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떠보니 조선군관-6화
본문
6화 사라진 주민들, 범인을 찾다 (2)
송진일의 말을 들은 풍산보의 군관이 아이를 험상궂게 쳐다봤다. 마치 잡아먹으려는 듯한 눈빛이었다.
“큼.”
송진일이 헛기침하자 군관이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이 아이는 어려서 부모를 잃고 천애 고아로 지냈소. 지금 한창 관심이 필요한 나이지요. 가끔 이렇게 별것 아닌 일도 과장해서 관심을 끌려 할 때가 있습니다.”
말을 끝낸 군관이 아이 팔을 잡아당기려 하자, 아이가 기겁하며 송진일 뒤로 숨었다.
“싫어요. 저 만지지 마세요.”
“어허, 이놈이! 이리 오래도!”
송진일이 자신 뒤에 숨은 아이 손을 붙잡으며 말했다.
“지금 이 아이가 판관 어르신께 찾아간다는 것을 내가 붙잡아 여기로 데려온 것이요. 풍산보에 근무하는 당신들 생각해서 데리고 왔는데. 큼”
그 말을 끝으로 연신 헛기침을 했다.
처음에는 무슨 뜻인지 몰라 송진일을 멍하니 보던 군관이 알겠다는 듯 크게 웃었다.
“하하. 알겠소. 김가야!”
군관이 큰 소리로 누군가를 부르자, 집 뒤에 숨어 있던 김가라는 이가 달려왔다.
“부르셨습니까?”
“김가야! 초피 몇 장을 가져오너라.”
“알겠습니다!”
김가라는 이가 담비 가죽을 가져오기 기다리며, 송진일이 풍산보를 한번 훑어봤다.
둘러보던 송진일과 눈이 마주친 군관이 어색한 표정으로 히죽 웃었다.
‘이놈 봐라?’
이곳에 온 순간부터 지금까지 위화감이 귀를 간지럽히고 있었다.
함경도 토착 군관과 신출신 군관 사이에는 큰 벽이 있었다.
과거에 급제한 출신 군관들은 토착 군관을 무시했고, 토착 군관들도 거드름만 피우는 출신 군관들을 못마땅해했다.
그런데 풍산보는 참 이상했다.
자격지심, 부러움, 적개심 따위는 느낄 수 없었다.
큰 비밀이라도 있는 것처럼 외지인에 대한 경계심만 보였다.
잠시 후, 검은담비 가죽은 아니지만, 꽤 품질 좋은 초피 가죽을 들고 김가가 뛰어왔다.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한 보람이라도 있어야 하지 않겠소? 안 그래도 바쁘신 판관 나리를 이 아이 때문에 힘들게 해 드릴 수는 없으니 앞으로 우리가 이 아이를 잘 단속하겠소. 뭐, 주민들이 두만강을 넘어 월경하는 것이 한두 번도 아니고 우리도 열심히 지키고 있지만 다 막을 수는 없으니 이해해 주쇼.”
군관이 초피를 송진일에게 건네며 넉살 좋게 웃자, 송진일이 덩달아 웃으며 답했다.
“알겠소. 그래도 이렇게 사람이 계속 없어지는 건 본관은 이해되지 않소. 마치 누가 데려간 것 같지 않소?”
“그럴 리가요. 몇몇 가족이 밤중에 야반도주한 것은 사실이지만, 저 아이가 말하는 그런 것은 없소이다.”
군관의 강한 부인에 송진일이 한발 뒤로 물러났다.
“알겠소. 이 가죽들은 판관 나리께 말씀드리는 데 잘 쓰겠소. 어서 이 아이를 데려가시오.”
송진일의 말에 군관이 잽싸게 아이의 팔을 잡아끌었다.
군관에게 질질 끌려가는 아이는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며 외쳤다.
“싫습니다! 나리! 도와주세요! 어찌 저를 이렇게 팔아넘길 수가!”
* * *
그날 저녁.
송진일과 대화를 한 군관 외에도 4명의 인원이 심각한 표정으로 논의를 하고 있었다.
