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죽일 집착남주가 이상해졌다-108화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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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움츠러들었지만,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용기를 냈다.
“아니요, 그만큼 저는 절박해요. 아이를 낳지 못한다면 저는 우울감에 빠질 거예요. 그건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예요. 저는 시도도 해보지 않고 당신과 나의 아이를 포기하고 싶지 않아요.”
간절한 마음에 내 눈에는 어느새 눈물마저 고였다.
우울증으로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은 과장이었지만, 언젠가는 아이를 낳을 수 있다는 희망으로 우울한 마음을 털어낼 수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런데 칼릭스가 그런 희망도 주지 않겠다고 한다면 나는 지금보다 더 좌절하고 슬픔에 빠질 게 분명했다.
소설에서 나를 이렇게 약한 몸으로 설정한 내 과거를 자책하며.
칼릭스는 아무 말이 없었다.
한참의 침묵 후, 그가 말했다.
“생각해 보지.”
!!!!!!!!!!!!!
생각해 본다니!
그가 한발 물러선 것이었다.
기쁨으로 내 가슴이 날뛰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며칠 후, 칼릭스가 몇 개월 만에 내 침실로 찾아왔다.
마침내 그가 아이를 가지기로 결심한 것이었다!
그날 밤 그는 지난 몇 개월간 어떻게 살았나 싶을 정도로 밤이 새도록 나를 내버려 두지 않았다.
내가 조금만 더 버텼으면 자기가 먼저 아이를 갖겠다고 항복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리고 그는 더 이상 피임을 하지 않았다.
그날 밤, 나는 새로운 사실도 하나 알게 되었다.
아이를 갖겠다는 의지로 온갖 좋다는 음식은 다 먹으며, 열심히 운동하고 체력을 기른 것이 뜻밖의 수확을 가지고 왔다는 것을.
예전과 달리 동이 터올 때까지 나를 가만두지 않는 그 때문에 기절하듯 중간에 잠들어 버리지 않고, 제정신으로 긴 밤을 즐기게 되었다.
*****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임신에 성공했다.
사실, 임신이 안 되면 그게 더 이상한 상황이었지만.
걱정했던 것과 달리 나는 임신 기간 동안 비교적 건강했고 열 달 후 출산도 쉽지는 않았지만, 무사히 해냈다.
세상에 나온 사랑스럽고 천사 같은 내 아이 ‘에릭스’를 보며, 임신 기간 동안의 힘듦과 죽을 것 같았던 산통도 다 잊혔다.
그러나 칼릭스는 에릭스가 한 돌이 된 즈음, 그때까지 참고 있었던 통보를 했다.
더 이상 아이를 갖지 않겠다는 말이었다.
나는 그건 말도 안 된다고, 내 어머니도 아이를 둘은 낳았다고 항변하려 하던 것을 깨끗이 포기했다.
최후통첩을 날리듯 말하는 그의 표정이, 만약 내가 다시 아이를 낳겠다고 하면, 나를 다시는 보지 않겠다고 말할 정도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사실, 아이 하나를 낳으니 하나를 더 낳고 싶다는 욕심이 생기긴 했다. 하지만 에릭스의 출산 이후, 몸을 회복하기까지 일 년이나 걸린 데다, 완벽한 몸 상태도 아니었다. 여기서 또 아이를 가진다는 것은 도박에 가까운 거라는 걸 나도 알고 있었기에 고집을 피울 수는 없었다.
결국, 나는 에릭스가 건강하게 세상에 나와 준 것만도 감사하게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딸이었다면 딸의 황위 계승이나 양자를 들여야 하는 문제가 생길 수 있었지만, 에릭스는 아들이어서 그런 문제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있었다.
에릭스는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랐다.
사랑하는 남편과 아들.
나는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행복했다.
에릭스가 두 돌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내가 다커스 제국을 탈출할 때 데리고 온 하녀 메리가 이상하게도 주춤거리며 내 주위를 서성거렸다.
그녀는 딱히 마음을 준 사용인이 없었던 내게, 어느새 가장 소중한 하녀가 되어 있었다.
