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떠보니 조선군관-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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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혼자 먹으면 탈 나는 법이다
한동안 물품 물목이 적혀 있는 종이를 손에 쥐고 있던 부사가 뒤처리를 지시하고 돌아온 판관에게 조용히 건넸다.
물목을 한참 살펴보던 판관이, 곧 입을 벌린 채 한동훈을 쳐다보며 말했다.
“포로를 끌고 왔을 때 소와 말을 봤지만, 이 물품들은 대체 다 뭔가? 뭘 이렇게나 많이 가져온 건가?”
판관의 반응도 부사와 비슷했다. 마을 하나를 털어 온 만큼 약탈해 온 물량이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판관이 놀라움을 금치 못할 때, 부사가 한동훈에게 말했다.
“이제 자네 생각을 말해 보게. 수량을 일부 적어 두지 않은 것들이 보이는군.”
“말씀드린 대로 구출한 조선인들에게 적당히 생필품과 먹거리를 챙겨 줬습니다만, 영감께서 추가로 더 나눠 주시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허허. 자네.”
“저들이 영감의 은혜에 감읍할 겁니다.”
생색낼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 주자 부사가 흡족한 듯 수염을 만지며 웃었다.
“알겠네.”
“그리고 저들이 정착할 곳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임시 거처에 계속 머물게 할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자네 말이 맞네. 저들의 거처 문제도 조정에 보고하도록 하겠네. 아, 아예 저들을 풍산보에 머물게 하는 건 어떻겠나?”
“영감, 풍산보는 거주지와 밭이 너무 멉니다. 산길을 타고 한참을 걸어야 밭농사를 지을 수 있어, 저들이 선호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한번 험한 꼴을 당했던 이들이라 불안해할 것 같습니다.”
부사의 말에 판관이 조심스럽게 의견을 개진했다.
“그럼 어쩌면 좋겠는가?”
“도호부가 있는 읍성도 그렇고 수용할 공간이 마땅치 않다면, 무산으로 보내는 건 어떨지요? 이곳으로 오면서 들렀는데 대지가 넓어 저들을 수용하기에 충분할 것 같습니다.”
광산과 대장간에 사람을 추가로 투입하려는 마음에 한동훈이 무산을 추천해 본다.
“무산?”
“예, 이곳과도 가깝고 땅이 기름지다 들었습니다.”
한동훈의 말에 부사와 판관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산으로 저들을 이주시키는 것도 조정에 아뢰겠네. 그건 그렇고 이제 가장 값이 나가는 초피 이야기부터 함세. 수량은 역시 일부러 비워 둔 거겠군.”
부사가 비어 있는 수량 칸을 보며 말했다.
“영감, 한양에서 초피(貂皮, 담비 가죽)가 유행한 지 오래입니다.”
“그래. 요새는 모자부터 덮개까지 전부 초피로 치장해야 대접받는다지? 세태가 어찌 변하는 건지-. 이거 원.”
부사가 쓰게 웃으며 말했다.
한양은 모자뿐 아니라 갑주와 관복에 초피를 두르고, 방석까지 초피로 만드는 것이 유행하고 있었다.
“수량은 영감께서 장계에 적절히 기재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적절히?”
“예, 영감.”
“자네 그 말은 내게 일임한단 말 아닌가? 자네 아비와 인연이 있지만, 내가 입을 싹 씻으면 어쩌려고 그러는 건가?”
부사가 웃으며 말하자, 한동훈이 담담한 표정으로 답했다.
“세상사가 어찌 공자님 말씀처럼만 돌아가겠습니까? 부디 큰일을 하는 데 쓰시옵소서.”
* * *
잠시 후, 한동훈 일행의 공적과 말 그대로 적정 수량이 적힌 장계가 조정으로 향했다.
전령뿐 아니라 회령도호부 인근에 있는 각 진과 북병영에도 사람이 보내졌다.
행영에 머무르는 북병사에게 따로 노획한 말과 가죽을 상납하고, 주변 진에도 나눠 주려는 것이었다.
판관뿐 아니라 회령 관내에 있는 보을하진 첨사에게도 일정 수량이 분배되며 곳곳에 기름칠을 칠하고 있었다.
* * *
집무실을 나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송진일이 한동훈에게 물었다.
“형님, 근데 아깝지 않습니까?”
“뭐가?”
“겨우 10장이라니요? 우리가 가져온 가죽만 49장이었는데요. 우리 몫이 너무 작지 않습니까?”
아쉬운 소리를 하는 송진일을 보며 한동훈이 답했다.
“응? 누가 10장이라고 하더냐?”