“도호부로 돌아간 게 확실한가?”
“김가를 보내 확인했소. 초피를 들고 희희낙락하며 도호부로 들어가는 걸 봤다 합디다.”
오랜 시간 함께해 서로 막역한 사이였는지, 말에 거침이 없었다.
“그 아이는 어떻게 했지? 건방진 꼬마 놈이 기어오르다 못해 기어이 사고를 치는군!”
“순이네와 같이 아이도 넘기려고 묶어 뒀습니다. 아, 여진족에게는 미리 연락해 두었습니다.”
“그러게 미리 그 자식을 팔아넘기자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 녀석 눈빛이 맘에 안 든 지 오래요. 1년 전부터 계속 들쑤시는 바람에 아주 피곤했습니다.”
이야기를 나누는 군관들의 말에는 죄책감이 보이지 않았다.
그냥 귀찮은 벌레한테 물렸다는 듯 대수롭지 않게 말하고 있었다.
“그래도 그자가 그냥 돌아가 다행히요. 약간 이상하다는 생각은 한 것 같지만 말이요.”
“사실 판관한테 고한다고 한들 우리를 어쩌겠습니까? 증거도 없지 않습니까? 어서 출발하시지요.”
잠시 후 대화를 끝낸 사내들이 조용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그날따라 달도 보이지 않은 칠흑같이 어두운 밤이었다.
말의 입은 천으로 가리고, 말발굽에도 헝겊을 두른 채 검은 옷을 입은 군관들이 조심스럽게 북으로 올라갔다.
강변 숲을 따라 한참 북상하는 이들 뒤로 조용히 뒤따르는 이들이 있었다.
회령이 보이지 않는 곳까지 올라왔을 때 갑자기 숲속 어디선가 휘파람 소리가 들려온다.
쉬이익-.
휘파람 소리에 응대라도 하듯 검은 복면의 사내들도 뿔피리를 불었다.
서로 간에 암호가 있었던 걸까?
신호를 보낸 지 한참 후에 수풀이 흔들리더니 일단의 여진인들이 나와 사내들에게 물었다.
“오늘 왜 부른 거지? 약속한 날이 아니지 않나?”
통역을 대동한 여진인의 말에 토착 군관 중 한 명이 대답했다.
“이런 날도 있고, 저런 날도 있는 것 아니요? 며칠 전 넘겼던 놈의 부인과 아이들이요.”
말을 마친 사내가 짐들을 내리기 시작했다.
자루가 꿈틀거리는 것을 보면 다들 아직 살아 있는 것으로 보였다.
여진인들이 먼저 사람이 들어 있는 자루를 말에 싣기 시작하고, 생필품이 들어 있는 자루는 물건을 하나하나 확인하기 시작했다.
* * *
숨어서 이들 거래를 몰래 지켜보던 한동훈이 아이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이미 1년이나 지난 일이다. 네 말대로 풍산보 무관들이 의심된다 하더라도, 그들을 어설프게 덮치면 오히려 역으로 당할 수도 있다.”
“….”
“그러니 너의 역할이 중요하다. 해 보겠느냐? 우린 풍산보에 가면 너를 고변자라고 말하고, 저들에게 너를 넘길 거다.”
“네, 나리. 할 수 있습니다. 근데-”
“근데?”
아이가 망설이며 대답했다. 어려 보이지만 영리한 아이였다. 무언가 바라는 게 있을 터였다.
“순이도 꼭 살려 주셔야 해요!”
의외의 말에 한동훈이 웃으며 답한다.
“약속하마. 근데 너는 나를 어찌 믿고 이러는 거냐?”
“저 아저씨 안 믿어요.”
“응? 왜 안 믿어?”
“아저씨를 믿는 것이 아니에요. 아저씨 첫 임무를 믿는 거예요. 첫 임무라면서요? 판관 나리께서 주신 첫 임무를 일부러 망치려 드는 사람이 있을까요?”
한동훈이 머리를 한 대 맞은 표정을 지었다.
아직 어린이고, 체구가 왜소하지만 크게 될 아이였다.
