습을 포착한 윤 대리가 기회를 잡겠다는 듯 은근하게 물었다.

“네? 윤 대리님이 왜요? 아니, 그것보다 아직 안 가셨어요?”

은호가 의아하면서도 당황한 눈초리로 물었다. 계속 은호의 자리 앞에 서서 어떻게든 대화를 잇기 위해 갖은 애를 쓰던 윤 대리가 민망한지 얼굴을 붉혔다.

물론 은호는 바로 앞에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완전히 잊을 정도로 둔한 성격이 아니었다. ‘민망함’이라는 감정이 옆에서 얼쩡거리는 귀찮은 사람을 떼어 내는 데 유용하다는 것을 잘 알기에 적당히 연기를 했을 뿐이다.

“많이 피곤해 보이시는데 얼른 퇴근하세요.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예의 있고 깍듯한 말투였다. 그리고 그만큼 빈틈이라곤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녀에게 이성적인 관심이 먼지만큼도 없다는 게 누가 봐도 확 느껴졌다. 윤 대리는 무엇보다 그 점이 자존심이 상한 얼굴이었다.

“별로 피곤하진 않은데…….”

그녀는 애써 웃음 지으며 말을 흐렸다.

다른 남자 같았으면 이쯤에서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갔겠지만 강은호는 조금 자존심을 구기더라도 노력해서 낚을 가치가 확실히 있는 남자였다. 그리고 사실 강은호 정도면 저렇게 철벽을 치는 것도 그다지 얄밉게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어떻게든 넘어뜨리고 싶은 묘한 승부욕이 더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얼굴도 잘생기고 키도 큰 데다가 업무 능력까지 뛰어나다. 게다가 평소 차림이나 여유로운 분위기만 봐도 집안이 부유할 거라는 추측이 가능했다.

성격도 모나거나 까칠하지 않아서 동료들과 두루두루 잘 어울렸다. 그러면서도 스스로 정해 둔 일정한 선을 넘는 건 절대 용납하지 않는 단호함 같은 게 은근슬쩍 느껴질 때가 있어 더욱 매력적인 남자였다. 사람들과 잘 어울리면서도 명확한 선을 긋는 남자란, 유혹하기 어려운 만큼 가지고 싶다는 욕망도 커지기 마련이니까.

“사실 이대로 집에 들어가기가 좀 안 내킨달까. 요새 바빠서 친구들도 잘 못 만나고, 계속 회사랑 집만 반복해서 오갔으니까요. 기분 전환이라도 좀 하고 싶은데……. 내가 얼른 은호 씨 일 도와줄 테니까 우리 퇴근하고 같이 술 한잔해요. 야근 동지끼리. 어때요?”

애교스럽게 콧소리를 내며 아주 정성을 다해 예쁜 눈웃음을 만들었다. 웬만한 남자들은 다 넘어오는 윤 대리의 필살기였다. 그러나 은호는 심각한 얼굴로 그녀를 빤히 보았다.

“대리님.”

“응?”

윤 대리가 순진한 느낌이 들 만큼 눈을 느릿하게 깜빡이며 대답했다.

“술 마실 때가 아니신 거 같은데요.”

“왜요?”

“감기 걸리셨잖아요.”

“네?”

“코가 꽉 막혔어요.”

윤 대리의 얼굴이 일순 하얗게 굳어졌다.

“가, 감기 아닌데…….”

“아니긴요. 낮에는 분명 이 목소리 아니셨잖아요. 아무래도 일하다가 코감기 걸린 거 같은데, 혹시 지금 필요하시면 화장지 좀 드릴까요? 코 푸실래요?”

은호가 책상 한구석에 놓인 갑 티슈에 손을 뻗으며 평소와 다름없이 매끈한 미소로 물었다. 윤 대리는 발갛게 익은 얼굴을 식히기 위해 호흡을 다스렸다. 그러면서도 은호가 괘씸하다는 듯 싸한 눈빛을 숨기지 못했다.

그녀가 이 간드러진 목소리와 살랑살랑한 어조로 유혹하면 대다수의 남자들이 어쩔 줄 몰라 하며 몸을 들썩거리기 바빴다. 근데 감히 자신을 콧물이 가득 찬 감기 환자로 취급하다니.

“술을 아무리 좋아하셔도 감기 걸렸을 땐 자제해야 해요.”

은호는 감기가 걸린 와중에도 술을 찾는 윤 대리가 조금 한심하다는 듯한 눈빛을 아주 미세하게 내보이며 말했다. 그 눈빛을 해석하지 못할 리 없는 그녀가 분한 듯 입술을 바르르 떨었다.

“그래요. 혼자 잘할 수 있을 거 같으니 난 먼저 가 볼게요. 은호 씨도 열심히 해 봐요. 해 뜨기 전엔 퇴근해야지.”

처음 말을 건넬 때와는 확연히 달라진 말투였다. 나긋나긋하던 콧소리가 싹 빠지고 담백하다 못해 냉랭하게 인사를 마친 윤 대리가 휙 등을 돌렸다.

신경질적인 구두 소리가 점차 멀어졌다. 은호는 윤 대리가 모습을 감춘 문 방향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휴대폰을 들었다. 그때, 혼자라고 생각했던 사무실 안에서 익숙한 음성이 낮게 울렸다.

“너 진짜 성격 나쁘다.”

윤 대리가 나간 문과 멀리 떨어진 다른 문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은호의 책상으로 느직느직 걸어오고 있는 한 남자가 보였다. 전등들이 대부분 꺼져 있는 탓에 얼굴이 흐릿했지만 익숙한 목소리였다. 음흉한 성격답게 어두운 사무실 한구석에서 숨죽인 채 대화를 엿들었던 게 틀림없었다.

“뭐야, 언제 왔냐?”

“언제 왔냐? 냐? 냐아?”

현호가 당장이라도 은호를 엎어뜨릴 것처럼 눈자위를 번뜩 빛내며 말꼬리를 잡았다. 은호는 의자 등받이에 등을 편히 기대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임원이 말단 직원 폭행이라도 하게? 9시 뉴스 타 볼래?”

“버릇없는 동생 교육 좀 시키려는 걸 누가 뉴스 꼭지로 쓴다고 그래?”

네 살 차이면 적은 나이 차도 아니건만 현호는 어릴 때부터 은호를 못살게 구는 얄미운 형이었다.

본인 말로는 하나뿐인 동생이 예뻐서 저만의 방법으로 귀여워해 주는 거라지만, 종합 격투기 마니아인 둘째 형에게 초등학교 때부터 연습이라는 이름 아래 온갖 기술을 몸소 당하며 맷집을 길러야 했던 은호에게 강현호는 대청소하는 날 가장 먼저 갖다 버리고 싶은 존재였다.

