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빌어봐-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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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별채 집무실을 청소하는 내내 집요한 시선이 샐리의 몸을 훑었다. 싸구려 나일론 브러시가 몸을 샅샅이 훑어 내리는 느낌이었다.
시선은 이따금 간지러운가 싶으면 한순간 따끔해졌다. 저도 모르게 움찔 몸서리쳐졌다.
“대위님, 혹시 제가 방해가 된다면 청소는 나중에 하도록 할까요?”
뒤로 돌아 공손히 물었다. 윈스턴은 그새 책상 위의 서류로 시선을 돌린 후였다.
손가락 사이에 끼워진 시가의 끝이 잘근잘근 씹혀 있었다. 불을 붙이려다 잊었는지 다른 손에는 금빛 라이터가 들려 있었다.
“아니, 계속해. 난 내 일을 하고, 넌 네 일을 하고.”
그는 서류를 향해 눈을 내리깐 채로 샐리 머릿속의 대본에 있는 대답을 뱉었다. 어차피 나가선 안 되는 그녀는 다시 등을 돌리고 걸레를 놀렸다. 짓씹힌 시가 끝이 자꾸 머릿속을 맴돌았다.
‘나를 보며 무얼 씹는 상상을 한 걸까.’
돌연 얇은 브래지어 속에 숨겨진 가슴 끝이 따끔, 아렸다.
더러운 왕정의 돼지 새끼.
당장 나가고 싶지만 그럴 수 없었다. 중요한 임무가 남았으니까. 그나마 안심이 되는 건 문 앞에 군인 둘이 동상처럼 우두커니 서 있다는 사실이었다.
낮은 의자 위에 올라서서 책장을 천천히 닦았다. 그의 눈높이에 더욱 가까워진 종아리가 자꾸만 간질거렸다.
‘차라리 소파 뒤에 엎드려 있지도 않은 카펫 얼룩이나 지울까?’
고민하던 차에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윈스턴의 허락에 문이 열리자 캠벨 소위가 걸어 들어와 경례를 했다.
“대위님, 거번으로 가는 호송차는 3시에 온다고 합니다.”
수용소로 가는 호송차가 온다는 소리에 샐리는 한시름 놓았다. 아저씨가 변절하지 않았구나. 이중 첩자를 미리 판별해 내는 일도 샐리의 임무였다.
“음… 아직 시간이 있군. 손님을 심심하게 해선 안 되겠지.”
피에 미친 악마. 어서 네게 걸맞은 지옥으로 떨어지길.
또 한 차례 신문이 있을 거란 말에 샐리는 속으로 저주를 퍼부었다.
“네, 당장 준비하겠습니다.”
캠벨이 나가자 샐리는 윈스턴의 책상으로 다가갔다. 재떨이를 비운다는 핑계였지만 저 망할 개자식은 아직도 시가에 불을 붙이지 않았다.
그가 고개를 서류에 향한 채로 시선만 들어 올렸다. 샐리는 생긋 웃으며 빈 탄산수 병이 놓인 쟁반을 집어 들었다. 청소 도구가 든 양동이와 쟁반을 들고 태연하게 문으로 향하는 길, 가슴 끝이 또 한 번 따끔했다.
***
고문실 문틈으로 새어 나오던 비명이 멎었다.
이윽고 프레드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나왔다. 구역질을 참는지 이를 악물고 있었다. 그는 샐리의 손에 들린 죄수복을 받아 안으로 들어갔다.
샐리는 귀에 꽂아 두었던 솜을 뽑아 주머니에 넣었다. 주머니 안에 든 편지가 바스락거렸다.
문이 다시 열리는 순간, 청소 도구가 가득 든 양동이를 보란 듯 두 손에 들었다. 한 무리의 군인들이 쏟아져 나오며 샐리에게 목례를 했다.
그 한가운데, 점심때보다 수척해진 아저씨가 있었다. 죄수복을 입은 그는 축 늘어진 손발에 족쇄를 찬 채 가축처럼 끌려가고 있었다.
그의 떨리는 눈에서 공포를 읽은 샐리는 웃음기 없는 얼굴로 단호한 눈빛을 보냈다.
‘구조대가 반드시 갈 거예요.’
회색 코트 자락이 보이자 곧바로 시선을 거뒀다. 고문실 밖으로 나오는 윈스턴은 매음굴이나 카바레 밖으로 나온 사내의 기운을 풍겼다.
쌓인 욕구를 푼, 산뜻한 낯이었다.
“그럼 오늘도 잘 부탁해.”
그가 샐리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고 복도 저편으로 사라지자 그녀는 곧바로 고문실 청소를 시작했다.
매트리스는 ‘손님’이 나갈 때마다 갈 수밖에 없었다. 피와 오물로 엉망이 된 매트리스를 복도에 내어놓고 창고에서 새 매트리스를 낑낑대며 꺼내 와 침대에 놓았다.
고문실 관리는 이 저택에서 가장 고되고도 역한 일이었다. 그 탓에 모두가 꺼리지만 그만큼 주급이 높기도 했다.
그런 까닭에 원래는 노름꾼 남편을 둔 중년의 하녀, 에델이 몇 년째 맡고 있었다.
샐리가 처음 이 저택에 하녀로 잠입했을 때는 윈스턴 부인의 시중을 드는 일을 맡았다. 드레스 쇼핑, 귀부인들의 다과, 그리고 윈스턴 부인의 변덕과 험담 등. 정말이지 첩보원으로서 영양가는 조금도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고용인들 사이에서 일 잘하는 아이로 신용을 쌓았을 즈음 아픈 어머니 탓에 돈이 궁한 척했다.
