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떠보니 조선군관-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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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사라진 주민들, 범인을 찾다 (1)
“영감, 권관(權管)은 종9품 아닙니까?”
“맞네. 조정에서 자네를 권관(權管)으로 임명했네! 축하하네. 이제 자네도 종9품일세! 하하”
관직을 제수받게 된 한동훈은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부사가 싱긋 웃으며 차를 따라 준다.
“신출신이 부방이 끝나기도 전에 관직을 제수받는 건 아마 자네가 처음일걸세!”
“그러게 말입니다. 부방이 끝나자마자 관직을 제수받는 건 봤어도 조정에서 우리 권관 나리를 어여쁘게 본 모양입니다. 축하하네! 한 권관!”
옆에 앉아 있던 판관도 한동훈에게 축하 인사를 건넸다.
점점 군대에 코가 꿰이는 느낌이 들지만, 한동훈이 벌떡 일어나며 감사 인사를 했다.
“감사합니다.”
인사하는 한동훈을 앉으라고 손짓하던 부사가 송진일과 오세운을 보며 위로를 건넸다.
그들은 관직을 제수받지 못한 터였다.
“너무 섭섭해하지 말게. 자네들의 공도 똑같이 올렸네만 조정에서는 이 일을 기특하다 여기지만, 크게 공론화되길 원하지 않네.”
“영감,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이 친구들도 사대부들인데 대놓고 좋아할 수 없는 조정의 사정을 뻔히 알지 않겠습니까?”
부사에 이어 판관도 송진일과 오세운을 위로했다.
까마득히 높은 상관들이 연신 위로를 건네자 송진일과 오세운이 어쩔 줄 몰라 했다.
“자네들에게도 기회가 곧 돌아갈 걸세! 조만간 공을 세우면 바로 관직을 제수받을 수 있을걸세.”
“감사합니다.”
사실, 이번에 관직을 못 받은 것에 대해 그리 섭섭해할 건 아니었다.
신출신(新出身, 갓 무과에 급제한 이들) 군관들의 부방은 이미 임진년 이후 의무적으로 시행해 오던 것이었다.
1년을 북방에서 복무한 뒤에 바로 중앙 관직을 제수받는 것이 아니었다.
인사 적체가 심해 통상 2~3년은 더 기다렸다가 제수받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야기를 들어 보니, 자네들 이야기로 정계가 한바탕 난리가 났다 하네. 정묘년의 치욕을 갚자고 주장하는 이들에겐 참 보물 같은 소식이지. 남자 13명과 여자 3명을 구출해 오고, 여진인을 3명이나 잡아 오지 않았나?”
“맞습니다. 북병사께서도 따로 무산으로 사람을 보내 진위를 확인한 모양입니다. 풀려난 이들을 다 만나 보았다지요.”
이야기를 듣던 한동훈의 얼굴이 뻘게졌다.
최가를 구출하려다 여진인들을 볼모로 삼고, 몸값을 받은 것밖에 없었다.
하지만, 무산 마을 사람들은 북병사가 보낸 병사들 앞에서 여진 마을과의 결탁을 말할 수 없어, 한동훈의 활약상을 부풀린 것으로 보였다.
점호에 늦은 이유로 말했던 것이 조정에 보고될 때쯤에는, 삼인방의 맹렬한 활약상으로 둔갑해 있었다.
어색해하는 한동훈을 보며, 부사가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내 자네들을 팍팍 밀어줌세! 여기 온 지 한 달이 넘었으니 슬슬 적응도 다 했을 테고. 자네들을 위해 새로운 임무를 주겠네!”
* * *
점호에 늦은 한동훈 일행은 회령도호부의 장조군(場操軍)으로 배속되었는데, 야전 및 인근 지역 지원 전투에 동원되는 부대였다.
첫 임무라는 말과 함께 판관을 따라 옮긴 회의실은 낯선 곳이었다.
장조군(場操軍)이 쓰던 건물도, 판관 집무실이고 아닌 인적이 드문 후미진 창고였다.
“어제 고변이 올라왔네.”
“고변이요?”
“풍산보(豐山堡)에서 지난 1년간 계속 사람이 실종되고 있다는 고변이었네.”
“만주로 월경한 것 아닙니까?”
한동훈의 질문에 판관이 고개를 저었다.
“그럼 차라리 다행이겠지. 이제 나와 봐라!”
잠시 후 문이 열리고 숨어 있던 아이가 나왔다.
열 살 정도는 되었을까? 옷은 해져 있고, 머리는 산발이지만 눈이 밝게 빛나는 아이였다.
“내게 했던 말을 다시 말해 보아라.”
판관의 말에 아이가 한동훈을 보며 말하기 시작했다.
