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죽일 집착남주가 이상해졌다-107화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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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얼굴에 나타난 경악을 눈치챈 것인지, 에이비가 침울하게 말했다.
“내 생각엔 황제 폐하는 네가 출산을 하다가 죽을까 봐 두려우신 것 같아. 그거 때문에 아이를 원하지 않으시는 게 아닐까?”
이런!
‘악!’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내 설정의 저주냐 뭐냐!
그놈의 설정들 때문에 내가 얼마나 개고생을 많이 했는데, 아이 문제까지 발목을 잡다니!
금세 죽어버릴 조연이었기에, 나 역시 엄마를 닮아 몸이 약하다고 쉽게도 써버렸던 과거의 내 손을 정말 때려주고 싶었다.
“그럼 나는 어쩌라고….”
나도 모르게 한탄의 말을 튀어나왔다.
웬만해서는 무엇이든 시원시원하게 대답을 해주는 에이비도 아무 말이 없었다.
아이를 가지라고 말해주기엔 내 건강이 걱정되고, 그렇다고 포기하라고 말할 수도 없으니 입을 다물어 버린 모양이었다.
나는 울고 싶어졌다.
나도 내 몸을 알았다.
아름답지만 약해빠진 내 몸을.
생각해 보니, 출산이 내 몸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나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정말 케일린의 엄마처럼 죽어버릴 수도 있었다.
내가 만약 정말 아이를 낳는 중에, 혹은 아이를 낳은 후에 죽어버리면, 정말 그렇게 된다면….
상상도 하기 싫었다.
내 칼릭스를 혼자 남겨 둘 수는 없었다.
아이를 못 가질 수도 있다는 생각과 내가 죽으면 칼릭스가 혼자 남는다는 생각에 절로 눈물이 났다.
과거의 내가 죽음을 두려워한 것은 그저 죽음 자체가 두려운 것이었다.
죽음 이후를 알 수 없는 두려움.
살아서 행복하게 내 삶을 누리고 싶다는 욕망.
그게 전부였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 지금, 나는 다른 의미로 죽음이 두려워졌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혼자 남겨 둘 수는 없다는 두려움.
내가 죽어버린 이후에 그가 느낄 슬픔과 괴로움은 상상만 해도 두려웠다.
“에이비, 나는 어쩌면 좋을까? 칼릭스 님이 그런 이유로 아이를 낳기 싫어하는 거라면, 그런 거라면 나도 두려워. 정말 아이를 낳고 죽어버리면 칼릭스 님과 내가 낳은 아이는 나 없이 남겨지는 거잖아.”
에이비는 말없이 내 손을 잡았다.
그때 마침, 자고 있던 아이크가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
아기가 꼬물거리는 사랑스러운 모습을 보자, 조금씩 흘러내리던 눈물이 급기야 왈칵 쏟아져버렸다.
나도 아이크처럼 사랑스러운 아이를 갖고 싶어.
나도 내 아이, 칼릭스의 아이를 갖고 싶어.
기지개를 켜며 일어날 기색을 보이던 아이크는 아직 잠이 덜 깬 것인지 다시 새근거리며 잠이 들었다.
에이비가 내 눈물을 닦아주며 말했다.
“린, 아이크를 낳아보니, 아이는 나보다 더 소중한 존재더라. 낳아놓고 내가 죽어버리면 절대로 안 될 만큼 소중한 존재. 그러니까 정말 아이를 낳고 싶다면 좀 더 건강해지려고 노력해 봐. 너의 어머니도 루크를 낳고 나서는 괜찮으셨잖아. 그러니 너까지 낳으신 거지. 포기하지 말고 건강해지면 돼.”
나는 에이비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케일린의 어머니는 아이를 둘이나 낳은 거였다.
나도, 노력도 해보지 않고 두렵다고 포기할 수는 없었다.
눈을 반짝이는 내게 에이비가 계속해서 말했다.
“아직 납치됐었던 후유증이 남아있을 수 있으니까 너무 성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좀 더 건강해져. 그러고 나서 몸이, 마음이 모두 준비가 되면 그때 아이를 가지는 거로 해, 응?”
“응, 그럴게.”
나는 마음을 단단히 다졌다.
반드시 건강해져서 칼릭스에게도 나 자신에게도 믿음과 확신을 주고 말리라고.