“너 말이야, 방금 저 여자가 무례하게 접근한 것도 아닌데 왜 그랬냐? 마음에 드는 이성한테 적당히 관심 표현할 수도 있는 거지. 그렇게 사람 민망하게 만들 필요가 있어? 생긴 것도 예쁘던데.”

“그렇게 마음에 들면 형이 얼른 튀어 나가서 붙잡아. 둘이 잘 어울리겠네. 형도 여자 만날 땐 목소리부터 깔잖아.”

“됐다. 나 만나는 사람 있거든? 그나저나 우리 집안에서 어떻게 너같이 꼬인 녀석이 나왔는지, 참.”

어머니 경진은 시원시원하고 뒤끝 없는 성격이었고, 아버지 성한은 세심하면서도 자상한 사람이었다. 두 분은 전혀 다른 성향이긴 해도 누군가를 대할 때 뒤로 계산하거나 머리를 이리저리 굴리지 않는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첫째인 인우와 둘째인 현호도 성격은 제각각이지만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어 솔직하고 직선적인 점만은 부모님에게 제대로 물려받았다.

그런데 막내인 은호는 어릴 때부터 좀 유별났다. 어른들 앞에선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아이인 척 생글생글 웃으면서도,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이 있으면 꼭 뒤에서 은근하게 괴롭히거나 망신살을 줘야 그날 발 뻗고 푹 자는 배배 꼬인 녀석이었다.

“……요즘 신경이 예민해져서 그래.”

미간을 찌푸린 은호가 뒤늦게 이유를 들려주었다.

신경이 예민해지는 이유야 뻔했다. 야근이 끝없이 이어지니까. 일이 밀려 야근을 계속하면 서희를 또 못 보니까.

은호가 낮은 한숨을 내쉬더니 휴대폰 화면을 켰다. 모바일 메신저로 대화창을 열자, 은호가 보낸 메시지들이 상대에게 아직 읽히지 않은 채로 외로이 둥둥 떠 있었다.

[서희야 뭐 해?]

[퇴근했어?]

[저녁 먹었어?]

[뭐 먹었어?]

[씻어?]

[뭐 해?]

[나 또 야근이다. 불쌍하지?]

[김서희 김서희 김서희]

[왜 전화 안 받아?]

[잠들었어?]

[나 네 목소리 까먹을 거 같은데.]

[기임서어희이]

“김서희 발닦개…… 가 아니라 이제는 스토커로 별명을 바꿔 줘야 하나.”

은호의 휴대폰 화면을 슬쩍 읽어 내리던 현호가 심각하게 중얼거렸다. 이번엔 놀리려는 마음도 싹 가신 얼굴이었다.

“한 번에 다 보낸 거 아니야. 서희가 안 읽고 답이 없으니까 계속 쌓인 거지.”

“그게 더 소름 돋아, 인마. 답이 올 때까지 좀 진득하게 기다릴 순 없냐? 애가 메시지 확인하고 놀라겠다.”

현호의 면박에도 은호는 이미 다른 생각에 골몰해 있었다.

“저번에 엄마가 서희 보약 지어 놓는다고 했는데 오늘이면 집에 도착했겠지? 몸이 너무 허약해서 좋은 거만 골라 먹여야 하는데. 이번 주말엔 그거 가지고 꼭 서희 보러 가야겠다.”

현호는 답이 안 나온다는 눈빛을 동생에게 쏘며 쯧쯧 혀를 찼다.

“넌 분명 전생에 서희 종이었을 거야. 그것도 엄청 충직하게 주인을 섬기고 받드는 모범적인 종놈. 이름을 은호 말고 길상이라고 지었어야 하는데.”

현호가 손을 뻗어 은호의 머리를 쓰다듬으려 하자 그가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옆으로 비켰다.

“머리 건드리지 말랬지.”

“막내 주제에 귀여운 구석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놈. 나 먼저 집에 간다. 적당히 하고 얼른 와라.”

돌아선 현호가 성의 없이 대충 손을 흔들며 문 쪽으로 향했다. 현호마저 나가자 이제 사무실은 완전한 적막이 감돌았다. 은호는 귀찮게 구는 방해꾼이 사라져 속이 시원하다는 표정을 짓더니 휴대폰 통화 버튼을 꾹 눌렀다.

“전화 좀 받아라, 김서희.”

이번에는 받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서희는 연결음이 다 끝나 갈 때까지도 목소리를 들려주지 않았다. 은호는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을 다시 내뱉으며 휴대폰을 귀에서 뗐다.

“이렇게 빨리 잔다고?”

불만스럽게 중얼거리던 그는 휴대폰 안에서 사진첩을 열어 저장된 사진들을 이리저리 눌러 보았다. 그 속에는 고즈넉한 풍경 사진들이 많았다. 정확히는 풍경 사진인 척하는 인물 사진이지만.

담양의 메타세쿼이아 길에서 찍은 사진이었다. 그림 속 풍경처럼 아름답고 웅장하게 이어진 나무들이 만들어 낸 길 가운데에 서희가 서 있었다.

하지만 너무 멀리서 찍어서 서희가 짓는 표정은 잘 보이지 않았다. 자신보다 나무들이 잘 나오도록 찍어 달라고 몹시 강조했기 때문에 이런 사진이 나왔다.

사진첩을 쭉 넘겨 봐도 서희의 얼굴이 클로즈업되어서 찍힌 사진은 거의 없었다. 풍경을, 특히 자연을 아주 중시하는 그녀인 만큼 자신의 얼굴 사진을 찍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은호가 하도 고집을 부려서 겨우 찍히는 걸 허락한다 해도 풍경 속에서 전신이 손톱만큼 작게 나와야 만족했다.

사진들을 살펴볼수록 웃음이 나왔다. 스물일곱밖에 먹지 않은 젊은 사람의 사진첩이 고풍스럽고 그윽한 풍경의 자연 명소나 수목원, 식물원 사진으로 가득했다. 그리고 그 풍경들 속에는 숨은그림찾기처럼 손톱만 한 크기의 서희가 있었다.

‘이제 벌써 가을이네.’

은호는 사진을 보다가 문득 떠올렸다.

이번 가을에는 보호수로 지정된 600년 된 은행나무를 함께 보러 가기로 했는데. 둘 다 요새 무척 바빠서 이러다가 잊고 넘어갈지도 모르니 미리 구체적으로 약속 날짜를 잡아 놓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은호는 서희에게 메시지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작성하던 도중 서희가 그가 남겼던 메시지들을 읽었다. 한꺼번에 지워진 1 표시에 그는 들뜬 표정으로 손가락을 멈춘 채 그녀의 답장을 기다렸다.

“……어?”

그러나 1분이 지나고, 3분이 지나고, 5분이 지날 때까지도 서희에게선 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메신저 화면을 뚫어져라 응시하던 은호의 표정이 점차 어두워졌다.

