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존환생-26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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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9화
-무당-화산 동맹 (26)
진가보는 공동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횡으로 긴 공동의 내부는 오랜 세월 흐르며 굳어진 종유석들이 잔뜩 매달려 있었다.
‘단주라는 그 여인은 대체 어디로 사라진 것이지? 어쩌면 마교도들이 만들어 놓은 함정일까?’
그러나 진가보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미약하지만 그녀의 기척이 느껴지고 있다. 이것은 놀람과 공포에 절어 있어. 그녀가 함정을 팠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러나 또 다른 기척은?’
진가보는 눈을 감았다.
온몸을 스쳐 가는 기운의 흐름.
‘그래, 이곳 동굴 내부에는 상상 이상으로 많은 기운들이 꿈틀대고 충돌하며 소용돌이를 일으키고 있다. 그리고 이것?’
진가보는 흡사 짐승의 몸에서 발산되는 격한 기운과도 같은 것을 발견했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진가보가 눈을 벌떡 뜨더니 의수의 검을 발출하여 동굴 벽 중 어느 한 곳에 찔러 넣었다.
쿠가가각!
쿠구궁!
동굴 벽이 열리고 작은 석실이 나타났다.
굵은 목소리와 함께.
“으하하하! 결계를 풀어내다니 제법이구나.”
석실 안에는 노인이 앉아 있었는데 그의 곁에는 잔뜩 두려움에 질린 단주가 서 있었다.
노인은 백발이 발밑까지 내려오고 있었으나 턱에는 수염 한 올 없었다.
피부는 매끈하고 눈동자는 푸른빛을 띠었으니 진가보가 보아 왔던 여느 사람과도 크게 달랐다.
진가보가 정색을 하며 말했다.
“항상 찾아온 손님을 이런 식으로 대하십니까?”
“하하하. 너무 화내지 말게. 이런 곳에 은거하다 보면 가끔 장난기가 발동할 때도 있으니 말이야. 그나저나 자리에 앉는 것이 좋겠어. 단주 또한 마찬가지고.”
진가보가 걸어 들어오자 단주는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진가보가 보기에 그녀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것이, 아직도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두려움이 사라지지 않은 것 같았다.
진가보와 단주가 자리에 앉자 정양이 입을 열었다.
“그래. 자네들이 찾아오게 되었으니, 오늘 나로서는 즐거운 하루가 될 수 있겠어. 클클클.”
그러고는 단주에게 말했다.
“송지상은 네 추측대로 매설단의 구양수가 사용한 독에 의해 중독된 것이다. 그를 족친다면 이 일에 매설단 단주인 신지(申池)가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낼 수 있을 게야.”
단주가 말했다.
“말씀하신 바는 이미 저희들도 짐작하던 바였으나, 이 일은 도화교에 있어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후후후. 증좌가 필요하단 말이로군? 다른 단주들이 납득할 만한….”
“그렇습니다. 증거 없이 매설단을 단죄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후후후. 네 녀석은 나에게 모든 것을 떠먹여 달라 말하고 있는 것인가? 아까 말했듯이 구양수를 족친다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될 것인데?”
“아버지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정양선인께서는 마율곡에서의 일로 한 가지 원하는 청은 반드시 들어주시기로 하셨다고 말씀이지요.”
“매설단의 세력이 워낙에 강하니 구양수를 족칠 능력이 되지 않는다?”
“그렇습니다.”
“으하하하! 하지만 나는 세속의 일에 직접 개입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내가 오랜 세월 지켜온 규율 중 하나야.”
“그렇다면 약속하셨던 말을 지키지 않는 것은 규율에 합당한 일입니까?”
진가보가 속으로 생각했다.
‘겁에 잔뜩 질려 있는 것치고 말하는 것은 꽤나 강골인 것 같구나.’
“내 마율곡에서 송지상이 아니었던들 원신마저 파괴될 뻔하였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가 떨어져 있던 단약을 사그라져 가던 나의 육신에 먹이지 않았다면 난 이 자리에 있지도 않았겠지.”
잠시 생각하던 정양이 입을 열었다.
“그러나 아까 말했듯이 내가 너희들의 일에 직접 개입하는 것은 내가 속한 문파의 가장 엄한 금기 중 하나! 그러니 나는 다른 자를 이용해 너를 돕도록 하마.”
“다른 자라니 그것이 무슨 말씀이십니까?”