메리는 내 감시자이던 예나, 마음을 나눈 사이가 된 지금이나 내게 먼저 말을 거는 경우가 거의 없었지만, 꼭 해야 하는 경우엔 주춤하는 법 없이 단호하게 말하는 편이었다.
그런 그녀가 할 말은 있는 것 같은데, 그녀답지 않게 머뭇거리기만 하는 모습이 이상했다.
왜 저러지?
“메리. 내게 무슨 할 말이라도 있니?”
“예, 황후 마마, 실은 제가 휴가를 받고 싶습니다.”
“휴가?”
메리는 휴가를 가라고 떠밀어도 갈 데도 없다며 거절하곤 했었다.
“제가 결혼을 해야 합니다.”
“뭐?”
결혼? 어머나! 메리가?
나는 뜻밖의 말에 놀랐지만, 생각해 보면 내가 놀랄 일이 아니었다.
메리도 이제 혼기가 꽉 찬 아가씨였으니까.
그래, 메리도 결혼하긴 해야지.
그렇지만 도대체 언제 연애를 한 거지?
난 메리가 연애를 하거나 누군가를 소개받았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기에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메리, 정말 축하해. 그런데 도대체 어떤 남자야? 난 메리가 누구를 만나고 있는 줄은 몰랐어….”
메리의 얼굴이 붉어졌다.
“황후 마마, 그때 황후 마마를 이곳까지 모시고 온 소렐 왕국의 마부 한스입니다.”
“뭐?”
나는 너무나 놀라버렸다.
몇 년 전, 그 한스?
“소렐 왕국에서의 일을 정리하고 이곳 에버렌에서 자리를 잡느라 시간이 걸렸습니다만, 이제 마침내 안정적인 자리를 잡았고 저와 결혼을 하고 싶다고 청혼을 했습니다.”
“한스….”
나는 한스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에릭스를 낳은 이후쯤부터는 까마득히 잊고 있던 이름이었다.
“제가 결혼까지 하게 된 것은 모두 황후 마마 덕분입니다.”
내 덕?
그때 우리가 함께 탈출한 인연으로?
이런 경우가 다 있나?
메리랑 한스가 결혼을 하다니….
어안이 벙벙할 지경이었다.
3년이 넘는 기간 동안 메리와 한스가 연애를 해왔다는 얘기였다.
탈출할 그 당시부터 두 사람 사이에 불꽃이 튀었던 건가?
자세히 묻고 싶어졌지만, 메리의 성격상 부끄러워할 것 같아서 꾹 참았다.
천천히 물어보지 뭐.
아, 잠깐!
설마… 아니겠지?
“메리, 저… 혹시, 한스가 자리 잡았다는 일이 빵집 일은 아니지?”
메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마마?”
“뭐? 맞아? 빵집 한스야?”
“어떻게 아셨는지….”
이럴 수가!
“메리, 혹시 하녀 일을 그만두고 꽃집을 할 생각인 거야?”
나는 걱정스레 물어보았다.
꽃집 메리와 빵집 한스인 것이 불안했다.
메리가 나를 떠나면 안 되는데.
“꽃집이라니요. 저는 황후 마마를 절대로 떠날 생각이 없습니다. 다만 이제 결혼을 하게 되어서, 숙식 하녀에서 출퇴근 하녀로 소속을 옮기는 걸 허락해 주시길 바랍니다.”
“아….”
황궁에 소속되어 숙소를 배정받고 사는 하녀들이 있는 한편, 황궁으로 출퇴근하는 하녀들도 있었다.
메리는 이제 가정을 꾸리게 되었으니 출퇴근을 원하는 것이 당연했다.
물론 그만큼 내 최측근 하녀는 아니게 되겠지만, 그래도 메리를 위해서는 당연히 그렇게 해 주어야 했다.
꽃집을 한다고 나가버리지 않는 것만 해도 어디냐, 싶었다.
그녀는 내게 너무 소중한 사람이 되어 있었기에 나는 그녀를 잃고 싶지 않았다.
“그럼! 그러고말고. 메리, 정말 축하해. 한스와 메리라니, 두 사람은 정말 완벽할 거야! 아주 낮이고 밤이고, 완벽…. 하하하. 축하해.”
