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존환생-26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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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6화
-무당-화산 동맹 (23)
종남에서는 정월에 어린 제자들이 연싸움을 하는 풍습이 있었다.
연싸움에서 우승한 이에게는 장문인으로부터 약간의 용돈과 검이 상으로 주어졌다.
다만 이는 정식적으로 제자가 된 본산 제자들에 한정되어 있는 것이었으므로, 진가보와 항규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일이었다.
아이들이 연을 날려보고 싶어 하는 것을 알고 있었던 규월은 작년 대회에서 종남의 제자들이 사용하다가 망가져 버려졌던 연을 고이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다.
부서진 부분은 이미 규월이 심혈을 기울여 고쳐 놓았다.
보따리 안에서 작은 연 두 개가 모습을 드러내자 진가보와 규월은 즐거운 비명을 질렀다.
“우와! 이건 연이잖아요?”
“그래. 보는 대로 연이다.”
“어디서 난 거예요?”
“버려진 것을 주워다 고쳐 놓았지.”
“이야! 누가 이렇게 비싼 연을 버린 것일까요?”
“글쎄다. 누구에겐 쓸 수 있는 것이 그 누구에겐 그렇지 못한 것일 수도 있으니까.”
진가보와 항규가 각각 연을 집어 들고 기뻐하는 모습을 보자 규월의 얼굴에도 미소가 지어졌다.
“이 연, 지금 날려 봐도 되나요?”
항규의 말에 진가보가 입을 열었다.
“그래도 이곳에서 연을 날렸다가 들키는 날엔 모두 혼이 나게 될 텐데요?”
규월이 웃으며 말했다.
“그래, 연을 날리기에 적당한 다른 곳을 찾으면 되지 않겠느냐!”
“그러면 종남을 나가야 할 텐데요?”
“오늘은 행사가 있어 외부 손님들이 오시는 날이라 나는 그곳으로 나가지 말라는 명이다.”
“정말요?”
항규의 말에 규월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항규는 즐거운 것 같았으나 진가보는 그렇지 못했다.
그가 우울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들은 우리를 창피하게 생각하고 있는 거군요?”
“행색이 남루하니 어쩌겠니.”
“같은 제자인데도 어찌 이리 차별이 심한 거죠?”
진가보가 화가 난 표정으로 말하자 규월이 그를 달랬다.
“너희들이 무슨 죄가 있겠니? 내가 삼속이라서 그런 것을….”
어느덧 아무도 말을 꺼내지 않고 정적이 흘렀다.
규월이 말했다.
“그래도 그런 것들은 그저 옷과도 같은 거란다. 우리의 행색이 남루하고 보잘것없지만 그것은 겉모습뿐인 거지. 옷은 단지 갈아입으면 그뿐, 그런 것에 너무 연연할 필요는 없는 거야. 그러니 너무 속상해하지 말거라.”
진가보가 답했다.
“속상해하지 않아요. 저들보다 나아지면 되는 것 아니겠어요? 저는 사부님과 항규만 있다면 그것으로 족해요.”
진가보가 눈을 떴다.
‘꿈이었구나.’
갑자기 마음속에서 규월에 대한 그리움이 물밀듯 몰아닥쳤다.
진가보는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물론, 규월에 대한 고마움과 제자를 아끼는 그를 존경하는 마음이 상당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지금 그가 마음속에서 느끼고 있는 그리움까지는 아니라 여겼던 것이다.
게다가 지금 진가보가 꾸었던 꿈은 분명 자신이 이 소년의 몸에 빙의하기 전의 일들이라 생각되었다.
‘어째서, 내가 그때의 일들을 꿈으로 꾸게 된 것일까? 내 머릿속에 본래 이 몸의 주인이었던 소년의 기억이 남아 있었던 것일까?’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언젠가 육청화가 말한 적이 있었다.
우리가 진실로 전생의 우리인지, 그것이 아니라면 이 몸들의 주인이 그저 진가보와 장사익의 기억을 얻어 우리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말이다.
만일 그렇다면 백발진인과 기해봉은 대체 어찌 된 것일까?
도무지 모든 것이 의문투성이였다.
그때였다.
진가보의 머릿속에 과거 자신의 아들이라 주장했던 이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내가 몸담은 곳은 도화림이라는 곳입니다. 때론 인간이 이해하기 어려운 일들이 일어나는 곳이지요.]