‘왜?’

은호는 다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이번에도 받지 않으면 시간이 너무 늦었더라도 서희의 집에 쳐들어갈 작정이었다. 그런 은호의 속내를 읽기라도 한 듯 그녀는 연결음이 한참 이어진 후 뒤늦게나마 전화를 받았다.

― 여보세요.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아?”

― ……은호야.

“메시지는 왜 답장도 안 했어? 응? 메시지 읽고 무시한 거 다 봤어. 김서희, 너 내 연락 귀찮아?”

― 그런 거, 아니야.

“정말 아니야?”

― 응. 안 그래도 지금 연락하려고 했어.

그제야 은호의 얼굴이 살짝 풀렸다.

“뭐 하고 있었는데?”

― 그냥…… 쉬고 있었어.

“휴대폰도 계속 안 보고. 내가 연락 얼마나 기다렸…….”

― 은호야.

“어?”

나지막한 부름에 은호의 눈빛에 의아함이 서렸다. 웬만하면 상대의 말을 끊지 않고 끝까지 듣는 서희인데.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 나 오늘 좀 피곤해서 일찍 자고 싶거든.

“아……. 많이 피곤해, 서희야?”

― 응, 조금. 미안해.

“아니야, 미안하긴. 피곤하면 얼른 자야지. 슬슬 추워졌으니까 이불 좀 두꺼운 거 꺼내. 너 환절기에 꼭 방심하다가 감기 걸리잖아. 현관이랑 창문 다 꼼꼼히 잠그고, 이불 잘 덮고. 알겠지?”

― 알겠어. 은호야, 먼저 끊을게.

전화는 매정하리만치 한순간에 뚝 끊어졌다.

은호는 목소리에선 가까스로 감췄던 서운한 기색을 전화로는 볼 수 없는 얼굴에서는 숨기지 못했다. 이틀 만에 겨우 듣게 된 목소리인데 서희는 전혀 아쉽지도 않은 것 같았다.

“……많이 피곤한가 보네.”

은호는 애써 납득하면서도 꺼진 휴대폰 화면을 왠지 모를 불안한 눈길로 깊이 응시했다.

* * *

번화가의 수제 맥줏집 입구에 들어서자 거슬리지 않는 음량의 리듬감 있는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잠시 서서 가게 안을 전체적으로 훑은 은호는 익숙한 얼굴들이 모여 앉은 테이블로 저벅저벅 걸어갔다.

“오, 강은호. 진짜 왔네. 요새 토 나오게 바쁘다더니, 용케 나왔다? 이제 좀 숨 돌릴 틈이 생긴 거냐?”

“자기가 약속 장소까지 정했는데 안 나오면 너무 양심 없지. 근데 강은호 입사하기 전에도 얼굴 자주 못 보지 않았냐? 쟤 대학 때도 지금이랑 비슷하게 바빴던 거 같은데.”

“왜, 기억 안 나? 우리한테도 시간 좀 팍팍 쓰라고 하니까, 강은호가 눈 하나 꿈쩍 안 하고 아주 당당하게 얘기한 적도 있잖아. 친구에도 중요도가 정해져 있다고 말이야. 중요도에 따라 쓰는 시간도 차이가 나는 게 당연하다고 했었지, 아마?”

한 친구가 은호가 했던 말을 상기시키자 남은 두 명이 바람 빠진 웃음을 터뜨렸다. 새삼 다시 떠올려도 어이가 없다는 듯한 얼굴들이다.

‘너희도 중요 순위를 따졌을 때 아주 떨어지는 수준은 아니야. 뭐, 어느 정도 상위권에 속한다고 할 수 있지. 1순위하고는 비교가 아예 불가능해서 그렇지.’

강은호는 약간의 미안한 기색도 없이 그런 오만하고 뻔뻔한 말을 던질 수 있는 녀석이었다.

사실 사람마다 더 소중하고 덜 중요하게 생각하는 친구가 정해져 있는 건 당연한 마음인지도 몰랐다.

애초에 중요도를 나누고 싶지 않아도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게 보편적인 심리였다. 인간의 감정이란 절대 계산이 평등하고 정확하게 이루어질 수 없어서 마음이 더 가고 덜 가는 사람이 분명하게 존재할 수밖에 없으니까.

문제는 그런 말을 거리낌 없이 입 밖으로 꺼낸다는 것이었다. 어느 누구와도 비교 불가라는 그 1순위인 친구에게만 순위 공개를 한다면야 상관없겠지만, 굳이 2순위라는 그들의 앞에서.

그러면서도 은호는 너희가 어느 정도 상위권 수준은 되니 감지덕지하라는 말투였다.

뭐, 그런 제멋대로인 녀석인데도 상종하기 싫을 만큼 미워지지 않는 것도 재주라면 재주였다. 뭘 해 준 뒤에 생색도 꽤 내는 데다가, 자신이 잘난 점을 너무 잘 알아서 가끔 좀 재수 없긴 해도 말이다.

그건 아마도 진짜 생색을 낼 만한 순간에는 한없이 과묵해지는 녀석이기 때문일 것이다.

부친이 보증을 잘못 선 바람에 살던 집에서 맨몸으로 쫓겨나올 뻔했던 친구의 상황을 알게 되자마자 말없이 뒤에서 빚을 전부 처리해 준 것도 은호였다. 인간관계에 있어 매우 깐깐한 은호의 마음에 드는 건 상당히 어려워도, 마음속에서 제 사람이라고 인정되면 그는 무척 든든한 존재가 되어 주었다.

적당히 거리를 유지하는 사람들에게는 제법 반지르르하게 웃으며 가식적으로 구는 성향이 있었지만, 친해진 이들 앞에서는 민낯과 속내를 드러내기를 주저하지 않는 녀석이었다. 2순위 정도면 감격스럽게 여기라던 말도 그 전형적인 예들 중 하나였다.

“그래서 중요도 1순위 친구인 김서희가 오늘 바쁘대? 그 덕에 우리랑 놀아 줄 시간이 생겼냐?”

은호는 남은 자리에 툭 앉으며 슈트 재킷 안쪽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서희가 이 근처에서 회식 중이야.”

“회식? 여기서? 직장 경기도 쪽이라고 하지 않았나?”

“정확히 따지면 회식이라기보다는, 이번에 일 그만두는 동료가 생겨서 친분 있던 사람들 몇몇이 모여서 하는 조촐한 송별회. 들어 보니 술도 마시고 늦어질 거 같더라고. 끝날 때쯤 데리러 간다고 하면 서희가 연락 안 하고 집 다 가서 도착했다고 할 테니까 미리 근처에 와 있는 거야.”

