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떠보니 조선군관-10화
본문
10화 잔인하지만 해야 할 일
북병사가 돌아가고 꽤 시일이 지났지만, 조정에서는 별다른 소식이 들려오지 않고 있었다.
한동훈의 공을 치하한다는 말도, 구출한 조선인에 대한 처분도 내려오지 않았기에 다들 기다릴 뿐이었다.
노예로 끌려갔다 구출된 조선인들은 임시 거처에 계속 머무르고 있었다.
불편한 것투성이였고, 다시 착취를 당할 것 같아 불안해하는 조선인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여진인들이 시켰던 혹독한 노동은 없어 대부분 만족해했다.
문제는 포로로 끌고 온 여진인들의 처리였다.
초피 가죽과 같은 물품들은 인간관계에 ‘기름칠’ 하는 데 쓰거나, 상인들에게 팔아 버리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포로를 처리하는 것은 무척이나 애매했다.
‘기름칠’ 하는 데 선물로 줬다가 도망가거나, 주인을 공격하기라도 하면 선물하지 않느니만 못했다.
결국, 어떻게서든 포로를 처리하기로 한 한동훈이 최석과 함께 분류 작업을 하기 시작했다.
마을에서 끌고 온 여진인 포로들은 성인 남자 23명, 성인 여자 79명, 아이가 53명이었다.
포로들 간의 관계도부터 그려야 했기 때문에 분류 작업은 무척 고되었다.
며칠째 잠을 못 잔 최석이 한동훈을 보며 호소했다.
“나리, 포로들이 너무 많습니다.”
“나도 안다.”
최석과 함께 분류 작업을 하던 한동훈도 잠을 제대로 못 잔 지 오래였다.
최석처럼 눈이 뻘겠다.
일단 남편이 살아 있는 여자 포로들을 뽑아 봤다.
일부다처제 문화 때문인지 남자의 숫자보다 여자의 숫자가 더 많았다.
남자는 23명인데, 여자는 41명이 가려진다. 1:N이 가능한 세상에서 누구는 평생 모태솔로로 살고 있고, 참 더러운 세상이었다.
그들을 제하고 나니 성인 여자 38명, 아이 27명이 남았는데 남편이 없는 여자들 숫자가 꽤 되었다.
한동훈과 싸움에서 남편을 잃은 것인지, 아니면 그 전에 싸움과 질병으로 잃은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멀쩡한 사람도 질병에 죽을 수 있고, 적의 습격에 한순간에 몰살당할 수 있는 잔인한 시대였다.
아직 현대 한국인의 감성이 남아 있는 한동훈이 포로를 구분하면서, 아이와 어미를 생이별시키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오랜 시간 끝에 분류 작업이 끝나자, 한동훈이 선물을 줄 사람들을 목록에 적기 시작한다.
판관과 부사, 각 진의 참사들부터 행영에 있는 고위 무관들의 이름을 적은 후 포로들을 하나, 둘 보내기 시작했다.
아이가 있는 포로들을 먼저 보냈는데, 아이 때문에라도 주인을 공격하는 무모한 짓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계산이 앞서서였다.
도망갈 때도 아이의 느린 발걸음이 큰 방해가 될 터였다.
분류한 포로들은 곧장 선물로 보내지고, 이제 가정이 있는 포로들만 남자 한동훈이 개똥이를 불렀다.
“개똥아!”
“네, 나리!”
“여진인들을 데리고 오너라!”
한동훈의 말을 들은 개똥이가 부리나케 뛰어갔다.
이제는 소금을 다시는 캐지 않는 여진인 삼인방을 부르러 간 것이었다.
얼마 후 한동훈의 부름에 쿠타이를 비롯한 여진인 삼인방이 열심히 뛰어왔다.
아직 소금 광산의 추억이 몸에 남아 있는지 긴장한 모습이었다.
한동훈이 담뱃대를 입에 문 채로 여진인 삼인방에게 말했다.
“남아 있는 다른 여진인들 관리를 맡아 볼 생각이 있나? 각자 2개 조를 꾸려서 말이야. 어때? 23명이 남아 있는데 4명씩 6개 조로 나눠서 맡는 거야.”
개똥이의 통역에 여진인들이 알아들었다는 표정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조에서 조장을 뽑는다. 너희들은 조장을 두 명 거느리는 반장이 되는 거다.”
“….”
“혹시 조원이 가족이랑 같이 도망가면, 조장과 남은 조원을 전부 죽인다. 가족까지 전부 다.”
한동훈의 말에 최석이 궁금한 듯 물었다.
“그럼 조장이 도망가면 어떻게 해요?”
“응? 남은 조원들을 전부 죽여야겠지.”
잔인한 말이었지만 결국 서로를 감시하라는 것이었다.
포로들을 통제할 방법이 없으니 어쩔 수 없었다.
다 죽여 버리는 것보다는 그래도 인간적이라고 한동훈은 여기고 있었다.
“그러다 저들이 합심해서 우리를 공격해 오면 어떻게 합니까?”