‘도화림은 중원의 문파는 아니다. 다만 나는 분명 그 이름을 들은 적이 있다.’
전생의 진가보가 어렸을 때 풍소의라는 이름의 협객이 그의 목숨을 구해 주었던 적이 있었다. 이런 인연으로 풍소의와 한 달가량 같이 여행을 했던 진가보는 그로부터 강호의 많은 이야기들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대영웅 칠주검법의 조무를 필두로 마교의 교주였으나 은퇴하여 세상을 등진 조수문, 혜가장의 혜일평, 무면탈명이라 불리었던 담봉우의 이야기까지 말이다.
이런 영웅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어린 진가보는 피가 끓어오르고 마음속에서 호방한 기운이 용솟음치는 것을 느꼈었다.
그런 풍소의는 어느 날 그에게 이상한 이야기를 해준 적이 있었다.
[세상에는 알 수 없는 일들이 많이 일어나곤 한단다. 그러한 사건들의 정점에 서 있는 이들이 바로 수사들이지.]
[수사라구요?]
[그래. 그들은 구름이나 영물을 타고 하늘을 날아다니지. 그뿐이 아니야, 여러 가지 술법을 이용해 땅을 뒤집고 하늘을 무너뜨리기도 한단다.]
[거짓말. 설마 세상에 그런 사람들이 있으려구요?]
[믿지 못하는 것도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지. 나 또한 너와 같았으니 말이야.]
[대협께서는 수사를 본 적이 있으신가요?]
[단 한 번, 본 적이 있다.]
[그래요? 그는 어떻게 생겼나요? 열 개의 눈과 수백 개의 팔을 가지고 있었나요?]
[그렇진 않아. 그들은 우리와 똑같이 생겼으니까, 길을 지나가다 만난다 해도 알아보기 힘들 게다.]
[에이. 시시한걸요?]
[하지만 그들이 지닌 능력은 진짜야. 나는 분명히 보았지. 도화림이라는 곳에서 온 유정이라는 수사가 어떤 신통력을 발휘하는지를 말이야.]
[도화림? 유정이요?]
[그래. 아마 그들 중 하나가 마음을 먹는다면 일 각도 되지 않아 중원은 초토화되고 말 거야. 그들의 힘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니까 말이야.]
[우와~! 정말요?]
[내가 그를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 이런 말을 해준 적이 있지. 세상은 우리가 알고 있는 이곳 하나만이 아니라고 말이야. 또한 그 자신이 다른 세상에서 현신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지.]
[다른 세상에서요?]
[진양이라는 전혀 다른 세상에서 태사형이라는 인물로 태어날 예정이라고 하더군. 나는 그 말이 무엇인지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말이야.]
[믿기지 않는 말들이지만 어쨌든 놀라운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래. 그저 네가 명심해야 할 것은 우리가 경험한 것들이 유일한 진리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야.]
과거 풍소의와의 대화를 떠올렸던 진가보가 생각했다.
‘전혀 다른 이로부터 그 도화림이란 이름이 언급된 것으로 본다면 그곳이 실제로 존재한다고밖에는 달리 생각할 수가 없다. 사실 나는 천갱에서도 놀라운 일들을 목격하지 않았던가!’
잠시 묵묵히 있던 그가 혼잣말을 했다.
“그래, 도화림이라는 곳을 찾아낸다면 분명 내가 세상으로 다시 돌아온 것에 대해 뭔가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거야.”
* * *
“도화림이라구요?”
귀각이 물었다.
그의 얼굴을 뒤덮은 복면이 실룩거렸다.
격뇌검문으로 귀환한 진가보는 바로 귀각을 불러 도화림에 대해 알아볼 것을 지시했다.
귀각이 물러간 후 만운이 들어왔다.
“장문 사형!”
“그래, 야인족들의 수련은 차질 없이 진행하고 있는 것인가?”
“물론입니다. 야인족 아이들의 재능이 탁월하여 저는 물론 조운까지 감탄에 감탄을 거듭하는 중입니다.”
“그래?”
“단 한 번 시범을 보여도 완벽에 가깝게 익히는 것은 물론,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깨우치니, 도대체 어떤 아이들인지 저도 의아할 지경이거든요.”