한동훈의 말에 송진일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혹시 형님! 빼돌린 건-”
“쉿-! 자세한 건 알 것 없다. 그리고 원래 이런 건 혼자 먹으면 탈이 나는 법이다.”
애초에 한동훈이 적어 간 물목에는 몇 장의 초피가 빠져 있었다. 그게 몇 장인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 * *
한 달 후.
조정은 한창 회령에서 온 장계로 시끄러웠다.
“또 그자인가? 한동훈이라 했느냐?”
“예, 전하. 종 9품 권관으로 아비가 훈련원부정을 역임하고 퇴임한 한주원의 장남입니다.”
“이 장계가 맞는지 확인했느냐? 믿기 어려운 내용이 적혀 있지 않느냐! 군관 8명이 여진인 수급을 38개나 거두고, 구출한 조선인만 40명이다. 5명이 죽었다고는 하나, 엄청난 공이다. 사실 여부를 확인했느냔 말이다.”
후일 인조라고 불리는 이종이 신료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이괄의 난 이후 아무도 믿지 못하게 된 그는 최근 기찰(譏察, 군에 대한 감시)을 강화한 상태였다.
은밀히 사람을 보내 군관들의 행적을 살피고 조사하기 일쑤였다.
반란에 대비한다는 이유로 훈련할 때마다 이중 삼중으로 감시를 붙였다.
이괄의 난에 와해한 서북면의 방비 태세가 복구되지 못한 것도 사실 이종 때문일지 몰랐다.
잦은 기찰 때문에 군관들이 훈련 자체를 피하고 있었다.
한동훈에게 다행인 건 그가 함경도에 있었다는 것이다.
서북면과 달리 함경도는 한양에서 너무 멀고, 도로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아 한번 오갈 때마다 여러 날이 소요됐다.
더욱이 후금 주력이 심양으로 대거 이동한 후에는 조정의 주요 관심 지역도 아니었다.
“행영에 나가 있는 북병사도 같은 내용의 장계를 보고해 왔습니다.”
평소 경성에 주둔하던 북병사는 두만강이 얼어 도강이 빈번한 겨울에는 행영에 머물고 있었다. 혹시 모를 위급 사항을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주1)
“북병사에 파견한 점군어사도 장계를 올렸느냐?”
“전하, 같은 내용의 장계가 올라왔습니다.”
사실 여부를 재차 확인하고서야 이종이 만족스러운 표정을 드러냈다.
“그럼 믿을 만하겠구나. 한동훈이라는 자의 용맹이 대단하지 않은가! 이자에게 상을 내리고 싶구나!”
이종의 말에 가만히 듣고만 있던 신료들이 하나둘 말하기 시작했다.
“전하, 권관 한동훈을 엄히 처벌하소서. 이자의 무모함 때문에 다시 전쟁이 날 수도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조선인을 납치해 간 자들을 후금이 두려워 가만히 뒀어야 한단 말입니까?”
“그자가 공적을 탐하는 마음에 사고를 친 게 아니요? 우리 백성들이 끌려갔다면 저들에게 돌려달라고 말하면 될 터-. 어찌 모든 일을 힘으로만 처리하려 한단 말이오? 그러다 정묘년의 난이 다시 일어날 수도 있는 일이요!”
“이런 겁쟁이 같으니! 말이 안 통하는 오랑캐들에게 대화로 접근하자는 것이 가당키나 한 소리요?”
“뭐요? 나보고 지금 겁쟁이라고 했소?”
주전파와 주화파의 싸움으로 다시 조정이 시끄러워지고 있었다.
* * *
회령도호부의 모든 이들이 전부 바삐 움직이고 있다.
북병사가 행영에서 각 진을 순시한다는 이야기가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군관들의 지휘 아래 군졸들이 저마다 진을 보강하고 있었다.
자칫하다가 지적을 받으면 군 생활이 더 힘들어질 수도 있었다.
북병사 행차에 앞서 배행하는 선대마병별 장은 이미 다녀간 후라 이곳도 순시하는 것이 거의 확실시 되는 분위기였다.
일행은 저마다 다른 일을 하고 있었다.
한동훈은 벌목 및 목책 보강 책임자가 돼서 움직였다.
송진일은 참호 수리 감독관, 오세운은 풀베기 군사 인솔책임자를 맡았다.
군관이랍시고 다들 멀뚱히 감독만 하는 건 아니었다.
군졸들과 같이 나무를 나르고, 목책을 직접 교체하고 있었다.