은호는 대꾸하는 동시에 휴대폰 화면에 서희와의 대화창을 띄웠다. 어제저녁에 서희에게 송별회 장소를 들은 후 친구들과의 약속 장소를 그곳과 가까운 술집으로 정했다.

[서희야, 나 비어 타임이라고 너 있는 곳 근처 술집에서 고등학교 친구들하고 있거든? 기다릴 테니까 송별회 끝나면 바로 전화해. 집에 데려다줄게.]

정성스럽게 쓴 메시지를 전송한 후 고개를 들었다.

“시간 난 김에 너희도 보고.”

그러곤 자신의 귀한 얼굴을 이렇게라도 볼 수 있게 해 줬으니 황송하게 여기라는 듯한 눈빛으로 친구들을 바라봤다.

“그래, 짜증 날 정도로 정직하고 솔직한 답변 고맙다.”

“너무 서운하게 생각하지 마라.”

“서운하진 않아. 나도 뭐, 솔직히 여자 생기면 친구고 뭐고 무조건 애인이 먼저거든. 거시기 달린 수컷으로 태어났으니 남자보단 여자랑 같이 있는 쪽이 본능적으로 더 좋은 게 당연하지.”

은호와 마주 보는 자리에 앉은 찬성이 말했다. 찬성의 말을 듣던 은호의 눈동자가 단숨에 차가워졌다.

“여자? 애인? 서희랑 나는 그런 관계 아니라고 했지.”

해명하기도 이젠 지칠 정도로 많은 사람들에게 여러 차례 되풀이한 말이었다. 대부분은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여전히 오해하는 눈치였지만, 그의 가족들이나 아주 오래된 친구들은 은호와 서희가 남녀 관계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오랜 세월 동안 같이 붙어 지내면서도 정분이 안 난 것만으로도 쉽게 증명 가능했다.

그런데 꽤 오래 봐 온 축에 속하는 친구 녀석이 갑자기 또 저런 소리를 하니 순간적으로 짜증이 돋을 수밖에 없었다.

“우린 그냥 친구라고.”

툭 내뱉어 놓고도 스스로 한 말이 마음에 안 드는지 다시 덧붙였다.

“그냥 친구는 아니고, 제일 친하고 제일 소중한 친구.”

찬성은 같잖다는 듯 피식거렸다.

“야, 강은호. 근데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비교 불가 1순위, 하나뿐인 소울 메이트 어쩌고 해 놓고 그런 관계가 아니면, 그게 더 이상한 거 아니냐? 네가 하도 오랫동안 단호하게 부정해서 다른 놈들은 이제 그러려니 하고 넘기는 거 같지만, 내가 보기엔 아무리 생각해도 계속 이상해. 너 연애 안 한 지도 엄청 오래됐잖아. 하긴 그 상태로 여자 만나면 양심 없는 거지. 너 애인이랑 기념일에 분위기 잡고 데이트하다가도 서희가 갑자기 병뚜껑 안 따진다고 전화하면 고민도 없이 그거 따 주러 바로 튀어 나갈 거잖아. 아니야?”

은호가 미간을 확 구겼다.

“데이트? 내가 여자 만날 시간이 어디 있어? 지금 서희 만날 시간도 부족한데.”

데이트를 예로 들려 해도 애초에 서희 때문에 연애할 생각조차 없다고 딱 자르는 녀석이었다. 답이 안 나온다.

“서희도 남자 안 만나지? 너네 그렇게 아직도 붙어 다니는 거 진짜 문제라니까. 어릴 때야 상관없지만 지금은 좀 그렇지. 같은 성별이면 또 몰라도 다 큰 성인 남녀잖아. 서로의 연애 라이프를 위해서라도 이제 슬슬 거리를 둬. 지금은 별생각 없더라도 언젠간 결혼도 해야 할 거 아니야. 그러려면 연애는 필수인데. 고리타분하게 선봐서 결혼할 것도 아닌 이상.”

찬성은 오늘따라 청산유수였다.

“너희는 서로의 지뢰야, 지뢰. 누가 너네 같은 사람이랑 만나고 싶겠냐? 애인인 자기가 1순위가 될 수 없는 게 눈으로 뻔히 보일 텐데. 만약에 네가 지금 이 상태로 여자 사귀잖아? 그 애인이 고민 사이트에 사연 글 올리는 순간 바로 조회수 댓글수 폭발이야. 너랑 서희는 네티즌들한테 욕 푸지게 얻어먹을걸? 욕하는 댓글 적어도 한 천 개는 달릴 거다. 하나같이 입 모아서 이별을 추천해 주겠지. 그런 놈이랑은 당장 헤어지는 게 팔자 안 꼬는 일이라고. 반대로 서희 남자 친구가 글 올려도 마찬가지일 거고.”

잠자코 듣고 있던 은호의 눈썹이 비뚜름하게 세워졌다.

“우리가 왜 욕을 먹는데? 댓글이 천 개 달릴 정도로?”

“왜겠어. 예시를 좀 들어 줘? 안녕하세요, 제 남자 친구한테 엄청 오래된 소꿉친구가 있는데요. 저랑 있을 때 그 친구 얘기밖에 안 하고, 그 친구한테서 연락 오면 저는 거들떠보지도 않아요. 저번에는 그 친구가 감기를 앓아서 밤새 간병해 주고, 그 친구 집에서 잠도 잤대요. 근데 그 소꿉친구가 여자예요.”

옆에 있던 다른 친구들이 쿡쿡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찬성의 의견에 힘을 얹어 주는 반응이었다. 은호만 혼자 인상을 쓰고 있었다.

“그럼 아픈 애를 그냥 혼자 두냐?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그래도 자고 오는 건 좀 아니잖아. 서희 혼자 산다며. 그게 대학 때였지? 중간고사 바로 전이었는데도 공부도 안 하고, 아주 지극 정성으로 걔 간병하는 데 시간 다 쏟고. 난 그 말 듣고 당연히 둘이 결국 그렇고 그런 사이로 발전했구나 했는데 물어보면 또 아니라고 하고.”

은호는 더 설명할 가치가 없다는 듯 입을 다물었다. 아무리 아니라고 말해도 음흉하게 보는 이들을 상대하는 것도 이제 귀찮았다.

남들이 어떻게 보든, 얼마나 이상하게 취급을 하든, 그런 시선 따위는 털끝만큼도 관심 없었다. 서희와 자신의 이 오래된 우정은 그런 의심을 유유히 비웃어 줄 만큼 앞으로도 변함없이 굳건할 테니.

“나 화장실 좀 다녀온다.”

테이블에서 제일 열심히 떠들던 찬성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밖에 있는 화장실에서 볼일을 본 그는 휴대폰에 시선을 둔 채 가게 안으로 들어오다가 문 앞에 있던 여자와 툭 부딪쳤다.

