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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빌어봐-1화

본문

쿵푸벳

내게 빌어봐

- 리베냐

1화

착한 하녀, 교활한 첩자, 가슴 아픈 첫사랑, 죽이고 싶은 원수의 딸.

그리고 그의 아이를 밴 채 사라진 도망자.

그 여자에겐 수많은 이름이 있었다.

***

주방 문을 여는 순간 갖은 식재료의 냄새와 뜨거운 김이 훅 끼쳐 왔다. 하녀들은 문을 연 이가 누구인지 돌아볼 여유도 없이 점심 준비로 분주했다.

돌아볼 필요도 없었다.

칼질 소리와 지글지글 기름 끓는 소리가 시끄러운 주방으로 발을 들인 사람은 평범한 하녀였으니까.

무릎 끝을 스치는 검은 하녀복과 얼룩 하나 없는 흰 앞치마, 거기에다 수수한 다갈색 머리까지. 윈스턴가의 저택에서는 크리스털 샹들리에만큼이나 흔한 용모였다.

하녀는 식기장에서 나무 쟁반과 수프 접시 하나, 스푼 하나를 집었다. 색색의 병조림이 일렬로 진열된 찬장으로 가 바구니에서 흰 빵 하나와 삶은 달걀 두 개를 집는데 그제야 누가 말을 걸어 왔다.

“그 별채 손님 아직도 있니?”

주방장을 맡고 있는 애플비 부인이 갓 구운 고기 파이를 오븐에서 꺼내며 혀를 쯧쯧 찼다. 젊은 하녀는 늘 그렇듯 시무룩한 척 아랫입술을 살짝 내밀었다.

“그러게 말이죠. 그래도 오늘은 나가지 않을까 싶어요.”

“쯧쯧, 샐리 네가 정말 고생이다.”

애플비 부인이 고기 파이를 주방 한가운데의 큰 테이블에 놓더니 빈손을 샐리라고 불리는 하녀에게 내밀었다.

“이리 주렴.”

빈 수프 그릇을 받아 간 부인이 스토브 옆에 놓인 커다란 솥을 열더니 다 식고 멀건 수프를 가득 채워 샐리의 쟁반에 올려 주었다. 그릇에 떠다니는 거라곤 다 바스러진 자투리 재료뿐이었다.

“에델도 없이 그 험한 일을 혼자서 군말 없이 하다니.”

에델은 한 달 전까지만 해도 샐리와 함께 별채 지하의 ‘별실’을 담당하던 중년의 하녀였다. 지금은 노름꾼 남편과 일확천금의 꿈을 꾸며 신대륙으로 향하는 배에 몸을 싣고 있을 사람이었다.

윈스턴가 저택의 고용인들 모두 역겹고 꺼림직한 일을 홀로 맡게 된 샐리를 안타까워했다. 하지만 도와주겠다는 말은 절대로 하지 않는다. 샐리는 그래서 도리어 한시름 놓았다.

“벨모어 부인께 잘 이야기해 보렴. 사람을 하나 더 구해 주든지 주급을 더 올려 주든지.”

“그래 봐야겠네요.”

하지만 샐리가 하녀장에게 그런 부탁을 하러 갈 일은 없을 거다.

샐리는 쟁반을 들고 저택 서쪽으로 난 쪽문을 나왔다. 반듯하게 깎인 푸른 잔디 사이로 자갈길이 이어졌다.

머지않아 작게만 보이던 별채가 담장 위의 날카로운 철조망이 또렷이 보일 정도로 가까워졌다.

벚꽃 잎이 흩날리는 완연한 봄 속에서 별채 홀로 겨울의 음산한 기운을 내뿜었다. 그럴 만도. 비명이 끊임없이 지하를 울리는 저곳은 유령의 집이나 마찬가지였다.

별채 정문에서 경비를 서는 군인들이 보이자 샐리는 마른 입술을 적시며 입꼬리를 바짝 끌어 올렸다.

“안녕, 마틴.”

“안녕, 샐리.”

매일같이 보는 병사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곧장 철문을 열어 주었다. 그러니 그가 입술이 바싹 마르도록 긴장하게 만든 사람은 아니었다.

