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귀, 매화-184화
본문
184. …해치웠나?
“이는 본가에 대한 명백한 도발이며, 쉬이 넘어갈 일이 아닙니다!”
회의전에 자리 잡은 노인이 책상을 주먹으로 내리치며 노호를 터트렸다.
“자중하십시오. 가주께서 보고 계십니다. 하나, 저 역시도 동의하는 바입니다. 이 사태를 경히 다스렸다가는 강호에서 본가를 우습게 여길 것이 불 보듯 뻔한 일입니다. 유례가 없는 사건인 만큼 엄히 다스려 강호에 본보기를 세우는 것이 바람직한 대처라 판단됩니다.”
흥분한 노인을 만류하던 중년의 사내.
하나, 그 역시도 말의 높낮이만 달랐을 뿐 그 뜻은 노인이 주장하던 바와 다름이 없었다.
침묵을 지키는 회의전의 다른 이들 역시도 그의 뜻에 동의하는 듯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전쟁이었다.
자신들을 기만하고 우습게 여긴 상대를 멸(滅)할 때까지의.
회의전 상석에 자리 잡고 있던 가주는 잠시 답을 고민한 뒤 입을 열었다.
“전쟁은 불허합니다.”
가주의 말에 장로들 몇몇이 책상을 내리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가주!”
한평생을, 그리고 그들의 가주의 생애보다 훨씬 오랜 시간을 가문을 위해 살아온 장로들이었다.
그런 그들은 가주의 결정에 동의할 수 없었다.
무림은 만만하게 볼 만한 세계가 아니었다.
제아무리 정의를 외치고 협을 노래한다 할지라도, 등을 보이거나 약한 모습을 보였다가는 잡아먹히기 십상인 약육강식의 세계, 그것이 무림이었다.
한데, 전쟁을 원치 않는다니.
강호의 그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대가문의 위치까지 올라갈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철저한 은원(恩怨) 관리 덕분이었다.
함께 피를 흘린 이들, 그리고 피를 흘리게 만든 이들을 절대로 잊지 않는 것이 그들이 태어날 때부터 몸으로 익히고 머리로 배우는 철칙이 아니던가.
한데, 원한을 잊자고 말하다니.
그들은 속으로 생각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품고 있는 불만을 겉으로 드러내었다.
“다들 그만들 하시오. 가주께서는 아직 말씀을 마치지 않으셨소.”
점잖은 태도를 보이는 어느 장로의 말에 회의전은 모두 가주의 입술만을 바라보았다.
“다시 말하지만 전쟁은 허락하지 않습니다. 혈교와 흑교련의 동태가 심상치 않은 이 시기에 함정일지도 모르는 이 사건으로 인해 본가의 전력이 피를 흘리는 것은 용납할 수 없습니다.”
앞전과 다름이 없는 대답.
장로들이 무언가를 따지고자 입을 열려 할 때 가주의 말은 계속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손을 놓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여러분의 말씀처럼, 그리고 제가 나고 자라며 익혀온 것처럼 우리는 절대로 잊지 않습니다. 그것이 원한이건 은혜이건 간에 말입니다. 본가에 손님으로 방문해 체류하고 있는 객을 납치해 간 것, 그리고 보란 듯이 협박장을 남겨 본가의 분노를 일으킨 것은 절대로 좌시할 수 없는 일이지요.”
장로들은 뒤에 이어질 가주의 말을 기다렸다.
“하여, 저는 가주로서 본 사안에 대해 결정을 내리겠습니다. 본가의 중책을 맡고 계신 여러분들은 각자의 자리를 지키며 지금껏 그래 왔던 것처럼 협(俠)을 지켜주십시오. 그들이 본가를 얕잡아 본 대가는 제 손으로 그 값을 묻겠습니다. 그게 개인이건 혹은 문파이건 간에 말입니다.”
손님을 납치해 간 침입자를 잡기 위해 가주가 움직인다.
보통의 무가(武家), 혹은 문파였다면 그것은 말도 안 되는 명령체계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달랐다.
그 누구보다 핏줄과 명예를 중요시하게 여기는 세가.
그들이 사용하는 독만큼이나 지독한 은원관계의 청산을 철칙으로 여기는 사천의 독종들.
사천당가의 가주이자 강호의 십대고수로 손꼽히는 독왕, 당소명.
그녀는 말하고 있었다.
당가의 전각에 숨어든 뒤 정협맹의 손님으로 와 있는 수영을 납치하여 가문의 이름을 더럽힌 침입자.
그들이 강호의 어느 위치건, 어느 직위에 있건 벌을 내리겠노라고.
그리고 그 단죄는 전쟁까지 갈 필요 없이 자신이 직접 내리겠노라고 말이다.
그녀의 뜻을 알아챈 장로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소명의 의견에 동의했다.
