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떠보니 조선군관-2화
본문
2화 무산광산
우거진 수풀 속 일단의 인형들이 숨어서 여진인들을 훔쳐보고 있었다.
오세운의 몸종인 최가를 데려간 것으로 보이는 여진인들이 노천광산에서 철광석을 캐고 있었다.
인원은 대략 스무 명.
'어째서 이곳까지 여진인들이!'
한동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산광산은 광석 품위(品位, 광물 함유량)가 낮아 개발이 늦게 되는 곳이었다.
100톤의 철광석을 캐도 30톤의 철만 얻을 정도로 생산성이 낮은 이곳에 여진이라니!
가벼운 마음으로 몸종들을 보내 살펴보게 한 것이 실수였다.
“저들이 무산 백성들과 결탁한 것 아닐까요?”
“…….”
“백성들 묵인 없이 철광석을 캘 수 없습니다. 두만강 결빙도 고작 일 년에 서너 달뿐인데-”
일리 있는 말이었기에 한동훈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부스럭
여진인들이 철광석을 저마다 가져온 소쿠리에 담은 채 산에서 내려가자, 한동훈 일행이 그 뒤를 조용히 따랐다.
한참을 따라가자 산 밑에 검은 연기를 뿜는 건물과 작업장들이 보였는데 여진인들은 자연스럽게 그곳으로 들어갔다.
결탁했다는 오세운의 말이 맞는 것 같았다.
작업장 앞에 도착한 여진인들은 소쿠리와 무기를 내려놓고, 저들끼리 한참을 떠들었는데, 건물 문이 열리며 조선인들로 보이는 이들이 광석을 챙기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던 한동훈이 일행들을 보며 말했다.
“조선인들과 결탁한 여진인들 같다. 우리 인원이 너무 적으니, 함부로 접근했다가는 크게 다칠 수 있다. 꾀를 써야겠구나.”
* * *
잠시 후.
대장간으로 보이는 건물과 작업장 앞에 최석이 다가가 큰 소리로 최가를 돌려달라고 말하자 여진인들이 건물 안쪽으로 들어가 조선인을 불러왔다.
“뉘시오? 이 근방에서 처음 보는 이 같은데?”
대장간에서 일하는 것 같은 사내는 피곤한 기색으로 최석에게 물었다.
“같이 온 일행이 여진인들에게 붙잡힌 것 같으니 우리 일행들을 풀어 달라고 말 좀 전해 주쇼.”
최석의 말에 사내는 여진인과 한참 말을 나누더니, 최석을 보고 외쳤다.
“이야기가 잘 끝났으니, 어서 떠나시오.”
최석이 반가운 표정으로 물었다.
“우리 일행을 데려가도 좋다는 말이오?”
“그자는 이미 노예로 삼았다 하니 얼른 떠나쇼. 당신들까지 노예로 삼겠다는 걸 겨우 말렸으니까!”
이야기가 잘 끝났다는 소리가 자신을 포로로 삼지 않겠다는 건 줄 몰랐던 최석은 황망한 듯 물었다.
“그 무슨 개뼈다귀 뜯는 소리요? 우리 일행을 놓고 가라고?”
“얼굴이나 보고 갈 수 있도록 그자를 잠시 데려오겠소.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뿐이요.”
사내가 다시 여진인에게 뭐라 말하자, 고개를 끄덕인 여진인이 안쪽에 있던 최가를 데려왔다.
잠시 후 온몸이 묶인 최가가 끌려 나오자 최석이 화가 나서 외쳤다.
“당신 뭐 하는 거요? 조선인을 구하진 못할망정 모른 체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요.”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조선인 사내가 건물 안으로 들어가 버리고, 어깨를 으쓱한 여진인도 다시 최가를 챙겼다.
건물 안쪽으로 다시 데려가려는 것 같았다.
슝
“컥!”