샐리는 별채 입구로 천천히 걸어가며 앞뜰을 구석구석 곁눈질했다. 이 저택의 주인인 윈스턴 대위의 차는 없었다. 아직 부대에서 돌아오지 않았단 뜻이었다.

잘됐다.

곧장 서늘한 건물 안으로 들어가 지하로 내려갔다. 몸에 익은 대로 왼쪽 복도를 따라 걸었다. 복도 중간의 철문을 지키고 선 병사가 샐리를 보자마자 문을 열어 주었다.

삼엄한 경비는 3중이었다. 즉, 따돌려야 할 무리가 하나 더 남았다.

오른쪽으로 꺾어진 모퉁이를 돌자 군인 둘이 의자에 앉아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안녕, 샐리.”

군인의 맞은편에는 새카맣고 투박한 철문이 굳게 잠겨 있었다. 호화로운 저택 별채와 동떨어진 기운을 풍기는 곳이었다.

“두 분, 식사는 하셨어요?”

샐리는 군인들에게 다가가며 눈꼬리를 한껏 휘어 웃었다.

“아뇨, 아직 배식이….”

가슴팍에 ‘프레드 스미스’라는 명찰을 단 이등병이 옆에 앉은 상병을 조심스레 곁눈질하며 대답했다.

“본관에서 곧 가져올 거예요.”

한창 배가 고플 시각, 식사 이야기에 수프 냄새까지 풍기니 미끼를 덥석 물지 않을 사람은 없었다.

“오늘 메뉴는 뭐야, 샐리?”

“고기 파이예요. 주방 문을 열자마자 고소한 냄새가 어찌나 진동하던지. 침이 꼴깍 넘어가던걸요.”

상병의 흐리멍덩하던 눈빛이 일순 번뜩였다.

“아…. 이번에도 늦게 가면 없는 거 아닌가요?”

아직 소년티를 벗지 못한 이등병이 상병의 눈치를 보며 한마디를 넌지시 던졌다. 그러곤 곧바로 샐리에게 의뭉스러운 시선을 보냈다. 그 눈빛이 칭찬을 요구하는 강아지 같았지만 그녀는 못 본 척, 상병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젠장할…. 콩소메 수프는 지겨운데….”

모르는 이는 고급 요리를 지겨워하는 남자가 분수도, 고마움도 모른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건장한 젊은 남자에게 닭고기 완자와 채소 몇 조각뿐인 수프를 점심이라고 주면 불평이 나올 수밖에.

장교도 아닌 일반 병사들에게 값비싼 식사를 아낌없이 베푸는 관행은 사실 윈스턴 부인의 허영과 냉대에서 비롯됐으니 고마워할 이유도 없었다.

“몇 개 안 구운 것 같던데…. 늦기 전에 얼른 식당으로 가셔야 할 거예요. 문은 제가 잠글게요.”

샐리가 쟁반을 한 손에 옮겨 들고 주머니에서 검은 열쇠를 꺼내 들자 상병이 곤란한 얼굴을 했다.

“대위님께서 샐리 혼자 들여보내면 안 된다고 하셨는데….”

흐려지는 말끝에서 톡 치기만 해도 한쪽으로 휙 기울어질 것 같은 조짐이 느껴졌다. 샐리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눈썹을 쫑긋거리며 웃었다.

“괜찮아요. 저 손님 난폭하진 않은 것 같던데요? 쟁반만 놓고 빨랫감만 챙겨서 바로 나올 거예요. 밖에 그렉도 있잖아요.”

모퉁이 너머 철문을 지키고 있을 병사 쪽을 눈짓했다. 그제야 상병이 마지못한 척 몸을 일으켰다.

“스미스, 가자.”

두 사내가 모퉁이를 돌아 사라지자 샐리는 열쇠로 육중한 철문을 땄다. 끼익, 문이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안쪽으로 물러났다. 두 뼘만큼 벌어진 틈으로 비릿한 피 냄새가 흘러나왔다.

샐리는 어느새 다시 마른 입술을 적시고 어두컴컴한 방 안으로 손을 넣었다. 곧바로 스위치가 손에 잡혔다.

딸깍 소리와 함께 벽 등 네 개가 동시에 켜졌지만 방은 그다지 밝아지지 않았다. 벽은 물론 바닥과 천장까지도 검은색인 탓이었다.