최석이 약간 질린 표정으로 물어보자, 한동훈이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그럴 경우를 대비해서 안전장치를 하나 더 해 둬야겠지. 아이들을 모아서 공동육아 형태로 바꾼다. 인질 아닌 인질로 삼아 버리는 거지.”
아이까지 인질로 삼아 이중 삼중으로 여진인 포로들을 꼼짝달싹 못 하게 만들려는 계획이었다.
통역이 제대로 되어 잘 전달된 건지 모르겠지만 쿠타이를 비롯한 여진인들은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여진인 포로들을 처리한 한동훈이 약탈한 물품들을 배분하기 시작했다.
싸움에 참여한 모든 이들에게 골고루 포상이 돌아갔다.
쿠타이를 비롯한 여진인 삼인방에게도 공평하게 재물을 나눠 줬다.
약탈한 물품도 많았지만 정말 쉽지 않은 싸움을 함께한 이들이었다.
성과에 따라서 재물을 나눈다. 인간의 본성을 이용하기 위해 한동훈이 세운 원칙이었다.
‘성과주의’를 널리 퍼트리기 위해 오히려 넉넉히 재물을 나눠 주었지만, 말 14필이 한동훈 수중에 남게 되었다.
암말 8마리와 수말 6마리가 남았는데 생각해 보니 꽤 큰 자산이 될 것 같았다.
여진인들은 보통 암말은 팔지 않고, 수말을 시장에 내놓았는데, 이번에 마을을 털며 암말까지 전부 끌고 왔기에 목장을 만들어 볼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 * *
어느 순간부터 회령에 이상한 소문과 함께 새로운 단어가 사람들 사이에서 입에 오르락내리락하기 시작했다.
그건 바로 ‘성과주의’라는 신조어였다.
처음에는 기생집과 술집에서 퍼지더니, 장터를 거쳐 일반 백성들까지 입에 올리고 있었다.
“자네 성과주의라는 말을 들어 봤는가?”
“응? 그게 무슨 말인가?”
읍성의 한 주막에서 막걸리를 마시던 사내들이 한참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정확히 무슨 소리인지 사실 나도 잘 모르네. 그냥 저 울주에서 온 권관 나리가 있지 않은가?”
“아! 이번에 조선인들을 구해 온 나리가 아닌가?”
“그래! 그 나리 밑에 몸종인 최석이라는 사내놈이 있다네. 근데 글쎄-”
말하다 말고 탁주를 한 사발 들이켠 사내가 말을 이어 갔다.
“글쎄 그놈이 얼마 전에 면천이 돼서 막 양인 신분이 되었다 하지 뭔가? 근데 아직도 그 권관 나리 옆에서 간 쓸개 다 내줄 듯 그리 굽실거린다는 거야. 그리고 저녁만 되면 술집에서 돈을 아주 펑펑 쓰는 것이 아닌가?”
“얼마 전에 면천 된 노비가 돈이 어딨어서 그리 쓰고 다니는 건가?”
술기운에 얼굴이 붉어진 사내가 의아한 듯 되물었다.
“글쎄, 자기 입으로 자꾸 성과주의 프로파간다라고 하는데 도통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
“뭐? 프로파간다?”
“그래. 그건 무슨 말인지 모르겠으니 그냥 넘어가세나. 그치 말로는 싸움만 잘하면 자기처럼 돈을 벌 수 있다는 걸세. 여진인 마을을 털고 초피를 받았다고 아주 자랑하고 다니는 게 아닌가?”
“초피? 그 값비싼 초피를 그놈이 뭐 얼마나 갖고 있다고 그러는가?”
“자기는 속곳도 초피라고 자랑한다 들었네. 까칠한 담비 털에 할퀴지는 않나 모르겠지만 말일세!”
사내의 농에 왁자지껄 떠들고 웃었지만, 최석의 이야기를 입에 담는 사람들 마음에, 욕심이 점점 차오르고 있었다.
싸움만 잘해도 부자가 될 수 있다는 이야기.
여진인 마을을 약탈하고 공평하게 재물을 나눠 갖는다는 꿈만 같은 이야기가 떠돌기 시작했다.
“그건 그렇고, 자네 그 이야기 들었는가? 읍성 외곽에 가면 권관 나리 댁에 여진인들이 매일 땅을 파고 있다네.”
“매일 땅을 판다고? 거기는 농사짓기도 힘든 곳이 아닌가?”
“농사를 지으려는 게 아닌 모양이야. 그냥 맨땅을 계속 파기만 한다는 거지. 누가 빨리 파는지 시합하려고 조를 나눠서 경쟁을 시킨다는 말도 있네!”
“경쟁? 땅을 늦게 파면 어찌 되는 건가?”
“땅파기 시합에서 지면 그날 저녁은 거른다고 들었네.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땅을 파다 소금이라도 나올지 누가 알겠나?”
* * *
최석이 읍내를 휩쓸고 다닐 동안 한동훈은 소금을 캐고 있는 여진인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때, 멀리서 풍산보 사건을 고변했던 아이가 한동훈에게 뛰어왔다.