“어, 미안합…….”

대충 사과하려던 찬성은 뒤돌아선 그녀와 눈이 마주친 순간 흠칫했다. 여자는 객관적으로 따졌을 때 확실히 미인이었지만 예뻐서 놀란 것만은 아니었다. 짧게 까딱거리던 고개가 저절로 깊게 숙여질 만큼 어딘가 냉한 인상이었기 때문이다.

화장도 거의 하지 않은 데다가 옷차림도 수수한 편이었는데 마주한 순간 기가 확 눌렸다. 낮은 단화를 신었는데도 170센티 정도 되는 길쭉한 키에, 얼굴이 새하얗고 이목구비가 화려해서인지 입술을 굳게 다물고 짧게 응시하는 것만으로도 상당히 도도해 보였다. 살짝 위로 올라간 매끈한 눈꼬리와 오른쪽 눈 밑에 있는 작은 점마저도 쉽게 접근하기 힘든 분위기를 더욱 견고히 했다.

“저,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앞을 못 보는 바람에…….”

범상치 않은 차가운 분위기에 속된 말로 좀 쫄아서 정중한 사과를 표했다. 미간을 예민하게 좁히며 ‘앞 좀 똑바로 보고 다니세요’라고 말할 것 같은 느낌이었는데, 그녀는 찬성과 같은 각도로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저도 죄송해요. 들어오시는 데 방해되게 문 앞에 서 있어서.”

맑고 투명한 목소리였다.

찬성은 살짝 당황했다. 생긴 것과 달리 무척 예의가 바르다. 겉모습만 가지고 너무 편견을 가졌나?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테이블로 향하려는데 돌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은호가 이쪽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왔다.

“너 뭐냐? 급하게 화장실이라도 가는…….”

은호는 찬성의 말을 무시한 채 그의 바로 뒤에 선 여자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김서희! 너 여기 왜 왔어?”

김서희?

찬성은 깜짝 놀라서 뒤돌아보았다. 저 여자가 그 김서희라고?

강은호와 친구로 지내면서 귀에 완전히 박혀 버린 이름이었다. 은호가 틈만 나면 ‘서희는, 서희가, 서희도’로 시작하는 말을 해 대는 바람에 이름이 곧 닳지 않을까 하는 쓸데없는 걱정이 다 들 정도였고, 누군가와 길게 통화를 하거나 휴대폰을 오래 붙잡고 있다 싶으면 그게 다 김서희와 연락을 주고받는 중인 거였다.

그러나 은호와 안 지 10년이 되도록 찬성을 포함한 세 친구는 그녀와 단 한 번도 만날 수가 없었다. 10년간 단 한 번도 말이다. 서희가 언제 무슨 말을 했는지는 미주알고주알 떠들어 대면서 막상 소개 좀 해 달라 하면 죽은 듯이 입을 꽉 다물어 버리는 강은호 때문이었다.

은호의 말을 들을수록 그들도 그녀에 대한 궁금증이 넘칠 수밖에 없었으니, 긴 시간 동안 꽤 집요하게 굴며 얼굴을 보여 달라고 수차례 찔러 댔었다. 네 친구면 우리 친구나 마찬가지 아니냐고 능글거리며 졸라 보기도 하고, 안 보여 줄 거면 앞으로 우리 앞에서 김서희 얘기는 금지라고 정색을 해 보기도 했다.

그러나 저 독한 녀석은 시치미를 떼며 눈 하나 깜짝 안 했다. 그게 얼마나 얄미웠는지 모른다. 소꿉친구 자랑은 눈꼴 시릴 정도로 해 놓고, 같이 좀 만나자고만 하면 꼭 몰래 숨겨 둔 꿀단지라도 뺏기는 것처럼 잔뜩 예민한 표정이 되었다.

‘그러니 내가 그냥 친구라는 말을 안 믿지.’

지금도 그랬다. 은호는 왠지 당황스러운 듯 인상을 찌푸린 채 찬성 쪽을 흘깃 보고는 서희에게 다급히 물었다.

“송별회 벌써 끝난 거야?”

“응.”

“왜 이렇게 일찍 끝났어?”

“그만두는 분 남편이 갑자기 접촉 사고가 났다고 연락 와서 저녁만 먹고 다 같이 일어났어.”

“그래? 그럼 연락을 하지. 내가 나갔을 텐데. 왜 여기로 왔어? 얼른 가자. 나 쟤네한테 인사만 하고…….”

아주 오랫동안 은호에게 말로만 들었던 김서희를 잠시 전설의 동물 보듯 신기하게 관찰하던 찬성이 슬쩍 끼어들었다.

“어딜 가. 같이 합석하면 되지.”

“뭐?”

은호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듯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찬성은 아랑곳하지 않고 서희에게 한 발짝 다가섰다. 이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서희도 우리랑 다 같이 놀려고 일부러 여기로 온 거 아니야? 아, 서희라고 해도 되지? 우리 동갑이니까.”

“아……, 응.”

“참, 나 고찬성이야. 너도 나 알지? 적어도 이름은. 우리, 얼굴은 지금 처음 봤는데도 왠지 좀 친숙하지 않아? 저 녀석 덕분에.”

능청스럽게 웃으며 서희에게 말을 건네는 찬성으로 인해 은호는 심기가 뒤틀리는 기색이었다. 그러나 서희도 찬성도 오랜 친구인 그의 눈치 따위는 전혀 살피지 않았다.

“은호랑 고등학교 때부터 친한 친구지? 나도 은호한테 네 얘기 많이 들었어.”

“사실 나 고딩 때부터 너 꼭 한 번 보고 싶었는데 저 녀석이 어지간히 차단을 해야 말이지. 대통령 만나기보다 더 어렵더라니까. 그래도 만날 사람은 결국 이렇게 만나게 되나 보다. 저기 저 녀석들도 그동안 너 엄청 궁금해했는데, 오늘 같이 술 한잔, 괜찮지?”

딱 잘라 거절하려던 은호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기도 전에 서희가 답했다.

“응. 괜찮아.”

“……서희야?”

은호가 살짝 충격을 받은 눈길로 그녀를 응시했다.

“왜 그래? 안 내키는데 괜히 그럴 필요 없어. 모르는 애들이랑 어울리는 거 불편하잖아. 괜찮으니까 우린 여기서…….”

“안 내키는 건 은호 너 아니야?”

서희는 어쩐지 어두워진 표정으로 물었다.

“어? 그게 무슨…….”

“나 괜찮아. 정말로.”

서희는 저쪽 테이블에서 벌써 기대가 섞인 눈으로 그들을 보는 두 남자를 흘끗거렸다.

“너랑 친한 친구들, 나도 한번 만나 보고 싶었어.”