불이 켜지자 한쪽 벽의 좁은 침대에 몸을 웅크리고 있던 중년의 사내가 움찔 떨었다. 샐리는 재빨리 ‘별실’ 안으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아저씨, 저예요.”

온몸을 딱딱하게 굳히고 있던 ‘별실의 손님’이 긴 한숨을 내쉬며 긴장을 풀었다. 아직 눈이 부셔 샐리의 얼굴은 보지 못했지만 목소리만은 똑똑히 들었을 거다.

사내의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생기 넘치던 얼굴이 이 방에 발을 들이는 순간 시체처럼 말라비틀어지는 일은 여태 수도 없이 봐 왔다.

하지만 그 얼굴이 어릴 적부터 알고 지내던 마을 아저씨라면 마음이 더욱 아렸다.

“식사 가져왔어요.”

샐리는 침대 발치의 작은 테이블로 걸어갔다. 그사이 사내가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반도 일어나지 못하고 끄응, 고통에 찬 신음을 냈다.

그녀는 쟁반을 테이블에 놓고 재빨리 사내에게 다가갔다. 그를 부축해 테이블 앞 의자에 앉히는 동안 괜찮냐는 형식적인 말 따위는 하지 않았다.

여러 번 겪어 본 탓에 이제는 안다.

온갖 끔찍한 고문을 실낱같은 정신과 체력으로 버티고 있는 사람에게 괜찮냐는 값싼 위로는 기폭제가 될 수도 있다는 걸.

말없이 스푼을 쥐여 주고 삶은 달걀의 껍데기를 까기 시작했다. 사내는 손톱이 모조리 뽑힌 터라 달걀 껍데기를 까는 간단한 일조차 할 수 없었다.

“간밤엔 별일 없었어요? 어젯밤에는 본관에서 파티가 있어서 불려 가는 바람에….”

“없었, 쿨럭, 쿨럭.”

사내가 기침을 시작하자 샐리는 테이블에 놓인 주전자에서 컵에 물을 따라 내밀었다.

그래도 운이 좋은 편이었다. 그는 하루 한 끼 식사와 물은 허락받았으니까. 가끔 식사는커녕 물조차 주지 않는 때가 있었다.

마른 목을 축이니 기침이 잠잠해졌다. 샐리는 그가 다시 스푼을 들기 전에 잽싸게 주머니에서 작은 약병 하나를 꺼냈다.

“이거부터 드세요.”

모르핀이 든 진통 물약이었다. 사내가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벌리자 샐리는 그의 입 속으로 진통제를 한 스포이트 흘려 넣어 주었다.

약병을 다시 주머니 속에 숨기고 달걀을 마저 까 주었다. 그사이 수프를 허겁지겁 먹어 치우느라 바쁜 사내에게 계속 말을 걸었다. 누가 오기 전에 빨리 대화를 끝내고 나가야 하니 식사를 다 마칠 때까지 기다릴 여유 따위 없다.

“조금이라도 얘기한 건 없죠?”

“…….”

사내가 스푼을 멈추더니 고개를 들었다. 눈빛에 지독한 경멸이 서려 있었다.

이 또한 매번 있는 일이었다.

며칠째 고문에 시달린 동료에게 샐리의 질문이 기꺼울 리 없었다. 추궁하는 건가? 감시하는 건가? 그런 착각마저 들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도 어쩔 수 없었다. 새어 나간 정보가 있다면 최대한 신속히 알아야 대처를 할 테니까. 자칫하다가는 아저씨만이 아닌 다른 이들의 목숨도 위험할 수 있었다.

“솔직히 말해 주셔야 하는 거 알죠?”

“…없어.”

사내는 샐리를 오래도록 노려보더니 수프 그릇으로 고개를 숙이며 답을 내뱉었다. 침이라도 뱉는 듯한 말투였다.

“오늘 중으로 이동할 것 같아요. 어딘지 알아내는 대로 사람을 보낼게요. 그러니까 절대로 입 열지 말고 조금만 더 참아 주세요. 아시죠? 구조대 사람들 실패 따위 모르는….”

마지막 당부를 쏟아 내던 때였다.

붐플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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