그때 어디선가 화살이 날아와 최가를 데리고 건물 안으로 들어가려던 여진인의 목을 맞혔다.
저들끼리 희희낙락거리던 여진인들은 갑자기 날아온 화살에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기를 챙기려는 그들을 보며 최석과 개똥이가 큰 소리로 외쳤다.
“다들 움직임을 멈춰라!”
“무기를 주우려 하는 자는 죽을 것이다!”
조선어를 모르기에 최석의 말을 무시한 여진인 두 명이 무기를 줍기 위해 고개를 숙이자, 다시 한번 화살이 날아왔다.
슈슝
슝
“컥!”
“으악!”
연이어 두 명이 화살에 맞고 쓰러지자 최석의 말뜻을 짐작한 여진인들이 행동을 멈춘 채 양손을 어깨 위로 들었다.
* * *
생존 게임에서 상대방을 이기는 법은 아주 간단했다.
아직 스무 명 가까이 되는 인원이 남았고, 동시에 무기를 들면 될 터였다.
물론 누군가는 죽겠지만 그것이 최선이었다.
하지만 아무도 무기를 잡으려 들지 않고 있었다.
인간이기에 다들 상대방이 움직여 주기만 바랄 뿐, 그 자신이 먼저 움직일 마음이 없는 것이었다.
그때,
뒤쪽에 있던 여진인이 몸을 숙여 자신의 활을 잡으려 했다.
활을 쏘는 적들에게 노출되지 않은 것으로 판단한 것 같았다.
슝
“컥”
하지만, 어김없이 화살이 날아왔고 섣부른 움직임을 보인 여진인마저 쓰러지자, 좌중은 마치 얼음 샤워를 한 것처럼 얼어붙었다.
고개를 빳빳이 든 최석이 조선인 사내를 보며 말했다.
“너, 그래 너!! 줄 갖고 와서 저들을 한 명씩 묶어라. 최가 너도 같이 얼어 있으면 어쩔 거야? 빨리 안 튀어와?”
* * *
“수고했다.”
한동훈이 묶여 있는 이들을 보며 최석에게 칭찬을 건넸다.
이기적인 사람 심리를 이용해 스무 명이 넘는 여진인들을 포로로 잡은 것이다.
한동훈은 최석에게 어쩔 수 없다고 말했던 조선인 사내를 쳐다보고 물었다.
“우린 회령으로 가는 군관이다. 어찌 된 일인지 말해 줄 수 있나?”
“…….”
한동훈의 물음에도 사내는 대답하지 않고, 온몸이 꽁꽁 묶인 채 당혹스러운 표정만 짓고 있었다.
“저들은 누구지? 강 건너에 있을 이들이 왜 조선에서 광석을 캐고 있는 거지?”
한동훈의 재촉에 침묵을 지키던 사내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몇 해 전이었습니다. 겨울에는 어딜 가나 먹고살기 힘들지요. 무산도, 여진 마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해서?”
“여진인들이 무산을 노리고 먼저 강을 넘어왔습니다. 저기 저놈 말입니다. 저놈이 싸우면 많이 다칠 테니, 철제 농기구를 만들어 팔자고 먼저 제의했습니다. 겨울에는 자신들이 철광석을 캔다고 했고, 농기구도 대신 팔아 준다 했습니다.”
”…….”
“반대하는 마을 사람들도 있었지만, 믿어 보기로 했습니다. 사실 답이 없었습니다. 굶어 죽을 판이었습니다.”
한동훈이 답답한 듯 물었다.
“결국, 먹고살기 위해 저들과 결탁하여 철제 농기구를 팔아먹었다는 소리군. 자네는 철장(鐵匠)인가?”
한동훈이 말에 사내가 씁쓸한 표정으로 답했다.
“무산에 철장으로 있는 곽영명이라고 합니다. 저 멀리 평양에서 왔습죠. 일이 있어 만주로 넘어가려다 이 마을에 정착했습니다.”