“그래, 심법은 어디까지 익혔지?”
“아무리 그들의 재능이 탁월해도 내력을 쌓는 것에는 시간이 걸리니 지금은 경맥오혈도경을 칠 할까지 익혔습니다.”
“경맥오혈도경이라…. 그것도 대개는 입문한 지 이삼 년은 지나야 시작할 수 있는 것이 아니던가?”
“그러니까 말입니다. 검법은 더욱 놀라울 정도입니다.”
“그래? 검법은 어디까지 익혔지?”
“어제 오후부터 태양검법을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그들 중 링이라는 아이는 제가 보아 왔던 이들 중 가장 출중한 무재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진가보의 표정에 기쁜 빛이 어렸다.
“모든 것이 그들을 잘 지도한 사제와 조운의 노력 덕분일 것이다. 앞으로도 잘 지도하여 그들의 실력이 일취월장할 수 있도록 돕도록 하거라.”
“알겠습니다. 이제야 저도 가르치는 즐거움이 뭔지 그 야인족 아이들 덕분에 깨달을 수 있어, 하루하루가 즐겁습니다.”
“잘되었구나.”
만운이 나간 후 이번엔 여혜가 들어왔다.
“장문 사형!”
“내가 출행한 동안 검문에 별다른 일은 없었는가?”
여혜는 그동안의 각 문파의 동향에 대해 설명했다.
“항산파가 봉문을 당했다고?”
“그뿐이 아니에요. 형산파와 자월문 또한 무당에 의해 봉문을 당하였지요.”
“음…. 그리고 또 무슨 일이 있었지?”
“며칠 전 북해빙궁에서 사람을 보내왔어요.”
“빙궁에서?”
“궁주께서 건강이 안 좋아져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아요.”
이 말에는 진가보도 깜짝 놀란 듯했다.
“궁주가?”
“하여….”
“그래서?”
“빠른 시일 내에 장문 사형께서 방문해 주십사 하는 요청을 보내온 것이지요.”
여혜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그 이유는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궁주가 진가보가 그녀의 딸과 서둘러 혼인하기를 바라기 때문에 그를 부른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가실 건가요?”
“빙궁은 우리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많은 도움을 준 곳이다. 그런데 궁주가 몸이 좋지 않다는 말을 듣고도 어찌 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저도 따라가도록 하겠어요.”
진가보가 고개를 저었다.
“사매도 알고 있다시피 검문은 할 일은 많으나 인력이 부족한 상황이야. 사매가 빠진다면 여러 가지로 곤란한 일이 발생하겠지.”
그것은 여혜도 알고 있는 바였으므로 더 이상 선뜻 고집을 부리지 못하였다.
여혜가 나가고 난 후 검운이 들어왔다.
검운은 임무쌍과 함께 장문전에 들어섰는데 그의 얼굴은 행복으로 가득해 보였다.
“장문 사형의 은혜에 뭐라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임무쌍 또한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올렸다.
“소저를 구해 주신 은혜, 평생토록 갚을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진가보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니오. 검운은 격뇌검문에서는 없어서는 안 될 인재. 소저와 함께한 덕에 이제 그의 마음이 안정되었으니 이는 격뇌검문으로서도 큰 복이라 할 수 있소. 그러니 은혜니 뭐니 하는 이야기는 앞으로 하지 말도록 합시다.”
그러고는 검운을 보고 말하였다.
“지금은 시기가 좋지 못하여 혼인을 뒤로 미룰 수밖에 없는 것이 마음에 걸리는구나.”
“아닙니다, 장문 사형! 저는 임 소저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습니다.”
“그래. 하지만 상황이 나아지는 대로 혼인을 올리도록 하자꾸나.”
이 말에 임무쌍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모든 보고와 할 일을 마친 진가보는 육청화의 거처로 발길을 옮겼다.
그는 백발진인이 자신의 제자인 장현풍을 죽여 피를 받았던 일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난 후 육청화가 눈썹을 씰룩거리며 무엇인가 생각에 잠겼다.
“잠시만 있어 보게. 내 찾아볼 것이 있어.”
그는 곧바로 안쪽에 있는 서재로 들어갔다.
진가보가 탁자 앞에 앉아 차를 거의 다 마실 무렵, 육청화가 두어 권의 책을 들고 밖으로 나왔다.
“여깄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