아니나 다를까. 하녀장 벨모어 부인이 부리나케 그녀를 별채에 배정했다. 일 잘하는 하녀는 귀하지만 돈이 궁한 하녀는 위험하다. 윈스턴 부인의 드레스 룸에는 값비싼 물건이 가득하니까.
그렇게 에델과 사이좋게 고문실을 맡았지만 샐리가 이쪽을 자주 기웃대는 걸 에델이 수상히 여기기 시작했다.
“혹시 그런 식으로 대위님의 환심을 사려는 거면 그만둬. 여태 대위님 앞을 알짱대다 쫓겨난 아이만 몇 명인 줄 아니?”
다행히 본래의 의도는 까맣게 모르고 있었지만 임무에 거슬렸다. 그래서 머리를 좀 써서 쫓아냈다.
“제 먼 친척 아저씨가 그걸로 벼락부자가 됐거든요. 어찌나 부러운지. 가끔 고향에 놀러 올 때 저희 엄마 병원비를 두둑이 챙겨 주는데 예전의 그 수전노는 어디 갔나 싶더라니까요. 머리부터 발끝까지 아주 휘황찬란해서….”
노름꾼 남편 탓에 끝이 보이지 않는 빚더미에 깔려 사는 에델은 신대륙의 금광 이야기를 듣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주 지어낸 소리는 아니었던 게, 정말로 샐리의 이모네가 신대륙 금광 개발로 벼락부자가 됐다. 지금은 대양 너머의 대도시에 마천루를 가지고 떵떵거리며 살았다.
이모가 이따금 샐리에게 편지를 보내 같이 살자고 하지만 그녀는 매번 거절했다.
약한 이를 밟고 높이, 더욱 높이 올라간다. 그렇게 피로 물든 부를 쌓아 번드르르하게 입고 기름지게 먹는다. 돈이 만든 계급 속의 그들은 왕정의 돼지 새끼들과 다를 바 없어 보였다.
샐리의 돌아가신 부모님, 그리고 더 나아가 가족처럼 여기는 동지들이 꿈꾸는 세상은 그런 게 아니었다.
“그 이상향은 혁명군의 피를 먹고 자라나 열매를 맺을 것이다.”
샐리는 어릴 적부터 자주 외쳤던 구호를 되새겼다.
말 그대로 혁명군의 피가 검은 돌바닥 사이에 엉겨 붙어 있었다. 솔로 긁어내는데 주머니의 편지가 바스락댔다.
“샐리가 내 딸이었으면 좋겠어.”
매일 오후 다섯 시를 기다리는 샐리에게 애플비 부인이 한탄하곤 했다.
“우리 딸은 부활절과 성탄절에만 편지를 보낸단 말이지.”
샐리는 윈스턴 저택에 우편 마차가 오면 어김없이 달려가 편지 한 장을 내밀었다. 다들 병원에 있는 어머니에게 보내는 편지인 줄 안다. 그 상냥하고 심상한 글 속에 실은 동지에게 보내는 암호가 숨어 있다는 건 오로지 그녀와 우편배달부 피터만이 알았다.
오늘 편지에는 아저씨가 거번 수용소로 이동한다는 메시지가 숨겨져 있었다.
호송차는 이미 떠났다. 당장 지부에 전화를 걸어야 할 것 같지만 저택의 전화는 도청당할 수도 있었다. 전화는 피터가 시내로 돌아가는 즉시 걸어 줄 것이다.
이곳에서 거번 수용소까지는 차로 다섯 시간 거리. 그사이 거번 근처의 구조대가 구출 작전을 세우고 대기할 시간은 충분했다. 아마 아저씨는 거번 시내에 도착하기도 전에 동지의 품으로 돌아올 것이다.
샐리는 소독약과 표백제 냄새가 진동하는 고문실 밖으로 나왔다. 복도 안쪽으로 들어가 모퉁이를 돌면 별채 꼭대기 층까지 이어진 세탁물 투입구가 있었다.
그녀는 투입구를 열고 바구니에 피로 젖은 빨랫감을 채웠다. 가득 찬 바구니를 본관의 세탁실로 들고 가려던 차였다.
“브리스톨 양.”
머리 위로 갑작스레 쏟아진 목소리에 샐리는 바구니를 놓쳤다. 버드나무 바구니가 바닥으로 철퍼덕 떨어졌다.
“…대위님?”
언제 왔지? 발소리를 전혀 듣지 못했다.
머리를 틀어 올려 휑하게 드러난 뒷덜미에 뜨거운 숨결이 닿았다. 샐리의 팔뚝에 소름이 오싹 돋아 올랐다.
듬성듬성한 잔머리 아래로 코끝이 파고들어 왔다. 윈스턴이 살갗에 코를 묻은 채 숨을 들이켜자 다리가 후들거렸다. 피하고 싶었지만 사방이 차가운 벽, 그리고 피와 살로 된 뜨거운 벽으로 막혀 있었다.
“샐리, 네게서 좋은 냄새가 나.”
그녀에게서 나는 건 피와 소독약 냄새뿐이다.
그가 한 발짝 더 다가왔다. 투입구 속의 벽과 윈스턴의 가슴팍 사이에 갇힌 샐리의 심장이 쿵쿵 발작적으로 날뛰었다.
‘위험해. 이건 위험해.’
두 손으로 벽을 밀어내자 딱딱한 물건이 엉덩이 사이를 찔렀다. 그게 권총이 아니라는 건 쉽사리 알 수 있었다. 여러 겹의 천으로도 막지 못한 열기가 샐리의 여린 살갗을 멋대로 달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