당가를 넘어 강호 위에 군림하고 있는 소명에게는 그러할 명분도, 그리고 그녀와 당가의 분노를 세상에 보여 본보기 삼을 능력도 충분하였기에.
***
“맹주께서 자리를 비웠는데 나까지 이렇게 되어버리니 자네에게는 면목이 없네. 부디 뒷일을 부탁하네.”
미안함이 담긴 적우의 말투에 그의 부관으로 일하는 여인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염려치 마십시오, 부맹주님. 돌아오셨을 때 누가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업무를 보겠습니다.”
문중만큼이나 적우의 성정을 닮은 여인.
흡사 부맹주의 분신이라 볼 수 있을 만한 적우의 부관이 침착한 목소리로 답하자 적우는 안심하듯 답했다.
“참으로 유능한 자네가 고작 내 부관으로 썩고 있다니. 미안하고 또 고맙네, 항상.”
“제가 맡은 소임을 다할 뿐입니다. 부맹주님께서는 그저 몸 성히 돌아오시길 간곡히 바라겠습니다. 그리고…….”
그의 부관은 잠시 망설이다 이내 곧 말을 이었다.
“그리고 부디 이번에는 좀 전처럼 일을 크게 벌이시지 않기를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녀의 말에 적우는 잠시 그 의미를 생각했다.
그러고는 이내 허탈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유념하겠네. 이번 출타로 또 자네들이 한 달여간 동안 야근하는 일은 만들지 않도록 노력하겠네.”
적우의 말에 부관은 이왕 말을 꺼낸 김에 모두 토해내리라 작심했다.
“노력으로 그치셔서는 아니 됩니다. 지난번 그 사건의 뒷수습을 위해 한 달 동안 야근하던 송백이 아들의 출산을 놓쳐 부인과 갈라서게 될 뻔했던 것을 잊으시면 안 됩니다.”
그녀의 단호한 태도에 적우는 떨떠름하게 답했다.
“…역시 유능하니 마음에 담아둔 말을 모두 입 밖으로 꺼낼 수 있구나. 맹세하겠네. 다시는 그런 어처구니없는 짓을 벌이지 않겠다고 말이야.”
자신이 졌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적우는 허리춤에 두 자루의 검을 꽂아 넣었다.
***
“…해치웠나?”
사천에 자리 잡고 있는 약소문파, 성화문.
그들을 이끄는 장문인, 소륜은 마른침을 삼켰다.
성화문은 강호에 미끼를 던졌고, 그들이 기다리던 고기는 그 미끼를 물었다.
단지, 그들의 낚싯대에 걸린 고기가 너무 비대했던 것이 문제였지만.
흑교련의 무인들, 그리고 혈귀라 불리는 존재들의 도움으로 그들은 거대한 진법을 구축했다.
특정한 대상이 접촉했을 때 발동되는 것으로, 진법에 담긴 내력이 사슬이 되어 손발을 묶는 봉진.
성화문에 몸을 담고 있는 대부분의 무인들은 혈귀의 기운을 받아들이면서까지 그 진법에 온 힘을 다했다.
그리고 꼬리를 살랑이며 그들이 기다렸던 대상들 중 하나가 그 미끼를 물기를 기다렸고, 그 성원에 보답하듯 진법은 그 역할을 다하는 것처럼 보였다.
바닥을 적시고 있는 수많은 무인들의 피.
산산조각 나버린 검들의 파편.
그리고 불타오르는 전각은 그들이 실패했음을 말하는 증거들이었다.
진법은 부족하지 않았다.
오히려 평범한 고수를 억압하기에는 탁월한 수준이었다.
문제는 그들이 노리는 고수가 평범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괴물 같은 년, 아직도 살아 있구나.”
피어오르는 연기 속에 비친 인영을 바라보며 소륜은 으르렁대며 입을 열었다.
“아무리 그래도 여인에게 괴물이라니. 오만한 네놈의 혓바닥이 그 죄를 더하는구나.”
냉소 섞인 여인의 목소리.
여인은 연기를 걷어내고 소륜을 향해 걸어갔다.
자신의 문파원들을 모두 죽이고 전각마저 불태운 여인.
‘실로 잔인한 아름다움이다.’
그럼에도 여인의 얼굴을 마주한 소륜의 감상은 역설적인 것이었다.
“성화문의 문주, 소륜. 그대는 정협맹과 그 뜻을 함께한 동맹임에도 불구하고 사파들의 연합체인 흑교련과 손을 잡았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무림공적임과 동시에 조정에서 역모의 혐의를 받은 혈귀들에게 힘을 받았지. 이는 협(俠)을 수호하는 무인으로서 절대 경시할 수 없는 혐의들이다. 혹, 변론할 여지가 있는가?”