나는 머릿속의 떠오른 장면들에 머쓱해져서 어색하게 웃으며 그녀를 축하해줬다.
그때 마침, 낮인데도 불구하고 예고도 없이 칼릭스가 내 방으로 들어왔다.
칼릭스가 나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황후, 뭐가 그렇게 즐겁지?”
“아, 폐하 오셨어요?”
“뭐가 그대를 그렇게 웃게 만들었는지 궁금하군.”
메리는 칼릭스가 들어오자 재빠르게 내 방에서 나갔다.
칼릭스가 매번 이렇게 예고 없이 낮에 내 방에 들이닥칠 때면, 당연히 내 방엔 아무도 없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지곤 했으니까.
그리고 예상대로 이미 나를 침대로 끌어당기는 칼릭스에게 나는 조잘대기 시작했다.
“제 하녀, 방금 나간 하녀가 메리거든요.”
“메리?”
내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며 드레스의 어깨끈까지 같이 끌어내리고 있던 칼릭스가 되물었다.
내 말에는 별 관심이 없는 것 같았지만, 나는 개의치 않고 신이 나서 말했다.
“그런데 메리가 결혼을 한다고 하네요. 그래서 출퇴근 하녀로 소속을 바꿔주려고요.”
“음. 잘된 일이군.”
여전히 그는 크게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의 손은 이제 내 허리까지 내려가 있었다.
“그런데요, 글쎄 누구랑 결혼하는지 아세요?”
“글쎄, 내가 아는 사내일 리는 없을 것 같은데.”
그래, 네가 아는 사람은 아니지.
“한스요! 메리가 한스랑 결혼을 한대요.”
물론 칼릭스는 한스도, 메리도 알 리 없었다.
그렇지만 나는 신이 나서 혼자 말하면서도 깔깔깔 웃어댔다.
응?
그런데 한참을 웃다 보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내 허리에 닿아 있던 칼릭스의 손길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똑바로 앉아 나를 이상한 눈빛으로 내려 보고 있었다.
“왜… 그래요? 왜 뭐가….”
잘못됐어요?
내가 뭔가 크게 잘못한 것 같은 눈빛으로 나를 보고 있잖아.
왜 그래?
“한스.”
그가 혼잣말처럼 말했다.
한스?
누구냐고 물어보면 될 것을, 왜 저렇게 이상하게 말하지?
“한스가 누구냐면요….”
내가 설명을 시작하려는데 칼릭스가 어쩐지 간담이 서늘해지는 차가운 목소리로 나보다 먼저 말했다.
“빵집에서 일하는 사내인가?”
!!!!!!
세상에!
“그걸 어떻게 알았어요? 아니, 원래는 빵집에서 일하지 않았는데, 메리랑 결혼하면서….”
“린, 한스라는 사내와 잘 아는 사이였던 건가? 그저 소설 속….”
“네?”
소설 속이라고?
어엉?
설마 내 이상형, 빵집 한스를 알아?
칼릭스가 어떻게?
나는 너무 놀라 되물었다.
“한스를 아세요?”
“…….”
칼릭스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의 눈빛은 이글이글 타는 것 같았고 가슴은 크게 오르락내리락하며 무언가를 참는 기운이 느껴졌다.
그는 이제 완벽하게 내 몸에서 떨어져 있었다.
나는 오랜만에 보고 말았다.
꽉 말아 쥔 그의 왼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는 것을….
핏줄이 모두 불거져 나와 곧 터져버릴 것처럼 보였다. 저런 열 받은 주먹은 실로 오랜만에 보는 것이었다.
지금 도대체 뭐에 화가 난 걸까?
그리고 소설 속 한스라니, 정말 내 한스를 말하는 걸까?
어리둥절한 내게 그가 물었다.
“한스라는 사내가 지금 어디 있지? 에버렌에 있나?”
그렇게 말하는 그의 목소리가 워낙에 차고 날카로워서 나는 마치 그가 칼로 한스라는 이름을 베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뭔가 굉장히 불길한 예감이 밀려왔다.
한스가 에버렌에 있다고 말하면 큰일이 벌어질 것 같은 예감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