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빌어봐-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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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고문실 문 뒤에서 둔탁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두 병사가 식사를 마치고 왔다기에는 지나치게 짧은 시간이었다.
샐리는 말을 멈추고 잽싸게 침대로 갔다. 피로 물든 이불보의 한쪽을 벗겨 내는 찰나 문이 벌컥 열렸다.
“…샐리 브리스톨, 여기서 뭐 하는 거지?”
깃털이 떨어지는 것처럼 느릿하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등골에 날카롭게 꽂혔다. 어째서 지금, 그것도 하필이면 윈스턴 대위가 돌아온 걸까.
샐리는 대충 벗긴 이불보를 품에 안고 천천히 뒤돌아보았다. 어린 이등병 하나가 딱딱하게 굳은 자세로 활짝 열린 문을 붙잡고 있었다.
그 사이로 연회색 트렌치코트를 어깨에 걸친 남자가 주저 없이 걸어 들어왔다. 펄럭이는 코트 아래의 검은 장교복에는 색색의 훈장이 자로 잰 듯 반듯하게 매달려 있었다.
저 자리에 훈장이 하나씩 늘 때마다 샐리는 구역질이 났다. 훈장에서 피의 악취가 진동하는 것만 같았으니까.
“안녕하세요, 대위님. 손님께 점심을 드리고 빨랫감을 챙기고 있었어요.”
아무것도 모른다는 순진한 얼굴에, 늘 하는 일인데 왜 새삼 물으시냐는 의아한 기색을 조금 섞었다.
“너 혼자.”
“네. 에델 아주머니는 한 달 전에 관두셨….”
“하….”
윈스턴이 입술을 부드럽게 휘어 올리더니 낮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얼음장처럼 시린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또 바싹 말라 버린 입술을 축이고 싶은 충동이 일었지만 샐리는 참았다. 긴장하고 있다는 티를 내면 저자가 눈치챌지도 몰랐다.
‘설마 벌써 눈치챈 건 아니겠지? 무슨 대화를 했냐고 물으면 댈 핑계는 많은데….’
속으로 다급하게 온갖 작전을 세우면서 겉으로는 그저 의아한 척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갸웃했다.
윈스턴은 테이블에 앉은 사내와 샐리의 사이에 섰다. 큰 키와 몸집 탓에 장벽을 마주한 것만 같은 위압감이 느껴졌다.
벌써 손을 떨기 시작하는 사내를 잠시 싸늘한 눈으로 내려다본 그가 각진 정모를 벗었다. 눈빛만큼이나 차가운 금발을 날렵하게 뻗은 손가락이 가지런히 쓸어 넘겼다.
“그건 나도 알아, 샐리. 내 말은 그게 아닌 거 잘 알잖아.”
연인이라도 타이르는 듯한 말투로 샐리를 가볍게 다그친 그가 돌연 뒤돌았다. 검은 가죽 장갑을 낀 손에 들린 승마용 채찍의 끝이 그의 부관이나 마찬가지인 소위를 가리켰다.
“캠벨, 당장 문 앞을 지키고 있던 놈들을 데려와.”
섬뜩하리만치 낮은 목소리. 그 순간 샐리의 머릿속에서는 저 채찍이 공기를 휙 가르다 살을 찢는 환청이 울렸다.
샐리는 침대보를 품에 안은 채 한쪽 벽에 죄지은 사람처럼 서 있었다.
윈스턴은 병사들을 기다리는 동안 고문실을 처음 보기라도 하는 양 찬찬히 둘러보았다. 샐리의 옆에 매달린 쇠사슬을 들어 그녀의 목 앞에 장난스레 대어 볼 때는 등골이 오싹했다.
어서 데려왔으면. 하지만 데려오지 않았으면.
“대위님, 데려왔습니다.”
샐리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안도인지 좌절인지 알 수 없었다.
한창 식사를 하다 끌려왔는지 두 병사의 입술에는 기름기가 번들거렸다. 상병이 잔뜩 긴장한 얼굴로 경례 자세를 취했다. 이마에 댄 손날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대위님, 부르셨습니까.”
“맞아, 내가 왜 불렀을까? 한번 맞혀 봐.”
친구라도 대하듯 가벼운 말투였으나 이 상황을 가볍게 여기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상병이 초조한 눈으로 고문실 안을 둘러보았다. 제가 뭘 잘못한 건지, 그 해답은 이 방 안에 있는 게 틀림없으므로.
대위와 한 발짝 떨어져 벽에 붙어 서 있는 하녀에게 시선이 닿는 순간 그는 답을 찾았다.
‘저 녀석은 잽싸게 들어왔다가 나간다더니 왜 아직 여기 있는 거야?’
그는 속으로 욕지거리를 짓씹었다.
“하, 하녀를 혼자 들여보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정답.”
윈스턴의 눈꼬리가 느슨하게 휘었지만 고문실 안을 감도는 긴장감은 더욱 팽팽해질 따름이었다.
휙. 휙.
그의 오른손에 들린 채찍이 차디찬 공기를 날카롭게 가르고 왼 손바닥을 가볍게 내려쳤다. 그럴 때마다 두 병사가 제가 맞은 양 움찔 떨었다.
“귀가 있어서 내 지시를 듣긴 했는데, 뇌가 없어서 이해는 못 했나 봐?”
“아, 아닙니다.”
“그럼 왜 나의 샐리 브리스톨 양을 홀로 들여보내지 말라고 했는지 말해 볼까.”
샐리의 속이 울렁거렸다. ‘나의 샐리 브리스톨 양’이라니. 그 지나치게 신사적이면서도 지나치게 무례한 호칭 탓만은 아니었다.