“마을 사람들이 점점 사라지고 있어요. 1년 전부터 하나둘 없어지더니, 지금은 앞집도, 옆집도 아무도 살지 않게 되었어요.”
”…….”
고변이라고 말하기에는 평범한 이야기였다.
배를 곯다 못해 강을 넘어 도망가는 경우는 종종 있었다.
한동훈이 힐끔 쳐다보자 판관은 이미 내용을 전부 알고 있다는 듯 눈을 감고 있었다.
아이는 낯선 이들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고 다부지게 말을 이어 갔다.
“뒷집도 곧 사람들이 없어질 거 같아요. 도와주세요!”
“지금 여진인들이 두만강을 넘어, 네가 사는 마을 사람들을 데려갔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냐?”
오세운이 아이가 놀라지 않도록 부드럽게 질문했다.
그러자 아이가 한동훈을 비롯한 일행들을 쳐다보며 눈을 마주쳤다.
“아니에요. 그건 사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처음에는 앞집 김씨 아저씨가 돌아오지 않았어요.”
“돌아오지 않았다니?”
“그게, 강 너머 여진족에게 생필품을 팔러 갔는데 돌아오지 않았어요.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요.”
두만강을 넘어 만주를 오가는 월경은 국법으로 금지되어 있었다.
하지만 먹고살기 힘든 조선인들은 잘 지키지 않고 있었다.
그들을 막기 위해 파수꾼들을 두고는 있었지만, 그 넓은 땅을 전부 다 지키는 건 불가능했다.
결국, 조선인이든 여진인이든 서로 필요한 물품을 교환하고 있었다.
“여진인들과 싸움이라도 한 것이냐? 종종 여진인들과 사고가 나지 않더냐?”
거래 조건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상대방의 물품을 뺏거나, 죽이는 사고도 계속 발생하고 있었다.
생필품을 팔러 간 조선인이 납치당해 노예로 끌려가는 경우도 있었고, 반대로 인삼을 캐러 조선으로 넘어온 여진인이 살해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전부 후금이 심양을 점령하면서 본거지를 옮기면서 발생한 힘의 공백 때문이었다.
약소부족이거나 심양에 살다가 강제로 이주하게 된 부족들이 누르하치가 떠난 두만강 변에 살고 있었다.
아이가 고개를 저으며 다시 설명했다.
“사실 김씨 아저씨네 가족도 처음에는 그렇게 말했어요. 저한테 사고가 난 것 같다고 말했는데…….”
“말했는데?”
“아저씨를 걱정하던 아줌마도 며칠 후에 사라졌어요.”
“응? 아줌마도 사라졌다고?”
“네, 분명히 전날까지 저한테 돌아오지 않는 아저씨 걱정을 했었는데, 다음 날 집에 가 보니 아무도 없었어요.”
“옆집들도 마찬가지이고?”
“네, 옆집에 살던 아저씨들도 강 너머로 물건을 팔러 갔다 돌아오지 않았어요. 그리고 며칠 후에 다시 가족들까지 사라졌어요.”
“가족까지 사라졌더라!”
결국, 조선에서 먹고살기 어려워 가족 단위로 이주했다는 건데 약간 이상한 점이 있었다.
통상 월경할 때 가족 전부가 한 번에 이동하지, 이런 식으로 차례로 사라지는 경우는 없었다. 월경이 불법이었으니까 말이다.
“풍산보(豐山堡)에 있는 무관들에게 이야기해 보았더냐?? 왜 바로 도호부로 온 것이냐?”
한동훈의 말에 아이가 억울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바로 도호부로 온 게 아니에요. 저도 그렇고 마을의 어른들도 무관 나리들께 몇 번 이야기했어요. 그런데 그냥 별일 아니라고, 먹고 살기 어려워 도망간 것 같은데 왜 이상한 헛소문 만든다고 오히려 역정 냈어요.”
풍산보에 있는 무관들은 함경도 토착민들로 구성된 토착 군관들이었다.
비록 같은 마을 출신들은 아니었지만, 아무 조치도 하지 않은 것이 이상했다.
“벌써 1년이 넘게 사람들이 사라진 것인데, 지금 와서 도호부에 온 이유는 무엇이냐? 왜 이곳으로 갑자기 고변하러 올 생각을 했지?”
“그게.”
그동안 잘 말해 오던 아이가 망설였다.
“괜찮다. 천천히 말해 보아라.”
“이틀 전에 뒷집 순이네 아버지가 사라졌어요. 뒷집에 사는 순이도 곧 사라질까 두려워요.”
마치 순이가 옆에 있는 것처럼 아이의 얼굴이 빨개졌다.
“순이네 아버지가 사라졌을 때 어떻게 했지? 다시 군관들을 찾아갔더냐?”