* * *
거래가 끝나고 여진인들이 북쪽으로 떠나자 한동훈이 여진인들을 불렀다.
“지원자를 받겠다. 세 명 중에 한 명을 추격자로 뽑는다. 노예상을 추적하는 일이다.”
개똥이가 여진인들에게 상황을 설명하자 세 명 다 손을 들었다.
서로를 쳐다보던 여진인들이 소리 없이 웃더니 한참을 손짓과 발짓으로 이야기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서로 합의가 된 건지 쿠타이라는 여진인이 한동훈 앞에 섰다.
“저들 본거지를 찾아 무조건 돌아와야 한다. 3일 내 돌아오지 않으면, 나머지 두 명은 평생 소금 광산에 가둔다고 전해라.”
한동훈이 여진인들을 데리고 온 이유는 만주 지역을 잘 모르기 때문이었다.
지형도 모르고, 설사 몰래 뒤따르더라도 조선인이기에 들킬 위험이 더 컸다.
쿠타이가 바로 출발하지 않고, 한동훈을 바라보며 손짓, 발짓을 했다.
무슨 인사를 이렇게 길게 하나 싶은 한동훈과 달리 여진인은 속으로 외치고 있었다.
‘나는 당신이 미친 것을 안다. 우리 친구들을 위해서라도 무조건 저들의 근거지를 찾고 돌아올 거다. 그러니 제발 소금 이야기는 그만해라.’
무슨 이야기인지 알 수 없는 한동훈이 대충 고개를 끄덕이자, 쿠타이가 인질로 남게 된 여진인들을 찾아 눈빛 교환을 했다.
* * *
순이네와 귀찮은 아이도 팔아넘긴 군관들이 희희낙락하며 돌아갈 때였다.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선두에선 군관이 손을 들자, 일제히 칼을 빼 들었다.
“누구냐?”
잠시 후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일단의 무리가 수풀 밖으로 걸어 나왔다.
“너는?”
뜻밖의 인물이 수풀에서 나온 것이다. 도호부로 돌아간 줄 알았던 송진일이었다.
복면 사내는 적반하장으로 화를 냈다.
“초피를 받아 처먹고! 뒤통수를 쳐?”
낮에 준 초피가 아까운지 괴성을 지르는 군관에게 한동훈 일행이 검을 든 채 달려들었다.
* * *
칼을 맞대고 있던 토착 군관들은 자신들이 밀리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저들을 우습게 본 것도 사실이었다.
삼남 지방에서 온 샌님 아니었던가?
무과에 갓 급제한 샌님들 상대로 함경도의 닳고 닳은 자신들이 밀릴 거로 생각하지 못했다.
숫자도 우위에 있었다. 상대는 겨우 세 명이었다.
달려드는 한동훈을 처리하기 위해 두 명이 달라붙었다.
빨리 처리하고, 다른 이들에게 합류할 생각이었지만, 칼을 맞대자마자 그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만만치 않은 자다.’
산을 헤매며 일행들과 꾸준히 대련했던 한동훈이었다.
산속 대련처럼 주변 지형지물을 이용해 수적 열세를 만회했다.
불리할 것 같으면 발로 모래를 차거나, 왼손에 움켜쥔 모래를 상대 눈에 뿌렸다.
돌멩이를 칼로 쳐서 날리고, 땅에 엉킨 돌부리를 이용하기도 했다.
양반들이 익히는 본국검법도 아니고, 실전에서 단련된 아주 더러운 검술을 선보이고 있었다.
* * *
잠시 후.
풍산보 군관들은 지금 제정신이 아니었다.
만만히 보던 이들에게 말 그대로 박살이 났다.
송진일과 오세운은 그간 한동훈의 더러운 검술에 익숙해져 쉽게 상대를 제압할 수 있었다.
멍하니 앉아 있는 이들에게 한동훈이 준비했던 삽을 건넸다.
그들을 중심으로 크게 사각형을 그린 한동훈이 칼을 빼 들며 말했다.
“이 모양대로 땅을 파라!”