정양이 고개를 돌려 진가보를 보았다.
“자네가 이 아이를 도와야겠군.”
진가보가 말했다.
“무엇인가 단단히 착각하신 듯하군요. 내가 이 여인을 도와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네의 그 홍화회 친구들에게 도화림의 도사가 있다는 정보를 흘린 이가 바로 나라네.”
‘그렇다면 이곳으로 나를 불러들인 것도 결국은 의도적인 일이었단 말인가?’
정양이 눈에 이채를 띠며 물었다.
“자네는 귀환자들에 대한 정보를 알고 싶은 것 아니었나? 물론 자네가 귀환한 이유 또한 말이야.”
그것은 사실이었다.
진가보가 빙궁으로 가는 급박한 길에 육청화와 헤어져 이곳으로 온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었으니까.
진가보가 대답을 하지 않자 정양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빙궁의 교주는 그 어린 의원이 수명을 연장할 테니 굳이 그곳으로 가지 않아도 괜찮을 게야. 그러니 이번 일을 도와 매설단을 제거하고 이 아이를 교주의 자리에 올려놓도록 하게. 그리한다면 나는 자네가 궁금해하는 모든 것에 대해 답을 해주도록 하지.”
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의 대답은 이것이 전부일세.”
정양선인이 소매를 떨치자 세찬 바람이 불어와 그들을 감쌌다.
휘이이이잉.
다음 순간, 그들은 텅 빈 동굴에 서 있었다.
석실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상태였고, 입구 쪽의 떨어져 내렸던 바위도 보이지 않았다.
‘그야말로 귀신이 곡할 노릇이군.’
단주는 무거운 표정으로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잠시 싸늘한 눈빛으로 석실이 있던 동굴 벽을 바라보더니 그대로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진가보가 물었다.
“선인이 이른 말을 지키지 않을 셈이오?”
단주가 말했다.
“매설단에는 그야말로 중원에서는 보기 힘든 고수들이 즐비합니다. 당신 혼자서 그들을 상대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에요. 나는 정양선인을 믿고 이곳까지 왔으나 결국 원하는 답을 듣지 못하고 돌아가야 할 것 같군요.”
그녀는 이 말만을 남긴 채 성큼성큼 동굴을 걸어 나갔다.
진가보가 따라 나오자 밖에서 광 좌사가 단주에게 묻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단주님! 선인께서 우리를 돕기로 하신 것입니까?”
그러나 단주는 싸늘한 표정으로 마차 위로 오르더니 말했다.
“어서 돌아가자!”
광 좌사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진가보와 마차를 번갈아 보더니 결국은 말에 올라 수하들에게 길을 떠날 것을 명했다.
그들이 모두 떠난 후 진가보가 생각했다.
‘만일 그녀가 나에게 도움을 부탁했더라면 나는 흥미를 잃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일이 이렇게 돌아간다면 내 자존심이 허락할 수 없는 일이지. 물론, 도화림에 대한 정보를 알아내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고 말이야. 다만 가는 길에 빙궁의 연락소가 있는 양택에 들러 육청화에게 내가 가지 못한다 전해 달라 해야겠군.’
진가보는 결심을 굳힌 듯 말에 올라타 단주 일행을 따라 출발했다.
* * *
진가보는 이틀에 걸쳐 단주 일행을 따라갔다.
다만 그들에게 자신이 뒤쫓고 있다는 것을 들키지 않도록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있었다.
진가보는 도화교라는 이름을 들은 적은 없었으나 이들의 복색이 서천의 마교들 중 가장 큰 세력을 자랑하는 배화교도들과 흡사한 것으로 보아 아마도 그 갈래 교파 중 하나일 것이라 추정하였다.
삼 일째가 되어 황토곡이라 불리는 황량한 협곡을 지날 무렵, 절벽 위에서 바위가 굴러떨어져 단주 일행의 길을 막았다.
쿠르르르릉!
콰과광!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뒤쪽 길에서도 기름에 전 바위가 굴러떨어진 후, 그 위로 화시가 날아와 불길을 만들어 내니, 이들은 오도 가도 못하는 처지가 된 채 협곡에 갇혀 버리게 되었다.
“젠장! 매복이다!”
“단주님의 마차를 지켜라!”
교도들은 모두 단주의 마차를 중심으로 귀두도를 치켜든 채 사방을 주시했다.