“네, 다시 군관 나리께 찾아갔는데 제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귀찮다는 듯 쫓아냈어요.”
“그래? 혹시 순이네 아버지도 여진인과 거래를 하러 갔더냐?”
“네, 사람들이 사라지기 시작하면서 사실 강 건너로 안 가려고 했어요. 그러다 집에 쌀이 떨어졌다고 물건을 팔러 잠시 다녀온다고 하고 갔는데 그 후 소식이-”
한동훈이 인상을 찡그렸다. 풍산보 실종 사건에는 하나의 패턴이 있었다.
가족 중 누군가 먼저 월경을 하고, 그 뒤로 돌아오지 않는다.
그리고 며칠 후 가족이 전부 사라진다.
아이와 일행 전부 말이 없을 때 눈을 한참 감고 있던 판관이 눈을 뜨며 말한다.
“자, 이게 바로 자네들 첫 임무일세.”
* * *
한동훈과 일행들은 도호부 외곽에 집을 구했다.
처음에는 도호부 중심의 작은 민가를 구해 살려고 했지만, 이미 다른 지역에서 온 이들로 빈방이 없었다.
결국, 외곽의 큰 집을 구할 수밖에 없었고, 송진일과 오세운, 몸종들까지 전부 한집에서 같이 살기로 했다.
집의 크기만큼 너른 대지가 펼쳐져 있었고, 상처가 어느덧 다 나은 여진인들은 여전히 소금을 캐고 있었다.
포로로 잡아 온 여진인들의 처분은 암묵적으로 한동훈에게 일임되었다.
이제 와서 풀어 주기도, 죽이기도 뭐 하니 알아서 하라는 전언이 있었다.
풍산보로 떠나기 전 군장을 챙겨 온 한동훈이 그들을 한참 보고 있었다.
“형님, 이제 가시지요!”
“잠깐만! 개똥아!”
한동훈이 군장을 챙겨 온 송진일을 잠깐 제지하고, 개똥이를 찾았다.
“나리! 찾으셨습니까?”
“저놈들을 불러오거라.”
개똥이가 여진인들한테 소리치자, 땅을 갈던 여진인들이 삽을 든 채 급히 뛰어왔다.
그리고는 일렬로 서서 두려운 표정으로 한동훈을 바라봤다.
“그래 소금은 좀 나오더냐?”
개똥이가 통역하자 여진인들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곧 소금이 나올 것 같습니다!”
“얼마 안 남았습니다. 이제 금방입니다!”
소리 지르는 이들 눈에는 독기라고는 하나도 찾을 수 없었다.
땅에 올라와 말라 죽은 동태눈깔과 같이 힘이 하나도 없어 보였다.
한 달 동안 반복해서 땅을 팠다.
희망 없는 일을 한 달 내내 반복적으로 한 적이 있는가?
소금이 나올 리 없다는 사실에 정신이 썩어들어 가고 있었다.
사실, 그냥 평범한 땅이었다. 심지어 강변하고 가깝지도 않다. 바다도 근처에 없고, 예전에 바다였던 적도 없던 곳이다.
그런데 소금이 나오면 풀어 준다면서, 땅을 파게 했다.
소금이 나올 리가 없다는 생각에 처음에는 반항도 했다.
그때마다 저 조선 놈은 삽을 들고 와 대련을 청했다.
1:1, 2:1, 3:1까지 대련했지만, 그때마다 한동훈의 삽에 두들겨 맞기 일쑤였다.
지금은 아무도 더 이상 소금이 나오지 않을 거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소금이 나온다 믿고 삽질해야 했다.
살짝이라도 태만을 보이면 바로 대련이었고, 얻어터지는 날이었다.
“열심히 하고 있지?”
“네, 열심히 소금을 캐고 있습니다.”
“너희 혹시 다른 일 해 볼래?”
“…!”
여진인들이 갑자기 들고 있던 삽을 땅에 꽂더니 서로를 격하게 끌어안았다.
눈에 눈물이 맺힌 채, 감격하는 이도 있었다.
* * *
늦은 오후 풍산보(豐山堡).
회령에서 조금 남쪽으로 떨어진 보로 토병 외에 거주하는 이들이 20여 가호가 있어야 정상이었다.
수염을 잔뜩 기른 군관이 무장을 한 채 다가와 송진일에게 물었다.
“도호부의 군관이 이곳은 웬일이요?”
“아, 이곳에서 고변이 있어서 말이지”
송진일의 대답에 토병의 눈이 커졌다.
“고변? 무슨 고변을 말이요?”
“이 아이가 도호부까지 달려와 자네들을 고변했네.”
송진일이 환하게 웃으며 아이를 가리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