일이 있었다는 말과 함께 얼굴빛에 어두운 기색이 스쳐 지나간다.
이 시대에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한동훈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뒤에 묶여 있던 조선인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자네가 이 사람들을 다 가르친 게군.”
사내 뒤로 일곱 명의 조선인들이 손이 묶인 채 무릎 꿇고 있었다.
작업 중 끌려와 영문도 모르고 묶인 이들이었다.
“지금까지 빌어먹고 산 일이 이 일인지라, 이곳에 오자마자 이것저것 만들기 시작했습죠. 가래, 삽, 낫, 곡괭이부터 이것저것 만들기 시작하니 입에 풀칠할 수 있었습니다. 사실 이 일이 혼자 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점차 늘리다 보니 저리 됐습죠.”
“그렇다고 여진과 조선이 합작해 대장간을 같이 운영하다니 이게 말이 된단 말인가!”
조선과 명나라는 여진족에 철기가 유출되는 것을 크게 경계했다.
유목민족이 철을 가졌을 때의 위험성을 알고 있었다.
나라에서 유출을 엄히 금하고 있는데, 이곳에는 여진과 조선의 합동 대장간이 세워져 있었다.
답답한 마음에 담뱃대를 꺼내 든 한동훈이 불을 붙여 연기를 흡입했다.
* * *
한동훈의 심문은 계속되었다.
“저들 마을 규모는 어느 정도 되지?”
“40여 가호가 약간 넘습니다.”
“그럼 성인 남자가 더 있다는 말이군.”
한동훈이 턱을 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그렇게 큰 마을은 아니었다.
‘다 죽여 버릴까? 붙잡은 이들을 다 죽이면 마을에 남은 이들은 얼마 안 될 텐데.’
최가를 구하다 죽인 이들 때문에 이대로 풀어 주면 복수한답시고 쫓아올 것이 분명했다.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한 한동훈이, 이것저것 꼬치꼬치 캐물었다.
“무산에는 얼마나 살지?”
“어림잡아 130가호가 됩니다.”
꽤 많은 이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한참 고민하던 한동훈이 칼을 빼 들고, 굳은 표정으로 여진인들에게 다가갔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다 죽여야겠다. 풀어 주면, 복수한다고 쫓아오겠지.”
한동훈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줄에 묶여 있던 여진인들도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한동훈이 칼을 휘두르는 것을 본 여진인들이 어설픈 생존 조선어를 쓰며 외쳤다.
“살려 주십쇼!”
“살려 줘요!”
여진인뿐만 아니라 곽영명 또한 애원했다.
“이들을 이대로 죽이기보다 차라리 몸값이라도 받고 풀어 주십쇼. 군관이시니 저들이 쉽사리 뒤를 쫓지 못할 것입니다.”
한동훈은 잠시 고민하다 개똥이를 불러 세운 뒤에 그들을 향해 말했다.
“네놈들을 살려 줄 이유를 말해 보아라.”
개똥이의 통역을 들은 여진인들은 자신이 갖고 있던 물품을 몸값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저는 초피가 몇 장 있습니다.”
“전 조선인 남자 노예가 있습니다. 일을 잘해 다른 이들도 부러워하는 이들입니다.”
“표피 가죽이 있습니다.”
“저는 진주를 드리겠습니다.”
“수말 한 마리를 내놓겠습니다.”
“조선인 여자 노예 두 명입니다. 살림살이를 잘합니다.”
가난한 부족이 철제 농기구를 팔아 부를 쌓은 모양이었다.
포로가 된 여진인들은 대표 특산물인 초피, 말, 진주 등을 이야기했고, 조선인 노예들을 내놓겠다는 이들이 다수였다.
* * *
한동훈은 여진인들의 말에도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여진인 중 퉁가라고 이름을 밝힌 사내가 하소연했다.