여인의 차분하고 사무적인 말투에 소륜은 목에 핏대를 올리며 노호를 터트렸다.
“네놈들처럼 강한 녀석들이 무엇을 알겠는가! 우리처럼 날 때부터 약하고 보잘것없는 이들의 설움을, 날 때부터 강자인 네놈들이 그것을 알기나 하느냔 말이다! 보아라! 약자인 우리가 목소리를 내려 들자마자 그 싹을 짓밟…….”
소륜의 이어지는 항변은 그것을 듣고 있던 여인이 그의 입을 틀어막으며 중단되었다.
“우선 혐의는 스스로 인정하였구나. 본인은 이미 정해져 있는 맹과 무림의 법도에 따라 협을 등지고 신의를 저버린 배신자, 그리고 스스로 인간임을 포기하며 인외마도(人外魔道)의 길을 자처한 네놈과 성화문의 무인들에게 즉결 처분을 내리겠다. 그 대가는 멸문(滅門)이다.”
여인은 따분하다는 듯 맹의 법도를 이야기한 뒤 다시 입을 열었다.
“이봐, 네놈의 변명은 잘 들었다. 한데 몇 가지 틀린 것은 넘어갈 수 없어서 굳이 설명해 주지. 첫째로… 나도 알고 있다, 약하기에 무엇도 지킬 수 없는 그 심정을. 내 사연을 구구절절 말할 필요는 없지만 나 역시도 문파를 잃었다. 우리가 약했기 때문이지. 그때는 억울하고 분해서 복수를 꿈꾸기도 하였다. 한데, 세월이 지나고 내 문파를 멸문시킨 이의 경지를 엿보게 되니 알겠더구나. 강하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말이야.”
여인은 알고 있었다.
세상 그 누구보다 강했던 사내를.
정상에 선 그의 곁에 어울리는 이가 없었기에 그는 항상 혼자였다.
비로소 그에게 어울리는 이들이 생겨났을 때, 그는 세상에 의해 그들을 잃게 되었고 또다시 혼자가 되었다.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던 사내가 마침내 얻어낸 것마저 잃는 것에 대한 상실감.
여인은 그것을 이해할 수도,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단지, 그같이 드높은 하늘 위에 존재하는 용이 소중한 것을 얻어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게 되었을 뿐.
용은 오직 봉황과 같은, 드높은 하늘의 격을 갖춘 이들에게만 곁을 주는 존재다.
결코 개천에 갇힌 채 하늘을 올려다보는 이무기를 허락하지 않는다.
여인의 문파는 그런 이무기였다.
용이 가진 것을 탐냈고, 그것을 훔치려 들다 벌을 받게 된 이무기.
“그리고 나머지 또 하나를 말해주마. 목소리를 내려니 짓밟는다고 하였지? 세상 어느 인간이 목소리를 내기 위해 양민들을 납치하고 그들의 피를 뽑아 진법을 만들어내느냐. 그것도 고작 나 같은 이를 잡아내기 위해서.”
여인을 봉인하기 위해 만들어졌던 진법.
높은 효율성을 보이던 그것의 근원은 피였다.
그것도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이들의.
“정협맹과의 동맹을 파기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한데, 네놈은 큰 죄를 저지르고 말았다. 그것이 나를 분노하게 했고, 너희 성화문이 강호에서 그 역사를 지우게 된 이유다.”
정협맹의 청룡대주, 유선은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무리 그래도 인간으로서 같은 인간을 버리지는 말았어야지. 네놈들은 그토록 강자를 욕하고 약자를 자처했지만, 결국 네놈들이 버린 양민들의 입장에서는 네놈들 또한 같은 위치가 아니던가? 자신에게는 관대하고 남에게는 엄격한 이중적인 잣대. 나는 그 역겨운 것을 참을 수 없다.”
유선은 사내의 입을 틀어막고 있던 손아귀를 힘껏 쥐었다.
솟구치는 핏줄기를 피해내며 그녀는 발걸음을 옮겼다.
“마침 사천에 왔으니 오랜만에 당가주나 만나러 가보실까.”
유선은 소명을 위해 당가를 방문했지만 그녀를 만날 수 없었다.
“가주께서는 납치당한 정협맹의 무사를 구출하시기 위해 자리를 비우셨소.”
“납치를 당하다니요? 누가 납치를 당했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리고 누가 감히 당가의 눈을 피해 이곳에 숨어들어 그런 괴랄한 짓을 벌일 수 있다는 말입니까!”
유선의 물음에 당가의 무인들은 대답할 수 없었다.
그들 역시 답을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저기…….”
당가에 속해 잡일을 도맡은 하인으로 보이는 소녀가 망설이다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어처구니없다고 생각하시겠지만 제가 그 장면을 목격한 것 같아요.”