윈스턴이 그녀의 곁으로 바짝 다가와 어깨를 끌어안기까지 했다. 그의 손이 닿은 곳부터 등허리까지 솜털이 바짝 곤두섰다.
다른 하녀라면 이럴 때 어떻게 행동할까? 재빨리 머리를 굴린 샐리는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며 한쪽 뺨에 차가운 손등을 얹었다.
‘수줍은 척이 제발 통하길.’
프레드 스미스 이등병의 동요하는 눈동자는 못 본 척했다.
“저 쥐새끼 같은 녀석이….”
상병이 방 반대편 테이블 앞에 나무토막처럼 굳어 있는 사내를 한번 흘끔대고는 다시 대위에게 공손히 눈을 맞췄다.
“발정이 나서 샐리를 덮칠 수도 있다고 하셨습니다.”
샐리에게 발정이 난다고? 스푼을 들 힘도 없어 보이는 자가 물건을 세울 힘이 있을 리가.
게다가 샐리는 예쁘장하게는 생겼으나 사내의 음탕한 호기심을 동하게 하는 구석은 없는, 심심한 여자였다.
고로 그로서는 이유가 와 닿지 않았지만 상관이 그렇다 하면 그런 것이니 별수 없었다.
“샐리, 잘 들었지?”
윈스턴이 샐리의 어깨에 감은 손을 드디어 거뒀다. 하지만 긴장을 풀려는 찰나, 그 손끝이 그녀의 턱 끝을 들어 올렸다.
“이곳은 연약한 숙녀에게는 위험해.”
“네, 주의하겠습니다.”
곧바로 원하는 대답을 들려주었지만 그는 턱을 놓아주지 않았다. 키스라도 할 듯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채 샐리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내겐 당신이 더 위험해.’
이번에는 바짝 마른 입술을 적시지 않을 수 없었다. 혀끝이 아랫입술을 스치는 순간 윈스턴이 미간을 미세하게 구기더니 턱 끝에서 손을 거뒀다.
“너희들도 잘 들었나?”
그가 규정을 어긴 병사들에게 다가갔다.
“이곳은. 연약한. 샐리에게는. 위험하다고.”
말을 멈출 때마다 가늘고 유연한 승마용 채찍 끝의 세모난 가죽이 병사들의 명치를 쿡, 쿡 찔렀다. 목소리는 점차 성난 사자의 포효처럼 사나워졌다.
식은땀이 샐리의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프레드의 셋째 누나와는 세상에 둘도 없는 친구 사이였다. 게다가 아기 때부터 봐 와서 친동생 같은 프레드가 혹독한 벌을 받을까 봐 조마조마해졌다.
샐리는 고개를 푹 숙였다. 이내 겁먹은 토끼처럼 웅크린 어깨가 바들바들 떨리고 커다란 눈망울에서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졌다.
“흐흑, 죄송합니다. 제가 멋대로 들어온 탓이에요. 그러니 벌은, 끅, 제가 받을게요, 대위님.”
끅끅거리며 그의 트렌치코트 자락을 슬며시 잡고 흔들었다.
“남자는 여자가 우는 순간 바보가 되지.”
그런 말을 어머니가 하셨다. 다만 너무 자주 쓰면 통하지 않으니 적당히 하라고도 하셨지.
이자도 어쩔 수 없는 남자인가. 윈스턴이 프레드의 가슴팍을 찌르던 채찍을 멈추더니 샐리에게 다가왔다.
“샐리, 다시는 이런 짓 하지 않으면 돼. 응? 알겠지?”
“흑, 네….”
소매로 거짓된 눈물을 닦아 내려는데 그가 막았다. 윈스턴의 손이 그녀의 턱을 감싸 들었다. 곧 반듯하게 접힌 손수건이 눈물 자국을 하나하나 가볍게 눌러 훔쳤다.
냉혈한답지 않은 행동에 모두의 눈이 커졌다. 그가 하녀의 눈물로 젖은 손수건을 잠시 내려다보다 재킷 안주머니에 넣었을 때는 모두의 눈이 튀어나올 기세로 커졌다.
한 번 쓴 손수건은 곧바로 바닥에 버리는 그였다. 그런데 다른 것도 아닌, 미천한 하녀 따위의 체액이 묻은 손수건을 챙긴 것이다.
“앞으로 식사는 밖에 두고 가.”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어린아이를 타이르듯 다정한 목소리에 경계를 풀던 순간이었다.
턱을 놓던 윈스턴의 손이 허공에서 멈추더니 샐리의 왼손 엄지를 집어 올렸다. 부드럽던 눈빛이 순식간에 날을 세웠다.
그의 시선을 따라가던 샐리의 피가 싸늘하게 식었다. 손톱 밑에 작은 달걀 껍데기 조각이 붙어 있었다.
윈스턴이 첩자의 앞에 가지런히 놓인 달걀 껍데기 무더기를 보고 피식 웃었다.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바짝 깎은 윈스턴의 손톱이 샐리의 손톱 아래로 파고들었다. 살을 후벼 파낼 것처럼 깊이 들어온 손톱이 잔인하게 비틀렸다.
연약한 살을 짓이기는 통증에 신음이 나오려는 걸 샐리는 꾹 참았다. 고문의 고통을 견디는 훈련이 몸에 배어 버려 굳이 참을 필요 없을 때마저 참게 되는 건, 나쁜 습관이었다.
윈스턴은 제 손톱 끝에 들러붙은 흰 조각을 잠자코 내려다보다 툭 튕겨 냈다. 싸늘한 한마디가 껍데기와 함께 샐리의 머리로 날아왔다.
“샐리, 넌 너무 착해서 거슬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