“이 정도 재물이면 만족하고 그만 우릴 풀어 주시오. 우린 그저 광산에 침입한 조선인을 끌고 가려는 것이었는데, 무슨 죄를 지었다고 이리 각박하게 구는 거요?”
“죄가 없어? 네놈들이 내놓겠다고 하는 목숨값에 조선인이 이리도 많은데? 네놈들이 조선인들을 계속 사냥해 간 것 아니냐!”
한동훈의 말에 퉁가가 변명했다.
“강을 넘어온 조선인들을 붙잡아 농사짓는 데 우마(牛馬)로 쓴 건 맞지만, 다른 마을에서 재물을 주고 사 온 것이 더 많습니다.”
당시 조선인과 한인은 농사 기술이 뛰어나 소와 말처럼 농사에 부려먹는 노예로 팔리곤 했었다.
한동훈이 그런 사정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한참을 한동훈을 보며 말하던 퉁가는 철장 곽영명을 보며 호소했다.
“자네마저 우리를 외면하면 안 되지 않나? 우릴 구명해 주게. 그간의 정이 있지 않은가!”
* * *
결국, 최가를 구출하다가 여진인을 죽인 것에 대한 복수는 무산 마을에서 중재해 막아 주는 것으로 하고 몸값을 받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여진인 일부는 인질이 되어 남고, 일부는 그들 몫까지 몸값을 가지러 마을로 떠나자 한동훈이 곽영명을 보며 말했다.
“마을에 다녀와라. 네놈 마을에 가서 지금 상황을 이야기하고, 내일 정오까지 무산광산으로 와야 한다.”
“알겠습니다.”
“여진인들이 오는 시간에 맞춰 꼭 너희들도 나와야 할 것이다.”
“지금 당장 출발하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곽영명이 서둘러 마을로 뛰어갔다.
작업장에서 마을은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있었다.
무산은 연사보다 규모가 더 컸는데, 마을에 도착한 곽영명은 민가 사이를 계속 달려가다 가장 큰 집에 멈춰서야 숨을 골랐다.
무산 백성들이 자체적으로 조직한 수비대장인 석가의 집이었다.
한참 숨을 헐떡이던 곽영명이 허리를 편 채로 집 안쪽을 향해 외쳤다.
“이보게. 석가! 큰일일세! 나와 보게!”
곽영명의 외침에 석가가 문을 열고 나왔다.
석가는 오랫동안 수염을 깎지 않았는지 마치 산적처럼 생긴 사내였다.
대장간에서 일이 있었다는 것을 모르는 석가는 태평스럽게 배를 긁으며 물었다.
“곽노야. 뭡니까? 여진놈들과 무슨 시비라도 붙으신 게요?”
“자네 대장간에서 소란이 있었는데 아예 몰랐던가? 여태 뭐 하고 있었나!”
석가의 태도에 갑자기 열불이 난 곽영명이 냅다 소릴 질렀다.
그러자 석가가 손을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이고. 귀청 떨어지겠습니다. 대체 무슨 일인데 그러는 겁니까!”
“회령으로 부방(赴防) 가던 군관들과 여진인들이 충돌이 있었네.”
“그게 무슨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립니까? 회령으로 가는 군관들이 왜 이쪽으로 옵니까? 이 길을 통하는 자는 지난 20년간 본 적이 없습죠.”
한동훈이 산을 가로지르면서 북방으로 올라왔기에 그런 것이었지만, 그간 사정을 알 리 없는 석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허허-. 지금 그것이 중요한 일이 아니네. 여진인 스무 명을 지금 그들이 구금하고 있네. 내일 여진인들을 몸값을 받고 풀어 주기로 했으니 어서 준비해야 함세!”
곽영명의 말에 석가가 눈이 동그래져 외쳤다.
“저들이 약속을 안 지키면 어쩌려고 그런 약속을 했답니까? 당장 마을 청년들을 불러 모아야겠습니다.”
말을 마친 석가는 칼을 빼 들었는데, 그 모습이 무섭게 일그러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