이미 결정을 내린 그녀의 단호한 대답에 찬성은 씩 웃었고, 찜찜한 표정의 은호는 속으로 안절부절못했다.

“나 갑자기 머리가 아픈 거 같은데……. 왜 이러지? 몸살 기운인가. 아무래도 집에 가야 할 거 같아. 서희야, 우리…….”

마음이 급해진 은호가 뻔히 보이는 연기를 시작했다. 인상을 찌푸린 채 이마 한쪽을 부여잡자 꽤 그럴듯해 보이긴 했지만 소꿉친구인 그녀의 눈을 속이긴 어려웠다.

“방금까지 멀쩡하다가 갑자기 머리가 아파? 이상하네.”

늘 부드럽던 말투가 오늘따라 조금 서늘하게 들려서 은호는 설핏 놀랐다. 저를 향한 서희의 목소리가 차갑다니, 물론 말도 안 되는 착각일 게 분명하다.

그런 그를 놔둔 채 그녀는 찬성을 따라갔다. 결국 셋이 그들의 테이블 앞에 도착하자 앉아 있던 두 남자는 벌떡 일어나기까지 했다.

“김서희?”

“우리 예상이 맞지?”

퍽 과장되게 환영하는 그들의 반응에 서희는 살짝 어색한 듯하면서도 최대한 반갑게 인사하고는 은호의 옆에 앉았다.

“와, 혹시나 했는데 진짜였네. 강은호가 하도 꽁꽁 싸매고 안 보여 줘서 실존하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는데.”

“근데 왠지 상상했던 거랑 좀 다르다. 얼굴도 분위기도. 은호한테 전해 들으면서 난 되게 착하고 청순한 느낌일 줄 알았…….”

생각 없이 내뱉던 친구가 황급히 입을 막았다. 착하고 청순한 느낌일 줄 알았는데 상상과 다르다니. 날카롭고 못되게 생겼다고 대놓고 말한 거나 다름없지 않은가.

“아, 미안. 절대 나쁜 뜻으로 한 말 아니고. 사실 상상했던 거보다 훨씬 예쁜데……. 맞다, 우리나라에서도 히트 친 중국 사극에 나왔던 그 배우 닮았어. 저번에 내한한 그…… 이름이 뭐더라. 아무튼 전혀 나쁜 뜻 아니고, 그냥 인상이나 분위기가 좀 차갑고 도도…… 아, 뭐라는 거야. 어쨌든 기분 나빴다면 미안.”

왠지 설명할수록 말이 꼬이고 더 늪으로 빠지는 것 같아 급히 사과로 마무리를 지었다. 그러자 잠잠히 듣고 있던 은호가 영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서희 볼 때마다 다들 그 소리네. 서희가 진짜 그렇게 차갑게 생겼어? 난 모르겠던데.”

고개를 갸웃거리던 그는 돌연 묘하게 으스대는 듯한 느긋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아, 서희가 나랑 있을 땐 계속 웃고 있어서 그런가. 서희는 되게 어렸을 때부터 나하고 둘이 있는 거 좋아했거든. 다른 사람들은 불편해해서.”

저 자식 왜 저래.

세 친구가 복사한 것처럼 똑같은 눈빛을 은호에게 쏘았다. 원래도 별난 녀석이라고 생각했지만 오늘은 서희가 옆에 있어서 그런지 더 이상하다. 저 유난히 거드름 피우는 말투와 표정도 전혀 이해가 안 되고.

스스로 말해 놓은 사실을 다시 곱씹어도 기분이 좋은지 은호는 입가를 씰룩거리고 있었다. 그에겐 자신이 서희의 특별한 친구라는 사실이 그렇게 자랑스럽고 잘난 척을 할 만한 일인 듯했다.

“뭐, 난 잘 모르겠지만, 다가가기 어려울 만큼 남들한테 차가워 보이는 건 지금 생각하면 여러모로 다행인 일이야. 이 정도 방어선은 구축되어 있어야지.”

“방어선?”

“우리 서희는 화낼 줄도 모르고 싸울 줄도 모르는 애거든. 공격력이 제로, 아니 마이너스 수준이야. 누가 먼저 툭 시비 걸고 건드려도 자기가 먼저 사과할 정도로. 그러니까 외모가 만만하게 보이지 않는 건 착해 빠진 김서희의 유일한 방어 도구 같은 거지.”

은호가 서희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조금의 위화감도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자연스러운 손길이었다. 세 남자가 껌뻑껌뻑 멍청한 눈으로 그런 둘을 지켜보았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너 올 줄 알았으면 좀 더 고급스럽고 좋은 가게로 갈 걸 그랬다. 여기 안주 아까 한 젓가락 먹어 봤는데 별로 맛없어.”

서희가 어느새 제 앞에 채워진 맥주잔을 잡으려 하자 은호가 그녀의 잔을 뒤로 밀었다.

“그래도 술보다는 차라리 안주를 먹어. 술 별로 마시지도 못하잖아. 참, 아까 메뉴에 떡볶이도 있긴 하던데 그거 시켜야겠다. 우리 서희, 떡볶이 귀신이잖아. 떡볶이 먹자, 서희야.”

“아니야. 그냥 여기 있는 거 먹을게. 저녁 먹고 와서 배불러.”

“그래도 한 입이라도 먹을 거면 너 좋아하는 거 먹어야지. 그냥 시키자. 남기는 거 아까워서 그래? 나도 같이 먹을게. 참, 손목은 아직도 시큰거려? 좀 주물러 줄까?”

예상은 했지만 예상보다 더하다. 어릴 때부터 김서희 발닦개라는 별명이 붙은 녀석인 건 알았지만 눈앞에서 보고 있자니 당황스러워서 말이 안 나왔다.

187센티미터의 장신답게 강은호는 어깨 역시 넓었고, 옷을 걸쳐도 운동으로 단련된 몸이라는 걸 바로 알 정도였다. 테이블 주변에 있는 모르는 남자들조차 흘깃거리며 움찔댈 정도로 압도적인 체격을 가져 놓고, 집에 돌아온 주인에게 꼬리를 살랑살랑 흔드는 개처럼 굴고 있으니 같은 성별인 그들로서는 식욕마저 떨어지는 듯했다.

남들 앞에서 마음에도 없는 미소를 지으며 가식을 떨 때는 있어도, 저렇게 살갑게 알랑거리는 말투는 절대 쓰지 않는 녀석이었다. 그런데 대체 이 상황은 뭘까.

강은호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표현이지만, 그는 지금 거의 빌빌 기는 수준으로 서희의 얼굴을 살피며 그녀가 당장 필요한 게 뭔지, 어떻게 하면 그녀의 기분이 더 좋아질지, 오로지 그런 것만 생각하며 행동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조금도 작위적이지 않고 오랫동안 몸에 밴 습관이라는 게 절로 느껴져서 더욱 기가 찼다.