군관들은 한동훈의 강요에 땅을 파기 시작했는데, 점점 그들이 서 있는 지반 자체가 사각형 모양으로 낮아지기 시작했다.
한참 땅을 파는 것을 지켜보던 여진인이 중얼거렸다.
“지금 뭐라고 한 거냐?”
“조금만 더 파면 소금이 나올 것 같다고 합니다.”
* * *
군관들이 어깨보다 지반이 높아졌을 때부터, 파내는 속도가 현저히 느려졌다.
삽질할 때마다 ‘혹시’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것이다.
자신들의 판 구덩이에 그대로 생매장당할까 봐 두려워하는 눈치였다.
한동훈은 삽을 든 채 그대로 구멍 안으로 뛰어들었다.
좁은 공간에서 삽을 가지고 서로 싸우기 시작했는데, 일행들은 저마다 멀리 떨어져 지켜볼 뿐이었다.
그간 대련으로 한동훈의 실력을 알았기에, 질 거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다.
* * *
다음 날도 아무 말 없이 삽질만 계속되었다.
풍산보의 군관들은 아무것도 묻지 않는 일행들을 보며 답답해했다.
뭐라도 물어보면 거짓을 섞어 대답이라도 하겠건만, 아무 말도 묻지 않고 조용히 구덩이만 노려볼 뿐이었다.
처음에는 몇몇이 힘을 합쳐 개기기도 했지만, 도저히 이길 방법이 없었다.
정식 싸움이던, 개싸움이던 번번이 막히기만 했고 결국 두드려 맞기만 할 뿐이었다.
뭐 이런 식이었다.
삽질하던 세 명이 동시에 한동훈을 공격하려 하면, 갑자기 한동훈이 모래를 얼굴에 뿌린다.
눈에 모래가 들어간 틈을 타 삽으로 두들겨 패는 것이었다.
“이런 개싸움을”
한동훈이 한참 삽으로 두들겨 패는 것을 보던 여진인들이 한쪽 구석으로 가서, 무릎을 꿇고 하늘에 빌기 시작했다.
‘천지신명이시여. 쿠타이가 제발 약속을 지키게 하소서. 만약 그가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찢어 죽여 주소서.’
겨우 하루가 지났을 뿐인데, 믿음이 흔들리고 있었다.
한동훈이 구타할 때마다 자신들의 미래가 떠올랐다.
‘죽을 때까지 소금을 캘 수는 없다. 쿠타이 제발-’
* * *
“왜 이유를 안 물어보는 것이요?”
군관이 한동훈한테 삽으로 맞으며 물었는데, 헝겊으로 입이 묶여 제대로 발음이 나오지 않았다.
“뭐라는 거야? 여진인도 그렇고 얘네도 참 알아들어 먹기 힘들게 말하네!”
다시 한동훈이 삽을 치켜들었다.
왜 마을 사람들을 팔았는지는 끝까지 묻지 않은 채였다.
잠시 후.
멀리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는데 전력 질주를 하는 것인지 소리가 요란했다.
한동훈 일행을 발견한 여진인이 방향을 틀어 달려오기 시작했다.
자세히 보니 노예상을 쫓아간 쿠타이였다.
밤새 그들을 쫓다 돌아왔는지 온몸이 흙먼지투성이였다.
“돌아왔군.”
팔려 간 아이가 걱정돼 여진인을 기다리던 한동훈이 반가움을 표할 때였다.
갑자기 여진인 두 명이 울음소리를 내며 달려갔다.
하루도 안 되는 시간 동안 쿠타이를 기다리다 얼굴이 반쪽이 된 이들이었다.
혹시 돌아오지 않을까 전전긍긍한 것이다.
쿠타이는 쿠타이대로 힘들었다. 자신이 늦게 돌아가면 저 미친놈이 어떤 악행을 저지를까 싶어 쉬지 않고 달려온 터였다.
셋이 서로 부둥켜안고 울기 시작했다.
“쟤네 뭐 하냐?”
* * *
쿠타이의 안내대로 한참을 달려가자, 한동훈 일행만으로는 쳐들어가기 꽤 큰 마을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이대로 돌격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