다시 잠든 아이크는 금세 다시 일어났다. 아이크를 품에 안고 놀아주다 보니 슬픈 감정을 위로받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젖을 먹고 한참을 논 아이크가 다시 다음 낮잠을 자려고 칭얼거리자 에이비가 이상하다는 듯이 말했다.
“매번 너 데리러 오던 기사는 오늘은 웬일로 이렇게 안 오는 거니? 아이크가 낮잠을 두 번이나 잘 시간 동안 널 내버려 둔 적은 없지 않아?”
“아, 그러네?”
에이비와 이야기를 하고, 아이크를 보느라 시간 가는 줄도 몰랐었다.
정말 웬일이지? 라지프가 이렇게까지 나를 오래 놔두다니?
너무 늦었다는 걸 깨달은 나는 그제야 서둘러 브록버크 가를 나섰다.
나와 보니 라지프가 집 바로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응? 여기 있었네요? 오늘은 왜 이렇게 오랫동안 저를 내버려 둔 건가요?”
“저는 명령에 따를 뿐입니다. 황후 마마.”
명령?
이상하네?
칼릭스는 그런 명령은 한 적이 없다고 했었는데….
“라지프 님, 폐하는 저를 언제 데려오라고 하는 명령은 내린 적이 없다고 하던데요?”
“…….”
라지프는 희한하게도 내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그저 마차로 나를 안내하기만 했다.
이상하네, 정말.
*****
황후 마마가 탄 마차의 옆에서 말을 타고 가는 라지프의 얼굴은 완전히 굳어 있었다.
그는 자신의 주군이자 황제인 칼릭스에게 단 한 번도 불만을 가진 적이 없었다. 칼릭스의 명령은 절대적으로 옳다고 믿으며 살아왔다.
그의 주군은 모든 분야에서 완벽했고 도덕적으로 흠결이 없었으며 공평무사하고 정의로웠다.
물론 전쟁에서는 무자비하고 가차 없었으나, 지휘관으로서 전쟁터에서의 그런 모습은 오히려 장점이라 할 수 있었다.
다커스 전에 대해서도, 더러는 황제의 폭주에 대한 말들이 들려왔었지만, 라지프 스스로도 다커스 제국에 대한 분노가 극에 달해 있었기에 황제의 행동은 지극히 정의롭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마침내 오늘, 그는 자신의 절대적인 주군이자 황제가 완벽한 존재가 아니란 것을 인정하고 말았다.
완벽하기는커녕, 완벽히 비도덕적이며 노골적인 거짓말쟁이도 될 수 있다는, 여태까지는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 노력했고 보지 않으려 노력했던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황제가 그렇게 거짓말쟁이가 되는 것은 단 하나의 영역에서만이긴 했다.
바로 케일린 에버레티안 황후와 관련된 영역.
칼릭스는 케일린의 말대로 단 한 번도 라지프에게 ‘황후를 두 시간 만에 황궁으로 데리고 오라’고 말한 적은 없었다.
다만, 황후가 브록버크 가로 나들이를 하러 간다고 보고하면 반드시 이렇게 말하곤 했다.
“난 황후가 황궁에 없는 동안은 일이 손에 잡히지 않더군. 내 황궁을 벗어나서 케일린이 내 눈앞에 영원히 사라져 버릴 뻔했던 그 날이 떠오른단 말이지. 그게 두 시간을 넘어서면 그날의 분노와 불안이 떠올라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고 할까? 라지프, 어떻게 생각해?”
황후를 모시고 나갔다가 황후를 잃어버린 죄책감을, 라지프는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을 것이었다.
황후를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죽음으로 죄를 갚겠다 한 그에게, 칼릭스는, 그의 죽음으로 황후가 돌아오는 게 아니라면 살아 있으라고 명령했었다.
그만큼 황후 납치 사건은 그에게 강렬한 아픔이었는데, 황제의 저 말이 두 시간에서 1분이라도 늦어지면 도저히 참을 수 없으니 두 시간이 지나기 전에 황후를 잡아서 자신이 있는 황궁으로 데려다 놓으란 말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
그런데 그런 명령을 내린 적이 없다고 하다니….
오늘만 해도, 황후의 외출 소식에 으레 지금껏 그랬듯 두 시간 만에 모셔 가려 했었다.