아무리 뜯어봐도 평등한 친구 관계로는 느껴지지 않았다. 발닦개, 시다바리 등의 단어가 세 사람의 머릿속에 둥둥 떠오른다. 최대한 높게 쳐줘도 집사 정도다.

“야, 우리도 서희랑 말 좀 하자.”

“너네가 서희랑 무슨 할 말이 있다고?”

은호가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않고 물었다.

“궁금한 거 많거든? 그동안 얼마나 많이 쌓였는데.”

“이상한 소리 할 거면 하지 마라. 괜히 서희 곤란…….”

“뭐가 궁금했는데? 물어봐도 돼.”

그녀가 그의 말을 가로막으며 답했다. 세 남자의 얼굴이 확 밝아지며 이런저런 질문들이 쏟아졌다.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는 말수가 확 줄어드는 서희인데 제법 성실한 답변이 이어졌다.

“서희 너 하는 일이 그, 뭐라고 했지. 식물화가? 식물…….”

“식물 세밀화가.”

“아, 맞아. 식물 그림을 전문적으로 그리는 직업이 있는 거 난 네 덕분에 처음 알았어. 은호가 너 수목원 들어갔을 때 네 자랑을 오죽 많이 했어야지. 너랑 아주 딱 어울리는 직업이라면서 말이야.”

“어릴 때부터 좋아했어. 식물들 관찰하는 것도, 그림 그리는 것도.”

서희는 무의식적으로 은호의 옆얼굴을 짧게 응시하며 조곤조곤 말했다. 그녀의 얼굴에 언뜻 어두운 그늘이 졌다 금세 사라졌다.

“내 얘기만 계속하니까 별로 재미없지? 미안해. 내가 말주변이 없어서……. 너희 지루하겠다.”

“지루하긴! 전혀! 그치?”

“맞아. 우린 지금이 제일 재밌어.”

서희가 다행이라는 듯 웃었다. 차갑게 느껴지던 눈매에도 미소가 스치며 눈꼬리가 살짝 내려가자 인상이 한층 부드러워졌다.

서희에게 관심을 내보이면서도 어쩐지 알게 모르게 조금씩 긴장하고 있던 세 사람은 그 웃음을 보고선 잠시 넋을 놓았다. 그들은 곧 그녀를 오래전부터 알아 온 친한 친구처럼 편히 대하며 더욱 말이 많아졌다.

은호는 자신의 고등학교 친구들과 서희가 크게 어색함 없이 어울려 가는 모습을 시야에 담으며 묘한 표정을 지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서희에게 찬성과 두 친구에 대해 얘기해 준 적은 꽤 많아 생판 남보다야 친근하게 느껴질 수 있겠지만, 어쨌든 오늘 처음 만난 사이인데.

문득 자신이 오래도록 착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의심마저 들었다.

초등학교 5학년, 심한 괴롭힘과 따돌림을 당했던 서희는 왕따에서 벗어난 뒤에도 움츠러든 성격은 그대로였다. 여전히 사람들의 눈치를 살폈고,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관심을 받는 것을 꺼렸다. 한 자리에서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평온한 감정 상태로 머물고 싶어 했다. 왕따를 당한 후유증이 꽤 길게 이어진 셈이다.

선생님이나 반 친구들 앞에서는 조가비처럼 꼭 다물어지는 입술이 할아버지와 은호의 앞에서만 활짝 열리곤 했다. 그 시절의 어린 은호는 서희가 제 앞에서만 밝은 얼굴로 재잘거리는 것이 무척 좋았다. 자신이 서희에게 특별한 존재가 되었음을 선명히 느낄 수 있었으니까.

따돌림의 상처로 마음이 위축된 서희를 잘 이끌어서 다른 친구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려 놀 수 있도록 해야겠다는 속 깊은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서희는 저와 둘이 있는 걸 제일 편하게 느끼니 그녀가 원하는 대로 해 주는 거라고 스스로 납득했는지도 모른다.

시간이 흘러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올라가면서 서희의 불안정한 위축감은 서서히 나아지는 듯했지만, 숫기 없고 조용한 성격은 달라지지 않았다.

대학과 직장을 다니며 은호가 가까이에서 그녀를 지켜보지 못한 시간들 속에서 조금씩 변화가 있었을까.

어릴 때처럼 말수가 적은 건 여전하지만 친분이 없는 낯선 이들과 어울리는 게 거북하고 불편한 기색은 찾아볼 수 없었다.

서희는 어느새 쑥쑥 자랐는데, 자신은 늘 지켜 줘야 하는 그 열두 살 아이만을 떠올리며 그녀를 너무 연약하고 불안한 존재로만 보듬었는지도 모르겠다. 어릴 적 받은 상처를 홀로 잘 떨쳐 낸 그녀를 이제라도 알아차렸으니 기분이 좋아야 하는데 심경이 복잡했다.

왠지 조금…… 섭섭한 것 같기도 하다.

이게 무슨 고약한 심보일까. 그래도 역시 자신이 모르는 김서희를 뒤늦게 알게 된 듯한 지금 이 기분은 전혀 유쾌하지 않았다.

“야, 서희가 그린 그림 보여 줄까?”

은호가 여전히 서희에게 질문 공세를 이어 가는 친구들의 말을 툭 자르며 휴대폰을 내밀었다.

“방금 그렇게 궁금하다고 해 놓고, 서희 그림 보여 준다는데 왜 전혀 관심 없는 표정들인데? 서희 그만 보고 이것 좀 보라니까.”

여전히 그들과 그녀가 친해지는 게 탐탁지 않은 기색이었다. 질투가 그대로 드러나는 심술궂은 음성에 세 친구가 혀를 찼다.

“어때? 멋지지? 우리 서희가 그린 식물학 그림, 도감에도 실렸다? 봐. 얼마나 세밀하면서도 예술적인지.”

“뭐야, 네가 그렸어? 왜 네가 잘난 척인데?”

“서희 그림 들어간 식물도감, 내 방 책장에 한 서른 권 있는데 너네한테도 선물로 줄게. 그렇다고 서희한테 사인 받을 생각은 하지 말고.”

“서, 서른 권? 도감이?”

“소장용이랑 선물용으로 그 정도는 필요하잖아.”

그는 이상할 것 없다는 듯 툭 내뱉었다.

“난 지금 저놈이 우리 중에서 가장 안 취하고 멀쩡한 상태라는 게 제일 신기해.”

“내 말이. 술 한 모금도 안 마셨잖아. 말하는 거 보면 주정뱅이랑 가장 가까워 보이는데.”

“지금 나더러 주정뱅이라고 했냐?”