“나리!”
“무슨 일이냐?”
“혹시 다른 부족에게 팔려 간 이들도 구해 올 수는 없을까요? 아직 앞집이랑 옆집 가족들은 돌아오지 못하고 있어서요.”
아이가 또랑또랑한 표정으로 한동훈을 보며 말했다.
“나도 그러고 싶구나. 하지만 쉬운 일이 아니다.”
“왜요?”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을 짓는 아이를 보며 한동훈이 싱긋 웃었다.
“네가 정녕 몰라서 묻는 거냐?”
똘똘한 아이였다. 조선인을 구출해 온다는 것의 어려움을 모를 리가 없었다.
“태일아.”
아이의 이름은 태일이었다.
“네 나리”
“여진인들은 포로를 혈전(血戰, 생사를 가리지 않는 전투)의 대가로 생각한다. 저기 저 말이 보이느냐? 저 말처럼 하나의 재산으로 여긴다고 보면 된다.”
여진인한테 노예는 인간이 아니었다. 목숨을 건 싸움의 산물이자, 집안의 큰 재산이었다.
노예가 있어야 싸움을 할 때 뒤를 맡길 수 있고, 우마(牛馬) 대신 농사를 짓는 데 투입할 수 있었다. (주1)
“앞집 아저씨는 전투에 져서 끌려간 게 아닌데요?”
“그렇긴 하지.”
“그냥 이번처럼 여진인 마을도 털고, 조선인도 구해 오면 안 되는 건가요? 지난번에 털었던 마을 정도만 돼도 꽤 큰돈이 될 것 같은데요?”
아이의 말에 한동훈의 마음이 점차 흔들렸다.
* * *
아이에게 설득당한 것은 아니었다. 한동훈이 여진인 반장들과 조장들을 불러 지도를 그리게 했다.
노예들로 끌고 온 마을 사람들은 농사보다는 무역을 주로 했기에, 주변 마을 상황을 뻔히 알고 있어 유리했다.
한참을 닦달하자, 조잡한 지도가 나왔다.
회령 북쪽의 만주 지역을 그려 놓은 지도였다.
수많은 마을 중 공격할 만한 곳을 분류해 내야 했다.
한동훈이 고심하다가 일행들을 보며 말했다.
“이곳 마을 중에 팔기와 연관된 마을을 다 제외해야 한다. 마을을 치다 저들 산하의 마을을 만나면 괜한 곤욕을 치를 게 분명하다. 문제 생길 만한 마을은 다 제외해라.”
이미 팔기에 밀려 변방으로 강제 이주했던 무서움을 알기에 저마다 고개를 끄덕인다.
* * *
부인과 아이, 다른 여진인들을 위해서라도 탈주는 엄두도 못 꿀 일이었다.
송진일과 오세운이 여진인 반장들과 함께 마을을 염탐하고 있었다.
“너무 많은데?”
“그러게요.”
처음 공격했던 마을보다 훨씬 큰 마을이었다. 정찰을 마치고 돌아온 이들이 한동훈에게 보고하기 시작했다.
“형님, 규모가 장난 아닙니다. 눈으로 보이는 가호 수만 100가구가 넘습니다. 싸울 수 있는 남성들이 못해도 100명이 있다는 소리인데 어떻게 할까요?”
“그래? 일단 판관께 한번 가 보자꾸나. 약탈을 떠나기 전에 허락을 얻어야겠다. 조선인도 구출하는 일이니 한번 잘 말씀드려 보자꾸나.”
* * *
한동훈이 눈을 뜬 시기는 1,629년인 기사년이었다.
누르하치가 죽은 지 3년이 되는 해로, 후금의 새로운 한은 홍타이지가 이어받은 상태였다.
누르하치의 건주여진(建洲女眞)이 여진족을 통일해 후금이라는 나라를 만들었지만, 만주 여기저기에는 복속되지 않고 독립적으로 살아가는 여진인 마을과 부족들이 아직 많이 남아 있었다.
실제 역사대로라면 새롭게 후계자가 된 홍타이지는 앞으로도 10년 이상 ‘인간사냥’을 자행하며, 복속되지 않은 여진인 마을들을 약탈하고 노예로 삼아 심양으로 끌고 갈 터였다.
아직 구하지 못한 조선인을 구출해 오겠다는 한동훈 때문에 판관이 우려를 표하고 있었다.
“아니 될 말일세. 그렇게 큰 마을을 공격하다 자칫 문제가 커질 수도 있네! 자네들이 죽거나 다칠 위험이 너무 크네!”
판관의 말에 한동훈이 간곡한 어조로 설득하기 시작했다.
“나리, 이대로라면 팔려 갔거나 끌려간 조선인들은 되돌아오기 힘듭니다. 풍산보에도 아직 돌아오지 못한 백성들이 있지 않습니까? 누군가는 구해 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 * *
(주1) 병자호란 시기 조선인 포로 문제에 대한 재론. 역사비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