그런데 브록버크 가 앞에서 대기 중이던 자신의 앞에 웬일로 시종장이 직접 나타났다.
시종장은, 오늘은 황후 마마가 조카를 오래 보고 올 수 있도록 얼마든지 시간을 드리라는 말을 하고는 궁으로 돌아갔다.
안 그래도 바쁜 시종장이 자신을 찾아 브록버크 가까지 와서 할 말이, 정말 저게 맞는 것인가 싶을 정도로 희한한 말이었다.
라지프는 정확한 이유는 몰랐지만,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알 수 있었다.
황제가 황후의 스트레스를 아기 조카를 보며 해소할 수 있게 하려는 의도라는 것을.
말의 고삐를 잡은 라지프의 손에 어느새 힘이 꽉 들어갔다.
저 마차 안에서, 자신의 남편인 황제가 세상에서 가장 부드럽고 점잖은 남자라고 생각하고 있을 순진한 황후 케일린 님을 생각하니 얼굴도 굳어버릴 지경이었다.
라지프인 자신을 라지프 울프로 만들어 버린 황제.
울프는 절대적으로 조심해야 할, 늑대 같은 존재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었다.
어떻게 케일린 님을 향한 자신의 순수한 충성심에 늑대라는 성을 갖다 붙여 더럽힐 수 있는 것인지!
케일린 님에게 자신을 울프로 만들어 버린 것도 모자라, 멋대로 명령을 지어낸다고까지 하다니….
주군은 절대로 완벽한 존재가 아니었다.
자신의 여자에 관한 한 얼마든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내였다.
*****
나는 그날 이후 몇 달간, 산책뿐 아니라 황궁에서 할 수 있는 체력을 향상시키는 모든 일에 최선을 다했다.
물론 승마는 황궁 내 승마장 안에서만 했지만.
내 몸은 점점 더 건강해지고 있었지만, 칼릭스에게는 좀체 내 건강에 대한 믿음이 생기지 않는 모양이었다.
나는 내 뜻을 양보할 생각이 없었고 칼릭스도 자기 뜻을 굽힐 생각이 없었기에 우리는 완전히 각방을 쓰는 부부가 되어 버렸다.
자기가 무슨 스님이야?
마침내 나는 칼을 빼 들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칼릭스 님, 저는 이제 정말 아이를 갖고 싶어요.”
“분명 난 안된다고 했는데….”
“칼릭스 님, 혹시 제 어머니가 저를 낳고 돌아가신 것 때문에 이러시는 건가요?”
“…….”
대답이 없는 걸 보니 역시 그는 내가 죽어버릴까 봐 두려운 것이었다.
“전 죽지 않을 거예요. 제 어머니도 오빠와 저, 두 명이나 낳으셨잖아요. 저도 낳을 수 있어요. 그리고 저는 이제 많이 건강해졌어요.”
“…….”
그는 묵언 수행이라도 하려고 마음먹은 모양이었다.
흥!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나는 칼릭스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이것 외에 다른 어떤 협박도 그에게는 통하지 않을 터였기에, 미안하긴 했지만, 이 협박 카드를 꺼낼 수밖에 없었다.
그는 나라를 위험에 빠뜨릴 수도 있는 영토를 떼어주고 아무런 반격도 하지 않겠다는 결정을 했을 정도로 나의 죽음을 두려워했다.
그랬기에 아이를 갖지 않겠다는 고집을 꺾지 않고 몇 개월째 억울하고 원통하고 분통 터지는 각방 쓰기까지 하고 있었고.
그러니 그를 협박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였다.
내가 죽을 만큼 아프다거나 아파서 죽을지도 모르겠다거나, 둘 중 하나.
“저는 정말 아이를 갖고 싶어요. 만약 제가 아이를 낳지 못한다면 저는 아마 몸이 아파서가 아니라 마음이 아파서 우울증에 걸리거나… 정말 죽을지도 몰라요.”
나는 우울증에 걸려서 죽을 일은 절대로 없었다.
내가 그럴 리가 없잖아!
그러나 이 협박은 역시나 그에게 충격을 준 게 틀림없었다.
그때까지는 굳어만 있었던 칼릭스의 얼굴이 이 협박을 듣고는 노골적으로 일그러졌으니까.
“린, 정말이지 아무 말이나 마구 하는군.”
그의 목소리에서 분노가 일렁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