“뭐, 틀린 말은 아니지. 너 지금 총각들 앉혀 두고 자기 딸 사진 자랑하는 딸 바보 아빠 같아. 술 잔뜩 취한.”

편안하고 유쾌한 분위기의 술자리는 밤늦은 시각까지 이어졌다. 중간중간에 은호가 파투를 내려는 시도를 몇 번인가 했지만 소용없었다.

세 친구는 작정한 듯 서희를 붙잡고 늘어졌다. 무려 10여 년 만에 ‘그 김서희’와 감동스러운 첫 만남을 가졌으니 쉽게 보낼 수 없다는 의지가 넘쳤다. 은호가 앞으로 다시는 그녀를 그들에게 보여 주지 않을 거라는 불길한 짐작을 해서였는지도 모른다.

“이제 제발 좀 헤어지자. 어?”

협박에 가까운 은호의 간절한 부탁 때문이라기보다는 어느새 술에 취한 서희가 꾸벅꾸벅 졸기 시작해서, 어차피 내일 주말이니 동틀 때까지 마셔 대자던 그들도 그제야 슬슬 짐을 챙겼다.

“계산은 내가 할게. 난 서희가 먹은 거 다른 사람이 돈 내는 꼴 못 봐. 기분 나빠서.”

남은 땅콩을 대충 쥐고 털어먹은 찬성이 의자에서 일어나며 오늘 술자리에 대해 짧고 굵은 감상을 표했다.

“마지막까지 지랄 났다.”

친구들과 헤어진 뒤, 은호는 서희의 어깨를 팔로 감싸며 부축했다. 그러자 그녀가 고개를 휘휘 젓더니 그의 품에서 벗어났다.

“서희야?”

그녀는 그의 부름을 무시한 채 길을 걸었다. 똑바로 걷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것 같았지만 가까스로 넘어지지 않는다 싶을 만큼 아슬아슬한 걸음걸이였다.

“나한테 기대. 응? 아니면 내가 업어 줄까?”

“……괜찮아.”

“눈이나 제대로 뜨고 괜찮다고 해. 앞 보면서 걷고 있는 건 맞아? 불안하게.”

아까까지만 해도 또렷했던 서희의 눈이 지금은 몽롱하게 반쯤 감겨 있었다. 주차된 차에 다다를 때까지 그녀는 계속 비틀거렸다. 그러면서도 그의 도움은 절대 받지 않겠다는 태도였다.

은호는 서희의 이상한 고집에 짧은 한숨을 삼켰다. 아무래도 잘하지 못하는 술을 적정 이상으로 마셔서 저러는 것 같았다.

‘역시 중간에 확실히 말릴 걸 그랬나.’

서희는 은호가 주문했던 떡볶이가 나오자 그때부터 맥주를 조금씩 마시기 시작했다. 떡볶이가 꽤 매콤한 편이어서 차가운 맥주로 입가심하는 것도 좋겠지 싶어 편히 놔두었다.

어차피 자신이 옆에 있으니 마음껏 취해도 괜찮다는 생각에 이제 슬슬 그만 마시라고 말리는 것도 좀 소홀히 했다. 그러자 어느샌가 그녀는 눈꺼풀이 깜빡깜빡 내려갈 정도로 취해 있었다.

술에 취해도 크게 흐트러지지 않고 겉으로 잘 티가 나지 않는 서희였다. 그러나 예고도 없이 어느 순간 취기가 확 오르면 그녀는 대화 불가능 상태가 된다. 서희의 술버릇은 보는 사람이 다 안타깝고 안쓰러울 만큼 졸음과 사투를 벌이는 것이었다.

취한 서희를 태우고 그녀의 집에 도착한 은호는 대문 옆에 차를 댔다. 열쇠를 꺼내 잠긴 대문을 열고, 오는 동안 이미 비몽사몽 상태가 된 서희의 몸을 감싸 안은 채 아담한 마당을 가로질렀다. 현관문의 도어록 비밀번호를 누른 뒤 두 사람은 집 안으로 들어섰다.

“목마르지?”

그녀를 방 침대에 조심스럽게 눕힌 은호가 귀에 작게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얼른 물 갖다 줄게.”

“……은호야.”

잠들기 직전의 상태 같았던 서희가 불현듯 그를 불러 세웠다. 방을 나서려던 그가 다시 뒤를 돌아 그녀를 응시했다.

“응? 서희야, 왜? 뭐 필요한 거 있어?”

“나…… 너무 힘들어.”

축 늘어진 서희의 음성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는 침대 옆에 무릎을 꿇고 그녀와 눈높이를 맞췄다.

“무슨 일 있어? 다 말해 봐. 무슨 일인데. 내가 다 해결해 줄게. 어?”

요즘 들어 서희가 조금 이상한 것 같다고 생각했었는데 역시 착각이 아니었나 보다. 분위기를 보니 뭔가 큰 고민이 생긴 게 분명했다. 은호는 더 빨리 그녀의 상태를 알아차리고 살피지 못한 자신에게 속으로 험한 욕설을 던졌다.

“은호야. 부탁이야.”

“응. 뭔데. 뭐든 말해. 네 부탁이라면 나 뭐든…….”

“이제 여기 오지 마.”

걱정으로 떨리고 있던 눈동자가 한순간에 굳어졌다.

뭐?

“김서희. 너 방금 뭐라고…….”

“이제 정말, 그만하고 싶어.”

그녀는 눈을 감은 채 작게 흐느끼고 있었다.

“……너랑 이렇게 계속 친구 하기 싫어.”

왜. 대체 왜.

은호는 믿어지지 않는다는 얼굴로 그 자리에서 돌처럼 미동도 하지 않았다. 머리를 내리치는 충격에 숨을 내뱉는 것조차 잊었다.

내가 그동안…… 뭐든 했잖아. 네 마음에 들려고. 너랑 오랫동안, 영원히 친구 하려고 계속 노력했는데. 대체 왜, 14년 전처럼 다시는 이 집에 오지 말라는 말을 하는 건데. 내가 널 특별하게 여기는 것보다 네가 날 훨씬 더 특별하게 여기고 있다고 굳게 믿었던 어리석고 건방진 그 꼬마 시절처럼 마음에도 없는 나쁜 말도 안 하고, 필요 없는 고집도 안 부리고, 유치하게 이기려고 들지도 않았는데.

“은호야, 나 이제…… 너 안 보고 싶어.”

화를 낼 수조차 없을 만큼 그토록 힘들고 고통스러운 목소리로 겨우 토해 낸 말을, 난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데.

네가 원하는 건 뭐든 들어줘도 그것만은 죽어도 안 되는데.

“싫어.”

관자놀이를 타고 가늘게 흘러내린 눈물과 함께 이미 잠든 서희를 붉게 충혈된 눈으로 노려보며 짓씹듯 내뱉었다.

“……절대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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