잠시 후, 절벽 위에서 우렁찬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으하하하! 설영단주! 그대가 엄연히 교를 위해 큰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우리 단주님을 모함하고 헐뜯고 다닌다고 하더군.”
광 좌사가 눈에 핏발을 세우며 받아쳤다.
“네놈은 매설단의 홍암이로구나! 감히 이런 짓을 하고도 무사할 것이라 생각하느냐?”
“흐흐흐. 교를 떠나 있으니 네놈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조차 알지 못하고 있구나. 이미 교주님께서는 세상을 떠나셨다.”
마차의 문이 벌컥 열리며 단주인 송화가 튀어나왔다.
“그것이 무슨 소리냐?”
“분명히 말했지 않느냐. 교주님께서 귀천하셨다고 말이다.”
단주가 털썩 주저앉았다.
“이럴 수가….”
“그뿐이 아니다. 너희 설영단의 진복이 모든 것을 토설하였으니, 이로써 단주회에서는 너희 설영단을 도화교에서 영구히 파문하고 단죄키로 만장일치의 결론을 내렸다.”
광 좌사가 외쳤다.
“도대체 우리의 죄가 무엇이란 말이냐?”
“진복의 말에 의하면 설영단주 송화, 네년이 매설단주님을 암살하고 교주의 자리를 차지하려 작당을 하고 있었다 하던데? 이는 교의 규율상 참형에 처해야 하는 죄이다. 그것은 멍청한 네놈도 충분히 알고 있을 텐데?”
광 좌사가 뒤에 주저앉아 있는 단주에게 말했다.
“모함을 당하다니…. 놈들에게 선수를 빼앗겨 버렸습니다. 놈을 죽이지 않는 이상 이곳에서 벗어날 방도가 없습니다. 어찌할까요?”
송화 또한 지금 일이 어찌 돌아가는지 명확히 머릿속에 들어왔다.
교주가 비록 약에 중독되어 온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위중한 상황이었으나 그래도 당장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상태는 아니었다.
단주는 아버지인 교주의 죽음 또한 매설단과 관련이 있음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하여 그녀의 좌절은 곧 분노로 바뀌었다.
“놈들을 모두 죽여라!”
“곧 죽을 목숨임에도 의기 한번 가상하구나.”
싸늘한 명이 떨어지자마자 절벽에서 누군가 떨어져 내렸다.
흙먼지와 함께 바닥에 내려앉은 자는 보통 사람의 두 배는 됨직한 체구를 가진 거한이었다.
광 좌사가 놀란 듯 말하였다.
“자, 자네는 우사 함온? 어째서 자네가?”
함온이라 불린 거한은 등에서 도끼를 꺼내 들며 입을 열었다.
“이미 대세가 기울었으니 나는 도화교를 위해서라도 그쪽에 붙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동안의 은정을 보아서라도 고통 없이 저세상으로 보내드리지요.”
광 좌사가 터져 나올 것 같은 눈빛으로 외쳤다.
“이, 이 배신자! 오로지 네놈을 믿고 교주님을 맡기고 나왔던 것인데 그런 네놈이 배신을 해?”
광 좌사가 미친 듯이 달려들었다.
파캉!
함온이 냉기를 품으며 말했다.
“평소부터 난 네놈이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았었다. 오늘이야말로 네 건방진 콧대를 납작하게 만들어 주마.”
파캉!
“으하하하! 오늘은 마음껏 살육을 해볼 수 있겠구나.”
그때, 절벽에서 요란한 소리가 나더니 시커먼 피풍의를 입은 자가 마치 평지를 뛰어오듯 빠른 속도로 절벽을 내려왔다.
그는 팔에 달려 있는 검을 뻗어내어 외곽에 서 있던 교도들의 목을 단숨에 날려 버렸다.
단주가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북위 정명소? 저자까지….”
이쯤 되면 홍암이 말한 대로 도화교의 대다수가 매설단 쪽으로 돌아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들 중 하나라도 맞상대하기가 쉽지 않은데 도화교의 사천왕 중 삼 인이 나타났으니 살아나가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는 교도들도 마찬가지였으니, 그들은 평소부터 무시무시한 소문이 돌던 호법들을 적으로 마주하자 사기가 땅에 떨어진 지 오래였다.
게다가 지금 그들은 반도라는 누명까지 뒤집어쓰고 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