“여기를 보강하게. 이 목책은 지금 썩은 것 같은데? 빨리 교체하게! 아니 그 나무는 색깔이 너무 튀지 않나!”
종 7품의 부여과(副勵果)가 지나가며 한마디 하자 병사들이 소곤거리며 불만을 내뱉었다.
“나무색이 뭐가 중한 겨! 나무 색깔이 같으면 화살을 잘 막는다니?”
“높은 분은 왜 온다 해서 이 고생이냐!”
불만을 내뱉는 병사들과 달리 한동훈은 열심히 땅을 파고 있었다.
목책 높낮이가 달라질까 싶어, 일정한 깊이로 땅을 팠다.
일정한 속도로 기계적으로 삽을 움직일 뿐이었다.
순식간에 파헤쳐지는 땅을 보며 병졸들과 동원된 백성들이 입을 떡 벌리고 쳐다봤다.
한국에서 삽질하던 실력은 전혀 사라지지 않았다.
작업할 때 괜한 불만을 가지면 괜히 본인만 손해인 것을 잘 알기에 무념무상의 경지로 손만 움직일 뿐이었다.
‘뭐, 까라면 까야지.’
* * *
시간이 흘러 북병사가 회령에 도착하자, 부사와 판관, 각 진의 첨사까지 참석한 회의가 열렸다.
도호부 정식관원은 아니었지만, 부방을 수행하는 이들도 참석해 현황 보고를 하고 있을 때였다.
수고했다는 말과 함께 북병사가 주위를 둘러보더니 한동훈 일행을 찾는다.
“충”
두정갑을 입은 채 앞으로 나온 한동훈 일행이 군례를 올리자, 북병사가 이를 드러내며 만족스러운 얼굴을 했다.
“자네들의 활약은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듣고 있다네.”
“송구합니다. 영감.”
“허허, 그래. 자네가 일당백 장사라지? 혼자서 소도 들어 올릴 정도로 힘이 세다 들었네. 자네는 병략에 밝고, 활을 잘 쏜다지?”
북병사가 송진일과 오세운의 칭찬을 하다, 한동윤을 보고 말했다.
“그래, 한 권관 자네는 뭘 잘하는가?”
“…!”
“자네 처신에 감탄한 게 여러 번일세. 근데 결국 본질을 잊지 말아야 할 거야.”
나지막한 목소리로 경고 아닌 경고를 하는 북병사였다.
선물은 다 받아 놓고 무슨 심사가 꼬인 걸까?
직급이 깡패인 군대에서 살아남기 위해, 한동훈이 더 위로 올라가야겠다고 다짐할 때였다.
굳어지는 한동훈을 보던 북병사가 크게 웃더니, 옆에 앉아 있던 부사와 판관도 따라 웃기 시작했다.
“하하하”
“하하”
“자네 위로 올라갈수록 표정 관리도 능력일세.”
“그러게 말입니다. 한 권관이 못 하는 것도 다 있습니다!”
북병사가 농을 건네자 부사도 웃으며 말을 건넸다.
한동훈이 어색하게 웃을 때 북병사가 병졸을 시켜 선물을 갖고 오게 했다.
“자네들의 공을 치하하는 마음에 선물을 준비했네. 마음에 들지 모르겠네만.”
손잡이에 붉은 수실이 달린 검과 각궁이었다.
* * *
북병사 주관으로 읍성에 열리는 회연-.
회령의 무관뿐 아니라 북병사 행차에 따라온 북병영의 무관들도 전부 참석하는 큰 연회였다.
행사가 행사인 만큼 행영부터 회령까지 각진 면에서 달려온 기생들이 저마다 미색을 뽐내고 있었다.
처세에 밝다는 한동훈이 주변을 다니며 인사를 다녀야 할 시기에 혼자서 안동소주를 마시고 있었다.
‘이놈의 조선’
애초에 애월이들이 한가득할 것으로 생각해 기대하지 않은 자리였다. 그래도 이 정도일 줄 몰랐다.
그는 미의 기준이 한국과 다르다는 것을 알고 미리 행사를 준비하는 아전에게 말했다.
“가장 못생긴 기생으로 섭외해야 한다. 골반이 크면 안 된다! 진짜일세!”
회연을 준비하는 이는 난감해했지만, 한동훈 앞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의 옆에는 못생긴 애월이가 옆에서 술잔을 따를 뿐이었다.
조선에서 결혼은 한동훈에게 사치인 것 같았다.
* * *
주1) 조선 후기 함경도 육진 지역의 방어체계. 한국문화
주2) 『赴北日記』를 통해 본 17세기 出身軍官의 赴防生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